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아쉬운 건, '공부 빼고는 뭐든지 잘 해서' 맨날 꼴찌만 하던 덕선이가 딱 일 년 재수하고 너무 쉽게 스튜어디스가 된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물론 누구든 실제로 덕선 역을 맡은 혜리 정도의 미모와 귀염성만 있다면 어떤 면접시험이라도 잘 통과했겠지만 말입니다. 근데 그때도 스튜어디스 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거든요. 네, 맞습니다. 응팔 애기입니다. 방금 응팔 마지막회를 보았습니다. 처음엔 지난 시리즈의 성공에 힘입어 너무 ‘추억팔이’에만 매진한다는 반발심에 조금 외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드라마와 연기자들이 화제가 되고 회가 거듭할수록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쌓이면서 저도 어느덧 ‘응팔’의 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작가들의 치밀한 구성과 취재, 그리고 연기자들의 노력이나 드라마 자체가 가지는 개연성, 디테일 등이 정말 좋았거든요. 지난 시즌처럼 이번에도 역시 ‘마지막에 여주인공의 남편으로 등극하는 어릴 적 친구는 누구인가?’라는 대형 낚시바늘도 큰 몫을 했구요. 오죽하면 제 주변에 공중파 드라마는 안 봐도 이 드라마만큼은 챙겨 본다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어제 회의 시간에 들은 얘기지만 현재 ‘응팔’에 나오는 배우들이 최근에 찍은 CM이 무려 55개나 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블레이드 러너>나 <토탈 리콜>처럼 한 때 ‘근미래'를 다뤘던 SF영화나 소설이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는데, 마친가지로이 드라마도 ‘근과거’를 다뤘기 때문에 유난히 더 인기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는 우리들이 모두 기억하는 시대의 뻔한 모습이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면 새삼 감동하게 되는 단순한 구조가 숨어 있기 때문이죠. 생각해보면 도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아이폰을 썼다고 012나 015로 시작하는 플라스틱 삐삐 소품에 감동을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도룡뇽이 차린 식당에 가서 위기철의 <논리야 반갑다>를 읽는다든지, 결혼 전날에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고 있는 신부의 모습 등은 뻔하면서도 ‘맞아, 그땐 다들 저랬지’라는 묘한 반가움과 공범의식이 숨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거기에다 이 드라마 시리즈는 평범한 척 하면서도 모두 특별한 인물들이 주인공을 맡고 있습니다. 덕선이나 도룡뇽 말고는 대부분 공부도 잘 하고 모범생에다 효자 효녀들입니다. 보라처럼 과외 한 번 안 하고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든지 택이처럼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프로기사가 다닥다닥 옆집에 붙어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런데 정말 중요한 건 그러그러한 이야기 끝에 ‘그래도 그땐 사람들이 순진하고 착한 맛이 있었어’라는 ‘분식회계’가 숨어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자칫 이런 심리가 '과거회귀'로 가지나 않을까 매우 염려됩니다. 그때가 좋았어,라는 말은 현실을 잘 모르거나 외면하고 싶은 사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도피처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을 때 나오는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은 너무나 전염성이 강해서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과오가 많은 사람을 ‘열혈 애국자’로 포장할 수도 있고 이승만 전 대통령 같은 기회주의자를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할 수도 있으니까요.


