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예정되었던 일정들도 미리 앞당겨져 다 소화되는 바람에 졸지에 사무실에 한가한 바람이 불길래 옆방의 윤PD를 꼬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보러 가자. CGV압구정, 3시 20분 있네. 표는 내가 살게.” 


대뜸 넘어오는 윤PD. 그래서 오래 전부터 보고 싶어했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드디어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NHK의 대하드라마 [료마전]의 타이틀롤을 맡았던 미남 배우죠.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의 탐정물 [갈릴레이] 시리즈의 주인공이기도 하구요. 언제 봐도 준수한 외모와 좋은 인상,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자기관리 등으로 이름이 높죠. 1969년생인가 그런데 아직도 결혼을 안 해서 그런지 지금도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싶은 연예인’ 같은 앙케이트 조사에서 해마다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엄청난 훈남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실력 있는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하다죠? 나 참. 


그런데 후쿠야마 마사하루만큼이나 저를 반갑게 했던 인물은 상대역으로 나오는 릴리 프랭키였습니다. 이름이 좀 이상하죠? ‘Frank Goes to Hollyood’ 라는 영국 그룹이 있었는데 거기서 따온 예명이랍니다. 이 사람은 연기자이기 이전에 일러스트레이터였고 칼럼니스트였고 작곡가였고 라디오 DJ였으며 소설가였습니다. 보잘것없게 생겼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다방면에 눈부신 재능을 뿜어내는 인간이죠. 예전에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함께 [료마전]에도 특별출연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라는 자전적 소설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전 이 소설을 읽고 정말 펑펑 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광고 카피가 ‘우는 얼굴을 보이기 싫다면 전철에서는 읽지 마라’였다네요. 나 참. 그런데 아마 지금 읽어도 또 울 겁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 책을 읽고 그렇게 울었는데 이젠 저도 릴리 프랭키처럼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까요. 



영화는 아이가 병원에서 바뀐 줄도 모르고 육 년 동안이나 친자식으로 키워오다가 어느날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당황하는 두 집안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매우 극적인 사건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늘 그렇습니다. 죽어서 림프계에 머물게 된다거나(원더플 라이프), 엄마가 아이들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버린다거나(아무도 모른다), 실직한 사실을 숨기고 형의 기일을 챙기러 부모님댁으로 찾아 온다거나(걸어도 걸어도) 하는 돌발상황을 던져놓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살아가며 변화하고 변화시키는 인간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관찰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떤 묵직한 울림이나 깨달음이 다가오는 것이지요. 특수한 상황을 통해 인류 보편적 가치까지 서서히 끌어올리는 통찰력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젊은 거장으로 불리게 한 힘일 것입니다.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맡은 아버지 역은 빈틈없고 세련된 성공 비즈니스맨의 모습입니다. 당연히 이 문제도 아주 이성적으로 풀어가려고 하죠. 반면 상대편 아버지 역을 맡은 플랭키 릴리는 시골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입니다. 문제의 아들 말고도 두 명의 아이를 더 키우고 있는 40대의 중년이구요. 당연히 영화는 후쿠야마 마사하루 부부의 입장에서 진행이 됩니다. 어쩐지…수학이나 피아노를 잘 못하는 거 보면 역시 핏줄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는 거야. 저렇게 초라한 전파상을 하면서 애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는 걸까? 차라리 우리가 두 아이를 모두 키우면 안 될까…?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얼굴은 점점 초조해지는 반면 릴리 프랭키의 표정은 늘 여유가 있습니다. 그건 두 가족이 함께 만나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엘리트 아빠는 자기 친아들과도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서먹서먹해 하는데 전파상 아빠는 패스트푸드점 놀이시설에서 아이들과 한덩이가 되어 뒹굴고 웃으며 순간을 즐깁니다. 어떤 가정이 더 행복할 지는 관객이 눈으로 지켜보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히로카즈 감독은 아이들을 참 잘 찍습니다. [아무도 모른다]를 찍을 때는 아이들에게 연기지도를 하는 대신 촬영 직전에 아이들에게 다가가 앞으로 찍을 내용을 귀에 조용히 속삭여 주고는 그냥 마음대로 놀게 했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연스러운 연기들이 나오는 것이겠죠. 저는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이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사랑스럽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아이들에겐 아이들의 생각이 있다’ 라는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영화 도중 초밥 먹는 장면이 나오자 “외, 맛있겠다!”라며 입맛을 다시던 윤PD는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대뜸 초밥 얘기부터 합니다. 



윤PD : 정했어요. 오늘 저녁엔 혼자라도 회를 먹을 생각입니다. 

성준 : 영화 참 좋지? 


윤PD : 그러게요. 잔잔하게 찍었는데도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아요. 

성준 : 저런 게 바로 사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윤PD : 예, 애를 하나 낳아볼까 하는 생각이 다 들더라니까요. 

성준 : 하하. 잘 생각해. 



윤PD나 저나 둘 다 아이가 없는 놈들인데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상관 없습니다. 이 영화는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영화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인지를 질문하게 하는 영화니까요. 그리고 좋은 인간이 되는 법을 함께 고민하게 해주는 좋은 영화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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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소설 [아Q정전]의 주인공 아Q는 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싸가지’조차 없어서 늘 다른 놈들에게 당하고 얻어터지기만 하는 ‘상 찌질이’다. 그러나 그는 싸움이 끝나고 나면 늘 자신이 이번에도 결국 이겼노라고 멋대로 생각해버리는 ‘정신적 승리법’의 달인이기도 하다. 100년 전 대문호 루쉰은 ‘작금의 중국 동포들의 정신상태가 바로 이런 모습 아니겠냐’고 신랄하게 꼬집느라 이 소설을 쓴 것이었지만, 자고로 동서고금의 약자들에겐 그런 소심하고 편리한 상상력이라도 있어야 이 험한 세상을 견뎌낼 수 있는 법이다. 그건 20세기 최고의 사진전문잡지 ‘라이프 매거진’ 구석방에서 16년째 네거티브 필름을 현상하며 살아가고 있는 소심남 월터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는 모히칸족 헤어스타일을 하고 스케이트보드 챔피언 대회에 나갈 정도로 도전적인 삶을 살’뻔’도 했으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로는 식구들을 봉양하느라 회사 생활에만 매진하다 보니 결국 일탈도 성공도 연애도 꿈꾸지 못하며 하루하루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는 전형적인 소시민이 되어버린 월터 미티. 그런 월터가 가장 잘 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도때도 없이 멍때리기’다. 상상 속의 월터는 매우 용감하고 진취적이며 힘이 세다. 한마디로 못하는 게 없는 수퍼 히어로다. 그러나 미망에서 깨어나 보면 회사에서 멋대가리 없는 점퍼를 입고 네거티브 필름실로 향하다가 기면발작하듯 ‘데이드림’에 빠지는 얼간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엘리베이터 안에서 새로 나타난 재수없는 수염투성이의 구조조정 전문가에게 “야, 그런 수염은 덤블도어에게나 어울리지, 새꺄!”라고 쏘아붙이는 월터의 모습은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상형일 뿐이다. 


그런 월터에게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오프라인 잡지시대를 마감하고 온라인으로 전향하는 라이프지의 마지막 표지를 장식할 사진작가 션 오코너의 사진 중 사라진 ‘스물다섯 번째 컷’을 찾아 직접 그린란드로 날아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늘 행방이 묘연하고 세계 곳곳을 떠돌아 다니면서도 휴대폰이나 디지털 기기조차 쓰지 않는 괴짜 포토그래퍼 션을 찾아 떠나는 일에 월터가 처음부터 발벗고 나섰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가 몰래 짝사랑하는 회사 내 동료여직원 셜리의 눈빛과 미소가 그를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그녀가 회원으로 가입했다는 얘기만 듣고 자기도 그녀에게 ‘디지털 윙크’ 한 번 보내고 싶어서 덜컥 가입했던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의 상담원도 그를 부추긴다. “월터, 이제 망설임은 접고 새로운 모험을 시작해 봐” 라고. 



