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이승연 배우가 나오는 독립영화를 논현동에 있는 '이디야커피랩'에서 보게되었다. 이디야 커피랩 사장께서 매장 한 곳에 'E씨네'라는 아주 작은 상영관을 만들어서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한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어제 상영작은 [내 청춘에게 고함]으로 잘 알려진 김영남 감독의 [뜨거운 차 한잔]. 2005년도에 찍은 40분가량의 단편이다. 불치병에 걸렸다고 진단을 받은 아버지가 어쩐 일인지 다시 건강해졌다는 진단을 받고 어리둥절해 하는 딸. 병원에서 나온 딸은 아버지에게 택시를 타고 돌아가라 하지만 아버지는 걸어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화가 나서 아버지와 헤어진 딸은 네 살난 아이와 함께 읍내로 나갔다가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던 남자를 만나 모텔로 간다. 그들이 섹스를 하는 동안 모텔 주변에서 놀던 아이는 사라진다. 

아이에게 낚시를 가르치는 할어버지, 새로 생긴 남자친구에게도 위안을 얻지 못하는 엄마, 서울에 있는 친오빠와의 가시돋힌 전화, 엄마의 불안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어린 아들, 전남편에게서 온 편지...등등 영화는 숨겨진 많은 애기들을 뒤로한 채 아버지와 딸 사이에 놓인 차 한잔을 바라보다 끝을 맺는다. 

비록 톤이나 화법은 달랐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들이 생각났다. 롱테이크로 천천히 움직이다가 장면전환할 때마다 약간의 여운을 주는 카메라워크가 인상깊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필름으로 찍었다는데 정작 어제는 필름으로 보지 못해 아쉬웠다. <뜨거운 차 한잔>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재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감독의 말에 의하면 장편으로 개작을 하려다가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엎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이승연의 연기는 11년 전인데도 그 내공이 엄청나다. 그녀가 내 친구라는 게 자랑스럽다. 작은 영화관에 열 명 남짓 모인 관객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그 열기와 진지함은 어떤 시서회장보다도 뜨거웠다. 이렇게 작은 영화들이 일반 관객들과 만나는 일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라꼴이 하도 말이 아닌 때라 영화 보는 것도 마음이 썩 편하지만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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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 - 허드슨강의 기적] 을 조조로 봤다.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비행기가 허드슨강으로 비상착륙 하기 전에 여승무원들이 침착하게 매뉴얼에 따라 커다란 목소리로 '머리 숙이고! 몸은 낮추고!'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장면부터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났다. 그래, 그냥 저렇게 하면 되는 거였는데.

승객들이 물 위에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내려 양쪽 날개 위에 가지런히 서 있다가 한 명씩 구조되는 모습을 보며서도 눈물이 났다. 아니, 그냥 물에 반쯤 잠긴 비행기 선체를 보면서(사실은 아, 세월호 때랑 똑같네, 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들었을 때부터) 화가 나고 눈물이 났다. 아침에 출퇴근용 보트 선원들이 달려와 사람들을 구조하는 장면에서도, 지나가던 헬기가 관제센터와 무전을 주고받고 구조작업을 펼치는 장면에서도 눈물이 나고 울화통이 터졌다. 아, 저 나라와 이 나라는 얼마나 다른가. 155명 전원이 구조되었고 시작부터끝까지 모두 24분만의 일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연출력에 대해 새삼 더 보탤 말이 없다. 그냥 담백하게 한 시간반의 러닝터임 안에 사고와 반성과 해야할 일과 가족애와 정의로움과 떳떳함을 모두 담아냈다. 기장과 부기장이 공청회 중간에 잠깐 나와 서로 나누는 짧은 대화 중 "We did our job." 한 줄엔 그 떳떳함이 가득 차 있다. 옆자리를 보니 아내도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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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라고 하는 한심하고 야비한 방송사를 그래도 시청자들이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한도전’이나 ‘복면가왕'과 같은 킬러 콘텐츠가 아직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엔 ‘PD수첩’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황우석 사건 등등에 대한 정권의 입맛을 해치는 취재와 방송 이후 PD수첩의 주요 PD들이 좌천되고 해직되었다. 뉴스타파로 간 최승호 PD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는 뉴스타파에서 일하면서 만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이라는 이상한 사건을 한 번 깊게 파보기로 결심한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 서울시 공무원이 간첩이라니,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은  ‘21세기 액션 블럭버스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다분히 과장된 유머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리 틀린 타이틀도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일단 ‘스파이’가 등장한다. 거짓말이 난무하고 강력한 방어기제가 있으며 그걸 파헤치는 PD의 담대함은 ‘저러다 어디 한 군데 크게 다치는 거 아냐?’라고 염려가 될 정도로 ‘무대뽀’일 때가 많다. 이 영화는 최승호라는 ‘공익적인’ 인간의 집념이 어떻게 실천적으로 진행되고 구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결과물이다.

