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는 살림을 합치고 성수동에 있는 전세 아파트에서 4년을 살았다. 성수동에서 살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출퇴근이나 외출을 하기 위해 전철을 타려면 한강공원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점이었다. 뚝섬유원지역에서 내려 집까지 이어진 공원길엔 새들이 노니는 푸르른 나무와 꽃들, 그리고 깨끗한 보도블럭이 기분 좋게 조성되어 있었고 곳곳에 벤치와 깨끗하고 쾌적한 화장실이 있었다. 특히 화장실은 나처럼 갑자기 대소변을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잦은 인간에겐 정말로 고마운 시설이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함께 웃다가도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서로의 가방이나 소지품을 맡기고 화장실로 뛰어가는 일이 많았다. 똥오줌 걱정 없이 천천히 걷기만 하고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공간. 누구의 소유도 아닌 벤치. 나는 이런 게 너무나 좋았다.

사람들은 공원에 와서 산책도 하고 체조도 했다. 아침부터 모여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도 있고 클라이밍 동회회 사람들이 모여 암벽등반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뚝섬유원지공원 안 인공암벽에 오르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아는 얼굴을 만나기도 했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 우리집에 와서 도배를 해주신 지물포의 여사장님이었다. 암벽등반 장비를 갖추고 절벽을 오르는 아주머니의 모습은 도배를 할 때나 가게를 지키고 있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새롭고도 멋있었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많은 사람들이 공원을 찾았다. 특히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한 젊은이들이나 데이트족들이 많이 와서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마시거나 배달 치킨을 시켜 먹었다. 모처럼 원피스를 빼입고 하이힐을 신고 나왔다가 공원에 와서 어색한 데이트를 하게 된 젊은 여성과 그 파트너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조금 서글프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건 잠깐이었다. 눈부신 젊음들에겐 그런 서글픔쯤은 금방 날려버리는 힘이 있었으니까. 밤이면 버스킹을 하는 뮤지션들도 있었고 마술을 연습하는 사람, 혼자 색스폰을 부는 사람도 있었다. 공원이라는 열린 공간은 숨가쁘던 일상을 멈추고 각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바라보거나 보여주는 곳이었다.

우리는 햇볕 좋은 봄날이나 가을의 휴일이면 작은 그늘막과 돗자리를 들고 공원 잔디밭으로 나갔다. 가끔은 놀러 온 친구들과 공원으로 나가 간단한 와인파티를 열기도 했다.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내는 공원에 있는 커플들의 뒷모습만 봐도 부부인지 불륜인지 금방 알 수 있다고 했다. 손을 꼭 잡거나 서로의 손을 지나치게 다정히 어루만지며 가는 커플은 거의 다 불륜이라는 것이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다시 사람들을 쳐다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일단 부부는 나란히 서서 가는 경우가 드물었다. 남편이 앞서 걷고 2보 이상 떨어져 아내가 걷는 경우가 흔했다. 저 사람들도 처음엔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감정이 균질하게 흘러갈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세월이 지나 다 그렇게 된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둘이 공원을 걸을 때마다 '불륜커플 코스프레'를 많이 했다. 내가 아내의 손을 잡아 끌거나 허리를 감싸안으면 아내가 "어머, 왜 이러세요~?!"라고 외치는 식이었다. 부부보다는 불륜 커플이 훨씬 더 행복해 보였으니까. 이제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와서 한강공원에 갈 일이 거의 없지만 다행히 우리는 아직도 길을 걸을 때 손을 잡고 가는 경우가 많다. 서로를 위해서 좋은 버릇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불륜 커플처럼 보이려면 지금보다 손을 더 꽉 잡거나 서로 만지작거리면서 가야 하는 것 아닐까 잠깐 반성을 해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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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파트 앞엔 [신화마트]라는 수퍼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가게처럼 일용잡화를 팔고 밤에는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 간단한 안주에 맥주도 한 잔씩 하는 그런 평범한 수퍼죠. 우리 커플도 이사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들어갔다가 뻔데기통조림이나 골뱅이에 한 잔 한 뒤로는 단골이 되었습니다. 우리 말고도 그런 손님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단골들끼리 친해져서 인사도 나누게 되고 가끔은 누군가 집에서 가져온 ‘사제 안주’를 나눠먹으며 작은 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강남 부자 동네와는 좀 다른 정서죠.

