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책장을 정리하자고 한다. 올 8월이면 이 집으로 이사온 지 4년이 된다. 7층에서 바라보는 한강이 한 눈에 보이고 거실에는 친구들과 술 마시기 좋은 테이블도 있고 책꽂이도 양쪽으로 큰 게 있어서 더 살고 싶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엔 이사를 가야 할 것 같다. 아내가 눈대중으로 세어보니 대략 1,500권 정도란다. 책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가지고 있는 책을 줄여야 한다. 어떻게 줄일까.


일단 무슨 책을 남기고 무슨 책을 없앨 것인가부터 정해야 한다. 오늘 아침에 출근길에 아내와 한강변을 함께 걸으며 그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며칠 전 친구 표문송과 술을 마시다 무슨 얘기 끝에 내가 '십수 년 전에 홍명희의 <임꺽정> 열 권을 사놓기만 하고 아직 못 읽었다'고 했더니 그 책만큼은 절대 버리지 말고 나중에라도 꼭 읽으라고 한 게 기억난다. 그 책을 기준으로 남겨야 할 책과 없애야 할 책들을 생각해 보자.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 중엔 아무래도 <태백산맥>을 다시 읽고 싶어질 것 같다. <아리랑>은 읽으면 가슴이 너무 아리고 답답해져서(특히 정신대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부분) 다시 읽기 힘들 것 같고 <한강>은 두 책에 비하면 개인적으로 크게 당기지가 않았다. 그러니 <아리랑>과 <한강>을 다른 데로 보내고 필요하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도록 하자.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책들이나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늘 잘 팔리는 작가의 책들은 초기 희귀본이 아니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으니 모두 내보내자. <용은 잠들다>나 <방과 후> 같은 건 기념으로 한 권씩 남겨 놓을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들도 몽땅 내보내기로 하자. 이미 후배 윤보라가 내가 개포동 옥상 있는 집에 살 때 놀러와 우리집에서 술을 마시고 <개미> 전집 다섯 권을 빌려가다가 그날 밤 택시 안에서 분실한 터라 이건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하다. 

창간호부터 절판될 때까지 읽었던 SF잡지 [판타스틱]은 놔두자. 거기서 배명훈의 소설들도 만났고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보건교사 안은영>의 저자 정세랑의 단편도 처음 접했으니까. 1983년도쯤 문학잡지 [현대문학]을 일 년치 구독한 것은 순전히 당시 대성고등학교 국어교사인 권희돈 선생님 때문이었다. 수업시간에 '벌레'인지 '벌레구멍'인지 하는 시를 칠판에 적어주셨는데 시 말미에 '현대문학 몇월호'라고 출처가 씌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분히 허영심에서 선택한 정기구독이었지만 나에게는 당시 몇 달치 용돈을 모아 저지른 작은 사건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 잡지에 막 연재를 시작했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제목으로나마 먼저 구경할 수 있었다. 현대문학 과월호도 지금은 구하기 힘든 책이 분명하니 그냥 놔두기로 하자. 

김용 선생의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는 어떻게 할까. 난 <사조영웅전>을 너무 재미있게 읽은 나머지 중독성 때문에 <신조협려>까지 선뜻 손을 대지 못하다가 여태 못 읽은 케이스다. 엉뚱하게도 무협지를 좋아하는 뚜라미 동기이자 '오근네닭갈비'1,2호점의 사장님인 고한우가 빌려다가 며칠 밤 통독을 하고 다시 돌려줬다. 허멘 멜빌의 <모비딕>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백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 읽다가 만 책들은 그냥 놔둘 생각이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서>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등은 너무 어렸을 때 읽었으므로 다시 읽으려고 일단 눈에 들어올 때마다 사놨으나 아직 읽지는 못한 책이다. 일단 놔두자. 대신 아멜리 노통브나 무라카미 류, 마루야마 겐지, 야마다 에이미 등 한때를 풍미했던 작가들의 작품은 언제든지 구할 수 있으니 모두 내보내자. 아,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떻게 할까. 왠지 이 사람 책은 그냥 놔두고 싶어지는데. 그냥 무시하고 싶다가도 그 꾸준함이나 향상성 때문에 자꾸 생각나는 작가다. 최근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단편들만 읽어봐도 그렇다. 어쨌든 참 잘 쓴다. 