북한에서 살았던 유우성의 동생 유가려는 오로지 친오빠와 함께 살고 싶다는 이유로 서울에 온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와 국정원은 그녀를 합동신문센터라는 곳으로 데려가 6개월 간이나 감금한 채 협박과 회유, 폭행을 일삼는다. 하이힐이나 구둣발로 자신을 때리다가 조금 후엔 같이 눈물을 흘리고 껴앉아주는 ‘언니’와 ‘큰삼촌’ 수사관들의 농간에 판단력이 흐려진 그녀는 결국 '오빠를 위해’ 유우성이 간첩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게 된다. 당연히 그것 때문에 유우성은 체포되어 감방으로 끌려간다. 아무래도 이 나라엔 ‘간첩’이 꼭 필요한 모양이다. 영화 곳곳에 재판정에서의 실제 녹음 분량이 나오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살살 유도하는 검사의 목소리는 간교하기 이를 데 없고 기가 막힌 유우성의 목소리와 주눅이 든 유가려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가득차 있다. 최승호PD팀과의 인터뷰 내내 눈물을 흘리던 유가려는 결국 오빠를 만나지도 못하고 중국으로 추방되고 만다. 공항에서 취재진의 카메라에 대고 힘없이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련하다. 

모든 것은 국정원이 꾸민 짓이다. 유우성 사건을 취재하다가 만난 한종수 사건(본명은 한준식. 역시 간첩으로 몰려 수사를 받다가 감옥에서 자살했고, 무연고자 묘지에 묻혀있다)도 마찬가지다. 간첩은 해마다 생겨났고 그때마다 억울한 사람들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죽거나 병신이 되었다. 70년대 대학생 간첩사건이나 유학생 간첩사건 얘기가 나올 때 등장하는 남산의 살벌한 지하 고문실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최승호는 안기부를 찾아간다. 법원 앞에서 몇날며칠을 기다려 유우성을 간첩으로 만드는 검사를 인터뷰하고 유가려를 때렸던 ‘언니’에게 말을 건넨다. 중국으로 날아가 유우성이나 한준식의 주변인물들을 만난다. 중국에서 북한에 있는 열여덟 살짜리 한준식의 딸과 통화하며 뒤늦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주는 대목에선 정말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런데 합동신문센터는 영화팀이 묻는 것에 대해 ‘일체에 대한 아무 것도 확인해줄 수 없다’라고 말한다. 들이대는 카메라를 손으로 막고 끄라고 고함을 치는 건 어디서나 똑같이 벌어지는 일이다. 당장 달려들어 깨버릴 기세다. 그래도 최승호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국정원장이었던 원세훈에게 달겨들어 유우성 사건에 대해 묻고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예전 대공분실 팀장이었던) 김기춘에게 가서 학생 간첩단 사건에 대해 묻는다. 당신이 직접 쓴 메모가 여기 있지 않냐고. 지금이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할 용의는 없냐고. 당신은 대답할 의무가 있다고. 그러나 묵묵부답. 소이부답. 외면이 이어진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모르는 일입니다. 왜 이러세요? 당신 누굽니까. 명함을 주십시오. 적반하장. 철면피…이것만이 그들의 대답이다.  원세훈과 그의 부인은 결국 우산으로 카메라를 가려버리고 공항에서 만나 처음엔 반가워하던 김기춘은 최승호의 정체를 알고나자 굳은 얼굴로 돌아선다. 

영화의 뒷부분에 최승호 팀은 서울대를 다니다가 끌려가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한 뒤 정신병에 걸려 평생을 허비한 재일교포 김승효를 찾아간다. 40년 만에 찾아간 친구들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던 김승효는 차츰 기억이 돌아오자 수십 년간 쓰지 않았다는 한국말로 ‘한국 무서워’, ‘한국 나빠’를 중얼중얼 외친다. 누가 이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영화 말미엔 지금까지 있었던 간첩사건 일지가 연도별로 쭈욱 나온다. 모든 간첩사건 끝엔 ‘무죄 판결’이라 씌여 있는데, 지금까지 해마다 빠지지 않고 간첩 사건이 있었다는 기막힌 사실이 기록에 의해 밝혀진다. 신기하게도 중간에 딱 십 년 간만 간첩사건이 없었는데 그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다. 그때만 북한이 정신을 차려 간첩을 양성하지 않았던 것일까. 간첩은 북한이 만드는 걸까, 안기부가 만드는 걸까.


