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에 한양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잠깐 문상을 갔었다. 예전 MBC 합창단원이기도 했고 가수 소찬휘의 매니저이기도 했던 뚜라미 일 년 후배 윤선이가 모친상을 당한 것이었다. 저녁 약속이 있어서 낮에 잠깐 들른 것이었는데 문상객 중에 정말 오랜만에 보는, 학교 다닐 때 장마담이라 불렸던 미숙이가 와 있었고 미숙이와 윤선이의 불문과 동기인 은주 씨도 있었다. 그 분도 나처럼 카피라이터 출신이라고 했다. 지금 자기는 일을 그만둔 상태지만 남편은 아직도 작은 광고대행사 대표를 맡고 있다고 했다. 은주 씨는 우연히 누가 가르쳐줘서 나의 홈피인 '편성준의 생각노트'를 자주 들여다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운영하고 있는 독서모임 '독하다 토요일'에 자기도 참석해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 모임은 6개월에 한 번씩 회원을 모집하니까 지금은 들어올 수 없고, 또 책을 읽고 진지하게 토론을 하는 것보다는 한 달에 한 번 모여 두 시간 정도 책을 읽고 잠깐 책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척하다가 얼른 술집으로 달려가는 게 목적이라고 했더니 그 점이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내 블로그 얘기를 듣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거긴 글을 자주 올리지 않는 곳인데, 하며 약간 반성하는 마음을 가졌다. 장 마담이라 불릴 정도로 인물도 좋고 성격도 호방하던 미숙이는 현재 경마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며 명함을 건냈다. 또 다른 독문과 친구도 한 분 있었는데 이름을 잊었다. 

아무튼 대낮부터 술을 마시기도 그렇고 해서 생선전이나 동그랑땡 같은 안주에 물을 마시며 수다를 떨며 놀다가 '이렇게 미녀 세 분을 모시고 얘기를 나누니 정신이 다 혼미해진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살 미 자야, 쌀 미!" 하며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 넉넉한 대거리에 또 기분이 좋아졌다. 한 시간 남짓 얘기를 나누다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먼저 일어서야겠다는 인사를 하고 장례식장을 나섰다. 

학교 정문쪽으로 걸어나가다가 무심코 파카 바깥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반으로 접은 편지봉투가 잡혔다. 내 이름을 쓴 부의금 봉투였다. 방명록에 이름을 쓰면서 잠깐 주머니에 넣었다가 잊어버리고 그냥 나온 것이었다. 황급히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가서 부의금함에 봉투를 집어넣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장례식장에 올 때마다 벌이는 실수들만 차곡차곡 모아도 작은 책이 하나 나올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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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한때 바보였다. 아니라고? 흥분하지 말자. 중요한 건 우리가 한때 바보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바보가 아니어야 한다는 반성이요 깨달음이다. 슬기로운 사람들은 지금도 자신이 바보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면서 몸을 낮추고 산다. 그런 사람들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다수가 타고 있는 수레의 즐거움 때문에 소수의 괴로움이 수레바퀴에 깔리지는 않았는지 살핀다. 지난 봄에도 혹시 자신의 발에 벌레가 밟히진 않을까 짚신으로 갈아 신은 그 바보 스님이나 신부님들처럼. 진짜 바보들만 금목걸이를 목에 건 채 자신은 절대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돈이 많은데, 이렇게 좋은 회사에 다니는데, 이렇게 일을 많이 하는데. 그래서 세상엔 돈 많은 바보들이, 많이 배운 바보들이, 인기 높은 바보들이 더 행세를 한다.

며칠 남지 않은 2018년을 보내며 너는, 나는 어느 정도의 바보였는지 생각해 보자. 아, 흥분하지 말자. 어차피 우리 모두 바보인 건 맞지만 바보에도 등급이 있으니까. 혹시 내가 지난 일 년 간 싸가지 없는 바보는 아니었는지, 비겁한 바보는 아니었는지, 파렴치한 바보는 아니었는지  잠깐 돌아보자는 것 뿐이니까. 어떤가? 나는 바보, 라고 말하고 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좀 편해지지 않나. 어차피 바보였는데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내년엔 조금 더 나아지겠지, 라는 기대를 가져보자. 그리고 주변의 바보들을 모아 함께 '바보 연대'를 결성하자. 내년에는 주위의 바보 친구들과 함께 착한 바보, 떳떳한 바보로 거듭나서 자기만 아는 병신 같은 바보들을, 쫌팽이 같은 바보들을 무찌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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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자 : 밥 먹고 산책 가자.
성준 : 어디로?

