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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5.08.11 박가네

국동이 형

뒷담화의 향연 2016. 4. 30. 22:12





처음 들어보는데요. 


학생들은 '이적표현물'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이 년 전 춘천에 있는 한 대학교의 '카피랑이팅 실습' 시간에 있던 일이다. 나는  강의 시간에 "요즘 가수 이적과 작가 김영하가 각각 칼럼을 연재 중인데 칼럼 제목이 하나는 '이적표현물'이고 하나는 '영하의 날씨'라네요. 재미 있지 않아요?" 라고 했다가 졸지에  꼰대가 된 기분을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대학교에 걸개그림 하나만 잘못 걸어도 이적표현물이라는 누명을 쓰고 철거 당하거나 끌려갔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니. 이런 게 세대차이인가.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했구나. 제기랄. 


이래저래 우울한 날이었다. 그런데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더 우울한 소식을 들어야 했다. 루 리드가 죽었다는 것이다. 아아, 루 리드가 죽다니. 술 한 잔이 간절해졌다. 사람들은 루 리드라고 하면 영화 <접속>에 흐르던 노래 'Pale Blue Eyes'정도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가지고 루 리드를 애도할 순 없다.  당장 'Walk On the Wild Side'라도 듣고 싶어졌다. 생각해 보니 같이 루 리드를 들으며 앤디 워홀이나 J.J 케일까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국동이 형 뿐이었다. 국동이 형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는다. 어느 술집이냐고 물었더니 병원이란다. 암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했단다.뭐, 암? 언제요?! 며칠 됐어. 히히 웃는 국동이 형. 아, 씨발. 이게 지금 웃을 일인가. 루 리드는 죽었고 국동이 형은 암에 걸렸다니. 도대체오늘 어쩌자고 이렇게 우울하냐.  


국동이 형이라고 있다. 나이는 나보다 한 열 살 가량 많은데 아직 결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내가 광화문MBC빌딩 안에 있던 MBC애드컴이라는 광고대행사 들어가서 그날 처음 만났던 사람이다. 일단 광고대행사라는 곳에 출근하는 건 생전 처음이라 얼이 빠져 있었고 그날은 각 부서와 팀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날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11층 복도에서 누군가가 ‘아, 이건 말이 안 되잖아!”라고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화를 내던 사람이 바로 정국동 차장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하고 있는 나한테 오더니 “야, 아까 그 사람이 나 찾거든 못봤다고 해.”라고 말하면 씩 웃고 돌아섰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정국동 차장은 총각이었고 디자이너였다. 지금은 모두 아트 디렉터라고 하지만 그때는 광고 디자이너라는 명칭이 더 흔할 때였다.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술을 좋아했고 음악을 좋아했다. 그런데 취향의 폭이 좁아서 모든 술과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술은 맥주만 마셨고 음악은 브리티쉬 락과  락큰롤, 그리고 마국의 서던락 등을 즐겨 들었다. 처음부터 국동이 형과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팀도 달랐고 술 취향도 달랐다. 나는 소주를 주로 마시러 다녔으므로 국동이 형과 만나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팀 개편이 되면서 내가 정국동 부장 팀으로 발령이 났다. 그때만 해도 반항적인 기개가 살아있던 나는 상관의 농담에 더 센 농담으로 맞서거나 잘난척을 하며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등 사사건건 감정적으로 부딪혔다. 살살 달래가면서 윗사람의 비위를 맞춰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왜 이러고 계세요?”

“외로워서.”


업무가 끝나지 않아 야근을 하던 나는 퇴근한 디자이너 자리에서 맥캔토시 컴퓨터로 재미 없는 골프 게임을 계속하고 있던 정국동 부장에게 가서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 또 여자와 헤어진 모양이었다. 국동이 형은 참 재주 좋게도 어린 여자애들만 사귀었다. 그것도 이십대 초중반만. 왜 그렇게 어린 여자애들만 사귀냐고 물었더니 '스물다섯 살만 넘어가도 정신을 차리기 때문에 그 전에 뭘 모를 때 꼬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긴 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결혼보다는 연애가 더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가 종로나 신촌에 있는 술집에서 그를 만나면 그가 사귀고 있던 '어린 여자애들'도 자동으로 만날 수가 있었다. 다들 엄청 술을 잘 마셨고 다들 쉽게 친구가 되었다. 종로에 있던 LP 많은 단골 술집 '투뮤직'에서는 도어스의 ‘Light My Fire’가 나오면 우리들의 애국가가 나온다며 모인 사람 모두 술잔을 높이 들었다.


