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 ‘와, 좋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주제의식이나 플롯이 아주 선명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좋다고 느끼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좋긴 좋은데 도대체 뭐가 좋은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자고 일어나도 생각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지난 일요일에 본 영화 [노예 12년]은 후자였죠. 영화를 보고 나서 직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며칠이 흐른 후에야 이렇게 천천히 리뷰를 써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벙찐 표정으로 멀뚱멀뚱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는 목화농장 노예들의 모습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몇 초간 지속됩니다. 감독이 “자, 이제부터 시작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인상 깊은 첫 장면입니다.


1841년 뉴욕의 사라토가에서 바이얼린 연주자로 살아가고 있는 흑인 솔로몬 노섭은 어느날 예술단을 사칭한 사기꾼들에게 속아 폭음을 한 뒤 쇠사슬에 묶여 노예상에게 팔려가게 됩니다. 당시엔 흑인들이 자유롭게 사는 지역과 노예로 사는 지역이 혼재하던 시절이었는데 노섭은 하룻밤의 실수로 졸지에 자유인에서 플랫이라는 이름의 노예로 신분이 달라지게 되어버린 것이죠. 그로부터 12년 간 솔로몬 노섭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가까스로 다시 자유인이 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영화는 얼핏 150여 년 전 한 흑인 남자의 기막힌 삶을 통해 우리가 살던 세상의 야만성을 돌아보고 자유의 소중함을 설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의지로 운명의 비가역성을 이겨낸 안티히어로의 인간승리 이야기’로만 볼 수 없는 게 바로 스티브 맥퀸이라는 감독의 이름 때문이죠. 데뷔작 [헝거]는 못 봤지만 전작인 [셰임]만 보더라도 이 젊은 아티스트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평범한 인간드라마에 만족할 리가 없다는 선입관이 생깁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선입관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사람은 똑똑한 인간이니까 이번에도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또는 저 사람은 업계 평판이 대단하니까 아이디어도 무궁무진하고 통찰력도 뛰어날 거야. 또는 저 여자는 얼굴이 예쁘니까 분명 남자친구가 있을 거야…)



스티브 맥퀸은 놀라운 미술적 재능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획득한 비주얼 아티스트 출신 영화감독입니다. 당연히 그가 만드는 영화는 한 장만 한 장면이 다 당장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도 좋을만큼 때깔이 좋고 구도가 탁월합니다. 이번 영화도 그런 장면들이 차고 넘치게 나옵니다.배가 처음 나타날 때 돌아가는 터빈의 모습과 배 안에서 느닷없이 벌어지는 정사신에서 보여주는 빅클로즈업은 정말 압도적이죠. 그리고 배 안에서 어떤 흑인 여자가 겁탈 당할 위기에 처할 때 노섭의 동료가 그걸 막으려다가 허무하게 칼에 찔려 죽는 장면에서는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번 드라마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진행이 되는 편입니다. 첫 장면 이후의 플래시백 말고는 영화 속 사건들도 그냥 시간 순으로 진행이 됩니다. 말하자면 감독이 자신의 능력을 절제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어쩌면 감독은 현란한 비주얼적 장치들을 거둬들임으로써 관객들이 보다 더 영화 속의 다른 이야기에 집중하길 바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더 집중적으로 봐줬으면 하는 얘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영화는 오래 전 이야기이고 또 솔로몬 노섭이라는 사람이 겪은 특이한 실화이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비슷하듯이 영화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등장합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세상을 유영하다가 갑자기 불의의 덫에 걸려들지만 끝까지 자존감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노섭, 비교적 인간적이지만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충될 때는 그저 허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주인 윌리엄 포드,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휘둘려 바닷물을 마시듯 끊임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두 번째 주인 에드윈 엡스까지.



노예로서의 생활은 끔찍한 것입니다. 우리도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종이나 하인이라는 노예제도가 있었죠. ‘식모’라는 이름으로 임금과 성을 착취당하기 일쑤이던 반노예도 있었구요. 그런데 이 노예들도 ‘뒤웅박 팔자’라고나할까, 정해진 주인이나 환경에 따라 고생의 차이가 천차만별입니다. 노섭은 첫 번째 주인인 포드 밑에서는 비록 고생스럽더라도 자신의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펼치기도 하고 나름대로 중간 관리자와 싸움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드가 빚에 쫓겨 그를 잔인하고 포악하기로 소문난 엡스에게 팔아버리죠. 그때부터는 더 생지옥입니다. 목화밭에서 하루 종일 아무리 열심히 목화를 따도 저녁에 결산하는 자리에선 목표량에 모자라는 무게만큼 매일 채찍을 맞아야 했습니다. 도망가려고 몇 번이나 시도를 해봤지만 그 때마다 명백하게 깨닫는 건 잡혀서 나무에 목 매달리기 전에는 탈출할 방법이 없다는 절망뿐이었습니다.