혜자 : 정릉!
성준 : 좋아.

산책을 하자고 하면 늘 귀찮다고 거절하던 아내가 웬일로 먼저 산책을 제안했다. 의외이긴 했지만 좋았다. 요즘 연일 계속된 음주와 만찬에 이어 어제 '토요식충단'에서 너무 먹어서 그런지 오늘 아침부터는 식사량을 좀 줄이기로 한 아내와 함께 삶은 계란과 빵, 야채 , 과일 등으로 가벼운 아침식사를 하고 정릉을 향해 길을 나섰다. 정릉은 몇 주 전 이사 온지 2년만에 커피숍에서 만난 영화감독 한지승(중학교 동창이다)과 그의 동생 희정이가 추천해서 처음 갔었는데 굉장히 조용하고 넓어서 좋았다. 오늘도 역시 그곳은 고요하고 한산했다. 아내와 산책로를 천천히 거닐며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 받았다. 각자 자라면서 있었던 부모 형제들과의 슬프고 즐겁고 애틋했던 일화들을 얘기했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상의를 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결론은 한 마디로 '천천히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흥천사쪽으로 향하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전에 가보지 못한 낯선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어느집 대문 앞에 멀쩡한 반닫이와 자개장이 떡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게 왜 여기 서 있는 걸까?" 라고 아내가 묻는 사이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냅다 대문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계세요...?" 아무 소리가 없길래 초인종도 눌렀다. 곧 인터폰으로 "누구세요? 무슨 일이신데요?"라고 묻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다가 대문 앞에 있는 가구들을 보고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인터폰을 눌렀다고 했더니 덜컹, 하고 대문이 열렸다.

50대 말에서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니오셨는데 인상이 매우 곱고 점잖았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마주친 자개장과 반닫이가 너무나 멀쩡해서 '왜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고 했더니 사정이 생겨 집에 둘 수 없게 되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방을 하나 비워줄 일이 생겼는데 눈물을 머금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쓰신던 가구를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가 이걸 가져가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괜찮다고 하셨다. 다만 비가 온다는 소리가 있어서 내일쯤엔 구청에서 가져갈지도 모르니 원한다면 오늘 가져가야 할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우리가 먼저 탐을 낸 것은 반닫이였다. 아내나 나나 원래부터 작은 고가구를 좋아하는 데다가, 크기도 작아서 우리집 거실 어딘가에 딱 맞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자개장도 상태가 너무 좋았다. 자개가 상한 곳이 하나도 없었고 장문을 열어보니 안쪽에 옻칠이 조금 일어난 것 말고는 멀쩡했다. 가구를 아주 조심스럽게 쓰는 분이었던 것 같았다. 그냥 일반 집에 놓으면 그저 그럴지 몰라도 예술가의 작업실이나 청담동 고급 까페 같은 데 갖다 놓으면 당장 빛을 발할 물건이었다.

나는 지난 주 목요일 이사를 간 '옆집총각' 동현에게 카톡을 하고 전화를 걸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이곳으로 차를 가져와서 반닫이를 우리집까지 옮겨줄 수 없겠냐고. 자다가 일어나 전화를 받은 동현이 15분만에 정릉 앞으로 달려왔다. 그 사이 아내는 '행동(行洞) 단톡방(패션 디자이너 김행자 여사가 회장이라 이름이 행동이다)'에 이 집 주소와 사진, 그리고 간단한 사연을 올렸다. 길에서 마주친 물건이 너무 아까우니 누구라도 가져가셨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자기를 빚는 배주현 작가에게서 금방 콜이 왔다. 자개장을 가져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일요일이라 비용을 더 비싸게 부르는 용달차를 불렀다고 했다.