우리가 주로 다닌 술집들은 신촌에 있었다. 회사가 마포로 이사를 간 이유도 있지만 LP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실 수 있었던 ‘ROCK’이나 ‘Rolling Stones’가 모두 신촌에 있기 때문이었다. '투뮤직'의 주인 인하 씨도 나중에 신촌에 'LPG'라는 가게를 또 열었다. 우리는 한 때 출근부 도장 찍듯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집들을 다녔다. ‘ROCK’의 주인 호성이 형이나 ‘Rolling Stones’의 주인 두성이 형도 서로 친해서 가게가 먼저 끝나는 사람이 전화해서 만나 따로 술을 마실 정도였다. 가게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대중 씨나 '들찐이 날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젊은 단골 여자아이의 얼굴도 그립다. 우리는 술집 주인들과 어울려 새벽 한두 시가 넘어 신촌시장에서 2차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가 ‘Rolling Stones’에 불이 나서 두성이 형과 영화감독 이훈 씨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국동이 형이 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많은 사람들이 안부 전화를 했었다. 다행이 형은 전날 술이 과해서 그날은 일찍 집에 들어갔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때 뉴스에서는 ‘락카페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며 술을 마시다 화재가 발생해서 사망했다’라는 식으로 기사가 나와서 우리를 화나게 했다. ‘Rolling Stones’는 당시 홍대에서 유행하던 락카페처럼 오렌지족들이 테이블 사이에서 춤을 추다가 부킹을 하는 곳이 아니라 락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기운이 넘쳐서 밤새워 술을 마시고도 아침이면 발딱발딱 일어나 출근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국동이 형은 일하기 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우선 아침잠이 많아서 지각을 자주 했고 회의 시간을 앞두고 사라지기도 잘 했다.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실컷 농담을 하며 킬킬거리고 놀다가 갑자기 안면을 바꾸고 일을 시키는 일도 흔했다. 한 마디로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질투심도 강했고 연애를 잘 하는 남자 후배들을 무조건 존경하는 성향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익혀왔던 서브컬처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자신의 기준에 어긋나면 대놓고 미워하기까지 했다. '아담이 눈뜰 때'라는 소설에서 킹 크림슨 노래였던가 'penny'를 'penis'로 잘못 번역한 소설가 장정일을 기회 있을 때마다 미워했던 게 대표적인 케이스다. 재미 있지만 범생이 같은 무라카미 하루키보다는 날라리 과인 무라카미 류를 더 좋아하는 것에 자부심을 표했으므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폄하되기 십상이었다.  '문화적인 잘난 체' 하면 또 어디 가서 안 지던 내가 이런 국동이 형과 사사건건 대립했던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급기야 어느날은 'Rock'에서 'Renaissance'라는 그룹의 보컬이 애니 허슬럼인지 그레이스 슬릭인지 술내기를 했는데 내기에서 이긴 내가 하도 대놓고 좋아하는 바람에 국동이 형이 대단히 삐친 사건이 발생했다.  



나를 미워하던 국동이 형은 어느 해 팀 개편이 있을 때 나를 그 힘들다는 '대한항공 팀'으로 팔아넘겨 버렸다. 그 팀은 별명이 '0830부대'였는데, 그 이유는 전날 저녁에 회의를 하면 바로 다음날 아침 여덟 시 삼십 분까지 인쇄 광고 시안들을 완성해 광고주 책상 위에 올려놔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밤을 새는 지옥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내가 팀을 옮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IMF의 광풍이 대한민국 전역에 몰아쳤다. 회사에서도 미친듯이 인원감축을 단행해야만 했는데 국동이 형네 팀은 팀장인 국동이 형부터 밑의 직원들까지 몽땅 잘린 반면 대한항공팀은 단 한 명도 잘리지 않고 모두 살아남은 것이다. 당시 막강한 광고주였던 대한항공 광고팀이 대행사에 전화를 해서 자기 팀원 중 한 명만 잘라도 광고대행 끝, 이라는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다들 일엽편주에 올라탄 것처럼 어질어질하던 시절이었다.  



국동이 형은 라면집을 하면 딱 어울릴 것 같아.


