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화장실에 가서 [해피 투데이]라는 잡지를 읽다가 들고나와 계속 읽었다. 이 책엔 매달 아내 윤혜자가 쓰는 칼럼 ‘방방곡곡 탐식유랑단’이 실리기 때문이었다. 이번달엔 마천중앙시장의 두부 전문점 <내일도두부>와 시장 입구에 있는 호떡 포장마차에 대한 글이었다. 나도 두 군데 다 같이 갔던 곳인데 특히 그 호떡집은 맛이나 역사에 있어서도 보물 같은 곳이었다(TV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에 나온 사람들 중에 그 집 아저씨에게서 호떡을 배운 분들이 여럿 있을 정도라고 한다).

아내의 글 말미에 프로필이 실리는데 내 얘기도 조금 섞여 있어서 읽을 때마다 웃긴다.

​필자소개 윤혜자 :
책을 비롯한 다양한 컨텐츠를 엮는 기획자로 일했다. 나이 들어 결혼, 아침을 안 먹으면 하루 일과를 시작하지 못하는 남편과 살며, 그리하여 즐거이 매일 아침밥을 지어 상을 차린다. 손수 밥을 지어먹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고 음식 공부를 하고 있다. 남편과 함께 동네 술집과 밥집을 어슬렁거리며 맛있고 즐거운 음식점을 만나면 여기저기 소문내는 일을 즐거워 한다.


같은 책에 실린 도올 김용옥 선생의 글 ‘도올곤지’를 읽으며 깔깔깔 웃었다. 자신이 제주도에서 한 강의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했으며 <월간중앙>에 실으려 하는 글도 크게 환영 받을 것이다, 라는 식의 특유의 잘난척이 넘쳐남은 물론이고 월간중앙 한기홍 기자가 ‘선생님 글이 너무 래디컬에서' 실을 수가 없다라고 하자 ‘내가 먼저 쓰겠다고 한 글도 아니고, 자기들이 부탁해놓고 못 싣겠다고 하면, 내 피땀은 어디로 가나?그까짓 고료나 시간낭비의 문제는 용서할 수도 있지만, 문재인정부의 새시대에 나의 논리가 언론의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서글픔은 나의 존재의 시대적 기능이나 사명에 관해 근원적인 회의감을 불러 일으켰다’라고 투덜거리는 대목의 솔직함이 너무 너무 천진하고 귀엽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투덜거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르던 닭 두 마리가 죽자 먹지 않고 향나무 밑에 묻어 준 얘기도 나오고 추석 연휴에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소설가 김훈에게 전화를 건 얘기도 나온다. 물론 김훈에게 맨 처음 소설 쓰기를 권한 사람이 자기였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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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뭘 배우러 다니는 걸 좋아한다. 강연도 많이 듣고 음식이나 꽃을 배우러 다니기도 한다. 사실은 나도 아내처럼 뭔가 배우러 다니고 싶지만 회사 일만으로도 벅차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할 뿐이다. 세상에 시험 안 보는 공부만큼 재미 있는 건 없다. 인생을 헤아려 보아도 주로 돈 안 되는 일을 할 때가 더 재미 있었다. 일단 누가 시켜서, 또는 먹고 사느라 할 수 없이 하는 일과 내 자유의지로 하는 일은 모든 면에서 천지차이다. 매일 일에 치여 사는 샐러리맨들에겐 그래서 휴일이 필요하고 사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질 때만 비로소 커피 한 잔이나 럼주 한 잔도 더 맛있게 음미할 수 있을 것이었고, 담배 연기와 무더운 날 바다에서 하는 수영, 토요일마다 보는 영화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메렝게 음악, 이 모든 게 육체와 정신에 더 좋은 느낌을 선사할 것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 [염소의 축제]를 읽다가 눈에 번쩍 뜨여 잠시 멈추고 밑줄을 그으며 이 대목을 되새겼다. 이승우의 [가시나무 그늘]을 읽을 때도 느꼈던 ‘자유의지’의 소중함에 대한 한 구절이다. 오늘 같은 토요일 한가하게 한 잔 하는 차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소중한 행복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은 [새엄마 찬양] 이후 처음인데 노벨문학상을 탔던 만큼 대단한 필력과 통찰력에 유머까지 겸비하고 있다. 이런 우수한 작가가 말년에 극우파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고 가슴 아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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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간서치의 책 이야기’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있다. 책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나도 한때 이 모임의 회원이었으나 그들의 엄청난 독서량과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에 질려 활동은 안 하고 가끔 눈팅만 하고 지내는 신세다. 간서치는 옛날 조선시대에 살았던 이덕무처럼 책만 읽는 바보를 이르는 말이라고 들었다. 아무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이런 바보 소리를 들으면서도 틈만 나면 책속에 파묻혀 지내기를 꿈꾼다.