다시 초인종을 눌러 주인 아주머니에게 가게에서 산 커피를 한 병 드리며 반닫이는 우리 부부가 가져가고 자개장은 가져갈 사람이 정해졌다고 했더니 안 그래도 자기 남동생이 이얘길 듣고 반닫이가 너무 아깝다고 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자기도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아주머니와 아내가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우리는 동현의 차에 반닫이를 싣고 집으로 왔다. 반닫이를 차에 실으면서 가구를 밀던 내가 손가락에 나무가시가 박히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아내는 혀를 끌끌 찼다. 일 못하는 사람은 뭘 해도 성과 없이 쉽게 다치기나 한다는 것이었다. 면목이 없었다. 동현이 땀을 흘리며 반닫이를 들여놓는 동안 나와 아내는 내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뺄 쪽집개를 찾느라 집안에서 부산했다.

반닫이도 들여놓고 가시도 뽑았다. 반닫이는 맞춤이라도 한 듯이 TV 옆 책꽂이 앞에 딱 들어맞았다. 우리, 참 웃기는 사람들이야. 그치? 아내가 말했다. 산책을 하다 말고 가구를 들고 오질 않나, 다른 사람에게 용달을 불러 자개장을 실어가라고 하질 않나. 마침 배주현 작가가 보낸 카톡 사진을 보니 작업실에 들어선 자개장이 마치 예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거실에 들어선 반닫이엔 고양이 순자가 자기집처럼 들어가 놀고 있길래 쫓아냈다. 그녀도 반닫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나섰던 산책길에서 너무 많은 것을 얻었다. 이런 게 생활 속 작은 행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행운아 이닌가. '행운아'가 남성이라면 아내는 '행운녀'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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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재미 없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실패담이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한 번도 옆길로 새지 않고 반듯한 모범생으로만 살아 온 사람에게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생길 리 없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인기 있었던 <성공시대>라는 TV프로그램이 그렇게 싫었다. 거짓말로 치장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내용이 교장선생 훈화 말씀처럼 뻔하고 재미 없었기 때문이다. 토머스 에디슨의 '천재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말도 짜증나긴 마찬가지였다. 흔히 이건 노력이 중요하다는 말로 오해되곤 하는데 사실은 '누구나 노력은 다 하지만 1퍼센트의 천재성이 없으면 다 소용없다. 다행히 나는 그걸 가지고 있었다' 라고 잘난 척하는 얘기였으니까.  

나에겐 실패담보다는 실수담이 많다. 실수담의 기본은 건망증과 부주의인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 두 분야에서 가히 독보적이었다. 일단 초등학교 다닐 땐 등교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이유의 대부분은 '도시락을 두고 가서', 또는 '런닝셔츠만 입고 나가서' 같은 것이었는데 가장 백미는 학교에 갔더니 아무도 없었던 날이었다. 일요일에 혼자 등교를 한 것이었다. 식구들은 그런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나의 건망증과 부주의는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기계치'에 갔던 길도 까먹는 '길치'에도 소질이 있음이 밝혀졌다. 

다행히 성격이 꼼꼼한 아내를 만나 나의 삶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 싶었으나 아침에 교통카드를 놓고 나가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거나 하는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나의 자잘한 실수들을 목격하고도 웃어 넘기던 아내도 비가 오는 날 택시 안에 우산을 두고 내린 남편을 목격했을 땐 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내는 한숨을 내쉬며 위로했다. 그렇게 헛점투성이면서 여태 세상을 살아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드라마란 주인공이 뭔가 이루려고 엄청 노력하지만 결코 이루지는 못하는 이야기'라는 정의를 좋아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드라마의 핵심은 언제나 '성공'이 아닌 '실수'나 '엇나감'에 방점이 찍혀있기 마련이다. 어제도 그제도 나는 실수담을 썼다. 일단 내가 가진 성공담이 거의 없어서가 첫 번째 이유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작은 실수담들이 주는 효용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바람은 사람들이 내 실수담을 읽으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위로를 받는 것이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아량을 넘어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라는 통찰에 이르기라도 한다면 정말 기쁜 일이고. 

인생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데 성공하는 것'으로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개의 성공담보다 여러 개의 실수담이 있는 게 낫다. 실수담이 많은 사람일수록 부자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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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새길까?" 
"같이 죽자, 어때?" 
"좋네. 같이 죽자!" 

