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는 왕이 가장 사랑하는 큰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애지중지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 다 해주었으며, 그를 위해 성대한 잔치와 만찬을 베풀곤 했다. 어느날 만찬에서 왕자는 아버지 곁에 선 검은 수염에 얼굴이 어두운 남자를 보았고, 그가 저승사자라는 것을 곧 알아보았다. 둘은 눈이 마주쳤고 서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자는 만찬이 끝난 뒤 아버지에게 초대객들 중에 저승사자가 있었다고 말하며 그의 눈길로 보아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작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말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곧장 이란의 타브리즈 궁전으로 가서 숨어 있거라. 타브리즈 왕은 나와 철친한 사이이니 아무에게도 너를 넘겨주지 않을 게다." 그리고는 아들을 곧장 이란으로 보냈다. 

왕은 다시 만찬을 준비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또다시 얼굴이 어두운 그 저승사자를 초대했다. 저승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전하, 오늘 저녁엔 아드님이 안 보이네요." 왕이 말했다. "내 아들은 새파랗게 젊은 아이요. 그 애는 아주 오래 살아야 하오. 그런데 왜 내 아들 얘기를 묻는 거요?" 그러자 저승사자가 말했다. "사흘 전 신께서 제게 명하시기를, 이란의 타브리즈 궁전으로 들어가 왕자의 목숨을 앗아오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제 아드님이 이스탄불인 이곳에 있길래 놀라긴 했지만 한편으론 무척 기뻤습니다. 아드님도 내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는 것을 보았답니다." 저승사자는 이렇게 말한 후 곧장 궁전을 떠났다.  

터키에서 우물을 파러 다니는 사람 마하무트 우스타는 이 소설 [빨강머리 여인]의 주인공인 '나'에게 전날 들었던'오이디프스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비슷한 얘기를 알고 있다며 위와 같은 사연을 들려준다.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났다는 예언 때문에  강가에 버려졌다가 결국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뒤 두 눈을 찌르고 광야를 헤메다 죽은 오이디프스. 그리고 위험에 빠진 아들을 살리려고 친구의 궁으로 보냈다가 오히려 그 일로 인해 아들을 죽게 만든 비운의 왕.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만다. 다만 인간들은 그 일이 벌어진 뒤에야 그걸 깨닫는 거고. 나는 늘 내 운명의 한복판에 서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오늘은 금요일이니 내가 좋아하는 말을 하나 소개하기로 한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 먹고 마시고 조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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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두 번 가는 아침 수영 클래스를 마치고 나와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고 늘 가던 김밥천국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날씨는 여전히 추웠고 길은 황량했다. 광림교회 앞쯤에서 어떤 오십 대 아주머니가 지나가던 여자에게 뭔가를 묻다가 거절을 당한 뒤 웃으며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아주머니는 곧장 내게로 다가와서 간절한 눈빛으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혹시 특뿔식당이라고 아시나요? 휴대폰을 내려다 보니 문자메시지를 찍은 사진이 보였고 그 안엔 '압구정역5번출구 나와 직진 우리은행 끼고 돌아 계속 직진 투뿔등심'이라는 내용이 잔뜩 틀린 맞춤법으로 적혀 있었다. 특뿔식당이 아니라 투뿔등심이네요, 아주머니. 내가 그렇게 정정하자 "맞아요. 투뿔등심!"이라고 하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초초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흔히 '조선족'이라 불리던 재중동포인 것 같았다. 

"오늘 처음 일하러 가시는 거예요?" 
"네." 
"근데 우리은행 끼고 직진하면 여긴데, 투뿔등심이 안 보이네요." 
"아이고, 어떡하나. 열 시까지 가기로 했는데... 죄송해요, 바쁘신데. " 
"아니에요. 벌써 열 시 오 분이네요. 빨리 식당을 찾아야죠." 

내 휴대폰 지도서비스로 투뿔등심을 검색해 보니 제일 가까운 게 가로수길점이고 그 다음이 논현2호점이다. 둘 다 이 근처는 아니다. 아주머니 휴대폰을 다시 보여달라고 했더니 설상가상 배터리가 다 돼서 꺼졌단다. 보조배터리를 연결했는데 전원이 들어오려면 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추우면 더 잘 안 들어와요." 

아주머니는 애꿎은 휴대폰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면서 말했다. 검은색 휴대폰엔 애플 마크가 붙어 있었지만 왠지 가짜처럼 보였다. 나는 아주머니와 함께 근처 부동산으로 향했다. 마침 부동산 아저씨는 창에 달린 블라인드를 떼어 재설치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나는 바쁘신데 미안하다고 사정 얘기를 하고 근처에 투뿔등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옆에서 아저씨를 돕던 아주머니가 이 근처에는 투뿔등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때 재중동포 아주머니의 휴대폰 전원이 다시 들어왔다. 문자메시지 안에 있는 010으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보였다. 내가 이 번호로 전화를 해서 물어보라고 했더니 자기 전화로는 통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까 본 휴대폰 메시지도 사진으로 찍어 놓은 걸 보면 이건 뭔가 아주머니 소유가 아닌 일종의 대포폰인 것 같은데, 아무튼 안쓰럽고 답답한 상황이었다. 나는 아주머니의 사진을 다시 켜서 그 번호를 찍은 뒤 통화를 시도했다. 

