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가 일을 저지른다’라는 말이 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덥썩 뭔가 시작해버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오늘 아내와 함께 참석한 명로진의 북콘서트 [논어 당일치기]가 그런 경우다. 아무리 요즘 다양한  북콘서트가 유행이라지만 무려 2500년 전 공자의 4대 제자들이 쓴 ‘논어’의 북콘서트라니. 게다가 토요일 아침 열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당일치기’로 가는 강행군이다. 이만하면 무모한 도전 아닌가.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요즘 경험한 일상 중에 가장 ‘핫’한 시간이었다. 

기자 출신에 한때 연기자로도 활약했던 명로진은 수십 권의 책을 쓴 작가인 동시에 오래 전부터 ‘인디라이터 양성’으로 이름 높은 스타 강사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중국 고전을 소개하는 인기 팟캐스트도 운영하고 있는데 오래 전부터 ‘논어를 좀 화끈하게 공부하는 시간을 가질 순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마침내 일곱 시간 연속 강의를 생각해 낸 것이다. 

강의는 약속대로 오전 10시 정각에 시작되었다. 명로진 선생이 직접 만든 교재를 펼쳐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고 읽으면 학생들이 이어서 ‘배우고 때에 맞게 익히면 정말 기쁘지 않겠느냐’라고 한글 해설을 읽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소개하면 그야말로 고색창연한 서당이 떠오를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논어’라는 책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도 플라톤의 [국가]나 [소크라테스의 변명] 같은 서양 고전들이 무시로 끼어들고 ‘스키십’이나 ‘사교육’ 같은 현대어들이 적절하게 사용되는가 하면 우병우, 최순실 같은 인물들이 공자님 말씀의 예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진중함을 잃지 않는 철학적 고찰과 해석들이 초롱초롱한 수십 개의 눈동자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약 두 달 전에 이 강의가 기획되었는데 처음에는 강의 신청자가 없어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강의 시간도 길고 강의료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명로진 선생은 강의 도중 그런 얘기를 하면서 맨 처음 공고가 나자마자 신청해준 아내 윤혜자를 비롯한 몇몇 분들에게 조그만 선물을 전달했다. 선생이 공자의 고향에 가서 사온 ‘향나무 공자상’이 그것이다. 비싼 것은 아니라지만 대한민국에서 이런 선물을 받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점심 시간에 김밥을 먹을 때 수육을 가져와 나눠주신 분도 있었고 강의 후 간단한 뒷풀이 자리에서는 황현호 선생이 가져 온 ‘마약두부’를 맛보기도 했다. 심지어 꽃다발을 가져 온 플로리스트도 계셨고 커피 머신을 가져와 행사를 도운 제자도 있었다.    

북콘서트 도중에 초대 가수의 진짜 콘서트도 있었다. '술을 마시고’라는 곡으로 유명한 ‘금주악단’이 와서 세 곡을 불렀다. 워낙 독특한 인디밴드라 아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고 나중에는 앵콜곡으로 ‘낙타’라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공자님 말씀 하고 앉았네’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은 정작 공자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명로진 선생은 공자 강의를 기획하면서 스스로 만든 교재 맨 앞장에 이런 글을 인용해 놓았다. 

‘논어를 읽기 전에도 그저 그런 사람이요, 
읽은 후에도 그저 그런 사람이라면 
곧 논어를 읽지 않은 것과 같다.” 
- 정이천(1033~1107) <논어 집주> 

위 글이 아니더라도 한 자리에 모여 논어를 읽고 듣는 일은 확실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정이천의 말대로 논어를 읽은 후에도 '그저 그런 사람'인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왜 그럴까. 

논어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고 몇 줄의 문장으로 엑기스만 담긴 책이다. 당시에는 그 정도 문장만 있어도 사람들이 다 맥락을 이해 했겠지만 이천오백 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그 글만 읽어서는 앞뒤 사정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나타나 '사실 그때 공자의 수제자 자공은 이러이러한 성격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안회라는 제자는 공자에게 어떻게 편애에 가까운 사랑을 받았는지 등등을 설명해 주면서 그 시대에 이러이러한 일화들이 있었기에 아마 이런 문장이 나왔을 것이다'라고 배경을 깔아 준다면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강의를 듣는 동안 우리는 공자라는 인물이 수천 년 전 죽은 전설의 히어로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얼마 전까지 존재했었던 '셀럽' 같은 느낌으로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진지하게 그의 사상과 철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이노베이션은 옛것에서 새로움을 찾아낼 수 있는 눈에서 시작된다는 말도 있다. 우리가 오늘 논어를 접하고 내 인생이 조금이라도 변하거나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작은 단초라도 제공할 수 있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은 힘들어서 국악인들도 판소리 완창을 안 한다는 그 일곱 시간 동안 연속 강의를 마친 명로진 선생은 막판엔 기진맥진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오후 다섯 시에 이르니 아이 하나 낳은 아낙처럼 해맑고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오늘은 1강에서 5강까지 들었는데 앞으로 20강까지 들어야 ‘논어’를 다 떼는 것이라 한다. 아내는 강의실을 나오면서 앞으로 일요일마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있을 논어 강의를 신청했노라 통보했다. 오늘 특강 때문에 회사 가서 일하는 것을 내일로 미뤄 놨는데 앞으로는 당분간 일요일을 피해 토요일에 특근을 해야겠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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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구경하다가 뒤늦게 좋은 칼럼을 읽고 공유합니다. 

