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재개봉한 [프로리다 프로젝트]를 명동CGV 씨네라이브러리에서 관람했다. 사실 이렇게 슬픈 영화인지는 모르고 봤다. 위악을 떨던 꼬마애 무니가 마지막에 친구 앞에서 울 때는 나도 눈물이 나서 혼났다. 미혼모 핼리와 그의 딸 무니, 그러고 모텔 지배인 바비 역을 맡았던 윌리엄 데포까지 모두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니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예전에 디즈니랜드를 건설할 때 사업명이었고 지금은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사업의 이름이라고도 한다.

영화 마지막에 가족과 헤어지는 장면은 올해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떤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 다 '사는 건 왜 이렇게 힘이 들까'라며 한숨을 내쉬게 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심란한 영화를 굳이 극장에 와서 돈까지 내고 보는걸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했던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아마 이런 거 아닐까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더니 하늘은 파랗고 햇볕 쨍쨍한 목요일 오후가 거짓말처럼 펼쳐져 있었다. 



Posted by 망망디
,


어제 이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를 보고 재밌으니 한 번 보시라고만 했는데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러고 끝나면 안 될 것 같아 매우 간단하게라도 리뷰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니까 이건 영화를 한 명이라도 더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쓰는 '낚시성' 글입니다. 

왜 이렇게 흥분하냐 하면 이 영화는 우리가 예고편을 보면서 가졌던 나쁜 기대들을 배반하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나쁜 기대냐. 제목에서 풍기는 아마추어 같은 느낌, 성의만 넘치는 독립영화일 것 같은 느낌, 카메라 한 대 가지고 조지는 어설픈 일인칭 시점일 것 같은 느낌. 네, 맞습니다. 이 영화는 일본 돈 300만 엔의 터무니 없는 제작비로 완성된 인디영화 맞습니다. 그러나 100석 규모의 극장에서 상영을 시작했지만 점점 입소문이 커져 결국 각종 국제영화대회의 상들을 휩쓴 최고의 코미디 영화입니다.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전반부는 2차세계대전 때 군수공장으로 쓰였던 건물 안에서 좀비 영화를 찍던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이 진짜 좀비를 만나 고생하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37분의 원컷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까지 올라가고 나면 이 영화를 찍기 전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발단은 방송국에서 좀비물을 찍는 영화인들의 고군분투를 생방송으로, 그것도 원컷으로 보여준다는 기획안입니다. 기획안부터 워낙 황당하다보니 아무도 안 할 것 같아 뭐든지 대충대충 찍는 것으로 우명한 어느 퇴물 감독에게 기회가 돌아간 거죠. 

처음엔 말도 안 되는 기획이라며 이 감독 역시 거절을 하지만 자신처럼 영화 일을 시작한 딸이 이 좀비 영화에 출연하기로 한 아이돌 가수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승락을 합니다. 그러면서 우여곡절 끝에 감독과 배우 출신인 감독의 부인까지 영화에 출연하게 됩니다. 영화를 찍는 장면들이 보여지면서 왜 1부의 장면들이 진지하면서도 약간 어설픈 구석들이 있었는지 밝혀지는데, 이 복선과 전복의 아이디어들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생방송 좀비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태프들의 야단법석 코미디를 그린 영화.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다만 이 영화엔 그런 웃음 포인트 말고도 찡한 감동과 페이소스까지 있는 멋진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뒤늦게 전 세계의 극찬을 받고 다시 개봉이 된 것이겠죠. 우리나라에서도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화제가 되었다가 다시 개봉이 된 케이스랍니다. 상영하는 극장이 많지 않으니 성의를 갖고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안 보면 손해인 영화니까요. 맨 마지막에 지미집이 망가져 고공촬영을 못하게 되었을 때 이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호신술에 대한 복선도...음, 입이 간지러워 못견디겠습니다. 그냥 , 얼른 보세요. 





Posted by 망망디
,




평범한 인간을 살인병기로까지 만들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복수'라는 단어만큼 강력한 성취동기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전설은 물론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가 앞다투어 복수극이라는 테마를 즐겨 사용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의 부모 형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복수에 평생을 바치는 것도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연극 <조씨고아 - 복수의 씨앗>은 그런 의문을 테마로 만들어진 연극이다.

