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탈영병 얘기가 뉴스에 나오면 사람들은 한숨부터 내쉰다. 아니 어쩌자고 탈영을 해? 도대체 쟤는 무슨 생각에 저랬을까. 이해를 할 수가 없네. 물론 나도 똑같은 소리를 한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총을 들고 탈영을 하면 잘해야 다시 끌려가 징역을 오래 살거나 아니면 검거현장에서 사살되는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물론 본인에게는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애인이 변심을 했거나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고참 새끼가 있거나. 그러나 제3자는 죽었다 깨나도 그 이유를 모르고 이해도 못한다. 그게 세상의 이치니까.

 

그런데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심정을 헤아려 보는 방법이 뭐 없을까. 기자 또는 학자가 나와서 그 사실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 우리는 소설로, 영화로, 또는 연극으로 그 현장에 다시 들어가 보는 경험을 선택한다. 그러면 몇 줄로 요약될 수도 있었던 앙상한 사실은 픽션이라는 드라마 장치를 통해 육화되고 비로소 사람들에게 사건 밑에 깔려있던 입체적인 진실을 들려준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라는 이 직설적인 제목의 연극은 탈영병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2015년 현재 모 군부대에서 소총을 들고 탈영한 말년병장. 그 놈은 제대 한 달을 남겨두고 왜 탈영을 한 것일까. 연극은 현재의 탈영병 이야기로 시작해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의 반군들, 그리고 1944년 일본 오키나와의 가미카제 특공대로 지원했던(사실은 끌려간 것이지만) 조선의 젊은이들 얘기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2010년 서해 백령도의 초계함 안으로 들어간다.

 

명백히 천안함 침몰사건을 연상시키는 백령도 초계함 챕터는 생일을 맞아 동료들로부터 초코파이를 선물 받았던 병사 이야기, 돌 지난 육지의 아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 취사병 이야기, 매번 지각을 해서 매를 맞던 고문관 이야기 등등 병사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통해 그들이 군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었음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라크 병사들이나 탈영병, 가미카제 병사들의 이야기를 돌아 다시 이들의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아까 관객에게 들려주었던 각자의 대사들을 똑같이 한 번 더 반복하게 한다. 물론 그냥 반복은 아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초계함 안에서 사망한 그들은 자신의 대사가 끝날 때쯤 나타난 의사와 간호사들에 의해 머리 위에 검은색 직사각형 삼베봉투를 쓰고 그대로 서 있게 된다. 그렇게 저마다의 분분했던 사연들은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앞에서 일제히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 저마다의 사연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검은 봉투가 씌어지는 순간 로봇처럼 멈추어 설 때 코를 훌쩍이던 관객들은 여기저기서 눈물을 뿌린다. 나도 눈물이 나서 손수건을 꺼냈다.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젊은 영혼들의 심정이 가슴으로 뜨겁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공감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사연이 잘 짜여진 연극의 플롯과 대사, 그리고 절제되면서도 정확하고 열성적인 연기들을 통해 되살아 나면서 이것은 연극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곁에서 일어났던 일임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반복해서 일어날 일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 대학로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배우 이원재를 비롯해 캐스팅 일순위에 들어간다는 명배우들이 열 일을 제쳐두고 이 연극에 몰려든 것은 극을 쓰고 연출한 예술감독 박근형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나도 박근형이라는 이름 때문에 금요일의 바쁜 일정을 가까스로 소화한 뒤 저녁을 굶은 채 남산예술센터까지 달려 왔으니까. 박근형은 전작 [개구리]에서 전직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창작지원사업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다. 이 작품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다루는 바람에 정부에서 주는 창작자원금 후보에서 밀렸다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결국 그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관객들은 전회 매진이라는 뜨거운 성원과 집단지성을 통해 이 연극의 의의와 작품성을 인정해 주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인간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호모 사피엔스만이 가지는 고유한 기능인 픽션을 만들어내고 믿는 능력때문이라고 했다. 픽션은 거짓말이지만 진실을 밑천으로 하는 핍진성 있는 거짓말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끌려가 비행기 안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며 자폭했다라거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인해 초계함에 타고 있던 46명의 병사들 전원이 사망했다는 건조한 문장으로는 도저히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진실들은 픽션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우리들의 지성과 구체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연극을 보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이번 주말까지만 상연한다. 그러나 다시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놓치지 말고 꼭 예매를 하시기 바란다. 10월에는 일본 도쿄에서도 무대를 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놓치기 너무 아까운 연극이라며 티켓을(그것도 배우할인 가격으로!) 확보해 준 배우 이승연 씨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로버트 파우저 교수님의 신작 발표 행사 때문에 아깝게 이 연극을 놓친 아내 윤혜자 여사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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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창고 있는 사람!” 

“반창고 있는 사람~!” 

“반.창.고.있.는.사.람.” 

“반창고 있는 사람!” 

“반창고~없어?” 

“반창코 있는 사람!” 

“반창고 내놔!” 

 

까진 뒤꿈치에 붙일 반창고를 찾는 여주인공의 새된 목소리를 싣고 스테디캠이 좁은 분장실 복도를 이리저리 누비는 첫 장면부터, 난 이 영화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중국 6세대 감독 중 대표주자인 지아장커의 <세계>를 몇 주 전 EBS에서 프리미어로 방영했다. 하지만 이 날은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야근을 심하게 해야 하는 상황. 바쁜 카피를 대강 엉터리로 정리한 후  한상이가 옆에서 썸네일 스케치를 하는 동안 나는 밤 11시부터 TV속 영화에 코를 박고 떨어질 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고 일은 일이다. 한상이는 넋을 잃고 있는 나를 TV에서 떼어놓았고, 우리는 일요일에 출근을 안 하기 위해 TV를 끈 뒤 기를 쓰고 새벽 한시 반까지 일을 해야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영화를 못 봐 너무 아쉬워하는 나를 한상이가 안타깝고 한심하게 쳐다본다. 

 

일요일. 인터넷에 들어가보니 서울아트센터(구 허리우드극장)에서 <세계>를 상영 중이란다. 너무 반가워 망설일 틈도 없이 예매를 한 뒤 뿌듯한 마음으로 종로까지 달려간다. 

 

 

‘하룻동안에 세계일주를!’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커다랗게 걸려있는 베이징의 세계공원. 타오와 타이쉥은 여기서 무용수와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둘은 연인 사이다. 에펠탑, 런던브릿지, 피사의 사탑 등이 삼분의 일 사이즈로 오밀조밀 흩어져 있는 이 거짓말 같은 공간에서 타오는 춤을 추고 타이쉥은 관광객들을 돌본다. 타이쉥의 사촌동생 얼샤오도 여기서 일하는데 그 놈은 영 적응을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동료들과 함께 화려한 무대 옷을 입고 춤을 추는 타오는 늘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사실 안을 들여다보면 마음은 춥고 불안하다. 매일 쳇바퀴처럼 도는 공원 생활이 그렇고 아직 몸을 허락하지 않은 남자친구 타이쉥이 떠나갈까봐 안절부절 하기도 한다. 