여기 세계 최고의 간서치라고 소문난 할아버지가 있다. 알베르토 망구엘이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다. 일찌기 서점 점원으로 일할 때 눈이 먼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는 전설적인 이력을 가지고 있는 이 작가는 [은유가 된 독자]라는 이번 저작에서도 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쏟아내고 있다.

‘은유가 된 독자’라는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의 중요한 주제 또는 아젠다는 독서에 대한 온갖 메타포, 즉 은유들이다. 흔히들 책은 앉아서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고 여행은 걸어 다니면서 읽는 책이라 했다. 여기에 인생이 끼어든다. 인생은 여행이고 독서는 인생을 경험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삼담논법은 이렇게 해서 인생, 여행, 독서로 이루어진 ‘은유 삼종세트’로 완성된다.


망구엘은 기원전 7세기에 쓰여진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구약성서, 아우구스티누스, 몽테뉴, 셰익스피어, 돈키호테, 플로베르, 톨스토이, 그리고 21세기의 전자책을 읽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책을 쓰고 읽는다는 것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진정한 어른들만 낼 수 있는 경험과 지혜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물론 내가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었을 리가 만무하다. 구약성서나 아우구스티누스도 읽지 못했고 보바리 부인은 어렸을 때 삼중당문고로 겨우 읽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오히려 플로베르가 법정에서 ‘마담 보바리는 바로 나다!’라고 외쳤다는 가십이 더 생생하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독서의 대가가 이끄는 대로 한 발 한 발 따라 걸어가기만 해도 햄릿의 고뇌와 돈키호테의 야망, 안나 카레니나의 주체성, 오르한 파묵의 통찰 등을 차례대로 만날 수 있고 결국엔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로 분류되는 독자의 지위를 삼위일체로 한꺼번에 다 경험할 수 있는데.


나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가 단테의 [신곡] 첫 문장에서 따왔다는 걸 알베르토 망구엘의 이 책을 읽으며 처음 깨달았다. 페터 한트케가 독일 사람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극작가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뭐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다만 프롤로그에서 '우리 인간은 세상이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간주하는 유일한 종’이라 말하던 작가는 여행자가 됐든, 상아탑의 거주자든 아니면 책벌레든 우리는 모두 ‘독서하는 피조물’이며 단어를 섭취하고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어가 존재의 수단임을 잘 알고 있다는 결론을 전해준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우며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행위라는 소리다. 스마트폰에 둘러싸인 채 자신을 의심하면서도 꾸역꾸역 전철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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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와 한 여자가 뒤늦게 만나
살림을 합쳤다.

각자의 애인이나 옛 추억이야
당연히 정리를 했지만
책꽂이에는 아직도
과거의 편린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두 권의 책을 한 권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한 집에 사는 두 사람이
할 일이라 생각했다.

[토지]나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들을
먼저 원하는 사람들에게 한 질씩 주었다.

시시한 추리소설이나
값싼 베스트셀러들은
그냥 버렸다.

그래도 책꽂이엔 이상하게 
책들이 많았다. 

어느날 저녁
거실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각자 가지고 있던 시집들만 모아 보았다.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
정호승의 <새벽편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정호승의 <별들은 따뜻하다>
유하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황지우의 <어느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모두 두 권씩이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당대에 화제가 되었거나
후대까지 스테디 셀러로
사랑을 받았던 시집들.