서울극장에서 있었던 시사회장엔 영화 상영 직전 최승호 PD가 나와 인사를 했다. 보통 영화를 개봉하고 무대인사를 할 때는 감독이 주연배우들을 데리고 나와 인사를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영화의 ‘주연배우'들은 모두 고위직인데다 한결 같이 바쁜 사람들이라 나오지 못했노라 너스레를 떠는 그는 이 영화가 개봉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준 ‘뉴스타파’ 회원들과 이름 없는 후원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천안함 프로젝트]도 [다이빙벨]도 멀티플렉스라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좌절됐다. 영화를 만들어도 극장을 잡지 못하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멀티플렉스에서 상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철저하게 상업논리로 무장한 멀티플렉스 시스템을 뛰어넘는 방법은 역시 많은 사람들이 봐주는 것 뿐이다.

엔딩 크레딧엔 이 영화의 제작과 상영이 가능하도록 펀딩을 해준 사람들의 명단이 ㄱㄴㄷㄹ순으로 나온다. 길고 긴 그 명단이 우리에게 남은 힘이고 시대를 바꾸는 희망이다. 영화를 같이 본 배우 김혜나는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해져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는 심정을 토로했고 배우 박호산은 쉽게 흥분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영화의 흐름이 마음에 들었으나 또한 그것 때문에 조금 아쉽기도 했다는 말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박수를 치는 것으로 제작진의 노고를 치하했다. 

논리적인 이론과 언변으로 보는 이를 설득하는 텍스트가 있는가 하면 단지 보여주는 것만으로 강한 펀치를 날리는 영화도 있다. 다큐멘터리 [자백]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괜찮다고 생각하냐 질문을 던지는 문제작이다. 물론 그 대답은 영화를 보기 전과 후로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골치 아프고 힘든 것일수록 외면하면 마음은 편해진다. 그러나 두 눈 부릅뜨고 현실과 마주하는 사람이 있어야 희망의 불씨는 생겨난다. 어렵지만 지금 그런 걸 만드는 사람들과 공감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지점, 그곳에 영화 [자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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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의 소설 [하얀전쟁]에는 베트남 전쟁터 후방에서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던 정훈병들이 정신교육 시간에 대한뉴스 필름을 거꾸로 돌려보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내용이었는데 그 당시엔 단지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만으로 다들 배꼽이 빠지도록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이야기가 그렇다. 조금만 내용을 뒤집거나 주인공의 설정을 살짝만 바꿔도 이상하게 새로운 재미가 생겨난다. 김종관 감독의 [최악의 하루]는 '바람둥이'라는 주인공 설정을 남자 대신 여자로 바꿈으로써 색다른 재미와 깊이를 만들어낸 작품이다.

바람둥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게 뭘까. 바로 거짓말이다. 무용을 전공한 배우 지망생 은희는 연기 선생한테는 표정이나 대사가 뻣뻣하다고 야단을 맞지만(연극과 영화에서 맹활약 중인 이승연 배우가 연기 지도선생으로 나온다) 실생활에서는 남자들에게 아주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잘 한다. 거짓눈물을 순식간에 흘리는 것은 물론이고 말하는 톤도 상대와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자신이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자신에게 길을 물어온 일본 소설가 료헤이에게는 자신이 '거짓말 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며 자랑까지 하니 말이다.

료헤이와 헤어진 은희는 남자친구인 현오를 만나기 위해 남산으로 간다. 아침드라마에 출연하는 주제에 썬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약속장소에 나타난 현오를 비웃는 은희. 차라리 모텔에서 옷 다 벗고 있을 때가 더 멋있다는 농담을 날리자 현오는 자기가 데려간 곳은 모텔이 아니라 '부티크 호텔'이라며 화를 낸다. 남자친구라고는 하지만 서로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 사이라는 게 금방 드러나는 허약한 장면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소한 말실수로 크게 싸우고 헤어진 은희는 혼자 남산 벤치에 앉아 사진을 한 장 찍어 무심코 트위터에 올리는데 그걸 보고 냉큼 운철이라는 남자가 찾아온다. 그는 얼마 전까지 은희와 사귀었던 이혼남이다. 은희는 그 남자와 커피를 마시다가 결국 이혼한 전 부인과 다시 합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격렬하게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 이 영화는 하룻동안 북촌과 남산을 오가며 세 남자를 만나게 되는 은희라는 여자의 이야기다.

문제는 은희가 두 남자 사이에서 연기를 펼치다가 어느 순간 딱 셋이 마주치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도 하루 종일 오가던 남산 산책로에서. 현오와 운철은 서로 자기가 진짜 남자친구, 또는 더 오래된 남자친구라고 우기다가 그동안 은희가 자기들에게 거짓말을 늘어놓고 양다리를 걸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은희는 미칠 지경이다. 자기도 도무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모순된 점을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나의 모순됨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다니. 정말 아까 연기 지도선생과 함께 연습하던 대사처럼 하나님이 내게 오늘 최악의 하루를 주기로 아주 작정을 하신 모양이구나.