이런 지옥 같은 삶을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걸까요? 농장에서 목화를 가장 잘 따는 팻시는 노섭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합니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육체적 고생은 물론 주인인 엡스에게 당하는 성폭력, 그리고 주인마님의 노골적인 질투까지 더해지니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말이죠. 그러나 노섭은 그 부탁을 거절합니다. 그녀에게 버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돌보기도 벅차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은 견디는 것’이라는 메시지는 오히려 화면 밖의 감독이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영화의 폭력장면은 매우 사실적입니다. 처음 노섭이 술에서 깨어나 자신은 플랫이 아니라고 말하다가 등을 얻어 맞을 때를 시작으로 수많은 채찍질, 주먹질, 마님이 팻시에게 던지는 술병, 마지막에 나오는 길고 긴 롱테이크 신의 채찍질 등 어느 하나 편안한 장면이 없이 가장 높은 레벨의 압박감을 유지합니다. 덕분에 괴로운 건 영화 속 노예들만이 아닙니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도 그 잔혹한 장면들을 참아내는 건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런데 스티브 맥퀸 감독은 눈 돌리지 말고 그 장면들을 똑바로 보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인터뷰를 읽어보니 마지막에 팻시를 채찍질 하는 장면은 그 중요성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단 한 번의 테이크로 찍어냈다고 하더군요. 밀도가 대단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아마도 노섭이 작업반장과 싸우다가 결국 나무에 목이 매달려 선 채 진흙탕에 발을 디디고 간당간당 서 있는 장면일 겁니다. 두 손조차 묶인 채 미끌미끌한 진흙탕 위에 까치발을 하고 서 있는 노섭은 살짝 미끌어지기만 해도 목숨을 잃을 지경이지요. 그런데 카메라는 이 장면을 롱테이크 기법으로 잔인하게 오래오래 잡아냅니다. 감독의 재능이 빛나는 명장면이죠. 처음엔 안타깝게 지켜보던 동료들도 결국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정말 사는 게 이래도 되는 걸까요?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됩니다. 아, 인생이라는 건 정말 참는 것의 연속이구나.‘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라는 속담도 있지만 결국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서 참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참는 경우가 더 많은 거구나, 하는 아픈 깨달음이죠. “제가 가진 선의는 제가 소유한 만큼의 동전 갯수를 넘지 못합니다”라는 노예상의 말처럼 세상의 선의에 기대 산다는 건 헛된 망상일 뿐입니다.노섭도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오는 행운을 잡게 되었을 때 자신을 죽여달라던 팻시를 한 번 꽉 껴안아주고는 그대로 도망치듯 마차로 오릅니다. 혼자 살기도 바쁜데 남의 챙길 여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사정이 이 정도인데도 우리는 배를 타기 전 노섭이 내뱉었던 말 “I don’t wanna survive, I wanna live!”라는 말을 기억해야 하는 걸까요? 멋진 말이긴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감독은 오스카 작품상을 타고 난 직후 이 대사를 다시 한 번 언급했지만.


아무튼 참 세고 진하고 묵직한 영화였습니다. 요즘 여유가 없어서 이 영화와 함께 등장한 화제의 작품들을 아직 못 보았지만 한동안 이 영화를 쉽게 잊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이 모든 훌륭한 얘기를 이끌어 가는 데는 명배우들의 명연기가 있었습니다. 요즘 ‘셜록’ 시리즈로 인기 절정에 있는 베네딕트 컴버베치와 스티브 맥퀸의 모든 영화에 출연 중인 마이클 패스빈더가 연기 경연을 벌이고, 얄미운 작업 반장 역을 맡은 폴 다노의 연기도 [데어 윌 비 블러드]에 이어 또 한 번 대박이죠. 팻시 역을 맡았던 루피타 니용고는 결국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탔군요. 제작자인 브래드 피트도 뒷부분에 잠깐 출연하는데, 너무 천사 같은 역으로 나와서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쟁쟁한 스타들을 조연으로 만들어버린 치웨텔 에지오프의 연기는 정말 발군입니다. 이 친구를 어디서 본 듯 하다구요? 저도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러브 액추얼리]에서 키이라 나이틀리의 남편으로 나왔더군요. 그 유명한 ‘스케치북 고백 신’에서 거실 안 소파에 앉아있던 흑인 남자가 바로 그였습니다. 엡스의 부인으로 나왔던 사라 폴슨은 [Studio 60 on the Sunset Strip]이라는 아론 소킨의 드라마에서 매튜 페리의 전 애인이자 돌고래 소리를 잘 내던 코미디언이었구요. 중요한 건 아닙니다. 뭐, 그렇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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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예정되었던 일정들도 미리 앞당겨져 다 소화되는 바람에 졸지에 사무실에 한가한 바람이 불길래 옆방의 윤PD를 꼬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보러 가자. CGV압구정, 3시 20분 있네. 표는 내가 살게.” 


대뜸 넘어오는 윤PD. 그래서 오래 전부터 보고 싶어했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드디어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NHK의 대하드라마 [료마전]의 타이틀롤을 맡았던 미남 배우죠.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의 탐정물 [갈릴레이] 시리즈의 주인공이기도 하구요. 언제 봐도 준수한 외모와 좋은 인상,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자기관리 등으로 이름이 높죠. 1969년생인가 그런데 아직도 결혼을 안 해서 그런지 지금도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싶은 연예인’ 같은 앙케이트 조사에서 해마다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엄청난 훈남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실력 있는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하다죠? 나 참. 


그런데 후쿠야마 마사하루만큼이나 저를 반갑게 했던 인물은 상대역으로 나오는 릴리 프랭키였습니다. 이름이 좀 이상하죠? ‘Frank Goes to Hollyood’ 라는 영국 그룹이 있었는데 거기서 따온 예명이랍니다. 이 사람은 연기자이기 이전에 일러스트레이터였고 칼럼니스트였고 작곡가였고 라디오 DJ였으며 소설가였습니다. 보잘것없게 생겼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다방면에 눈부신 재능을 뿜어내는 인간이죠. 예전에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함께 [료마전]에도 특별출연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라는 자전적 소설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전 이 소설을 읽고 정말 펑펑 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광고 카피가 ‘우는 얼굴을 보이기 싫다면 전철에서는 읽지 마라’였다네요. 나 참. 그런데 아마 지금 읽어도 또 울 겁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 책을 읽고 그렇게 울었는데 이젠 저도 릴리 프랭키처럼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까요. 