너무 흔하고 트렌디해서
살짝 민망하기까지 했던,
그러나 전생에 나누어 가졌던
깨진 거울조각처럼

이제 와서야 두 권이
제짝처럼 야하게 몸을 맞댄
그 시절의 공감대.

'2-1=1'

이 간단한 수식이
삶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2013년 9월의 어느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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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가 김용은 대만에서 신문사를 창간하고 평생 그 신문의 주필로 일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평생 독재와 싸우고 잘못된 사회문제에 일침을 가하는 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여기며 살았다. [사조영웅전], [의천도룡기] 등 그가 쓴 무협소설들은 - 세계적으로 히트하고 나중에 그의 문학만을 연구하는 ‘김용학’이라는 장르까지 만들어졌지만 - 어디까지나 신문의 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김용과 비슷한 사람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스웨덴의 스티그 라르손이다.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에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냐 싶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스티그 라르손도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엑스포’라는 언론사를 세우고 극우파나 파시스트, 인종주의자들과 평생 싸운 사람이었다. 항상 적들에게 살해 위협을 느끼며 사느라 여자친구와 결혼도 하지 못하고 삼십 년 동거를 했다고 하는 그가 농담삼아 ‘노후 보장용’으로 구상한 게 ‘밀레니엄 시리즈’라 이름 붙은 사회파 추리소설들이다. 첫 번째 소설’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시작으로 10부작으로 구성되었지만 세 번째 소설까지 원고를 넘기고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만다.


몇 년 전 읽은 첫 번째 소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 이어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를 헌책방에서 구해 읽었다. 전작에서 이미 선보인 밀레니엄의 편집장 미카엘 블름크비스트와 보안업체 조사원인 천재 해커 리스벳 살란데르가 또다시 거친 운명을 헤쳐가며 활약한다. 이번에는 미성년자 성매매에 얽힌 추악한 진실을 파헤친다. 세계적으로 히트하고 스웨덴 인구 중 삼분의 일쯤은 읽은 수퍼 베스트셀러라서 그런지 충격적인 소재 말고도 주인공들의 파격적인 언행과 폭력, 섹스, 이상 성격 등이 양념처럼 골고루 배어있다. 특히 아주 작고 가냘픈 체격에 불 같은 성격과 민첩함, 괴력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공 살란데르는 작가가 좋아하는 '말괄량이 삐삐’가 어른이 되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서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스웨덴에서는 당연히 영화로 만들어졌고 미국에서도 데이빗 핀처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소설과 분위가 좀 다르지만 영화도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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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를 읽고 그 새로운 스타일에 가슴 설레던 스무 살 청춘이 2017년에도 여전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지금이 1990년대라면 도시적 감수성을 흡수하고 싶어서, 라고 간단히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썼던 하루키도 소설을 써온지 40년이 되어간다. 언제까지나 청춘의 아이콘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변함없는 인기는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양 사나이나 [1Q84]에 나오는 두 개의 달처럼 온갖 이상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하루키 월드'의 힘 때문일까. 꼭 그런 것 같지만도 않다. 그렇다면 지금도 여전히 신작이 나오기만 하면 출판사들끼리 선인세를 줘가며 하루키라는 작가를 확보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상실'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원초적 감성 때문 아닐까. 상실은 근대 이후 모든 지구인에게 통하는 보편적 정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처음 하루키 바람을 몰고 온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출판사나 역자가 임의로 바꾼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Norwegian Wood'이라는 비틀즈의 노래 제목보다 훨신 무라카미 하루키를 잘 드러내는 키워드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문장을 대하는 그의 태도다. 그렇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일단 문장의 마술사다.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조용한 서재에 앉아 방금 떠오른 아이디어를 이리저리 공굴리며 어떻게 하면 깔끔한 문장으로 써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다시 쓰고 정돈하는 작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루키는 특히 전문직을 묘사하는 데 능숙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소설엔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이 자주 나온다. '프로페셔널'이라는 단어에 어떤 모럴을 추가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이번엔 화가다. 초상화를 그리는 데 남다른 실력과 통찰을 지닌 화가.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꼬이는 바람에 눈코뜰 새 없이 바쁘던 지난 며칠 간었지만, 그래도 회사와 집을 오가는 전철 안에서, 또 휴일 아침 등을 이용해 [기사단장 죽이기]를 다 읽었다. 이번 주인공은 화가인데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따로 있지만 결혼을 한 뒤부터는 생계를 위해 꿈을 접어두고 초상화를 '주문 제작'하는 서른다섯 살의 남자다(하루키의 소설에선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얘기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일단 주인공들은 부자는 아니지만 하나 같이 마음만 먹으면 밥 벌어 먹고 살기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을 정도의 능력자들이다).

