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이나 우주선, A.I 등 신기한 인물이나 사건이 나오지 않는 SF를 쓰는 방법의 예를 들라고 하면 나는 대뜸 테드 창의 단편들을 얘기했을 것이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의 룰들이 이미 그 작품 속 사회에서 당연하게 돌아가고 있다면 신기한 사건이나 장치가 없더라도 소설은 이미 깊이 있는 SF, 또는 그 이상의 고전으로 완성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 대답 목록에 다른 작가와 작품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다.
 
이 장편소설은 1990년대 후반의 영국, 어느 시골 마을에 있던 기숙 학교 '헤일셤'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내는 캐시, 토미, 루스 등의 이야기다. 무대가 되는 학교에는 뭔가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흐르는데 이는 학생들이 모두 다른 인간들에게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 유전자 변형으로 태어난 클론들라는 게 밝혀지면서 풀린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또 섹스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들은 서서히 자신들이 어떤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자각하게 되고 그에 맞춰 순응하게 된다(담배를 피우면 절대로 안 된다고 강조하는 루시 선생님에게서 '네 몸은 네 것이 아니야'라는 암시가 강하게 풍겨온다).

[나를 보내지 마]라는 책의 제목은 주인공 캐시가 자신이 아기를 낳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나서 카세트 테이프로 듣게 된 노래 가사 'Never let me go, baby'에서 'baby'를 '아기'로 생각하고 인형을 흔들었다고 마담에게 오해를 산 장면에서 유래되었다. 아기를 낳지 못하므로 피임을 안 하고 섹스를 해도 된다는 사실에 오히려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런 이야기 자체를 피하게 된다. 특히 중반에 영화배우로 사는 게 꿈이라는 남학생에게 충고하는 에밀리 선생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다. 너희들은 결코 영화배우 같은 건 될 수 없어. 그저 운전사나 간병인 등으로 살아가야 해.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편의 이야기를 담은 미드 <블랙 미러>처럼 이 소설도 바이오 산업이 발달된 근과거나 가상의 세계를 담고 있는데 막상 장기 기증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클론들이 얼마나 인간처럼 살고 싶은지를 알려주는 장면들이 많다. 자신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근원자'를 찾아 몰래 외출을 한다든지 자신들에게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려 '마담'에게 전한다든지 하는 게 그것들이다. 심지어 어떤 커플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 헤일셤 관계자들이 그 진위를 가려주고 사실로 인정되면 두 사람은 몇 년 간 기증을 유예하고 함께 살게 된다는 소문까지 퍼지지만 나중에 그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마치 제인 에어가 그렸던 영국의 시골처럼 조용하고 아날로그적인 배경을 뒷그림으로 깔면서도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클론들의 서글픔을 아주 담담하고 델리케이트하게 묘사한다. 주인공들이 헤일셤을 떠나 코티지에서 만난 선배 중 헤어질 때마다 서로의 팔꿈치를 툭 치며 웃는 커플이 있었는데, 이는 TV 드라마에 나오는 인간들의 행위를 따라한 것이라는 것을 캐시가 알아채고 존재론적 회의에 젖는 식이다. 나중에 캐시는 간병사가 되어 기증자인 토미와 루스를 차례로 돌보게 되는데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그들의 과거에는 분명 성장소설적인 요소와 애증이 교차된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이 함께 들어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얘기를 알고 있음에 틀림 없다. 정말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인간의 입장을 떠나야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그 화두에 닿아 있으니까.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을 탄 직후 그의 오랜 친구인 소설가 살만 루시디는 "이시는 기타도 잘 치고 가사도 잘 써서 밥 딜런 정도는 쉽게 이긴다"라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문학의 대가들끼리 나눌 수 있는 멋진 축하인사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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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PT 준비로 한참 바쁠 인터넷 서점을 통해 살만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 샀다. 그의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라고 쓰면 매우 폼나겠으나, 사실은 하권까지 읽다가 말았다). 바빠서 책을 읽다가 마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런데 도중에 한 번 덮은 책은 다시 읽기가 참 힘들다. 그러면서 새 책에 대한 유혹은 끊임없이 들어온다. 사는 게 다 이렇다. 이 책도 사실은 여기저기서 워낙 제목을 많이 들어봤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읽어보리라 오래 전부터 다짐하고 있던 작품이었다. 


