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던가, 시드니 셀던의 데뷔작인 [네이키드 페이스] 읽다가 깜작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소설 속에선 헐리우드에 입성한 무명 여배우가 스튜디오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꼬마 사환에게 어찌어찌 꼬투리를 잡히는 바람에 즉석 섹스를 하게 되는데, 꼬마가 '엉뚱한 삽입을 하려는 바람에 여배우가 매우 당황하는 장면이 있었죠. 알고보니 10 꼬마는 항문섹스를 즐기는 변태성욕자였던 것입니다


어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 투 더 스타(Maps to the stars)] 보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소설이 다시 생각났습니다이 영화에 나오는 아역배우 벤지 때문이었죠. 벤지는 어렸을 때 출연했던 시트콤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지금은 자기보다 더 어린 배우에게 밀려 초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열세 살짜리 소년입니다. 그런데 영화 초반에 그에게 뭔가 충고를 해주는 남자 매니저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언사("차라리 바지를 내리고 그 안에 든 보지를 보여주지 그래? 이 뚱땡이 게이새끼야!")로 앙칼지게 욕을 해대는 걸 보고 저는 그만 기가 질려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만나 권총을 뽑아들고 러시안 룰렛 흉내를 내다가 개를 쏘아 죽이는 아슬아슬한 장면은 정말 섬뜩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늘 집에서 가운 비슷한 옷을 입고 지내는 그의 표정이나 몸짓은 권태롭지못해 ‘데까당’ 하기까지 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이 지경입니다. 얼굴과 목에 화상 자국이 선명한 채 나타난 정체불명의 소녀 애거서, 어렸을 때 엄마에게 당한 성적 학대를 잊지 못하며 늘 캐스팅에 대한 초조함에 시달리는 여배우 하바나, 아들 벤지의 약물문제와 일탈 때문에 늘 전전긍긍하는 크리스티나,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방화범 딸에게서 나머지 가족을 보호하고 심리치료사로서의 자신의 명성에도 누가 되지 않게 하려 애쓰는 샌포드까지. 이들이 벌이는 근친상간과 쓰리썸, 살인, 방화, 화형(태워 죽임) 등이 이 영화의 스토리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입니다. 게다가 주요 등장인물들은 걸핏하면 눈앞에 유령이 나타나는 신경쇄약증세까지 보이고 있죠. 마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처럼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극단적인 상황들을 한꺼번에 모아 일렬종대로 전시해 놓고는 “여기 제정신인 사람이 어딨어? 하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비디오 드럼]이나 [플라이], [그래쉬] 같은 ‘신체변형’영화들을 거쳐 근작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러미스]로 어둡지만 품격 있는 신화의 세계를 직조해 내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왜 새삼 이렇게 적나라한 메타포에 달겨들었을까요.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미 오래 전에 이야기를 완성해 놓은 작가 브르스 와그너의 시나리오를 보고 ‘헐리우드가 근친상간 관계로 유지된다’는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어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문제를 극단적으로 풀어내기엔 헐리우드만한 무대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겠죠.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인 브르스 와그너는 빌리 와일더 감독의 [선셋대로] 첫장면이 호화저택 풀장에서 빠져죽은 시나리오 작가의 대사로 시작되는 데서 이야기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등장 인물 중 애거서와 사귀면서 하바나와도 섹스를 하게 되는 제롬 역의 로버트 패틴슨이 리무진 운전기사로 나오는데, 시드니 셀던이 17살에 이미 허리우드에 들어와 각본가로 활동했던 것처럼 브르스 와그너도 젊었을 때 헐리우드에 와서 리무진 기사로 시작해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고 하죠.



이 영화는 일반인들은 도저히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들만의 정신세계’ 이야기라는 점에서 우리 정치인들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정치란 원래 사람들의 삶을 이롭고 조화롭게 하기 위한 행위라지만 실제 정가는 정의보다는 거대한 욕망의 수레바퀴를 따라 굴러기기 때문입니다. 욕망 앞에선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데,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고,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수 없다,는 개 같은 삼단논법이 성립됩니다. 



멀쩡해 보이지만 알고보면 모두 외롭거나 비정상인 사람들. 그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열연이 눈부십니다. 특히 칸느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줄리안 무어의 변화무쌍한 연기는 어느 정도 예상을 했었지만 그래도 막상 보고 다시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출연하고 싶었던 영화에 먼저 캐스팅 되었던 동료 여배우가 갑자기 아들을 잃는 바람에 영화를 포기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슬퍼하는 척 하다가 곧바로 신이 나서 춤을 추는 장면이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될 것 같습니다. 그 장면에서 옆에 있던 미아 와시코브스카에게 같이 춤을 추라 명령하며 자신도 몸을 흔드는 장면은 정말 사악하고도 기괴하죠.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는 친한 친구들과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는 장면 바로 다음에 점프컷으로 그 멤버들이 쓰리썸을 하는 장면이 더 좋았습니다. 이상한 건 남자 배우도 그리 호색한으로 생기지 않았고 줄리안 무어의 동성 친구도 그냥 평범한 비즈니스 파트너나 오랜 친구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쓰리썸을 한다는 건 그들의 평소 삶이 윤리적으로 얼마나 왜곡되어 있고 서로가 공범의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난 의문의 소녀 애거서 역을 맡은 미아 와시코브스카의 재감 또한 무시무시합니다. 자신의 부모가 남매였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집에 불을 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애거서는 7 년만에 다시 가족 앞에 나타나 그들의 삶에 균열을 만듭니다. 약간 또라이처럼 보이는 보이시한 여자 역할을 미아 와시코브스카만큼 잘 소화해내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가만히 있어도 그림이 되는 특이한 배우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하 [스토커]에서도 마지막에 살인을 저지르는 역할이었는데 여기서도 마지막에 영화상 트로피로 줄리안 무어를 때려죽이는 역을 진짜 리얼하게 해냅니다. 그밖에도 벤지 역의 에반 버드도 천재인 거 같습니다. 마치 요즘 우리나라의 감초배우 안내상처럼 어느 영화에 나와도 제 역할을 다 하는 존 쿠삭을 보는 것도 즐겁구요.