 

어느 날, 고향에서 잠깐 사귀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외국으로 떠나기 전에 인사차 찾아왔을 때 셋은 같이 인사를 나누고 밥을 먹은 뒤 작별을 고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타오의 옛 남자친구를 배웅한 타이쉥은 그 날 둘이 함께 가곤 하던 초라한 여관에서 타오에게 사랑을 나누자고 조르다 또 거절당하자 ‘우리 애인 사이 맞아?’라며 화를 낸다. 

 

“처음 여기 왔을 때, 여관이 너무 지저분해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알아, 우비를 입고 잤다고 했잖아.” 

“내 아이디어, 좋지 않았어?” 

 

측은한 마음에 더 이상 요구를 하지 못한 타이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타오를 말 없이 꼭 껴안아주는 것뿐이다. 

 

잠깐 다녀 올 일이 있어 고향에 가게 된 타이쉥은 함께 길동무를 하게 된 유부녀 췬과 가까워진다. 췬은 노름과 여자 문제로 늘 사고를 치는 남동생에게 또 돈을 가져다 주기 위해 타이쉥과 함께 길을 떠난 것이다. 십 년이나 남편과 떨어져 사는 외로운 여자 췬은 어느덧 타이쉥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감정을 그대로 밀어붙인다. 세계공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애인 타오가 눈에 밟히는 타이쉥도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비밀스런 관계를 갖게 된다. 

 

타이쉥이 없는 공원에서 일을 마치고 쓸쓸하게 걸어오던 타오는 동료 무용수 하나가 나이 든 공원 사장과 사진을 찍으며 데이트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두 사람은 절대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다.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타오는 벤처사업으로 갑부가 된 젊은 남자에게 청혼을 받지만 거절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그 술집에서 일하고 있는 러시아 출신 안나를 만나게 된다. 함께 일할 땐 같은 무용수였지만 지금은 호스티스가 된 안나를 보고 타오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고향 친구와 후배를 베이징으로 잠깐 데려 온 타이쉥은 공원 여기저기를 안내하며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준다. 저건 런던브릿지, 저건 자유의 여신상, 저건 에펩탑이야. 모두 삼분의 일 사이즈로 제작됐지. 와, 에펠탑이랑 똑같이 생겼네. 진짜 에펠탑 가봤어? 아니… 고향 후배는 신이 나서 자기도 여기서 일할 수 없겠냐고 묻는다. 난감해진다. 어차피 가짜로 가득 찬 공원에서 혹시 자기 인생도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또 쓸쓸해진다. 

 

공원 생활에 잘 어울리지 못하던 사촌동생이 결국 팀원들의 물건을 훔치다 걸려 쫒겨난다. 심란한 마음에 타오와 함께 자기 고향으로 내려간 타이쉥은 전에 친구와 놀러 왔던 고향 후배가 공장에서 일하다 다쳐 죽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가 죽기 직전에 유서로 내민 쪽지엔 누구누구에게 꾼 돈과 어느어느 가게에 진 외상값들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산업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고향은 더 이상 예전의 고향이 아니다. 흙먼지 섞인 바람이 황량하게 두 사람 사이를 훓고 지나간다. 

 

어느 날 공원 사장이 회의를 소집해 모두를 불러모으더니 예전 팀장을 해임하고 젊은 여자 무용수를 팀장으로 임명한다고 전격 선언한다. 새 팀장은 예전에 타오가 사장과 데이트하는 현장을 목격했던 바로 그 친구다. 

화려했던 불빛이 모두 꺼진 시간, 숙소로 돌아가다 그 친구와 마주친 타오는 팀장 된 걸 축하한다고 약간 비아냥거리지만 ‘그냥 직함만 달라진 것뿐인데 뭘.’ 이라고 하는 친구의 허탈한 대답에서 타인의 고단한 삶과 마주친 걸 깨닫고 당황한다. 

 

여주인공을 연기한 자오타오는 실제로 세계공원에서 무용수로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녀는 지아장커가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탄 영화 <스틸라이프>에서도 주인공을 맡았다. 남자 주인공인 첸타이쉥도 베이징에서 연기과를 전공했지만 배우의 길이 막연해 ‘평생 불법DVD나 팔고 살아야 하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인물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둘의 모습에서는 연기 이상의 깊이와 사실감이 절절이 묻어난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어요.” 

 

남자친구의 의처증 때문에 맨날 싸우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던 또 다른 공원 커플이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던 날, 피로연장에서 즐겁게 건배를 하던 타오는 우연히 췬이 파리로 떠나면서 타이쉥에게 보내온 문자메시지를 보게 된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잠자리까지 가진 타이쉥이 자신을 배신을 한 것이다. 

 

숙소를 뛰쳐나온 타오는 돈을 아끼기 위해 값싼 여관으로 간다. 지저분한 여관에서 우비를 꺼내 입고 침대에 몸을 눕이는 타오. 우비에 달린 모자까지 쓰고 단추를 꼭꼭 여민 타오의 모습은 마치 누에고치 같다. 

 

몇날 며칠 타오를 찾아 헤메던 타이쉥은 결국 신혼여행 떠난 동료의 빈 숙소에서 타오를 발견한다. 문을 열어주지 않고 바닥에 앉아 타이쉥에게 욕을 해대는 타오와 문 밖에서 용서를 구하는 타이쉥. 

 

어느덧 날이 밝아 새벽이 되었고, 숙소에선 사람들의 요란한 비명과 고함이 다급한 발걸음과 뒤섞인다. 연탄 까스를 마신 사람이 있으니 빨리 119를 부르라는 소리와 함께 업혀 나온 남녀는 술을 마시고 잠들었던 타오와 타이쉥이다. 119는 아직 오지 않고 담요에 싸여 새벽 길바닥에 눕혀진 두 연인의 모습 위로 타오와 타이쉥의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된다. 

 

“타이쉥, 우리 죽은 거야?”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마지막 대사는 왠지 낯이 익다. 아,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리턴>에서도 맨 끝에 이런 대사가 나오지.(형, 우린 끝난 건가요? 바보야,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한 영화 기자는 <세계>를 보고 나서 ‘어떤 감독은 삼십대 중반에도 거장이 된다’ 라고 했다. 귀엽고 경쾌했던 <키즈리턴>에 비해 <세계>는 훨씬 남루하고 고통스러운데, 이상하게도 그게 더 좋다. 정말 가슴이 뻐근해진다.     2006.11.22 17:44

 