소설 시작 전에 작가가 25년만에 다시 쓴 서문이 나오는데 거기서 작가는 제목을 정할 때 ‘자정의 아이들(Children of Midnight)’은 너무 진부했고 ‘한밤의 아이들(Midnight’s Children)이 좋은 제목이었다,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글이 잘 써졌다고 고백한다. 나로서는 그 두 제목이 어떻게 진부하거나 그렇지 않은지 아직은 잘 모르겠으니 책을 완독한 후에 이유를 찾아봐야겠다. 지금 현재 110페이지를 조금 넘게 읽었다. 권당 500페이지에 가까우니 이제 한 십분의 일을 읽은 셈이다. 


젊은 시절 런던의 ‘오길비 앤 매더’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한 적도 있는 살만 루시디는 매력적인 작가다. 이 책 역시 [무어의 마지막 한숨처럼]처럼 거침없고 끈적끈적 유연한 말과 글의 향연이 ‘전설따라 삼천리’처럼 구비구비 펼쳐진다. 이야기의 시작은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는 날 자정에 태어난 살림 시나이라는 남자애부터다. 일단은 그 이유로 ‘한밤의 아이들’이다. 


그런데 소설의 화자인 살림은 자기 얘기가 아니라 그 옛날 독일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인도로 돌아온 자신의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 때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어릴적부터 아담의 나이 많은 친구이자 수다장이인 뱃사공 타이를 등장시켜 시공간을 가르는 각종 ‘구라’들을 끝도 없이 펼치게 한다. 아담 할아버지가 구멍 뚫린 침대보를 사이에 두고 진찰(다 큰 여자가 남자에게 처녀가 함부로 몸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을 계속 하던 부잣집 처녀와 결혼하게 되는 얘기를 시작으로 영국의 식민과 독립을 향한 인도의 정치상황까지 별의 별 이전 얘기를 붙들고 국을 끓이고 있으니까 옆에서 보고 있던 그의 아내 파드마가 와서 “이런 속도로 가다간 당신 탄생에 대해 얘기하기도 전에 이백 살이 돼버리겠어요.”라고 투덜대기까지 한다. 마치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서 작자인 밀란 쿤데라가 나와 “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제목을 잘못 정했어. 사실은 이 책의 제목으로 썼어야 하는 건데.”라고 투덜대는 것만큼 재미있다. 



이 책을 사기 전에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이라는 노르웨이의 추리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작품인데 구성이 치밀하고 짧고 재빠른 대사들도 멋지다. 해리 홀레라는 연쇄살인 전문형사반장을 등장시켰는데 살인에 대한 묘사와 흥미로운 캐릭터 등등이 빛을 발하고 소설 곳곳에 영화나 음악에 대한 통찰력까지 번뜩인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데니스 호퍼의 [뒤로가는 남과 여]라는 영화에 대해 언급할 때는 너무 반가워 혼자 소리를 지를 지경이었다. 이 소설의 작가인 요네스 뵈는 노르웨이의 국민작가이자 뮤지션이고 저널리스트이며 경제학자란다. 도대체 잘난 놈들이 너무 많아서 살 수가 없다. 어쨌든 구정 시즌을 이용해 이 책에 대한 리뷰도 좀 써봐야겠다. 그러나 일단 살만 루시디의 책이 먼저다. 술과 TV, 잠, 영화 등등 여기저기 ‘치즈 인 더 트랩’처럼 유혹이 널려있는 연휴다. 과연 나는 이 역경을 딛고 [한밤의 아이들]이란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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