황석영의 소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무기의 그늘>과 <손님>만 남길까 한다. <손님>은 어쩌다보니 세 번이나 같은 책을 샀다.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없게 가까운>도 세 번째 산 책이다. 내보낼 순 없을 것 같다.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 같은 책은 쉽게 절판될 것 같으니 놔둬야 한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이나 <나라 없는 사람> 같은 책을 어찌 내보낼 수 있으랴. 밀란 쿤데라의 책들도 일단 다 품고 있어야 한다. 이런 책을 내보내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새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도 누군가 훔쳐가는 바람에 다시 샀던 책이다. <벨벳 애무하기>라면 혹시 몰라도 이 책은 안 된다. 모옌의 <홍까오량 가족>은 인덕이한테 선물받은 책인데 아직 안 읽었고 <탄샹싱>은 정말 정말 어렵게 구했던, 애지중지하는 책이다. 그런데 바르가사 요사의 책들은 다 어디 간 걸까. 


김훈의 책들은 일단 모셔 두기로 한다. 윤대녕의 단편집들도 마찬가지다. 폴 오스터의 책 중 그래도 <뉴욕 통신>쯤은 남겨둘까. 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서 집에 가서 어떤 책들이 꽂혀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싶다. 이러다가 몇 권이나 내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서재 결혼시키기'보다 어려운 게 '서재 시집보내기' 인 것 같다. 이건 일단 거실 왼쪽에 있는 내가 산 책들 중심의 책장 이야기다. 오른쪽에 아내가 산 책들까지 생각하면 정신이 약간 아득해진다. 아내는 그 책들 중에서 또 어떤 걸 골라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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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누군가 제게 그동안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을 다섯 편만 꼽아보라고 하면 무슨 책을 대야 할까 잠깐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 저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커트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 그리고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얘기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 소설 중 하나인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영화로 옮긴 작품을 IPTV를 통해 보았습니다. 이런 영화는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습니다.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누구든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정말 오랜만에 찰진 작품을 하나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당장 원작소설을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감독은 [빌리 엘리어트]와 [더 리더 : 책 읽어 주는 남자]를 만든 스티븐 달드리. 톰 행크스와 산드라 블록 같은 스타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주인공 오스카 역을 맡은 소년 토마스 혼의 연기가 대단합니다. 오스카의 할아버지로 나오는 막스 폰 시도우는 그 존재만으로도 대배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고요. 오스카네 맨션의 도어맨으로 특별출연하는 뚱땡이 존 굿맨도 참 반가웠죠.

 

영화는 매우 독창적이면서 유려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다만 오스카의 할아버지가 왜 말을 못하게 됐는지, 또 왜 양 손에 ‘YES’와 ‘NO’를 문신으로 새기고 다니며 의사소통을 하게 됐는지가 원작소설에선 자세히 다뤄지는데 영화에서 생략된 게 아쉽습니다. 소설에선 뉴욕 이야기 못지않게 2차대전 당시의 드레스덴 얘기가 기가 막히게 전개되거든요.

 

천재 작가가 쓴 엄청난 작품을 안정된 연출로 잘 만든 영화이고, 9/11을 다룬 영화라고만 쳐도 폴 그린그래스의 [플라이트93]을 능가하는 작품입니다. 전 이 책이 두 권이나 있었는데 모두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받지를 못했습니다. 누구한테 빌려줬는지 기억도 안 나고 해서 결국 오늘 서점에 가서 또 한 권을 샀네요. 전에 써놨던 독후감을 다시 한 번 올려봅니다. 영화도 책도 강추입니다.

 

 

 

 

비극적인 내용을 다루다 보면 글은 당연히 무거워지기 쉽다. 반면에 아무렇게나 몸을 놀리며 가볍게 칠렐레팔렐레 쓰는 거 같으면서도 유치하지 않게 보이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비극적인 내용을 가지고 칠렐레팔렐레 천의무봉으로 자유롭게 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불가능한 일을 해낸 사람도 가끔은 있는 법이다. 내 생각엔 그가 바로 조너선 사프란 포어다. 그리고 그가 쓴 책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란 소설이다.