내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한다고 했더니 별 모양의 도자기로 유명한 '나니쇼 공방'의 창시자이자 후배인 란영에게서 결혼선물을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공방에서 굽는 머그잔에 란영 특유의 멋진 캘리그래피로 문구를 새겨주는데 그 내용을 미리 주문할 수 있다고 하길래 '같이 죽자'와 '늦은 연애는 없다'로 해달라고 했다. 아내와 나는 '태어난 날은 다르더라도 죽는 날은 같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자주 했으므로 '같이 죽자'라는 문장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얼마 후 정말 그 글씨들이 새겨진 머그잔과 시계, 그리고 스마트폰용 도자기 스피커 등이 도착했다.  물론 도자기 스피커는 조심성 없는 내가 떨어뜨려서 깨져버렸지만 소주잔과 글씨가 새겨진 머그잔, 시계 등은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다. 

결혼한지 5년이 지났다. 

아무런 계획 없이 졸지에 11월 한 달 휴가를 쓰게 된 나는 아내의 배려로 혼자 제주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출판사 북스피어에서 기획한 '제주유랑단'이라는 북콘서트 겸 독립책방 순례 여행길에 참석하는 게 주 목적이지만 행사가 끝난 뒤엔 나 혼자 나니와 우동 부부가 운영하는 렌트 하우스 '한량한림'에 묵기로 일정을 잡았던 것이다. 눈코 뜰 새 없이 이박삼일 간의 일정이 끝나고 일요일 낮에 한림읍에 있는 란영의 집 근처로 와 연락을 했더니 두 사람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이 부부는 일산에 있는 공방을 여전히 운영하면서 제주에서 사는 생활을 일 년 반째 이어오고 있었다.  트렁크와 배낭을 들고 매고 나타난 나를 보고 란영과 우동 씨가 반가워했다. 한량한림은 '한 달살이'를 원칙으로 하는 게스트하우스라고 생각했었는데 란영의 말을 들어보나 기간이든 뭐든 특별한 규칙은 없는 '렌트 하우스'라고 했다. 아무튼 이 집은  주인들의 숙소와 손님동이 나란히 서 있는 건물이었고 마침 장기 예약이 차지 않아서 내가 손님동에 묵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넓은 집을 나 혼자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쾌적하고 좋은 숙소를 받았다. 소파와 식탁이 조화를  이룬 거실은 천정이 높았고 식탁 옆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또다른 침실 두 개가 있었다. 어느 침실을 써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데나 쓰세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원래는 한 가족이 쓰는 집인데 지금은 나 하나밖에 없으니 당연한 얘기이긴 했다. 란영은 주인집이나 손님집이나 문을 잠그지 않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한다. 첫날 저녁은 란영이 무명서점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한다고 해서 우동 씨와 내가 먼저 저녁을 먹었다. 우동 씨는 평소 바다에 나가서 물고기나 문어 등을 수렵하는 것을 즐긴다고 했는데 덕분에 첫 날 저녁에 냉방고에 보관되어 있던 문어와 한치 숙회에 칡주를 마실 수 있었다. 뒤늦게 란영이 한라산 소주를 사오기도 했다. 나는 내가 이렇게 환대를 받을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뻔뻔하게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까지 혼자 놀다보면 란영이나 우동 씨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럼 나는 아침을 먹으러 간다. 요즘 위염으로 고생하는 란영 때문에 식탁은 부담이 적고 신선한 식재료들로만 채워진다. 덕분에 나도 미니멀한 자연식단으로 매 끼니를 먹는다. 아침을 먹고 내 숙소로 돌아와 놀고 있노라면 제주도 구경을 시켜줄 테니 나오라는 연락이 또 온다. 나는 또 달려나가 그들의 차를 타고 제주 어딘가를 돌아다닌다. 그래도 내 생활은 자유롭기 그지없다. 어제도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이고 하다가 란영과 함께 곶자왈에 갔었다. 한낮인데도 나무와 덩쿨이 어우러져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 원시림을 걷는 기분은 각별했다. 함께 걸으며 란영이 오래 전 여행길에서 우동 씨 형제와 여행 파트너로 만난 이야기, 인사를 나눈지 한 달만에 외국 여행지에서 함께 손을 잡고 걸으며 떨리는 마음으로 열 살 아래 신랑을 맞을 결심을 한 이야기 등을 들었다. 나이는 아래로 차이가 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자기보다 더 성숙한 인간인 남자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선택이 지금의 삶을 만든 것이리라. 란영은 그러면서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이면 이 숲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줬고 아름드리 나무들을 감싼 넝쿨들을 가리키며 나무와 덩쿨들의 보이지 않는 사투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었다. 나무들은 덩쿨이  마음대로 자라는 걸 막기 위해 다른 나무보다 더 많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꾀를 낸다는 것이었다. 곧자왈이에서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신기한 이야기였다. 이 곳은 자신이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오면 늘 좋은 기운을 전해 준다고 하며 나에게도 심호흡을 크게 하고 숲의 기운을 받아보라고 했다. 