영화는 아이가 병원에서 바뀐 줄도 모르고 육 년 동안이나 친자식으로 키워오다가 어느날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당황하는 두 집안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매우 극적인 사건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늘 그렇습니다. 죽어서 림프계에 머물게 된다거나(원더플 라이프), 엄마가 아이들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버린다거나(아무도 모른다), 실직한 사실을 숨기고 형의 기일을 챙기러 부모님댁으로 찾아 온다거나(걸어도 걸어도) 하는 돌발상황을 던져놓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살아가며 변화하고 변화시키는 인간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관찰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떤 묵직한 울림이나 깨달음이 다가오는 것이지요. 특수한 상황을 통해 인류 보편적 가치까지 서서히 끌어올리는 통찰력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젊은 거장으로 불리게 한 힘일 것입니다.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맡은 아버지 역은 빈틈없고 세련된 성공 비즈니스맨의 모습입니다. 당연히 이 문제도 아주 이성적으로 풀어가려고 하죠. 반면 상대편 아버지 역을 맡은 플랭키 릴리는 시골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입니다. 문제의 아들 말고도 두 명의 아이를 더 키우고 있는 40대의 중년이구요. 당연히 영화는 후쿠야마 마사하루 부부의 입장에서 진행이 됩니다. 어쩐지…수학이나 피아노를 잘 못하는 거 보면 역시 핏줄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는 거야. 저렇게 초라한 전파상을 하면서 애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는 걸까? 차라리 우리가 두 아이를 모두 키우면 안 될까…?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얼굴은 점점 초조해지는 반면 릴리 프랭키의 표정은 늘 여유가 있습니다. 그건 두 가족이 함께 만나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엘리트 아빠는 자기 친아들과도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서먹서먹해 하는데 전파상 아빠는 패스트푸드점 놀이시설에서 아이들과 한덩이가 되어 뒹굴고 웃으며 순간을 즐깁니다. 어떤 가정이 더 행복할 지는 관객이 눈으로 지켜보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히로카즈 감독은 아이들을 참 잘 찍습니다. [아무도 모른다]를 찍을 때는 아이들에게 연기지도를 하는 대신 촬영 직전에 아이들에게 다가가 앞으로 찍을 내용을 귀에 조용히 속삭여 주고는 그냥 마음대로 놀게 했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연스러운 연기들이 나오는 것이겠죠. 저는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이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사랑스럽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아이들에겐 아이들의 생각이 있다’ 라는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영화 도중 초밥 먹는 장면이 나오자 “외, 맛있겠다!”라며 입맛을 다시던 윤PD는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대뜸 초밥 얘기부터 합니다. 



윤PD : 정했어요. 오늘 저녁엔 혼자라도 회를 먹을 생각입니다. 

성준 : 영화 참 좋지? 


윤PD : 그러게요. 잔잔하게 찍었는데도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아요. 

성준 : 저런 게 바로 사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윤PD : 예, 애를 하나 낳아볼까 하는 생각이 다 들더라니까요. 

성준 : 하하. 잘 생각해. 



윤PD나 저나 둘 다 아이가 없는 놈들인데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상관 없습니다. 이 영화는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영화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인지를 질문하게 하는 영화니까요. 그리고 좋은 인간이 되는 법을 함께 고민하게 해주는 좋은 영화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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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소설 [아Q정전]의 주인공 아Q는 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싸가지’조차 없어서 늘 다른 놈들에게 당하고 얻어터지기만 하는 ‘상 찌질이’다. 그러나 그는 싸움이 끝나고 나면 늘 자신이 이번에도 결국 이겼노라고 멋대로 생각해버리는 ‘정신적 승리법’의 달인이기도 하다. 100년 전 대문호 루쉰은 ‘작금의 중국 동포들의 정신상태가 바로 이런 모습 아니겠냐’고 신랄하게 꼬집느라 이 소설을 쓴 것이었지만, 자고로 동서고금의 약자들에겐 그런 소심하고 편리한 상상력이라도 있어야 이 험한 세상을 견뎌낼 수 있는 법이다. 그건 20세기 최고의 사진전문잡지 ‘라이프 매거진’ 구석방에서 16년째 네거티브 필름을 현상하며 살아가고 있는 소심남 월터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는 모히칸족 헤어스타일을 하고 스케이트보드 챔피언 대회에 나갈 정도로 도전적인 삶을 살’뻔’도 했으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로는 식구들을 봉양하느라 회사 생활에만 매진하다 보니 결국 일탈도 성공도 연애도 꿈꾸지 못하며 하루하루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는 전형적인 소시민이 되어버린 월터 미티. 그런 월터가 가장 잘 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도때도 없이 멍때리기’다. 상상 속의 월터는 매우 용감하고 진취적이며 힘이 세다. 한마디로 못하는 게 없는 수퍼 히어로다. 그러나 미망에서 깨어나 보면 회사에서 멋대가리 없는 점퍼를 입고 네거티브 필름실로 향하다가 기면발작하듯 ‘데이드림’에 빠지는 얼간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엘리베이터 안에서 새로 나타난 재수없는 수염투성이의 구조조정 전문가에게 “야, 그런 수염은 덤블도어에게나 어울리지, 새꺄!”라고 쏘아붙이는 월터의 모습은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상형일 뿐이다. 