우리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요리를 좋아하기도 했고  회사 앞 라면가게 '명재네'에서 간식을 먹을 때면 가장 맛있게 먹는 사람도 국동이 형이었다. 그리고 이젠 광고 디자인 업무에서 손을 떼고 좀 맘 편하게 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동이 형은 단호했다. 광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잘린 회사인 MBC애드컴 건물의 한 층에 세를 내고 들어와 사무실을 차렸다. 사무실 이름은 'Cream'이었는데 이건 에릭 크랩튼, 진저 베이커, 잭 브루스가 결성한 전설적인 브리티쉬락 그룹의 이름임과 동시에 속어로 '정액'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는 게자랑이었다. 흡사 일제시대에 시인 이상이 자신이 차린 다방 간판에 '69'라고 써놓고는 그게 섹스체위를 뜻하는 것인데 아무도 모른다며 좋아하던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Cream'은 망할듯 망할듯 망하지 않으면서 계속 명백을 유지해 나갔고 국동이 형은 저녁이면 여전히 신촌이나 홍대 부근 술집에서 두비 브러더스의 'Long Train Running'을 신청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꾸준하게 술을 마시는 국동이 형이 나중에 죽으면 우리가 돈을 모아 신촌에 공덕비라도 하나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고, 그 소리를 들은 우리들은 모두 동감의 의미로 고개를 끄떡였다. 




시간이 흘러갔고 국동이 형도 나도 나이를 먹어갔다. 나는 그 이후 다른 대행사들과 프리랜서 생활을 거치느라 예전 직장동료들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데 함박눈이 미친듯이 쏟아지길래 국동이 형한테 '눈이 오는데 전화 걸 사람이 딱히 생각나지 않아서 형한테 걸었다'고 했더니 '눈 오는 날 내가 왜 니 전화를 받아야 하느냐'며 불 같이 화를 내고 끊었다. 그래도 국동이 형은 잊혀질 만하면 전화를 걸어 술을 마시자고 했다. 어느날은 오후 세 시부터 전화를 걸어 '이젠 아무도 나와 술을 마셔 주지 않는다'고 징징거렸고 어느날은 '술도 사주고 왕복 택시비까지 오자마자 현금으로 줄 테니 지금 당장 홍대앞으로 나오라'는 내용의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나는 택시비까지 그냥 받는 게 미안해서 내가 좋아하던 책을 몇 권 들고 나갔는데 그 중 하나가 아사지 지로의 '칼에 지다' 1,2권이었다. 나중에 국동이 형은 이 소설을 너무 잘 읽었다며 '사무라이 소설을 그렇게 잘 쓰는 사람은 처음 봤다'라는 소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물론 국동이 형이 사무라이 소설을 이 책 말고 또 읽은 게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즈음 같이 만나 친구 중에 드라마 '이산'과 '동이'를 썼던 후배 김이영이 있었는데 이영이가 정국동이라는 이름이 정말 특이하다며 언젠가 꼭 한 번 자기가 쓰는 사극의 인물 중 하나로 기용하겠다고 허락을 구하기도 했다. 나도 예전에 '백만장자와 결혼하가'라는 그녀의 드라마에 이름을 빌려준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화정'인가에서 정말로 '정국동 대감'이라는 캐릭터가 등장을 했다고 한다. 정국동이라는 이름은 강호동만큼이나 특이해서 같은 회사를 다녔던 카피라이터 탁정언 선배가 쓴 소설 '이름 없는 전쟁' 에도 등장한다. 당시 회사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재구성해서 쓴 소설이라는데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다 바뀌었고 정국동만 이름과 캐릭터가 실제 인물과 비슷하게 나왔던 재미 있는 작품이다. 



루 리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국동이 형이 암에 걸린 걸 알게 된 나는 며칠 후 여자친구와 함께 봉투에 오만 원을 넣어가지고 병원으로 찾아갔다. 난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정작 몇 달간 술 담배를 못한 국동이 형은 얼굴이 뽀얬다.  과연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까 걱정을 했더니 다행히 초기에 발견한 암이라 완치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데가 아파서 검사를 하다가 우연히 암을 발견하게 된, 억세게 운 좋은 케이스였던 것이다. 문병을 당하는 일 자체가 즐겁고 신난다는 듯 히히히 웃는 국동이 형은 의외로 환자복이 잘 어울렸다. 



몇 달 전 국동이 형을 홍대앞 따루주막에서 만났다. 요즘은 술 담배를 안 하지만 여전히 술집을 쏘다니며 밤새도록 논다고 한다. 이젠 자기가 술을 못 마시니까 다름 사람들이 마시는 걸 보면서 노는 것이다. 아마 여전히 이쁜 가게 주인들과 친하게 지내느라 그러는 것이리라 짐작을 해본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 소리가 있지 않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국동이 형은 우리가 살아서 공덕비를 세워주지 못할 정도록 오래 살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만장하신 신사숙녀 여러분, 혹시 신촌이나 홍대앞에서 키가 작고 통통한 60대 초반의 무알콜 락애호가를 만나거든 내 얘기를 하며 맥주 한 잔을 요구하시라. 국동이 형은 아마 당신께 흔쾌히 맥주 한 잔을 사주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 '너 때문에 또 삥을 뜯겼다'라고 투덜거릴 게 틀림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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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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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네