헐리우드 뿐만 아니라 매스미디어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얘기이고 공감하는 명제 중 하나는 ‘연예인들은 부업을 해야 한다’는 법칙입니다. 인기라는 건 언제 시들어질지 모르는데 한 번 그 생활에 맛을 들이면 다른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거죠. 지금도 기획사에서 또는 골방에서 열심히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이 땅의 수백 만 연습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오르려 했던 나무는 다름 아닌 ‘욕망의 나무’인데 그 나무 끝에는 뭐가 있을까요. 그게 찬란하고 달콤한 열매는 아닌 것 같다고 이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0억 원이 있으면 행복할까. 잘 나가는 스타나 CEO가 되면 행복할까. 우리나라 최고 부자라는 삼성 이건희 가족들도 그리 행복해 보이진 않던데…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많아진다고 해서 마냥 심란하기만 한 영화는 아닙니다. 장면장면의 몰입도가 높고 배우들의 대사 구사력도 압권입니다. 일단 좋은 시나리오라서 그렇겠지요. 어쨌든 시간이 된다면 한 번 극장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제 술을 마시며 이 영화 생각을 다시 하다가 엉뚱하게도 줄리안 무어가 미아 와시코브스카게 맞아죽을 때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던 피투성이 트로피가 오스카였는지 골든글로브였는지가 궁금하더라구요. 뭐, 어느 쪽이라도 비참하고 씁쓸하긴 마찬가지겠지만 말입니다. (맥스무비에 실린 허남웅 기자의 리뷰에서 많은 내용을 참조해 썼습니다. http://m.maxmovie.com/news/news_view.asp?mi_id=MI010077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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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엔 연극을 한 편 보자고 전부터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올 크리스마스에 선택한 작품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목걸이가 언제나 옳아요]라는 창작극입니다. 제목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싶었는데 연극을 보면서 의문이 풀렸습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과 기드 모파상의 [목걸이], 그리고 안데르센의 [영감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아요] 세 편을 묶어 한편의 뮤지컬로 만들었으니까요.  이 연극은 100% 노래만 하는 뮤지컬이 아니고 등장인물들이 라디오 공개방송을 진행하면서 잘 알려진 단편소설들을 극으로 재연해 보여주는 형식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왜 이런 노래를 부르는지, 또 기왕의 단편소설이나 동화들이 현대에 와서 어떻게 재해석되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고 작가나 연출자의 기획 의도도 명확히 알 수 있죠. 진행자와 초대손님들, 그리고 밴드가 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따뜻하고 편안하게 진행되는데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모두 훌륭합니다. 소극장이라 배우들의 목소리나 동작이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는 장점도 있구요. 뮤지컬 장면들의 화음도 뛰어납니다.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하고 춤추는 배우들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별로 많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닐 텐데 언제나 어딘가에선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한 것이죠. 이런 일은 취미삼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작년에 봤던 연극 [식구를 찾아서]의 배우와 스탶들이 다시 뭉친 연극이라 들었습니다. 그때도 참 재밌게 봤는데. 각본을 쓴 오미영 작가의 작품은 다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제목에 들어있는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이 연극은 12월 28일까지 대학로 아리랑소극장에서 계속 상연됩니다.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계절, 사랑하는 사람과 연극을 한 편 보는 건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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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볼 연극 제목이 뭐랬지?” 

“반도체소녀!”


그럼 좀 심각한 내용이겠네. 저는 반도체소녀라는 말을 듣고 김옥빈이 나오는 이재용 감독의 옛날 영화 ‘다세포소녀’를 떠올렸다가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그래, 가끔은 심각하고 진지한 연극도 한 편 봐줘야지. 게다가 이 연극은 아내와 같이 ‘여자연구소’ 라는 모임의 멤버로 활동 중인 연극배우 이승연 씨가 출연하는 덕분에 가게 된 거니까.



지금 대학로 ‘아름다운극장’에서 문화창작집단 날이 상연하고 있는 연극 [반도체소녀]는 짐작대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처럼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노동자 이야기입니다. 소재 자체가

슬프고 심각한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한 시간 반 가량 되는 상연시간 내내 심각하기만 하면 관객들 몸이 뒤틀려서 끝까지 보기 힘들겠지요. 그래서 여기에도 재미있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일인다역’ 역을 맡은 배우 오주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연극 도중 부당해고 된 재능교육 선생님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는 인물 혜영 옆에 가 느닷없이 작업을 거는 연극배우 오주환은 자기가 가난한 연극배우임을 밝히며 이번에 들어간 연극 [반도체소녀]에서는 자그마치 ‘1인 14역’을 맡았다며 한탄을 하기도 합니다. 그 후에 그는 정말 신문기자, 인사담당자, 취객, 경찰, 퀵서비스 직원 등등 벼라별 변신을 거듭하며 관객들에게 깨알 웃음을 선사합니다. 어제는 판사로 분한 장면에서 맨 앞줄에 앉아 보던 저에게 와 망치를 선물하고 갔습니다 



연극은 호스피스로 일하며 ‘반도체소녀’와 인연을 맺은 간호사 정민과 그녀의 남동생 세운, 정민의 남자친구 동용, 그리고 세운의 여자친구 혜영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호스피스인 정민은 임신 3개월 상태인데 얼마 전에 정을 붙였다가 죽어버린 환자 ‘반도체소녀’가 늘 눈에 밟히고 삼성전자 서비스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친구 동용의 건강도 늘 걱정입니다. 삼성에 입사하는 꿈을 꾸며 공부를 하고 있는 동생 세운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언급하며 자신의 ‘스펙쌓기’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상주의자 노교수가 못마땅하고 그런 자신을 이해하고 독려하기는커녕 사사건건 비난하며 ‘쓸데 없이’ 재능교육 1인시위나 하고 있는 여자친구 혜영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이래저래 모두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든 피곤한 인생들이죠. 


