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낮잠에서 깨어난 나는 오디오를 켜 말로의 앨범을 틀어놓고 현관앞에 앉아 책꽂이에서 충동적으로 꺼내온 김훈의 <바다의 기별>을 펼쳐들었다. 책을 열자 여기저기 파란색 볼펜으로 쳐놓은 밑줄과 메모들이 보였다.

딸이 첫 월급을 받아 휴대폰을 사주고 용돈으로 15만 원을 주었을 때 김훈은 '노동과 임금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딸'을 쳐다보며  ‘그때 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라고 썼고 나는 그 귀퉁이에다 “좀 대견했다고 쓰면 어디가 덧나냐”라고 끼적이고 있었다. 김훈이 친구들과 술 마시는 자리에서 엉뚱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소방장비들의 기능과 작동방식에 대해 늘어놓다가 핀잔을 받는 장면에다가는 “데뷔작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얘기는 왜 안 하냐”라고 또 시비를 걸고 있었다. 

‘70년대의 기라성 같은 청년작가 김승옥이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발표했을 때, 아버지는 문인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모두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아서 넋이 빠진 상태였다…새벽에 아버지는 “이제 우린들 시대는 이미 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라는 문단을 읽으면서 문단에서 김승옥이라는 작가의 등장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는지를 새삼 느꼈고 그게 가능했던 매체 환경과 감수성을 부러워했다. 


그러다가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라는 글을 읽게 되었다.

아직 김지하의 정신이 말짱하다 못해 푸른 대나무처럼 빛나고 있을 때였고 스물일곱 살의 청춘인 김훈이 신문기자로 발령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영등포 교도소에서 김지하와 백기완 등 정치범들의 출소를 기다리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다들 교도소문이 언제 열릴지 알 수 없었으므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중국집에서 배달 온 식은 짬뽕국물을 마시며 교도소 안으로 전화를 걸어 “야, 풀어주려면 제발 지방판에 맞춰서 풀어주라. 지방 독자는 사람이 아니냐”라고 욕설을 퍼붓던, 그 스산하고 춥고도 지루한 풍경. 

그때 김훈은 교도소 정문 맞은편 야트막한 언덕에서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이를 업은 채 추위 속에 웅크리고, 저물어가는 교도소 정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혹시 박경리가 아닐까 하고 다가가 훔쳐보니 김지하의 장모 박경리 선생이 맞았다. 대절한 택시를 옆에 세워놓고 태어난지 10개월 된 손자를 어르며 언제 나올지 모르는 김지하를 기다리고 있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 김훈은 운좋게도 혼자 박경리를 알아보았지만 그렇다고 기자들을 향해 “여기 박경리 왔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밤 아홉 시께 옥문이 열리고 머리를 박박 깎은 김지하가 나타났다. 고은, 천승세, 조태일, 김광협 들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고, 학생들이 김지하를 무등 태워서 캄캄한 교도소 앞 광장을 미친 듯이 달리며 고함을 질렀다. 김지하는 장모가 와있는지도 몰랐으므로 아무 생각도 겨를도 없이 그들의 지지자들이 마련한 승용차를 타고 교도소 앞을 떠났다. 

다른 기자들은 대부분 김지하의 승용차를 따라 명동성당으로 가버린 뒤 김훈은 김지하 출감 기사를 먼저 신문사에 전화로 송고하고 백기완이 나오기를 또 기다렸다. 밤 열한 시쯤 드디어 백기완이 나오게 되었는데 교도소측에 의하면 6년 전 백기완이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벌금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어서, 그 벌금 십만 원을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즉석에서 모금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사람들이 대부분 떠난 후라서  제대로 모금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교도소 정문 앞 광장에 내려온 박경리가 포대기 앞섶을 뒤적거리더니 만 원짜리 몇 장을 내놓고 대학생에게 이 돈을 보태라 말하고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기자의 신분으로 모금에 참가할 수 없어 주머니 속에 있는 만 원짜리 몇 장을 만져보고만 있었던 김훈은 마지막이 이렇게 썼다.

그날 밤 나는 신문사로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박경리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나는 다만 백기완의 출소 모습만을 추가로 썼다. 나는 박경리에 관하여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말해서는 안 될 일인 것만 같았다. 새벽 두 시께 집으로 돌아와 잠자다 일어난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고 말했다. 춥고 또 추운 겨울이었다.