"여보세요, 거기가 투뿔등심인가요?" 
"네." 
"제가 지금 거기 찾아가시는 어떤 아주머니를 길에서 만났는데요." 
"그러세요?" 
"문자메시지엔 압구정역5번출구로 나와서 우리은행 돌아 직진하면 투뿔등심이 나온다고 돼 있는데..."
"거기 아닌데." 
"네. 뭔가 잘못된 것 같긴 해요." 

그때 복덕방 아주머니가 뛰어나오셨다. 자기가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투뿔등심은 가로수길에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알아서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다시 복덕방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가 덮인 테이블 위엔 설치하려다가 만 블라인드가 심란하게 놓여 있었다. 얼른 재중동포 아주머니에게 약도를 그려주자며 내가 종이를 찾았더니 아주머니가 빈 로또복권 용지를 들고 왔다. 거기에 그리긴 힘들 것 같아서 내 가방 안에 있는 다이어리를 꺼내 속지 한 장을 북 찢어냈다. 아주머니가 가로수길로 가는 길을 설명하며 종이 위에 도형을 그리기 시작하자 옆에 있던 아저씨가 언제 한가하게 그걸 그리고 앉아있느냐면서 테이블 위의 블라인드를 한켠으로 치우더니 유리 밑에 깔린 커다란 지역지도를 가리켰다. 그걸 카메라로 찍어서 찾아가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맞아요, 맞아. 다들 박수를 치며 그게 좋겠다고 말했다. 

재중동포 아주머니의 휴대폰 중 유일하게(?) 사용 가능한 카메라로 투뿔등심 가로수길점까지 가는 약도를 촬영했다. 그리고 복덕방 아주머니가 밖으로 따라나와 손으로 길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쭉 가서 두 블럭 지나 가로수길을 건너서...하며 목이 터져라 열심히 설명을 해줬다. 재중동포 아주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재중동포 아주머니는 가로수길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고 복덕방 아저씨 아주머니 커플은 다시 들어가 블라인드를 마저 설치하기 시작했으며 나는 김밥천국으로 달려가 이천 원짜리 원조김밥을 한 줄 사서 사무실로 왔다. 2019년 1월 두 번째 화요일 아침에 벌어졌던 '압구정동 오지라퍼 커넥션'의 결말은 이렇게 싱거웠다.  그나저나 아주머니는 그 식당 잘 찾아 가셨을까. 오늘이 첫 날이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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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길위의 생각들 2019. 1. 6. 13:22


서양 사람들이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쉽게 미소를 짓고 악수를 나누는 것은 누구와 마주치더라도 내가 당신을 해칠 의도가 없고 내 손엔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공생욕구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 인사법이 서양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밴드 등 가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누군가의 게시물에 '좋아요'로 그 선의를 표시하고 산다. 페이스북을 처음 만들 때 주커버그가 '싫어요'도 같이 만들지 않는 바람에 우리는 좋아요 하나만 가지고 감정을 표해야 하는 약간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래서 오늘도 할 수 없이 '좋아요'를 누르고 다닌다. 이렇게 멋진 사진을 올렸는데 좋아요를 안 누르면 안 되지. 저렇게 좋은 글을 써서 올렸는데 좋아요를 안 누르면 섭섭해 할거야. 그렇게 얼굴이 예쁜데 좋아요를 안 누르면 질투해서 건너뛴다고 생각할거야....졸지에 좋아요를 안 누르면 그것은 곧 '싫어요'라는 표시로 둔갑한다. 괜히 좋아요 한 번 안 눌러서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오해를 받으면 손해니까 누르자. 뭐, 돈 드는 일도 아닌데.  

그러다 보니 오늘도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내 게시물의 좋아요 숫자를 확인한 뒤 그 좋아요를 눌러 준 사람들의 담벼락에 들어가서 인사 삼아 그의 게시물에도 좋아요 몇 개를 누르고 나온다.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확인차 밴드에 들어갔다가 내가 전부터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놈의 게시물에조차 좋아요를 누르려다가 멈칫한 나는 순간 아연실색한다. 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늘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입에 발린 소리나 하면서 가면처럼 사는 인생이라니. 어제 대학 써클 모임에서 선배 형에게 내가 의외로 사회 생활을 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예전부터 나약하고 빈 구석이 많은 나를 잘 아는 형이 전혀 비꼬는 의미 없이 해준 칭찬이었지만 왠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재미 없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 숙취에 시달리면서 과연 잘 산다는 건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런 엄청난 인문학적 질문에 쉽게 답이 나올 리가 없다. 다만 바라건대 올해는 예전보다 좋아요를 좀 덜 누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할 땐 싫어요! 라고 소리도 지르며 살았으면 좋겠다. 어느새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취향이 아닌 권력의 문제가 되고 말았으니까. 성공한 대기업의 회장님이나 CEO들 중엔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 유독 많은데 생각해 보면 그건 그가 급한 성격 그대로 살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위치보다는 마음이 더 문제다. 내가 좋아요를 누른 횟수 만큼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싫어요를 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살자 결심해 본다. 그러니 아내여, 친구들이여, 부디 새해부터 나와 함께 단체로 삐뚤어져 보지 않겠는가. 착하고 올바르게만 살면 재미 없으니까. 그리고 난 그대들이 그렇게 착해빠지거나 올바른 성향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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