원래부터 여행을 좋아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란영 부부는 판에 박힌 서울생활에 싫증을 느껴 여기저기를 노마드처럼 돌아다니다가 이런저런 연이 닿아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을 하고 살지는 정확히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량한림'이라는 렌트 하우스를 만들고 에어비앤비에 등록한 뒤 한 달살이 하는 사람들을 맞기 시작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것 말고도 가끔은 섬에서 필요로 하는 일들을 과외로 하며 돈을 벌기도 하는데 정기적으로 하는 일은 없단다. 이들 뿐 아니라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일주일 내내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뭔가를 하는 보람보다는 뭔가를 하지 않을 자유를 선택한 이들은 '앞으로 뭐해 먹고 살려구?' 라는 질문에서 하루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에 비하면 확실히 특별한 존재다. 

아침을 먹으며 내가 오늘은 새벽 네 시부터 일어나 놀았다고 했더니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나느냐고 묻길래 언제든지 졸리면 다시 잘 수 있기 때문, 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한 달에 삼주일은 제주 생활을 하고 일주일은 서울에서 보내기로 했지만 너무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엔 가지 않는 것처럼 나도 여행지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했더니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와서 선배처럼 제주도 관광지를 전혀 돌아다니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라는 말도 하며 웃었다. 생각해 보면 '하기 싫은 걸 안 할 자유'라는 컨셉이 그들과 나를 묶어주는 지점이었다. 다만 그게 나에게는 이박삼일 간의 꿈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일 년 반 전부터 시작해 앞으로 먼 나날까지 계속 된다는 게 큰 차이였다. 공항으로 가기 전 두 사람의 권유에 의해 차를 타고 '봄날의 카페'와 GD가 만들었다는 카페까지 가 해안길을 걷고 있노라니 화요일 오전에 제주 앞바다에 서 있는 내가 매우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고마운 한량 부부다. 

부록) 제주도에서는 극장에 가는 게 큰 행사이므로 대부분의 영화는 다운을 받아서 본다고 한다. 곶자왈에서 내려오면서 두런두런 영화 얘기를 좀 했더니 란영이 요즘 볼 만한 작품들을 좀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작년부터 올해까지 내가 본 영화 중 몇 편을 꼽아보았다. 

어느 가족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서치
레이디 버드
킬링 디어
체실비치에서
여배우는 오늘도
혹성탈출:종의 기원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러스트 앤 본
류조와 일곱 명의 졸개들
태풍이 지나가고
스포트라이트
팬텀 쓰레드
쓰리 빌보드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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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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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친구 신청자 명단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한 이름 때문에 눈쌀을 찌푸릴 때가 있다. 일단 도저히 사람 이름이라고는 여길 수 없는, 닉네임이 분명한 단어나 문장 뒤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것도 탐탁지 않지만 그보다는 너무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난 이름의 부담감 때문에 선뜻 친구로 받아들이기 망설여진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만 그런 건 아니다. 책을 쓴 작가나 방송에 나오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김구라, 같은 이름은 말을 청산유수로 잘 한다는 것을 '구라' 라는 속어로 치환한 것인데 처음엔 정말 듣기 거북했다(지금은 워낙 오래 되기도 했고 김구라라는 개인의  진정성이 많이 인식되어서 괜찮아졌지만). 마찬가지로 이름에 '글'이나 '작가'가 들어간 경우도 안쓰럽다. 내가 그런 불만을 토로했더니 같이 술을 마시던 한 선배는 "그 사람은 얼마나 작가가 되고 싶었으면 그랬겠어?"라고 반문했다. 