 

 

그런데 이 가게가 얼마 전부터 한쪽 공간을 막더니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 사장님께 물어보니 가게를 반으로 줄이고 새로 생긴 공간에 작은 치킨집을 열 생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녁마다 찾아오던 단골 청년들 중 둘은 벌써 며칠째 공사를 맡아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재미있을 거 같았습니다. 이 가게는 바로 옆 토끼굴을 지나 수십 미터만 나가면 한강변이고 뚝섬유원지역도 걸어서 13분 거리입니다. 뚝섬유원지는 여름이면 치킨배달이 엄청 성행하는 곳이죠. 수퍼마켓만 하는 것보다 훨씬 신나는 일일 거 같았습니다. 우리도 뭔가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사장님 부부도 반색을 하며 좋아하셨습니다.

 


치킨집이라…일단 신화마트가 사업을 확장한 거니까 ‘신화치킨’을 생각하기가 쉽겠죠. 그러나 그건 “아, 신화마트가 치킨집을 냈구나”라는 몇몇 지인들의 반응 말고는 뾰족한 게 없습니다. 별 의미가 없는 네이밍이란 말이죠. 게다가 치킨집 특유의 고소하고 바삭바삭한 유머나 특징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닭컴'부터 시작해서 코스닭, 후다닭, 쏙닭쏙닭, 토닭토닭까지 차고 넘치는 게 치킨집 이름이었지만 그래도 치킨집 이름은 그래야 하는 거니까요.

 

 

 

“닭터 어때? 닭터 치킨!” 제가 여친에게 물어봤더니 그거 괜찮은데, 라는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성이 오 씨니까 닭터오 치킨으로 하자. 그리고 닭터라는 상호명은 이미 많을 테니 ‘성수동 닭터오 치킨’으로 하자는 얘기까지 급속도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표기는 ‘닭터5’와 ‘Dr.5’를 병행하면 패러디 아이덴티티도 더 살릴 수 있을 거 같았구요.

 

 

아울러 윤혜자 양은 ‘닭터오 특별 메뉴’까지 즉석에서 제안했습니다. 한 마리가 아니라 닭고기 다섯 조각으로 이루어진 오천 원짜리 특별 상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치킨이 생각나도 만사천원이나 만육천 원쯤 하는 치킨 한 마리를 혼자 시켜먹기엔 부담이 있습니다. 이럴 때 오천 원짜리 ‘닭터오 스페셜’이 있으면 좋지 않겠냐는 것이죠. 기분 좋게 결론을 낸 우리는 내일 빨리 이 이름을 알려드려야겠다고 조바심을 내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늘 간단한 네이밍 기획서를 써가지고 [신화마트]에 갔더니 일단 아주머니가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옆에서 공사를 하던 청년들에게도 보여줬는데 다들 좋다고 한 마디씩 하더군요. 닭터5스페셜 메뉴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장님은 며칠 전 다리를 다쳐 네이밍 후보안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오늘 수술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이름이 확정되면 간판과 스티커 디자인도 같이 일하던 친구나 동료들에게 부탁해볼 생각입니다. 같은 이름이라도 디자인이 좋으면 더 효과가 좋아지겠죠.

 


뿌듯한 일입니다. 아주머니가 얼마를 내야 하냐고 물으시길래 “저희 비싼 애들이에요. 정식으로 돈 내시려고 하면 너무 비싸니까, 관두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요. 동네에서 그럴 순 없죠. 근데 이름값을 치킨으로 다 받으면 도대체 몇 마리나 되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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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열시에 

카메라를 들고

우리동네를 좀 돌아다녔더니

대체로 이런 모습들이더군요.

 

 

 

지팡이 대신 유모차를 끌고 다니시던 할머니,

고물상 아저씨와 뭔가 한참 얘기를 나누시더니 금방 사라지셨습니다

 

 

 

 위치나 보나 자세로 보나 왼쪽에 앉아있는 아저씨가 이 동네 짱인 거 같죠?