Posted by 망망디
,

 

 

한 시간을 넘게 서가 앞에서 서성이던 앳띤 고교생은 결국 ‘엠마누엘부인 시리즈 특집’ 이란 기사가 실린 [월간 스크린]을 내밀며 ‘누나, 이것 좀 싸주세요’ 라고 은밀하게 말했다.
 
막 사춘기에 들어섰던 나는 소문만 무성하던 그 영화 '엠마누엘 부인'의 스틸 컷 몇 장이 실린 잡지 표지에 이미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던 것이다. 서점 주인 누나는 알았다는 듯 씽끗 웃으며 코팅 포장지와 스카치테이프로 정성껏 책을 싸주었다. 그게 재희 누나와의 두 번째 만남이었던 것 같다.
 

1982년 겨울, 그때 나는 고등학교 일학년이었다. 당시 내가 살던 시커먼 동네 구파발엔 서점이 딱 한 군데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전철역 앞의 [진양서점]이었다. 기자촌 입구 쪽에 있는 헌책방 하나를 제외하면 도대체 책을 살 수 있는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여기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언제나 용돈이 풍족하지 못했던 나는 그 후로도 가끔 서점에 들러 한 시간이 넘도록 이 책 저 책을 집적거리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서너 번을 들러 야 겨우 소설책 한 권을 사는 게 고작이었는데, 어느 날 주인 누나가 한숨을 쉬며 차 한 잔을 타더니 난로가에 앉으라고 했다. 이젠 올 때마다 책을 안 사도 괜찮으니 언제든지 놀러 오라는 얘기였다.
 

누나의 이름은 재희였다. 서재희. 서른이 넘은 노처녀였으며 신춘문예 6수생. 그닥 예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진 선량하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매일 서점에 가서 놀았다. 책 얘기를 많이 했고 광주사태, 김대중, 계훈제, 전두환, 장영자 사건 등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다.
 
 

“언니, 용이 아제가 죽었어. 흑흑…”
 
당시에 박경리의 <토지>를 열심히 읽던 동네 누나가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오며 애석해 하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진양서점엔 나 말고도 단골손님이 많았다. 당연히 우리들은 쉽게 친구가 되었고 저녁이면 사랑방처럼 난로가에 둘러앉아 이런 저런 책 얘길 나누었다.
 
 
이외수의 <들개>, <훈장>, <장수하늘소>, 한수산의 <부초>, <해빙기의 아침>, 윤흥길의 <장마>,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내 마음의 풍차>, 김성동의 <만다라>, <기차길옆 오막살이>, 김홍신의 <난장판>, <인간시장>, 함석헌의 <씨알의 노래>, 황석영의 <객지>, <장길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 김주영의 <객주>, <아들의 겨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김지하의 <오적>, 최인훈의 <광장>, <회색인>, 이병주의 <지리산>, <행복어 사전>…
 
춘천 거지로 유명했던 이외수, 여자보다 더 여성적인 문체를 만들어내던 한수산, 술과 여자가 없으면 글을 쓰지 못한다던 이병주, 읽다 보면 정부 발표보다 훨씬 더 많은 광주 희생자의 숫자가 까발려짐으로써 당국의 미움을 샀던 황석영, 김지하와 박경리의 거룩한 관계 등 우리는 서로 앞다투어 읽은 책들과 그 주변에 얽힌 뒷얘기들을 나누었고 또 읽고 싶은 책들에 대해 듣고 말하고 감탄했다. 
 
당시에 한 문학월간지에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막 연재를 시작했었는데 경상도 억양이 심한 재희 누나는 이 소설에서 쏟아지듯 펼쳐지는 전라도 사투리들을 그렇게 재밌어 했다.

