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주년, 그래서 우리는 제주로 갔다>



아내와 만나기 시작한 날이 5월 23일, 내 생일이 5월 24일, 그리고 결혼기념일이 5월 25일. 우리는 이 정도면 ‘기념일 폭풍주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겠냐는 데 서로 동의했다. 그래서 아내는 작년 12월에 소위 ‘취소가 불가능한’제주도행 평일 항공편 티켓을 싼값에 끊은 것이리라.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늘 바쁜척하며 사는 내게 아예 쐐기를 박은 것이다. 물론 나도 회사에 미리 사정 얘기를 했다. 평소에 더 열심히 일 할 테니 해마다 5월말 휴가만큼은 좀 보장을 해다오. 그러나 시집 가는 날 등창 난다고 휴가를 하루 앞둔 날이 하필 경쟁PT 준비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이었다. 결국 휴가 전날 새벽 한시가 넘어야서 회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제주로 가는 비행기 시간이 낮 2시 45분이니 좀 천천히 일어나도 되겠지 생각했지만 막상 일어나 짐 챙기고 밥 먹고 씼고 공항까지 가서 발권하고 검색대 통과하고 하는 시간을 생각하니 도저히 느긋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멀미를 심하게 하는 나는 비행기 시간에 맞춰 멀미약까지 챙겨 먹어야 했다.



1일차


오후 늦게 제주공항에 도착해 버스를 탄 우리는 협재 근처 한림 금능리 ‘추의작은집’이라는 게스트하우스에 가서 체크인을 했다. 추소명 씨라는 젊은 여주인이 운영하는 이 곳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깥채가 다이닝룸으로 꾸며져 따로 식사나 차를 즐기기 좋았다. 우리가 들어올 때는 주인장이 없어 전화로만 얘기를 했는데 샤워를 하고 나와보니 밖에 키가 큰, 머리를 질끈 동여맨 젊은 여자가 얼핏 보이는 것이었다. 옥상으로 올라간 나는 텃밭에서 뭔가 하고 있는 여자분에게 주인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하면서 아래층에도 남자분이 하나 계시던데요, 라고 한다. 그 남자가 바로 접니다, 방금 옥상으로 올라왔어요, 라고 대답하니 그녀가 웃는다.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별 의미 없는 하늘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다시 일층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짐을 부려놓고 아내의 페이스북 친구인 윤수훈 씨에게 연락을 했다. 윤수훈 씨는 뉴질랜드에서 살다가 제주도로 와서 혼자 ‘연미당’이라는 떡볶이집을 하고 있는 솔직담백하고 멋진 여자였다. ‘추의작은집’에서 걸어가면 금방인 연미당에 도착한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마침 수훈 씨 여자 후배 하나 씨도 같이 있길래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수훈 씨가 안내한 곳은 한림읍에 있는 ‘칠돈가’라는 곳이었다. 제주흑돈을 두껍게 썰어 연탄불에 올려 구워주는 집인데 고기 맛이 아주 좋았다. 그들은 제주도에 와서 돈을 더 내고 구태여 프리미엄 돼지고기를 먹을 필요가 없다고 귀뜸한다. 제주도에서 파는 돼지고기는 하나같이 품질이 좋기 때문이란다. 손님이 고기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서 구워주는 시스템이므로 우리가 할 일은 잘 익은 돼지고기를 골라 자신의 접시에 갖다놓고 그때마다 술잔을 들어 입으로 털어넣는 것뿐이었다. 수훈 씨가 뉴질랜드를 마다하고 제주도에 와서 장사를 하게 된 이야기, 서울에 사는 오랜된 남자친구와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는 하나 씨의 이야기, 우리가 5월에 제주여행을 하게 된 이야기 등등 일차에서 이런저런 정보들을 주고받으며 즐거워 하던 우리는 여세를 몰아 이차로 숙소의 다이닝룸에 와서 와인을 더 마셨다. 수훈 씨가 소주를 못 마시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술이 올랐다. 아내는 이제 그만 들어가 자자고 했고 나머지 술꾼들은 편의점에 가서 한 잔 더 하자고 했다. 결국 아내를 뺀 세 명만 편의점으로 가 싸구려 와인 한 병을 더 사서 플라스틱컵에 따라 마셨고 숙소로 들어간 아내는 ‘남편은 젊은 여자들과 술 마시러 가고 늙은 나는 잔다’라는 글을 남겼다.