딴에는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다. 작가가 되고 싶으면 글을 열심히 쓸 것이지 왜 이름으로 배수진을 치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추리소설 작가 에드거 앨런 포우를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일본어를 가지고 그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물론 일본 추리문학엔 '에도가와 란포상'이라는 게 있을 정도로 그 사람 역시 훌륭한 작가가 되었다지만(그의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으니 이런 글을 쓰는 나도 떳떳하진 못하다)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름은 그렇게 지었는데 막상 뛰어난 추리소설가가 못 되었으면 어쩔 뻔했느냔 말이다.이름은 영혼의 문신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냥 김철수, 이영아 같은 이름이 자연스럽게 몸에 난 점이나 무늬라면 '에도가와 란포' 같은 예명은 난 이런 사람이 될 테야, 하고 온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문신은 쉽게 눈에 띄고 한 번 새기면 쉽게 지우기 힘들다.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어떤 음악 평론가가 나와 새로 생긴 헤비메틀 그룹(이름이 로즈였던가) 멤버 전원이 결속을 과시하기 위해 온몸에 장미 문신을 새겼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가 덧붙인 걱정은 '장미 문신은 가까이서 보면 아름답지만 멀리서 보면 매우 기괴하다. 게다가 밴드는 걸핏하면 깨지기 쉬운데 탈퇴 후 그 문신은 어떡할 것인지 걱정된다' 정도였던 것 같다. 지금 그 멤버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조니 뎁의 어깨에도 문신을 지운 흔적이 있다. 위노나 라이더와 살 때 새겼던 '위노나 포에버'라는 글자였다. 사람의 마음이나 처지는 쉽게 변한다. 그래서 인생에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절대로'라는 부사다, 라는 농담도 있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이름에까지 그렇게 명백한 의도를 넣고 살아야 하나. 그냥 좀 설렁설렁 사는 건 정녕 죄악이란 말인가. 일 때문에 일찍 나온 주제에 엉뚱한 생각에 젖어 자판 앞에 달라붙어 있는 나는 또 뭐냔 말이다. 어서 일이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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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오학년 때 담임 선생은 참 말씀을 재밌게 하는 분이셨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이태리타올'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다.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깔깔이 치마'가 대유행을 한 적이 있었단다. 그런데 누군가 뒤늦게 깔깔이 천을 잔뜩 수입해 놨는데 다음 해 여름엔 유행이 지나는 바람에 더 이상 깔깔이치마를 찾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이다. 판단 착오로 많은 빚을 지게 된 사업가는 자살을 결심했단다. 집에서 목을 매려다가 죽기 전에 목욕이나 하고 깨끗하게 죽자, 라는 생각이 들어 목욕탕에 들어갔는데 마침 깔깔이 천이 눈에 띄길래 아무 생각 없이 살갗에 갖다 대보니 때가 국수처럼 밀리더라는 것이다. 그는 무릎을 쳤다. 그래, 이거다! 그렇게 해서 이태리타올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물론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와 내 친구들은 정말로 넋을 잃고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구라나 스토리텔링이란 이런 것이다. 극적인 구조를 기반으로 반전이 있고 적당한 교훈까지 가지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니, 만드는 게 아니라 찾아야 한다. 우리 안에 이미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고 우리 곁에도 사연들은 널려 있다. 우리가 아직 그걸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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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 우리 동네엔 특이한 담배 가게가 하나 있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밤새도록 무릎 위에 담요를 덮고 앉아 조그만 유리창을 통해 담배를 팔던 곳이었다. 구파발 시장 입구에 있던 그 가게는 열두 시가 넘으면 불이 꺼지고 터미널 티켓 창구처럼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는 유리창 앞엔 삐뚤삐뚤한 필체로 '절대 두드리지 마시오'라는 빨간색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담배가 필요하거나 늦게 귀가하는데 담배가 떨어졌을 때면 유리창 앞에 가서 "할아버지" 또는 "저기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면 정확히 1초 뒤에 '똑'하고 작은 스탠드 불이 켜졌고 정확히 원하는 담배와 거스름돈을 받을 수 있었다. 만약 할아버지가 써놓은 안내문을 무시하고 아주 약하게라도 유리창을 두드리게 되면 불을 켠 할아버지에게 눈이 멀었냐는둥 온갖 욕을 먹어야했고 그 날 담배는 절대로 살 수 없었다. 나름 고집이 있는 할아버지였는데. 지금은 아마 돌아가셨을 것이다.  