그런 월터에게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오프라인 잡지시대를 마감하고 온라인으로 전향하는 라이프지의 마지막 표지를 장식할 사진작가 션 오코너의 사진 중 사라진 ‘스물다섯 번째 컷’을 찾아 직접 그린란드로 날아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늘 행방이 묘연하고 세계 곳곳을 떠돌아 다니면서도 휴대폰이나 디지털 기기조차 쓰지 않는 괴짜 포토그래퍼 션을 찾아 떠나는 일에 월터가 처음부터 발벗고 나섰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가 몰래 짝사랑하는 회사 내 동료여직원 셜리의 눈빛과 미소가 그를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그녀가 회원으로 가입했다는 얘기만 듣고 자기도 그녀에게 ‘디지털 윙크’ 한 번 보내고 싶어서 덜컥 가입했던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의 상담원도 그를 부추긴다. “월터, 이제 망설임은 접고 새로운 모험을 시작해 봐” 라고. 



영화는 20세기 한복판을 가로지른 역사적인 잡지 ‘라이프’의 몰락이라는 큰 그림 위에 월터의 정신적 성장이라는 구체적인 갈등을 던져 모두가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데뷔작으로 [위노나 라이더의 청춘스케치]라는 멋진 영화를 만들어 냈던(편의점에서 “맘,맘,마,마이 섀로나!”라는 노래에 맞춰 미친듯이 춤추던 주인공들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헐리우드의 재간둥이 벤 스틸러는 이번 영화에서도 적절한 개연성과 깨알같은 유머로 관객들에게 일정량 이상의 감동을 선사하는 데 성공했다. 


전체적인 영화의 짜임새는 더소 헐겁지만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히말라야의 풍광들, 스케이트 보드 모티브, 빨간 마티즈 파란 마티즈, 데이비드 보위의 명곡 ‘A Space Oddity’ 등  곳곳에 숨어있는  촘촘한 에피소드들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엷은 미소를 띄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뒷부분에 잠깐 등장하면서도 영화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숀 펜의 그 존재감이란. 월터의 어머니로 등장해 중요한 순간마다 슬기로운 조언을 해주는 셜리 맥클레인은 또 어떤가. 1983년 [애정의 조건]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는 자리에서 “난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어!”라고 외치며 데보랑 윙거의 눈물어린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를 어찌 잊으랴. 


미리 예상은 했지만 션이 "월터는 그 누구보다도 내 사진을 잘 이해했던 사람"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마지막으로 선물처럼 건냈던 문제의 ‘스물다섯 번째 컷’은 역시 우리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그것은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일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격려임과 동시에 상상에만 머물고 차마 실천하지 못하며 살아왔던 우리 모두의 '잃어버린 꿈'에 대한 아련한 찬가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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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뉴욕을 사랑하는 작가 우디 앨런은 근 십 년 동안 유럽을 떠돌며 영화를 찍어야 했다. 갑자기 뉴욕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미국에서는 자신의 영화에 돈을 댈 투자자들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헐리우드는 전세계가 사랑하는 시네아티스트 우디 앨런조차도 살아남기 힘든 블록버스터의 왕국인 것이다. 


[매치 포인트] [스쿠프] [환상의 그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등등에서 스칼렛 요한슨, 페넬로페 크루즈 증 새로운 뮤즈들과 함께 유럽에서 소소하지만 자유로운 작업을 진행했던 우디 앨런은 회심의 역작 [미드나잇 인 파리]의 엄청난 흥행으로 인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이름만으로도 위엄이 서는 ‘여왕’ 케이트 블란쳇과 함께 새 영화를 찍게 된다. 그게 바로 [블루 재스민]이다. 



케이트 블런쳇은 말한다. “우디는 사실 이 역할을 자기가 직접 연기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재스민이 여자라서 할 수 없이 나를 시킨 것이다.” 케이트의 통찰력 있는 지적이 아니라도 그 동안 우디의 영화들은 모두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부자 남편을 만나 뉴욕에서 상류생활을 즐기던 재스민(자넷이란 이름도 상류상회에 어울리게 재스민으로 바꿨다)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여동생집에 얹혀 살게 된다. 돈은 한 푼도 없지만 여동생한테 갈 때도 일등석을 타고 간다. 루이비똥 가방에 놀라는 여동생에게”이건 다 예전에 산 거고, 내 이니셜이 들어가 있어 중고는 팔기도 힘들어서 그냥 들고 온 것”이라 변명한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한 법이다. 재스민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칫과의 사무원으로 취직을 하기도  하지만 자기는 이것보다는 더 뭔가 의미 있고 대단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 전부터 사람들이 나한테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어보라고 했어. 인터넷으로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워야지. 그러려면 먼저 컴퓨터 강좌부터 들어야겠네…"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마음에도 안 드는 칫과의사가 사귀자고 덤비질 않나, 여동생이랑 사는 ‘루저’가 오히려 자길 업신여기질 않나.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은 샤넬의 트위드 재킷과 에르메스 백, 그리고 거짓말뿐이다. 