연극은 그러나 섣불리 그들의 처지를 도약시켜 해피엔딩으로 이끌거나 하지 않습니다. 반도체소녀는 죽은 뒤에도 이승을 뜨지 못해 정민 곁을 맴돌고 세운은 입사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맙니다. 설상가상 몇 개월 뒤 정민과 결혼식을 올리려던 동용은 갑자기 심장이 멈춰 죽어버리구요. 교수님이나 혜영에게도 뭐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없습니다. 아마 이 연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지금 2014년의 현실을, 그리고 우리 같은 사회 구성원들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게 없는 2015년, 2016년의 대한민국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을 좀 찾아보니 이 연극에서 교수 역을 맡은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실제로 ‘우리나라 강단의 마지막 맑시스트’로 유명한 분이더군요. 아무래도 현직 연기자가 아니라 연기는 좀 부자연스러웠지만 그 진정성을 생각하면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분이었습니다. 일부 수구언론에서 이 작품에 ‘빨갱이 연극’이라는 낙인을 찍었다고 하던데, 아마 이 분의 출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이 연극이 빨갱이 연극은 아닙니다.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 얘기하면 무조건 다 빨갱이 콘텐츠입니까. 그리고 요즘 세상에 빨갱이 연극이면 또 어떻습니까. 하긴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백]도 ‘빨치산 소설’이라고 쓰는 기레기들한테는 뭐든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연극을 볼 때면 늘 신기합니다. 특히 어제처럼 소극장 연극인 경우 바로 눈 앞에서 자잘한 소도구들만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게 그렇습니다. 바로 제 발 앞에 놓인 기다란 직사각형의 아크릴 박스와 약간의 물, 그리고 모래만 가지고도 금방 바닷가가 되는 마술이 벌어지니까요. 불이 꺼지고 깜깜했다가 다시 들어오면 어둠 속에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있거나 서 있는 배우들도 신기하구요. 배우들과 관객이 서로 짜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공법의식이 생겨 늘 즐겁습니다. 그리고 이런 ‘쓸데 없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착하게 느껴져 고마운 생각도 들고요. 


대학로 좋은 배우들의 고른 열연이 빛나는 연극이었습니다. 일단 11월 30일까지 상연한답니다. 시간 내셔서 한 번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제 아내는 이 연극을 보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함께 연극을 보고 저희에게 맛있는 청국장 등을 선물해 주신 전미옥 대표님도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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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춘희로 나왔던 심은하의 직업이 결혼식 촬영기사였죠. 주말이면 정말 바쁜 결혼식 촬영기사. 결혼식은 두 사람에게 거의 단 한 번뿐인 행사고 또 단숨에 지나가기 때문에 혹시라도 잘못 찍게 되면 두고두고 욕을 먹는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결혼식 비디오라는 게 집들이날 당사자들에게나 재밌지 다른 손님들까지 박장대소하며 같이 볼 영화는 아니지요(그래서 저희 부부는 결혼식 비디오를 아예 찍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식 비디오만으로 훌륭한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큐멘터리 감독 덕 블록(Doug BLOCK)입니다.


뉴욕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살아가던 덕 블록은 ‘아르바이트’로 이십 년 간 결혼식 비디오를 촬영했답니다. 수입이 꽤 짭짤하고 안정된 생활이었던 모양이지요. 그런다가 어느날 자기가 비디오를 찍어준 그 사람들은 결혼식 이후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평범했던 결혼식 비디오들이 감독의 신선한 발상에 의해 새로운 영화로 탄생하는 순간이었죠. 무려 112쌍의 결혼식 고객 중 9쌍이 그에게 인터뷰 허락을 전해왔습니다. 감독은 그들을 다시 만나 결혼식 이후 각자의 스토리들을 추적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시작과 진행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고 인생에 대한 우문현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순간을 들여다보는 손쉬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다큐 감독이라 그런지 예전에 찍어놓은 결혼식 비디오도 범상치가 않습니다. 더구나 십여 년 후에 만나 그들을 인터뷰한 필름은 놀랍기까지 합니다. 인터뷰어의 통찰력에 따라 인터뷰이들의 대답의 깊이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죠. 

젊었던 신랑 신부가 아이들을 낳고 자신의 커리어를 착실하게 쌓아간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흐뭇한 일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해 간 모험담이니까요.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함께 시작했던 사람들 중 누군가는 결국 이혼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까지 가감없이 털어놓는 장면들이 있다는 것이죠. 이건 감독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영화에는 레즈비언 커플도 나오고 우리나라 여성도 나옵니다. ‘윤희’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재원이었는데 어느날 비행기 옆자리에서 “혹시 그 바이올린 케이스로 총기류를 운반하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미국에 정착하게 된 사연이었습니다. 딸이 한국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을 줄 알았던 그녀의 부모님들은 미국에서 찍힌 결혼식 비디오에서 매우 찹찹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죠. 


일부러 그렇게 고른 것은 아닐텐데 인터뷰이들이 거의 다 평범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말도 조리있게 잘들 합니다. 여유있고 유머도 풍부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천생연분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천생연분은이란 없다.” 참 열려있는 생각이죠. 이건 '첫 번째 결혼’에 출연한 ‘수와 스티브 커플’에서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어이없게도 부킹클럽이었지만 지금까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잘 살고 있으니까요. 