2일차


아침에 둘 다 일찍 깼다. 매일 아침 일곱시 경이면 아침밥을 차려먹는 습성 때문이었다. 배가 고프지만 아침식사는 아홉 시부터라고 한다. 둘 다 하기가 져서 어쩔 줄을 모른다. 마루에 나가서 테이블에 쌓여 있던 책 중 [안도현의 발견]을 집어들었다. 안도현 시인이 한겨레에 연재하던 원고지 3.7매의 글들을 모은 책이다. 나도 한겨레를 보던 시절 즐겨 읽던 쪽칼럼이다. 책표지 안쪽에는 ‘추소명 씨에게 드립니다’라는 안도현의 친필싸인이 있었다. 책을 뒤적이다가 눈에 익은 시를 발견했다. 이제하 시인이 고등학교 때 써서 학원문학상 장원으로 뽑힌 '청솔 그늘에 앉아'라는 시다. 워낙 유명한 시였고 우리 집에 있는 [시의 고향]이라는 책에서도 읽은 적이 있는 작품이라 더 반가웠다. 천재의 작품이다. 도대체 고등학교 때 처음 쓴 시가 교과서에 실리다니, 뭐 이런 기분나쁜 천재가 다 있단 말인가.


아침에 추의작은집에서 차려준 샌드위치와 요구르트, 커피 등으로 허기를 채우고 오전 내내 금능리 해변을 어슬렁거리다 최상식 씨를 만났다. 상식 씨는 제주도에서 캠핑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친구인데 이번 제주 여행에서도 우리에게 길안내와 캠핑을 도와주기로 했다. 상식 씨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서 아내의 친구 부부인 윤주 씨와 상완 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본격 투어의 시작이다. 


아내가 제일 먼저 정한 곳은 국제학교 근처에 있는 이태리식당 ‘포르체타’였다. 여기 주방장이자 주인장인 김효중 씨는 서울에서도 요리를 꽤 잘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삼 년 전 제주도로 내려와 이태리식당을 여는 모험을 감행했다고 한다. 제주도 현지 음식을 사용하는 것으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는 이 식당에서 리조또와 피자, 파스타 등을 주문했는데 모두 수준급 이상이었다. 특히 리조또의 맛에 아내는 혀를 내둘렀다. 보통 리조또를 시키면 너무 달거나 반죽이 질척질척하게 나오기 쉬운데 포르체타는 밥알이 고슬고슬하고 양념도 과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맛있었다. 요리를 들고 나온 주인장께 물어보니 드물게 제주에서 생산되는 쌀이 있는데 그걸 쓴다고 했다. 제주에 오면 돼지고기, 갈치, 생선회를 무시할 수가 없는데 그걸 피하고 이태리 음식을 하려다 보니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가 택한 길은 자신의 메뉴를 고집하되 약간 싸게, 그리고 양도 약간 많이 내는 것이었다. 음식을 다 내고도 주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식탁 옆 벽난로에 한쪽 팔을 올리고 계속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가는 김효중 씨를 보니 사람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고 요리 좋아하는 그의 인품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아무튼 제주에 와서 뻔한 음식 대신 고급한 식사를 한 끼니 하고 싶다면 주저 않고 추천할 만한 식당이다.