중국 진나라때 조정의 충신인 조순은 정적이자 간신인 도안고의 계략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자신은 물론 일가 300명이 멸족되는 대재앙을 겪는다. 조순에게 사랑 받았던 시골 의원 정영은 마흔 다섯 살에 늦게 자식을 하나 얻었는데 낳은지 한 달이 지난 그 자식을 대신 죽게 함으로써(도안고가 바닥에 세 번 패대기를 쳐서 죽었다고 한다)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조씨고아를 살린다. 그리고 간신 도안고 밑으로 들어가 조씨고아를 도안고의 양아들이 되게 한다. 스무 살이 되면 조씨고아에게 복수를 하게 하려는 일념으로.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린다. 그리고 이십 년 후 정영과 조씨고아는 드디어 도안고에게 복수를 하는 데 성공한다. 황석영의 역작 [손님]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가족을 도륙하는 이 비극의 끝엔 무엇이 남을까.

이 연극은 13세기에 살았던 기군상이 사마천의 <사기>에 있던 기록을 토대로 쓴 희곡이 원작이다. 이를 현재 가장 잘 나가는 연출가인 고선웅이 각색해 재작년 처음 무대에 올렸는데 어느새 '명불허전'이라는 평을 들으며 전회매진을 기록하는 작품이 된 것이다. 그제 내가 명동예술극장에 가서 본 [조씨고아 - 복수의 씨앗]은 본토인 중국 베이징 공연을 거쳐 국내에서 세 번째로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이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군신을 위해 초개 같이 목숨을 버리거나 적장으로 들어가 신분을 숨기고 오랜 세월을 견디다가 복수를 감행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인이 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런 설정은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건 개념적으로 따졌을 때 얘기고 실제로 숨 쉬고 밥 먹고 소리 지르며 살아가는 인간군상들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게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연극이 상연되는 지금은 진나라나 원나라 시대와는 가치관이 다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에서도 정영의 아내는 "당신이 한 약속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그런다고 제 자식을 죽여?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라고 남편에게 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영은 조순의 아들이자 부마인 조삭과 공주의 눈물어린 부탁을 저버리지 못한다. 간단치 않은 캐릭터를 앞에 두고 연출가의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이 작품을 21세기에 한국에서 상연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가 선택한 것은 '존재론적 질문과 유희정신의 조화'였던 것 같다. 군신을 위한 복수극이라는 테마를 다루고 있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머코드로 무장하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심각함과 유머가 공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간신인 도안고나 시골 의원 정영은 물론 하물며 복수를 부탁하는 공주의 대사와 몸짓에도 경쾌한 유머가 스며있어서 관객들이 1, 2부로 나뉘어진 150분 동안 여러 번의 감정적 이완을 느끼며 연극을 즐길 수 있다. 이건 훌륭한 각본과 연기가 뒷받침 되어야만 가능한 일인데 이 연극은 그것을 해내고 있다. 극의 중심이자 복잡한 주제의식을 실어나르는 정영 역의 하성광은 그 중에서도 눈이 부신다. 장엄할 때는 장엄하게, 소심할 때는 소심하게 천의무봉의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특히 높은 목소리로 길게 이어지는 그의 탁월한 대사 능력은 놀랍다. 가만히 듣고 있다보면 연극대사가 아니라 랩처럼 리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극에서 누군가 죽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나 부채를 펼치는 묵자라는 캐릭터는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처럼 감초 역할을 적절히 수행한다.

도안고 역을 했던 장두이는 초반에 좀 대사를 불분명하게 처리해 눈쌀을 찌푸리게 했으나 이내 컨디션을 회복하고 극의 중심 역할을 해낸다. 그 밖에도 공손저구 역의 정진각, 조순 역의 유순웅, 정영의 아내 역을 맡은 이지현, 공주 역의 정새별 등도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게 딱 맞는 열연을 펼친다. 대사 처리에서 가장 미숙한 사람은 조씨고아 역을 맡은 이형훈이었는데 이는 맡은 역할이 열혈청춘인 스무 살의 젊은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리 흠이 되진 않았다.