나는 우디 앨런의 영화가 해피엔딩인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비극적으로 끝나는 경우도 본 기억이 없다. 모든 것을 잃은 재스민은 길거리에서 혼잣말을 하며 끝을 맺는다. 재스민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거의 차이밍량의 [애정만세]에 버금가는 엔딩씬이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거기엔 묘한 쾌감이 있다. 나이 80이 넘은 이 악동 할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섣불리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식의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너만 외롭고 힘든 게 아니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는 역설의 카타르시스를 던져준다. 그래 좋다. 산전수전 다 겪은 우디 할아버지도 힘들단다. 그러니 우리 모두 힘을 내자.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까지는  아닐지라도 뭐, 조금 위로는 되는 법이니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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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먼저 본 이야기를 연극으로 다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연극 [클로저]를 보러 가면서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난 영화를 두 번이나 봐서 줄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캐릭터도 어느 정도는 파악을 하고 있다. 그러니 전혀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도 입장료는 영화를 볼 때보다 훨씬 비싸다. 단지 연극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텍스트를 관객들이 대학로까지 가서 다시 봐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클로저]는 1997년 5월 런던에서 초연된 후 유럽, 일본, 호주 등 전 세계 50개국 100여 개 도시에서 지금도 공연되고 있는 인기 작품이다. 영화 또한 백전노장인 마이크 니콜스 감독에 주드 로, 줄리아 로버츠, 클라이브 오웬, 나탈리 포트만 등 대 배우들이 출연했던 화제작이다. 



“Hello, Stranger”라는 유명한 대사로 시작하는 이 연극(영화)는 신문사에서 부고 기사를 쓰는 소설가 지망생 댄과 스트립 댄서 앨리스가 우연히 교통사고로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차에 치어 쓰러졌다가 일어나면서 “안녕, 낯선 사람”이라 인사를 건넸던 앨리스는 젊고 매력적인 댄과 금방 함께 사는 사이가 되고 댄은 그런 그녀와의 동거생활을 소재로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그런데 댄은 소설의 표지사진을 찍으러 가서 만난 사진작가 안나에게 대뜸 키스를 하며 사귀자고 유혹한다. 이건 뭐 아주 개새끼가 아닌가. 


그런데 영화에서 하필 댄 역을 맡은 배우가 주드 로였다. 원래도 잘 생겼지만 그때 당시엔 정말 ‘전세계 남녀 배우를 통틀어 최고의 미모’라는 소리까지 듣던 막강 포스였다. 그러니 ‘개새끼를 개새끼라고 부를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고 만 것이다. 더구나 주드 로와 입술을 맞대던 세련된 사진작가 안나는 바로 줄리아 로버츠였다. 그들의 지적인 매력에 격조 높은 연출력, 게다가 하필 데미안 라이스의 마약성 농후한 불멸의 미친 곡 ‘Blower’s Daughter’까지 배경음악으로 겹쳐져 우리는 이 막장 드라마를 마치 꽤 세련된 영화라고 착각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극은 좀 달랐다. “안녕, 낯선 사람”이라 인사를 건네며 시작하는 것은 같지만 분위기도 달랐고 대사도 달랐다. 앨리스 역을 맡은 이윤지는 새처럼 자그만 몸집에 아이 같은 도발성으로 관객들의 흥미를 돋구었고 명민한 배우 김혜나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기 두려워하는 안나의 복잡미묘한 심리를 잘 표현해 주었다. 댄 역을 맡은 이동하도 물론 좋았지만 최고의 캐릭터는 피부과 의사 래리 역을 맡은 배성우였다. 능수능란한 대사 구사력과 타이밍, 찰진 욕설 구사력까지, 이 연극을 이만큼 살아 숨쉬게 하는 데 이만한 일등 공신이 없었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용서를 구하다가도 또 배신하고,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근데 걔랑 잤어 안 잤어?”하고 묻는, 홍상수 영화의 등장인물들보다 더 찌질하고 끈적한 네 사람은 간결한 세트와 자막, 오밀조밀한 구성 등을 선보인 연출자 추민주의 능력에 의해 연극에서 확실한 생명력을 얻었다. 우리와 같이 연극을 보았던 페친 안재만 대표도 “영화에서는 미처 다 이해할 수 없었던 주인공들의 행동을 이제야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자잘한 유머들(채팅창에 성기 사이즈 18cm를 18m라고 잘못 쓰고 욕을 내뱉는다든지 하는)이 그 우아했던 드라마에 막장의 개연성과 더불어 페이소스까지 더해 주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영화와 연극의 차이는 무엇일까? 혹시 완벽한 반복과 변주의 차이는 아닐까? 예전에 슬픈 결말이 너무 안타까워서 한 번쯤은 해피엔딩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고 매일 똑 같은 영화를 보던 소녀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노래 가사였던가?). 


영화는 늘 똑같지만 연극은 그날그날의 캐스팅과 컨디션에 따라서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 그러니까 영화는 매번 똑같은 맛에 보고 연극은 매번 다른 맛에 본다는 얘기가 된다. 선택은 자유다. 만약에 영화 속 배우가 하던 연기를 집어치우고 스크린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오면 어떻게 될까, 라는 기발한 상상을 실천에 옮긴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도 있지 않았던가. (아, 그러고 보니 그 영화에 나왔던 멋진 남자 주인공이 지금 [뉴스 룸]에서 앵커로 나오는 그 제프 대니얼스로구나) 



연극 [클로저]에는 영화와는 또다른 찰진 이야기들과 에피소드가 드글드글 하다. 그러니 이 가을에 기필코 연극을 한 편 봐야겠다고 결심한 분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클로저]를 선택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연기도 연출도 고루 좋다. 12월 1일까지 대학로에서 계속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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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뛰어나야 연기도 잘 한다는 걸 알려주는 영화 – [더 테러 라이브] 




조정래의 [아리랑]을 읽으면서 정말 신기했던 것은 친일파에 대한 작가의 뛰어난 묘사력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팔려가던 민초들을 다루거나 순진한 마음으로 정신대에 자원하다시피 끌려가는 소녀들을 다룰 때는 독자들을 같은 편에 서서 울분에 떨게 만들던 작가가 친일파들을 묘사할 때는 180도 돌변해서 어찌 그리 얄미우면서도 논리정연하게 남의 속을 긁는지.. 정말 대단합니다. 혹시 작가가 친일파 출신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였죠. 