* 오늘 페이스북 댓글로 어떤 페친께서 지아장커의 <산하고인>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예전에 그의 영화 중 가장 좋아했던 <세계>의 영화일기를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10년 전이군요. 다시 보고싶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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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를 보고 아내가 많이 울었다. 극장을 나와 얼굴이 빨개진 아내에게 왜 울었냐고 물었더니 챙피해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무엇이 챙피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나 역시 부끄러웠으니까. 우리보다 훨씬 못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미래가 아닌 더 큰 가치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일차적으로 부끄러웠고 우리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도 더 어른 같았던 선배들의 언행에 이차적으로 부끄러웠다. 지금처럼 시험에 나오는 지식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가르치고 배우던 시대라 그런 '인간의 품격'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시인 윤동주는 어렴풋이 알지만 독립운동가 송몽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살았던 우리들의 얕은 역사 지식에 또 한 번 부끄러워졌다. 마치 영화 <암살> 덕분에 뒤늦게야 천만 명의 한국인이 김원봉이라는 거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처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중학교 땐가 무슨 상을 받으면서 같이 받은 시집이었다. 그 후로 계속 이 시집을 끼고 살았던 것 같다. 몇 년째 나의 카카오톡 메신저 대화명이 하늘을 우러러 여러 점인 것만 봐도 윤동주의 시가 나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윤동주의 시는 그저 막연히 아름다웠으며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서 그런지 글에서 늘 청년의 냄새가 났을 뿐, 그 시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심정으로 씌여졌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영화 <동주>를 만들기로 한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얼마 되지 않는 역사적 사실만으로 참 감동적인 씨나리오를 썼다 생각하고 찾아보니 극본을 쓴 신연식은 <러시안 소설>이라는 영화를 만든 감독인데 그가 먼저 씨나리오를 써서 이준익 감독에게 보여주었고 이후 둘이 같이 각본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백억 원이 넘는 흥행작을 주로 만들던 감독이 순제작비 5억 원짜리 흑백영화를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모험이었을 것이지만 이준익은 거기서 흥행의 부담감을 덜어낸 자유를 느꼈던 것이리라. 대신 이준익은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과정이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적은 예산이지만 70년 전에 살았던 젊은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뜨거운 혈기는 만드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펄펄 살아날 수도 있고 그냥 날아가 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감독과 제작자의 간절한 마음이 통해서 그랬는지 영화는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호연으로 찬란하게 빛이 난다. 북간도에서 함께 나고 자란 윤동주와 송몽규는 사촌형제다. 둘 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편인데 내성적이고 섬세한 동주에 비해 몽규는  행동주의자적인 면모를 지녔다. 당연히 몽규가 앞장서고 동주가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장난처럼 투고한 글이 동아일보 꽁트 부문에 당선되는 것도 몽규가 먼저다. 늘 시인이 되기를 꿈꾸던 동주는 뭐든 결심하면 곧바로 몸을 던지는 몽규가 부럽다. 몽규는 니는 계속 시를 쓰라. 총은 내가 잡을 테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격과 성향이 달랐을 뿐 뜨거운 심장을 가진 것은 똑같았기에 결국 둘은 같은 감옥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런 두 사람을 얘기하면서 배우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우선 유아인을 제치고 동주 역을 맡게 된 강하늘(시나리오를 읽어본 유아인이 동주 역을 매우 탐냈으나 너는 너무 스타라서 안 된다며 감독이 거절했다는 얘기를 아내에게서 들었다). 섬세하고 내성적인 윤동주의 파리한 얼굴은 물론 원고지에 세로로 써내려가는 펜글씨까지도 윤동주의 필체를 닮았다. 이준익 감독도 영화를 찍으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지금 윤동주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윤동주가 된 사람. 이는 강하늘만이 아니다. 배우들 뿐 아니라 전 스태프가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윤동주평전을 읽었다고 하니 과정이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자는 감독의 다짐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영화의 제목이 ‘동주’지만 사실은 ‘몽규’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의 연기는 대단하다. 특히 마지막 부분 취조장면에서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엄청나다. 박정민은 지치고 아픈 연기를 하기 위해 촬영 전날부터 물과 밥을 안 먹고 버텼으며 연기에 너무 몰입하느라 안압이 올라 실핏줄이 터지는 바람에 촬영을 중단하고 병원에 실려갈 정도였다고 한다. 

감옥 창살 사이로 별을 헤아리며 동주의 목소리로 '별 헤는 밤'이 흘러 나올 때부터 아내는 울었지만 영화에서 가장 슬프고 아팠던 부분은 일본 경찰이 동주와 몽규에게 각각의 죄상을 적은 서류를 주고 서명을 요구하는 장면이었다. 동주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서 지장을 찍으면 될 것 아니냐며 서명을 거부하고 몽규는 거기에 적힌대로 내가 다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울부짖으며 서명을 한다. '우리는 문명국이라서 절차를 지키는 것이라는 일제의 궤변 앞에서 목숨을 걸고 서명을 거부하는 젊은이도 불쌍하고 눈물을 뿌리며 서명을 감행하는 젊은이도 불쌍하다. 객석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진다. 

면회 장면에서 동주의 죽음을 알리는 몽규의 비참한 얼굴이 눈에 선하다. 동주와 몽규가 살아서 지금 엉망이 된 우리나라를 본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다행히 영민한 배우들이 있어서 조금 위안이 되긴 한다. 연기를 잘 하던 배우 박정민은 글도 잘 쓰는 모양이다. <톱클래스>라는 월간지에 매달 칼럼을 연재한다고 한다. 그가 쓴 글 <동주>를 덧붙인다. ‘언희(言喜)’는 말로써 기쁨을 준다는 그의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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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시를 쓰기로 유명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어느날 한 기자가 그의 어려운 시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시 하나를 가리키며 도대체 무슨 의미로 이런 시를 썼느냐고 묻자 ‘이 시를 쓸 때는 나와 신만이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로지 신만이 아신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자신도 무슨 뜻인지 까먹었다는 얘기다. 시계태엽오렌지라는 제목을 단 소설가 앤서니 버지스도 죽기 전까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시계태엽오렌지(A Clockwork Orange)는 대학 시절 '비짜 비디오'로 처름 본 이래 DVD로, 시네마테크에서, 그리고 또 얼마 전 '스탠리 큐브릭전'에서도 반복해서 보았던 영화였다. 하지만 영화 전편을 이토록 몰입된 환경에서 큰 스크린으로 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오늘 오후 2시, 전날의 격한 음주로 인한 숙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매를 강행한 나는 압구정CGC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와 정식으로 조우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정말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져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더니

버지스는 1972년 한 잡지와 인터뷰하며 “런던 동부 사람들이 흔히 쓰는 ‘시계태엽 오렌지처럼 괴상한’(as queer as a clockwork orange)이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밝혔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레이어 ‘orang’을 이용한 말장난이라고 말했다. 또 얼마 뒤 그는 이 제목이 “즙이 많고 달콤하며 향이 좋은 한 유기적 독립체가 기계장치로 바뀌는 것”에 대한 은유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언어유희에서 시작했든 은유효과를 노렸든 아무래도 버지스는 남들이 안 쓰는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내는 데 매혹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에서 새로운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기 싫어했던 스탠리 큐브릭도 당연히 이 단어의 특별함에 단박에 매혹된 것이리라. 

1972년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매우 연극적이고 감각적인 미장센을 고집하는 이 영화는 미술은 말 할 것도 없고 특히 음악의 배치와 쓰임새가 놀랍다.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며 세련된 중산층 작가의 부인을 강간하는 장면은 너무도 매혹적으로 그려져 영국에서 청소년들이 이를 그대로 따라한 모방범죄가 발생했을 정도라고 한다. 덕분에 이 영화는 감독이 사망할 때까지 영국에서는 더 이상 상영을 하지 못했고. 

틴토 브라스 감독의 지상 최대 포르노 <칼리큘라>에서 네로 역을 맡았을 때도 굉장했는데 말콤 맥도웰은 이 영화에서 완전 미친놈 그 자체다. 당장이라도 상대의 얼굴을 쇠막대로 내려칠 것만 같은 위악적이고 불안한 미소와 눈빛. 도대체 이십대에 이런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배우가 몇이나 있었던가.

