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오늘 낮, 뒤늦게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러 갔다. 극장은 아리랑시네센터. 2000년대 초반 정릉에서 혼자 살 때 갔던 것 말고는 십수 년만에 가보는 극장이다. 구민회관입구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형!" 하고 부르길래 쳐다보니 같은 동네 사는 배우 박호산이다. 작품 연습하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 요즘 좀 뜸했는데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니 반가웠다.


버스를 탔더니 어떤 아저씨가 옆에 앉자마자 내 넓적다리를 꽉 잡는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손짓을 이상하게 하고 소리고 자꾸 지르는 폼이 뭔가 몸이 불편한 분 같았다. 이런 분은 혼자 버스에 타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앉아 있다가 아리랑시네센터 정류장이 가까워져 내리려고 좀 비켜달라고 했더니 얼른 다리를 접어준다. 알고보니 선량한 사람이었다.

극장에서 표를 사고 나와 먹을 걸 파는 집을 찾아 헤매다가 웬 화덕피자집에서 칠천 원짜리 스파게티를 시켰는데, 끔찍했다. 스파게티를 내주고 남자 직원들끼리 점심을 먹고 있길래 혹시 피클은 안 주냐고 물었더니 냉장고에서 포장 피클을 하나 꺼내 주며 '200원인데 그냥 주겠다'고 한다. 돈 드릴게요, 라고 했더니 괜찮단다. 한숨이 나왔다.


극장에 올라가 표를 내보이는데 키가 작고 안경을 쓰고 목소리가 높은 남자 직원이 나를 쳐다보고 웃으며 "어떻게 저 있을 때만 오시나 봐요?!" 라고 인사를 한다. 저 여기 처음 오는데요, 라고 말이 헛나왔는데도 그 남자는 여전히 친한 사람 대하듯 싱글벙글이다.

극장에 들어가니 내 자리 뒤에 앉은 어떤 아저씨가 양말을 벗고 내 왼쪽 팔걸이에 발을 올려놓고 있었다. 발을 내려달라고 정중하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두 줄 앞 좌석엔 할머니 두 분이 앉아 박근혜에 대해 큰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홍상수 영화를 보기엔 지나치게 고령이신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뒤에 있던 그 남자 직원이 날 보고 또 인사를 했다. 영화를 같이 본 모양이었다. 엇 뜨거라 하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완전히 밖으로 나가려다가 아냐, 간단하게 영화 리뷰나 써야지 하고 극장 안에 있는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계단을 올라갔더니 그 남자 직원이 "뭐 두고 가셨어요?" 라고 반갑게 묻길래 그대로 다시 내려왔다. 이상한 날이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영화 리뷰는 다음에 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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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영화들

영화일기 2017. 4. 20. 10:43


며칠 전, 작년에 극장에서 봤던 영화들의 제목을 인터넷으로 대충 찾아 봤다(아, <헤이트풀8>은 IP TV로 봤구나).

아가씨
곡성
부산행
밀정
내부자들
마스터
최악의 하루
더 킹
럭키
에브리바디 원츠 썸!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본 투 비 블루
바닷마을 다이어리
헤이트풀 8
캐롤
데드풀
빅쇼트
우리들
동주
4등
당신자신과 당신의것
태풍이 지나가고
카페 소사이어티
너의 이름은
녹터널 애니멀스
라라랜드

그리고 보고깊었는데 못 본 영화들.

더스트
신비한 동물사전
닥터 스트레인지
나, 다니엘 블레이크
비치 온 더 비치
로스트 인 더스트

좋았던 영화는 아가씨, 곡성, 내부자들, 마스터, 최악의 하루, 캐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바닷마을 다이어리, 동주, 태풍이 지나가고, 헤이트풀8, 라라랜드

제일 좋았던 영화는 내부자들. 하나 더 하자면 캐롤.

