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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음식 산문집 [오늘 뭐 먹지?]에서 오이지무침 부분을 읽다가 난데없이 반성 아닌 반성을 해야 했다. 오이지무침은 소설가 권여선이 여름 내내 떨어뜨리지 않고 해먹는 밑반찬인데 탈수가 생명이란다. 그런데 여자의 악력으로는 꼬들꼬들한 오이지 식감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목을 보호하기 위해 오이지를 짜던 베보자기를 그대로 펼쳐 냉장고에 넣고 서너 시간 말렸다 무치는 꾀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평소 음식용 짤순이가 있는 작은어머니를 부러워하던 그녀가 그러다 어느 날 발견한 방법은...
"요즘은 한결 수월하게 애인을 불러 짤 것을 명한다. 애인이 인정사정없이 쥐어짠 오이지는 꼬들꼬들을 넘어 오독오독하다. 정말 내 애인이라서가 아니라 이 친구가 악력 하나는 타고났다. 그러니 날 놓치지 않고 잘 붙들고 사는 것이지 싶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렇지. 애인이나 남편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지...'라고 중얼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악력이 약하다. 일단 손이 작기도 하고 요령도 없다. 태어날 때부터 손재주를 타고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집에서 와인을 딸 때도 늘 아내가 와인병을 잡는다. 내가 따면 따개 스프링이 코르크마개를 비뚤게 관통해 마개가 쪼개지기 일쑤라 늘 야단을 맞는다. 게다가 난 손목도 약하다. 군대 가서 오른쪽을 다쳤기 때문이다(군대 가서 다쳤다고 하면 다들 훈련하다 다친 것으로 오해해 줘서 약간 폼이 나긴 하는데 사실은 이등병 때 내무반에서 걸레질 하다가 손목에 너무 힘을 주고 미끄러져 크게 접지른 것이었다).
아무튼 안 그래도 약한 게 많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 항목에 '악력'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되었다는 슬픈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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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의 시집을 한 권 샀습니다. 수백 편의 시 중 아무 페이지나 넘기다가 전부터 좋아했던 '남편'이나 '초대받은 시인' 같은 시도 다시 만나고 슬픈 억척 어멈을 그린'찬밥'이라는 시도 만나고 '치마', '내가 한 일', 동백꽃', 칸나' 같은 싱싱한 시들이 발견될 때마다 페이지 윗쪽 귀퉁이를 접어놓고 하다가 마침내 '그 소년'이라는 시를 만났습니다.
시인이 삼성동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 만난, 입이 거친 남도의 택시운전사와 얘기를 나누다가 어린 시절 어떤 소녀를 사랑했던 순수한 소년까지 만나게 되는 이야기('그러고는 속으로 이 시를 시대 풍자로 끌고 갈까 그냥 서정시로 갈까 망설이는 순간그에게서 믿을 수 없는 한 소년이 튀어나왔다')를 시로 풀어놓은 내 누님 같은 시인 문정희.
택시라는 곳은 일차적으로 장소 이동의 수단이지만 때로는 정치 토론의 장, 나아가 인생의 축소판처럼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하지요. 저도 예전에 '심야택시'에 관한 글을 두 편 쓴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택시운전을 하는 초등학교 동창 한식이한테 들었던 얘기고 또 하나는 야근을 하고 오다가 택시 운전사와 죽이 맞아 인생과 죽음에 대해 수다를 떨었던 내용입니다. 감히 대 시인의 글과 제 글을 나란히 놓는 게 죄스럽긴 하지만 '택시'라는 공통분모가 있는데 못 할건 또 뭐냐, 라는 건방진 마음으로 이어붙여 봅니다.
