몇 년 전에 재밌게 읽은 짧은 소설이었죠. 오스트리아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오늘 잘못 온 문자 메시지 사진을 페북에 올린 걸 보고 홍콩에 사는 제 친구 지연 씨의 언니 문정 씨가 일깨워주시는 바람에 다시 찾아 여기에 올려봅니다.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 오후, 잠깐 강남역 근처에 갔던 나는 혼자 점심을 사먹은 후 교보문고에 들렀다. 마침 이날은 현영이 쓴 무슨 ‘재테크 일기’ ㄴ가 하는 책의 사인회가 있는 날이라 매장이 무척이나 붐볐다. 아무 생각없이 지하 1층 매장으로 향하던 나는 교보빌딩 옆 가판대의 30% 할인 행사를 보자마자 눈이 뒤집혀 옛날 책 몇 권을 급하게 샀다. 사실은 이 책들을 사러 온 게 아닌데.

 지하 1층 본매장에 가서 선택한 책은 다니엘 글라우티어라는 오스트리아 작가가 쓴 장편 였다. 얼마 전 신문의 신작 코너에서 간단한 소개글을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라는 다분히 칙릿소설 같은 제목의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메일로만 이루어진 특이한 소설이다. 얘기는 에미라는 웹다자이너가 한 잡지의 정기구독을 취소하려고 이메일 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단순히 ‘라이크’와 ‘라이케’를 혼동하는 바람에 엉뚱한 사람에게 메일이 전달된 것이다. 그러나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에미는 라이케라는 남자에게 정중하게 죄송하다는 메일을 다시 보내고 둘은 금방 이 일을 잊어버린다.

 아홉 달 후, 언어심리학 교수인 레오 라이케는 컴퓨터를 켜자마자 ‘즐거운 성탄절과 복된 새해 맞으시기를 에미 로트너가 빌어드립니다’ 라는 뜬금없는 단체 메일을 받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정기구독을 취소하겠다고 항의 메일을 자꾸 보내오던 바로 그 여자다.

 다분히 장난스러운 기분으로 이 메일에 답장을 보낸 레오는 다시 죄송하다는 에미의 답장을 받게 되고 그 안에서 ‘그리고 혹시라도 그동안 불행한 날들을 정기 구독하셨다면 마음 놓고 저에게 - 실수로 - 구독을 취소하십시오’ 라는 문장을 보고 감동한다.

 그 뒤에 에미가 또 아직도 취소되지 않은(듯한) 잡지의 정기구독을 취소하려는 항의 메일을 보내오고, 또 레오가 장난스럽게 답장을 하고 하면서 둘은 어느새 호감을 갖게 된다. 얼굴이나 배경, 나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매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시시콜콜한 일상을 전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신선한 자극이 된다.

 더구나 에미는 언어심리학자답게 재치 있는 글 솜씨와 유머를 겸비한 그에게 늘 감탄하는 중이었고, 레오는 레오대로 하고싶은 말마다 걸핏하면 1), 2), 3)…하는 식으로 번호를 매기는 그녀의 독특한 버릇과 솔직한 감정 표현에 몰입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참 빨리 읽힌다. 그렇다고 내용이 허술한 것도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라서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고 그러다가 어느덧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게 되는 현대인의 아이러니가 절묘하게 구현되어 있다. 심지어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 같은 스릴까지 맛보게 해준다. 밀고 당기는 두 사람의 재치 있는 문체들은 정말 현실적이다. 난 처음에 작가가 당연히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에미가 쓴 메일들을 읽어보면 안다)

 서로 그렇게 만나고 싶어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환상이 깨질까봐 만나지 못하는 두 사람. 에미와 레오는 어느날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후버 카페’라는 붐비는 곳에서 (아마 강남역 뉴욕제과 앞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동안 주고받은 이메일의 이미지만으로 서로 알아보기를 시도한 것이다. 즉, 진짜 에미와 레오를 찾는 게 아니라 ‘에미처럼 보이는 여자’와 ‘레오처럼 보이는 남자’ 를 찍기로 한 것이다... 과연 그들은 서로를 알아 봤을까?

 
스포일러는 여기까지다. 난 한밤중에 쳇 베이커의 CD를 올려놓고 이 소설을 읽었다. 바람이 부는 새벽 세시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때로는 장난스럽고 때로는 절실한 사연에 쉽게 잠이 들지는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면 참 좋을 것 같은 소설이다.