싫었던 영화는 너의 이름은, 녹터널 애니멀스, 더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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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명동 엘칸토 예술극장에서 피터 한트케의 언어유희극 <카스파>를 본 적이 있다. 아무런 사정 정보 없이 보게 되었는데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인극이라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나는 연극 도중에 목이 칼칼해서 계속 '음,음...'하고 헛기침을 했는데 배우가 갑자기 연극을 멈추고 나를 똑바로 노려 보며 "거, 연극을 볼 때는 그 목으로 음,음...소리 좀 내지 말아요!"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 배우도 좀 너무 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인 나는 너무 놀라고 무안해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었다. 그러니 어찌 그 연극을 잊을 수가 있으랴.  


내게 명동은 구두와 연극의 거리였다. 엘칸토 예술극장이라는 이름도 금강제화라는 구두회사의 후원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을 것이다.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을 본 것도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에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창고극장은 사라졌고, 엘카토예술극장도 없어졌다. 그런데 언제인가 명동예술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동네에 사는 김진경 연출가가 이 연극을 우리에게 추천했고 아내가 김광덕 배우에게 예약을 부탁했는데 마침 예약 취소된 자리가 있다고 해서 운 좋게 빨리 그 연극을 보게 되었다. 어제 저녁 연극을 보고 나와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급하게 관람후기를 써서 페이스북에 올렸었다. 오늘 정신을 가다듬고 독서일기를 하나 올린 뒤 오자 수정을 해서 여기에도 다시 한 번 올려 본다. 


아아. 내가 이렇게 문화 생활을 자주 해도 되는 걸까. 성북동으로 이사 온 뒤로 영화는 좀 줄었는데 오히려 연극 나들이가 부쩍 늘었다. 배우들이 이웃에 살아서 그런가 보다. 오늘은 명동예술극장에서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을 로버트 알폴디가 새로 해석한 연극 [메디아]를 관람했다. 성북동에 사는 여배우 김광덕 씨가 코러스로 출연하는 작품인데 오랜만에 보는 배우 이혜영 주연 작품이라 더욱 기대가 되는 연극이었다.

난 어렸을 때 엉터리로 읽은 기억이 조금 나긴 하는데(그리스 비극이 다 그렇듯이)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배신, 분노, 복수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일단 나는 이혜영의 목소리와 억양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번 연극의 타이틀 롤인 메디아 역으로는 이혜영 이외의 배우를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딱 적역이었다(단 8분 간 출연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남명렬 배우 - 요즘 아로나민 골드 CM에 나와 '드신 날과 안 드신 날의 차이을 경험해 보십시오' 라고 말하는 분 - 도 좋았다) 같이 출연한 김광덕 씨는 이혜영 선배와 출연하며 그 카리스마를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는 소감을 남겼다.

믿었던 남자 이아손에게 배신을 당한 메디아의 마지막 선택은 무엇일까. 배신자에게 가장 큰 아픔을 남기는 방법을 고안해낸다. 그건 바로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을 죽이는 것이다. 최고의 복수는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스스로 용서 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단히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비극의 장치로서 이보다 더 센 선택은 없을 듯하다. 감독은 신들의 이야기였던 원작에서 신의 영역을 모두 삭제하고 철저하게 인간의 '러브 스토리'로 개작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혜영 배우에게 들은 얘기지만 '분노는 큰 사랑에서 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앞뒤로 움직이는 기다란 의자를 이용한 심플한 무대도 멋졌고 그리스 비극이지만 모두 현대 의상을 입고 나오는 점도 좋았다. 다만 유머가 거의 없는 정극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좀 힘들었다. 그리고 해설을 대신해 가끔 나오는 직설적인 대사는 너무 친절해서 짜증이 났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 내 앞에서 일어서던 여자 관객은 옆 친구에게 "야, 내 기가 다 빨린 느낌이다." 라며 웃었다. 두 시간 내내 계속된 열연과 긴장감에 약간 탈진을 한 것이다. 물론 연출가도 배우도 관객도 쉬운 길을 마다하고 일부러 선택한, 고되지만 뿌듯한 탈진감이었다.