'세븐일레븐'이라는 24시간 편의점이 처음 생겼을 때 내 친구 동생은 "오빠, 우리 이제 새벽에도 집에서 술 마실 수 있어!"라고 감격스러워 했다지만  내가 처음 그 곳에 들어가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밤중에도 대낮같이 밝은 형광등의 불빛이었다. 거기엔 '도대체 이 늦은 밤에 어떤 미친 새끼가 뭘 사러 온 거야?' 따위의 불평이나 신경질이 없었다. 새벽 두시에 가도 떳떳한 동네 가게.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모든 상품은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고 한쪽 테이블에서는 간단하게 컵라면이나 커피 등을 먹을 수도 있었다. 어렸을 때 동네마다 있던 구멍가게와는 차원이 다른 삶이 펼쳐지는 순간이었고, 그 내용의 한 축은 한밤중이 되어도 자지 않고 일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게 당연한 디스토피아의 시작이기도 했다.

내년도 최저임금이 올해보다 10.9% 오른 시간당 8,350원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요 며칠 사이 편의점주들의 반발이 거셌던 것이, 알바생들 시급을 만 원까지 올려주면 점주들은 남는 게 없으니 차라리 편의점 문을 닫겠다는 입장까지 나왔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편의점주들이 유난히 나쁜 사람들이라 이러는 건가. 아니다. 세상에 그냥 나쁜 사람은 없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나쁜 사람과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낼 뿐이다. 저녁 뉴스에서도 아침 시사프로그램에서도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정리해 보면 핵심은 '갑의 횡포'에 있다. 여기서 갑이란 프랜차이즈 본사와 건물주를 말한다. 편의점 사업을 하는 대기업들이 워낙 많은 돈을 가져가니 남은 돈으로 점주와 알바가 나눠가지려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건물주들이 갑자기 월세를 올리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들과 싸워서 이겼다는 사람을 아직 나는 보지 못했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했을까. 

"문제는 몇백 원 오른 알바 시급이 아니라 높은 임대료나 프랜차이즈 본사에 내는 비용이다. 이건 ‘갑’을 제쳐놓고 ‘을’이 ‘을’에게 화를 내는 식이다" 

을과 을의 싸움에 대해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읽은 기사 내용 일부다. 배가 부르지만 늘 배고프다고 하는 갑들은 팔짱 끼고 구경만 하는데 죄 없고 힘 없는 을들끼리 멱살 잡고 싸우는 모습이란 얼마나 비참하고도 슬픈가.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오전 “최저임금위원회의 결정으로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목표는 사실상 어려워졌다. 결과적으로 대선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을 사과드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의 사과에서도 알 수 있듯 당장 1만 원으로 올릴 수는 없다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계속 알바생들만 조질 수도 없는 일이다. 보다 큰 호흡과 안목으로 정책을 정비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기업이나 건물주들은 일제시대에 친일파 말고도 지주나 돈 많은 부자들이 왜 그렇게 민중들의 미움을 받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아무리 유발 하라라가 [호모 루덴스]에서 얘기했듯이 "자본주의에서는 그만 하면 됐으니 멈추라고 하는 법이 없다"고 하지만 당신들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닌가. 당신 옆에서 어떤 사람들은 단 돈 몇 백, 몇 천만 원에도 자살을 하는데.  

오늘도 우리는 편의점에 간다. 밝고 반듯반듯한 진열대가 있고 누구나 선량한 시민들로서의 권리를 똑같이 누릴 수 있는 편의점.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작년에 무라타 사야카가 쓴 소설처럼 '편의점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 구멍가게가 가지고 있던 촌스러움과 따뜻함을 포기한 대신 메마르고 익명성 넘치는 자유만 쓸 데 없이 만끽하게 된 슬픈 인간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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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내와 뉴스를 보다가 일기예보를 전해주는 기상 캐스터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꼭 저렇게 젊고 날씬한 여자가 나와서 날씨를 전해줘야 온도 습도가 시청자들 귀에 착착 감기는 걸까. 원래 짧았던 치마를 더 접어서 위로 올렸네. 핀바리 했네, 핀바리(쓰면 안 되는 속어지만). 

