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JTBC뉴스가 끝나고 IP-TV로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를 봤다. 처음엔 일찍 자겠다던 아내도 어느덧 TV앞에 앉더니 끝까지 영화를 지켜보았다. [정사]나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같은 날렵한 드라마를 만들던 이재용 감독이 웬일로 파고다공원의 박카스 아줌마 얘기래? 했는데 막상 영화는 생각보다 귀엽고 산뜻했다. 이를테면 [친구]를 만들던 곽경택이 어깨에 힘 빼고 [똥개]를 만든 느낌이랄까. 작년 10월에 개봉한 영화다. 


윤여정은 나이로는 분명 노인이지만 그냥 노인이 아니다. 어울리지 않게 청자켓을 입고 새침한 표정을 지어도 어울리고 고양이밥을 들고 마당으로 나오다가 다른 사람의 로맨스를 목격하고 부러워하는 얼굴에도 어울린다. 그렇다. '발리 윤식당'의 셰프도 윤여정이지만 이렇게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를 숨기지 못하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녀와 마주할 때 우리는 아직 윤여정만큼 '원톱'을 소화해낼 수 있는 여배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같이 나오는 배우들과의 화학작용도 좋다. 트랜스젠더 배우 안아주나 윤계상이 윤여정과 함께 이태원의 이층집에서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에서 내가 "완전 루저들의 합창이네?!" 라고 했더니 아내도 빙긋이 웃으며 동의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과거 성매매로 만난 사이지만 서로 예의를 지키고 품위가 있는 멋진 노인들이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이게 가능한 게,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김기덕이 만들었으면 비린내가 났을 영화가 이재용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한층 담백해졌다. 그렇다고 푸근하거나 흐뭇한 것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윤여정이 오랜 친구들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살인자가 된 뒤 미련없이 체포되어 경찰차로 실려갈 때 운전하던 경찰이 건내주는 담배 한 가치의 연기는 참으로 위로가 된다. 작품 전체가 열여섯 평짜리 이층 양옥집만 하다면 거기에'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 라는 동의가 두세 평짜리 옥탑방처럼 붙어 있었기에 더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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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를 보았다. 과연 눈물 없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미루고 미루다 가긴 했지만 상영관 입구에서 곽티슈를 한 통씩 나눠주길래 '에이, 이건 좀 오버 아냐?'라고 했던 아내는 막상 안에 들어가서 상영 내내 휴지를 뽑아 눈물을 닦고 코를 팡팡 풀었다.

눈물의 포인트는 안희정의 인터뷰였다. 별로 슬픈 얘기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노무현은 확실히 별종이었다. 노무현의 운전기사와 전 국정원 직원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다. 평생을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던 사내. 그에게 우회도로나 지름길은 없었다. 그냥 정도를 뚜벅뚜벅 걷다가 절벽을 만나자 거기서 수직낙하했다. 그가 바로 노무현이다.

아내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이인제는 확실한 악역, 강원국은 유머와 코믹 담당"이러고 깔끔하게 정리를 해줬다. 나는 나레이션 한 번 없이 내러티브가 이렇게 잘 연결될 정도면 감독이나 구성작가들이 자료화면을 얼마나 많이 봐야 했을까를 생각하며 그 노고에 감탄했다. 감독과 함께 이 영화의 구성을 담당한 작가는 아내의 친구인 양희 씨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와 남대문 부원면옥에 가서 냉면과 닭무침, 그리고 소주를 주문했다. 아내는 한 병만 마시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닭무침 안주가 남아서 할 수 없이 한 병을 더 주문해야 했다. 그리고 나와 서울로를 걷다가 서울로 기획에 첨여했던 시청 직원 온수진 주무관을 만나 커피도 한 잔 했다.