끝으로 이혜영 얘기 하나만 더. 연극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두 아이를 죽인 뒤라 옷과 손에 피를 묻힌 상태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특히 이혜영이 개인적인 얘기를 언급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동안 계속 작품 활동을 하긴 했지만 지난 이십 년간 엄마와 아내로서 아이들 키우는 데만 집중하다가 작년에 연극 [갈매기]를 기점으로 '숨어있던 욕망'을 다시 발견했음을 깨닫고 작품이 끝난 뒤 집에서 일주일을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심정을 추동력 삼아 이번에 다시 [메디아]라는 작품에 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4월 2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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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라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미술관 관장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수잔에게 어느날 우편물이 날아온다. 전남편인 에드워드가 쓴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소설의 초고다. 그 소설엔 토니 헤이스팅스라는 남자가 나오는데 가만히 읽어보면 토니는 전남편 에드워드의 페르소나이고 그의 부인과 딸은 수잔이 살았을지도 모르는 또다른 삶의 모습이다. 

수잔은 겉으로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사실 재정적으로 그리 편치 못한 상황이고 남편과도 냉랭한 사이다. 하물며 자신이 하고 있는 미술 일도 사실은 마음이 떠난지 오래다. 그런데 에드워드가 쓴 소설의 내용은 예전에 수잔이 잔인하게 에드워드를 떠난 일에 대한 비난처럼 읽힌다. 에드워드는 왜 이 소설을 그녀에게 보낸 것일까. 이 영화는 이런 ‘액자소설’ 구조를 통해 현재와 과거, 그리고 이루지 못한 미래를 굴곡진 시각으로 보여주는 ‘심리 스릴러’다. 

우선 소설 속에 등장하는 폭력씬이 너무 길고 지루해서 힘들었다. 그리고 에드워드가 소설을 통해 추구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서 괴로웠다. 감독은 ‘선택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라고 하던데 수잔의 잘못된 선택이 이런 소설을 낳았고 그게 결국 교묘한 복수의 형태라면 이건 너무 졸렬한 게 아닌가 싶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내가 뭔가 놓친 게 있다 싶어서 인터넷에 들어가 이동진의 영화평을 읽어보니 그는 이 영화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알레고리로 놓고 작품 안에 등장하는 수 많은 상징들을 해석해서 매우 고급스럽고 안정된 심리 스릴러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동진은 이전에 원작 소설도 읽었고 또 평소처럼 장면 속에 숨어 있는 상징성을 찾아 해석하는 재미(현실 속 수잔이 앉은 빨간 소파와 소설 속 아내와 딸이 강간 당한 뒤 피 흘린채 누워있는 소파 등)에 이 영화가 좋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일단 소설과 현실이 주고받는 공통점이나 연계성이 적었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시각도 너무 일방적이었다. 심지어 소설에 등장하는 악당들의 캐릭터도 평면적이어서 좋은 연기에도 불구하고 금방 흥미가 떨어졌다. 이는 주인공인 에이미 아담스나 제이크 제렌할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음악도 좋다. 그런데 전체를 이끌어 가는 플롯의 개연성이 떨어지는데다 마지막 장면까지 너무 고급스럽게 폼을 잡은 듯해서  영화 전체가 각본 감독까지 겸한 톰 포드의 아우라와 유명세에 기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솔직히 골든글로브를 비롯해 유수 영화제에서 격찬을 받고 있는 영화라는 게 좀 믿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영화의 어디에 그리 열광하는 걸까. 

내가 밥을 먹으며 휴대폰으로 검색한 결과들을 띄엄띄엄 말해주자 아내는 “근데 좋다는 사람들은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든대?”라고 묻길래 “몰라, 이동진이 빨아줘서 그런 것 같아’”라고 말했더니 하하 웃으며 ‘빨아준다’라는 표현은 너무 저속하니 쓰지 말았으면 한다고 충고했다. 아내도 이 영화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급스러운 식기에 담긴 그저그런 음식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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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러스트 앤 본]을 ‘Watcha play' 서비스로 보았다(서비스 가입을 해놓고 시간이 없어서 못보다가 며칠 전 해약을 했는데 이번달 말까지는 뭐든 볼 수 있다고 해서 문득 어제 이 영화를 찾아보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녹과 뼈’라는 이 제목은 동명 소설집에서 따왔다는데 불어와 연관되어 가깝게는 ‘주먹다짐’을 뜻하기도 하고 넓게 보면 ‘녹을 벗겨내다’라는 의미로까지 확장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영어나 불어를 잘 하는 사람이라면 뭔가 좀 더 심오한 뜻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나는 그냥 그 정도로 어림짐작을 할 뿐이다. [예언자]나 [내 심장을 건너뛴 박동]의 자크 오디아르 감독이 만든 영화지만 내게는 마리옹 코띠아르의 영화라서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마리옹 코띠아르의 얼굴과 표정이 좋다.[인셉션] 같은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그 번듯한 미모가 빛나지만 이 영화처럼 캐릭터 중심의 작품에서는 잘생긴 얼굴이면서도 한편 평범하기도 하고 회한이 서려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등 변화무쌍한 매력이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연기를 참 잘 한다는 얘기다. 