오늘 [더 테러 라이브]에서 하정우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정우가 맡은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윤영화 앵커는 영화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정말 정이 안 가는 밥맛이죠. 아홉시뉴스 앵커를 5년 간 하다가 뇌물수수 비리로 인해 며칠 전 라디오로 쫓겨온 인물이며 방송기자인 아내의 아이템을 훔친 일 때문에 별거까지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테러범의 전화를 받은 뒤 경찰에 신고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남들보다 먼저 이걸 가로채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드는 야비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하정우가 하는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혹시 저 자식이 실제로 저런 야비한 놈 아닐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인물에 몰입을 하게 만듭니다. 처음에 후줄근한 차림새와 잠 덜 깬 얼굴로 방송을 하다가 화장실에 가서 순식간에 야욕이 넘치는 모습으로 변하는 장면은 참 대단합니다. 더구나 하정우는 이 영화에서 야비한 면뿐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따라 때론 아주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어떤 시점부터는 자신이 속한 시스템에 진한 회의를 느끼는 역할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게다가 흔들리는 카메라는 잠시도 하정우라는 배우를 떠나지 않죠. 



이창동 감독은 어리버리한 [오아시스]의 설경구 캐릭터를 설명하며 “그게 다 내 안에 들어있던 모습”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무의식 속엔 참으로 많은 캐릭터들이 숨어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많은 캐릭터들 중에 한 가지만 꺼내서 살게 되죠. 두 가지가 번갈아 나오면 그게 ‘지킬과 하이드’가 되는 것이구요. 그런데 뛰어난 작가나 배우들은 수시로 여러 캐릭터들을 꺼내 독자나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김수현의 드라마를 봐도 그렇습니다.그녀의 드라마에서는 도저히 한 사람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저마다의 개연성을 가지고 빼곡하게 등장하죠. 


전 이게 상상력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상상력은 작가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흔히들 배우는 상상력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전 배우야말로 머리가 좋고 상상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연기도 잘 합니다. 머리가 나쁘면 연기도 못해요. 자신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캐릭터를 꺼낼 수 있는 힘, 이건 훈련만으로 되는 건 아니거든요. 타고난 상상력과 노력이 합쳐져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한때 ‘설리가 진리’라는 말이 있었듯 요즘 몇 년간은 ‘하정우가 대세’입니다. [더 테러 라이브]를 보시면 왜 지금 하정우가 대세 소릴 듣는지 확실히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근데, 저 자식도 실제 저렇게 야비한 인간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이경영의 날렵한 연기를 보는 즐거움은 ‘덤’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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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는 악당들의 인질극 덕분에 주인공 이소룡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한민국에 있는(!) 파고다탑에 가서 보물을 탈취해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탑엔 각 층마다 세계의 무술 고수들이 지키고 있는 거죠. 이소룡은 첫 칸부터 압둘 자바가 기다리고 있는 맨 윗층까지 올라가 차례차례 고수들을 제압해 나갑니다. 전 그 영화를 볼 때 어린 마음에도 “쟤네들은 도대체 이소룡이 오기 전까지는 저기서 뭘 하고 기다릴까? 먹을 것도 놀 것도 없는 텅 빈 방에서…그리고 왜 이소룡이 괴조음을 내지르고 싸울 때 밑으로 내려와 동료 고수들과 같이 싸우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등장인물들에 대한 ‘개연성’에 대한 목마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봉준호의 [설국열차]를 보면서도 비슷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설국열차라는 설정 자체가 ‘노아의 방주’ 같은 세기말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짐작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꼬릿칸의 사람들은 저토록 현실적이고 삶에 대해 확고한 신념과 욕구, 기대치가 있는데 반해 다른 칸 사람들은 왜 저렇게 비현실적이며 도대체 ‘인격체’처럼 느껴지지 않는 걸까 하고 의아했습니다. 물론 꼬릿칸 사람들이 최하층민 계층이니까 반란의 욕구가 매우 강하고 다른 사람들은 지배층에 속하거나 그 사람들에게 동조하는 계층이라서 그렇다고 할 순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란군들이 달려오는데도 자신의 열차칸을 벗어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문이 열리면 비로소 총을 쏘거나 도끼질을 한다는 게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런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가하게 앉아 초밥을 만들어 먹거나 어린이들과 수업을 하거나 계속 마약을 하고 춤을 추고 사우나를 한다는 건 지나치게 관념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한마디로 불편한 거죠. 그런데 제 아내는 이 장면이 너무도 당연하고 잘 된 설정으로 느껴졌다고 합니다. 저와 삐딱선을 탄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여기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봉준호의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박찬욱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나는 것도 관람의 즐거움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습니다. 열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서로 망치 살육전을 벌이던 적들끼리 “해피 뉴 이어!”를 외치며 잠깐 멈추는 유머코드는 [올드보이]에서 자기 생니를 뽑으며 고문하던 악당에게 “우린 친구잖아”라고 말하는 오달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박찬욱은 이런 잰체하는 유머코드를 좋아합니다.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틸다 스윈튼의 연기도 거북했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결정적으로 삶은 계란을 나눠주다가 그 트레이 속에서 기관총을 꺼내 쏘는 장면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명백한 오마주라고 해야겠죠.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시퀸스에 이르기까지 ‘팔’에 대한 고찰이 많이 나옵니다. 앤드류의팔은 열차 밖으로 내밀어졌다가 박살이 나고 꼬리칸의 선지자 길리엄은 팔이 없는 반면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커티스는 아직도 자기가 팔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죠. 그런데 이 모든 게 나중에 ‘달마대사’의 메타포임이 밝혀집니다. 전 이게 좀 싱겁습니다. 