점심을 먹고 영아리오름에 올랐다. 오를 땐 약간 숨이 찼지만 올라가 보니 바람이 엄청 시원하게 불었고 전망도 기가 막혔다. 와인 한 병을 들고 가 바람을 맞으며 마시면 정말 천국일 듯했다. 이타미 준 건축가의 바람미술관, 물미술관, 돌미술관, 두손미술관 등이 있는 ‘비오토피아’도 방문했다. 이 곳은 연예인이나 성공한 사업가들이 별장처럼 쓰는 회원제 타운하우스라 입장부터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비오토피아 레스토랑을 예약한 후 여기서 커피를 한잔씩 마시고 구경을 해야했다. 현대예술은 뭐든 컨셉이 중요하다. 이곳 역시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물론 건축물을 자연과 결합시킨 머리 좋은 건축물들이 그 가치를 드높이는 것 같았다. 근처에 있는 방주교회도 가서 잠깐 구경한 후 월드컵경기장 근처에 있는 ‘수모루국수’에 갔는데 여기가 완전 대박이다. 좁은 가게에서 직접 뽑아 내는 국수도 흘륭하지만 수육은 정말 최고였다. 자신있게 강추한다. 서귀포 올래시장에서 회를 조금 사고 이마트에서 와인을 산 후 하도리 해변으로 이동 후 해변에서 캠핑을 했다.



3일차


아침에 일어났더니 온몸이 쑤신다. 좀은 텐트 안에서 낡은 슬리핑백을 깔고 덮고 자서 그렇기도 하지만 바닥이 좀 고르지 못해 더 잠을 설쳤던 것 같다. 상식 씨가 준비해준 커피와 빵을 먹으며 해변의 정취를 천천히 즐긴 우리는 아침 식사를 위해 이동했다. 그러나 너무 형편없는(?) 식당이라 언급하지 않겠다. 식재료 좋기로 이름난 제주에서 아침부터 고춧가루 듬뿍 들어간 조림을 먹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된다. 물론 그동안 여러 고객에게서 괜찮은 평가를 받은 식당이었겠지만 아침 메뉴를 옥돔조림(분명 중국산 냉동옥돔였을 것이다)으로 선택한 것은 분명 우리의 실수였다.


식사 후 재작년도 갔던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에 다시 갔다. 마침 그날이 김영갑 선생이 돌아가신 지 10주년 되는 날이었다. 김영갑은 제주의 산천에 반한 후 오직 제주의 오름 사진을 찍기 위해 부모형제도 애인도 모두 버리고 제주로 이주한 기인이다. 그리고 필름을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돈을 모으는 일 말고는 아무 것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사진을 찍는 일에만 구도자처럼 매달린 예술인이었다. 루게릭병에 걸려 죽기 전까지 이 갤러리를 만들기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평범한 사람이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자신에게 엄격해지고 고독해져야하는지 알려주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주는 결혼 기념일 선물로 김영갑 선생의 작품이 담긴 액자를 하나 샀다. 물결치는 억새밭을 찍은 사진이다. 3만 원밖에 안 하는 저렴한 사진액자다. 그러나 앞으로도 결혼기념일 선물은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뜻깊은 것을 주는 것을 구입하기로 했다.


아침이 좀 무거웠던지 아무도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해서 점심은 ‘자연속으로’라는 카페 겸 식당으로 가서 토마토 비빔국수와 콩국수를 먹었다. 이 집 역시 구태여 찾아가서 먹을 만한 집은 아니었다. 적당히 코스가 그 지역이고 거르기 애매한 점심식사를 해야 한다면 가보길 바란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용눈이오름, 숲길이 만들어내는 그늘과 햇빛에 비친 나뭇잎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비자림을 거쳐 숙소인 구좌읍 ‘성산가는길’에 갔다. 2년 만에 찾은 성산가는길은 여전히 깨끗하고 정원은 더 아름다워졌다.