무대는 아주 미니멀하하게 꾸며져 흡사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아내는 예전에 LG아트센터에서 보았던 피터 브룩의 <마술피리>가 떠오른다고 했다). 고선웅은 천정이 높은 명동예술극장의 장점을 살려 소도구들에 줄을 매달아 천정에서 내려오게 하거나 올리는 무대연출을 선보인다. 두 겹으로 되어 있는 커튼은 공간의 폭을 더욱 넓게 만들어 몇 사람만 등장하는데도 당장 옛 중국 대륙과 왕실의 스케일이 느껴지게 만든다.

연극을 보기 전 프로그램을 한 권 샀다. 연출가 인터뷰가 실려 있었는데 인터뷰어 김민정이 원작인 기군상의 [조씨고아]와 고선웅 각색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내가 아무리 뛰고 날아봤자다. [조씨고아 - 복수의 씨앗]은 결국 기군상 작가의 손바닥 안에 있다."라고 하는 대답이 믿음직스러웠다. 그의 말대로 이 작품은 원작의 문제의식을 가볍게 뒤집거나 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에 복수에 성공하고 그 복수극 때문에 죽은 사람들과 정영이 마주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아내를 비롯한 죽은 자들이 그를 아는척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침으로써 복수의 허망함을 전할 뿐이다. 그렇다고 복수를 하지 말았어야 할까. 그건 쉽게 대답할 문제가 아니다. 연극은 즉답을 회피함으로써 우리에게 '살아가는 원동력'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고선웅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릴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아 누구보다 바쁜 일정을 보냈던 스타 연출가다. 5·18광주민주항쟁을 다룬 ‘푸르른 날에’를 연출한 것 때문에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가 문체부 차관이 당시 초연인 이 작품을 보고 리스트 삭제를 부탁했다 해서 유명세를 치룬 적도 있다. 1부를 보고 인터미션에 잠깐 밖으로 나오다가 우리 좌석 맨 뒷열에 앉아 있는 배우 이혜영을 보았다. 얼마 전 이 극장에서 그가 주연했던 [메디아]를 보았기에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좋은 연극을 보았다. 저녁을 먹으며 아내가 십만 원을 내고 국립극단 회원으로 가입하면 할인 혜택도 많고 또 일 년 간 국립극단에서 올리는 작품만 제대로 찾아 보아도 좋은 연극을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길래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Posted by 망망디
,


어제 오후 '독하다 토요일' 첫 시즌을 마감했다. 책을 읽은 회원들과 함께 이차로 '혜화동 칼국수'에 가서 간단하게 식사와 음주를 하고 우리집인 '성북동 소행성'으로 올라와 옥상파티를 단행했다.  미리 준비한 간단한 안주 말고는 다른 음식 없이 캔맥주를 마셨는데 다들 매우 즐거워했고 모든 사람들이 늦은 밤까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맥주를 정말 많이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옆집 총각과 함께 종로에 있는 '이문설농탕'에 가서 해장을 하면서 아내가 영화 [서치]를 예매했다. 

'부재중 전화 세 통만 남기고 사라진 딸을 찾는 아빠의 이야기'라는 것 말고는 아무 정보 없이 보기로 한 영화였다. CGV대학로에 들어서자 아내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11층 투썸플레이스에 가서 커피를 사가지고 오는데 가족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50대 아저씨가 자신의 딸에게 "...그러게. 컴퓨터 화면으로만 보여주는데도 어떻게 저렇게 재미 있게 만들었냐."라고 감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이 짧은 촌평만으로 영화를 잘 골랐다는 것을 직감했다. 

굉장한 영화였다. 푸른 잔디밭과 하늘이 보이는 평범한 데스크톱 배경화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그녀의 SNS를 뒤지기 시작하는 장면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배우가 카메라에 그대로 노출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원칙을 지킨다. 대신 맥북, 페이스타임, TV보도화면, CC-TV, 텀블러, 유투브, 유캐스트 등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각종 매체에 비친 모습이으로 등장하고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나 그들이 찾는 정보도 구글 검색이나 G메일 등을 통해서 전해진다. 언뜻 우리 스스로 가두고 있는 SNS 상황을 비판하려고 이러는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만 영화는 그런 사회적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스릴러의 문법에 충실한 전개를 착착 선보인다. 