그 소년 / 문정희
터미널에서 겨우 잡아탄 택시는 더러웠다
삼성동 가자는 말을 듣고도 기사는
쉽게 방향을 잡지 않더니
불붙은 담배를 창밖으로 획 던지며
덤빌 듯이 거칠게 액셀을 밟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욕을 하기 시작했다
삼성동에서 생선탕집을 하다가
집세가 두 배로 올라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했다
적의뿐인 그에게 삼성동까지 목숨을 내맡긴 나는
우선 그의 사투리에 묻은 고향에다 안간힘처럼
요즘 말로 코드를 맞춰보았다
그쪽이 고향인 사람과 사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속으로 이 시를 시대 풍자로 끌고 갈까
그냥 서정시로 갈까 망설이는 순간
그에게서 믿을 수 없는 한 소년이 튀어나왔다
한 해 여름 가난한 시골 소년이 쳐다볼 수 없는
서울 여학생을 땡볕처럼 눈부시게 쳐다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가을날 불현듯 그 여학생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마치 기적을 손에 쥔 듯
떨려서 봉투를 쉽게 뜯지 못하고 있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친구 녀석이 획 낚아채서
편지를 시퍼런 강물에 던져버렸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밤이 되면 흐르는 불빛 속을 가면서
그때 그 편지가 떠내려가던 시퍼런 급류 앞에서
속으로 통곡하는 소년을 본다고 했다
어느새 당도한 삼성동에 나는 무사히 내렸다
소년의 택시는 그 자리에서 좀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심야택시>
야근을 하고 열두 시 넘어 택시를 타고 오면서 기사 아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내가 마흔일곱 살에 뒤늦게 결혼을 했다고 하니 깜짝 놀라며 자긴 서른넷에 하면서도 늦게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 결혼한 게 결정적인 실수였다며 웃는다. 다시 할 수만 있다면 혼자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저희는 아이 없이 살 거니까 둘이서만 재밌게 살다 깨꾸닥 죽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했더니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저는 어머니가 삼 년을 꼬박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아파트 한 채를 병원비로 다 쓰고 가셨어요. 근데 그 뒤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이게 복구가 안 되네...'라고 말하는 기사 아저씨. '저는 어머니가 너무 갑자기 돌아가셔서 그게 정말 가슴 아팠는데' 라고 말하는 나.
이미 택시기사와 손님이라는 관계를 망각한 우리는 죽을 때 돼서 금방 죽는 것도 복이라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얘기가 흘러간다. 아저씨는 행여 자신이 죽기 전에 오래 아프거나 치매 같은 거 걸려서 자식들에게 폐라도 끼칠까봐 그게 걱정이라고 한다. 나도 우리 부부 둘이 재밌게 살다가 같이 죽는 게 바람이라고 소원을 얘기한다.
앞으로 원하는 사람들에겐 인도적인 안락사나 자살 같은 방법은 좀 열어놔야 하는 것 아니겠냐는 데까지 얘기했을 때 택시가 집 근처에 도착했다. 우리는 '서로 알아서 잘 죽읍시다' 라는 이상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밤 12시 52분이었다.
<심야택시에 두고 내린 옛사랑들>
몇 년 전에 술 마시면서 택시운전하는 초등학교 동창 한식이한테 들은 얘기가 기억난다. 택시를 몰다 보면 별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된다고 한다. 이런저런 취객은 말할 것도 없고 가끔 요금 안 내려고 문 열리자마자 냅다 튀어나가는 놈들도 많은데 그런 놈들은 그냥 놔둬야 한다고 한다. 쫓아가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염한 자세와 멘트로 기사를 유혹하는 아줌마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노르스름한 잡지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얘기는 택시비 대신 주고 갔다는 반지나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긴 이 세상엔 사랑을 시작하는 옵티미스트들도 많지만 사랑을 끝내는 페시미스트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아저씨, 저 이거 더 이상 필요없는 물건인데 택시비 대신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손님들은 야밤에 술에 취해 또는 맨정신에 고즈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사연이 붙어있는 금붙이나 보석들을 택시에 두고 내린다고 한다. 그날 그 친구가 보여준 목걸이도 그런 스토리가 내장된 물건이었다. 처음 그가 들고 온 진주목걸이를 보고 놀라던 그의 아내도 이젠 그런 물건들을 가져다 주면 태연하게 처리한다고 한다.