어느날 아내 유즈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고 있음을 알리며 헤어지자는 일방적인 통보를 한다. 그 동안 얘기도 안 하고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한 건 무척 미안하게 생각한다면서. 여기서 하루키의 녹슬지 않은 문장이 빛난다.

그녀의 통보를 듣고 내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비가 얼마나 오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조용하고 잔잔한 바다였다. 그러면서도 몸에 은근하게 스며드는 냉기를 몰고 오는 비였다. 그 냉기는 봄이 아직 멀리 있음을 알려주었다. 빗줄기 너머 흐릿하게 오렌지색 도쿄타워가 보였다. 하늘에는 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다들 어느 지붕 밑에서 얌전히 비를 피하고 있으니라.
"이유는 묻지 말아줄래?" 그녀가 말했다.

고향에 있는 애인에게서 헤어지자는 편지를 받고 연필을 몇 자루 깎은 뒤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가서 '여, 많이 밝아졌네?!'라는 소리를 들었던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주인공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느닷없긴 하지만 하루키 소설에서 이미 익숙한 코드다. 누군가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죽거나 하는 상황. 그러면 주인공은 주변을 정리하고 먼 여행을 떠난다. 이번에도 주인공은 자신의 집을 나와서 '북쪽'으로 기약없는 여행을 떠난다. 이유는 그저 북쪽으로 가야할 것만 같은 느낌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와 자신만의 아지트를 마련한다. 요양원에 가 있는 아마다 도모히코 - 대학 친구의 아버지이자 원로 화가 - 의 작업실 겸 별장이다.

마침 시내 문화센터에서 그림 지도 아르바이트를 맡아 그럭저럭 생활은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추상화 작업에 몰두하면 된다. 그러나 소설 주인공의 일상이 이리 평화롭게 흘러갈 리가 있나. 어느날 머리가 하얗게 센 멘시키라는 묘한 남자가 찾아와 거액의 작품료를 제안하며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한다. 거절하려던 주인공은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와 닮은 멘시키라는 남자에게 묘한 흥미를 느껴 그 일을 수락한다. 새로운 사건의 시작이다.

보통 모델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는 일반 화가와 달리 그는 모델과 긴 면담을 하고 스냅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혼자서 작업을 한다. 책에는 그 과정과 이유가 놀랍도록 논리적으로 그려져 있다. [댄스 댄스 댄스]에서 주인공이 글 쓰는 것을 '눈 치우기'에 비유했듯이 하루키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마샬아츠 하는 걸 운전이나 레고 쌓기처럼 단계적으로 그려내는 걸 좋아한다. 또한 초상화 그리기의 디테일한 묘사는 하루키의 글쓰기 과정을 묘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특히 그가 '방울소리' 때문에 뒷뜰에서 이상한 구덩이를 발견한 후 그 것을 그리고 싶어하는 장면은 이 소설가가 어떤 이야기를 쓸까 결정하는 계기나 과정도 이렇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그럴 듯하다.

왜 갑자기 그런 그림을 그릴 생각이 들었는지 의미나 목적을 밝혀내기는 불기능했다. 다만 어느 순간, 어떻게든 이 <잡목림 속의 구덩이>를 그리고 싶어졌다.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무언가-어떤 풍경, 물체, 인물-가 지극히 순수하게, 매우 심플하게 마음을 사로잡고, 나는 붓을 들어 그것을 캔버스에 그려나간다. 이렇다 할 의마가 없을뿐더러 목적도 없다. 단순한 변덕 같은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단순한 변덕'이 아니다. 무언가가 내게 그림을 그리라고 요구했다. 매우 강렬하게, 그 요구가 나를 움직여 그림을 시작하게 하고, 내 등을 떠밀어 단기간에 작품을 완성시켰다. 어쩌면 그 구덩이 자체가 의지를 지니고 나를 움직여 제 모습을 그리게 했는지도 모른다-어떤 의도를 품고서, 마치 멘시키가 (아마도) 어떤 의도를 품고 내게 자기 초상을 그리게 한 것처럼.