영화는 슬펐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오히려 역설적인 희망이 생겼다. 우리는 노무현이라는 성공 케이스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선한 사람들이 이기는 경험. 그게 중요하다. 광고회사도 성공경험은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경쟁PT를 선호한다. 가끔은 우리가 옳다는 걸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막판에 죽음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누가 이를 실패라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노사모'는 아니었지만 우리 모두 노무현과 함께 한 시간을 기억하자. 어쨌든 그런 희망과 환희를 안겨 준 사람이 있었다니, 고마운 일 아닌가. 노무현의 눈물을 딛고 일어선 문재인 정부는 좀 더 강하고 더욱 세련되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게 '동업자' 노무현을 기리는 최선의 방법이니까.


(* 어제 낮술에 취해 페이스북에 올린 리뷰인데 기록 차원에서 여기에도 남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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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영화들

영화일기 2017. 4. 20. 10:43


며칠 전, 작년에 극장에서 봤던 영화들의 제목을 인터넷으로 대충 찾아 봤다(아, <헤이트풀8>은 IP TV로 봤구나).

아가씨
곡성
부산행
밀정
내부자들
마스터
최악의 하루
더 킹
럭키
에브리바디 원츠 썸!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본 투 비 블루
바닷마을 다이어리
헤이트풀 8
캐롤
데드풀
빅쇼트
우리들
동주
4등
당신자신과 당신의것
태풍이 지나가고
카페 소사이어티
너의 이름은
녹터널 애니멀스
라라랜드

그리고 보고깊었는데 못 본 영화들.

더스트
신비한 동물사전
닥터 스트레인지
나, 다니엘 블레이크
비치 온 더 비치
로스트 인 더스트

좋았던 영화는 아가씨, 곡성, 내부자들, 마스터, 최악의 하루, 캐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바닷마을 다이어리, 동주, 태풍이 지나가고, 헤이트풀8, 라라랜드

제일 좋았던 영화는 내부자들. 하나 더 하자면 캐롤.

싫었던 영화는 너의 이름은, 녹터널 애니멀스, 더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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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러스트 앤 본]을 ‘Watcha play' 서비스로 보았다(서비스 가입을 해놓고 시간이 없어서 못보다가 며칠 전 해약을 했는데 이번달 말까지는 뭐든 볼 수 있다고 해서 문득 어제 이 영화를 찾아보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녹과 뼈’라는 이 제목은 동명 소설집에서 따왔다는데 불어와 연관되어 가깝게는 ‘주먹다짐’을 뜻하기도 하고 넓게 보면 ‘녹을 벗겨내다’라는 의미로까지 확장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영어나 불어를 잘 하는 사람이라면 뭔가 좀 더 심오한 뜻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나는 그냥 그 정도로 어림짐작을 할 뿐이다. [예언자]나 [내 심장을 건너뛴 박동]의 자크 오디아르 감독이 만든 영화지만 내게는 마리옹 코띠아르의 영화라서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마리옹 코띠아르의 얼굴과 표정이 좋다.[인셉션] 같은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그 번듯한 미모가 빛나지만 이 영화처럼 캐릭터 중심의 작품에서는 잘생긴 얼굴이면서도 한편 평범하기도 하고 회한이 서려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등 변화무쌍한 매력이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연기를 참 잘 한다는 얘기다. 

이번 작품에선 사고로 두 다리가 잘린 전직 범고래 조련사 역이다(특수효과를 잘 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정말 두 다리가 잘린 채로 나온다). 그런 여자가 사고 이후 처음으로 남자에게 안겨 머뭇머뭇 바다 수영을 하는 장면도 좋았고 남자의 제안에 의해 첫 섹스를 한 뒤 또 하고 싶어질 때마다 ‘출장 가능?’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장면도 좋았다. 나중에는 남자친구의 브로커 역할을 맡아 의족을 달고 길거리 싸움 현장에서 유유히 지폐를 세는 장면조차도 그녀라서 잘 어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알리로 나오는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연기도 훌륭했다. 몸으로 살아가는 전직 복서이자 현 경비원인 짐승남의 역할을 무심한 척 능숙하게 연기한다. 