이번 작품에선 사고로 두 다리가 잘린 전직 범고래 조련사 역이다(특수효과를 잘 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정말 두 다리가 잘린 채로 나온다). 그런 여자가 사고 이후 처음으로 남자에게 안겨 머뭇머뭇 바다 수영을 하는 장면도 좋았고 남자의 제안에 의해 첫 섹스를 한 뒤 또 하고 싶어질 때마다 ‘출장 가능?’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장면도 좋았다. 나중에는 남자친구의 브로커 역할을 맡아 의족을 달고 길거리 싸움 현장에서 유유히 지폐를 세는 장면조차도 그녀라서 잘 어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알리로 나오는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연기도 훌륭했다. 몸으로 살아가는 전직 복서이자 현 경비원인 짐승남의 역할을 무심한 척 능숙하게 연기한다. 

이 영화는 스테파니의 잘린 다리로 시작해 알리의 길거리 주먹싸움 장면에서 튀는 핏방울들과 상처와 치아, 마지막 얼음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기 위해 맨주먹으로 빙판을 부수는 장면 등 육체를 날것으로 다루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아마도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살아간다는 것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이처럼 매순간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것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처럼 살아가기 팍팍한 주인공들의 에피소드들을 관조적으로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아들을 구하느라 주먹뼈를 다친 알리가 병원에서 아들이 깨어난 후 스테파니에게 처음으로 휴대폰을 통해 사랑고백을 하는 장면은 뭉클하다. 음악이나 촬영도 훌륭하다. 201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작이었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에게 밀려 수상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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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 한 번 본 것 말고는 어떤 사전지식도 없이 갑자기 어젯밤 신사동 롯데시네마 브로드웨이극장에 혼자 가서 [마스터]를 봤다. 올해 12월 31일까지 쓰지 않으면 휴지가 되는 영화초대권이 있어서였다. 별 생각 없이 선택한 흥행작이었는데 감독이 [감시자들]의 조의석 감독이라는 걸 알고 나서 '최소한 스피디하고 영리하긴 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감시자들]을 보고 조금 놀랐었다. 특히 서울시내에서 감행한 몹씬이나 추격신이 인상 깊었다.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나 [도둑들]이 생각나는 케이퍼 무비. 등장 인물들의 선악 구분이 뚜렸하고 사건도 명쾌하지만 이리저리 속도감 있게 엎치락 뒤치락 하는 쾌감을 선사하기 위해 색다른 금융지식을 등장시키고 실제 인물들의 일화까지 반영하는 등 시나리오에 골고루 양념을 쳤다. 그러다 보니 러닝타임이 무려 143분. 영화 두 편을 한꺼번에 몰아본 기분이 든다. 하지만 길다고 꼭 지루한 건 아니다. 일단 이병헌이라는 확고부동한 스타가 중심을 잡아주고 강동원과 김우빈도 놀라울 정도로 연기를 잘 하기 때문이다. 연기를 잘 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잘 수행하는 느낌이랄까. 왜 그런 거 있잖은가. 수퍼세션맨들이 모여서 한 무대에 섰는데 어느 하나 튀지 않고 각자의 연주가 온몸으로 골고루 스미는 쾌감. 엄지원, 진경, 오달수는 물론 잠깐 나오는 원로 연극배우 박정자까지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적절하게 열연을 펼친다.