쓸모없는 것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가 '황우석 사태'처럼 언젠가 있을 대박을 터뜨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주는 글이라서요.





[정동칼럼]쓸모없는 것들을 가르칠 의무

대학에 갓 입학한 ‘고등학교 4학년’들이 내 수업에서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들의 첫 질문은 과연 그것이 시험 범위에 들어가는지 여부이고, 내가 궁금한 점은 어떻게 모든 종류의 추천도서 목록에 빠지지 않는 이 책을 읽어본 학생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이 예의 바르게도 묻지 않는 질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게 우리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나요?”

목적의식이 뚜렷한 세대이며 목적 없는 “쓸모없는 것들”을 가차 없이 퇴출시켜나간 교육시스템이다. 대학은 더 좋은 직장으로의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고, 고등학교는 더 좋은 대학으로의 입학을 준비하는 곳이며, 중학교는 더 좋은 대학에 많이 입학시키는 고등학교로 갈 준비를 하는 곳이며, 초등학교는, 그리고 유치원은…. 아니, 이 앞의 문장은 상식이 되어버려 새삼 지면에 옮기기도 뜬금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교육의 황폐화와 우리 현실의 암담함이 이런 목적론적 교육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문화의 시작이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었고, 학술의 근원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는 궁금증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 교육에는 문화도 학술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그것이 매우 자랑스럽다. 이것을 서생정신이라 불러도 좋고 아마추어리즘이라 불러도 좋다. 쓸모없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은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을 통해 아이폰을 만들 수 있었고, 워런 버핏이 ‘풍부한 독서’를 통해서 훌륭한 투자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학술과 교육과 문화는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기치 않게 페니실린이 발견되기도 할 것이며 우연찮게 뢴트겐은 X선에 손을 대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폰과 주식투자와 페니실린과 X선이 - “대박”이 - 학술과 교육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혹은 전해주고 싶은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이, 이 강의실이, 나아가 학교에서의 모든 경험들이 당신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고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동굴의 우상’이 무엇인지를 외우기 전에, 동굴에서 무기력한 삶을 살던 이가 동굴을 나와서 처음 광명한 햇살을 느꼈을 때의 그 저미는 고통을, 그리고 다시 동굴로 되돌아갔을 때의 뼈를 깎는 격통을 책으로 느낄 수 있다면 당신들은 이미 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것은 시험에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며 당신들이 살아가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면 다시는 읽어볼 수도, 고민해볼 수도, 토론해볼 수도 없을 마지막 기회라는 것. 나는 우리의 대학교와 고등학교와 중학교와 초등학교가 학생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더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소중한 ‘마지막 기회’들을 허비하고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든다.

계절이 지나 겨울방학을 앞둔 시기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학생들이 또 있다. 취업의 어려운 관문을 뚫은 졸업예정자들인데, 축하의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기말고사를 치를 수 없다는 양해를 구한다. 학점을 받아야 졸업을 할 수 있지만 당장 회사에서 출근 - 무급인턴 - 을 하라고 하니 시험 대신 다른 것으로 학점을 달라는 부탁이다.

우리 교육시스템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위치한 ‘회사’들은 이토록 촌스럽기 짝이 없으며 이들에게 묻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학생들 일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교정에서의 마지막 두어 달 기간에 당신들이 학생들을 얼마나 더 잘 성장시킬 자신이 있는지. 세상의 모든 관심과 배려를 받고 초·중·고·대학의 십수년 교육기간 동안의 학생 생활을 마감하는 이들을 두어 달 기다려줄 여유도 없는지. 사회적 배려라는 것이 수능일 아침 앰뷸런스로 고사장에 실어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약간의 시간을 주고 성장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이런 교육환경이 이르는 종착역은 바닥 모를 둔감함이다. 배려받지 못한 학생들은 공감하지 못하는 시민으로 자라고, 손톱 밑의 가시가 아니면 고통과 분노는 건망증에 포획된다. 세월호, 국정원, 부패리스트, 메르스 등 신문 지면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공동체의 사건들이 너무도 쉽사리 잊혀지고, 일상의 아득함만 우리 앞에 벽처럼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아들 딸들에게 어떤 공동체를 물려줄 것인가. 대답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근원적인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대안 없는 쓸모없는 글로 지면을 허비하게 되어 송구한 마음이다.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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