잠도 오지 않는 초여름 심야. 내가 심야택시에 두고 내렸던 기억은 어떤 것들이 있었나 생각하다가, 이런 건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떠올려야 하는 이야긴데...하고 창밖을 힐끔 내다본다. 자야겠다. 내일은 일요일이지만 출근을 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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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광고인이자 글쟁이인 카피라이터인 정철 선배는 [틈만 나면 딴생각]이라는 저서의 책날개에 '좋은 생각, 맞는 생각만 하려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머리가 굳는다'라고 썼다. 나는 거기에 이렇게 덧붙여보고 싶다. 회사에서 시키는 일만 하다보면 몸 축나고 머리도 비어 결국엔 바보가 되거나 기계로 전락한다고.
30대 초반에 회사를 그만두고 놀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은 다 열심히 일을 할 시기에, 놀면 안 되는 상황에서 나만 놀게 되었으니 당연히 돈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더구나 내게는 학력, 학식, 재능, 배경, 배짱 등 사회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한 상황이고 남아도는 건 오로지 시간 뿐이었다. 그래도 뭔가 재미있는 게 없을까 몇날 며칠 시간을 펑펑 써가며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게 바로 '월조회'라는 단체였다. '월요일 아침에 조조를 보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었는데 명색이 단체이긴 했지만 회원은 달랑 나 하나뿐이었다. 그 시간에 나와 놀아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가 있었다. 남들은 월요병에 시달려가며 주간업무회의를 하고 있을 시간에 혼자 텅 빈 극장에 앉아 조조영화를 보는 맛은 각별했다. 아, 이게 주류 이탈자의 쾌감이구나. 나는 그 새로 취직이 될 때까지 그 소심한 행복을 많이 즐겼다.
월조회에서 한 번 깨소금맛을 경험한 나는 틈만 나면 '쓸 데 없는 짓'을 구상하는 편이다. 어느날은 아내와 옆집 총각 이렇게 셋이서 밥을 먹으며 '수요미식회'처럼 우리도 날을 정해서 뭘 먹으러 다녀보면 어떨까? 라는 얘기를 하다가 즉흥적으로 '토요식충단'을 만들기도 했다. 이름은 내가 제안을 했는데 자칫 '벌레 충 자'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먹을 것에 충성한다는 뜻의 '토요食忠團'을 병기하기로 했다. 토요식충단은 미식가인 옆집 총각의 취재력과 출판 기획자인 아내의 추진력 덕분에 정식 회원도 모집하고 페이스북에 페이지를 개설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여전히 토요일에 성북동 삼총사가 식당을 찾아다니는 일이 주업무지만 두 달에 한 번씩은 회원들을 불러모아 맛있는 식당을 소개하고 함께 즐기는 정기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나만큼이나 쓸 데 없는 일을 좋아하는 아내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아내는 아침밥을 먹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하지 못하는 남편 덕에 매일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 수고를 떠안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식탁 사진을 찍어 올리는 '매일매일밥상'이라는 페이지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이제는 수많은 구독자들이 우리들의 소박한 아침 밥상 사진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쓸 데 없는 생각이라 여겼던 행위가 사실 아주 쓸 데 없는 생각은 아닌 경우가 많은데 지나고 보니 '매일매일밥상'이 그런 경우였다.