이상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끝까지 가벼움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영화다. 악당들은 수 조원의 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표정이나 말투가 장난치듯 경쾌하고 경찰들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악당들에게 이죽거리는 여유를 부릴망정 크게 주눅이 들지 않는다. 나는 이게 이 영화의 승리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최근의 대한민국은 영화나 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역동적이고 엽기적인 일이 많았는데 영화에서까지 그렇게 극단적으로 달려나간다면 참 견디기 힘든 노릇이 아니겠는가. 최근 김성수의 [아수라]가 대박을 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도 그거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입만 열면 들리는 3조 원, 6조 원 등의 금액이 좀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걱정 마시라. 내년에도 박근혜 최순실 패거리들이 벌인 국정농단 사건이 베일을 벗을 때마다 우리는 계속 그런 단위에 익숙한 서민들이 되어야 할 테니까.  

이 영화가 '천 만 관객'을 찍을지 안 찍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몇 년 후 다시 봐도 배우들의 활약만큼은 '미친 존재감'의 레퍼런스로 남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영화가 끝나고 송년 회식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뒤늦게 전화를 했다가 치사하게 혼자 그런 영화를 보느냐고 야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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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각박해지고 국정농단까지 겹치는 바람에 겨울이 와도 크리스마스 기분이 안 나는 건 꽤 오래 되었지만 그래도 이맘때쯤엔 연극이나 뮤지컬을 꼭 한 편 보고 지나가자고 약속했었다. 그래서 올해도 아내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맞춰 창작 뮤지컬을 하나 예매했다. 유정민 작가가 극본을 쓰고 연기도 하는 일인극 뮤지컬 [오늘 하루]다.

유정민의 출연작으로는 [식구를 찾아서]와 [스페셜 딜리버리]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인 것 같다. 유산을 한 번 한 경험이 있는 30대 동화작가가 4년만에 새 아기를 임신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작가가 직접 쓰고 연기를 해서인지 세세한 디테일까지 대사가 아주 수다스러우면서도 오밀조밀하다. 유정민은 주인공인 동화작가 민지원도 되었다가 친구인 자현도 되었다가 남편 태주도 된다. 심지어 둘이 결혼할 때 반대했던 경상도 시어머니와 전라도 친정엄마 역할까지 '변검'처럼 척척 해낸다. 디테일도 훌륭하다. 속이 타는 연기를 할 때는 백산수 한 병을 벌컥벌컥 다 마셔버리고 휴대전화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네 번이나 기종이 바뀐다.

일인극이라고는 하지만 휴대전화 통화, 스크린 이용 등을 통해 여러 배우들을 보고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고 무대 왼쪽엔 일렉과 어쿠스틱을 오가며 연주하는 기타와 키보드, 바이얼린 연주자들, 그리고 극 중간 중간 동화를 낭독하는 여섯 살짜리 꼬마 오유주까지 있어 무대가 꽉 찬다(오유주는 이 연극의 연출가인 오준석 PD와 유정민 배우의 딸이다. 딸이 셋인데 갓난아기까지 둘이 이 연극에 잠깐 출연을 한다).

연기는 물론 노래 솜씨까지 빼어난 유정민의 스토리를 따라 깔깔거리고 웃다보면 어느새 따뜻한 눈물이 흐르게 되는 뮤지컬이다. 유정민은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데 6년 전 첫 딸을 낳고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이럴게 재미 있고 진심으로 가득한 연극이 내일까지 단 나흘간만 상연된다는 게 안타깝다. 아마 또 다른 곳에서 또 볼 날이 곧 오겠지, 라고 희망을 걸어본다. 크리스마스가 여름에 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오늘 본 [오늘 하루]는 힘겹게 또 한 해를 살아온 우리 부부에게 주는 작은 선물 같은 작품이었다.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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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는 몇 초면 컴퓨터에서 모든 영화를 다운받을 수 있는 이 시대에도 왜 우리가 굳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봐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영화라는 예술의 진정한 줄거움은 영화를 보는 순간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영화를 예매할 때의 기대부터 당일 극장으로 가는 길,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그 감동을 조금 더 연장하고 싶어서 들른 커피숍의 진한 커피향 속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영화다.