저녁은 숙소에서 가까운 세화리의 ‘천하일미’라는 고기집에서 먹었다. 돼지고기 모듬에 오리고기, 전복까지 포함된 세트 메뉴로 고기가 대단히 좋은 집은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평균점은 줄 수 있다. 저녁을 마치고 성식 씨와 헤어진 뒤 숙소로 가서 어제 남은 와인과 소주 한 병을 마시며 늘어지게 수다를 끓여부었다. 우리도 닭살 부부지만 윤주 상완 부부도 장난이 아니다. 결혼한 지 이십 년이 된 커플이지만 여전히 이 사람들은 틈만 나면 ‘물고빨고’를 멈추지 않는다.



4일차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늘어지게 자다가 일어나 보니 온세상에 촉촉하게 비가 오고 있었다. 숙소 사장님께서 준비해 주신 반찬과 아내가 타이머를 맞춰놨던 전기밥솥이 지은 새 밥으로 천천히 아침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순한 쌀밥과 배추된장국에 우리를 금방 행복해졌다. 옆방의 부부는 아침도 안 먹고 더 자겠다고 했다고 한다. 아마 ‘아침 물빨’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가 오는 숙소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사모님이 월정리까지 태워주시겠다고 해서 염치불구하고 두 부부가 그 차를 타고 바닷가를 달렸다. 자고 일어나면 땅값이 오르고 있다는 제주에서도 요즘 가장 핫한 곳 중 하나가 월정리라고 했다. 우리는 이 년 사이 몰라보게 번화한 월정리 해변을 조금 구경하고 이 동네 기인께서 운영한다는 ‘빌레못카페’에서 차도 한 잔 마셨다. 주인은 서울로 놀러 갔다는데도 3층에 있는 카페 문은 열려 있었고 사모님이 전화를 해보니 그냥 올라와서 차 마시고 놀다 가도 된다고 허락을 했다고 한다. 주인이 수작업으로 제작했다는 음악 CD까지 얻은 뒤 시간이 남은 친구 부부는 그 주변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고 우리는 사모님과 작별한 뒤 시외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공항 오는 길엔 제주시내 제일교사거리에서 내려 사거리에 있는 ‘맛짱김밥집’에 들어가 급한대로 김밥을 먹었다. 간판에 ‘1200원 김밥의 위용’이라고 써있었던가. 김밥이 무척 맛있었다. 배가 고파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김밥집인데 의외로 김밥 맛이 아주 좋았다. 내용물보다 밥의 간이 아주 잘 맞아 기분이 좋았다. 심지어 김밥이 한줄에 1200원. 택시기사분 말씀이 ‘찾아와서 먹는 집’이란다. 운이 좋았다.



결론


5월에 두 사람만의 ‘애니버서리 주간’ 휴가를 내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중요한 일은 중요하게 여기고, 행복을 누릴 수 있을 때 그것을 추구하는 것.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년엔 일본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다만 이번 여행처럼 여러 곳을 돌아다니지는 얺을 것 같다. 우리 둘은 평상시도 그렇지만 여행지에서는 특히 더 게으른 커플이니까.




(* 이 글은 아내 윤혜자가 공항에서 핸드폰으로 틈틈히 메모한 것을 받아 남편 편성준이 정리한 글입니다. 아래에 저희들이 다녔던 맛집과 숙소 중 추천할 만한 곳을 몇 군데 적어놓았으니 참고하시길)

_추천 맛집 : 월드컵공원 근처 수모루국수 / 한림 칠돈가 / 이태리식당 ‘포르체타’
_추천 명소 ;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 영아리오름 / 비오토피아
_추천숙소 : 성산가는길(제주시 구좌읍 상도리657 010-5549-9908) / 추의작은집(010-8878-5183)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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쌔비(아내의 닉네임)가 제주도를 좋아하는 바람에 저도 벌써 네 번이나 제주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엔 결혼을 하고 나서 처음 가는 제주였죠. 우리는 남들과 달리 일요일 오후에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쌔비가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 평일에 여행을 할 수 있는 기간은 지금 뿐이었거든요. 태풍과 장마전선이 몰려온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제주도행 비행기표를 예약했습니다. 비오면 제주 가서 이박삼일 동안 떨어지는 빗방울이나 보고 오면 되지 뭐. 이런 얘길 주고받으면서요.