화가 난 현오와 운철은 졸지에 피해자 연합으로 의기투합해 내려가서 소주나 마시자고 한다. 가기 전에 현오가 "너는 거기서 그냥 땅 파고 뒈지시던가"라고 모진 소리를 내뱉지만 달리 할 말이 없는 은희는 "어, 그럴게."라고 대답할 뿐이다.

나는 사실 한예리처럼 별로 예쁘지도 않고 신경질적으로 생긴 여자는 좀 싫어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은희역으로 한예리 이외의 배우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딱 맞는 옷이다. 같은 여자 바람둥이라도 홍상수 감독이 만든 [우리 선희]의 정유미는 남자들이 더 설쳐서 저절로 그렇게 된 수동형 바람둥이이라면 이 영화의 은희는 스스로 상대를 쥐락펴락하는 능동형 바라둥이라 더 통쾌하고 유머러스한 면이 있다. 그리고 한예리는 이와세 료와 영어 연기를 펼치는데 그게 아주 자연스럽고 좋다. 한 마디로 연기를 참 잘하는 똑똑한 배우인 것이다.

적은 예산 때문이겠지만 이 영화는 한예리, 권율, 이희준, 이와세 료 뿐 아니라 남산의 산책로와 서촌의 골목길도 어엿한 주인공으로 엔딩 크레딧에 오를 만하다. 솔직히 김종관의 예전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는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핸드헬드가 난무하는 바람에 보다가 멀미가 날 지경이었는데 이번 영화는 카메라가 매우 안정적이고 정적인 화면들이 아름다워서 아주 놀라웠다.

적은 예산 덕분에 하룻동안 벌어진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었는지는 몰라도 연기와 극본, 카메라까지 좋은 영화라 누구에게든 한 번 보라고 자신있게 권할 만하다. 게다가 제목은 '최악의 하루'지만 영화 말미엔 이와세 료와의 마지막 대사들을 통해 어렴풋이 해피엔딩을 암시하고 있기까지 하다. 아마 그래서 영화평론가 이동진도 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한 주가 저물어가는 금요일 저녁쯤에 보면 최적일 영화'라고 썼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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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들에게 가장 큰 애증의 대상은 누구일까. 아마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닐까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 없이 전해준 스승, 그리고 걷는 법부터 시작해 창작의 방법론까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다시 배운 제자. 서로는 너무나 잘 아는 사이이면서도 주종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애증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제자들에게는 제 스승을 넘어서야 하는 무의식적인 의무감까지 있다. 흔히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말이 스승을 존중하고 어려워하는 말로 해석하지만 사실은 스승이 이룩한 길을 피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여기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애증의 결정판 같은 이야기가 있다. 토종 연극 <도둑맞은 책>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작품을 쓸 정도로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가 된 서동윤은 어느 날 자신의 보조작가였던 조영락에게 납치를 당한다. 영락은 스승의 방과 똑같이 꾸민 곳에 그를 집어넣고 최소한의 음식과 커피만 제공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쓰라고 위협한다. 주제는 '슬럼프에 빠진 작가가 살인을 하고 그의 작품을 훔친다'이다. 동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게 다 무슨 미친 짓인가 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며 제자에게 욕을 하고 야단을 친다. 그러나 휠체어에 자신의 두 팔을 결박한 채 골프채를 휘두르며 달겨드는 영락을 본 후로는 쉽게 웃을 수 없게 되었다. 자, 좋든 싫든 살기 위해선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어디서 많이 본 얘기라고? 그렇다. 모티브만 놓고 보면 캐시 베이츠가 출연했던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 <미저리>가 떠오른다. 그러나 모티브는 비슷해도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에 각 작품이 도달하는 위치는 사뭇 다르다.