“모두가 두 사람을 축하해 주기 위해 있는 날, 나는 그 장면들을 잡으려 거기 있었다”라는 감독의 말이 아니라도 이 영화엔 설레는 첫출발의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애쓰고 살아가는지가 진실되게 담겨 있습니다. 아이디어란 이런 것이지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서도 남과 다른 시각으로 새로운 의미를 뽑아내는 것. 그래서 덕 블록 감독을 다시 한 번 칭찬하고 싶어집니다. 저는 평소 다큐를 좋아하는 아내 덕분에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참 행운이었죠. 다른 분들과도 이 행운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www.eidf.org/kr 에 들어가시면 공짜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번 주까지만 상영하는 것 같습니다.이런 영화는 때를 놓치면 나중에 DVD나 ‘어둠의 경로’로도 찾기가 매우 힘드니 지금 시간을 내서 꼭 보시기 바랍니다. 러닝타임은 95분 6초. 올해 ‘EIDF 2014’ 시청자·관객상을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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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에 늦게 일어나 토요일자 신문을 읽었습니다. 신동호 논설위원이 쓴, 2001년도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을 탔던 [버스44]라는 중국의 단편영화 이야기를 다룬 칼럼이었죠. 세월호 참사에 일그러진 우리들의 현실 인식이 겹치는 기발한 영화였습니다.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녀도 이 영화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올렸더군요. 짧은 영화니까 다들 한 번씩 보셨으면 해서 공유합니다. 신문칼럼도 함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5092010555&code=9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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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다는 것은 일부러 돈과 시간을 내고 컴컴한 극장으로 들어가 남들이 만들어놓은 거짓말에 기꺼이 속아줄 마음을 먹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이건 좀 미친 짓인 거 같다. 그런데 얼마 전 개봉한 [그랜드 브다페스트 호텔] 같은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오늘 이런 미친 짓 하길 참 잘 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해보자,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니 이를 또 어쩌랴. 한 번 생각해 보자. 그 옛날 남부러울 것 전혀 없고 아라비아의 왕이기도 했었던 그 자는 왜 매일밤 아름다운 샤라자드의 옷을 벗기는 대신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 달라고 너드짓을 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어렸을 때 잠들기 전이면 할머니에게 호랑이든 곰이든 나무꾼이든이 나오는 뻔한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매일 졸랐을까?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던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지구인들 유전자 어딘가엔 권태를 이기지 못하는 취약점이 있거나 아니면 ‘이야기 본능’이라고 하는 의외의 요소가 찰지게 아로새겨져 있는 모양이다. 


이야기. 그렇다. 이야기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래서 누구든 틈만 나면 ‘이빨’을 까고 ‘구라’를 푼다. 그런데 똑같은 이야기라도 어떤 놈이 하느냐에 따라, 또는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이야기의 깊이와 재미는 시시각각 달라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요즘은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듣고 보고 느끼는 공감각의 시대라 그 방법론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래서 요즘 잘 나가는 소설가나 철학자, 교수들 중에는 자신의 직업명을 제껴버리고 ‘이야기꾼’이라는 닉네임을 이름 앞에 달고싶어 안달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원한다고 다 이룰 수는 없는 법. 품새가 어설프거나 도그마적인 한계에 부딪혀 엉뚱한 길을 헤매는 수많은 중생들을 뒤로 하고 단연 괴팍한 천재로 우뚝 빛나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웨스 앤더슨이다. 그는 자신만의 강박적인 스타일과 자유로운 상상력, 복고적 화법, 강렬한 색채, 미친 속도감과 블랙유머 등을 무기로 단숨에 그 분야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번엔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흥미진진한 가상 공간을 삽으로 푹 떠서 통째로 들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1930년대 동유럽의 가상국가 주브라스카 공화국에 있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총지배인 구스타프가 고객이자 연인이었던 마담 D의 아들에 의해 그녀의 살인범으로 몰린 뒤 ‘사과를 든 소년’이라는 비싼 그림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무자비한 암살자에게 쫓기는 것은 물론 투옥과 탈옥 등 갖은 고초를 놀이공원 자유이용권 코스처럼 두루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누명을 벗게 되지만 그만 허무하게 사망해 버리고 그 호텔은 벨보이였던 무스타파(또는 제로)가 물려받게 된다는 코믹 환타지 역사 미스터리 모험극, 이라고 거칠게 줄거리를 요약하고 나면 그 무신경함에 분개한 나머지 나를 죽이려 드는 사람들이 여럿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살인사건을 다룬 스릴러나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그 구조가 너무나 빈약하다. 더구나 코미디라고 하기엔 고급스러운 유머가 너무 많이 등장하고 역사극이라고 하긴엔 그 연대가 흐릿하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일단 너무 재밌어서 지난 몇 달 간 봤던 다른 영화들이 어느 하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호텔 부다페스트 호텔]이 관객 40만을 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2014.04.08. 경향신문 24면 하단) 소위 ‘다양성 영화’로서는 초대박을 친 것이다. 무엇이 이 영화를 이토록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작품으로 만들었던가. 우선 이전 웨스 앤더슨의 이전 영화들(이르테면 ‘로얄 테넌바움’이나 ‘다즐링 주식회사’, ‘문라이즈 킹덤’ 같은)에 열광했던 매니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감독의 필모그라피는 물론 카메라나 렌즈의 종류, 영화 속의 세세한 미장센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형식미를 중요시하는 시네필들의 헌신적인 입소문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영화감독 박찬욱 등 문화계 유명인사들의 ‘투 썸즈 업’ 추천이 그 인기몰이에 더욱 불을 지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앞서는 요인들이 있으니 그것은 이 영화가 그 자체로도 참 이쁘고 경쾌하고 재밌다는 사실이다. 우선 주인공들의 말이나 행동이 엄청 빠르다. 주인공 구스타프는 물론 그의 천적인 드미트리, 벨보이 제로, 그리고 벨보이의 여자친구이자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는 빵집 아가씨 아가사까지 이들은 한결같이 대사가 빨라서 이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듣고 있자면 흡사 우리나라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이나 표정들도 옛날 무성영화 시절의 배우들처럼 속도가 급하고 경쾌해서 어떤 슬픈 장면에서도 결코 완전 슬퍼지지는 않고 위험한 순간에 이르러서도 어느 정도 마음을 덜 졸이게 되는 것이다. 



옛날 옛적에 어떤 마을에…하고 고전적으로 이야기 파일을 여는 형식들은 결국 ‘이거 내가 누군가에게서 들은 얘긴데…’라는 조건이 전제됨으로써 전달자의 각색이 더 흥미진진해지는 법인데 이 영화는 그림 속의 그림이 몇 개나 겹치고 책속의 책처럼 이중삼중 구조를 가지고 있는 ‘챕터식 구조’라 이야기의 변용이나 화면비율이 만화나 동화처럼 자유롭고 또 그로 인해 어느 시점에서 카메라가 멈추든 결국 그 시절의 아련한 노스텔지어를 불러오고 마는 의외의 효과까지 거두게 된다. 