영화는 20세기 한복판을 가로지른 역사적인 잡지 ‘라이프’의 몰락이라는 큰 그림 위에 월터의 정신적 성장이라는 구체적인 갈등을 던져 모두가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데뷔작으로 [위노나 라이더의 청춘스케치]라는 멋진 영화를 만들어 냈던(편의점에서 “맘,맘,마,마이 섀로나!”라는 노래에 맞춰 미친듯이 춤추던 주인공들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헐리우드의 재간둥이 벤 스틸러는 이번 영화에서도 적절한 개연성과 깨알같은 유머로 관객들에게 일정량 이상의 감동을 선사하는 데 성공했다. 


전체적인 영화의 짜임새는 더소 헐겁지만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히말라야의 풍광들, 스케이트 보드 모티브, 빨간 마티즈 파란 마티즈, 데이비드 보위의 명곡 ‘A Space Oddity’ 등  곳곳에 숨어있는  촘촘한 에피소드들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엷은 미소를 띄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뒷부분에 잠깐 등장하면서도 영화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숀 펜의 그 존재감이란. 월터의 어머니로 등장해 중요한 순간마다 슬기로운 조언을 해주는 셜리 맥클레인은 또 어떤가. 1983년 [애정의 조건]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는 자리에서 “난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어!”라고 외치며 데보랑 윙거의 눈물어린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를 어찌 잊으랴. 


미리 예상은 했지만 션이 "월터는 그 누구보다도 내 사진을 잘 이해했던 사람"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마지막으로 선물처럼 건냈던 문제의 ‘스물다섯 번째 컷’은 역시 우리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그것은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일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격려임과 동시에 상상에만 머물고 차마 실천하지 못하며 살아왔던 우리 모두의 '잃어버린 꿈'에 대한 아련한 찬가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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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구에서 팔던 장난감 같은 영화 - [퍼시픽 림] 



영화 [퍼시픽 림]에 에 나오는 ’카이주’는 괴수의 일본 발음이라죠. 외계인은 늘 하늘에서 날아오는 줄 알았는데, 어느날 태평양에서 괴물들이 출현해 도시를 파괴하고 다니는 겁니다. 외계인들이 수억 년 전 공룡시대에 지구에 왔다가 ‘아, 아직 때가 아니구나’하고 그때부터 진득하니 기다렸다가 이제야 나타났다는 거죠. 


카이주라는 이름부터 그 괴물들을 쳐부수는 로봇 ‘예거’를 두 명이 조종한다는 설정, 그리고 괴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장난감처럼 무력하기만 한 탱크와 비행기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오타쿠 맞습니다. 오덕입니다. 마징가Z나 로보트태권V같은 캐릭터들이 우리나라 만화라고 생각하며 자랐던 저희 세대랑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 같습니다. (영민했던 저는 철이가 마징가Z의 조종관으로 들어가 기어를 조종하면서 “화이야, 온!”이라 외치는 걸 보고 일본 만화라는 걸 진작에 눈치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만화의 주인공들은 왜 기어나 버튼을 조작하면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까요? 기합 넣는 건가? 아직도 궁금해요) 



이 영화의 ‘좋은 로봇’ 예거는 마징가나 그레이트 마징가, 태권V처럼 버튼이나 기어 대신 두 명이 직접 몸을 움직여 조정하는 일종의 ‘모션 트레이스’ 방식입니다. 브라이언 브라운이 [F/X]에서 썼던 그 특수장비 옷처럼 말입니다. 아, 얼마 전에 휴 잭맨이 나왔던 [리얼 스틸]도 대충 이런 식이었군요. 


이 작품은 캐릭터도 좀 뻔하고 인물들간의 갈등구조나 해소도 고만고만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진격의 거인]처럼 진지하게 벽을 쌓아 괴물을 막는 어이없는 설정도 나옵니다. 대신 로봇들의 질감이나 규모는 진짜 현실감 넘칩니다. 시가지에서 괴물과 싸우느라 거침없이 부서져 나가는 건물과 자동차들은 그야말로 스펙터클합니다. 문방구에서 파는 그리운 장난감 같은 이 작품을 보고 ‘대도시파괴성애자를 위한 영화’라는 글을 누군가 인터넷에 올렸다는 얘길 듣고 한참 웃었습니다. 


여주인공 마코 모리 역의 기쿠치 린코는 좀 안습이더군요. 그렇게 이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고 눈만 큰 여자애. 브래트 피트 주연의 [바벨]에 나올 때는 그렇게 인상 깊었었는데. 린코 대신 배두나가 맡았어야 했다는 어느 페친의 말씀에 많이 동감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보다 이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무신경함이 더 큰 패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앞섭니다. 



공감 가는 점도 많은 영화입니다. 우선 이런 블록버스터마다 등장하는 ‘팍스 아메리카나’가 없어서 좋습니다. 물론 대사는 모두 영어로 나옵니다만 이 영화에서 미국은 그저 ‘태평양연안(퍼시픽 림)’의 동맹군일 뿐이죠. 그리고 두 명의 조종사가 ‘드리프트’를 해야 한다는 설정도 재미 있었습니다. 드리프트는 서로의 경험과 생각, 심리상태 등을 모두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이런 걸 하게 되면 서로의 성적 취향을 속속들이 알게 되고 결국 “이런 변태새끼!” 소릴 할 만도 한데, 어린 관객을 위해 그런 건 다 그냥 넘어가는군요.  


영화 종반 즈음, 괴수들의 공격으로 최신 예거들이 동작을 멈췄을 때 제일 처음 만들어졌던 구닥다리 예거가 나서서 세계를 구하는 장면이 나오죠. 디지털 기반의 기계들이 어떤 에러로 인해 동작을 멈추었을 때 바보 같은 아날로그가 나선다는 이 설정은 기성세대들에게 보내는 감독의 따뜻한 위로이자 찬가일 겁니다. 찡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죠. 제기랄. 


전 이 영화를 공짜표로 보았습니다만, 뭐 돈을 내고 봤다고 하더라도 재미있게 즐기며 봤을 것 같습니다. 거창한 기대나 새로운 선언 없이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소소하게 떠들면서 볼 수 있는 그런 정감 있는 영화죠. 제가 볼 때는 옆에 초등학생, 앞에 중학생들이 앉아서 함께 떠들면서 봤는데 걔들이 중간에 화장실도 다녀오고 서로 내용도 물어보고 하는 게 오히려 정겹고 좋았습니다. 



영화 보면서 웃었던 거 하나. 이런 영화에서 대장들은 아무리 시끄러운 장소에서도 입만 열면 다른 사람들이 일순 조용해지고 연설하는 목소리도 쩌렁쩌렁 울리게 마련이죠. 이 영화에 나오는 저항군 사령관 스탁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설하는 목소리는 기름지고 호흡도 여유롭습니다. 배경음악도 우퍼가 진동할 정도로 장엄하게 깔리죠. 다른 영화에서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경찰청장이나 전쟁을 선포하는 대통령들도 연설 참 잘 합니다. 그런데 실제 세계에서는 왜 다들 그렇게 목소리들이 쫌팽이 같을까요? 억양이나 발음도 후지고. 