어두컴컴한 극장에 들어거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면 그 순간부터 현실 속의 우리는 사라지고 객석의 모든 남녀는 라이언 고슬링이 되고 엠마 스톤이 된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던 내가 어느덧 노래를 잘 부르게 되고 프레드 아스테어나 진 켈리처럼 춤도 잘 추게 된다. 심지어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고 어쩐지 코도 더 뾰족해진 느낌이 든다. 표정이 풍부해지고 결정적으로 젊어진다. 그렇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두 시간 동안 세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온전히 나만의 꿈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아주 로맨틱한 쉼표인 것이다.


꽉막힌 LA 고속도로에서의 첫 장면부터 관객을 압도하는 이 영화는 현실과 뮤지컬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번번히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배우 지망생과 재즈 피아노 연주자가 어떻게 만나서 사랑하고 노력하고 성공하고 어른이 되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얼굴을 약간 찌푸려야 더 매력적인 엠마 스톤은 이 영화에서 노래와 춤, 연기 등 모든 분야에서 그야말로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오른다. 그리고 재즈를 사랑하는 피아니스트 역의 라이언 고슬링이 연주하는 모든 곡의 멜로디는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이라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 귓가를 간지럽힌다. 두 사람이 함께 부르는 'Stars in the city'를 들으며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의 OST를 사야겠군. 이건 전작 [위플래시]에 이어 또다시 음악을 영화의 중심에 놓은 감독 데이미언 셔젤의 책임이 크다.

그런데 지난번 작품의 주제가 음악과 음악인 사이의 처절한 사투였다면 이번 영화는 그보다 부드럽고 단순한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맨 처음 만남에서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미아의 차를 채근하며 길게 클랙션을 울려대던 세바스찬은 그 이후 그녀를 만날 때마다 늘 길게 클랙션을 울림으로써 두 사람만의 암호로 삼는다. 함께 주차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눈 앞에 펼쳐진 LA의 야경이 별로라며 '이 얼마나 아름다운 밤하늘의 낭비인가'라는 노래를 부른다. 야경이 별로라던 두 사람의투덜거림과는 달리 그 순간 이미 둘은 서로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모노 드라마를 준비하는 미아를 위한 '연구 목적으로(for research)' 보게 된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을 계기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그러나 원만한 직선으로만 흘러가는 사랑이나 인생이 어디 있으랴. 두 사람이 각자의 꿈을 향해 달려갈수록 사이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뮤지컬 영화이고 사랑 영화지만 동시에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컬러부터 앵글, 그리고 배우들의 춤과 노래들에선 이전 헐리우드 영화들에 대한 향수가 물씬 배어난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영화들을 무조건 베끼거나 숭배하진 않는다. 다만 감독은 헐리우드 시스템이 최고 전성기를 구가할 때 유행하던 뮤지컬 형식을 가져와 그동안 선배들의 영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행복과 슬픔과 노스텔지어를 심어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배우들에게 계속 춤 추고 노래하고 사랑하게 만든다. 마치 그게 인생이라는 듯이.