우리 주변엔 오랜 관행으로 그냥 굳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다. 저녁 뉴스의 남성 메인 앵커 옆 젊은 여자 앵커나 아나운서도 마찬가지다. 하긴 나 어렸을 땐 반장은 무조건 남자, 부반장은 여자였다. 그땐 여자 반장보다 신기한 게 남자 부반장이었다. 그리고 여자 반장도 손꼽을 정도로 없었다. 예순 살인 손석희 앵커 옆에 쉰아홉 살의 여성 앵커가 나란히 앉아 나란히 뉴스를 진행하는 신선한 광경을 보게 되는 건 아직 꿈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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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살아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무슨 연유에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일곱 살 때까지는 '나는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말해서 어른들을 걱정시켰는데 막상 여덟 살이 되어 학교에 들어가더니 단박에 모범생이 되어버렸다. 당시엔 어른들이 시키는 것은 뭐든지 열심히 하거나 잘 해야 칭찬 받는 풍토였으므로 나는 어른들의 말을 잘 들으려 노력했고 공부도 꽤 열심히 했다. 그래서 놀고 싶을 때도 제대로 놀지 못했고 군것질을 하고 싶었지만 늘 용돈이 부족해서(또는 나이보다 어른스러운 아이이므로)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약간의 반항심이 있었지만 여러가지 규율과 입시에 대한 부담, 사춘기 특유의 존재론적 방황 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반항은 할 수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약간의 자유가 생겼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과 술, 담배, 허무를 열심히 누리는 대신 학점이나 연애, 미래 설계가 펑크나기 일쑤였으므로 그것 역시 '자학'에 가까운 자유였다. 설상가상 군대엘 갔더니 자유라는 건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부대원 중 자야할 시간에 안 자고 버티는 놈 정도가 있었지만 그걸 자유라고 부르기엔 너무 서글프고 웃겼다. 

졸업을 하고 힘들게 광고대행사에 들어갔더니 선배들이 술을 사주며 우리는 영원한 '을'이라고 털어놓았다. 모든 걸 광고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대행사에서 나와 친구와 크리에이티브 브띠끄를 차려보기도 했고 CM프로덕션에 들어가보기도 했다. 이번엔 '병'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을'인 광고대행사가 시키는 대로 해줘야 하는 것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다 사실이었다. 그래서 프리랜스 카피라이터로 독립도 해봤다. 내 위엔 아무도 없고 출퇴근 시간도 없고 일도 내가 마음대로 고를 수 있으므로 일단 자유는 넘쳐 흘렀다. 그러나 내가 하고싶은 대로 몇 번 했더니 곧 통장의 잔고가 바닥이 났다.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 예전엔 왕이 있었고 지금은 기업의 회장님이나 건물주 등이 마음대로 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사장이나 왕에게 물어보면 "무슨 소리야, 나도 내 맘대로 못 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라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게 월등히 많은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 증거로 대기업의 회장님들은 대체로 장수하는 반면 이인자들은 단명한다는 통계가 있었다. 삼성이었던가, 아무튼 연봉이 수십 억원인 부회장님이 평소 소주 한 잔 이상을 마시지 않는 게 음주 철칙이었다는데 그 이유가 '회장님이 언제 찾으실지 몰라서'였다고 한다. 너무 한심하고 슬퍼서 그 기사 내용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영화 [넘버 쓰리]의 대사처럼 '일등이 다 해먹는 세상'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행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라는 심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나왔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해도 틀렸다고 말하거나 위험하다고 제지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 상황은 반복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내가 하는 일은 다 옳은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누군가 반항을 하고 경찰이나 언론에 신고를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은 CEO의 인물 됨됨이가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는 것인데, 안타까운 건 CEO가 되는 순간 공감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심리학자들의 증언이다. 그러니까 출세하더니 사람 변했다, 라는 말은 그 사람이 원래 싸가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인간의 특질이라는것이다.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요즘도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음대로 못하고 산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쩌면 그 덕분에 요즘 세상을 좀 더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부터 시작해 회장님들, CEO, 건물주님들, 아주 작은 가게의 사장님들까지, 혹시라도 내가 지금 내 마음대로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해 보라고. 물론 대단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부탁해 본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우월적인 지위에 서 본 적이 없어서, 라는 말씀만은 삼가하기 바란다. 당신이 고은이나 이윤택, 오달수, 안희정, 김기덕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일단 우월적 위치에 서 본 것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대한민국의 정계, 학계, 법조계, 문화계를 강타하고 있는 '미투운동'의 본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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