염상진의 아내 죽산댁이 주재소로 끌려가 빨치산인 남편에게서 연락이 오면 신고하란 말을 듣고 ‘고로코럼은 못하지라!’’ 라고 하는 대사를 억지로 흉내 내는 걸 보고 우리들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난 염상구의 쫀득쫀득한 전라도 사투리들 - ‘서울말 고것이 워디 붕알 단 남자덜이 헐 말입디여? 밑구녕 째진 것덜이나 헐 말이제. 밥 먹었니이? 잘 잤니이? 고 간사시럽고 방정맞고 촐싹거리는 말이 워디가 좋다고 배우것습디여?’ - 이 단연 좋았다)
 
 
아직 이명박이 현대건설 사장이었고 정광태가 <독도는 우리땅>이란 노래를 부를 때였다. 어둡고 돈은 없었지만 또한 좋은 시절이었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담배를 피웠으며 연애를 했고 또 군대도 갔다. 이제는 그때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들 보다 나이가 많아졌다. 그리고 책은 거의 인터넷으로 산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초반을 진양서점과 함께 보냈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재희 누나는 잘 있을까.
 
빠알갛게 달아오르던 연탄난로에 모여있던 사람들. 어제는 무슨 책을 읽었으며 이번엔 또 무슨 책을 읽을까 얘기하던 사람들. 이젠 가물가물해져 추억의 책갈피도 되지 못한다. 그래도 가끔은 그립다. 토토가 어린 시절의 극장을 다시 찾아갔던 것처럼 나도 꼭 한 번 다시 가보고 싶은 곳. 진양서점. (2008.7.17)

Posted by 망망디
,

지리산 일기 1

독서일기 2012. 5. 4. 11:15

 

 

이 소설은 1933년 추석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박경리의 [토지]가 1897년 추석날 시작하던 것과 비슷하지요? 첫 장면은 제사를 지낸 규와 태가 다음날 지리산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십 리라고 했던 무덤까지의 거리는 그 두 배가 넘는 길이었다는 게 밝혀지죠. 그건 할머니의 양반이수’라는 뻥이었다고 같이 가던 중부가 알려줍니다. 양반이수란 양반들이 짐꾼들 삯을 떼어먹으려고 거리를 줄여 말하던 수작을 일컫는 말이었죠. 규와 태는 결국 지리산에 있는 할아버지 묘에 참배를 하고 나오다가 제사 지낼 때 펴놨던 병풍과 똑같은 풍경을 목격하고 할아버지가 수십 년 전에 화공을 앞세우고 거기까지 와서 그 풍경을 병풍에 그대로 담게 한 까닭을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규와 같이 산소에 갔던 중부는 몇 년 뒤 가출을 해버립니다. 독립운동 하느라 집안 다 말아먹고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중부를 보다 못한 백부가 마름 자리라도 해보라고 말한 게 화근이 된 겁니다. 행방이 묘연한 중부는 지리산에 있는 ‘서동지’라는 사람을 찾아간 게 아닌가 하는 아련한 소문만 남깁니다.

 

규는 공부도 잘 하고 마음가짐도 바른 청년으로 자랍니다. 그리고 박태영이라는 엄청난 천재와 친구가 됩니다. 고리끼의 소설을 탐독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불려간 사건을 계기로 박태영과 더 친해진 규는 돈 많은 지식인이자 자신을 ‘딜렛탕트’라고 자조하는 인물 하영근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중국의 노신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알게 되죠. 그리고 하영근의 딸 윤희에게 희미한 연정도 품게 됩니다. 일본인이지만 존경할 만한 인물인 하라다 교장과 영어선생인 쿠사마도 만나게 되는군요. 지금 고등학교 진학 공부를 위해 상주에 왔다가 여관집 딸인 야스꼬의 수학문제를 풀어주는 바람에 이 여자와도 나중에 뭔가 이루어질 분위기를 풍깁니다…지금 134페이지까지 읽었습니다.

 


어렸을 적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가슴이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새삼 기억납니다. 중편소설인데도 스케일이 크고 꿈을 꾸는듯한 낭만적인 필치가 어지간히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이게 데뷔 소설이라니요. 그리고 그 뒤 고등학교 2학년 때 [행복어사전]을 읽으면서 얼마나 즐거웠던지. 지금 다시 읽으면 좀 구시대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이병주를 읽으니, 옛 친구를 다시 만난 느낌이랄까. 즐겁습니다.

 


 

'독서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화'에 대한 짧은 메모  (0) 2012.10.17
지리산 일기 2  (0) 2012.05.14
제가 [지리산]을 집어든 까닭은  (0) 2012.05.03
우린 지금 피로하다 - [피로사회]  (0) 2012.04.19
대학로 책방에서 서성거리다  (0) 2012.03.17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