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은 본능적으로 작가였고 소설가였던 것 같다. 해방 후 몇 년 동안의 경험들을 돌아다 보면 인간 이하의 모욕을 받거나 밑바닥 생활을 한 적도 있는데 그럴 때조차 선생은 '언젠가는 당신 같은 사람을 한 번 그려보겠다'는 식의 문학적 복수를 꿈꾸었다고 하니까. 그런 마음이 불행감을 덜어줌으로써 아주 뼛속까지 불행해하지는 않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저런 인간을 소설로 한 번 써야지, 라고 생각하며 현재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대가의 어릴적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런 날것들의 증언이 있어서 인터뷰글을 좋아한다.

아울러 앞으로 내게 오는 나쁜 새끼들도 좀 귀하게 여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그놈들이 내 작품에 도움을 주는 캐릭터가 되어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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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먼저 이 영화 [일일시호일]을본 아내는 '영화가 슬프지는 않지만 눈물이 날 수 있으니 주의하라'면서 손수건을 챙겨가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는 내겐 눈물보다는 씁쓸한 미소와 엷은 한숨이 더 자주 나왔다. 아내가 어느 지점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거의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는 스무 살의 노리코는 무엇 하나 특별하지도 않고 잘 풀리는 인생도 아니다. 사실 그 나이 때는 대부분이 다 그렇지만 노리코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같이 다도 수업을 듣는 사촌동생 미치코만 해도 취업이든 결혼이든 뭔가 적극적이고 매번 자기보다 앞서 나가는 것만 같은데 그녀는 맨날 제자리 걸음 같다. 그렇다고 매주 가는 다도에 엄청난 애착이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학창 시절은 쏜살 같이 지나가 버리고 인생은 무엇 하나 깔끔하게 떨어지는 게 없다. 글을 쓰며 살고 싶지만 출판사 취직 시험에 떨어져 프리랜스 작가가 되어야 했고 결혼을 앞둔 남자가 배신한 것을 두 달 전에 알아 파혼을 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다도 수업은 꼬박꼬박 참석하는 노리코. 다도를 가르쳐주는 다케다 선생은 계절마다 바뀌는 거실 족자의 글씨들을 읽어주며 그런 노리코의 마음을 조용히 다독여준다.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라는 뜻의 '日是好日'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며 다도를 시작했던 노리코는 여러가지 사건들을 겪으며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봤던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이라는 영화가 왜 좋은 작품인지 비로소 알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그때는 이미 고마운 아빠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후였다. 

다도는 내용보다 형식이 먼저라는데 난  과연 인생의 내용과 형식 중 어느 것을 선택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어느덧 다도를 시작한지 20년이 넘은 노리코는 생각한다. 옛날 사람들이 가장 추운 때를 입춘으로 정한 건 이제 멀지 않아 봄이 온다는 마음을 가지고 싶기 때문 아닐까. 누구는 좀 일찍 도착하고 누구는 조금 늦게 갈 수도 있는 게 인생 아닐까. 다케다 선생도 말한다. 같이 차를 마셔도 다시 이렇게 똑같이 마실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임해주세요. 

그렇다. 자책할 것도 없고 조급해할 것도 없다. 지금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비 오는 날에는 빗소리를 듣고 눈 오는 날엔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여름에는 찌는 듯한 삼복더위를, 겨울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다도는 그런 삶의 방식을 어려운 이론 없이 '몸으로 익힐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쳐 준다. 그래서 매일매일이 힘든 날이지만 동시에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느리고 고단해도 지금처럼 날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고마워하고 또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인생은 그럭저럭 살 만하지 않겠는가. 

키키 키린 할머니는 [걸어도 걸어도]나 [만비키 가족] 같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부터 워낙 좋아했지만 유작인 이번 영화에서 늘 다도 교실 안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한 장면 한 장면이 욕심 없는 할머니의 유언을 듣는 것만 같았고 그녀의 목소리는 스님의 법문이나 랍비 또는 신부님의 고언을 듣는 것처럼 매번 지혜롭고 다정했다. 

여러 번 우려낸 찻물처럼 따뜻하고 정갈한 영화를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 안에서 돌아가신 키키 할머니가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힘들지요? 괜찮아요. 스님들이 좋은 일에나 나쁜 일에나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우는 것처럼 여러분도 이제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라고 외워보세요. 그럼 좀 나아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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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회사를 다니는 내가 작년에 '2018평창동계올림픽' 홍보영상을 만들 때만 해도 영상의 마지막엔 '세계인이여, 평창으로 오라. 대한민국은 안전한 곳이다'라는 식의 메시지를 넣어야 했다. 당시엔 북한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말폭탄을 쏘아올릴 때였고 미국도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심'이 바닥난 듯 보이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실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도 낙관하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롤러코스터를 타듯 변화를 거듭하던 한반도 문제는 작년 한 해만도 전격적인 남북영수회담과 북미영수회담이 줄지어 열리는 등 '상전벽해'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일단 부시와 오바마를 거쳐 북한에 가장 적대적이었던 트럼프 대통령이 복핵 문제 해결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 보수지의 사주를 지냈던 홍석현이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기 위한 고민으로 책 [한반도 평화 오디세이]를 낸 것도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보니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면서부터 남북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보수지의 회장을 지낸 저자가 가지고 있는 진보적인 대북관이다. 그는 지금 한반도에는 통일보다 평화가 더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우리가 할 일은 북한의 개혁개방과 경제발전을 돕는 일이라고 한다. (심지어 통일부 명칭도 '남북교류부'로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얘기까지 한다). 지난 보수정권 때였다면 '종북발언'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책이 쉽게 술술 읽힌다. 홍석현 이사장이 가지고 있는 한반도에 대한 지식과 견해를 스무 고개 넘듯 하나하나 펼쳐나가기 때문이다. 하루 만에 휘리릭 다 읽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급변하는 한반도 상황에 대입해봐도 큰 무리가 없다. 이는 그가 언론사를 경영하고 다년 간 국제활동을 해서 국제정세 파악에 능한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짚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꺼림직하다면 홍석현이라는 이름을 가리고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중대 현안을 인터넷 기사로 읽는 것과 책으로 읽는 것은 그 느낌이 다르다. 더구나 대표적 보수주의자가 내놓은 진보적 주장을 읽는 짜릿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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