거기다가 웨스 앤더슨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을 기꺼이 하찮은 소품 정도로  취급해도 상관없다는 듯 작정하고 모여든 수많은 일급 배우들 - 랄프 파인즈, 틸다 스윈튼, 시얼샤 로넌, 윌렘 데포, 애드리언 브로디, 에드워드 노튼, 주드 로, 빌 머레이, 하비 케이틀, 레아 세이두 등을 동시패션으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도대체 무슨 깡으로 이런 대스타들을 한꺼번에 스크린 안에 담을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배우들을 병렬식 구조로 줄줄이 세우는 데 일가견이 있는 ‘대규모 앙상블’의 대가 로버트 알트먼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역설적으로 어느 면에선 이게 더 쉬울 수도 있다고 한다. 뭐 하나가 삐끗하면 다른 쪽으로 도망갈 구석이 생기니까.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수의 등장인물들로 인한 복잡함이나 지루함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미스터리 구조를 슬쩍 끼워넣는 것이다. 이 영화의 시작도 틸다 스윈튼이 분한 마담D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살인사건이었다. 물론 이 살인사건이나 누명은 일종의 ‘맥거핀’ 효과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하고 사소하다. 그러나 이 모티브 덕분에 주인공들이 호텔을 벗어나 알프스 산등성이에 있는 수도원까지 올라가서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히치콕의 옛 영화를 보는 듯한 흐뭇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된다. 거기다 ‘체크포인트19 교도소’ 등을 잡을때의 카메라 앵글이 보여주듯 웨스 앤더슨의 좌우대칭에 입각한 엄격한 카메라 워킹과 대담한 컬러감은 불현듯  팀 버튼의 초기 영화를 떠오르게 하고 때로는 박찬욱의 어떤 영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가장 큰 덕목은 방금 말한 영화들나 감독의 생산물과 어느 정도는 유사할지언정 결코 같다고는 할 수 없는 또다른 ‘향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이 영화에서 제 3의 텍스트나 영화가 떠오른다며 자랑하는 것은 영화 마니아적인 취미를 즐기는 호사가의 잘난 척일 뿐이다. 



베를린 영화제는 작년에 이 영화에 심사위원 대상을 안겼다. 아마 그들의 시상 이유에는 웨스 앤더슨의 독창적인 미학과 그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테크닉들, 유려한 음악들,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지평을 넓힌 뛰어난 기획력, 그가 영화 말미에 언급한 오스트리아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에 대한 예우까지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그럴듯한 이유보다 앞서는 것은 역시 상영관에서 엔딩 크레딧을 보고 일어서는 순간 ‘아, 이런 영화라면 한 두 번쯤은 더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웠던 시간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웬만하면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는 극장문을 나서지 마시길 바란다. 웨스 앤더슨은 영화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깨알 재미’를 선사하는 성실한 감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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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람은 신기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 국악을 배워 국악인으로 생활하는 한편, 자신의 일렉트릭 밴드도 가지고 있다. 운 좋게도 몇 달 전엔 홍대앞 클럽에서 ‘이자람밴드’의 공연을 보았는데 지난 토요일엔 과천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이자람이 혼자 공연하는 판소리 [억척가]를 보았다. 이 공연은 2011년 초연부터 관객과 평단의 만장일치 찬사를 받고, 프랑스와 루마니아 등 세계적으로도 기립박수를 받으며 큰 화제를 뿌린 바 있다고 한다. 






판소리는 모든 등장인물의 대사와 노래, 동작을 혼자 하는 종합예술이다. 나에게는 얼마 전 타계한 이은관 선생이 ‘TBC향연’이라는 TV프로그램에 나와 ‘배뱅이굿’을 할 때 넋을 잃고 본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접하는 판소리였다. 놀라운 건 두 시간 반 동안 무대를 꽉 채우며 종횡무진 활약하는 판소리꾼 이자람 뿐 아니라 애초에 브레이트의 희곡을 읽고 영감을 얻어 이 극의 모든 대사와 작창(작곡)까지 해낸 사람 역시 이자람이라는 사실이다. 


숙련된 기교나 타고난 천성을 자랑하는 예술가들은 많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지성과 감성,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창조력까지 두루 갖춘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이자람은 우리 예술계의 소중한 자산이라 할 것이다. 


무대가 열리면 이자람이 나와 의고체로 된 ‘적벽가’의 첫 소절을 한 번 읊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어려워서 어디 알아먹겠느냐?”면서 더 쉽게 고친 ‘억척가’를 하겠다고 의뭉을 떤다. 김순종이라는 이름처럼 ‘순종적이었던’ 여인이 어떻게 우여곡절 끝에 남편과 헤어져 달구지 하나만 끌고 어린 아이들과 전쟁통을 살아가면서 김안나(이제 애는 더 안 낳아, 안 낳아…하다가 안나킴이 됨), 김억척이라는 이름으로 변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이 대단한 일인극은 부채 하나를 든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그리고 기타와 드럼, 키보드로 이루어진 밴드와 함께 두 시간 반 동안 관객들을 칼칼칼 웃게 만들고 어흐어흐 눈물 흘리게 만든다. 


그녀의 절창, 능청, 액션, 절묘한 의성어까지…아, 길게 써봐야 손가락만 아프다. 기회가 되거든 다음엔 꼭 놓치지 마시고 직접 보시라. 이런 공연은 ‘Seeing is believing’이요, ‘보는 게 남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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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운영을 하지 않는 네이버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예전에 대행사 그만둔 후 썼던 백수일기 한 토막을 발견했습니다. 강남역 근처 혼자 살 때였는데 날짜를 보니 무려 2003년 4월이네요. [간장선생]이란 영화 참 좋아했는데.





2003.4.24 PM 3:00

낮잠에서 깨어나 늦은 점심을 먹기 전 케이블TV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며 지난주 놓친 연속극들을 섭렵하다가 충동적으로 시티문고로 달려가 허겁지겁 책을 몇 권 구입함. 


≪타임머신≫, ≪투명인간≫ 등을 썼던 H.G 웰스의 ≪세계문화사≫, 

다큐멘터리 영화 <보울링 포 컬럼바인>의 감독이 쓴 <<멍청한 백인들≫, 

그리고 일본의 드라마 작가이자 소설가 카마타 토시오의 ≪29세의 크리스마스≫ 1, 2권. 