 사족)

초판이라 그런지 책을 읽다가 명백한 오자를 발견했다. 321페이지 마지막과 322페이지 초입에 걸쳐 ‘로트너씨’를 ‘라이케씨’로 세 번이나 잘못 표기했다. 오늘 문학동네편집부에 전화를 해서 알려줬더니 ‘지금 자기 앞에 책이 없어서 그러는데 검토 후 다음 판본부터 반영하겠다’ 는 심드렁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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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After : 어느 카피라이터의 좌충우돌 패션 변신 체험기

카피라이터는 참 괴로운 직업 중 하나입니다. 미국의 선배 카피라이터인 핼 스테빈스라는 분은 ‘카피는 초등학교 6학년도 이해할 수 있도록 써라’라고 하셨죠. 한마디로 쉽게 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광고 작업을 할 때에도 클라이언트들은 디자인이나 편집 보다는 카피에 보다 쉽게 참견을 하기 마련입니다. 직업이 카피라이터인 저도 그런 경우를 많이 만나게 되죠. 제가 쓴 카피를 보고 “왜 이렇게 카피가 길어욧?” ‘헤드라인 좀 바꾸면 안 돼욧?” 같은 얘기를 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심지어 ‘시작은 윤리 경영이었습니다’라는 홍보영화의 리드 카피를 보고 “우리 회사는 지금도 윤리 경영을 하고 있는데 이건 왜 과거형이냐?”고 따지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그 입 다물라, 다물라! 꼴도 보기 싫으니 돌아서 있으라!” 라고 저하처럼 외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아, 예. 그럴 줄 알고 B안, C안도 준비해 봤습니다. 헤헤.”라며 또 다른 카피가 씌어져 있는 A4지를 꺼내곤 하죠. 엉엉.

이른바 ‘전문가 존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전문가를 재깍재각 알아 모시고 존중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경험과 아우라가 차곡차곡 쌓여 드디어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경우엔 전문가의 말 한 마디에도 무게가 실리게 마련입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너는 어떤 편이냐,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정치가 말고는 거의 모든 전문가를 존중하는 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저는 최근 일년 간 어느 전문가 한 사람을 만나 속칭 ‘팔자를 고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때는 작년 5월 말. 저는 새로운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그녀의 친동생이 유명한 스타일리스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0년이 넘게 KBS 등 방송국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해 온 그녀가 제게 한 첫 충고는 ‘티셔츠를 바지에 넣어 입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청바지와 티셔츠를 즐겨 입는 저는 그때까지 평생 한 번도 셔츠를 바지 안에 넣어 입지 않았습니다. 키도 작고 배가 나온 체형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배를 가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했습니다. 그럴수록 더 당당하게 노출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 속는 셈 치고 그녀의 말을 따라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보고 살이 빠져 보인다, 다리가 길어보인다, 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지나가던 사람들이 저를 길에 세워놓고 한 얘긴 아니고,다 아는 사람들이 해준 얘기였지만 그래도 저는 신이 났습니다. 그녀의 충고는 계속되었습니다. 제가 입고 있는 모든 옷의 치수를 하나씩 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팔은 가늘고 어깨도 좁은 체격이라 늘 박스형 티셔츠로 몸을 감싸고 다녀야 했습니다. 콤플렉스가 많은 몸매에 타이트한 옷을 입고 다닌다는 건 ‘사회적인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런데도 그녀는 어느날 다짜고짜 저를 끌고 가로수길의 아무 옷집으로 데려가더니 이것저것 작은 티셔츠와 스티니진 등을 마구 구입한 뒤 제 카드를 빼앗아 강제로 결재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다니던 미용실도 바꾸고 안경도 금테로 바꾸게 했습니다.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는 저에게 그동안 입지 않던 셔츠와 가디건 입는 법, 옷에 맞춰 신발 연출하는 법까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느새 저는 ‘참 일하기 귀찮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심드렁한 광고인’에서 ‘냉철한 두뇌와 세련된 감식안을 가진 프리랜스 카피라이터’로 변신을 하고 있었습니다...움홧홧.

옛날 미스코리아 대회나 슈퍼모델 선발대회에서 가장 많이 주고받던 얘기가 뭔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내면의 아름다움’입니다. 전 왜 이쁜 여자들이 수영복만 입은 채 한결같이 그런 얘기를 종알거리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건 정말 공감이란 단어를 국 끓여먹은 시추에이션이지요. 내면의 아름다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상대방이 알기까지는 기나긴 시간이 걸립니다. 반면에 첫인상은 단 3초 만에 결정이 됩니다. 어느 기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잘못 전달된 첫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려 7,8개월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저를 변신시켜준 YHMG의 윤혜미 대표는 특히 남성의 옷차림에 정통한 나머지 얼마 전 [남자의 멋∙품∙격]이란 책까지 출간했습니다. 그동안 그녀의 충고를 충실하게 따른 저는 겉모습이 변함에 따라 내면까지 변하게 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겼고 클라이언트를 만날 때도 이전보다 더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여친의 충고까지 곁들여져 면도를 하고 나서 아무렇게나 벅벅 문지르던 값싼 스킨로션 대신 추천해준 스킨과 에센스를 신중하게 바르기 시작했고 외출을 할 때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꼭 썬블럭을 발랐습니다. 전 햇빛이 쨍쨍 내려 쬐는 바닷가나 한여름의 등산로가 아니면 썬크림은 절대 바르지 않는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외선은 해가 뜨나 날이 흐리나 늘 피부를 공격한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자다가도 떡이 생기더군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세련된 옷차림에 피부까지 좋아지다니 이게 웬일입니까.