소설에는 사건이 존재하지만 사건만큼이나 중요한 게 배경이요 맥락이다. 하루키는 이 배경과 맥락 구축에 매우 성실하다. 그의 소설이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데, 화가인 주인공의 직업을 상세하게 묘사하거나 아마다 도모히코의 빈 유학시절, 난징대학살 등을 다루는 건 다 '견고한 건축물' 같은 소설을 만들어 내고싶은 창작자로서의 욕망일 것이다. 다만 일본에서는 하루키가 난징대학살을 다룬 것 가지고 호들갑을 떨었다는데, 그렇다고 갑자기 그가 '현실참여작가'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키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장치 소설'이기도 하다. 독립적이고 쿨한 주인공의 이야기가 뻗어가는 길목마다 무수한 장치들이 숨어있는데, 이번에도 '이데아'나 '메타포' 같은 실제로는 말도 안 되는 개념들이 시침 뚝 따고 등장해서 중요한 화두들을 던진다. 그런데도 이 소설에 빨려들어가는 것은 하루키가 구축하는 세속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문화적 코드들 때문이다. 실제로 이 소설에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가 계속 턴테이블 위에서 돌아가고, 돈 지오반니나 일본화에 대한 얘기들이 끊임없이 언급된다. 심지어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 대해 퀴즈를 내기도 한다. 시퀀스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코드들을 이야기 전반에 잘 섞어내는 것이 그를 일류 작가로 만들었으리라. 물론 아직도 잔뜩 미스테리들을 벌려 놓고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의뭉을 떨거나 상상만으로 헤어진 아내를 임신시켰다고 우기기도 하지만.

한편,열세 살 짜리 여자애가 주인공에게 자기 가슴이 작다고 하는 장면은 매우 하루키적이면서도 역설적으로 하루키가 나이 든 사람임을 보여준다. 먼저 '작은 가슴'에 대한 부분. 소녀는 자신의 가슴이 작다며 "남자들은 가슴 큰 여자들을 좋아하잖아요."라고 말한다. 자신의 가슴인데도 남자들부터 생각한다. 다분히 남성중심적이다. 한겨레 기자들이 모여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얘기하는 기사를 읽었는데, 하루키가 작은 가슴을 좋아한다고 거듭 밝히거나 성기 사이즈 얘기를 하는 것 등은 매우 자신이 없어보인다는 얘기가 나왔다. 뭐, 별로 그런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다만 그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것 자체가 매우 하루키스럽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러나 소설이 끝나갈 때까지 소녀의 가슴 얘기를 하는 건 좀 지겨웠다.

그래도 하루키는 하루키다.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오직 나만을 위해 온전히 개인적인 시간을 쓴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리고 아직도 신선함을 읽지 않은 유머감각이 사랑스럽기도 하다. 멘시키가 오믈렛을 만드는 장면 묘사의 눈부심도 탁월하지만 그의 거실에 비싼 꽃병이나 귀한 골동품들이 여기저기 많이 놓여있는 걸 보고 주인공이 '큰 지진이 오지 않아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하게 하는 그를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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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hhan21&logNo=221069131204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이나 방송인 노홍철은 왜 책방을 냈을까. 아내나 친구들이 술을 마시면서 가끔 서로에게 던져보는 질문이다. 그들은 정말 책의 미래를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책을, 또는 책방을 이용해서 자신의 '퍼스널 브랜드'를 높이려는 것일까(물론 그러면서 책도 잘 팔리면 더 좋고).