2003.4.24 PM 5:00

느닷없이 '이게 몇 년만이냐'며 해도 지기 전 동네로 찾아온 후배 이종혁과 순대집에서 소주를 마심. 전날의 음주행각과 늦은 점심식사 등의 영향으로 인해 소주 두 병을 겨우 비우고 일어섬. 카운터 앞에서 미적미적하고 있는데 이종혁이 마침 잔돈이 없다고 선수를 치며 오천 원을 내밈. 두 지갑의 돈을 합쳐봐도 이천 원이 모자람. 짧게 절망하고 카드를 꺼낸 뒤 이종혁에게 차비조로 삼천 원을 돌려줌. 백수의 카드를 쓰게 하다니... 얄미운 놈.



2003.4.24 PM 8:00

저녁뉴스를 보다가 인터넷에 들어가 평소처럼 약간의 포르노를 다운받음. 태풍권의 영향으로 전국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끝나고 <위풍당당하지 못한 그녀>를 건성으로 보다가 TV를 끈뒤 ≪29세의 크리스마스≫를 집어듬.


비가 오기 시작함. 소설은 생각보다 재밌고 몹시 맥주가 땡김. 옆 건물의 편의점으로 달려가 카스 500cc를 두 캔 사고 냉동만두를 레인지에 데운 뒤 맥주를 홀짝거리며 소설을 탐독함. 1권을 다 읽고 맥주 두 캔을 다 마시니 어느덧 새벽 3시. 2권은 내일 마저 읽기로 하고 침대로 올라감.



2003.4.25 AM 9:00

계획보다 일찍 깨어난 자신을 원망하며 조간신문을 집으러 나가다가 이사를 가는 옆집 아줌마와 마주침. 조만간 첼로를 하는 처녀가 혼자 이사올 거라는 아줌마의 귀뜸에 환호작약함. 화장실에서 신문을 대충 훓어보고 간단한 아침을 끓여먹은 후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면서 미소지음. '어서 침대로 들어가라고,다시 자도 된다고'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따뜻하게 속삭여 주는 듯한 착각속에 평화롭게 잠이 듬. 



2003.4.25 PM 12:00

이틀전에 약속한 전 회사 동료 김욱현 부장과의 점심식사. 탕수육에 빼갈을 네 잔 정도 마심.

회사로 잠깐 올라가 마주치는 동료들마다 '잘 지내고 있다'고 과장되게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킬킬대다 귀가함.



2003.4.25 PM 5:00

어제 인터넷으로 대여신청한 DVD <간장선생>이 도착함. 영화를 보기 전 백수일기를 토닥거리고 있는데 우체부 아저씨가 초인종을 누름. 주간지 [Film2.0] 2년 정기구독 사은품으로 고른 공짜 DVD 16장이 등기우편으로 도착함.



내일을 향해 쏴라(SE)

타이타닉

에이리언1(SE)

에이리언2(SE)

사운드 오브 뮤직

가위손

다이하드1(SE)

다이하드2(SE) 

로마의 휴일(SE)

THE BEATLES "A HARD DAY'S NIGHT"

바닐라 스카이

가게무사

판타스틱 소녀백서

더 도어즈(SE)

터미네이터2(UE) - 2장으로 침




갑자기 쏟아진 DVD의 세례에 잠시 어이없어 함. 일단 내일 반납해야 하는 <간장선생>을 보기로 결정함. 내일은 전주영화제에 가서 밤새도록 네 편의 영화를 봐야 하므로 컨디션 조절이 절실함. 오늘은 일체의 저녁약속을 삼가기로 다짐함. 


백수, 바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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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 ‘와, 좋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주제의식이나 플롯이 아주 선명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좋다고 느끼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좋긴 좋은데 도대체 뭐가 좋은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자고 일어나도 생각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지난 일요일에 본 영화 [노예 12년]은 후자였죠. 영화를 보고 나서 직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며칠이 흐른 후에야 이렇게 천천히 리뷰를 써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벙찐 표정으로 멀뚱멀뚱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는 목화농장 노예들의 모습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몇 초간 지속됩니다. 감독이 “자, 이제부터 시작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인상 깊은 첫 장면입니다.


1841년 뉴욕의 사라토가에서 바이얼린 연주자로 살아가고 있는 흑인 솔로몬 노섭은 어느날 예술단을 사칭한 사기꾼들에게 속아 폭음을 한 뒤 쇠사슬에 묶여 노예상에게 팔려가게 됩니다. 당시엔 흑인들이 자유롭게 사는 지역과 노예로 사는 지역이 혼재하던 시절이었는데 노섭은 하룻밤의 실수로 졸지에 자유인에서 플랫이라는 이름의 노예로 신분이 달라지게 되어버린 것이죠. 그로부터 12년 간 솔로몬 노섭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가까스로 다시 자유인이 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영화는 얼핏 150여 년 전 한 흑인 남자의 기막힌 삶을 통해 우리가 살던 세상의 야만성을 돌아보고 자유의 소중함을 설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의지로 운명의 비가역성을 이겨낸 안티히어로의 인간승리 이야기’로만 볼 수 없는 게 바로 스티브 맥퀸이라는 감독의 이름 때문이죠. 데뷔작 [헝거]는 못 봤지만 전작인 [셰임]만 보더라도 이 젊은 아티스트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평범한 인간드라마에 만족할 리가 없다는 선입관이 생깁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선입관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사람은 똑똑한 인간이니까 이번에도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또는 저 사람은 업계 평판이 대단하니까 아이디어도 무궁무진하고 통찰력도 뛰어날 거야. 또는 저 여자는 얼굴이 예쁘니까 분명 남자친구가 있을 거야…)