보통 이런 컨디션이었다면 잠깐 졸거나 연신 하품을 해대겠지만 평소와 달리 영화에 깊이 빠져 좌석에서 등을 떼고 화면을 향해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 촘촘하고 속도감 있는 영화라 숙취까지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존 조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연기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정확함의 미덕을 가지고 있었고 1991년생인 아니쉬 차간티 감독은  적어도 세 번의 커다란 반전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다. 컴퓨터나 휴대폰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니까 좀 차갑거나 평면적일 수도 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마우스를 조작하는 손의 동작만으로도 주인공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진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폴더 안에 있던 가족들 동영상을 플레이 해보고 지우려다가 망설이거나 예전에 딸이 찍어놓은 유캐스트 화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자신의 딸이지만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아빠의 슬프거나 놀라운 감정들을 섬세하게 전달해준다. 그리고 후반에 밝혀지는 '악역'들도 다 자신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어서 스토리 전개상 전혀 무리가 없게 느껴진다(늘 느끼는 거지만 악역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능력이 뛰어난 극작의 기본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아내가 "와, 이 영화 끝내준다. 올해 본 영화 중 최고다!"라고 외쳤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말 100분 남짓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의 기분 좋은 몰입감이었다. 뒤늦게 숙취가 몰려와서 집에 와서 한잠 자고 일어나 인터넷을 찾아보니 아니쉬 차간디는 직접 제작한 구글 글라스 홍보 영상으로 24시간 만에 100만 뷰를 돌파한 뒤 ‘구글 크리에이티브 랩’에 스카우트된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었다. 한 마디로 천재라는 소리다. 페이스북에 들어가 영화사에서 제공한 예고편 밑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내가 실종되고 부모님이 내 SNS를 뒤져보는 것만으로도 올해의 호러'라고 쓴 글에서 빵터졌는데 그 밑에 친구들을 소환해놓고 '우리 엄마가 우리들 단톡방을 본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라는 둥 '자살하기 전에 트위터, 페북 계정부터 폭파시키고 죽어야 합니다. 물론 자살은 무척 안 좋은 겁니다 여러분' 이라는 둥 각종 두려움에 떠는 댓글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 이거 스토리 상 내 이야기면 아빠가 날 찾는 이유가 죽이러 오는 거로 바뀔 것' 라는 댓글이었다. 우리가 SNS에 얼마나 의존하며 사는지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돈이 별로 안 든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노력만큼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가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 수 많은 페이스북 화면들과 사진, 동영상, 유캐스트 화면 들을 감독과 스태프들이 일일이 다 밤새워 만들었을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자료를 좀 더 찾아보니 '촬영은 13일 간 했는데 후반작업은 2년이 걸렸다'는 제작 에피소드를 읽을 수가 있었다. 천재적 능력에 인내심까지 갖춘 이 젊음이의 앞날이 기대된다. 강추한다. 그런데 [서치]의 원제는 'Searching'이었다. 배급사에서 알아서 한 거겠지만 도대체 서칭보다 서치가 왜 더 나은 건지는 정말 아직도 모르겠다. 





Posted by 망망디
,


아내가 얼마 전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싶다는 얘기를 한 게 기억나서 광복절 낮에 명동CGV 씨네라이브러리에 예약을 하고(내가 하려고 했는데 아내가 포인트가 많다고 자신이 한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가서 그 영화를 봤다. 나는 2008년도에 무슨 국가대표전 축구경기가 있던 날 저녁에 청담CGV에 가서 혼자 이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단발머리 연쇄 살인마 안톤 쉬거. 거의 십 년만에 극장에서 다시 만나는 작품이라 가슴이 설레었다.  

주인이 안톤 쉬거에게 어디서 왔냐고 무심코 물었다가 졸지에 목숨을 걸고 동전 던지기를 하게 되는 수퍼마켓 장면은 대사, 연기, 호흡까지 지금 봐도 역시 끝내준다. 이건 코맥 맥카시의 원작소설이 있지만(소설도 사서 읽었다) 역시 이건 코엔 형제표 영화라고 말하는 게 어울린다. 이백만 달러가 든 돈가방과 연쇄살인마를 먼지바람 횡횡 부는 텍사스로 불러내 인간사 전체를 차갑게 비틀며 조롱하는 이야기를 이 형제만큼 잘 할 사람이 또 있을까. 원래 조엘 코엔은 형 에단 코엔이 쓴 시나리오를 타이핑 해주다가 자기도 얼떨결에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고 겸손을 떨지만 사실은 비트켄슈타인에 대한 논문을 쓴 적이 있을 정도로 철학과 인문학에 조예가 깊다고 한다. 