전문가의 의견을 너무 따르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진 제 모습을 보고 “아니, 저 자식 요즘 좀 살만한가 보네?”라든가 “너 아주 잘 나가시는 모양이네요.”라고 오해를 품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 제발 사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전 그냥 스타일이 쬐끔 좋아진 것뿐 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밥은 사 먹고 술은 얻어 먹는다’라는 백수의 모토를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술값 안 낸다고 욕은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그리고 요즘은 가끔 술값도 내요. 가끔이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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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일기 51

음주일기 2012. 2. 29. 00:19



 
저는 우리 동기 애들이 정말 싫어요. 술도 너무 잘 마시고 또 체력이 좋아서 뻑하면 밤을 새고 노는 무서운 애들이거든요. 그래서 이번 송년회도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안 가려고 노력했지만, 지난번 술자리에서 꼭 나가겠다고 하도 굳게 약속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나가게 된 거예요. 믿어주세요. 그래요. 이번 일도 결국은 제가 불행을 자초한 거죠.
 
다사다난이란 말은 매년 연말만 되면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사자성어지만 ‘다사’와 ‘다난’에 또다시 이렇게 새로운 항목을 추가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은 차가 막히는 구산동 사거리의 택시 안에서부터 스멀스멀 온몸을 휘감더란 말이죠.

약속시간보다 거의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서오능 열두마당이라는 고기집엔 벌써 아이들이 많이 모여있었어요. 연말이라 이런저런 약속도 많을 텐데, 얘들은 바쁘지도 않은가 봐요.

저는 입구에서 만난 한숙이가 주차를 하는 동안 담배를 피우는 척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들어가면 그때부터 쉬지 않고 계속 술을 마셔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총무인 민석이가 바쁘게 돌아다니며 이 상 저 상 술과 고기를 챙기고 있었어요. 저는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아직 불판을 올리지 않은 상에 가서 앉았어요. 저쪽 상에 앉아서 술을 마시던 정노와 상엽이 준성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어요. 오른쪽 상엔 명옥이 옥희 한숙이 미옥이 등이 모여 앉아 있었구요. 수염 난 여자애가 하나 끼어있길래 자세히 봤더니 계천이었어요.
 
술잔을 채 잡기도 전에 민석이가 회비를 거두러 샤일록처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오더군요. 종이가방엔 벌써 회비로 거둔 만 원짜리 지폐들이 그득했어요. 저는 회비를 내고 종원이와 함께 술을 마셨어요. 우리 옆에 있는 희선이에게도 익은 고기를 좀 집어주면서 말이죠. 정노가 한 박스나 가져왔다는 생굴도 좋은 안주였어요.
 
종원이는 어제 추운 날씨에 덜덜 떨면서 골프를 치고 새벽 네 시까지 술을 마셨다면서도 뭐가 그리 급한지 술을 벌컥벌컥 마셨어요. 서로의 위 속에 헬리코박터균과 간염 바이러스를 심는다는 그 무서운 ‘술잔 돌리기’까지 하면서 말이죠.
 
한참 술을 마시고 있는데 성규가 도착했어요. 이놈은 신도초등학교 동문도 아닌데 지난번 체육대회 때 협찬을 계기로 우리 모임의 특별회원이 된 놈이에요. 어차피 초등학교 친구 절반이 중학교나 고등학교 동창과 겹치니까 성규도 무리 없이 우리들과 어울리게 된 거죠.
 
정노 집들이 때 안면을 텄던 종원이와 성규는 새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술을 마셨어요. 그래요.여긴 누구든 술로 인사하고 술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알코홀리랜드’였던 거에요.
 

그러나 더 무서운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어요. 지난 일 년간 임원을 맡아 했던 한식이와 정현이 민석이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새 임원을 뽑는 자리기 시작된 거죠. 사회를 맡은 민석이는 ‘오래 끌면 술 마시는 데 방해된다’는 이유만으로 급하게 회의를 몰아가고 있었어요. 임원 선출이 아니라 인민재판에 가까운 통보 방식이었어요.
 