응팔을 지켜보면서 현실이 각박하고 힘들수록 지금 여기서 온몸으로 부딪히려는 굳은 마음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무조건 과거만 추억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곧 총선이 있고 내년엔 대선이 있습니다. 과거는 부도수표요 미래는 약속어음이라 했습니다. 현재만이 현금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사람들은 성보라도 택이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근미래를 책임질 정치인들과 행정가들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안철수 씨, 문재인 씨, 박원순 씨, 딴 데 쳐다보지 말고 대답해 주십시오. 과연 답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만약 '응답하라 2016'이라는 드라마가 만들어진다면 분명 당신들 얘기가 제일 먼저 나올 텐데. 제발 정신 차리고 우릴 쳐다보십시오. 싫지만 우리에겐 지금, 당신들이 그나마 희망입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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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지만 가끔 마주치게 되는 광고 동료 중에 큰일이야. 나 요즘 TV 연속극 뭐 하는지 하나도 몰라.”라는 말을 자랑처럼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자긴 요즘 TV를 너무 안 봐서 도대체 어떤 드라마가 유행하는지, 어떤 쇼 프로의 어떤 캐릭터가 인기를 끄는지 잘 모르고 한참 화제가 된 다음에야 뒤늦게 인터넷으로 겨우 확인을 한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만난 후배도 그랬습니다. 자긴 요즘 드라마 신의마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천만 관객이 들었다는 광해도 시간이 없어 못 봤으며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아직도 방영되고 있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자랑인가요? 그렇습니다. 알고 보면 지독한 자기 자랑입니다. ‘난 세속의 일엔 별 관심이 없이 고고하게 살고 있어라고 말하고 싶은, (그러면서 집에 가서는 일본드라마에 심취해있는) 고달픈 내면의 투영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고등학생이 와서 , 난 요즘 교과서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지 하나도 몰라요. 시험범위는 왜 맨날 그렇게 자주 바뀌는지. 헷갈려. 하하.”라고 한다면 과연 무슨 생각이 들까요? 아마 정신줄 놓고 사는 싹수가 노란 인생이라고 혀를 차게 될 것입니다. 광고인들에게 TV, 인터넷과 신문과 잡지 같은 각종 매체는 매일매일이 교과서이고 참고서입니다. ‘좋아, 싫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걸 다 챙겨 봐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적어도 안 본다고 자랑질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정치나 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난 정치에 관심이 없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일단 정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정신 산란하고 골치 아프다고 고개부터 내젓습니다. 자긴 박근혜와 문재인과 안철수가 하는 얘기가 다 거기서 거기고 다 똑 같은 거 같다고도 합니다. 어떻게 박근혜와 문재인과 안철수가 똑 같을까요? 그러면서 자세한 건 모른다고 단서를 답니다.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겁하고 쪼잔한 직무유기입니다.

 

유권자라면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공부를 하고 열심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정치인을 뽑는 건 자기와 자기 주변인들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죠.

 

민주주의라는 이 허점 많은 제도 아래 살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정치 행위는 몇 년에 한 번 하는 투표뿐입니다. 그래서 우린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투표는 나의 미래를 이롭게 하는 이기적인행위입니다. 그런데 나라의 미래를 망치고 자신들의 욕심 채우기 급급한 나쁜 정치인들일수록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유권자들을 몹시 사랑합니다. 오죽하면 말 많으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던 우리나라입니다. 우리가 후보자들을 보고 그 놈이 그 놈이라고 자포자기하는 순간, 그 놈도 그 놈이 되고 그 놈이 아닌 놈도 그 놈이 됩니다. 가치체계가 뒤죽박죽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 입이 찢어질까요? 뒤가 구리고 비전이 불분명한 정치인이 가장 반길 상황입니다. 그리고 유권자에겐 판단 근거가 없어지니 모든 게 허무한 일 대 일상황이 됩니다. (로또 1등의 당첨 확률은 1/8,145,060이지만 되느냐 안 되냐만 놓고 보면 1/2 확률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코미디언이자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민주주의는 졸라 불완전한 체제야. 제대로 하려면 대학생에겐 두 표씩 주고 아줌마들은 두세 집 묶어서 한 표씩 줘야 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웃자고 한 말이지만 투표의 맹점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투표라는 게 옛날 아테네에서처럼 단란한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선량한 아빠에게만 주어지는 권리라면 얼마나 쉬울까요? 그러나 단란한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선량한 아빠에게 한 표가 주어진다면 오늘 또 누구를 속여먹을까궁리하는 사기꾼에게도, ‘은행이나 털어 외국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몽상가에게도 한 표가 주어지는 게 국민투표의 룰인 것입니다. 진정 자기의 미래를 위해 일할 사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도 한 표, 난 아무 것도 모르겠고 그 놈이 그 놈 같으니 아무나 찍을래, 라고 하는 이에게도 한 표입니다.

 

 

TV뉴스에서 정치 얘기 나온다고 고개 돌리지 마십시오. 인터넷에서 연예인이나 요리법 모아놓은 파워 블로거만 찾아 다니지 마십시오. 정치에 관심을 갖는 건 우리의 미래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선거에서 이긴 사람이 5년 동안 우리의 월급과 집값과 세금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귀찮더라도 우리 일에 관심을 가집시다. 괜히 고상한 척 허무한 척 말고, 좀 이기적인 사람이 됩시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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