영화 시작한지 120분쯤 지나면 안톤 쉬거는 교통사고를 당해 기진맥진한 상태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돈가방도 사라지고 화면이 바뀌어 늙은 보안관 토미 리 존스가 아내에게 지난 밤 꿈 얘기를 하다가 영화는 갑자기 맥없이 끝이 난다. 팽팽하던 122분의 러닝타임이 다 지나고 불이 켜졌다. 아, 어려워. 아내가 말했다. 그러게. 나도 어려워. 내가 말했다. 왜 나한테 이 영화 보자고 했어? 하하. 그러게. 근데 되게 재밌지 않아? 도대체 감독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글쎄...인생은 절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니면 인생은 누구든 잘 안 풀리게 되어 있으니 희망을 버려라...? 나, 참. 

적어도 두 가지는 분명한데, 첫 번째는 다시 봐도 무척 재미 있고 동시에 어렵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매력이 철철 넘치는 작품이라는 것. 하비에르 바르뎀처럼 센 캐릭터가 나와 진지하고 섬뜩하게 굴면서도 가끔 뻔뻔하게 웃기는 것까지 잊지 않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얼마 전 [시카리오2]에서 무시무시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던 조슈 브롤린은 또 어떤가. 번번히 살인마를 놓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보안관 토미 리 존스는 또 어떤가. 처음 이 영화를 기획할 때 코엔 형제가 쓴 시나리오를 먼저 읽은 토미 리 존스는 어디서 단발머리를 한 기괴한 사내의 사진을 가져왔다고 한다. 안톤 쉬거의 헤어스타일로는 이게 딱이라고. 사진을 본 하비에르 바르뎀은 '아, 씨발...'이라고 뇌까린 뒤 조용히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희대의 살인마 캐릭터인 안톤 쉬거가 탄생했다. 

누구든 돈가방을 보고 그냥 지나갈 순 없다. 르웰린도 마찬가지였다. 황량한 텍사스 사막 한복판에서 마약상들이 자기들끼리 총질을 하다가 죄다 죽어버린 현장을 발견했다. 다 죽었고 언덕에 있는 시체 옆에 놓인 가방엔 이백만 달러가 들어 있다. 안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르웰린은 생각한다. 어떡하든 이 돈을 가져야겠어. 그러나 안 그러는 게 좋았다. 이 돈가방을 추척하는 사람이 다름아닌 안톤 쉬거니까. 아, 그냥 잘 걸. 괜히 죽어가는 놈 물을 떠다 준다고 거길 간 게 잘못이었어. 아니면 우디 해럴슨의 제안처럼 적당히 나눠 가질걸. 그러나 이 또한 소용 없다.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결과는 별로 달라지진 않았을 테니까. 코엔 형제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러하다. 

커다란 산소통을 들고 다니다가 사람 머리에 공기 구멍을 내서 죽이는 안톤 쉬거. 그도 돈가방을 쫓긴 하지만 돈을 원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죽이기로 정한 사람을 꼭 죽이는 게 더 중요하다. 왜?  어차피 죽거나 죽이는 것 말고는 확실한 게 없으니까. 그런데 돈가방은 어디로 간 걸까.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한데,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그 느리고 무시무시한 편집감에 취해 아무 생각도 못하게 된다. 

