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재섭이

 

 

제 친구 중에 재섭이란 애가 있습니다. 이놈은 어렸을 때 그렇게 공부를 잘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현재 세계적으로 이름난 외국계 IT회사의 임원으로 재직 중입니다. 또 인간적으로도 비교적 선량하며 아이를 넷이나 낳아 잘 키우고 있는 착실한 가장인데도 친구들 사이에선 매번 구박을 받는 캐릭터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죠. 그러나 어쩝니까. 만나면 나도 모르게 또 구박을 하게 되는데. 도대체 뭐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한 번 살펴볼까요?

 

재섭이의 가장 큰 단점은 무슨 얘길 하든 잘 못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얘길 들어도 금방 까먹거나 무심코 흘려듣고 나중에 딴소리를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또 그 얘기가 나오면 마치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얘긴 처음 들어본다는 듯이 “아~그래? 그랬어?” 하고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재섭인 참 좋을 거야. 뭐든 게 새로우니…”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포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른 사람은 다 쉽게 이해하는 유머나 특이한 일화일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몇 년 전 여름 휴가를 함께 갔을 때 일입니다. 모임 멤버 중 유난히 싱거운 농담을 잘 하는 H라는(이분도 큰 유통회사의 부사장님이십니다만) 분이 계십니다. H가 술을 마시다가 ‘흥부가 형수에게 뺨맞은 얘기’를 하며 좌중을 웃기고 있었습니다. 내용인즉슨 배고픈 흥부가 놀부네집으로 찾아갔다가 때마침 혼자 있는 형수에게 “형수, 나 흥분돼(흥분데)”라고 말하는 바람에 주걱으로 뺨을 한 차례 얻어맞고 다시 “형수, 그러지 말고 사정(?) 좀 합시다”라고 말했다가 또 뺨을 얻어맞았다는, 다소 싱거운 음담패설입니다. 그래도 저녁 술 분위기상 사람들은 아주 즐거워하며 웃었습니다. 가장 많이 웃은 사람은 다름아닌 재섭이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자 재섭이가 옆사람에게 작은 목소리로 “근데 ‘흥분데’라고 말하는데 왜 뺨을 때려?”라고 묻는 게 아니겠습니까. 경악한 사람들은 그걸 모르면서 왜 그렇게 웃었냐고 물었더니 남들이 웃길래 그냥 웃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 대학 서클 동기 몇 명이 만나 저녁을 먹었습니다. 재섭이 부부도 나왔더군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놀다가 분위기가 좀 처지는 거 같아서 제가 ‘원두막 삼행시’ 얘기를 해줬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밖에서 원두막 삼행시를 듣게 되었습니다.

 


원 :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두 : 두 쪽 다 빨개
막 : 막 빨개

 


이걸 들은 할아버지는 재밌다고 생각하고 집에 가서 식구들에게 이 얘기를 다시 들려주기 위해 기억을 단단히 하고 귀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들 앉아서 밥을 먹을 때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할아 : 얘들아, 내가 오늘 ‘원숭이 삼행시’를 들었는데…
손녀 : 뭔데요, 할아버지? 원!

할아 :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손녀 : 숭!

할아 : 숭하게 빨개.
손녀 : 이!

할아 : 이게 아닌데…?

 


다들 웃었습니다. 물론 재섭이 부부도 많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또 술을 마시며 놀았습니다. 그런데 헤어질 때쯤 돼서 재섭이가 제게 다가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야, 근데 두 번째 ‘숭’이 뭐더라?”

 

‘두 번째 숭이 뭐…? 아아, 재섭아.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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