이 영화는 스테파니의 잘린 다리로 시작해 알리의 길거리 주먹싸움 장면에서 튀는 핏방울들과 상처와 치아, 마지막 얼음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기 위해 맨주먹으로 빙판을 부수는 장면 등 육체를 날것으로 다루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아마도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살아간다는 것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이처럼 매순간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것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처럼 살아가기 팍팍한 주인공들의 에피소드들을 관조적으로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아들을 구하느라 주먹뼈를 다친 알리가 병원에서 아들이 깨어난 후 스테파니에게 처음으로 휴대폰을 통해 사랑고백을 하는 장면은 뭉클하다. 음악이나 촬영도 훌륭하다. 201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작이었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에게 밀려 수상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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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 한 번 본 것 말고는 어떤 사전지식도 없이 갑자기 어젯밤 신사동 롯데시네마 브로드웨이극장에 혼자 가서 [마스터]를 봤다. 올해 12월 31일까지 쓰지 않으면 휴지가 되는 영화초대권이 있어서였다. 별 생각 없이 선택한 흥행작이었는데 감독이 [감시자들]의 조의석 감독이라는 걸 알고 나서 '최소한 스피디하고 영리하긴 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감시자들]을 보고 조금 놀랐었다. 특히 서울시내에서 감행한 몹씬이나 추격신이 인상 깊었다.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나 [도둑들]이 생각나는 케이퍼 무비. 등장 인물들의 선악 구분이 뚜렸하고 사건도 명쾌하지만 이리저리 속도감 있게 엎치락 뒤치락 하는 쾌감을 선사하기 위해 색다른 금융지식을 등장시키고 실제 인물들의 일화까지 반영하는 등 시나리오에 골고루 양념을 쳤다. 그러다 보니 러닝타임이 무려 143분. 영화 두 편을 한꺼번에 몰아본 기분이 든다. 하지만 길다고 꼭 지루한 건 아니다. 일단 이병헌이라는 확고부동한 스타가 중심을 잡아주고 강동원과 김우빈도 놀라울 정도로 연기를 잘 하기 때문이다. 연기를 잘 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잘 수행하는 느낌이랄까. 왜 그런 거 있잖은가. 수퍼세션맨들이 모여서 한 무대에 섰는데 어느 하나 튀지 않고 각자의 연주가 온몸으로 골고루 스미는 쾌감. 엄지원, 진경, 오달수는 물론 잠깐 나오는 원로 연극배우 박정자까지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적절하게 열연을 펼친다.

이상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끝까지 가벼움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영화다. 악당들은 수 조원의 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표정이나 말투가 장난치듯 경쾌하고 경찰들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악당들에게 이죽거리는 여유를 부릴망정 크게 주눅이 들지 않는다. 나는 이게 이 영화의 승리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최근의 대한민국은 영화나 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역동적이고 엽기적인 일이 많았는데 영화에서까지 그렇게 극단적으로 달려나간다면 참 견디기 힘든 노릇이 아니겠는가. 최근 김성수의 [아수라]가 대박을 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도 그거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입만 열면 들리는 3조 원, 6조 원 등의 금액이 좀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걱정 마시라. 내년에도 박근혜 최순실 패거리들이 벌인 국정농단 사건이 베일을 벗을 때마다 우리는 계속 그런 단위에 익숙한 서민들이 되어야 할 테니까.  

이 영화가 '천 만 관객'을 찍을지 안 찍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몇 년 후 다시 봐도 배우들의 활약만큼은 '미친 존재감'의 레퍼런스로 남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영화가 끝나고 송년 회식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뒤늦게 전화를 했다가 치사하게 혼자 그런 영화를 보느냐고 야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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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는 몇 초면 컴퓨터에서 모든 영화를 다운받을 수 있는 이 시대에도 왜 우리가 굳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봐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영화라는 예술의 진정한 줄거움은 영화를 보는 순간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영화를 예매할 때의 기대부터 당일 극장으로 가는 길,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그 감동을 조금 더 연장하고 싶어서 들른 커피숍의 진한 커피향 속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영화다.