갑자기 제 이름이 불리는 걸 듣고 저는 마치 공회당 마당에 끌려 나온 반동분자처럼 엉거주춤 일어나 끝내 수락을 하고 말았어요. 술을 먹여 판단력이 흐려진 데다가 불법으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여당의원들처럼 땅,땅,땅! 단숨에 해치워버린 솜씨에 꼼짝없이 걸려든 거죠. 그래서 전 졸지에 이 모임의 임원이 되었어요.
 
저를 선출시킨 아이들은 마치 큰 껀을 하나 해치우고 나서 폭탄주 말아 돌리는 한나라당 의원들처럼 연방 희희낙낙 술을 마셨어요. 모든 걸 포기한 저도 대책 없이 술을 마시고 또 마셨어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원태랑 술을 마셨고 그보다 더 오랜만에 보는 재선이랑 술을 마셨어요. 마시고 또 마시니 못 마실 것도 없었어요.

재선이는 왜 그렇게 연락을 끊고 살았냐며 저를 야단쳤어요. “전에 ‘난 결혼 안 할거야’라고 하더니 진짜 안 했네?!” 하며 저를 놀려대기도 했어요. 저는 얼마 전 흥배형 만난 얘기를 했고 우리가 고등학교 때 중국집에서 낮술 마시고 곧장 명보극장에 들어가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보기 전 그 형이 애국가를 따라 불러서 기립박수 받았던 얘기를 하며 웃었어요. 재선이가 옛 친구 인구의 전화번호를 알려줬어요. 경태랑 연락해서 한 번 보자는 거죠. 걔들도 정말 오래된 친구들이에요.

삼만 원이라는 저렴한 회비 치고는 좀 과하다 싶게 많은 술과 고기를 넉넉하게 해치운 우리들은 지난번처럼 또 이차로 노래방엘 갔어요.우리 친구들은 놀면 놀수록 힘이 솟는 어린이 체질인가 봐요. 노래방에서도 맥주를 마시면서 우리는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어요.
 
준성이와 저는 손님들에게 불려온 전속 밴드의 마스터처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종횡무진 활약을 했어요. 물론 다른 친구들도 열심히 춤 추고 마시며 노래를 불렀구요. 그래도 우린 참 건전한 모임이에요. 술 마시고 꼬장 부리는 아이 하나 없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엉뚱한 스킨쉽이나 터치도 없으니까요. 아마 멤버 중에 눈에 확 띄는 미남 미녀가 없어서 더욱 건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나 봐요.
 

노래방에서 실컷 놀고 난 후라 어지간히 지치기도 했을 텐데 철없는 친구들은 또 용감하게 삼차를 외쳤어요. 실내 포장마차에 가서 해물에 소주를 마셨어요. 일찍 돌아간 몇몇 친구들 빼고는 다 참석한 엄청난 자리였어요. 플라스틱 테이블을 일렬로 길게 붙이고 앉은 우리들은 지치지도 않고 술을 마셨어요.저는 너무 지쳐서 잠깐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졸기도 했죠.

결국은 사차를 가고 말았어요. 자랑스러운 친구들이 아닐 수 없어요. 노래방에서 나올 때 누군가가 제게 목도리를 매줬는데 가방에 넣어놨다가 소주집에서 꺼냈더니 민석이가 주인을 찾아주겠다며 가져갔어요. 이미 우리들의 몸 속엔 피보다 알코올이 더 많이 돌고 있는 수준이었지만 술자리는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었어요. 민석이가 “어차피 늦은 거, 아침까지 계속 마시다가 지하철 타고 가.”라는 무서운 멘트를 날리더군요. 참으로 무모한 발언이었지만 그때는 술이 취해서 그런지 꽤 설득력 있게 들렸어요.
 

날이 훤하게 밝았어요. 어떻게 지하철을 탔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수서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자다가 일어나 버스로 갈아탔어요. 새벽 날씨가 매섭게 춥더군요.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니 졸음이 몰려왔어요. 아마 저를 본 주민들은 “일요일에 이렇게 일찍 일어나 돌아다니다니, 저 사람도 나처럼 부지런한 인간인가 보군.” 이라 생각했을 거예요. 저는 파리한 낯빛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들어갔어요.
 
저는 정말 우리 동기들이 무서워요. 요즘 일박 이일로 술을 마신 게 몇 차례 되는데, 다 얘네들하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젠 제가 그 모임의 임원까지 되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오늘 오후에 일어나 제 홈피에 가보니 상조가 방명록에 글을 남겼더군요. 겉으로는 잘 들어갔냐는 안부인사였지만 ‘이제 임원이 됐으니 똑바로 해.’라는 은근한 압박이라는 걸 제가 모를 리가 있겠어요. 여러분들도 혹시 길을 가다가 우리 동기들이랑 마주치거든 아는 체 하지 말고 얼른 피하세요. 얘네들, 진짜 센 녀석들이거든요.

(2008.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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