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기가 두려워질 때 나는 레이먼드 카바의 책을 펴서 "소설가가 그 근처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구절 아래 그어놓은 밑줄을 확인하곤 한다. 만약 어떤 시대처럼 소설가가 지식인이고 스승이란면 나는 소설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회사에 있던 은희경의 단편집 [타인에게 말걸기]를 뒤적이다가 작가후기에서 발견한 글. 그렇다. 용기를 내자.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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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역사상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이 곡이라는 외신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마침 은희경의 단편소설 '인 마이 라이프' 도 생각이 나서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어느 겨울 신촌에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라는 지루한 영화를 혼자 소리내어 울며 보던 여주인공이 3층에 있는 카페 '인 마이 라이프'를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손님 중 한 남자가 기타를 치며 비틀즈의 '인 마이 라이프'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세 번 목격하게 되는 이야기. 


내 인생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소가 있지. 
어떤 곳은 변하고 어떤 곳은 영원하고 
어떤 곳은 사라지고 어떤 곳은 남아 있어도 
이 모든 장소는 그들만의 순간을 지니고 있네. 


이 모든 친구와 사랑하는 이들 중에서도 
당신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당신과의 사랑은 나날이 새로워
지나버린 추억들은 모두 의미가 없네 


함께 한 친구들 지나간 세월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네 
때로 걸음을 멈추고 그때를 생각하겠지 
그러나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 뿐이라네
인 마이 라이프, 아이 러브 유 모어 


 은희경이 2001년에 쓴 이 수필 같은 소설 속에서 직접 번역한 '인 마이 라이프'의 가사입니다. 어때요, 난로가 빨갛게 타고 있는 그 카페에서 몇 명이 빙 둘러 앉아 작은 노래를 부르고 듣던 그 겨울이 기억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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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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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심윤경의 소설들을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맨 처음 읽은 건 후배 송인덕이 저희집까지 찾아와 선물로 주고 갔던 책들 중 하나인 [달의 제단]이었는데, 어느 양반댁 종손이 주인공으로 나오서 자칫 엄격하고  고풍스러운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소설은 뜻밖에도 아주 탐미적이고 영리하며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원작을 가지고 KBS [TV문학관]에서 단막극으로 만든 적도 있더라구요. 


영화기획자인 제 친구 김유평 씨가 어느날 “요즘은 심윤경의 소설을 야금야금 꺼내 읽는 맛에 산다”라는 얘기를 했을 때도 저는 뭐 그냥 시쿤둥했었는데 어느날 헌책방에서 그녀의 데뷔작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고 나서는 그 말을 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은희경의 데뷔작 [새의 선물]을 연상시키는 ‘홍제동 버전 성장소설’이었는데 역시 문장이 탄탄하고 진한 유머와 페이소스는 물론 이야기를 능숙하게 이끌어가는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한레문학상 수상작이었죠. 


그 다음 읽은 책이 [사랑이 달리다]입니다. 이건 뭐 작가가 대놓고 독자를 웃겨 쓰러뜨리기 위해 쓴 듯 빵빵 터지는 캐릭터들이 종횡무진하는 굉장한 작품입니다.  서른아홉 살이 되도록 아빠의 신용카드만 믿고 취직 한 번 안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잘 생기고 학벌 좋지만 섹스리스인 남편’ 말고 언제나 새로운 남자와의 연애를 꿈꾸는 똘끼 충만녀 혜나입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수십 억원의 빚을 지고도 태평스럽게 오픈카를 몰고 다니는 말썽쟁이 작은 오빠가 있고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 집을 나가버린 아빠, 돈 오만 원에도 벌벌 떠는 사업가 큰 오빠 등등 시트콤스러운 캐릭터들이 줄줄이 등장하는데 정말 스피디하고 유쾌합니다. [사랑이 채우다]가 후속작이라는데 아직 그 책은 못 구했습니다. 


며칠 전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가 [서라벌 사람들]이란 연작소설이 있길래 또 샀습니다. 심윤경이 역사소설을 쓴다고 하길래 어떤 식일까 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황당함과 대담함이 공존하는군요. 


심윤경은 신라의 황실 사람들을 거인으로 상정합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에게 군림하려면 일단 겉모습부터 일반인보다 월등하게 커야 한다는 거죠. 등장인물 중 하나인 지증제의 음경은 한 자 다섯 치에 이르러, 아무리 색사에 능한 여성이라도 그의 거대한 양물을 감당하지 못하는 바람에 황손은 황위를 잇지 못하고 몽달귀신이 될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나 그의 신하가 백방으로 수소문 하던 중 기골이 장대한 여인을 드디어 찾아내(“바로 내가 원하던 바요! 내가 모시는 어른의 기골이 또한 장대하오! 그분과 동침하다가 옥문이 찢어져 목숨을 읽은 여인이 그간 여럿이었더니, 그분의 배필이 되실 분을 이제야 찾았소”) 태후로 봉하게 되죠. 이들은 이차돈의 순교 이전의 사람들이기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기도 대신 ‘교합례’를 지냅니다. 즉, 조상을 모신 자리에서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대표로 섹스를 하는 겁니다.  


이날 천제에서 지증제와 연제황후는 그들의 몸을 받친 뱀 모양 제단을 와지끈 무너뜨리고도 교합을 멈추지 않았다. 그 먼지 오르는 잔해 속에서도 한 식경이나 합환을 계속 했으니 그들의 땀과 애액 제단 아래로까지 흘러내려 태자 법흥의 비단옷을 적셨고 그 벽력 같은 교성에 동해 바다의 용까지 잠에서 깨어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합화례가 끝나면 황제와 황후는 서로 노고를 치하하며 특별한 수라상을 받으시었는데, 각각 검은 돼지와 흰 돼지를 한 마리씩 드시었다.



일연스님의 저작을 연구한 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경건한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눙을 치는 호방한 작가의 변이 믿음직스럽습니다. 오늘 이차돈의 목을 자르는 에피소드가 들어있는 ‘연제태후’ 한 편 읽었는데 앞으로도 ‘준랑의 혼인, ‘변신’, ‘혜성가’, ‘천관사’ 등의 연작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도 재미있을 거 같죠?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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