전 박원순 시장을 좋아하는데, 서울시장 선거전 할 때 TV토론 본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상대 후보 나경원의 똑부러지고 앙칼진 말솜씨에 비하면 그 분은 얼마나 어눌하고 느려터지던지. 박 시장님, 어렸을 때 웅변학원 같은 데 좀 다니시지 그러셨어요…? 그래도 응원합니다. 존경하구요. 음. 뭐 결론이 좀 이상하네요. 하지만 고치지 않고 그냥 가겠습니다. 이건 그냥 비 오는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난 김에 마구 쓰는 영화 수다니까요. 영화평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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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EBS ‘한국영화특선’에서에서 이창동의 [밀양]을 다시 하네요. 2007년도 영화입니다. ‘생일번개’로 친구들과 이 영화를 본 다음날 집에서 꼼짝 않고 오후 내내 영화일기를 쓰다가 밖으로 나가 술을 마시고 다시 들어와 마저 완성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 제가 쓴 영화일기 중 가장 집중해서, 가장 괴로워하면서, 그리고 가장 행복해하면서 쓴 글이 아닐까 합니다. 제목도 없고 좀 긴 글이지만 그래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져 오랜만에 다시 꺼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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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 저, 신애예요. 이신애. [밀양]의 주인공이요. 며칠 전 전도연씨가 칸에서 상 탄 소식 듣고 저도 무척 기뻤어요. 혹시 [밀양] 아직 못보셨어요? 어머, 그럼 이 글은 읽지 마세요. 저도 스포일러라고 욕먹고 싶진 않거든요.

 

 

[밀양]보시는 동안 힘드셨죠? ㅋㅋ…죄송해요. 제 팔자가 좀 세야 말이죠. 사실 남편 고향이라고 밀양 내려간 건 순전히 제 오기였죠. 죽은 남편이 바람 피운 것도 인정하기 싫었고, 사랑에 배신당한 여자라구 동정 받는 것도 싫었거든요. 그래서 ‘오냐, 내가 얼마나 잘 살아내는지 한번 보여주마!’라는 마음으로 내려간 거였어요. 괜히 센 척 한 거죠. 안 그러면 전 재산 780만원 남은 년이 땅은 왜 보러 다니고 그랬겠어요.
 
우리 쭌이 보셨죠? 예쁘죠? 진짜 너무 예뻐요! 근데 그렇게 이쁜 애를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미치겠더라구요. 처음 범인의 전화를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제가 밀양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겨우 종찬 씨뿐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무작정 달려갔는데 이 남자, 혼자 카센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예요. 미치는 줄 알았어요. 정말 애는 돌려줄 줄 알았는데. 걔가 무슨 죄가 있다구 그렇게 죽여요? 그게 사람이에요? 당장 패 죽이고 싶었어요. 찢어 죽이고 싶었어요. 그 놈 죽이고 저도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쭌이 사망신고를 하고 나오다 동사무소 앞에 잠깐 정신을 놓고 쓰러졌었는데 그 때 마침 ‘상처 받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회’ 라는 현수막이 보이더라구요. 약국 아줌마가 예수 믿으라고 치근덕댈 땐 이게 왠 헛소린가 했는데 그 땐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걸음이 향하더라구요. 이런 게 바로 성령인가 싶었죠.

 

무턱대고 들어가 의자에 앉았는데 처음엔 계속 기침만 나왔어요.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냥 울음이 쏟아지는 거예요. 무슨 둑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요. 도저히 울음을 그칠 수가 없더라구요. 사실 우리 쭌이 보내고 나서 그때처럼 후련하게 울어본 게 처음이었어요. 목사님이 와서 제 머리에 손을 얹으시는 순간 온 몸이 짜릿하게 떨리고, 아 이제 살겠구나 싶었어요. 전 그날 처음으로 잠을 아주 푹 잤어요.

 

 왜 하필 기독교냐구요? 저도 이창동 감독님한테도 물어봤죠. 왜 하필 교회냐구. 그랬더니 ‘기독교만큼 사람들 인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종교가 또 있냐?’고 하시더라구요. 맞는 말이에요. 제가 만일 교회 대신 절이나 성당에 갔었으면 그토록 빠르고 그토록 절실하게 구원과 평화를 얻지는 못했을 거 같아요. 제가 만난 신이 하필 하나님이었던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좀 극성스럽긴 해도 이건 단순한 종교영화나 반기독교 영화는 절대로 아닌 거죠.

 

하루하루가 새로웠어요. 전 그야말로 벼락을 맞은 것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그때부터 하나님하고 연애를 하는 기분이었다니까요. 진짜 믿는 건지 아니면 믿는 척 하고 싶었던 건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뭘 모르는 종찬씨도 저를 졸졸 따라다니다 결국 교회까지 왔지만(그 사람 진짜 속물이거든요) 그렇게라도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제가 역 앞에서 찬양하는 동안 뒤에서 불량한 친구들하고 담배나 피면서 ‘한라산 정기’ 어쩌구 떠들더라도 전 조금도 개의치 않았어요. 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이렇게 행복한데, 그 사람이 원님 덕분에 나팔 좀 분다고 뭐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용서하기로 했죠. 그래, 우리 쭌이한테 그런 일이 생긴 것도, 나한테 그런 일이 생긴 것도 다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뜻이었을 테니까. 이제 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라면, 거꾸로 그걸 실천함으로써 나도 영원한 마음의 평화를 얻으리라. 면회 가서 그 인간을 봤을 때 전 너무나 뿌듯했어요. 아, 저기 나의 용서를 받고 새롭게 구원을 얻을 어린 양이 앉아 있구나. 이게 결국 하나님의 큰 뜻이었구나...

 

근데…근데 이런 씨발, 그게 아니었어요. 말이 돼요? 감방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그 놈의 말을, 드디어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그 미친놈의 말을, 아침에 일어나 기도로 시작하고 자기 전에도 기도로 끝낸다는 그 인간 말종의 말을 제가 듣다니요!

어떻게 교도소를 나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제가 잠깐 기절을 했었나 보죠? 하하하. 웃음밖에 안 나왔어요. 하나님이 날 배신하다니. 하하. 그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약국에 찾아가서 아저씨를 꼬셨어요. 순진한 분이라 그런지 쉽게 넘어오더라구요. 아저씨랑 억지로 섹스를 하면서 전 하나님한테 물었어요. ‘보여? 보여? 보이냐구?’ 당신이 그렇게 사랑한다던 그 어린 양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보이냐구!

 

 약국 아저씨랑 헤어져서 카센터로 갔더니 종찬씨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더라고요. 오늘이 생일이었나 봐요. 아, 그래서 같이 저녁 먹자고 했었구나. 전 잔인하게 물었죠. ‘종찬씨도 하고 싶어요, 섹스? 혹시 원하나 해서.’ 미친년같이 노래를 부르는 제 앞에서 종찬씨는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며 가게를 뒤엎었죠.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였거든요. 하하. 신에게 복수하는 길은 신의 어린 양을 죽이는 길뿐이다. 그래 죽자! 잘 봐. 과도로 손목을 그은 것도 몰랐어요. 그냥 견딜 수가 없었나 봐요. 피가 철철 나데요. 근데 왜 살고 싶었을까요? 이 비참하고 치사한 목숨, 왜 놓기가 싫었을까요?

 

 정신병원에서 나온 저는 머리를 자르러 미장원에 갔다가 그 살인범의 딸을 만났어요. 이창동 감독님, 정말 지독한 사람이죠? 보통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리면 그 사람도 좀 맛이 가는 법인데 이창동 감독님은 문화부 장관까지 하고 나서도 어떻게 변한 게 한 개도 없어요? 그 뭐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쓴 유홍준 씨도 얼마 전에 문화재 옆에서 고기를 구워먹다가 장난 아니게 욕 먹고 하던데 말이죠.

 

 머리를 자르다 말고 뛰쳐나온 저는 ‘니 미칬나, 머리를 한쪽만 자르다 나오게?’ 라고 말하는 양품점 아줌마 얘기를 듣고 쿡쿡 웃음을 터뜨렸어요. 미친년한테 미친년이라구 물으니까 그것도 의외로 재밌더라구요.