연말에 동네에 있는 커피숍 '성북동 콩집'에 앉아 '올해 읽은 책 베스트5'를 작성하고 있는 나를 보고 아내가 '그러지 말고 사람들과 같이 모여서 소설을 읽는 모임을 한 번 만들어 보면 어떠냐'고 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라 생각해서 만들어진 게 '독하다 토요일'이다. 우리가 만든 이 모임은 이름만 독할 뿐 사실은 매우 널널한 독서클럽이다. 다른 그룹처럼 책을 전투적으로 읽고 와서 열띤 토론을 벌이거나 하는 것은 우리 성격에 맞지도 않으니 자제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인 회원들은 내가 미리 공지한 6권 중 '이달의 책'을 들고와 모임 장소에서 한 시간 정도 묵독한 뒤 각자 책에 대한 소감을 얘기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사실 처음엔 한 시간 뒤 각자 '세 줄 평'을 작성해 읽어보기로 했었으나 이마저도 시들해져서 요즘은 나만 하고 있다). 우선 육 개월만 시험삼아 모임을 가져보기로 하고 내가 6권의 한국 소설을 선정했는데 생각보다 회원들도 빨리 모였고 다들 우리나라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쏠쏠하다고 말해줘서 나름 보람을 느끼고 있다. 오늘이 여섯 번째 모임이니 빨리 이 글을 마감하고 대학로 '책책'으로 달려가야겠다.
생각해보면 위에 열거한 짓거리들 중 돈이 되는 모임은 하나도 없다. 요즘 인스타그램에 쓰고 있는 '공처가의 캘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떠랴. 언제나 그랬듯이 인생에서 돈보다 중요한 게 바로 이런 '즐거움' 아니던가. 그러니 쓸 데 없는 짓을 두려워하지 말자. 장담하건데 가끔 딴생각을 할수록 인생은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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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준의 세줄평 : SF이면서도 서사가 능숙한 소설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안녕, 인공존재!]는 반짝이는 아이디어 뒤에 존재론적 성찰까지 깔려 있어서 읽는 맛이 남다른 단편들이었다. [팔란티어] 이후 종적이 묘연한 김영민과 달리 배명훈은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활동을 계속 해줄 것으로 묻는다.
김하늬 씨가 카톡으로 보내 온 평들 : 헉... 보낸다는게 시간을 못봤습니다ㅠㅜ 뒤풀이중이실거 같지만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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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그녀는 그들의 정원에서 키운 당근 하나를 들어 보인다. 이상하게 생긴 돌연변이로, 두 개의 인간 몸이 서로 얽혀 성교 중인 모습과 닮았다. 이걸 해나에게 보여줘. 그녀가 말한다. 우리의 카마수트라 당근이야. 특별할 때 쓰려고 따로 두었던 거란다. 차에서 다시 혼자가 된 비트는 그 외설적인 것을 손에 들자 두 여인의 즐거움이 귓가에 울리는 듯해 기쁘다.
죽어가는 엄마 해나를 간호하던 주인공 비트가 마을 자연식품가게에 들러 당근을 선물로 받던 이 장면을 아침에 전철에서 읽으며 슬며시 웃었다. 로런 그로프의 <아프카디아>를 조금씩 읽고 있다. [운명과 분노]만큼 재밌지는 않지만 이런 대목들은 정말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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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모든 상투적인 말이 다 비장한 말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늘 염원하면서도 내내 이루어지지 않았던 희망을 그 상투적인 말이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끌어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이 상투적인 말이 되도록 놓아둔 것은 늘 보던 것 외에 다른 것을 보려 하지 않는, 다른 것을 볼까봐 오히려 겁을 먹는 우리들의 나태함일 것이 분명하다. 말은 제 힘을 다해 우리를 응원하는데, 우리가 먼저 포기해버린 탓일 것이 분명하다. 상투적인 말들도 처음에는 그 날카로운 힘이 우리의 오장에 파고들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말이 나를 넘어뜨리고 내 안일을 뒤흔들 것이 두려워 우리가 철갑을 입을 때 말도 상투성의 철갑을 입기 시작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인들이 말의 껍질을 두들겨 그 안에서 비장한 핵심을 뽑아내려고 사시사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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