그리고 열차의 엔진을 소유하고 있는 맨 앞칸의 윌포드가 작은 아이를 납치해 가는 이유도 “이 작은 곡사포 안을 어린아이 손 아니면 어떻게 닦아낸다 말입니까?”라는 거짓말로 나치들로부터 어린 생명을 구했던 쉰들러의 대사를 거꾸로 변용한 것 같아서 좀 낯간지러웠습니다. 



얘길 하다 보니 온갖 불만을 늘어놓으며 남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영화를 일방적으로 폄훼하고 있는 꼴이 되어버렸군요. 그런데 평소에 안 그러던 정말 제가 정말 왜 이럴까 생각해 봤더니 가장 결정적인 건 ‘감동’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짜릿함이나 감동 부분의 트리거 역할을 해야 할 요나와 남궁민수의 ‘캐릭터’가 너무 평면적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 연기 잘 하는 송강호와 동서양 어디서도 통할 거 같은 매력적인 포스를 뿜어내는 고아성은 영화 내내 심드렁하게 겉돕니다. 캐릭터 구축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죠. 이 열차의 보안 책임자였던 남궁민수와 다음 칸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있는 요나는 원할 때마다 열차칸의 문을 척척 열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지만 정작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성취동기’가 부족합니다. 하다 못해 윌포드에게 철천지 원수 진 일이 있어 그걸 꼭 갚아야 한다든지, 아니면 그게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진실과 통한다든지 하는 확실한 동기가 그들에게 주어졌으면 어땠을까요.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건 고작 1년에 한 번씩 세계를 뱅뱅 도는 ‘윤회’ 같은 이 지겨운 열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가 새로운 세상에서 생존 가능성을 찾는 것뿐입니다. 이건 좀 맥이 빠지는 결론이며 안일한 통찰이죠. 



이상이, 엄청난 스케일과 비주얼, 쟁쟁한 스타들의 뛰어난 연기가 등장하는 만듦새 훌륭한 일급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설국열차]를 재미 없게 본 이유입니다. 물론 이 메모는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혀야 뒷탈이 없겠으나… 따지고 보면 개인적이지 않은 의견이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저는 유명한 평론가나 기자도 아닌 일반 관객인데요 뭐. 그런 의미에서 매우 성급하고 편협한 영화 일기인지 알면서도 그냥 올립니다. 이건 그저 제 개인적인 블로그이고, 개인적인 페이스북 담벼락일 뿐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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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통찰력과 막강한 연기력의 행복한 만남 – [마지막 4중주] 






주먹으로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데니스 호퍼는 자신을 고문하던 마피아들에게 담배를 하나 달라고 해서 맛있게 빤 다음 엉뚱한 얘기를 시작합니다. 그것도 아주 침착하고 흥미롭게 빙글빙글 웃어가면서.  “난 책을 좋아하지. 특히 역사책을 많이 읽었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한 가지 가르쳐 줄까? 니네 시실리아인들은 원래 곱슬머리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천 년 전쯤에 무어인들의 피가 섞이면서 그렇게 된 거지. 깜둥이 말야. 그러니까 시실리아인들은 죄다 깜둥이의 종자인 거라고…니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깜둥이들하고 그짓을 한 거야...” 


얘기를 들으며 점점 얼굴이 일그러지던 보스 크리스토퍼 월큰은 나중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그만 킥킥킥킥 웃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데니스 호퍼도 그의 약을 올리느라 마주 보고 더 크게 웃죠. 하하하하하. 자세를 수습하려 돌아서던 월큰은 손으로 데니스 호퍼를 가리키며 다시 한 번 포복절도를 합니다. 아아, 이 새끼 봐라 진짜 웃기네, 하는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던 크리스토퍼 월큰, 결국은 참지 못하고 부하의 권총을 뽑아서 단숨에 데니스 호퍼를 쏴죽여 버립니다. “1984년 이후로 내가 누군가를 직접 죽이는 건 니가 처음이야!”라는 말과 함께. 