재미 있는 이야기 하나 더. 폴 토머스 앤더슨이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찍으러 텍사스에 갔다가 아침에 여관에서 나오는데 마침 코엔 형제가 지나가고 있었다고 한다. 여긴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를 찍는 중이라고 했다나. 그 넓은 텍사스에서 그런 대가들끼리 그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참 신기한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은 그 해에 [데어 윌 비 블러드], [주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걸작들이 다 개봉을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같은 관객들에게 그건 우연을 넘어 행운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Posted by 망망디
,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은 이런저런 사연을 가지고 모여 사는 유사가족 이야기다. 영화에서 구성원들은 할머니의 연금과 가족들의 좀도둑질, 성인업소 알바 등으로 연명하는데 이는 그리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고레에다 감독은 과연 혈연으로 엮이거나 정식 결혼을 통해 공인받은 가족만이 행복을 담보하는가 묻고 있다. 그래서 친부모에게 폭행을 당하던 유리를 데려다 키운 사람들은 유괴범이 되고 정말 마음으로 아꼈던 할머니가 죽자 신고하지 않고 집 안에 파묻었다는 이유만으로 유기죄를 받게 되는 걸 냉정하게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는 각본이나 연출도 좋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연기력을 선보이는 배우들을 보는 맛이 각별하다. 그의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키키 키린이나 릴리 프랭키는 물론이고 [백엔의 사랑]으로 일본 열도를 들었다놨던 명배우 안도 사쿠라의 연기가 그야말로 빛을 발한다.


일요일 조조로 영화를 보고 나왔다. 어린 여동생 유리를 데리고 물건을 훔치던 소년 쇼타에게 '여동생에겐 시키지 마'라며 가게의 물건을 그냥 내주던 문방구 할아버지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피가 섞이든 아니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려는 태도는 결국 이런 '어른스러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작품은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도 그렇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중 바로 전 작품인 [세번째 살인]이 유일하게 싫었는데 이 영화는 다시 좋았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Posted by 망망디
,


뒤늦게 IP-TV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았다. 제목부터가 멋지다. 워낙 좋다는 소문을 많이 들어서 진작부터 보고싶기는 했지만 바빠서 극장에서는 놓치고 말았다.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여름을 보는 것만을도 좋은데다가('관객들으르 햇살에 취하게 만들자' 라는 게 감독의 의도였다고 한다) 주연을 맡은 티모시 샬라메와 아미 해머의 매력과 연기도 매우 뛰어나다. 나는 퀴어영화는 슬퍼서 좀 망설이는 편이다. 토드 헤인즈의 [캐롤] 때도 느꼈는데 동성이라서 더 애절한 그들의 사랑은 늘 아슬아슬하고 불행의 씨앗을 품고 있다. 다행히 이 영화에서는 어린 엘리오의 부모가 올리버와의 사랑을 용인하고 위로까지 해주는 편이어서 그나마 견디기가 쉬웠다. 

영화를 보면서 역시 여름은 '청춘'에게 어울리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각적이고 안정된 연출력 덕분에 1983년 이탈리아의 여름 풍경과 과즙 같은 공기의 느낌까지 두 시간 내내 아름답게 펼쳐진다. 어젯밤 과음으로 오전 내내 누워있던 아내가 무슨 영화 보냐고 묻길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고 했더니 그런 걸 왜 당신 혼자 보냐고 화를 냈다. 영화가 끝나고 검색을 해보니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전에 [아이 엠 러브]를 만들기도 했단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비슷한 정서가 많은 영화다. 더 놀라운 것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시나리오 각색을 했다는 점이다. 이런 청춘영화를 89세 노인이 쓰다니. 대단한 할아버지다. 




Posted by 망망디
,


금요일 저녁에 예약해 놓은 조조영화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를 보러 토요일 아침에 CGV용산아이파크몰에 갔다. 밤늦게 찾아온 후배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으므로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화 볼 시간을 내기 힘드니 숙취에 시달리거나 아침을 굶는 것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매장이 워낙 넓어서 여긴 올 때마다 길을 헤맨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쇼핑몰 사이를 헤매다 겨우 극장을 찾아내 들어가니 내 자리가 있는 열엔 60대 할머니 여섯분이 쫘악 앉아계셨다. 내가 나의 좌석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한 할머니가 "여기 맞아요, 자리"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일어설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다 일행이세요? 그럼 제가 저쪽에 앉을게요, 라고 줄 끝을 가리키자 다들 그게 좋을 것 같다며 맞장구를 쳤다. 자리야 얼마든지 양보해 줄 수 있지만 이 분들은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떤 건지는 알고 오신건가,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고 심각하고 잔인하게 사람 많이 죽어나가는 영화인데. 오래 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를 볼 때 만났던 할머니 두 분이 떠올랐다. 영화 초반 얼치기 킬러가 이발소에서 면도칼로 손님의 목을 그어 살해하는 씬에서 걱정을 했었으나 중반쯤 보니 영화 도중 여유있게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시던 그 할머니. 