이 연극은 원래 영화를 위해 씌여진 글(2011년 대한민국 스토리공모대전 수상작)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심리 드라마'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위에서 언급한 '미저리'를 생각하면 이 컨셉은 스릴러나 심리 드라마로서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 글을 쓰던 서동윤이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자신의 시나리오에 애착을 갖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영락과 함께 '좋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진정으로 고민하는 장면부터 이야기는 급속도로 재미있어진다. 그리고 시나리오 안으로 들어가면서 생기는 플래시백을 통해 맨 처음 수업 시간에 <차이나타운>의 시나리오 작가가 누구인가를 묻는 장면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영화지식 겨루기'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오타쿠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즐거운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다. 동윤을 위협하면서 예전 스승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상기시키고 지금 동윤이 쓰는 시나리오에 적용시키며 비웃는 영락, 그리고 그에 맞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 몸부림치는 동윤. 이 연극은 어쩌면 그런 두 남자의 불꽃 튀는 화학작용이 가장 큰 '스펙터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장르적 분류는 작가를 위협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글을 쓰게 하는 미친 팬심 스릴러 <미저리>보다는 기존 공포영화의 온갖 룰들을 들먹이며 가지고 놀던 <스크림>의 악동들 쪽에 더 가까운 듯하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객석을 둘러보니 오른편 뒤쪽에 배우 송영창이 혼자 앉아 있었다. 더블 캐스팅 중인 배우가 다른 팀의 연기를 모니터링 하며 자신의 대사도 한 번 더 점검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날 밤 연극이 끝나고 서동윤 역을 맡은 박호산 배우와 술을 한 잔 하며 들어보니 지금 진행되고 있는 캐스팅 중 송영창 박용우 팀은 '클래식'에 가깝고, 자기네팀은 '재즈' 분위기를 내기로 해서 똑같은 연출가와 각본이라도 아주 다른 연극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간다고 한다. 욕심 같아서는 다른 팀의 공연도 한 번 관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내가 뭐 평론가도 아니고 또 그렇게 시간을 낼 자신도 없다. 사실은 그날도 갑자기 업무가 길어지는 바람에 야근하는 동료들을 놔두고 혼자 도망치듯이 뛰쳐나와 겨우 관람한 연극이었으니까.


얼마 전 성북동으로 이사를 와서 새로 생긴 이웃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박호산 배우였다(도대체 우린 이게 무슨 인복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같이 연극을 본 아내는 박호산 배우가 '너무도 능글맞게 연기를 잘 하는 바람에 무대 위로 달려가서 머리를 한 대 탁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하며 웃었다. 노련하고 안정감 있는 배우와 연출의 힘이 균형감 있게 느껴지는 흐뭇한 공연이었다. 다만 소극장이라고 하기엔 공간이 약간 크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소극장 공연은 관객이 바로 옆에서 피부로 느끼는 맛도 있는 법인데 말이다. 


9월 1일부터 25일까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있는 충무아트센터 블루에서 만날 수 있다. 한가위 연휴 빨간날들 중 하루 골라서 이 연극을 한 번 보시는 건 어떨까 적극 권장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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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건 <원더플 라이프>였다. 상영관이 광화문 씨네큐브였는데 예매를 해놓고도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시간에 쫓겨 마구 뛰어갔던 기억이 난다. 헐떡이는 숨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지켜본 그 영화는 죽은 사람들이 저승으로 가기 전에 열흘 정도 림프계에 머물면서 자신이 살아있을 동안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무엇인지 반추해 보고 그걸 토대로 자기만의 단편 영화를 하나씩 찍는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일생을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으로 '도쿄 디즈니랜드에 갔던 때'를 꼽은 경우가 많았다는 기사에 충격을 먹어 이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는 후일담을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아내는 원작소설을 읽은 것 같다고 한다) 당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죽음이든 죽음에 대한 생각이든 이 감독은 전혀 슬프지 않게 일상처럼 차분하게 다룬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나는 이 영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팬이 되었고 그 후로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등을 차례차례 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개봉한 그의 데뷔작 <환상의 빛>을 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어제 보게 된 것이다. 영화는 아무런 이유 없이 3개월된 어린 아이와 아내를 남겨두고 스물여섯 살에 자살하듯 기차에 치여 죽은 남자 얘기로 시작된다. 망연자실한 아내. 그러다가 몇 년 후 아랫집 세탁소 아주머니의 소개로 멀리 바닷가 마을로 재혼을 하러 간다. 상대는 딸이 하나 있고 늙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남자다.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아이들도 여자를 잘 따르고 남자도 서글서글하니 잘 대해준다. 처음 남편이 죽었을 때는 도저히 못 살 거 같았는데 또 어찌어찌 다른 곳에서 정을 붙이고 살게 된다. 