 

 

죽는 건 좀 보류하기로 했어요. 그렇다고 뭐 딱히 살아갈 희망이 생긴 건 아니구요. 따뜻한 햇빛 아래서 머리를 듬성듬성 잘라버리고 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맨날 구박만 받으면서도 변함없이 제 주변을 얼쩡거리는 종찬씨가 어떤 땐 좀 고맙기도 하구요. 사실 그 사람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냐구요?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죠 뭐.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애들 피아노 가르치고…가끔 종찬씨 좀 갈궈주고. 아, 근데 요즘은 씽크대 앞에 서서 혼자 밥 먹고 그러진 않아요. (2007.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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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은 촬영 전 자기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에게 평소 입던 옷을 몇 벌 가져오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조감독이나 스텝들을 몰래 집으로 보내 그 배우의 옷장에서 영화에 어울릴만한 헌옷들도 더 골라오게 한다고 한다. 과연 꾸며진 이야기나 전형적인 연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홍상수 감독이 할 만한 짓이다. 그가 천착하는 ‘자연스러움’은 그런 세심한 과정을 거쳐서 탄생하는 것이다. 덕분에 홍상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연기에서도 자의식에서도 새로운 배우로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준다.


홍상수 영화에 자주 출연하는 배우 김태우와 예지원이 함께 나오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제목은 [내가 고백을 하면]. 일요일 밤에 [SBS스페셜] ‘가면 뒤의 눈물’을 보고 나니 기분이 너무 꿀꿀해져서 견딜 수가 없어서 혜자를 꼬셔 IPTV로 보게 된 영환데, 둘 다 차츰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가 아주 흐뭇한 마음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던 작품이다. (사실은 비비아나킴 님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처음 갔을 때 이 영화에 대한 칭찬을 마구마구 해놓은 걸 보고 ‘언젠가 한 번 꼭 찾아봐야지’, 하고 있긴 했던 영화다)

 


광화문에 있는 스폰지하우스의 극장주이며 영화제작에도 손을 대는 바쁜 몸이지만 주말이면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강릉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커피도 마시며 혼자 멍때리는 시간이 즐거운 영화감독 인성. 그리고 강릉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쭉 그곳에서 일해 왔지만 주말이면 어김없이 서울로 올라가 영화나 뮤지컬을 보며 문화생활을 만끽하는 게 유일한 낙인 간호사 유정.

 

두 사람에게 해결해야 할 거의 유일한 문제는 '주말 잠자리'인데, 인성은 매번 모텔 옆방에서 모르는 남녀가 질러대는 교성을 들으며 자는 것도 지겹고 호텔이 깨끗하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좀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유정은 올라갈 때마다 머물던 서울 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는 바람에 졸지에 찜질방에서 자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서로 엮일 게 별로 없을 것처럼 보이던 두 사람은 둘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강릉의 단골 카페 주인의 주선에 의해 주말마다 서로의 집을 바꿔 쓰기로 합의한다. 얼핏 도입부만 따져보면 잭 블랙과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한 [로맨틱 할리데이]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렇게 술렁술렁 얘기가 진행되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다.

 

유정은 집을 바꿔 써도 괜찮을 거 같다고 하는 지성의 제안을 번번히 거절을 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생활에 침범하는 것이 귀찮은 것이다. 그러나 지성도 유정에게 딴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요즘 떠오르고 있는 '카우치 서핑'이나 '에어 비앤비'처럼 서로의 편의를 위해 합리적인 선택을 하자는 것뿐인 것이다. 둘은 오랜 망설임을 거쳐 '서로의 물건을 건드리지 않는다', '냉장고 안의 음식은 먹지 않는다', ‘이성 친구는 데려오지 않는다’ 등등의 조건을 합의한 후 집 바꾸기에 돌입한다.


주인이 없는 남의 집에서 자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물건에는 그 사람의 삶이 녹아있다. 서로 같은 공간을 사용하지만 동시에 머물지는 않는 ‘이상한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서로의 물건을 살펴본다. 처음엔 냉장고 안. 책꽂이. 그리고 TV옆의 CD와 DVD들. 조심스럽게 열어본 책갈피에서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나 공감 가는 메모를 발견할 때면 시공간을 초월한 친밀감이 느껴지기 않겠는가.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순간을 매개로 둘을 갑자기 확 묶어버리거나 하지 않는다. 인성에게는 투자자의 입맛에 맞게 시나리오를 고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말썽쟁이 감독이 있고, 자신이라도 시나리오를 고쳐서 보여줘야 할 투자자가 있다. 피곤한 일상이다. 그러나 주말이면 어김없이 강릉으로 간다. 유정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출장 간호사도 겸임하고 있는데 암 말기 환자 부부를 돌보느라 다른 데 정신을 쏟을 여유가 없다. 자신과 불륜 관계였던 ‘김박’과의 정리도 아직 깔끔하게 끝내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주말이면 여전히 서울로 올라간다.

 

 

조성규 감독의 [내가 고백을 하면]은 반드시 극적인 사건을 등장시키거나 인물들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서울의 달동네를 찾아 다니며 카메라에 담는 유정의 시선과 강릉의 바다를 바라보는 지성의 시선이 교차편집된 장면들은 아름다우면서도 선량하다.

 

그렇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오늘의 사건사고]나 [카모메 식당],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등이 떠오르게 된다. 실제로 감독이 운영한다는 커피숍도 나오는데 이름이 ‘조제’다. 그리고 비슷한 느낌의 영화로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도 있다. 그러나 [해가 서쪽에서…]가 어떤 감동을 위한 촘촘한 준비로 가득 찬 영화였다면 이 작품은 결론을 정하지 않고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입장을 취해서 더 자유롭고 좋다.

 

그래서 등장인물들도 참 자연스럽고 멋진 연기를 펼치는 모양이다. 잘생기고 지적인 역할에 잘 어울리는 김태우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생활연기를 보여준다. 너그러움과 조심스러움, 자유로움을 함께 갖고 있는 조인성 감독은 딱 배우 김태우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 코믹한 역할을 많이 맡았던 예지원은 초반에 너무 웃음기 없는 캐릭터라 좀 부자연스러운가 하더니 중간부터 완전 몰입해서 진짜 간호사 유정이 되어버린다. 노래방에서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부르는 장면에선 가슴이 짠해진다. 그리고 안영미는 개그맨이 영화에 나와 희극 연기를 안 할 때 더 멋있게 보인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해 준다.

 


인성의 집에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을 때 우리는 유정의 마음이 어느덧 인성에게 가 닿고 있음을 느낀다. 새로 준비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고치느라 고심하던 인성은 자신이 언제부턴가 유정에게 하고싶은 말과 행동들을 시나리오에 넣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늦은 밤 강릉으로 달려간다. 유정의 집앞까지 가서는 잠깐 숨을 고르고 전화를 건다.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어서 내려오라고. 유정도 반가워 한다. 한달음에 내려온다. 그런데 이상하다. 막상 만나서는 술 대신 커피를 마시러 간다. 이런 싱거운 사람들. 하지만 이건 그런 영화다. 천천히, 사려깊게,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영화는 끝나가지만 두 사람은 이제 막 시작이다. 급할 거 없다. 그래서 둘은 술 대신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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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섹스를 두려워합니다. 물론 좋아하기는 하죠. 그런데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세상엔 그렇게 많은 성적 농담들이 존재하는 겁니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자꾸 섹스를 웃음의 소재로 삼는 거죠. 자신이 바람둥이임을 자랑하거나(나 어제 걔 먹었다), 그 친구를 부러워하는 동성 친구 얘기가 반복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너 걔 먹었구나? 나쁜 새끼!) – 레드 제플린의 노래도 있습니다. [Dyer Maker] “너 걔 먹었냐?”(Do you make her?)라는 뜻이죠.