아무튼 영화가 시작되었다. 전편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기대감이 컸다. 여전히 묵직하고 사실적인 진행, 강렬한 총격씬, 배우들의 존재감 등 어떤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영화였다. 특히 투탑인 베니치오 델 토로와 조슈 브롤린의 연기와 카리스마는 끝장 그 자체다. 시나리오도 역시 좋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확인해보니 1편 '암살자들의 도시'도 썼던 요즘 정말 잘 나가는 각본가 테일러 셰리던의 작품이었다. 그는 작년 개봉했던 [로스트 인 더스트]의 각본도 썼다고 한다. 배우 출신인데 이렇게 잘 쓰다니 정말 놀랍다. 한 십 년 전 날고 기던 배우 출신 각본가 아론 소킨이 생각났다. 정치드라마 [웨스트 윙] 등 미니시리즈 각본을 많이 썼던 그가 아주 수다스러운 편이었다면 테일러 셰리던은 꼭 필요한 대사만 하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며서 구조를 잘 짜는 작가다. 이번엔 전작에서 신참 여성 요원 케이트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엘밀리 블런트가 빠져서 너무 아쉬웠지만 그건 1편에 비해 그렇다는 얘기지 작품 자체만 놓고 본다면 너무 큰 욕심이라 할 수도 있겠다. 스테파노 솔리마 감독도 뚝심있게 이야기를 잘 이끌어 간다. 그러나 전편의 드니 빌뇌브 감독이 그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총격전 등 액션은 한층 강화되었으니 눈호강, 귀호강이야 더할나위 없이 했지만 절절했던 등장인물들의 사연이 1편에서처럼 새롭지 않으니 너무 매끈하고 정석적으로 흘러간다는 일말의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맨 마지막에 죽을 뻔하다가 살아 돌아온 베니치오 델 토로가 자신의 머리에 총을 쐈던 어린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이 닫히는 장면 이후 뿌듯한 마음으로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다가 옆좌석을 살펴보니 할머니들은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 그 분들은 이 영화에 대해 뭐라 영화평을 남기셨을까. 3편의 제작이 확정되었고 그 작품에선 드니 빌뇌브 감독이 다시 복귀할지도 모르다던데 그 때도 극장에서 나와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까. 모두 젊고 건강한 편이셔서 충분히 시리즈 세 번째 작품도 보러 오실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Posted by 망망디
,

<영화 마녀를 본 날>

일요일 한낮에 햇볕이 내려쬐는 날씨를 무릅쓰고 요즘 흥행작인 <마녀>를 보러 갔다. 사실은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 팬이라 간 것이었다. 제목이 '마녀'라 당연히 느와르 영화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뮤턴트 히어로물이었었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일본 애니메이션을 각색해서 요즘 영화로 다시 만든 느낌이었다. <악마를 보았다>나 <부당거래> 시나리오를 썼던 박훈정인데 도 불구하고 영화 앞부분이 지루하고 유머코드 역시 애매했다. 이 인간이 미쳤나. 여주인공이나 그의 친구 연기도 아쉬웠고 그리고 특히 베테랑 조민수의 연기가 별로였다.

내 옆엔 혼자 온 주제에 영화 상영 내내 커다란 팝콘통을 뒤지며 음료수 두 통을 먹고 마시는 미친놈이 있었다. 괴력을 가진 영화 인물들이 잠깐 스크린을 찢고 나와 그놈을 죽여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으나 오늘따라 스크린과 객석의 구분이 유별하였다. 영화는 별로였고 날씨는 뜨거웠다. 집으로 돌아와 동네 성북동의 단골식당 '디미방'에 가서 닭도리탕을 시키고 다음주 고로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떤 가족]이나 보자고 아내와 합의를 하며 송명섭막걸리와 한라산을 나눠 마셨다.