평범한 사람으로서 좀 더 잘 살거나 행복해지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거의 진리에 가깝다. 책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읽을 시간이 없다는 얘기를 한다. 우리는 먹고 사는 일에, 공부니 취직 준비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긴다. 그리고도 남는 시간이 생기면 TV에, 인터넷에, 모바일에 또 대부분의 시간을 빼앗긴다. 일이나 공부에 치여, 구직이나 스펙쌓기에 지쳐 널부러져 있다가 잠깐 정신이 나면 리모콘을 들어 '효리네 민박' 같은 프로그램을 틀어 건성으로 본다. 건성으로 보다가 효리가 요가를 하는 걸 보고 나도 요가나 배워볼까, 생각한다. 이상순이 다기에 뜨거운 차를 붓는 것을 보고는 나도 차를 시작해 볼까, 생각한다. 실제로 요가학원이 늘어나고 다기나 보이차가 잘 팔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 책이 끼어들 틈은 없다. 가끔 드라마나 <무한도전> 같은 인기 프로그램에 책이 한 권 노출되면 당장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투기 현장의 떳다방보다도 못한 '반짝 상품'일 뿐이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나도 회사 일이 바빠서 지지난 주에 산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출퇴근 시간과 잠자기 직전에 조금씩 읽었는데도 아직 2권 중간이다. 물론 출퇴근 시간에도 기습적으로 울리는 업무전화나 카톡 때문에 온전히 소설에 집중하기는 어렵다. 남들보다 조금은 더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나도 이렇게 책을 읽기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한기호 소장의 칼럼 ' 대한민국에는 서점이 없다. 그러니 출판 경기가 최악일 수밖에 없다' 에서 보는 것처럼 작가들도 책을 팔아 생활할 수 없으니까 강연으로 돈을 번다. 사람들은 '세바시' 같은 강연엔 열광하며 박수를 치지만 그 강사가 얘기하는 책을 사서 읽진 않는다. 그러니 서점이 잘 될 리가 없다. 그리고 어쩌다가 서점에 가도 서점에서 제안하는 매대 위의 책을 사서 읽을 수밖에 없다. 


책의 유통 구조를 고쳐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만, 책도 서점도 상품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말에도 동의하지만, 정말 그런 것이 본질적인 문제일까. 비꿔야 하는 것은 쓸 데 없이 분주하고 걱정만 하며 사는 우리의 삶이 아닐까. 정말 내가 옛날에 다니던 구파발 전철역 앞의 '진양서점'이나 맥 라이언이 책방 주인으로 나오던 <유브 갓 메일> 같은 정겹고 소소한 일상 속의 서점이란 불가능한 것일까. 이렇게 -까, 로 끝나는 의문문만 잔뜩 늘어놓고 끝내는 글을 쓰는 건 정말 싫지만 그렇다고 내가 뭐라고 뽀족한 수를 낼 수가 있을까. 아, 그런데 참. 그들은 왜 책방을 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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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분노]라는 소설을 두 번 샀다. 두 번 읽은 게 아니라 두번 구입. 출퇴근길에 전철 안에서 짬짬이 읽다가 100페이지쯤 읽었을 때 어디선가 잃어버렸는데 책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책값이 16,500원이니까 나는 결국 33,000원짜리 이야기를 읽은 셈이다. 그래서 어땠냐구? 다시 사서 읽길 잘 한 것 같다. 아마도 올해가 다 가도록 나에겐 이보다 더 ‘올해의 책’은 없을 것 같으니까. 