 

이번 여행의 포인트는 ‘저렴하게, 실속있게’였습니다. 최근의 초호화 결혼식, 초호화 하와이 신혼여행 등등으로 인해 분에 넘치는 소비를 단기간 동안 압축적으로 경험한 저희들은 이젠 또 굳이 비싼 돈을 들여 고급스런 숙소에서 자고 싶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비행기는 민간항공 중에서도 평일 노선으로, 그리고 숙소는 호텔이나 펜션이 아닌 민박집으로 하기로 기준을 세웠습니다.


평소 제주도와 관련된 트위터리안들을 많이 알고 지내는 쌔비가 트위터로 문의를 해보니 몇몇 분들이 ‘써니허니 게스트하우스’라는 곳을 알려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게스트하우스보다는 민박을 원하던 바, 고맙게도 ‘써니허니’의 주인장께서 친히 알려준 민박집이 바로 ‘성산가는길’이었습니다.

 

 

 

 

올레 20코스 근처에 있고, 2인 1실에 5만 원. 방마다 욕실이 딸려있답니다. 우리는 괜찮은 가격이라 생각했습니다. 항공료도 세금까지 합쳐 채 5만 원이 안 되는 가격이었으니 그야말로 ‘격’이 맞는 셈이었죠. 그런데 막판에 동행이 하나 생겼습니다. 쌔비가 페이스북에 올린 우리의 여행 계획을 듣고 반응을 보인 ‘예전부터 아는 동네 형’이었던 근식이 형을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싱글인 근식이 형은 다름 방에 묵어야 하는데 혼자 5만 원을 내는 건 좀 … 하고 있는데 쌔비가 집주인과 문자메시지를 통해 4만 원으로 합의를 보았다며 웃습니다.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제주시에 있는 ‘오막칼국수집’에서 점심부터 한라산을 부어라 마셔라 하던 우리들은 세화 바닷가에서 맥주를 또 한 잔씩 하고 좀 취한 상태로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성산가는길’에 도착했습니다. 세화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니 잔디밭 위에 보도블럭이 깔린 단아하고 조용한 민박집 입구가 보였습니다.


주인은 50대의 온화한 인상을 가진 사장님과 사모님이셨는데 나중에 얘길 들어보니 원래 이곳 분들이 아니고 부천에 사시다가 거기에 20대 딸 둘을 남겨두고 ‘독립’ 하셨다고 하네요. 사장님은 그동안 쭉 건축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제주도에 내려오셔서는 사진을 많이 찍으러 다니시는 모양이었습니다. 잠깐 나갈 때도 DSLR카메라를 들고 다니시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집안이 환하고 조용해서 좋았습니다. 흔히 여행을 가면 여러 다른 팀들과 살을 비비고 지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긴 두 팀만 꾸려와도 독채를 온전하게 쓸 수 있고 또 각 방마다 안쪽으로 화장실이 딸려 있어서 아주 마음이 편했습니다. 더구나 두 팀이 오면 나머지 한 팀은 받지 않는다는 방침이 놀라웠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생계형 민박집이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는 대목이죠. 민박집 뒷뜰엔 두 분이 가꾼 여러 채소와 꽃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3년쯤 뒤면 더 예뻐질 거라는 사모님의 말씀에 쌔비는 벌써 감동을 먹은 눈치였습니다.