 


잘 생기고 번듯한 직장도 있는 뉴욕의 여피족 브랜든은 외모나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하루 종일 포르노를 보고 틈만 나면 자위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한 마디로 ‘섹스중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색이 섹스중독인데도 정작 여자랑은 섹스를 잘 못합니다. 클럽에 가서 놀 때도 보스가 껄떡이던 세련된 커리어 워먼은 술자리가 끝나고 결국 멋있고 매력적인 브랜든에게 옵니다. 하지만 그런 여자랑은 원나잇 스탠드로 끝내버리고 맙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러니 회사든 집이든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수많은 변태 포르노를 쌓아놓고 보는 게 일인 거죠. 그것도 즐기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을 경멸하면서 말이죠.

 

그런 브랜든에게 여동생 씨씨가 찾아옵니다. 처음에 전 씨씨가 브랜든의 옛 애인인줄 알았습니다. 허락도 없이 집에 들어와 레코드를 크게 틀어놓고 샤워를 하는 씨씨를 도둑으로 오해한 브랜든이 야구배트를 들고 욕실로 쳐들어갔을 때 그녀는 태연하게 음모까지 노출하면서 브랜든과 얘기를 나누거든요. 그 이후에도 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집안을 돌아다니구요. 그런데 알고 보니 여동생이더군요. 아무튼 씨씨는 빈티지 모자를 쓰고 다니며 뉴욕의 클럽에서 노래를 하는 자유로운 영혼인데 팔에는 자살하려다 실패한 면도칼 자국이 무수한 상 똘아이입니다.  

 

브랜든은 씨씨가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클럽에서 두 남매의 주제가나 다름없는 ‘뉴욕, 뉴욕’을 부른 뒤 그날 처음 만난 자신의 보스와 엉켜 집에 와서 같이 자지를 않나, 집에 있는 노트북을 켜서 브랜든이 평소에 음란채팅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내고 화를 내질 않나. 급기야 브랜든이 자위하는 장면까지 급습해서 훔쳐보고 마구 비웃기까지 합니다. 그러다가도 자기 마음이 약해지면 자고 있는 브랜드의 이불로 파고들어 무섭다고 춥다고 킹킹댑니다. 브랜든은 그런 씨씨가 미워서 냅다 소리를 질러 방에서 쫓아버리죠.

 


브랜든도 노력을 안 하는 건 아닙니다. 회사에서 ‘설탕을 좋아하는군요’ 드립을 통해 급 친해진 지적인 여성 동료와 섹스를 전제로 한 데이트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으로 그녀를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합니다. 브랜든은 뭐 하나 부족함이 없는 멋있는 남자니까요.

그러나 역시. 섹스든 연애든 정말 잘 해보고 싶은 상대랑은 더 잘 안 되는 게 세상 이치인가 봅니다. 그녀와의 섹스에서 발기에 실패한 브랜든은 수치심에 떨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합니다. 물론 이럴 때 괜찮다고 하는 그녀의 위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간 뒤 곧바로 콜걸을 불러 격렬한 섹스를 합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콜걸이 돌아간 뒤 모멸감이 두 배로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인 걸 알텐데 말이죠.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에서 주인공은 세상이 무서워서 계속 섹스 속으로만 도피하다가 결국 섹스 속에 파묻혀 죽어버리고 맙니다. 브랜든도 그런 전철을 밟아야 하는 걸까요? 부끄러운(쉐임!) 자신을 견딜 수 없어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브랜든은 또다시 창녀 두 명과 난교 파티를 벌이고 게이 클럽을 찾아가 남색까지 감행합니다. 밤새도록 길거리를 돌아다닙니다. 또다른 클럽에 가서는 모르는 커플에게 일부러 시비를 건 다음 그야말로 개처럼 얻어맞습니다. 뭘 해도 직성이 풀지 않습니다. 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지칠대로 지친 브랜든은 지하철 안에서 문득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또다시 자살을 시도한 씨씨를 욕실에서 발견하고는 간신히 그녀의 목숨을 구해냅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깨어난 그녀의 모습과 목소리는 수십만 광년 떨어져 있는 별처럼 보입니다. 제대로 된 여자와의 관계는 물론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동생과도 제대로 마음을 주고받지 못하는 브랜든. 결국, 뛰쳐나가 오열합니다.

 

변하고 싶지만 변할 수 없는 지옥 같은 생활. 지옥 같은 세상.

 

 

브랜든은 지하철 안에서 또다시 어떤 여자와 눈빛을 교환합니다. 약혼반지까지 끼고 있는 그 여자도 묘한 눈빛으로 브랜든을 끌어들입니다. 눈에 익은 장면이다 했더니 이 씬은 영화 첫 장면이랑 겹치는 부분이군요. 그 옛날 AFKN에서 봤던 앤소니 퍼킨스 주연의 영화 [콜렉터]의 마지막 장면 같기도 하구요. 이제 두 사람은 또 어딘가로 가서 미친듯이 섹스를 하겠지요. 당연히 그 누구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거구요. 어떤 여자하고도 진지한 관계로는 4개월을 넘겨 본 적이 없다는 브랜든이니까요.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 이미 비주얼 아티스트로 이름을 날린 스티브 맥퀸은 이전 작 [헝거]와 [쉐임] 단 두 편으로 어떤 경지에 오른 듯 합니다. 브랜든이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앤서링머신 소리를 듣는 첫 장면부터 시내에서 조깅을 하는 기나긴 쇼트까지 영화 곳곳에 그가 잡아놓은 차가우면서도 꽉찬 화면들은 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감성을 압도합니다. 상상의 여지를 한껏 열어놓고 사람의 몸에만 천착하는 척하는 역설적 스토리텔링 기법도 신선하구요. 어쨌든 이 영화에 쏟아진 화려한 찬사와 수상 경력들이 아니더라도 그의 작품은 두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충분한 ‘우량주’라고 생각합니다.

 

 

캐리 멀리건. 미국 영국 드리마 좀 보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예전부터 캐리 멀리건의 팬이었는데 말이야…”라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되는 묘한 매력의 배우죠. 이번 영화에서도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그녀만의 압도적인 표정과 목소리와 몸짓으로 소화해 냅니다.

 

마이클 파스벤더가 이 영화의 수훈갑이라는 건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캐릭터를 이만큼 소화해낼 배우가 또 있을까싶게 그의 연기는 대단합니다. PR필름을 보면 파스벤더가 이 영화에 합류한다는 소식만으로도  주요 스텝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만큼 믿음이 가는 배우란 뜻이겠지요. 심지어 얼굴도 멋있게 생겼습니다. 저와 혜자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마이클 파스벤더는 나중에 더 나이가 들면 제러미 아이언스처럼 될 거 같지 않아?”라고 하며 좋아했습니다.

 


일찍이 시인 유하는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왜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고 했을까요? 거기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온갖 욕망과 이미지가 끓어넘치는 현대성의 블랙홀이었지만 정작 거기 가 보면 텅 빈 공허만이 있는 거니까요. 마치 ‘바다가 굉장한 건 거기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처럼. 그런데도 우린 걸핏하면 지금도 압구정동으로, 바다로 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슬슬 압구정동에 가도 소용없다는 걸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거 같은데요. 이젠 차라리 이렇게 얘기해 보는 건 어떨까요?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도 소용 없다… 그래도 다행이다. 나만 외로운 게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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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에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이후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은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였다. 적어도 쿠엔틴 타란티노가 [저수지의 개들]을 들고 나오기 전까지는. 이젠 ‘비디오가게 점원 출신의 영화 천재’라는 수식어는 골백 번도 넘게 들어서 식상할 만도 하지만 그래도 타란티노가 변함없이 천재라는 사실에 쉽게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천재들, 특히 예술 쪽 천재들의 특징을 한두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자유분방함’과 ‘싸가지’가 될 것이다. 억울한 일이다. 그놈들은 아무렇게나 꾸며대는 거 같은데도 저절로 플롯이 생기고 디테일이 살아난다. 어딘가 혼자 처박혀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결정적 증거를 내놓는 탐정처럼 무심하게 이야기를 툭 던지는 건방진 놈인데도 여자들은 그 앞으로 달려가 콧소리를 낸다. 왜냐하면 그놈들은 하고싶은 대로 해도 좀처럼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으니까. 당장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입체적으로 조명해 보면 그게 다 필요한 그림이었고 꼭 필요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니 나 또한 그녀들과 같은 입장이 된다. 생각해 보라. 타란티노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일단 흥분이 되지 않던가. 이번엔 또 어떤 얘기로 우리를 낄낄거리게 만들지, 어떤 의외의 캐릭터로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 전두엽 근처가 간잘간질해지지 않던가.