스티브 맥퀸은 놀라운 미술적 재능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획득한 비주얼 아티스트 출신 영화감독입니다. 당연히 그가 만드는 영화는 한 장만 한 장면이 다 당장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도 좋을만큼 때깔이 좋고 구도가 탁월합니다. 이번 영화도 그런 장면들이 차고 넘치게 나옵니다.배가 처음 나타날 때 돌아가는 터빈의 모습과 배 안에서 느닷없이 벌어지는 정사신에서 보여주는 빅클로즈업은 정말 압도적이죠. 그리고 배 안에서 어떤 흑인 여자가 겁탈 당할 위기에 처할 때 노섭의 동료가 그걸 막으려다가 허무하게 칼에 찔려 죽는 장면에서는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번 드라마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진행이 되는 편입니다. 첫 장면 이후의 플래시백 말고는 영화 속 사건들도 그냥 시간 순으로 진행이 됩니다. 말하자면 감독이 자신의 능력을 절제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어쩌면 감독은 현란한 비주얼적 장치들을 거둬들임으로써 관객들이 보다 더 영화 속의 다른 이야기에 집중하길 바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더 집중적으로 봐줬으면 하는 얘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영화는 오래 전 이야기이고 또 솔로몬 노섭이라는 사람이 겪은 특이한 실화이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비슷하듯이 영화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등장합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세상을 유영하다가 갑자기 불의의 덫에 걸려들지만 끝까지 자존감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노섭, 비교적 인간적이지만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충될 때는 그저 허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주인 윌리엄 포드,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휘둘려 바닷물을 마시듯 끊임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두 번째 주인 에드윈 엡스까지.



노예로서의 생활은 끔찍한 것입니다. 우리도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종이나 하인이라는 노예제도가 있었죠. ‘식모’라는 이름으로 임금과 성을 착취당하기 일쑤이던 반노예도 있었구요. 그런데 이 노예들도 ‘뒤웅박 팔자’라고나할까, 정해진 주인이나 환경에 따라 고생의 차이가 천차만별입니다. 노섭은 첫 번째 주인인 포드 밑에서는 비록 고생스럽더라도 자신의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펼치기도 하고 나름대로 중간 관리자와 싸움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드가 빚에 쫓겨 그를 잔인하고 포악하기로 소문난 엡스에게 팔아버리죠. 그때부터는 더 생지옥입니다. 목화밭에서 하루 종일 아무리 열심히 목화를 따도 저녁에 결산하는 자리에선 목표량에 모자라는 무게만큼 매일 채찍을 맞아야 했습니다. 도망가려고 몇 번이나 시도를 해봤지만 그 때마다 명백하게 깨닫는 건 잡혀서 나무에 목 매달리기 전에는 탈출할 방법이 없다는 절망뿐이었습니다.



이런 지옥 같은 삶을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걸까요? 농장에서 목화를 가장 잘 따는 팻시는 노섭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합니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육체적 고생은 물론 주인인 엡스에게 당하는 성폭력, 그리고 주인마님의 노골적인 질투까지 더해지니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말이죠. 그러나 노섭은 그 부탁을 거절합니다. 그녀에게 버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돌보기도 벅차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은 견디는 것’이라는 메시지는 오히려 화면 밖의 감독이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영화의 폭력장면은 매우 사실적입니다. 처음 노섭이 술에서 깨어나 자신은 플랫이 아니라고 말하다가 등을 얻어 맞을 때를 시작으로 수많은 채찍질, 주먹질, 마님이 팻시에게 던지는 술병, 마지막에 나오는 길고 긴 롱테이크 신의 채찍질 등 어느 하나 편안한 장면이 없이 가장 높은 레벨의 압박감을 유지합니다. 덕분에 괴로운 건 영화 속 노예들만이 아닙니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도 그 잔혹한 장면들을 참아내는 건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런데 스티브 맥퀸 감독은 눈 돌리지 말고 그 장면들을 똑바로 보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인터뷰를 읽어보니 마지막에 팻시를 채찍질 하는 장면은 그 중요성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단 한 번의 테이크로 찍어냈다고 하더군요. 밀도가 대단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아마도 노섭이 작업반장과 싸우다가 결국 나무에 목이 매달려 선 채 진흙탕에 발을 디디고 간당간당 서 있는 장면일 겁니다. 두 손조차 묶인 채 미끌미끌한 진흙탕 위에 까치발을 하고 서 있는 노섭은 살짝 미끌어지기만 해도 목숨을 잃을 지경이지요. 그런데 카메라는 이 장면을 롱테이크 기법으로 잔인하게 오래오래 잡아냅니다. 감독의 재능이 빛나는 명장면이죠. 처음엔 안타깝게 지켜보던 동료들도 결국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정말 사는 게 이래도 되는 걸까요?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됩니다. 아, 인생이라는 건 정말 참는 것의 연속이구나.‘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라는 속담도 있지만 결국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서 참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참는 경우가 더 많은 거구나, 하는 아픈 깨달음이죠. “제가 가진 선의는 제가 소유한 만큼의 동전 갯수를 넘지 못합니다”라는 노예상의 말처럼 세상의 선의에 기대 산다는 건 헛된 망상일 뿐입니다.노섭도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오는 행운을 잡게 되었을 때 자신을 죽여달라던 팻시를 한 번 꽉 껴안아주고는 그대로 도망치듯 마차로 오릅니다. 혼자 살기도 바쁜데 남의 챙길 여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사정이 이 정도인데도 우리는 배를 타기 전 노섭이 내뱉었던 말 “I don’t wanna survive, I wanna live!”라는 말을 기억해야 하는 걸까요? 멋진 말이긴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감독은 오스카 작품상을 타고 난 직후 이 대사를 다시 한 번 언급했지만.