그리고 얼마 전 스탠리 큐브릭전에 다녀온 뒤 남긴 짧은 포스팅에 내 친구 표문송 씨가 큐브릭 예술의 핵심은 음악!!이라는 댓글을 달았었는데 오늘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폭력장면들에 우아하게 흐르는 클래식이라니. 그것도 베토벤의 9번 교향곡. 그런데도 마치 그 장면을 위해 작곡을 한 것처럼 느껴지는 신선함이라니. 완벽주의자이자 천재였던 스탠리 큐브릭의 공력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영화의 이미지와 테크닉에 압도당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새삼 거론하는 게 구차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천재의 작품에 뭐 이런저런 토를 달겠는가. 그냥 감탄하다 잠드는 것도 행복한 리뷰의 한 가지 방법 아니겠는가. 


(*영화를 보고 인터넷에서 찾은 평론가 김효선의 글을 많이 참조해서 썼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73101&cid=42621&categoryId=4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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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대 스타들이 출연하는 외국 라이선스의 대형 뮤지컬이 너무 거하거나 비싸다고(또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국내의 우수한 창작 뮤지컬을 권해주고 싶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진짜 당대 우리 모습를 담은 재미있는 이야기와 노래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창작 뮤지컬 [스페셜 딜리버리]를 관람했다. 왕년의 인기스타이지만 현재는 별 볼일 없는  행사가수로 전락한 정사랑과 가출 후 조건만남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열여덟 살 소녀 강하리가 우연히 병원에서 만나 서로의 영혼이 뒤바뀌는 얘기다. 영혼이 뒤바뀐다는 설정은 이젠 흔한 레파토리가 되었지만 입장이 뒤바뀜으로써 서로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라는 얼개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쓴 장유정 작가 덕분에 한국 창작 뮤지컬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 오미영 작가를 만나고 나서 창작 뮤지컬에 대한 믿음이 더 깊어졌다고나 할까. 사실 나는 이 극을 쓰고 연출한 오미영 작가의 팬이다. 오 작가는 전작 [식구를 찾아서]에서도 그랬지만 언제나 따뜻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쓰고 연출하는 작가다. 오늘 본 작품에도 나오는 대사 결국엔 해피엔딩’처럼 그녀는 늘 어렵고 소박하지만 사람이 살아갈 만한 세상을 구한다.


오늘 첫 공연이라 그런지 조금 합이 안 맞는 부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전작들에서 대단한 역량을 보여주었던 배우들이라 곧 기가 막힌 호흡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단 일곱 명이 쉬지 않고 백 분 내내 스물두 곡의 노래와 춤을 선보인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대본 공모를 통해 2015년 창작뮤지컬 우수작품지원사업에 선정된 작품이라 한다. 2월 14일까지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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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화를 처음 봤던 건 [원더플 라이프]라는 작품이었다. 꽤 오래 전 광화문에 있는 극장에 예약을 했는데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혼자 전철역에서부터 미친듯이 달려 영화 시작 직전에 겨우 입장을 했고 뛰어오느라 너무 숨이 차서 몇 분간 민망할 정도로 숨을 헐떡거리며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죽은 사람들이 저승으로 가기 전에 림프계에 머물면서 일 주일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작은 단편 영화를 한 편씩 찍은 다음에 비로소 다음 세상으로 간다는 내용이 참 우화적이면서도 통찰력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경험을 묻는 질문에  ‘도쿄 디즈니랜드에 가서 놀았던 기억’을 대는 사람들이 의외로 너무 많았다는 사실이 서글퍼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는 감독의 인터뷰를 ‘씨네21’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라는 영화를 정말 인상 깊게 보았고 [걸어도 걸어도]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도 무척 좋아하는 영화가 되었다. 게으른 탓에 데뷰작 [환상의 빛]이나 오다기리 조가 나오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오늘 본 [바닷마을 다이어리] 역시 좋았다. 정말 악인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드라마인데도 이렇게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저력은 아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번 작품은 어렸을 때 가족을 버리고 다른 가정을 꾸몄던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는 시건을 계기로 배다른 여동생과 살게 되는 세 자매의 이야기인데,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스토리텔링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특히 여성들과 아이들, 노인들 각각의 심리를 묘사하는 상황설정과 대사의 섬세함은 정말 최고다. 내친 김에 영화의 내용을 자세하게 쓰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아무리 그 내용을 상세히 전달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아야세 하루카는 예전엔 그저 예쁘다는 생각만 했는데 이젠 공력이 쌓여서 그 어려운 맏언니 역할도 참 똑부러지게 잘 하는구나 하는 생각, 가세 료가 어느새 저렇게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 릴리 프랭키는 정말 멋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앞으로도 무조건 봐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는 것 등을 짧게 메모해 놓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아내는 ‘릴리 프랭키 아저씨는 우리나라 김창완과 참 비슷하다’는 얘기를 했다. 맞는 얘기다. 소설도 쓰고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도 하는 릴리 프랭키는 여러 가지로 김창완과 많이 닮았다. 특히 둘 다 어깨에 힘을 빼고 자유스러운 일상과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그렇다. 


일상이 바쁘고 단조로워서 밀린 영화들이 많다. 개봉한 지 꽤 지난 타란티노의 영화도 봐야 하는데. 어쨌든 오늘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한 편 보았으니 이 또한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일은 월요일. 또 다시 일상과의 전쟁이다. 뭐 어쩌겠는가. 오늘 본 영화의 좋은 에너지를  연료 삼아 내일 하루를 또 무사히 잘 버텨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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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레이먼드 카버나 윤대녕의 소설을 지금 열 다섯살 중학생이 읽는다고 생각해 보자. 뭐,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씨들이니 읽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건 읽는 것이 아니다. 뜻도 모르고 그냥 눈으로 스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매번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 카버의 짧은 소설들이 우리 인생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행위라는 것을, 여행만 떠나면 자살 직전일 것 같은 여자들을 만나 카페에서 술을 마시거나 여관에서 같이 자는 주인공의 여정이 인생의 쓸쓸함과 신산함을 돌려 말하는 글이라는 것을 열 다섯살 나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인간은 일정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그런 존재다. '열 두살은 열 두살을 살고 열 여섯은 열 여섯을 살지’라는 김창완의 노래도 바로 그런 얘기일 테니까.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지금은맞고 그때는틀리다>가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이 거의 없는데도 '미성년자 관람불가’가 된 것은 미성년이 봐서는 아무런 의미도 느낄 수 없고 재미도 없을 것이라는 감독의 판단과 배려 덕분이다.  에로나 포르노만 성인영화가 아니다.  진짜 성인영화란 이런 것이다. 어른들이 아니면 절대로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런 이야기, 그런 이데올로기. 


홍상수의 작품들을 즐겨 본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이야기할 것이다. 또 그 얘기야? 그렇다 또 그 얘기다. 이번에도 영화감독이 주인공이고 그림을 그린다는 젊은 여자가 하나 나온다. 둘은 우연히 만나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술에 취해 서로 약점을 드러내고 속내를 탐색하다가 치사하거나 어이 없는 공방전이 몇 차례 지나가고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런 지리멸렬한 이야기로 감독은 이번 로카르노 영화제 대상을 탔고 정재영은 남우주연상까지 탔다. 어떻게 그런 결과가 가능했을까. 