 

 

타란티노의 최신작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남북전쟁 발발 이 년 전 시점의 서부극이다. 그렇다. 놀랍게도 서부극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놀랄 일은 아니다. 코엔 형제가 그렇듯이 이제 타란티노도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증거를 대볼까? 지금 당장 헐리우드에서 타란티노가 부르면 누구든 달려온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왔고 사무엘 L. 잭슨이 왔다. 윌 스미스는 물망에 올랐다가 너무 매끈하게 생겼다는 지적이 이는 바람에 주연 자리를 제이미 폭스에게 넘겨야 했다. 크리스토프 왈츠는 작년에 [바스터즈;나쁜 녀석들]에 이어 연이은 출연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단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타란티노의 영화에 출연하는 걸까? 아니다.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데쓰 프루프] 시나리오를 쓸 때였던가? 보통 사람들은 글이 안 풀려 호텔방에서 물구나무를 섰네, 머리를 쥐어뜯었네 어쩌구 하고 있을 때 타란티노는 “어서 이걸 써서 사람들한테 들려줘야 할텐데.”라는 조바심을 가지고 손가락에서 불이 나게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타란티노의 시나리오는 한 마디로 재밌다. 나는 [저수지의 개들]의 그 유명한 오프닝 시퀀스가 지금도 너무너무너무 좋다. 정장을 차려입고 은행을 털러 가기 전 커피숍에 주르르 앉아서 웨이트리스에게 팁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한심한 문제로 마돈나의 [Like A Virgin]까지 들먹이며 싸우는 갱들이라니.

 

그런데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도 똑 같은 장면이 나온다. KKK단원들이 모여 장고와 슐츠 박사를 공격하기 직전에 말 위에 앉아 흰 복면에 뚫린 눈구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문제로 불만과 수다를 끓여붓는 장면이다. 이 장면 하나만 봐도 이건 타란티노표 영화임에 틀림없다. 또 디카프리오가 흑인 노예의 두개골을 들고 골상학 운운하며 깜둥이들의 노예근성을 설명하는 장면은 어떤가. 이 장면은 가난하던 시절 타란티노가 시나리오를 써서 토니 스코트에게 팔았던 [트루 로맨스]에서 크리스찬 슬레이터의 아버지 데니스 호퍼가 “이탈리아 놈들은 모두 깜둥이의 자손”이라며 크리스토퍼 월큰을 약올리던 모습 그대로다. 생각해 보면 타란티노는 변한 게 없다. 그런데도 늘 새롭고 재밌다. 오죽하면 꼬장꼬장한 아카데미 심사위원들도 이번만큼은 별다른 고민 없이 타란티노에게 시나리오상을 안겨 줬을까.

 


타란티노가 서부극을 만들면 어떤 얘기가 될까? 아무래도 존 포드보다는 세르지오 레오네쪽이겠지. 그런데 이건 그 정도가 아니다. 일단 주인공이 흑인이다. 디카프리오는 난생 처음 악역이다. 게다가 백인들은 모두 흑인들에게 병신 취급을 받다가 결국 몰살당한다. 꿈 같은 얘기라고?  그렇다면165분간의 불량식품 같은, 그러나 영양가까지 풍부한 롤러코스터를 지금 당장 타보시라. 당신이 놀러 간 역사공원이 순식간에 놀이공원으로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짐 크로스의 [I Got A Name]을 비롯한 탁월한 선곡들도 놓치지 마시라)

 


아, 참. 타란티노가 사랑스러운 점 한가지 더. 그도 가끔 자기 영화에 출연을 한다. 이번에도 나온다. 그러나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기 때문에 언제나처럼 찌질한 역으로 잠깐 출연한다. 이번엔 허리춤에 다이나마이트를 잔뜩 두르고 있다가 어이없이 폭발해 죽는 역이다. 이건 타란티노가 팬심으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더 CSI의 에피소드 ‘무덤 속의 위험’(Grave Danger)에서 범인이 자살하던 것과 똑같은 방법이다. 유머 넘치는 구라는 물론 깨알 같은 디테일까지, 역시 타란티노는 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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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베호벤 감독은 대량 살육의 쾌감을 만끽하고 싶어서 [스타쉽 트루퍼스]라는 영화를 만들었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을 죽이는 걸 화면에 담으면 누구에게나 끔찍하고 잔혹하게 보이지만 그 상대가 우주괴물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지치도록 베고 쏘고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중세의 ‘마녀사냥’에서 그런 비뚤어진 심리의 힌트를 얻은 바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 죽이고 싶다. 방법은 간단하다. 마녀라고 밀고를 하면 된다. 본인이 아무리 아니라고 항변을 하더라도 마녀의 변명일 뿐이므로 그건 거짓말이 된다. 그러다 모진 고문에 못이겨 거짓자백을 하면 그때부터는 진짜 마녀가 되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 와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비념]은 1948년에 제주에서 정부와 미군들에게 마치 ‘마녀’처럼 몰려 떼죽음을 당했던 4•3항쟁 희생자들과 현재 강정마을에서 정부와 미국의 이해관계에 대항해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한 줄 위에 놓고 바라보는 다큐멘터리영화다.

우리에게 제주란 무엇인가? 구름•돌•바람이 많아 삼다도라 불리던 섬이었고, 최성원의 노래처럼 ‘신혼부부 몰려와 똑같은 사진 찍’던 관광지였다. 지금은 장선우 감독이나 예전 동아기획 식구들이 ‘이민’을 가서 사는 천혜의 휴양지, 그리고 올레길과 크고 작은 게스트하우스들이 모여있는 이국적인 섬일 뿐이다. 적어도 4•3항쟁의 비극적 진실을 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임흥순은 제주 사람이 아니다. 그냥 제주에 놀러 오는 흔한 관광객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같이 일하는 프로듀서의 할머니가 4•3때 남편을 잃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걸 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굉장히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던 이 작업은 당시의 자료들을 조사하면서 기록자로서의 의무감을 갖게 되었고 아울러 현재 강정마을 구럼비바위 폭파 현장을 지켜보면서 상관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 하나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입체적인 역사의식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1948년 11월 미군정하에 있던 남한정부는 제주해안선 5Km 바깥의 모든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하고 사살하라는 소개령을 내렸다. 미녀사냥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폭도로 몰린 도민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군인들과 서북청년단들에 의해 어느날 갑자기 학교 운동장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 한라산으로 도망간 사람들은 잡히지 않으면 대부분 굶어죽거나 얼어죽었다고 한다.

 

 

2007년 6월 강정마을 해군기지 조성 공사 후 주민들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져 대립과 반목이 계속되고 있다. 여태까지 잘 어울려 살던 이웃들은 물론 가족끼리도 원수가 되고 서로 말을 섞지 않는다고 한다. 정부는 공사방해금지 명목으로 주민과 종교단체 환경단체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해 놓은 상태다.