 

 

횟집 앞에 있는 작은 공원엔 쉬는 분도 있고 운동을 하는 분도 있고

 

 

 24시간 언제나 아침뿐인 저의 단골, 모닝마트입니다

 

 

뚝도시장 입구에 있는 가게 아저씨. 오늘 팔 핸드백을 진열하시는 중

 

 

예전엔 중학생들이 많이 매던 '쌕'을 이젠 할머니들마다 매고 다니시더군요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한국사람들은 왜 다들 평소에도 등산복을 입구 다니냐?"고 묻는다죠. 아마 그들은 이해를 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나라 경제를 일으켜세운 베이비붐 세대들에게 수트라는 옷은 그리 활동성이 좋지 않은 옷이거든요. 그래서 양복은 회사에 출근을 하거니 어디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 갈 때만 입기 십상이죠. 우리 아저씨들은 평소엔 바지에 점퍼를 많이 입습니다.

 

생각해보면 서글픈 일입니다. 어른들이 그런 효율성만 강조하다 보니 학생들도 덩달아 값이 비싼 등산복이었던 '북쪽얼굴'에 목을 매고 그랬으니까요. 사회적 지위가 높거니 부유한 층을 제외한 일반 서민들은 지금도 일할 때나 산책할 때나 가리지 않고 등산복 바지나 점퍼를 입고 다니는 일이 많습니다. 누가 물어보면 다들 '그냥 편해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티셔츠에 청바지를 즐겨 입는 저도 어쩌다 수트를 입을 때는 왠지 스스로를 좀 존중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수트를 입은 날은 괜히 몸도 더 추스리게 되고 양복이 구겨질까봐 아무 데나 앉지도 않게 되거든요. 또 셔츠도 한 두번 입고 나면 드라이크리닝을 맡겨야만 하기 때문에 돈이 들고...아무튼 아침에 등산복을 입고 찡커피를 마시고 있는 아저씨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아저씨들이 다들 수트에 구두를 신고 저러고 있어도 꽤 웃기겠구나 하며 혼자 미친놈처럼 웃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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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역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뚝섬유원지역까지 카메라를 메고 천천히 걸어다녔습니다. 고개를 들면 하늘이 보이고 길을 나서면 사람들이 차들이 보이더군요. 매일 보는 것들인데도 유심히 들여다 보면 또 다르게 보인다는 건, 참 신기한 일입니다.

 

 

우리 동네엔 주차의 달인들이 많이 사십니다.^^

 

낡았지만 정겨운 풍경들도 많구요.

 

고개만 들면 이렇게 파란 하늘인데, 자꾸 까먹습니다.

 

다시, 박대통령의 나라.

 

얘들아, 어른들은 슬픈 일이 많단다.

 

다들 왕년엔 힘 좀 쓰시던 분들.

 

100점 보다 훨씬 정겹다. 100명이라는 말.

 

현실 뒤에 숨어 있는 꿈을 상상할 수만 있다면 어디서든 문은 열리리라.  

 

누가 좀 얘기해 주지 않을래? 천천히 가도 결코 늦는 게 아니라고.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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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구두골목 이야기 [드림핸드메이드]에서 명품 수제화를 만나다

 

 

발렌타인데이 하루 전날인 2 13, 여친과 저는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성동구청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결혼식은 5월 예정이지만 최근에 제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의료보험 처리 등등 혼인신고를 먼저 해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기억하기 쉽게 2 14일에 신고를 하자고 약속을 해놨었는데 마침 여친이 몸살이 나 회사를 하루 쉬는 바람에 그냥 앞당겨 다녀오기로 한 것이었죠.

 

저희 아파트에서 성동구청에 가려면 성수역까지 걸어가 왕십리역으로 가는 게 가장 빠른 길입니다. 우리들은 평소처럼 쉬엄쉬엄 걸어 15분 걸리는 성수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뚝도시장을 지나 성수동 구두골목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지붕이 낮고 아담한 일 층짜리 수제화 가게가 하나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엔 관심이 없어 반대편 길로만 다녔는데 그날은 웬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친이 눈을 반짝이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진열되어 있는 구두들을 둘러 보았습니다. 이런저런 많은 구두들이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벌써 어떤 구두 한 켤레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캐주얼화로 보통 구두처럼 브라운이나 블랙 대신 잘 쓰지 않는 피코크 그린컬러를 쓴 것부터가 범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래, 저 구두야.이심전심이랄까. 평소에 양복을 거의 입지 않아 제대로 된 구두를 장만할 기회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저였습니다. 게다가 발이 아주 작은 편이라 구두를 살 때마다 늘 마음에 드는 구두 대신 사이즈에 맞춰 구두를 고르곤 했습니다(아버지, 어머니, 형까지발 작은 건 집안 내력입니다). 245mm 남자구두는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이니까요.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성수동에서 마음에 쏙 드는 구두를 하나 만난 것입니다.