길위의 생각들 2015. 8. 11. 15:47





박가네라고 혹시 들어보셨는지? 마포에 있는. 아, 최대포는 아신다구요. 네. 사실 마포는 최대포라는 고깃집이 제일 유명하죠. 그런데 오늘은 최대포 말고 박가네라는 집 얘기 좀 하려구요. 제가 두 번째로 다니던 광고회사가 MBC애드컴이라는 곳이었는데요, 정동MBC빌딩에 있던 그 회사가 어느날 갑자기 마포 태영빌딩이란 곳으로 이사를 간 겁니다. 정동MBC빌딩은 덕수궁과 광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나름 정취가 있었고 또 당시만 해도 경향신문과 MBC라디오방송국이 남아 있어서 가끔 ‘별밤' 공개방송 같은 녹화방송 프로그램이 열리는 날엔 여중생들이나 여고생들이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인기 연예인이 나타나면 광화문이 떠나갈 정도로 비명을 지르는 소소한 재미가 있던 곳이었죠. 아, 박근혜 대통령이 대표를 지낸 정수장학회도 그 건물에 있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정' 자와 육영수 여사의 수' 자를 따서 이름이 그랬다죠. 그런데 회사가 마포로 옮겨가면서 그런 분위기나 재미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마포라는 새로운 공간에 재빨리 적응을 했습니다. 일단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밥집. 마침 회사 바로 앞에 공덕시장이라는 오래된 재래시장이 있어서 우리의 점심과 저녁은 그곳에서 손쉽게 해결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팀은 곧바로 시장 안에 있는 명재네라는 분식집과 단골을 텄습니다. 오후 네다섯 시쯤 되면 두세 명씩 가서 간식으로 떡볶이도 먹고 라면도 먹고 하던 집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초등학생인 명재네집 아들 명재가 우리 팀장님인 국동이 형을 보면 저쪽에서부터 달려오며 “아저씨,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공덕시장은 이후에 두 번 크게 신문에 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전국에서 가장 붕괴위험이 큰 건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사였고 또 한 번은 IMF를 맞아 저렴한 시장 전집이 뜬다, 5천 원이면 배부른 안주에 막걸리까지...라는 내용의 조금 서글픈 기사였습니다)  바로 근처에 건물이 있던 한겨레 기자들도 많이 오고 그랬지만 어쨌든 공덕시장은 너무 오래된 건물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예나 지금이나 밥보다는 술이었죠. 눈만 뜨면 회사에 와서 허구헌날 부대껴가며 회의하고 야근하고 툭하면 주말에도 나와 일하고정말 어이 없게도 가족들보다 오래 시간을 같이 보내는 사이였고 또 쓸데없이 체력은 넘쳐나던 신입사원 시절, 절대적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는 건 업무 중간 틈틈이 마시는 술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우리 회사 뒤에는 제일빌딩이라는 적당한 크기의 베이지색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일층의 맥주집부터 2,3층의 파발마 같은 단란주점, 그리고 지하에 ‘언니들’이 T/C 없이 자유롭게 근무하는 야릇한 술집들까지 즐비해서 우리는 매일 밤 선택의 폭을 넓혀가며 그 빌딩에 출근부 도장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밤에 MBC애드컴 직원들을 만나고 싶으면 제일빌딩으로 가라' 는 말이 생겨났고 실제로 밤이면 그 빌딩 화장실에서 술에 취한 동료들과 자주 마주치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빌딩은 어느새 우리들 사이에서도 ‘환락빌딩’이라는 직관적인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마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가게는 최대포였죠. 우리도 당연히 처음엔 최대포를 갔었습니다. 그러나 곧 시들해지고 만 것이, 소문과 달리 고기 질이 그리 좋지 못했고 서비스도 그저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이유는 고기를 굽는 연료가 숯불이 아니라 브루스타’ 라 불리는 이동식 가스렌지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건 회사에서 가까운 '그냥 대포'든 마포 굴다리 밑에 있는 '원조 최대포'든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십 년 이름 높은 최대포가 가스렌지로 고기를 구워주다니. 우린 마포라는 지역의 문화적 자존심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 같이 숯불로 고기를 구워주는 집이 하나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회사앞 제일빌딩 맞은편 박가네'였습니다. 