 

 


감독은 64년 전 일이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재현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강정마을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은 1948년 당시 제주의 모습을 재현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 비디오, 설치미술 등을 전공했던 임흥순 감독은 좀 색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보통 다큐멘터리처럼 인터뷰어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카메라가 항상 인터뷰이의 얼굴을 따라가지도 않는다. 4•3사건에 대한 증언이 흘러나올 때 카메라는 제주의 풍경이나 하늘, 감귤나무 같은 고정된 사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기 일쑤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어둡고 거친 밤길을 헤매기도 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누군가 맨발로 눈길을 허정허정 걸어가는 장면을 보고 비로소 감독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의 도민들이 어떤 심정이었을까를 조금이라도 짐작하는 방법은 직접 그들처럼 밤길을 헤매보고 눈길을 헤치며 걸어보는 것뿐이라는 다소 무식한(?) 통찰이 가슴에 와닿았던 것이다.

 

 


‘비념’이란 제주에서 행해지는 작은 규모의 굿을 뜻한다. 감독은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애도의 행위야말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본성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4•3때 희생된 사람들을 애도하는 굿을 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엔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이 아름다운 자연 뒤에는 피로 물든 4•3사건이 숨어있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빼어난 자연경관 뒤에는 해군기지라는 첨예한 이해관계가 숨어있다. [비념]은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고 설명하기 보다는 스스로 볼 수 있도록 눈을 열게 해주는 영화다. 알고 보면 더 많이 보이는 영화고 알고 나서 다시 보면 더 깊어지는 영화다. 당신이 올해 블록버스터 영화를 세 편쯤 보았다면 이젠 이런 영화도 한 편 보시는 건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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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시나리오 작가 심산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대부]라고 썼을 때 그 밑에 “깡패영화 좋아하셔서 참 남자다우시겠습니다”라고 비아냥거리는 댓글이 달린 것을 보고 마음이 언짢았던 기억이 난다. 심산은 깡패영화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대부]가 얼마나 훌륭한 영화인지를 얘기하고 싶은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는 힘이 세다. 거의 모든 ‘어른영화’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을 효과적으로 소개하는 법, 주인공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 하는 법, 가슴에 남는 대사를 쓰는 법, 적재적소에서 캐릭터들이 복무하게 하는 법…한마디로 [대부]는 바보같은 깡패영화가 아니다.

 


그건 그렇고 우린 왜 자꾸 ‘깡패영화’를 보는 걸까? [신세계]를 보는 동안에도 온통 그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다. 나아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무섭기 때문이다. 왜 단란한 가족이 휴일에 대공원에 가서 일부러 무서운 청룡열차를 타고 소리를 지르는가. 왜 귀신의 집에 들르는가. 왜 다정한 연인들이 손에 손잡고 극장에 가서 귀한 돈을 써가며 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려 죽는 걸 보고 질질 짜는가. 그러면 좀 낫기 때문이다. 아, 그래도 내가 저놈들보다는 덜 힘들구나. 적어도 나는 지금 당장 영화보고 나가다가 칼에 찔리거나 나이롱줄에 목이 콱 졸려 죽진 않겠구나.


이자성은 강과장이 오래 전에 ‘골드문’이라는 폭력조직에 심어놓은 스파이다. 경찰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조직의 중간 보스급이다. 이건 뭐 [무간도]를 비껴가기 힘든 설정이다. ‘적의 내부에 침투해 활약하다가 점점 그들에게 동화되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주인공’이란 공식이 딱 나오지 않는가. 경찰이 폭력조직의 후계자 문제에 적극 개입한다는 설정은 두기봉 감독의 [흑사회] 시리즈와 흡사하다.

 

그런데도 박훈정 감독은 비껴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강력한 캐릭터와 상황들로 기존 작품들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 그래서 틈만 나면 이자성을 다그치는 강과장은 [무간도]의 황반장보다 다섯 배는 더 싸늘하고 피를 나누지 않은 ‘브라더’ 정청은 [도니 브레스코]의 알 파치노보다 더 잔정이 많다. 그렇더라도 감독이 수많은 오해를 무릅쓰고 그런 야심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출연 배우들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을 때 [베를린]을 보러 나갔다가 극장에서 포스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최민식 황정민 이정재라는 셀러브리티들이 나란히 등장하는 ‘신종 듣보잡’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박훈정이라는 이름을 보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미 시나리오 작가로 충분히 이름이 알려진 감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역시!’로 변했다.

 


황정민은 그야말로 미친듯이 연기를 잘 한다. 달라져 봐야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에서 얼마나 멀어지겠냐 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물을 만난 물고기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정청이 처음 등장할 때 비행기 일등석 슬리퍼를 신고 나오는 설정이나 이자성 대신 옆에 있던 부하 뺨을 때리는 장면 등이 모두 황정민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연기뿐 아니라 작품을 입체적으로 대하는 그의 열정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다.

 

혹자는 최민식의 연기가 황정민에 비해 좀 아쉬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경찰이 깡패들에게 카메라를 빼앗길 때 홀연히 등장해 능청스럽게 대사를 치는 최민식을 떠올려 보라. [넘버 쓰리]의 마동팔 검사 이후 그런 정확하고 적확한 발음과 억양들이 아무한테서나 나오는 게 아니다. 그리고 날고 기는 황정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튀지 않음으로써 극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까지 충분히 해주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그림이 되는 배우 이정재. 연기력이 모자라던 [모래시계] 때처럼 정말로 ‘가만히’ 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베테랑이다. 그리고 거울 효과라는 게 있다. 이런 귀신 같은 배우들과 함께 연기를 하면서 어떻게 연기가 좋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연기자들이 또 있다. ‘연변거지들’이다. 인천국제공항에 처음 등장할 때는 좀 억지가 아닌가 싶었는데 이건 갈수록 존재감이 커지는 것이었다. 특히 송지효를 습격하다 한 명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소풍 왔넨?!” 이라 외치며 저돌적으로 쳐들어가던 무대뽀들이 장례식장에선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먹다 이자성과 눈이 마주치자 쩔쩔매는 연기는 정말 압권이다. 연변 거지 삼인방의 이름은 김병옥 우정국 박인수. 미친 존재감이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신선한 캐릭터들을 창조해 멋지게 써먹은 감독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영화엔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자성의 아내도 나오고 송지효도 나온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가 아니다. ‘빠져나갈 데가 없는’ 이자성의 처지를 설명해주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 여성성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애초부터 이 영화엔 여자가 나오지 않아야 맞다. 마초 영화라서가 아니다.

 


정청은 오랜만에 이자성을 만나서는 “우리 어디 가서 떡이나 치자”고 조른다. 이건 명백히 파트너에게 섹스를 하러 가자고 조르는 남자의 멘트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말미의 6년 전 에피소드에서도 첫 살인 임무를 힘겹게 완수한 정청은 이자성에게 “우리, 목욕탕 가서 깨끗이 씻고 영화나 한 편 보러 가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무슨 영화냐는 파트너의 질문에 “무슨 영화는. 떡영화지.”라고 대답한다. 실지로 섹스를 하진 않을 뿐 이보다 더 징그럽게 가까운 사이가 또 어디 있을까.

 


어제 본 인터넷 기사에서 박훈정 감독은 이 영화를 ‘넥타이 매고 정치하는 영화’라고 설명하더라. 그러나 그건 너무 점잖다.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강과장이 비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피곤함을 대변해 주는 존재라면, “독하게 살아야 해”라고 죽어가는 순간까지 배신자를 감싸는 정청의 멘트는 존재의 본원적 외로움 때문에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깡패 영화의 탈을 썼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연약하고 지친 남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탄생한 아주 ‘징헌’ 멜로드라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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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부하고 있는 사진 수업 때문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예전에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영화일기를 썼던 기억이 나서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2005년 3월 20일에 올렸으니 8년 전에 쓴 글이로군요.