어두컴컴한 극장에 들어거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면 그 순간부터 현실 속의 우리는 사라지고 객석의 모든 남녀는 라이언 고슬링이 되고 엠마 스톤이 된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던 내가 어느덧 노래를 잘 부르게 되고 프레드 아스테어나 진 켈리처럼 춤도 잘 추게 된다. 심지어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고 어쩐지 코도 더 뾰족해진 느낌이 든다. 표정이 풍부해지고 결정적으로 젊어진다. 그렇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두 시간 동안 세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온전히 나만의 꿈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아주 로맨틱한 쉼표인 것이다.


꽉막힌 LA 고속도로에서의 첫 장면부터 관객을 압도하는 이 영화는 현실과 뮤지컬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번번히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배우 지망생과 재즈 피아노 연주자가 어떻게 만나서 사랑하고 노력하고 성공하고 어른이 되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얼굴을 약간 찌푸려야 더 매력적인 엠마 스톤은 이 영화에서 노래와 춤, 연기 등 모든 분야에서 그야말로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오른다. 그리고 재즈를 사랑하는 피아니스트 역의 라이언 고슬링이 연주하는 모든 곡의 멜로디는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이라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 귓가를 간지럽힌다. 두 사람이 함께 부르는 'Stars in the city'를 들으며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의 OST를 사야겠군. 이건 전작 [위플래시]에 이어 또다시 음악을 영화의 중심에 놓은 감독 데이미언 셔젤의 책임이 크다.

그런데 지난번 작품의 주제가 음악과 음악인 사이의 처절한 사투였다면 이번 영화는 그보다 부드럽고 단순한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맨 처음 만남에서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미아의 차를 채근하며 길게 클랙션을 울려대던 세바스찬은 그 이후 그녀를 만날 때마다 늘 길게 클랙션을 울림으로써 두 사람만의 암호로 삼는다. 함께 주차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눈 앞에 펼쳐진 LA의 야경이 별로라며 '이 얼마나 아름다운 밤하늘의 낭비인가'라는 노래를 부른다. 야경이 별로라던 두 사람의투덜거림과는 달리 그 순간 이미 둘은 서로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모노 드라마를 준비하는 미아를 위한 '연구 목적으로(for research)' 보게 된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을 계기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그러나 원만한 직선으로만 흘러가는 사랑이나 인생이 어디 있으랴. 두 사람이 각자의 꿈을 향해 달려갈수록 사이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뮤지컬 영화이고 사랑 영화지만 동시에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컬러부터 앵글, 그리고 배우들의 춤과 노래들에선 이전 헐리우드 영화들에 대한 향수가 물씬 배어난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영화들을 무조건 베끼거나 숭배하진 않는다. 다만 감독은 헐리우드 시스템이 최고 전성기를 구가할 때 유행하던 뮤지컬 형식을 가져와 그동안 선배들의 영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행복과 슬픔과 노스텔지어를 심어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배우들에게 계속 춤 추고 노래하고 사랑하게 만든다. 마치 그게 인생이라는 듯이.