수원에 GV 및 특강이 있어서 내려 온 영화감독 함춘수는 주최측의 착오 때문에 하루 일찍 오는 바람에 행사 전날 숙소를 정해두고 하릴없이 화성행궁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후줄근한 청바지와 오리털 파카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기보다는 돈 없고 시간은 많은 소외된 지식인의 모습에 가깝다. 고궁의 따뜻한 햇빛이 내려쬐는 툇마루에서 잠깐 졸던 춘수는 그곳에서 바나나우유를 마시고 있는 젊은 여자 희정을 목격한다. 뭐 하세요, 라고 거의 본능처럼 남자가 말을 붙이고 우유 마시는데요, 라고 여자가 대답을 하고. 어렵게 어렵게 말을 붙인 두 사람은 남자가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여자가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하면서 급반전을 이룬다.

커피를 마시러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그녀가 그림을 그린다는 작업실로 가게 되고 거기서 그녀의 그림을 본 남자는 “희정 씨는 모르고 들어가서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하는 것 같아요”라는 애매모호로 칠갑을 한 칭찬들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해가 지자 자연스럽게 스시집으로 가서 소주를 마신다. 원래는 치킨집에 갈 계획이었는데 춘수가 즉흥적으로 스시집 앞에 멈추는 바람에 희정이 그집으로 들어가자고 한 것이다. 

단 둘이 술을 마시며 남녀가 하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남자는 계속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여자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웃음을 흘리며 남자의 애간장을 태운다. “아유, 제가 무슨…”이라는 입에 발린 지식인의 겸손을 몸에 두른 듯한 정재영의 연기도 그렇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인생의 맛을 어느 정도 알게 된 김민희의 자연스러운 목소리와 연기도 일품이다.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음주 장면은 모두 실제 술을 마시는 것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배우들은 진짜 술을 마시고 그 술에 취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연기를 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저 배우들은 술이 좀 약하네. 보통 홍상수 영화에는 테이블에 소주가 대여섯 병은 늘어서 있는데 아까 걔네들은 세 병밖에 없었잖아.”

그렇다. 세 병이든 다섯 병이든 중요한 건 배우들이 정말로 술을 마시며 연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이건 대사를 정확하게 외우고 연기를 하냐 아니냐의 문제를 훌쩍 넘어서는 연출법이며 연기 테크닉이다. 배우들은 그날 아침에야 감독이 쓰기 시작하는 시나리오를 받다들고 연기를 한다. 물론 그 전에 감독과 충분한 대화를 통해 이 영화가 어떤 컨셉과 얼개로 진행이 될 것이고 어떤 소재들이 등장할 것이라는 건 알지만 1부와 2부가 어떻게 미세하게 다를 것이라는 것까지는 모르고 영화를 찍게 된다. 그건 감독도 닥쳐보기 전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천재의 자신감이 아니면 생각할 수도 없는 독단이요, 파격이다. 아무튼 이번엔 술이 약한 배우들이 술 영화를 찍느라고 고생을 좀 했겠다. 나중에 들었는데 정재영은 정말 스시집 장면을 찍고 나서 기절하듯 쓰러져 잤다고 한다.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은 희정이 깜빡 잊고 있었던 파티에 함께 가게 되고 거기서 최화정, 기주봉, 서영화 등을 만나게 되는데 이미 술이 많이 취했고 또 깐깐한 최화정에 의해 춘수가 일찍 결혼을 한 유부남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계에서 바람둥이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라는 것이 모두 밝혀진다. 화가 난 희정은 다른 방으로 가서 책상에 업드려 자고 춘수는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채 숙소로 돌아간다. 다음날 GV때 사회자이자 평론가인 유준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춘수는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며 마구 그 평론가를 욕하게 되고 마침 엉뚱하게 자신의 시집을 들고 찾아온 서영화를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된다. 여기까지가 1부다.

2부는 똑같은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게 펼져친다. 이건 <오!수정>이나 <강원도의 힘>에서부터 계속 되던 '홍상수표' 전개방식이다. 그때는 정보석이 “포크예요”라고 하다가 “스푼이에요”라고 바뀐 것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 후로 시간대를 마구 뒤섞어본다든지(<자유의 언덕>) 시점이 바뀌면서 드러나는 코미적인 상황들을 보여준다든지(<우리 선희>) 하는 변주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홍상수의 '반복과 차이’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전에는 그런 것을 통해 지식인의 위선, 남자들의 찌질함, 여자들의 빤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홍상수 영화가 재미 있지만 불편하다고 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홍상수는 더 여유로워지고 깊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맞고 그때는틀리다> 리뷰를 쓰려고 다시 살펴보니 제목의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왜 그런가 궁금해 인터넷을 찾아보니 홍상수 감독 왈 ‘제목이 너무 길어서’ 였다고 한다. 제목의 의미를 찾아 헤맨 사람들에겐 다소 김이 빠지는 설명일 수 있겠다. 그런데 난 그게 이 영화를 이해하는 작은 팁이 될 수도 있다 싶었다. 

홍상수 영화가 세상의 찌질함, 남자들의 유치함을 연료로 삼고 있는 코미디 영화라는 점은 데뷔적부터 지금까지 여전하지만 그 걍팍함은 많이 사라졌다. 거짓말을 일삼는 춘수도 2부에서는 더 솔직해지고 희정도 그런 춘수를 탓하기는커녕 나중에 술에 취한 춘수가 선배 언니들 앞에서 팬티까지 내리는 추태를 보였다는 얘기를 듣고도 오히려 귀엽게 여긴다. 거짓말을 하든 참말을 하든 애초부터 세상에 큰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이건 1부와 2부가 사뭇 다르게 진행되지만 큰 그림으로 놓고 보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2부에서 둘이 즉흥적으로 택시를 타고 강원도로 놀러가기로 의기투합하지만 잠깐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그 얘기가 흐지부지 되어 없었던 얘기처럼 취급되는 장면도 그렇다. 둘이 택시비로 십만 원을 내고 강원도까지 가든 안 가든 뭐 그리 달라질 일이 있겠는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홍상수 영화는 절망도 희망도 없고 ,그저 흘러갈 뿐이다. 그런데 그 흘러감이 인위적이지 않고(우연을 질료로 삼는데도 불구하고!) 인생의 쓴맛단맛을 아는 통찰력이 스며있기에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른한 술자리와 반복되는 헛소리들 속에서 우리들의 인생이 의외의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 홍상수의 영화들은 흥행과 상관 없이 또 만들어질 것이고(2009년 <잘 알지도 못하면서>부터 전원사라는 영화사를 차려 자유롭게 영화를 찍고 있다)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도 또 다른 재미와 의미가 피어날 것이다. 또 어디서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 이번엔 수원이었지만 다음엔 제천일 수도 있고 부산일 수도 있다. 그게 어디면 어떻겠는가. 어디나 사람은 살아가고 있고 이야기는 만들어지는데. 우리 곁에 홍상수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그는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발명하는 발명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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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랑 얘기를 하다가 [멋진 하루]라는 영화를 둘 다 좋아한다는 걸 알았습니다.하정우와 전도연이 주연한 영화죠. 당시 짤막한 리뷰를 쓴 기억이 나는데 어디 있나 한참을 찾다가 예전 싸이월드 미니홈피 '편성준의 음주일기'에서 찾았습니다. 그 분께 한 번 보여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여기로 옮겨 봅니다. 날짜를 보니 2008년 10월 쓴 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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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난다. 그런데 이 남자, 수단이 보통이 아니다. 음식점이든 술집이든 어딜 가나 주인들이랑 다 친하고 어딜가나 덤으로 뭔가를 더 받아 먹는다. 인간관계가 좋은 것이다. 여자는 생각한다. 그래, 이런 남자라면 인생을 맡겨도 무방하겠어.한참을 밀고 당기다 드디어 함께 여관으로 간다. 그런데 여관 주인 아줌마가 그 남자에게 반색을 하며 말한다. “오랜만이네? 근데 아가씬 왜 달고 왔어. 방값만 내면 내가 덤으로 하나 넣어줄 텐데.”