로런 그로프는 무시무시한 작가다. 안 그렇게 생겼는데 글은 독하고 능숙하고 교활하다. 섹스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마음에 딱 든다. 그리고 필력이 엄청나다. 글을 잘 쓴다는 건 시나리오 작가처럼 사건을 잘 짠다는 것과는 좀 다른 얘기다. 사건보다 중요한 건 그 모티브를 어떤 태도와 문체로 다루느냐인데, 뛰어난 작가일수록 가장 고귀해질 수도 가장 저속해질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던 것처럼. 로런 그로프가 그렇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이 책엔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 얘기도 여기저기 끊임없이 인용된다. 남자 주인공 로토가 셰익스피어 연극을 주로 하는 배우였고 나중엔 잘 나가는 희곡작가가 되기 때문이다. 스물두 살에 결혼하는 그의 아내 마틸드를 만난 것도 그가 햄릿 역을 했던 날의 일이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호의와 사랑을 받았고 원하기만 하면 모든 여자와 잘 수 있었던 로토는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던 신비한 여신 같은 마틸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청혼하고 순식간에 결혼을 한다. 소위 ‘킹카’들의 갑작스러운 결합에 어이 없어하던 친구들은(여자라면 대부분 로토와 섹스를 했던-쓰리섬을 했던 여자들도 있다)신혼파티에 와서 그들의 결혼이 곧 깨질 것을 예상하며 "뭐, 첫 번째 결혼이니까”라고 배배꼬인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런 바람과는 달리 두 사람은 로토가 죽기까지 무려 23년간 다른 사람을 넘보는 일 없이 결혼생활을 영위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일찍 결혼한 남녀가 헤어지지도 않고 이십 년 넘게 함께 사는 얘기가 어떻게 흥미로운 소설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로런 그로프라는 작가의 힘이 빛난다. 이 소설은 로토와 마틸드의 격하고 찬란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 뒤엔 콜리와 에이리얼이 라는 음습한 인물들이 숨어 있는 교활하고 잔인한 드라마다.  이 책이 심리소설이었다면 왜 제목이 ‘운명과 분노’인지, 에이리얼과 마틜드의 비밀 거래는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원인과 결과가 딱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이 책이 추리소설이었다면 마틸드가 왜 스물여섯 살에 낙태를 하고 스물여덟 살엔 불임수술을 하는 배신을 저질렀는지 밝혀내려 애쓸 것이다. 아니, 그보다 어렸을 때 정말 마틸드가 남동생을 계단에서 밀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게 사실인지부터 밝혀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문학책이다. 그것도 강력한 서사를 지닌 입체적인 문학 작품. 마침 이 책을 쓸 때 작가가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비극을 탐닉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현대적인 결혼생활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신화적인 구성과 고전적인 비극미를 함께 갖추게 되었다.

백만장자의 아들로 태어나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서 단 한 푼의 돈도 물려받지 못했지만 매력적인 외모와 비상한 두뇌를 소유했던 한 사내와 어릴 적 불운했던 과거를 분노라는 동력으로 맞서려 했던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이 연상되는, 마치 세상 일을 모두 알고있는 듯한 로런 그로프의 우아하고 오만한 문체와 폭발적인 서사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인생사와 인간의 단면을 활자의 힘만으로 능숙하고 위엄있게 그려낸다.   

그동안 누가 흥미진진하면서도 문학성까지 갖춘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가네시로 가즈키의 [영화처럼],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또는 [인생],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조지수의 [나스타샤]등을 추천했는데 이제 한 권을 더 추천해야겠다. 바로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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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북악산 등산길에 오르면서 측근과 경호원들에게 조선의 도읍을 정하기까지 태조 이성계와 무학도사에게 있었던 일화를 해설사처럼 설명해주는 장면은 드라마 [웨스트윙]에서 걸핏하면 미국의 국립공원에 대해 강의하는 걸 즐기던 대통령 마틴 쉰를 떠올리게 한다. 아론 소킨이 각본을 쓴 이 드라마의 대통령도 노무현처럼 민주당 출신이있다. 차이가 있다면 노무현이 마틴 쉰은 경제학자 출신이지만 노무현은 인권변호사였다는 점 정도일까. 그보다 더 중요한 차별 포인트는 아무래도 노무현이 우리나라 최초의 고졸 대통령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들 중엔  아직도 그의 학력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경우가 있지만 정작 그는 그 사실을 부끄러워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편이었다. 학력은 고졸이었지만 그는 뛰어난 변호사였고 영어도 뛰어나게 잘했으며 그 누구보다도 아는 것이 많은 지식인이라는 프라이드가 강했으니까.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이런 유서를 남기고 불현듯 세상을 버린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총리가 읽을 추도사를 써야하는 연설기획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건 아마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그래서였을까. “다시는 정치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라는 눈물 나는추도사를 썼던 '노무현의 筆士’ 윤태영이 노 전 대통령과의 이십 년 인연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소설 [오래된 생각]을 읽으면서 연설 잘 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각이 많이 났다. 그의 시원하면서도 조리 있고 품격 넘치는 연설을 다시 듣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유투브로 노무현의 연설을 찾아 들으면 눈물이 찔끔 날 때가 많다. 그래서 아내는 친구 양희 작가가 각본을 쓴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어떻게 봐야하나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눈물이 날까봐. 그저 대통령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이 지경이니 거의 24시간을 곁에서 붙어지내던 사람의 심정은 어떠할까.