 

 

 

 

사장님, 이거 얼마에요? 우리의 질문에 사장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신어서 맞으면 삼십만 원, 새로 만들면 사십만 원이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뭐 이런 노란 고무줄 같은 가격대가 다 있어? 아마 새로 만들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새로운 노력과 품이 더 드니까 그런 모양입니다. , 그래요? 저는 245인데. 발이 작아서 여기 있는 건 안 맞을 거예요. 그랬더니 사장님 왈 저게 245예요.” 그러시는 게 아닙니까. 에이, 설마.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쇼윈도에 있던 구두를 꺼내 신어보니 정말 요술처럼 제 발이 구두 속으로 쏙 들어가 노는 것이었습니다. 물건마다 주인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말이 있죠. 아마 이 구두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건 현찰박치기를 해야 맛이 나죠. 저는 당장 길 건너 은행으로 달려가서 빳빳한 5만 원 권으로 현금 삼십만 원을 인출해 사장님께 드렸습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좋아하는 저희들을 바라보는 사장님의 표정에도 내가 만든 구두가 오늘 주인을 제대로 찾아가는구나하는 흐뭇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구두는 처음 신는 것인데도 아주 부드럽고 편했습니다. 새 구두로 갈아 신고, 헌 운동화를 종이가방에 넣은 뒤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가게를 둘러보니 매장 안에 있는 구두는 거의 다 남성용이었습니다. 여자 구두는 안 만드세요? 라고 물었더니 싸우기 싫어서요.”라는 명쾌한 답이 돌아왔습니다. 여성 고객들은 하나같이 까다로워서 이젠 상대하기 지치셨다는 겁니다. 어딜 가나 정여사 같은 분들이 여전히 맹활약 중이신 모양입니다.

 

 

성수동 구두 거리 [드림핸드메이드] 유홍식 대표.

 

그는 우리나라 수제화 역사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1960년도부터 구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손수 구두를 제작한다고 하니 그 열정과 집념이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힐끗 보니 사장님의 손은 그 동안의 역사를 증명해주듯 아주 거칠고 상처가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장인의 손이죠. 제가 산 구두도 사장님께서 손수 한땀한땀 바느질해서 만든 세상에 단 한 켤레밖에 없는 구두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해 주시네요. 구두 수명이 다 될 때까지 A/S를 해줄 테니 언제든지 오라는 말도 믿음직스러운 대목이었습니다.

 

작년 8월 저희가 아무런 연고도 없으면서 괜히 이사 온 성수동은 수제화산업 중심지로 서울시에서 집중 육성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연히 찾아간 수제화점 [드림핸드메이드]는 이 시점에서 성수동 수제화의 중흥을 상징하는 핸드메이드의 메카였던 것입니다.

 

 

사실 나는 구두 더 팔아먹으려고 A/S 해주는 거예요. 구두 고치러 와서 새 구두 또 사가는 경우가 꽤 많거든. 하하.”

 

 

보통 50~60만 원부터 시작한다는 고가 수제화를 A/S 받으러 와서 또 새 구두를 사간다는 유홍식 대표의 이 솔직한 이야기에는 핸드메이드의 우수한 품질과  명품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전 잘 차려 입은 양복에 구두까지 잘 갖춰 신은 남자의 모습을 참 좋아합니다. 캐주얼한 청바지에 징 박힌 구두를 맞춰 신은 모습도 좋아하죠. 좋은 구두는 발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편안하고 자신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건 유명 브랜드를 달고 나온 기성 제품보다는 장인의 손길에서 탄생한 온리원제품일 때 더 하겠지요.

 

운수가 좋은 날이었습니다. 구청 가는 단 몇 시간 만에 명품 구두도 얻고 또 명품 아내도 얻었으니까요. 아무래도 이 구두는 당분간 제가 가장 애정하는신발이 될 거 같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장에 신랑이 피코크 그린컬러 구두를 신고 입장해도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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