 


<멋진 하루>의 남자 주인공 조병운이 바로 이런 놈 아닐까. 허황되고 느물느물하고 말발 세고 그러면서도 또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만은 없는 페이소스를 가진 캐릭터. 이 영화는 어느 토요일 오전부터 밤까지 한나절 동안 일어나는 - 꿔준 돈 받으러 옛 애인 찾아 간 쩨쩨한 여자와 그 350만 원을 치사한 방법으로 갚으려 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토요일 아침. 과천 경마장 로비에서 동창생들에게 경마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있는 조병운에게 느닷없이 김희수가 나타난다. 일년 전에 헤어진 애인이다. 다짜고짜 “돈 갚어. 350만 원 꿔간 거.” 라고 앙칼지게 소리치는 그녀. 현금이 없다고 발뺌하는 병운에게 그녀는 오늘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돈을 받아가겠다고 버틴다.

 


그래서 ‘하룻동안 돌아다니며 350만 원 마련하기 투어’라는 짧은 로드무비가 시작된다. 병운은 희수를 데리고 아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찾아 다니거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까지 거의 삥을 뜯는수준으로 돈을 마련한다.

 

 

하정우는 정말 연기를 잘한다. 대사를 외운게 아니라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자기 대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투와 속도, 몸짓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밀양>에서 전도연의 열연 덕분에 송각호가 상대적으로 가려진 느낌이 든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전도연의 훌륭한 연기가 하정우의 포스에 의해 좀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다.

 

 

사업하는 사모님을 찾아가 골프 자세에 대한 정확한 조언을 하고(어머, 내 골프 강사도 그런 얘기 하던데!) 돈 백만 원을 받자마자 차용증을 내밀며(사모님, 제가 혈서를 쓰려고 했는데 빈혈이라…)너스레도 떤다. 술집 나가는 동생, 대학 서클 후배와 그 남편, 스키강사 시절의 후배들, 그리고 할리 데이비슨 타는 사촌 형. 이혼하고 혼자 사는 여자 동창생까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많든 적든 돈을 얻어낸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 병운의 부탁을 듣고 선뜻 돈을 꿔준다. 돈을 뜯어내려고 특별히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희수는 어이가 없다. 왜 이러구 사냐. “너 그 아줌마랑 잤지?”  아니란다. 우연히 길에서 만나 함께 술을 마시게 된 서클 후배의 남편도 묻는다. “전에 우리 집사람하고 잤어요?” 아내가 술에 취해 병운이를 찾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상하다. 분명히 병운이는 믿을 수 없는날건달이 틀림없는데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할리 데이비슨을 타는 사촌 형에게 찾아간 희수는 술에 취한 사촌형의 입을 통해 병운이가 ‘그 많던 조씨네 재산 다 말아먹고, 결국마누라까지 도망간 놈’ 이란 걸 알게 된다. 면전에서 그 정도 모욕을 당하면 화를 낼 만도 한데 병운이는 “뭐, 이미 다들 아는 얘긴데.”라고 싱글거리며 고기를 굽는다.

 

 

병운은 돈을 구하러 다니는 중간 다른 사람의 부탁도 이행해야 한다. 아는 형의 딸년이 학교를 안 가서 정학을 당했는데 학교에 가서 걔를 집까지 좀 데려다 달라는 것이다.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여자애를 데리고 나왔더니 그 사이 교문 앞에 세워둔 희수의 차가 견인을 당했다. 화가 치민다. 희수는 병운에게 지랄을 한다. 그러나 병운은 “차량보관소 여기서 안 멀어. 얘부터 데려다 주고 차 찾으러 가자.”라고 태연히 말한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문제아 여학생은 “병운이 삼촌처럼 어리광 심한 남자, 좀 곤란하죠. 그래두 전 병운이 삼촌 괜찮던데요?” 라고 제법 어른스러운 소리를 한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무렵. 지하철을 타고 견인차량 보관소로가는 길은 쓸쓸하고 구질구질하다. 병운이 전철 안에서 효도르 선수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때 희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파마끼도 오래 전에 풀리고 단발로서도 어정쩡한 헤어스타일에 과하다싶은 마스카라를 칠한 채 그깟 350만 원을 받아내겠다고 옛 애인에게 하루 종일 끌려 다니는 자신의 옹졸한 모습을 문득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일년 동안 안 갚았다면서요?  그러게 왜 저렇게 헐렁한 놈한테 돈을 꿔줘요?”

 


낮에 만났던 병운의 초등학교 동창생 싱글맘을 다시 만났더니 40만 원이 든 봉투를 내밀며 웃는다. 병운이는 차에 있는 휴대전화를 가지러 주차장에 갔다. 희수는 봉투를 다시 여자에게 내민다. “저 이 돈 못 받겠어요.” 여자와 희수는 서로 괜찮다고 한참을 옥신각신한다. “절대 안 물러나실 거죠? 그럼 이렇게 해요 우리. 20만 원씩 나눠요.” 결국 그렇게 해서 하루 종일 330만 원을 돌려받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엉뚱하게 일본 애니메이션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이 자꾸 생각났다. 돌담, 신호등, 육교, 골목길 등 둘이 돌아다니는 동안 보여지는 서울 구석구석의 모습 때문이다. 새롭지만 낯설지않게, 서울을 이렇게 이쁘고 정감 있게 찍은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밤에 약속이 있다는 병운이 전철역에서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내리자 희수는 작별을 고한다. 병운이가 차를 가리키며 손짓을 한다. 희수가 여자에게서 20만 원을 받는 동안 병운은 고장 났던 희수 차의 와이퍼를 고쳐놓은 것이다. 희수가 희미하게 웃는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그녀는 문득 병운이가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닿고 다시 전철역으로 간다.

 

할 일 없이 전철역에 들어갔다가 나온 병운은 역앞에서 판촉을 하고있는 건강음료 데스크에서 한가롭게 시음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내려서 뭘 할 것인가. 희수는 그냥 시동을 걸고 출발을 한다. 맨 처음 병운을 만났던 때가 자꾸 생각난다. 다시 한 번 작게 미소를 짓는다.