여자는 전남편이 왜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렸는지 늘 궁금해 하지만 인생엔 끝내 답을 찾을 수 없는 게 너무나 많다. 여자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전남편의 죽음에 대해 현재 남편에게 물어본다. 그런데 남편은 담담하게도 자기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여자는 어쩌면 지금 남편이 시아버지에게 들었다는(마치 사이렌의 노래를 닮은) 수평선 위 반짝반짝 빛나는 '환상의 빛' 때문에 그 남자가 그렇게 된 건 아닐까 그냥 짐작해 볼 뿐이다. 분명한 건 누군가의 죽음 뒤에도 다른 사람들의 삶은 계속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그걸 서두르거나 채촉하는 일 없이 카메라를 통해 천천히 바라볼 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씨네21의 20자평을 찾아보니 그냥 다짜고짜 '환상의 힘'이라고만 쓴 평론가도 있고(진짜 이 영화를 본 건지 의심이 간다) '동전의 양면 같은 생사불이, 거기 아롱대는 빛의 매혹!"이라고 과대하게 의미부여를 한 사람도 있었다. '남겨진 사람의 통증. 답을 찾으려, 빛을 찾으려'라는 휘트먼의 싯구절 같은 평마저 있다. 내 생각엔 영화에 죽음이 나온다고 해서 그 것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들엔 죽음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그 자체의 비장함보다 죽음 이후에도 또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따뜻하고 차분한 시각으로 관조하는 데 쓰임으로써 더 큰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악인이나 극적인 사건, 또는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아도 그의 영화는 언제나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리라. 


이 영화는 만든 지 21년이나 된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아내는 "저 어린 여배우도 이젠 나이가 많이 들었겠네..." 라고 혼잣말을 했다.  1995년 베니스 영화제 촬영상(황금오셀리오니 상), 카톨릭 협회상, 이탈리아 영화산업협의회 상을 수상하고,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것도 모자라,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게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이라는 수식어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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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정책기획관의 "국민의 99%는 개나 돼지와 같다”라는 발언 덕분에 인간의 가치가 그리 높게 느껴지지 않을 때 마침 <곰의 아내>라는 연극을 보았다. 왜 '곰의 아내'냐 하면 주인공인 소녀가 어느날 산에서 발을 다쳐 길을 잃었다가 곰을 만나 그의 새끼까지 낳고 살게 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살을 하려던 한 남자를 구해주게 되는데 그에게 자신이 곰의 아내였으며 자신의 새끼를 사냥꾼이 죽여버린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사라진 곰 대신 그 남자와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새롭게 아이를 낳고 살게 된다. 다분히 신화적인 이야기이다. 일단 곰이 나오니 우리의 단군신화나 웅녀 생각부터 떠오른다. 


남산예술센터는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 이어 두 번째로 온 곳인데 원형강의실처럼 구성되어 있어 무대에 대한 집중도가 높고 최소한의 효과만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심플한 시스템이라 올때마다 기분 좋은 극장이었다. 객석도 입식좌석을 고정시켜 놓은 형태라 공간 낭비가 적고 편안하다. 물론 내가 연극 공연 도중 무심코 발을 좀 길게 뻗었다가 앞에 앉은 여자 관객의 옆구리를 건드리는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말이다. 


영화 <화장>과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열연했던 배우 김호정의 호연이 돋보이는 무대였다. 다만 팜플릿의 인삿말에서부터 작가와 연출의 변이 서로 부딪히는 것을 읽게 된다는 건 안쓰러운 일이었다. 작가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수많은 곰아내들이 있습니다"라고 쓰며 이는 곧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동굴 속으로 들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자신도 수 많은 곰아내 중의 하나였다가 연극을 하고 글을 쓰며 무사히 걸어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원래 쓴 희곡 <처의 감각>이 아니라 각색된 대본 <곰의 아내>로 공연을 하게 된 점이 대해 송구한 마음이라고 썼다.


작가가 '곰의 아내'라는 것을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로 읽은 것에 비해  연출가 고선웅은 함께 살기 시작한 남자가 생활의 짓눌려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고 여자도 결국 이전에 같이 살던 곰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에 촛점을 맞춘듯 하다. 이는 세계관에 대한 충돌이다. 작가는 신화적 해석을 하는 반면 연출가는 이 모든 과정을 '샐러리맨의 딜레마' 정도의 메타포로 좁히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극은 후반으로 갈수록 지루하고 공허하게 흘러간다. 작가의 의도대로 공연이 되었으면 훨씬 더 단단한 장면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내도 <처의 감각>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한 번 이 연극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작가나 연출 둘 다 쟁쟁한 경력을 가진 인물들이다. 그래서 어느 사람이 옳다고 말할 순  없다. 더구나 예술은 '타협'의 세계가 아니다. 다만 극단 '마방진'의 특징이라고 하는 과장된 톤과 문어체 형식의 대사를 조금 더 살려서 가슴 뜨거운 장면들을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마지막에 진짜 곰이 잠깐 출현하는 키치함 대신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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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내면 진다, 가뷔 바위 보! 안 내면 진다, 가뷔 바위 보...!"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며 한 명씩 피구 경기의 팀원을 뽑는 모습이 보인다. 아니, 소리만 들리고 카메라는 한 소녀의 얼굴을 고정적으로 비추고 있다. 혹시 자신이 최후까지 남을까봐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고 있는 소녀. 그러나 결국 염려대로 자기가 맨 마지막까지 선택되지 못했다. 맨 마지막에 잉여 인력인 소녀를 억지로 데려가야 하는 팀의 친구가 뭐라뭐라 이 여자애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다가 맨 마지막에 "미안, 농담인 거 알지?" 하고는 게임을 하러 가버린다. 짧지만 슬픈 장면이다. 