스포일러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마지막 시퀀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겠다. 다만 이런 진부한 표현을 써서라도 그 느낌만은 좀 남겨두고 싶다. 아마 당신도 마지막 장면에서 라이언 고슬링을 바라보는 엠마 스톤의 그렁그렁한 눈과 미소를 바라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알싸하게 저려오고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질 것이라고. 그리고 이 영화를 보러온 오늘은 참 좋은 날로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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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 예매 어플에 뜬 <비치 온 더 비치>라는 영화 제목은 단박에 'Sex on the beach'라는 칵테일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정가영이라는 감독이 만든 영화인데 홍상수가 생각난다는 평이 있었다. 조금 더 궁금해져서 유투브에 들어가 그가 만들었다는 단편영화 <내가 어때섷ㅎㅎ>이라는 작품을 먼저 찾아 보았다. 그냥 콘도 응접실 같은 데에 카메라 한 대 뻗쳐놓고 13분동안 두 남녀가 앉아 맥주 마시며 수작질하는 내용이 전부였는데 놀랍도록 재미가 있었다. 감독이자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정가영은 '여자가 들이대는 영화를 만들어보면 재밌을 거 같아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는 정말 그의 생각대로 어이 없이 웃기면서도 귀여운 맛이 있었다. 내친 김에 <처음>이라는 단편도 찾아보았다. 연기과에 다니는 남학생이 두 여학생이 있는 방에 찾아와서 영화 촬영 전 첫 키스를 경험하고 싶으니 협조해 달라고 얘기하는 황당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정가영의 연기가 빛을 발한다. 특히 평범하면서도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억양이 일품이다. 성적 욕망에 충실하지만 실제로는 잘 되지 않는 캐릭터, 하면 그동안 윤성호 감독만 떠올랐었는데 이제 정가영이라는 막강 캐릭터가 하나 더 생긴 거 같아서 반가웠다. 개봉한지 며칠 되지 않은 영화 <<비치 온 더 비치>. 극장에서 내리기 전에 보러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사실은 <라라랜드>가 더 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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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은 후배인 혜원을 좋아한다. 그런데 혜원은 동욱의 마음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과 사귀는 건 곤란하다는 것이다. 오늘도 동욱이 조르고 졸라서 겨우 만든 둘만의 술자리이지만 얘기는 겉돌기만 한다. 테이블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새로 옮긴 혜원의 직장 얘기를 하다가 혜원이 육 개월 전부터 동욱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일하는 임창수 대리와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옆자리 직장 동료와 몰래 사귀고 있다는 사실에 격분한 동욱은 일방적으로 혜원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동욱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이 술집의 주인이자 선배 영식은 혼자 남은 동욱을 위로하고자 중국에서 가져 왔다는 술을 한 잔 따라 준다. 그런데 동욱이 이 술을 한 잔 마시고 고개를 든 순간 영식은 사라지고 눈앞에 사라졌던 혜원이 다시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시점은 둘이 새로 옮긴 직장 얘기를 하던 불과 몇 분 전 상황이다. 동욱은 이미 알고 있지만 혜원은 자신이 임창수 대리와 사귄다고 고백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다시 얘기를 이어가다가 임창수 대리와 그의 전 애인 은나가 사귄 기간 얘기를 하며 싸우는 두 사람. 이번엔 동욱이 나가고 술집 주인 영식이 중국술을 마시게 된다.그리고 또 타임슬립.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비밀은 술이다. 이 술은 과거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의 약이었던 것이다.

흔히 단편영화라고 하면 웬지 예술적이라 뭐가 뭔지 모르는 알쏭달쏭한 내용일 거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흥행과는 담을 쌓은 듯 어렵게만 만든 단편영화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일반론을 가볍게 뒤집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정말 좋았건 이유는 타입 슬립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능력으로 지구를 구한다거나 복권을 산다거나 하는 거창한 게 아니라 동생이 훔쳐먹은 푸딩을 다시 차지한다거나 너무나 갑작스러운 첫사랑의 고백을 되돌린다는 사소함에 쓰이는 게 더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도 그렇다. 타임 슬립을 일으키는 중국술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하이컨셉이지만 여기서는 각자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도구 이상으로 쓰이지 않는다. 대신에 연애나 질투 같은 사소한(?) 감정들이 개연성 있는 플롯 속에서 대활약을 한다. 장소 한 번 바꾸지 않은 술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임창수 대리는 얼굴 한 번 나오는 일 없는데도 신기하게도 영화 내내 그 존재감이 느껴지는 건 감독의 뛰아난 각본 감각과 연출력 때문일 것이다. 