 

  이 책의 주인공 오스카는 아홉 살이다. 그의 아빠는 9·11 때 무역센터에서 회의를 하다가 죽었다. 아빠는 죽기 직전에 다급하게 집으로 여러 통의 전화를 했고 오스카는 그때 자동응답기에 녹음이 되는 걸 알면서도 너무 무서워서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비극적인 일이다. 오스카는 그 이후로 전화를 무서워한다. 자동차나 비행기도 무서워한다. 전화기를 무서워하는 오스카는 길 건너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할머니와 얘기를 할 때는 무전기를 사용한다. 난 신선하고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와 말투를 창조해 낸 이 장면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가서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할머니? 할머니, 제 말 들리세요? 할머니? 할머니?” “오스카니?” “전 잘 있어요. 오버.” “밤이 늦었어. 무슨 일이냐? 오버.” “저 땜에 깨셨어요? 오버.” “아니다. 오버.” “뭐하고 계셨어요? 오버.” “세입자한테 얘기를 좀 하던 참이었다. 오버.” 그 사람도 아직 안 자고 있어요? 오버.” 엄마는 세입자에 대한 질문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렇단다. 하지만 방금 막 나갔어. 심부름할 것이 좀 있어서. 오버.” “하지만 지금은 새벽 4시 12분인데요? 오버.”

 

 

  오스카는 전화를 무서워하지만 사람들에게 편지 쓰는 건 좋아한다. 그래서 스티븐 호킹에게 자기를 제자로 삼아달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제인 구달에게서 답장을 받기도 한다. 호킹도 나중에 정중한 답장을 보내온다. 그는 쉴 때마다 공상을 하고 발명을 한다. 보통 아홉 살이 아니다.

 

  어느날 오스카는 아빠의 방을 뒤져보다가 파란색 꽃병을 깼는데, 그 속에서 ‘블랙’이라고 씌여진 봉투와 열쇠 하나를 발견한다. 그는 인터넷으로 블랙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낸 뒤 여덟 달에 걸쳐 그 사람들을 방문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유는 그 열쇠에 맞는 자물쇠를 찾기 위해서다.

 

  한편, 할머니는 오스카의 아버지를 임신했을 때 남편과 헤어졌던 뼈아픈 과거가 있다. 2차대전 당시 드레스덴에서 폭격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뉴욕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말을 못하는 상태였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에서처럼 여기서도 드레스덴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그 책도 비극적인 현실을 블랙유머로 펼쳐낸 책이었다. 보네거트와 사프란 포어는 이렇게 만나는 건가?)

 

  노트에 필기를 해서 대화를 했고 왼손엔 “예스”, 오른손엔 “노”라고 문신을 해서 의사소통을 했다. 할머니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제발 저랑 결혼해 주세요.” 그리고 둘은 결혼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또 잃을까 봐 그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비극적인 일이다. 둘 다 아주 젊었을 때의 일이었다...

 

  아아, 줄거리를 소개하려고 하다 보니 이상해진다.

 

  그냥 짧게 말하겠다. 이 소설은 엄청난 입심과 다채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시도들로 이루어진 멋진 작품이다. 페이지 사이사이 사진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글이 딱 한 줄만 써있는 페이지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글씨들이 서로 겹쳐져 볼 수 없게 만든 페이지도 있다. 근데 놀라운 건 그런 시도들이 조금도 치기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작가가 말하려는 감정이 절실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글을 워낙 잘 쓰다 보면 그렇게도 되는 모양이다.

 

  정말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아니, 너무 슬프면 울지 못한다. 그래서 오스카도 아빠의 장례식에 가는 날 리무진 운전기사와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런 오스카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완벽하게 이해한다.

 

 

넌 운전사와 농담을 하고 했지만, 속으로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운전사를 웃겨야 할 만큼 넌 고통스러웠던 거야.


 

 

  이 소설은 마치 여러 대의 카메라로 똑 같은 장면을 찍을 것처럼 동일한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그리고 화자가 바뀌어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때는 ‘아, 그때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깨달음을 선사해 준다. 그런 시선들과 사건들이 쌓이면서 여덟 달 만에 이야기는 마침내 이상한 감동과 함께 따뜻한 위로와 화해의 지점으로 향하게 된다.


 

이 책은 현대의 고전으로 남을 게 확실해 보인다. 아직 새파란 1977년생인데. 아무래도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엄청나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재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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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옛 회사 동료이자 페북 친구인 권오성 님과 댓글로 김연수의 신작 얘기를 주고받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 얘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엄청 좋아하는 작가라고 했더니 권오성 님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친 김에 책을 읽은 직후에 써놓았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독후감을 여기에 한 번 올려봅니다.




엄청나게 똑똑하고 믿을 수 없게 뛰어난 천재의 작품


비극적인 내용을 다루다 보면 글은 당연히 무거워지기 쉽다. 반면에 아무렇게나 몸을 놀리며 가볍게 칠렐레팔렐레 쓰는 거 같으면서도 유치하지 않게 보이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비극적인 내용을 가지고 칠렐레 팔렐레 천의무봉으로 자유롭게 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불가능한 일을 해낸 사람도 가끔은 있는 법이다. 내 생각엔 그가 바로 조너선 사프란 포어다. 그리고 그가 쓴 책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란 소설이다.