 토요일 아침에 잔인하고 무서운 심리극을 보았다. CGV압구정에서 상영 중인 영화 [우리들]. 이건 11살 어린 아이들의 우정, 이 아닌 갈등을 다룬 영화다. 다시 말해 어린들이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어린이 영화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이들이 뭐 그리 큰 갈등이나 고민이 있겠어,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삶의 갈등과 오해, 염려, 수직과 수평을 오가는 권력관계 등은 어린이들이라고 어른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는 게 편치 않은 건 그게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벌어지는 일이라 더 답답하고 끔찍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팽팽하고 자연스러운 극의 흐름을 만들어낸 것은 윤가은 감독의 뛰어난 연출 덕분이다. 자신의 경험담에서 시작되었다는 영화의 주제는 아역 배우들에게 연기학원을 그만두게 한 뒤 일대일 개별 면담시간을 거쳐 배우들의 개성을 파악했고, 전체 내용은 모르더라도 카메라가 돌아가는 상황들은 정확하게 인식하게 한 다음에 자신의 표정과 대사로 펼치게 한 즉흥연기를 카메라 두 대로 찍어냄으로써 훌륭한 리얼리즘으로 형상화되었다. 이 영화의 출현을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비교하는 영화의 카피는 이전에 이 작품과 거의 비슷한 연출 방법을 먼저 선보였던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 때문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출 방법이 비슷하다고 폄하될 이유는 전혀 없다. 그것이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기에 사용된 것이었을 테니까.


영화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들이 떠올랐다. 직접적이고 분명한 갈등들, 가슴을 후벼파는 대사들, 원형적인 인물들이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모양이다. 뛰어난 어린이들의 연기는 물론 영화에 배치된 어른들의 캐릭터나 배경도 영화의 질감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맨 마지막에 아주 희미한 화해의 가능성만 남겨두고 두 인물에 집중하는 카메라 워크는 이 영화를 끝까지 빛나게 한다. 특히 무심하게 들려오는 피구 경기의 앰비언스는 대학교 개방형 강의실을 물끄러미 비춰주던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 마지막 씬을 연상시킨다. 이 영화가 해외에서 상을 많이 타서 감독이 다음 작품을 좀 더 수월하게 연출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 토요일에 영화를 보고 이동하는 지하철에서 급하게 쓴 감상문인데 기록의 차원에서 제 홈피에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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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을 두 번 보았다. 우리 부부는 시간이 안 맞아서 이 영화를 따로따로 보았는데 어느 날 다시 극장에서 함께 보고 작품에 대해 서로 얘기해 보자는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조조를 봄으로써 그 약속을 이루게 되었다. 


한 마디로 곡성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는 마을이 있다. 얼마 전 마을로 들어온 외지인의 짓이라는 소리도 있고 귀신의 짓이라는 소리도 있다. 그러다가 마을 경찰인 종구의 딸 효진이가 병에 걸려 이상한 짓을 하게 된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상하게도 왜, 라고 묻는 순간 할 말이 없어진다. 그냥 재수가 없어서? 아니, 그걸 설명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이 영화는 세상 모든 일 중 ‘왜?’ 라는 질문에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음을 얘기하는 듯하다. 대신 ‘어떻게’에 대한 얘기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왜 효진인가, 가 아니라 효진이가 선택된 이후에 종구는 딸을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고 일광은 어떻게 어떤 굿을 했으며 무명은 마을을 지키려고 어떻게 노력했는지가 이 영화를 보는 재미의 포인트다.

어떤 사람은 이 영화가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어떤 이는 종교와 샤머니즘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고도 한다. 다 맞는 말 같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이건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왜?’라는 전자의 질문이 그럴듯한 담론들을 만들어낸다면 후자의 ‘어떻게?’라는 질문은 옳고 그름을 떠나 어디로 뻗어나갈지 모르는 무궁무진한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외지인이 왜 곡성에 들어왔는지는 모른다. 왜 사람들을 죽이는지도 모른다. 일광이 외지인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최선을 다했나,에 이르면 스토리와 디테일들은 단박에 날개를 달고 끝없이 달려 나간다. 