가운데에 자리한 거실의 낮은 탁자와 벤치, 그리고 한쪽에 있는 컴퓨터 책상도 간단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주방과 잘 어울리는 구도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운데 놓인 책장이 마음에 들었는데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단행본들 사이사이로 사진 관련 서적이나 포토그래퍼들의 에세이가 많았습니다. 사장님의 취향이 묻어나는 컬렉션이었습니다.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를 모토로 삼고 있는 저희들은 이날 저녁도 해녀박물관 근처에 있는 ‘별방촌’이란 횟집에 가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과음을 단행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사모님께서 맛있는 죽을 쑤어서 가져다 주시는 게 아닙니까. 우린 이게 웬떡이냐, 웬죽이냐 하면서 맛있게 먹는 수밖에요. 물론 태어나자마자 서울 생활을 하셨다지만 그래도 사모님은 부산 출신이라는데 의외로 반찬들이 모두 정갈하고 맛깔스러웠습니다.

 

 

 

 

 


둘째날 큰그리오름에 다녀와 좀 지쳤던 우리들은 “오늘 저녁엔 집에서 먹는 게 어떠냐?”라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민박집이 편안하고 깨끗해서 그게 더 나을 듯했습니다. 쌔비가 전화로 여쭤보니 고기만 사오면 나머지는 대충 준비를 해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농협하나로마트에 들러 돼지목살과 술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사모님은 벌써 탁자 위에 신문지를 깔고 고기를 구울 수 있도록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먹던 거’라며 같이 내오신 밥까지 염치없이 얻어먹던 우리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시자’고 청한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두 분이 너무나 반가워하시며 술과 찬을 가자고 건너오시는 게 아닙니까.


그때부터 즐거운 술자리의 향연이었습니다. 월요일 저녁이라 민박엔 다른 손님도 없고 우린 걱정할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점잖게 생긴 두 분이 부천에 과년한 딸들을 남겨두고 연고도 없는 제주까지 내려와 ‘독립’하게 된 사연. 저희들이 각각 카피라이터와 출판기획자, 작곡가 등의 일을 해오면서 있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들. 저희 부부가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드라마 등등 이야기마다 웃음과 공감이 끊길 틈이 없었습니다.

 

사모님은 나이가 드셔도 아직 출중한 미모를 자랑하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사모님은 [내일을 향해 쏴라]와 [졸업]에 나온 캐서린 로스를 닮았다고 아부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근식이 형이 ‘바다가 육지라면’을 부른 가수 조미미를 닮았다고 초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혜자는 사모님도 미인이지만 사장님이 참 잘 생기셨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 할 때마다 웃음꽃이 피어나는 날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래저래 두 부부께서도 오랜만에 마음껏 웃어보았다고 좋아하셨습니다. 물론 사장님 사모님께서 안채로 돌아가신 후에도 저희들의 ‘부어라 마셔라’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지요. 센스있는 사장님께서 한라산을 몇 병 더 남겨놓고 가셨더라구요.

 

 

 

 


쌔비는 사모님이 마당에서 자신을 부를 때 “손님!”이라고 하는 대신 “혜자 씨~”라고 부르는 게 정말 정겹고 좋았다고 합니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나쁜 마음을 먹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 더 즐거운 시너지 효과가 생깁니다. '성산가는길'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저희는 다음날 아침 또 ‘우리가 먹던 거’라는 뻔한 거짓말에 속는 척하며 콩나물국을 얻어먹고 나왔습니다. 일기예보와는 달리 첫날 빼고는 쨍쨍하게 맑기만 했던 제주도 여행. 이번 일정은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장소에서 게으르게 지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고 평화로웠던 B&B(Breakfast & Bed)형 민박집 ‘성산가는길’이 있었죠. 정말 다시 와서 묵고 싶은 집입니다.

 

 

 

제주시 구좌읍 상도리 657(상도로 5-2)

010-5549-9908 / 010-8294-9908

http://blog.naver.com/stella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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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공항 – 제주시 [오막집국수] – 함덕해수욕장 – 구좌읍 상도리 – 민박집 [성산가는길] -  저녁 해녀박물관 옆 [별방촌] 

 

* 둘째날 / 상도-박물관 점심 [생이소리] – 큰그리오름 - 저녁 민박집 [성산가는길]

 

* 셋째날/ 우도 – 성산 - 공항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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