이 책의 주인공 오스카는 아홉 살이다. 그의 아빠는 9·11 때 무역센터에서 회의를 하다가 죽었다. 아빠는 죽기 직전에 다급하게 집으로 여러 통의 전화를 했고 오스카는 그때 자동응답기에 아빠의 목소리가 녹음 되는 걸 알면서도 너무 무서워서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비극적인 일이다. 오스카는 그 이후로 전화를 무서워한다. 자동차나 비행기도 무서워한다. 전화기를 무서워하는 오스카는 길 건너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할머니와 얘기를 할 때는 무전기를 사용한다. 난 신선하고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와 말투를 창조해 낸 이 장면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가서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할머니? 할머니, 제 말 들리세요? 할머니? 할머니?” “오스카니?” “전 잘 있어요. 오버.” “밤이 늦었어. 무슨 일이냐? 오버.” “저 땜에 깨셨어요? 오버.” “아니다. 오버.” “뭐하고 계셨어요? 오버.” “세입자한테 얘기를 좀 하던 참이었다. 오버.” 그 사람도 아직 안 자고 있어요? 오버.” 엄마는 세입자에 대한 질문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렇단다. 하지만 방금 막 나갔어. 심부름할 것이 좀 있어서. 오버.” “하지만 지금은 새벽 4시 12분인데요? 오버.”


오스카는 전화를 무서워하지만 사람들에게 편지 쓰는 건 좋아한다. 그래서 스티븐 호킹에게 자기를 제자로 삼아달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제인 구달에게서 답장을 받기도 한다. 호킹도 나중에 정중한 답장을 보내온다. 그는 쉴 때마다 공상을 하고 발명을 한다. 보통 아홉 살이 아니다.
어느날 오스카는 아빠의 방을 뒤져보다가 파란색 꽃병을 깼는데, 그 속에서 ‘블랙’이라고 씌여진 봉투와 열쇠 하나를 발견한다. 그는 인터넷으로 블랙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낸 뒤 여덟 달에 걸쳐 그 사람들을 방문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유는 그 열쇠에 맞는 자물쇠를 찾기 위해서다.

한편, 할머니는 오스카의 아버지를 임신했을 때 남편과 헤어졌던 뼈아픈 과거가 있다. 2차대전 당시 독일 드레스덴에서 폭격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뉴욕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말을 못하는 상태였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 5도살장>에서처럼 여기서도 드레스덴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그 책도 비극적인 현실을 블랙유머로 펼쳐낸 책이었다. 보네거트와 사프란 포어는 이렇게 만나는 건가)

노트에 필기를 해서 대화를 했고 왼손엔 “예스”, 오른손엔 “노”라고 문신을 해서 의사소통을 했다. 할머니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제발 저랑 결혼해 주세요.” 그리고 둘은 결혼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또 잃을까 봐 그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비극적인 일이다. 둘 다 아주 젊었을 때의 일이었다...

아아, 줄거리를 소개하려고 하다 보니 이상해진다.그냥 짧게 말하겠다.

이 소설은 엄청난 입심과 다채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시도들로 이루어진 멋진 작품이다. 페이지 사이사이 사진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글이 딱 한 줄만 써있는 페이지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글씨들이 서로 겹쳐져 볼 수 없게 만든 페이지도 있다. 근데 놀라운 건 그런 시도들이 조금도 치기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작가가 말하려는 감정이 절실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글을 워낙 잘 쓰다 보면 그렇게도 되는 모양이다.

정말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아니, 너무 슬프면 울지 못한다. 그래서 오스카도 아빠의 장례식에 가는 날 리무진 운전기사와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런 오스카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완벽하게 이해한다.

 

넌 운전사와 농담을 하고 했지만, 속으로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운전사를 웃겨야 할 만큼 넌 고통스러웠던 거야.

이 소설은 마치 여러 대의 카메라로 똑 같은 장면을 찍을 것처럼 동일한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그리고 화자가 바뀌어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때는 ‘아, 그때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깨달음을 선사해 준다. 그런 시선들과 사건들이 쌓이면서 여덟 달 만에 이야기는 마침내 이상한 감동과 함께 따뜻한 위로와 화해의 지점으로 향하게 된다.

이 책은 현대의 고전으로 남을 게 확실해 보인다. 아직 새파란 1977년생인데. 아무래도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엄청나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재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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