나홍진 감독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주된 이야기는 치열하고 치밀하게 침입을 방어하고자 하는 어느 가장에 대한 이야기다. 2시간 내내 전력을 다해 방어하는데 들어오려고 하는 존재가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 모르는 상황이 가장 무섭다.”라고 했다. 영화는 일광이나 무명이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야기의 끝까지 간다는 데 진짜 묘미가 있다. 심지어 끝나고 나서도 좋은 편과 나쁜 편의 구별이 희미하다. 어쩌면 사건의 중심에 있으며 동시에 최대 피해자인 종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맨 마지막 장면에 도달해서도 “걱정 마, 아빠가 다 해결 할게.”라는 하나마나 한 맥빠진 소리나 중얼거리고 있다. 난 이렇게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열려있는 결말’이 좋았다. 

그래서 이건 일종의 거대한 ‘ 사기극’이라고 생각했다. 포스터나 예고편에도 나오고 일광도 얘기하던 그 ‘낚시질’ 말이다(미국에도 있다.J.J. 에이브람스라고, 거대한 '떡밥'의 일인자). 만약 당신이 사기꾼을 만났다면 그가 왜 사기꾼이 되었는지를 묻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대신 어떤 사기를 어떻게 쳤는지 물어보는 게 옳다. 아마 그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질문에 더 신이 나서 자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양껏 풀어놓을 것이다. 물론 진짜 사기꾼이라면 나중에 당신까지 속여먹고 튈지 모르니까 그 전에 얼른 차버려야겠지만, 그게 나홍진 같은 영화감독이라면 기분 좋게 한 번 속아줘도 좋지 않겠는가. 가뜩이나 재미 없는 세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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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모스트 페이머스(Almost Famous)’라는 캐머런 크로우의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연극도 ‘거의 메인이 될 뻔한’ 이라는 뜻인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오로라가 보이는 메인 주 북쪽에 있는 가상의 마을 ‘올모스트’에서 일어나는 아홉 커플의 이야기더군요. 연극은 벤치에 앉은 어린 남녀의 짧은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느닷없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두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자신들이 정한 명제와 지구의 둘레 길이를 재는 데서 이견이 생겨 어처구니 없이 헤어집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는 올모스트 마을로 오로라를 보러 온 여자가 그 동네 사는 남자 집 마당에 다짜고짜 텐트를 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입니다. 여자는 관광 가이드에 나온대로 이 동네 사람들은 오로라 관광객들에게 매우 호의적이라 자기는 이 집 마당에다 텐트를 쳐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하고 남자는 그러는 여자에게 갑자기 사랑을 느껴 키스를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의 부서진 심장을 봉지에 넣어 들고 다닌다고 말하고 사실은 죽은 남편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오로라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종의 부조리극처럼 느껴지는 이 시퀀스는 번역투의 문장들과 과장된 제스추어들로 인해 역설적인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번역극의 묘미는 관객들이 우리나라 사람인 줄 뻔히 아는데도 배우들이 외국인 이름을 달고 외국인 연기를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전에 다 서로 속고 속아주기로 짜고 보는 셈이지요. 그러다보니 너무 자연스러운 대사 처리나 몸짓보다는 서양 사람들처럼 약간 과장된 제스추어들이 더 대본의 의미를 잘 전달해 줍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특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여배우의 대사 처리가 뛰어나 더 좋았습니다. 

그밖에도 세탁실에서 만난 커플, 결혼기념일에 스케이트장에서 싸우는 커플, 누가 더 불행한 지(사실은 누가 더 한심한지) 내기를 하다가 동성끼리의 사랑을 깨닫고 당황하는 남-남 커플, 그리고 천둥벌거숭이 불알친구처럼 지내다가 남녀관계로 돌입하는 커플들의 이야기까지,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도 모아놓았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하는 짱짱한 구성입니다. 

집에 와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연극은 2002년에 뉴욕에서 초연된 이후로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흥행작이라고 하네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의 대본을 쓴 사람이 미국 TV시리즈 ‘로 앤 오더’로 유명한 배우 존 카리아니(John Cariani)라는 사실이죠. 배우 출신 천재 극작가가 애런 소킨 말고도 또 있다니, 참 살 수가 없습니다. 연극을 보기 전에 잠깐 얘기를 나눈 유정민 배우는 이 작품은 대단히 쉽게 쓰여진 즐거운 작품처럼 보이지만 두 번 이 상 보면 현대인의 슬픈 단면을 잘 잡아낸 연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귀뜸해 주셨습니다. 연극을 보고 난 뒤 그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됩니다.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더 보고 싶은 연극입니다. 겨울에 보면 더 좋은 연극이라는 말에도 동의합니다. 아주 따뜻하고 웃기고 슬픈 연극이라 사랑하는 사람과 보기 참 좋은 연극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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