30분남짓 되는 이 단편은 나와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백영욱 감독이 만든 영화인데 얼마 전 이 작품이 외국의 어떤 영화제에서 뒤늦게 상을 또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페이스북에 올림으로써 알게 되었다. 우리 회사의 김건익 실장님에게 영화 [한 잔] 얘기를 했더니 자신은 시사회 때 후배인 백영욱 감독은 물론 그의 가족 친구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고 자랑을 하셨다. 맨 마지막에 혜원이 중국술을 한 잔 마시고 처음의 설전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은 아주 어릴 적 읽었던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라는 동화가 생각나서 더욱 반가웠다.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이런 멋진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안 그래도 어렴풋이 술 약속을 해놓긴 했는데 11월이 가기 전에 백영욱 감독님하고 만나 이 영화 얘기 하면서 소주 '한 잔'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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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이승연 배우가 나오는 독립영화를 논현동에 있는 '이디야커피랩'에서 보게되었다. 이디야 커피랩 사장께서 매장 한 곳에 'E씨네'라는 아주 작은 상영관을 만들어서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한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어제 상영작은 [내 청춘에게 고함]으로 잘 알려진 김영남 감독의 [뜨거운 차 한잔]. 2005년도에 찍은 40분가량의 단편이다. 불치병에 걸렸다고 진단을 받은 아버지가 어쩐 일인지 다시 건강해졌다는 진단을 받고 어리둥절해 하는 딸. 병원에서 나온 딸은 아버지에게 택시를 타고 돌아가라 하지만 아버지는 걸어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화가 나서 아버지와 헤어진 딸은 네 살난 아이와 함께 읍내로 나갔다가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던 남자를 만나 모텔로 간다. 그들이 섹스를 하는 동안 모텔 주변에서 놀던 아이는 사라진다. 

아이에게 낚시를 가르치는 할어버지, 새로 생긴 남자친구에게도 위안을 얻지 못하는 엄마, 서울에 있는 친오빠와의 가시돋힌 전화, 엄마의 불안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어린 아들, 전남편에게서 온 편지...등등 영화는 숨겨진 많은 애기들을 뒤로한 채 아버지와 딸 사이에 놓인 차 한잔을 바라보다 끝을 맺는다. 

비록 톤이나 화법은 달랐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들이 생각났다. 롱테이크로 천천히 움직이다가 장면전환할 때마다 약간의 여운을 주는 카메라워크가 인상깊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필름으로 찍었다는데 정작 어제는 필름으로 보지 못해 아쉬웠다. <뜨거운 차 한잔>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재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감독의 말에 의하면 장편으로 개작을 하려다가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엎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이승연의 연기는 11년 전인데도 그 내공이 엄청나다. 그녀가 내 친구라는 게 자랑스럽다. 작은 영화관에 열 명 남짓 모인 관객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그 열기와 진지함은 어떤 시서회장보다도 뜨거웠다. 이렇게 작은 영화들이 일반 관객들과 만나는 일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라꼴이 하도 말이 아닌 때라 영화 보는 것도 마음이 썩 편하지만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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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의 소설 [하얀전쟁]에는 베트남 전쟁터 후방에서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던 정훈병들이 정신교육 시간에 대한뉴스 필름을 거꾸로 돌려보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내용이었는데 그 당시엔 단지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만으로 다들 배꼽이 빠지도록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이야기가 그렇다. 조금만 내용을 뒤집거나 주인공의 설정을 살짝만 바꿔도 이상하게 새로운 재미가 생겨난다. 김종관 감독의 [최악의 하루]는 '바람둥이'라는 주인공 설정을 남자 대신 여자로 바꿈으로써 색다른 재미와 깊이를 만들어낸 작품이다.

바람둥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게 뭘까. 바로 거짓말이다. 무용을 전공한 배우 지망생 은희는 연기 선생한테는 표정이나 대사가 뻣뻣하다고 야단을 맞지만(연극과 영화에서 맹활약 중인 이승연 배우가 연기 지도선생으로 나온다) 실생활에서는 남자들에게 아주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잘 한다. 거짓눈물을 순식간에 흘리는 것은 물론이고 말하는 톤도 상대와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자신이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자신에게 길을 물어온 일본 소설가 료헤이에게는 자신이 '거짓말 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며 자랑까지 하니 말이다.