 

 

강파른 마음으로 찾아가서 빚을 받겠다고 온종일 끌려 다녔지만 마지막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채 돌아가게 된 희수. 쓸쓸한 위로랄까.일본 영화 <바이브레이터>의 마지막 장면처럼 뭔가 알싸하고 조금 더 착해진 느낌이 드는, 그런 엔딩이다. 집에 돌아와 영화일기를 쓰는 동안 캔맥주 하나를 따서 마셨다. 나에게도 오늘은 조금 괜찮은 하루였다고 중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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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좀 우스웠던 것 중 하나는 미스코리아나 수퍼모델 선발대회 같은 미인대회를 할 때마다 출연자나 사회자가 결론처럼(또는 기획의도처럼) ‘결국 내면의 아름다움이 제일 중요하다'는 얘기를 반복하는데 하필이면 그게 수영복 심사일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아니,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면서 왜 영혼과 별 상관 없는 쭉쭉빵빵 몸매를 뽐내는 수영복 심사 때 그런 얘기를 나누는 것일까. 하긴 나도 아름다운 몸매가 좋긴 했다. 일단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에는 아름다운 영혼이 깃들기 힘들 것 같았고 이쁜 여자와 못 생긴 여자 중 누가 더 착할 것 같냐고 물으면 왠지 이쁜 여자일 것만 같은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예쁘고 귀여운  강아지일수록 주인에게 더 사랑받는 이치나 들판에 핀 꽃 중에서도 예쁜 꽃들이 아이들에게 먼저 꺽이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진리처럼 보였다. 보기 드문 추남이었다던 소크라테스도 만약 헐리우드 배우인 브래드 피트나 데인젤 워싱턴처럼 매력적인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과연 그렇게 쉽게 독배를 마시고 죽어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조금만 진지한 자리가 되어도 무조건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교조주의를 내게 강요했고 나도 자발적으로 그들의 거짓 정서에 굴복하는 일반인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오늘 본 백감독의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제목 그대로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내면의 아름다움’이라는 말 자체가 품고 있는 아이러니가 얼마나 큰가.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심한 부담감을 안고 들어가는 불리한 프로젝트였다. 사실은 백종열 감독이 장편상업영화 데뷔작으로 이 영화를 선택했다고 발표했을 때부터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었다. 지난 20여 년간 광고계나 뮤직비디오 업게에서 최고의 감독으로 별 실패 없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백종열 감독이 왜 하필 인텔인사이드와 도시바가 만들어서 이미 '깐느광고영화제 그랑프리'라는 단물을 다 빼먹은 유명 콘텐츠에 도전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더구나 6부작으로 만들어진 기존의 광고영화는 ‘매일 밤 자고 일어나면 모습이 바뀐다’라는 빅 아이디어가 이미 알려질대로 다 알려지고 한글자막까지 나돌던 유투브의 인기 콘텐츠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예전 왕가위의 영화를 한 콤마 한 콤마 그대로 베껴 재기불능의 상태가 될때까지 욕을 먹었던 김의석 감독이나 히치콕의 [싸이코]를 컷바이컷으로 그대로 모사해 비웃음을 샀던  브라이언 드 팔머 꼴이 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그런 여러가지 구차한 걱정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극복해 버린 특이한 경우라고 해야할 것이다.  원작처럼 주인공 우진은 아침에 눈을 뜨면 나이, 성별, 인종에 이르기까지 먀번 전혀 다른 사람으로 깨어난다. 어떤 사람이 될지 ‘미리보기’ 따위는 존재하자 않는다. 그것은 ‘절대고독’을 전제로 하는 잔인한 운명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하는 것은 '관계를 이루는 존재’라는 점 때문인데 열여덟 살 이후로 우진에게 지속적인 관계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절친인 상백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진의 삶에 어느날 이수라는 여자가 들어온다.

영화는 마술적이고 동화적인 기본 설정답게 생활의 냄새는 최대한 지우고 두 사람의 로맨틱한  상황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본 영화를 보는 것처럼 따뜻하고 착한  아날로그적 분위기로 일관한다. 이는 무려 스물한 명에 달하는 우진 역의 남녀 배우들이 그들의 개성을 살리기보다는 매일밤 새로운 얼굴을 맞아야 하는 우진이라는 캐릭터에 충실하게 복무한 까닭이기도 하고 가구점이나 가구 디자이너라는 나무 질감이 많이 등장하는 인간적인 직업설정이나 공간, 소품배치 등에도 기인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훗날 따뜻한 기억으로 남고 뭔가 작고 흐뭇한 에피소드들이 자꾸만 생각난다면 그 공은 아마도 여주인공 이수 역을 맡은 한효주 덕분일 거라고 생각된다. 아름답지만 독하거나 격정적이지 않고, 스물아홉 살의 젊은 여자지만 마치 누나나 여동생처럼 나의 이야기를 찬찬히 잘 들어줄 것만 같은 여자. 이수는 그런 넉넘함을 표정과 제스추어에 탑재하고 있는 흔치 않는 캐릭터였다. 더구나 우진의 비밀을 알고 한참 사귀다가 너무 힘들어 헤어지려는 마음을 먹었을 떄(이수의 언니가 우진이 만들어준 의자에 앉아 “이건 너무 니 싸이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이수를 안아줄 때)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연기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물론 우진의 이야기를 아버지 세대로까지 확장시킨 후반부나 ‘내면의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하기엔 너무나 예쁘고 잘 생긴 주인공들 때문에 정신과 의사까지 동원해 틈만 나면 설교하듯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반복 강조하는 후반부는 좀 성기고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러나 이건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설정에서부터 관객과 감독 배우 모두 서로 이해하고 들어가는 로맨틱 코미디 아닌가. 더구나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이 기본 아이디어가 모두 공개된 콘텐츠이기도 한데 뭐 더 새로운 것을 그렇게 바라나. 

이미 나이가 든 우리 커플은 초대형 팝콘 박스와 음료수컵을 든 젊은 커플들에 밀려 맨 오른쪽 자리로 피해가야만 했다(영화 보는 도중 옆에서 우적우적 팝콘 먹는 소리가 정말 싫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러 온 커플 중에 아직 손을 못 잡은 커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 이 영화를 보고 마음이 풀어져서 서로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한다면 어떨까. 아니면 맥주를 한 잔 걸치고 처음으로 같이 잔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영화는 그런 종류의 공감을 가진 작품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라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관객들이 두 시간 동안 소소한 에피소드에 웃음짓거나 안타까워 하다가 결국 기분 좋은 추억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영화. 그래서 친구들에게 추천하게 되고 비록 평론가들은 낮은 평점을 부여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극장에 찾아가기 위해 시간을 비우는 영화. 원래 로맨틱 코미디라는 것은 클라크 케이블이 나왔던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어젯밤에 생긴일] 이후부터 지금까지 늘 그런 이유로 사랑받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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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힘든 이유는 누구에게나 기쁜 날보다 힘든 날이 월등히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퇴근 후에 허름한 술집에 모여 직장 상사를 욕한다. 아니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시댁 사람들 흉을 본다. 휴가를 가서 멋진 여행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단골 바에 가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그런데 유난히 기분 나쁘고 우울한 날엔 어떤 음악을 듣는 게 좋을까. 얼핏 신나는 음악을 듣고 마구 춤이라도 추면 나아질 것 같지만 심리학자들은 오히려 그럴 땐 슬픈 음악을 듣는 게 더 낫다고 조언한다. 신나는 리듬과 볼륨으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면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런 ‘자기기만’은 현실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무엇 하나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나면 다음날 더 쓸쓸해지는 ‘파티 증후군’을 생각하면 쉽게 수긍이 가는 얘기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입시 준비나 직장 생활, 구직 생활 등등 무엇 하나 잘 풀리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 시달리다 오랜만에 극장 나들이 한 번 하기로 한 사람들이라면 신나게 달리고 때려부수는 블록버스터나 샤방샤방한 로맨틱 코미디에 먼저 눈이 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당의정에 싸인 예쁜 알약은 잠깐의 진통효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끔은 입에 쓰지만 약효가 서서히 퍼지는 보약처럼 우리 마음에 자양분이 되는 영화들을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난 주에 개봉한 [산다]가 바로 그런 영화다.