기억 나세요? 얼마 전 자살한 토니 스코트 감독의 영화이긴 하지만 매니아들 사이에선 무명 시절의 쿠엔틴 타란티노 시나리오로 더 유명한 영화 [트루 로맨스]의 한 장면이죠. 여기 나오는 크리스토퍼 월큰은 정말 카리스마가 넘치는 악역 전문 배우입니다. 몇 해 전 인사동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친구들 영화제’가 열렸을 때 아벨 페라라의 [킹 뉴욕]을 추천했던 류승완 감독은 영화가 끝나고 열린 간담회에 나와 “우리 월큰 형님이 나오는 장면에서, 우와!…”라고 흥분하며 크리스토퍼 월큰을 기렸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에서 여자 승객의 돈을 빼앗는 지하철 강도에게 “야, 그러지 말고 차라리 이건 어때? 하고 자신의 지갑 속 돈을 던지며 “생각 있으면 나중에 한 번 찾아오라” 고 말하는 장면은 실제로 월큰의 경험담이라고 합니다. 실제로도 눈빛 카리스마가 장난 아닌 배우라는 얘기죠) 


자, 그런 전설적인 악역 전문 배우가, [퓨너럴]에서 숀 펜의 동생 크리스 펜과 함께 사악하게 웃던 그 보스가, [디어 헌터]에서 단 한 발의 탄환이 든 권총을 머리에 대고 끊임없이 러시안 룰렛을 해대던 그 슬픈 또라이가 [마지막 4중주]의 첼리스트로 나온다니. 얼른 상상이 안 갔습니다. 물론 크리스토퍼 월큰이 코미디 영화에 전혀 출연을 안 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가 기억하는 그는 백 번 양보해도 [수어사이드 킹]같이 살짝 맛이 간 상황의 ‘납치 당한 보스’라도, 결국은 카리스마 작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불이 꺼지고 [마지막 4중주]가 시작되고 나니 조직의 보스 월큰 형님은 어디 가고 파킨슨병 진단을 받아 고뇌하는 노장 첼리스트가 거기 서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푸가’라는 세계적인 쿼텟의 리더인 피터는 자신이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새 첼리스트를 구하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공연곡으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을 결정합니다. 


얘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피터가 빠지게 된다는 건 25년 간 지속되었던 네 사람의 팀웍이 깨진다는 얘기죠. 타격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제2바이올린인 로버트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 받쳐주는 역할만 하긴 싫다며 앞으론 때에 따라서 자신이 다니엘 대신 제1 바이올린을 맡을 수도 있음을 시사합니다.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다니엘이 당황하는 것은 물론 로버트의 아내이자 쿼텟의 비올라 연주자인 줄리엣도 곤혹스러워 합니다. 그동안 모두의 아버지와 같았던 피터의 리드 하에 가려져 있던 멤버들의 질투, 갈등, 욕심 등이 한꺼번에 표출되는 상황인 것이죠. 


자신을 만류하는 줄리엣에게 화가 난 로버트는 홧김에 알고 지내던 조깅 파트너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그 사건 때문에 둘의 사이는 더욱 벌어집니다. 게다가 로버트와 줄리엣 사이에서 태어난 대학생 딸에게 바이올린을 지도하던 다니엘이 그녀와 사랑에 빠져 동침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습니다. 얼핏 단조롭고 고귀한 척 할 수도 있었던 극은 이처럼 클래식 음악에 어울리지 않는 ‘막장스러움’을 통해 인간적인 온기와 삶의 신산스러움을 함께 갖춘 입체적인 텍스트로 발전합니다.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던 피터는 자신이 마지막 연주곡으로 선택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의 의미에 대해 질문합니다. 


“당시엔 4악장으로 구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 곡을 7악장으로 구성했으며, 악장 사이에 쉬는 시간 없이 바로 연주하도록 했다. 40분 동안 쉼 없이 계속 이어서 연주해야 하는 이 곡은 연주하는 동안 악기의 튜닝이 풀리거나 연주자들의 하모니가 망가지기 마련이지. 그렇다면 연주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베토벤의 주문을 어기고 중간에 잠시 멈춰서 조율을 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연주자들에게 자신의 연주를 맞춰 가며 끝까지 계속 쉬지 않고 연주해야 할까?” 


좋은 텍스트엔 언제나 ‘인생의 메타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죠. 다큐멘터리를 찍던 야론 질버만 감독은 극영화 데뷔작인 이 작품에서 베토벤의 곡을 통해 이기심과 이타심, 화합과 개성의 관계, 그리고 직업과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을 관객에게 던지죠. 



이처럼 명확한 컨셉과 만듦새를 가진 이 영화는 기가 막힌 배우들의 열연으로 더욱 빛이 납니다. 무슨 연기를 시켜야 저 사람이 연기 못 한다는 소릴 한 번 들어볼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무슨 연기든 완벽하게 해내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물론 , 다니엘 역의 마크 이바니어와 줄리엣 역의 캐서린 키너도 명불허전입니다. 


리허설을 하면서 호흡을 고르고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배우들의 긴장된 손끝 연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요. 젊었을 때 카잘스와 만났던 장면을 회상하며 즉흥적으로 첼로를 켜는 크리스토퍼 월큰의 몸짓과 연기를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적당할까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악기를 연주할 땐 정말 악기를 배워서 실력으로 연주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멋진 음색들이 계속 흘러 나옵니다. 


영화는 네 사람이 무대에 서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을 연주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연주 도중 한 사람이 떠나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연주는 계속 이어지죠. [마지막 4중주]. 이 영화는 텍스트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막강한 연기력이 만나면 얼마나 멋진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게다가 귀를 황홀하게 해주는 정상급 연주들을 한 시간 반 동안 실컷 들을 수 있습니다. 얼른 가까운 극장으로 가십시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땐 아마 "아, 오늘 술 약속 취소하고 극장으로 오길 정말 잘 했어."라는 생각이 절로 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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