료헤이와 헤어진 은희는 남자친구인 현오를 만나기 위해 남산으로 간다. 아침드라마에 출연하는 주제에 썬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약속장소에 나타난 현오를 비웃는 은희. 차라리 모텔에서 옷 다 벗고 있을 때가 더 멋있다는 농담을 날리자 현오는 자기가 데려간 곳은 모텔이 아니라 '부티크 호텔'이라며 화를 낸다. 남자친구라고는 하지만 서로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 사이라는 게 금방 드러나는 허약한 장면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소한 말실수로 크게 싸우고 헤어진 은희는 혼자 남산 벤치에 앉아 사진을 한 장 찍어 무심코 트위터에 올리는데 그걸 보고 냉큼 운철이라는 남자가 찾아온다. 그는 얼마 전까지 은희와 사귀었던 이혼남이다. 은희는 그 남자와 커피를 마시다가 결국 이혼한 전 부인과 다시 합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격렬하게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 이 영화는 하룻동안 북촌과 남산을 오가며 세 남자를 만나게 되는 은희라는 여자의 이야기다.

문제는 은희가 두 남자 사이에서 연기를 펼치다가 어느 순간 딱 셋이 마주치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도 하루 종일 오가던 남산 산책로에서. 현오와 운철은 서로 자기가 진짜 남자친구, 또는 더 오래된 남자친구라고 우기다가 그동안 은희가 자기들에게 거짓말을 늘어놓고 양다리를 걸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은희는 미칠 지경이다. 자기도 도무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모순된 점을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나의 모순됨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다니. 정말 아까 연기 지도선생과 함께 연습하던 대사처럼 하나님이 내게 오늘 최악의 하루를 주기로 아주 작정을 하신 모양이구나.

화가 난 현오와 운철은 졸지에 피해자 연합으로 의기투합해 내려가서 소주나 마시자고 한다. 가기 전에 현오가 "너는 거기서 그냥 땅 파고 뒈지시던가"라고 모진 소리를 내뱉지만 달리 할 말이 없는 은희는 "어, 그럴게."라고 대답할 뿐이다.

나는 사실 한예리처럼 별로 예쁘지도 않고 신경질적으로 생긴 여자는 좀 싫어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은희역으로 한예리 이외의 배우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딱 맞는 옷이다. 같은 여자 바람둥이라도 홍상수 감독이 만든 [우리 선희]의 정유미는 남자들이 더 설쳐서 저절로 그렇게 된 수동형 바람둥이이라면 이 영화의 은희는 스스로 상대를 쥐락펴락하는 능동형 바라둥이라 더 통쾌하고 유머러스한 면이 있다. 그리고 한예리는 이와세 료와 영어 연기를 펼치는데 그게 아주 자연스럽고 좋다. 한 마디로 연기를 참 잘하는 똑똑한 배우인 것이다.

적은 예산 때문이겠지만 이 영화는 한예리, 권율, 이희준, 이와세 료 뿐 아니라 남산의 산책로와 서촌의 골목길도 어엿한 주인공으로 엔딩 크레딧에 오를 만하다. 솔직히 김종관의 예전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는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핸드헬드가 난무하는 바람에 보다가 멀미가 날 지경이었는데 이번 영화는 카메라가 매우 안정적이고 정적인 화면들이 아름다워서 아주 놀라웠다.

적은 예산 덕분에 하룻동안 벌어진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었는지는 몰라도 연기와 극본, 카메라까지 좋은 영화라 누구에게든 한 번 보라고 자신있게 권할 만하다. 게다가 제목은 '최악의 하루'지만 영화 말미엔 이와세 료와의 마지막 대사들을 통해 어렴풋이 해피엔딩을 암시하고 있기까지 하다. 아마 그래서 영화평론가 이동진도 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한 주가 저물어가는 금요일 저녁쯤에 보면 최적일 영화'라고 썼던 것이리라.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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