회고록일수도 있었던 글이 소설로 탄생한 것은 열린정부 시절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작가의 야심 때문이었으리라. 작가 윤태영은 운동권 경력 때문에 취직이 요원해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시절부터 시작한 글쓰기가 평생 직업이 된 '프로페셔널 라이터'다. 노무현 캠프 일을 맡으면서 방송원고와 홍보물들을 주로 썼고 노무현의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의 집필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에는 그의 연설기획 비서관이 되어 가장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이 하는 모든 말을 기록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당연히 노무현 정권의 속사정에 대해 그 누구보다 밝을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노무현 정부가 몰락의 길을 걷던 2006년부터 시작된다. 김대중에 이어 민주정부의 길을 이어갔던 참여정부는 한미FTA와 부동산 가격 폭등, 북한 핵실험에 대한 반응, 작전통제권 환수문제, 대연정 제의 등등으로 인해 계속 하락세의 길을 걸어야 했다. 어느 정권이나 레임덕은 있었지만 노무현 정부는 처음의 그 기대만큼이나 실망감도 커서 그 댓가도 더 가혹했던 것이다. 게다가 노무현은 스스로 권력을 독점하지 않으려 제도적 노력을 기울인 최초의 집권자였다. 집권 초기 벌였던 ‘평검사들과의 대화’는 지금 보면 답답할 정도로 순진한 시도였고 결국 그는 검찰에 의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신세가 된다. 

소설이 사실을 바탕으로 한 팩션이라고 하더라도 수기나 백서와 다른 것은 가상의 인물들을 설정해 사건을 보다 감성적이고 입체적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물론 글쓴 이 윤태영도 진익훈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여릴 적 친구이자 훗날 야당 대변인으로 대립각을 세우게 되는 인수, 그리고 그의 첫사람이었으나 결국 인수와 결혼하게 되는 희연 등이 등장해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권력이란 손잡이가 없는 칼과도 같은 것이었다. 쥐고 휘두를 수는 있지만 그러는 동안 자기 손에서도 피가 흐를 것을 감당해야 했다. 어설프게 사용했다가 자신만 다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조심해야 하는 것이 권력이었다. 

윤태영이 소설 속에서 진익훈의 입을 빌어 권력의 양면을 묘사한 문장이다. 일단 이 소설은 그의 안정되고 의미 있는 문장들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소설가로서 또 문장가로서 그가 보여줄 수 많은 가능성에 대해 헤아려 본다. 노무현과 가장 가까웠던 필사 윤태영은 문재인 대통령의 수락연설 중 백미로 꼽히는 이런 문장을 쓴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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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한의원에 들러 침을 맞고 회사 가기 전에 강남교보에 들러 책을 한 권 샀다. 윤태영의 장편소설 [오래된 생각]이다. 참여정부 청와대 대변인과 제1부속실장을 지내며  '노무현의 필사(筆士)'라 불릴 정도록 가까이에서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을 읽고 이를 글과 말로 옮겼던 이가 쓴 소설이다. 주인공은 대통령연설기획관인 진익훈이고 대통령은 임진혁이지만 상황이나 말투, 태도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빼다박은 걸 보면 이건 일종의 팩션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요즘 베스트셀러가 된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를 살까 하다가 문재인 정부 출범을 맞아 노무현 시절을 좀 입체적으로 느껴보고 싶어져서 이 책으로 골랐다. 제목은 노무현의 유서에 쓰여 있던 바로 그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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