강원도 건설현장에서 잡부로 일하는 주인공 정철은 매순간 벼랑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정도로 위기와 고통의 연속을 사는 인물이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대한민국 지방도시에서 정규 직장 없이 살고 있는 30대 남자. 부모는 산사태로 집이 무너질 때 흙더미에 깔려 돌아가셨고 옆에는 정신이 좀 온전치 못하고 행실도 헤픈 누나와 그녀가 낳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어린 조카, 그리고 착하긴 한데 약간 모자라 보이는 친구 명훈이 있을 뿐이다.


기댈 언덕 하나 없는 척박한 세상에서 하루하루 밥을 벌기 위한 정철의 고군분투는 우직하고 눈물겹다. 첫장면에서 정철 혼자 가시덤불을 자르고 나무를 베는 장면이 한참 나온다. 대사는 한 마디도 없다. 그저 계속 일을 할 뿐이다. 그 장면이 지나간 다음에도 왜 그 일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없다. 박정범 감독은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로케이션 헌팅을 하다가 그 장소를 발견하고 즉흥적으로 그 장면을 찍었다고 한다. 이 첫 장면은 그 후로 계속되는 공사장, 벌목장, 메주공장(그리고 메주공장 사장집에서의 가사노동까지!) 등에서 펼쳐지는 고된 노동현장을 압축해서 보여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박정범 감독은 놀라운 사람이다. 혼자 영화를 기획하고 시나리오도 쓰고 연기도 한다. 전작인 [무산일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 '배우'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경우는 시나리오를 무려 50번이나 고쳤다고 하니 영화에 대한 그의 집념이 놀랍다.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 여자 아이 이야기를 다뤘던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처럼 현실적인 주제의 이야기를 고안하고 그 위에 실제로 메주공장을 운영했던 자신의 가족사를 얹으니 영화가 씨줄날줄로 튼튼해질 수밖에 없다. 흔히 독립영화라고 하면 습작처럼 어둡고 거친 화면과 녹음, 허술한 내러티브 등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선입견을 가볍게 배신한다. 물론 돈이 없어서 조명을 거의 쓰지 못한 듯한 촬영 상태는 좀 아쉽지만 능수능란한 화술과 시제를 적절히 뒤섞은 편집은 165분 동안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대사들도 훌륭하다.



정철은 자신과 동료들의 돈을 떼어먹고 서울로 도망간 공사장 십장의 집을 찾아간다. 밖에서 두드려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아이 혼자 라면을 끓여먹으려 하고 있던 집 창문을 부수고 들어간 정철 일행은 그 집 현관 철문을 떼어들고 나온다. “현관문 다시 찾으려면 아빠한테 돈 들고 오라고 해.”라는 말을 어린 아이에게 남기고. 잔인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영화는 정철을 멋진 남자나 정의로운 사람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 뭐든 다 하는 무색무취한 사람으로 보여줄 뿐이다. 툭하면 가출을 하고 고속터미널에서 아무 남자나 끌고 가 섹스를 한 뒤 돌아와서는 자해를 하는 누나를 어쩔 것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빠를 찾고 싶다며 교회 헌금통에서 훔친 돈과 명훈이 알려준 쪽지만 들고 무작정 서울의 공장까지 올라간 조카 하나를 어쩔 것인가. 돈 떼어먹은 십장과 내통했다고 자신을 찾아와 린치를 가하는 동료들이나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된장공장 기존 노동자들의 질시를 어쩔 것인가.



이런 이야기일수록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관건인데, 마침 이 영화는 정철을 연기하는 박정범은 물론 그의 바보 친구을 연기하는 박명훈의 연기도 믿음직하다. 연극판에서 이미 검증된 배우 이승연의 열연 또한 눈이 부시다. 나는 동생에게 붙잡혀 트럭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트럭문을 열고 그냥 도로로 굴러떨어지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마 정철의 누나가 대학로에서 오디션 보는 장면에서는 거의 모든 관객들이 전율을 느껐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연기가 처음이라는 하나 역의 신햇빛과 메주공장 사장딸 역의 박희본까지 모두 제 역할에 충실하고도 남는다. 다만 메주공장 사장의 연기만 조금 어색했는데, 알고보니 그 분은 감독의 친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시종일관 무겁고 답답한 것만은 아니다. 간간히 유머코드도 있고(‘우리 같이 잤잖아’,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공장에서 함께 밥을 나눠먹는 메주공장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들도 눈물겹지만 트로트적인 감성이 깔려있다. 난 특히 뭐든 곁에서 도움이 되고싶다는 명훈에게 “그럼 수퍼에 들어가서 저 무우 하나 훔쳐봐”라고 말한 뒤 그렇게 못하겠다는 명훈에게 시범을 보이려 일부러 무우를 훔쳐나와 땅바닥에 패대기 치던 정철의 모습과, 술에 취해 버스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여자친구 진영을 찾아가 행패부리던 장면이 특히 좋았다. 해가 진 저녁, 터미널에 멈춰있는 고속버스 안에서 손님들과 함께 조하문의 ‘이밤을 다시 한 번’을 부르던 진영은 갑자기 버스 안으로 들어온 정철 때문에 당황한다. 그리고 곧 손님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정철. 취해서 저항도 제대로 못한다. 그리고 그런 정철을 감싸는 진영. 너무 가난하고 힘들면 사랑하기도 힘들다. 가슴 아픈 장면이지만 따스한 장면이기도 하다.



버스 안에서 주인공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정류장이 다가오자 좌석으로 허리를 낮추어 몸을 숨기던 [무산일기]의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툭하면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던 절실한 대사가 잊혀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도 메주공장 사장이 “자네, 닭 잡을 수 있나?”라고 물었을 때 박정범의 “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기시감처럼 튀어나와 나의 뇌리에 박혔다. 이것은 뭐든 할 수 있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당장 밥을 굶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들의 일자리라도 빼앗지 않으면 가족들을 건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답이 보이지 않는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비참한 이야기 속에서도 희망의 빛은 피어난다. 가출한 누나를 위해 조카 하나와 함께 집앞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장면이 그렇고 한밤중에 철문을 짊어지고 가서 다시 아이에게 현관문을 달아주는 정철의 전기드라이버 소리가 그렇다. 165분 내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던 영화였고 불이 켜지고 일어나면서 꼭 다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영화였다. 지금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강추한다. 놓치지 마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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