스포일러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마지막 시퀀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겠다. 다만 이런 진부한 표현을 써서라도 그 느낌만은 좀 남겨두고 싶다. 아마 당신도 마지막 장면에서 라이언 고슬링을 바라보는 엠마 스톤의 그렁그렁한 눈과 미소를 바라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알싸하게 저려오고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질 것이라고. 그리고 이 영화를 보러온 오늘은 참 좋은 날로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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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 예매 어플에 뜬 <비치 온 더 비치>라는 영화 제목은 단박에 'Sex on the beach'라는 칵테일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정가영이라는 감독이 만든 영화인데 홍상수가 생각난다는 평이 있었다. 조금 더 궁금해져서 유투브에 들어가 그가 만들었다는 단편영화 <내가 어때섷ㅎㅎ>이라는 작품을 먼저 찾아 보았다. 그냥 콘도 응접실 같은 데에 카메라 한 대 뻗쳐놓고 13분동안 두 남녀가 앉아 맥주 마시며 수작질하는 내용이 전부였는데 놀랍도록 재미가 있었다. 감독이자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정가영은 '여자가 들이대는 영화를 만들어보면 재밌을 거 같아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는 정말 그의 생각대로 어이 없이 웃기면서도 귀여운 맛이 있었다. 내친 김에 <처음>이라는 단편도 찾아보았다. 연기과에 다니는 남학생이 두 여학생이 있는 방에 찾아와서 영화 촬영 전 첫 키스를 경험하고 싶으니 협조해 달라고 얘기하는 황당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정가영의 연기가 빛을 발한다. 특히 평범하면서도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억양이 일품이다. 성적 욕망에 충실하지만 실제로는 잘 되지 않는 캐릭터, 하면 그동안 윤성호 감독만 떠올랐었는데 이제 정가영이라는 막강 캐릭터가 하나 더 생긴 거 같아서 반가웠다. 개봉한지 며칠 되지 않은 영화 <<비치 온 더 비치>. 극장에서 내리기 전에 보러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사실은 <라라랜드>가 더 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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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은 후배인 혜원을 좋아한다. 그런데 혜원은 동욱의 마음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과 사귀는 건 곤란하다는 것이다. 오늘도 동욱이 조르고 졸라서 겨우 만든 둘만의 술자리이지만 얘기는 겉돌기만 한다. 테이블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새로 옮긴 혜원의 직장 얘기를 하다가 혜원이 육 개월 전부터 동욱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일하는 임창수 대리와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옆자리 직장 동료와 몰래 사귀고 있다는 사실에 격분한 동욱은 일방적으로 혜원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동욱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이 술집의 주인이자 선배 영식은 혼자 남은 동욱을 위로하고자 중국에서 가져 왔다는 술을 한 잔 따라 준다. 그런데 동욱이 이 술을 한 잔 마시고 고개를 든 순간 영식은 사라지고 눈앞에 사라졌던 혜원이 다시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시점은 둘이 새로 옮긴 직장 얘기를 하던 불과 몇 분 전 상황이다. 동욱은 이미 알고 있지만 혜원은 자신이 임창수 대리와 사귄다고 고백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다시 얘기를 이어가다가 임창수 대리와 그의 전 애인 은나가 사귄 기간 얘기를 하며 싸우는 두 사람. 이번엔 동욱이 나가고 술집 주인 영식이 중국술을 마시게 된다.그리고 또 타임슬립.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비밀은 술이다. 이 술은 과거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의 약이었던 것이다.

흔히 단편영화라고 하면 웬지 예술적이라 뭐가 뭔지 모르는 알쏭달쏭한 내용일 거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흥행과는 담을 쌓은 듯 어렵게만 만든 단편영화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일반론을 가볍게 뒤집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정말 좋았건 이유는 타입 슬립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능력으로 지구를 구한다거나 복권을 산다거나 하는 거창한 게 아니라 동생이 훔쳐먹은 푸딩을 다시 차지한다거나 너무나 갑작스러운 첫사랑의 고백을 되돌린다는 사소함에 쓰이는 게 더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도 그렇다. 타임 슬립을 일으키는 중국술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하이컨셉이지만 여기서는 각자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도구 이상으로 쓰이지 않는다. 대신에 연애나 질투 같은 사소한(?) 감정들이 개연성 있는 플롯 속에서 대활약을 한다. 장소 한 번 바꾸지 않은 술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임창수 대리는 얼굴 한 번 나오는 일 없는데도 신기하게도 영화 내내 그 존재감이 느껴지는 건 감독의 뛰아난 각본 감각과 연출력 때문일 것이다. 



30분남짓 되는 이 단편은 나와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백영욱 감독이 만든 영화인데 얼마 전 이 작품이 외국의 어떤 영화제에서 뒤늦게 상을 또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페이스북에 올림으로써 알게 되었다. 우리 회사의 김건익 실장님에게 영화 [한 잔] 얘기를 했더니 자신은 시사회 때 후배인 백영욱 감독은 물론 그의 가족 친구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고 자랑을 하셨다. 맨 마지막에 혜원이 중국술을 한 잔 마시고 처음의 설전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은 아주 어릴 적 읽었던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라는 동화가 생각나서 더욱 반가웠다.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이런 멋진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안 그래도 어렴풋이 술 약속을 해놓긴 했는데 11월이 가기 전에 백영욱 감독님하고 만나 이 영화 얘기 하면서 소주 '한 잔'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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