섹스의 가능성이 완벽하게 배제된 멜러 드라마가 존재할 수 있을까.
여기 그런 영화 한편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25번째 감독 작품, 밀리언달러 베이비.
왕년에 컷맨(링의 응급치료 트레이너)으로 이름을 날리다 지금은 허름한 체육관을 운영하는 트레이너 프랭키에게 매기라는 서른 한살 짜리 여자애가 권투를 하고싶다며 찾아온다. 그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열세살부터 지금까지 웨이트리스를 하고있는 순 깡촌년이다. 여자 선수는 키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프랭키는 일언지하에 그녀의 제의를 거절한다. 하지만 매일 식당 일을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체육관에 찾아오는 그녀의 열의까지 막을 도리는 없다. 왕년의 복서이자 지금은 체육관의 잡일을 맡아 하고 있는 스크랩(모건 프리먼)은 밤늦게까지 혼자서 무턱대고 샌드백을 두드리는 그녀를 보다못해 조금씩 기본기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녀의 생일날 ‘펀치볼’ 사건을 계기로 프랭키는 드디어 그녀의 트레이너가 되기로 결심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누구인가. 우리가 어렸을 적 KBS나 MBC 주말의 명화 같은 데서 엔리오 모리코네의 노르스름한 음악이 흘러나오면 홀연히 망토를 뒤집어쓰고 나타나 시가를 입에 문 채 인상을 구기고 총질을 해대던 ‘황야의 건맨’ 아니던가. 그러나 가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수십년의 세월은 어느덧 그를 75세의 할아버지로 만들어 놓았다. 비교적 최근작인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에서는 너무 늙어보여 과연 메릴 스트립 앞에서 제대로 발기나 할 수 있을까, 하고 관객을 민망하게 만들었던 그가 이번 영화에서는 정말 눈이 움푹 파이고 깡마른 노인 피부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늙은 건 배우로서의 육체일 뿐 감독으로서의 역량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깊게 단련되어 이제는 찬란한 장인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깨닫게 된다. 이번 아카데미가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 대신 백만달러 짜리 소녀 매기의 손을 들어준 것은 어쩌면 헐리우드에 ‘클린트 월드’ 같은 저력이 아직 존재하고 있음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프랭키는 매주 편지를 써도 받지 않고 돌려보내는 냉정한 딸이 하나 있고, 매기는 어렵게 번 돈으로 집을 사줘도 고마워하기는커녕 ‘차라리 돈으로 줄 것이지 왜 시키지 않은 일을 하냐’고 화를 내는 엄마를 비롯해 몹쓸 싸가지로 똘똘 뭉친 형제자매가 있다. 가족 중 유일하게 인간같았던 아버지는 일찍 죽어버렸다. 프랭키는 애써 키워 놓은 선수들은 돈을 좇아 떠나버리기 일쑤고, 23년간 매주 빼놓지 않고 가는 성당의 신부에게나 오랜 동료인 스크랩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반쯤 밖에 열지 못한다.

‘피붙이’는 있어도 ‘마음붙이’가 없는 두 사람은 서로 권투라는 매개체를 통해 드디어 ‘아버지와 딸’ 이 된다. 그리고 프랭키의 노련한 지도와 매기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은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둔한 몸짓으로 샌드백을 두드리던 그녀는 프랭키와 스크랩에게서 ‘서고 걷는 법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하더니 결국 일년 반만에 한마리 날렵한 맹수로 새롭게 태어난다. 영화 속 권투 경기 장면들은 너무나 박진감 넘쳐서 ‘저것이 진정 여자들의 주먹이란 말인가’ 경악하게 되고 힐러리 스웽크의 코뼈가 부러지는 씬에서는 나도 모르게 객석에 앉아 내 코가 멀쩡한지 몇번이나 감싸쥐어야 할 지경이었다. 흔히 ‘배우들은 운 좋게 재능과 인물을 타고나 일이 없을 땐 섹스 스캔들이나 일으키고 약물이나 해대는 존재’라고 헐뜯는 사람이 있는데 난 절대로 그런 선입관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영화로 두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가져간 힐러리 스웽크는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것은 물론 석달 동안 일주일에 6일씩 두시간의 권투 연습과 두시간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반복했고, 계란 흰자를 꾸역 꾸역 먹어가며 6Kg의 근육을 만들었다고 한다. 신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더라도 노력하지 않는 존재에겐 좀처럼 운을 허락하지 않는 냉정한 양반인 것이다.

연전 연승. 맞붙는 선수마다 1회 KO로 때려눕히길 거듭해 더 이상 상대 선수가 나서질 않는 경지에 오른 매기에게 오랜만에 런던에서의 시합 제의가 들어온다. 도약의 기회다. 틈만 나면 ‘늘 자신부터 스스로 돌봐야 한다’고 귀가 따갑도록 읇어대는 프랭키는 시합 직전 그녀에게 ‘100% 올 실크’로 제작된 화려한 선수 가운을 입혀 준다. 그 가운의 등판엔 매기 핏제랄드라는 그녀 이름 대신 ‘무쿠슈라’라는 정체불명의 단어가 새겨져 있다. 매기는 이 경기에서도 화끈하게 승리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쿠슈라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마침내 대전료 100만달러 짜리 세계 타이틀 도전자가 되어 라스베거스 특설링에 오르게 된다.

여기까지가 매기 권투인생의 정점이다. 매기는 반칙을 일삼아 인기를 끌던 사나운 챔피언년과 맞서 싸우다 뒤통수를 얻어맞고 넘어져 전신마비가 된다. ‘늘 자신부터 스스로 돌봐야 한다’는 프랭크의 충고를 단 한번 어긴 죄로 천국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얼굴 뿐이다. 프랭키는 모든 일을 작파하고 성심성의껏 그녀를 돌보지만 그녀의 몸은 욕창이 나서 점점 썩어 들어간다. 오직 그녀의 돈만을 노리고 나타나 장례식까지 운운하며 서류에 싸인을 요구하던(입에 펜을 물려주며!) 가족들을 쫒아보낸 매기는 프랭크에게 자신을 죽여줄 것을 부탁하지만 거절당하자 혀를 깨물고 자살을 시도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장르 영화의 관습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절묘한 복선들을 곳곳에 치밀하게 깔아놓고 관객의 마음을 찢어발기다가 어느 지점에서 완만했던 서사 구조를 일시에 뒤집어 대단한 감동과 신선함을 선사한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프랭크와 티격 태격 유머러스하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대사들을 주고받는 것은 물론 영화 전체의 나레이션까지 맡아 인생의 지혜를 끊임없이 들려주던 스크랩이라는 인물은 원작에 없었다는 점이다. 즉 70세에 ‘불타는 링’을 쓴 원작자 F.X 툴이 이 영화의 뼈와 근육을 만들어 놓았다면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각색자 폴 해기스는 영화에 살과 체온을 불어넣은 것이다.

권투 영화이면서도 멜러 영화이고, 장르 영화이면서도 파격적 주제를 담고 있는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결론적으로 ‘소통’에 관한 영화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할 것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프랭키는 매기와 완벽하게 소통하는 순간, 번민을 넘어 중대한 결심을 한다. 매기의 청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 옛날 다리를 절던 개를 안락사 시킨 뒤 삽을 들고 나타났던 매기의 아버지처럼.

프랭크는 밤에 주사기를 들고 병원에 나타나 매기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부터 네 산소 호흡기를 떼주겠다. 약물을 함께 주사할테니 편안하게 잠들거라… 그리고 무쿠슈라는 겔릭어로 ‘나의 혈육’이라는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랭키를 바라보는 매기의 눈에서 고마움과 감격의 눈물이 흐른다. 매기에게 트레이너이자 아버지로서의 마지막 주문을 마친 프랭키는 꾸부정한 뒷모습으로 어두운 병원 복도를 빠져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 어쩌면 그가 병상에서 읽어주던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의 호수섬> 에 나오는 오두막을 진짜 찾아나서기라도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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