Posted by 망망디
,

어떤  극장은 장소 이전에 그 자체가 추억이요 고유의 작품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는 '명동 엘칸토예술극장'과 '삼일로 창고극장'이 그런 경우인 것 같다. 아직 감수성이 여물기 전인 십대 후반에 처음 연극을 봤던 곳이 바로 이 극장들이었으니까. 나는 여기서 추송웅이 번역, 연출, 연기 등 거의 모든 것을 도맡아 했던 화제의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보았다. 당연히 초연은 아니었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 앵콜공연을 할 때 보았던 것 같다. 창고극장은 운영 상의 문제로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나중에 '떼아뜨르 추'라는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런 명동의 추억들 말고 더 추가하자면 송승환이 출연했던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을 보았던 광화문의 '마당세실극장'과 운석화 윤소정의 [신의 아그네스]를 보았던 명륜동의 '실험극장' 정도였을까.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을 해석한 작품들이 재개관 기념극으로 새로 올라간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전화 예매를 했다(인터넷으로 예매하려다가 이런저런 난관에 부딪혀 결국전화를 했다). 내가 표값 4만 원을 카드로 계산하겠다고 하자 담장자가 놀라서 물었다. 무슨 통신할인이나 하다못해 배우할인이라도 없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4만 원 을 계산할 테니 예약을 해달다고 했다. 제 값을 안 내고 보는 게 추세이다 보니 이런  해프닝이 생기는 것  같아 씁쓸했다. 

우리가 예매한 작품은 [빨간 피터들] <추ing_낯선 자>라는 작품이었다. 신유정 연출에 하준호 배우가 출연하는 모노드라마였다. 40 여 분 정도의 짧은 작품이라고 했는데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무대와 객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바닥에 놓인 스툴에 관객들이 앉아 있으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 연극은 무대와 객석이 따로 구별되어 있지 않으니 적당한 의자를 골라 앉으시면 되고 조금 있다가 배우가 나와 연기를 하다가 관객 가까이 가더라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라'는 안내멘트였다. 우리는 웃으며 배우를 기다렸다. 연극영화과를 다니는 듯한 젊은 관객들이 많았다. 

불이 꺼지고 어디선가 배우가 나타났다. 바지를 입고 웃통을 벗은 원숭이 분장이었는데 코를 뒤집어 원숭이처럼 꾸미고 가슴과 등에 털을 달아서 언뜻 보면 진짜 원숭이 비슷하기도 했다. 말을 전혀 하지 않고 원숭이처럼 '기긱', '우우~' 소리만 내는 무언극이었다. 잠시 후 천정에서 땅콩이 후두둑 떨어지고 배우는 그 땅콩을 집어던지며 관객들과 이야기거리를 만들어갔다. 우리는 흡사 진짜 원숭이를 본 것처럼 놀라워했고 수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혼자 원숭이 역을 잘 해내고 있는 배우를 보며 감탄했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순간순간 달라지는 연기이기에 배우 관객 모두 빠른 순발력이 필요했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에 서로 신기해 하거나 뿌듯해했다. 순간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혼란스러웠다. 원숭이 역을 하고 있는 배우를 진짜 원숭이로 여겨야 하나, 아니면 원숭이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배우로 봐야 하나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원작자인 카프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고 왕년의 각색자인 추송웅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으며 새롭게 추송웅과 카프카의 작업을 재해석한 연출가 신유정과 배우 하준호가 원하는 바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부가 끝나고 암전 후 웃도리를 차려 입은 하준호가 나와 2부를 시작하면서 극은 새로운 활기를 띄었다. 하준호는 잘 나가지 못하는 연극배우 역할을 했는데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중간중간 관객들을 툭툭 건들면서 자신의 위치와 생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배우로서의 애환이나 개인적인 역사를 드러내던 배우는 돌연 다시 원숭이가 되어 무대 위를 훨훨 날아다니다가 끝을 맺었다. 배우가 끝내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하고 다시 원숭이로 돌아간 것 같아 슬펐다. 

그런데 왜 원숭이일까. 

설마 이 기회에 원숭이의 생각이나 삶을 들여다보자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에 늘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인간과 닮은 '원숭이 메타포'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영화 [혹성탈출]도 마찬가지다. 원숭이의 눈을 통해 들여다 볼때 인간의 모습은 더 적나라하게 보이지 않던가. 그래서 '빨간 피터'라는 원숭이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고 추송웅의 작업을 재해석한 일련의 작품들도 2018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나름의 의의를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40여 분의 짧은 러닝타임이었지만 느낀 바가 많았고 신선한 자극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좋은 연극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연극이라고 해야할지 퍼포먼스라고 해야할지 약간 헷갈리긴 하지만.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