아무튼 참 세고 진하고 묵직한 영화였습니다. 요즘 여유가 없어서 이 영화와 함께 등장한 화제의 작품들을 아직 못 보았지만 한동안 이 영화를 쉽게 잊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이 모든 훌륭한 얘기를 이끌어 가는 데는 명배우들의 명연기가 있었습니다. 요즘 ‘셜록’ 시리즈로 인기 절정에 있는 베네딕트 컴버베치와 스티브 맥퀸의 모든 영화에 출연 중인 마이클 패스빈더가 연기 경연을 벌이고, 얄미운 작업 반장 역을 맡은 폴 다노의 연기도 [데어 윌 비 블러드]에 이어 또 한 번 대박이죠. 팻시 역을 맡았던 루피타 니용고는 결국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탔군요. 제작자인 브래드 피트도 뒷부분에 잠깐 출연하는데, 너무 천사 같은 역으로 나와서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쟁쟁한 스타들을 조연으로 만들어버린 치웨텔 에지오프의 연기는 정말 발군입니다. 이 친구를 어디서 본 듯 하다구요? 저도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러브 액추얼리]에서 키이라 나이틀리의 남편으로 나왔더군요. 그 유명한 ‘스케치북 고백 신’에서 거실 안 소파에 앉아있던 흑인 남자가 바로 그였습니다. 엡스의 부인으로 나왔던 사라 폴슨은 [Studio 60 on the Sunset Strip]이라는 아론 소킨의 드라마에서 매튜 페리의 전 애인이자 돌고래 소리를 잘 내던 코미디언이었구요. 중요한 건 아닙니다. 뭐, 그렇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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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예정되었던 일정들도 미리 앞당겨져 다 소화되는 바람에 졸지에 사무실에 한가한 바람이 불길래 옆방의 윤PD를 꼬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보러 가자. CGV압구정, 3시 20분 있네. 표는 내가 살게.” 


대뜸 넘어오는 윤PD. 그래서 오래 전부터 보고 싶어했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드디어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NHK의 대하드라마 [료마전]의 타이틀롤을 맡았던 미남 배우죠.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의 탐정물 [갈릴레이] 시리즈의 주인공이기도 하구요. 언제 봐도 준수한 외모와 좋은 인상,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자기관리 등으로 이름이 높죠. 1969년생인가 그런데 아직도 결혼을 안 해서 그런지 지금도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싶은 연예인’ 같은 앙케이트 조사에서 해마다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엄청난 훈남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실력 있는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하다죠? 나 참. 


그런데 후쿠야마 마사하루만큼이나 저를 반갑게 했던 인물은 상대역으로 나오는 릴리 프랭키였습니다. 이름이 좀 이상하죠? ‘Frank Goes to Hollyood’ 라는 영국 그룹이 있었는데 거기서 따온 예명이랍니다. 이 사람은 연기자이기 이전에 일러스트레이터였고 칼럼니스트였고 작곡가였고 라디오 DJ였으며 소설가였습니다. 보잘것없게 생겼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다방면에 눈부신 재능을 뿜어내는 인간이죠. 예전에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함께 [료마전]에도 특별출연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라는 자전적 소설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전 이 소설을 읽고 정말 펑펑 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광고 카피가 ‘우는 얼굴을 보이기 싫다면 전철에서는 읽지 마라’였다네요. 나 참. 그런데 아마 지금 읽어도 또 울 겁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 책을 읽고 그렇게 울었는데 이젠 저도 릴리 프랭키처럼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까요. 



영화는 아이가 병원에서 바뀐 줄도 모르고 육 년 동안이나 친자식으로 키워오다가 어느날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당황하는 두 집안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매우 극적인 사건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늘 그렇습니다. 죽어서 림프계에 머물게 된다거나(원더플 라이프), 엄마가 아이들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버린다거나(아무도 모른다), 실직한 사실을 숨기고 형의 기일을 챙기러 부모님댁으로 찾아 온다거나(걸어도 걸어도) 하는 돌발상황을 던져놓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살아가며 변화하고 변화시키는 인간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관찰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떤 묵직한 울림이나 깨달음이 다가오는 것이지요. 특수한 상황을 통해 인류 보편적 가치까지 서서히 끌어올리는 통찰력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젊은 거장으로 불리게 한 힘일 것입니다.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맡은 아버지 역은 빈틈없고 세련된 성공 비즈니스맨의 모습입니다. 당연히 이 문제도 아주 이성적으로 풀어가려고 하죠. 반면 상대편 아버지 역을 맡은 플랭키 릴리는 시골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입니다. 문제의 아들 말고도 두 명의 아이를 더 키우고 있는 40대의 중년이구요. 당연히 영화는 후쿠야마 마사하루 부부의 입장에서 진행이 됩니다. 어쩐지…수학이나 피아노를 잘 못하는 거 보면 역시 핏줄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는 거야. 저렇게 초라한 전파상을 하면서 애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는 걸까? 차라리 우리가 두 아이를 모두 키우면 안 될까…?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얼굴은 점점 초조해지는 반면 릴리 프랭키의 표정은 늘 여유가 있습니다. 그건 두 가족이 함께 만나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엘리트 아빠는 자기 친아들과도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서먹서먹해 하는데 전파상 아빠는 패스트푸드점 놀이시설에서 아이들과 한덩이가 되어 뒹굴고 웃으며 순간을 즐깁니다. 어떤 가정이 더 행복할 지는 관객이 눈으로 지켜보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히로카즈 감독은 아이들을 참 잘 찍습니다. [아무도 모른다]를 찍을 때는 아이들에게 연기지도를 하는 대신 촬영 직전에 아이들에게 다가가 앞으로 찍을 내용을 귀에 조용히 속삭여 주고는 그냥 마음대로 놀게 했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연스러운 연기들이 나오는 것이겠죠. 저는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이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사랑스럽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아이들에겐 아이들의 생각이 있다’ 라는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영화 도중 초밥 먹는 장면이 나오자 “외, 맛있겠다!”라며 입맛을 다시던 윤PD는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대뜸 초밥 얘기부터 합니다. 



윤PD : 정했어요. 오늘 저녁엔 혼자라도 회를 먹을 생각입니다. 

성준 : 영화 참 좋지? 


윤PD : 그러게요. 잔잔하게 찍었는데도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아요. 

성준 : 저런 게 바로 사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윤PD : 예, 애를 하나 낳아볼까 하는 생각이 다 들더라니까요. 

성준 : 하하. 잘 생각해. 



윤PD나 저나 둘 다 아이가 없는 놈들인데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상관 없습니다. 이 영화는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영화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인지를 질문하게 하는 영화니까요. 그리고 좋은 인간이 되는 법을 함께 고민하게 해주는 좋은 영화니까요.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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