환락빌딩 바로 맞은편에 있던 박가네였으니 우리들의 회식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어쩌다 경쟁PT라도 따는 날이면 당연히 팀 전체가 몰려갔고 그냥 별 이유 없이 저녁에 술 한 잔 걸치고 싶은 날도 우리의 발걸음은 어느새 김유신의 말처럼 박가네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술, 담배, 외박을 인생 삼대지표로 삼고 살았을 정도로 한창 팔팔했던 저는  바쁘든 한가하든 어떤 경우에도 집에는 일찍 들어가면 안 되는 걸로 알고 살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툭하면 술이요, 뻑하면 외박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부지런한 박가네 사장님은 우리가 갈 때마다 활짝 웃으시며 가게 옆 숯막에서 빨갛게 익은 숯불을 들고 들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잘 생기고 붙임성도 좋은 우리 선배 김동만 차장은 원래도 사장님과 친했지만 두 사람이 동향이라는 걸 알고 난 다음부터는 즉시 호형호제하는 막역한 사이가 되어 한가한 저녁이면 가게에 가서 함께 숯불을 지피기까지 했습니다. 가게는 부지런한 사장님 사모님 덕분인지 나날이 번창했고 늘 만석에 가까울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우리는 번지르르한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MBC애드컴 직원놈들보다 박가네 사장님이 훨씬 더 돈도 많이 벌고 실속 있다고 부러워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장님 부부는 에이, 말도 안 된다고 손을 내저으며 웃으셨구요. 

매번 관광도시를 강간도시로 발음하던 바보 같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 갑작스럽게 IMF가 왔고 많은 사람들이 나이 서른에 명퇴를 당하며 회사를 떠났습니다. 동료들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환송회를 하던 곳 역시 대부분은 박가네였던 것 같습니다. 저 또한 IMF시절은 어떻게 버텨냈지만 그 다음 해엔 회사 다니기가 너무 지겨워져 다른 곳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십대를 넘어 서른 언저리, 아직 마흔이 되기 전 우리들의 모습이 담겨있던 마포 시절은 그렇게 힘없는 산문처럼 한 줄 한 줄 흩어져 추억의 책갈피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이제는 PD프로덕션의 기획실장 일을 하고 있는 저는 작년 어느날 마포의 HS애드라는 광고대행사에 회의를 하러 갔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실로 오랜만에 박가네를 갔습니다. 카운터에 앉아서 활짝 웃는 사모님과 여전히 저를 반갑게 맞아주는 사장님을 보고 함께 간 PD들이 “실장님, 여기 단골이었나봐요?라고 물었습니다. 단골이었지. 그것도 아주 찐한 단골이었지. 고기를 시키고 소주도 시켰습니다. 여전히 사장님이 웃는 낯으로 숯불을 피워 들고 오시더군요.


"아유, 이제 숯불 피우는 건 다른 사람 시키시지...동만이 성은 요즘도 와요?"
하하, 안 와."

예나 지금이나 그저 하하 웃기만 하는 사장님을 보니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아니, 그 동안 번 돈은 다 어쩌고 아직도 이러고 계세요. 사모님은 다리를 다치셨는지 카운터 의자에 앉아 다리 위에 덮은 담요를 한 번도 치우지 않으셨습니다. 반가워 하면서도 저한테 가까이 와 인사도 못하고 그냥 카운터에 앉아 박꽃처럼 하얗게 웃기만 하는 사모님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가게에 손님은 여전히 넘쳐나는데, 돈은 여전히 많이 버는 거 같은데. 왜 이 분들은 여전히 이러고 살고 있는 거야. 그 돈 다 누가 쓰는 거야. 아, 씨발.


박가네 사장님, 반가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희들이라고 뭐 다른 게 있나요. 십여 년쯤 후엔 나도 뭔가 다르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그때쯤이면 내 친구나 동료들도 이런 힘겨운 일들 졸업하고 지금보다는 더 여유 있게 살아가고 있겠지...하지만 막상 오랜만에 만났을 때 우리들의 손에도 저마다의 숯불화로들이 하나씩 들려 있는 거죠. 그게 광고를 굽는 숯불이든 IT를 녹이는 숯불이든 뭐 별 차이가 있겠어요. 어디서 일을 하고 있든 여전히 우리의 얼굴은 그 숯불 때문에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는 걸요. 다만 아직은 사장님처럼 그렇게 웃으면서 빨간 숯불을 솜씨있게 집어낼 자신이 없어서요. 그리고 아직은 그 숯불에 우리들 꿈이 다 타버린 건 아니라고 우겨보고 싶어서요. 여름은 아직 다 지나가지 않았으니까요.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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