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아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참 X 같은 말이지. 야, 사실 죄가 무슨 죄가 있냐. 그 죄를 짓는 그 개새끼가 나쁜 새끼지... " 

어젯밤 늦게 한 케이블 TV 방송국에선 영화 [넘버 쓰리]를 틀어주고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 송능한 감독이 1990년대 중반에 만든 이 영화엔 주옥 같은 명대사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배우 최민식의 입을 통해 전달된 마동팔 검사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문제다.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피해 사실 고발로 시작된 대한민국 전반에 걸친 성폭력 문제는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이 뒤늦게 조명 받음으로써 문화계의 '미투 운동(#metoo)'으로 확산되었다. 그의 시에 등장한 괴물이 원로 시인 고은이라는 건 이제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논란의 장본인도 마지못해 잘못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긴 했다. 그의 유감 표명에 진정성이 있냐 없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문제는 비겁한 공범의식을 시대의식으로 포장하며 그를 감싸려 들거나 한켠에서 일어난 작은 일 가지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는 말자며 논란의 핵심을 흐리는 동료 문인들이나 문화언론계 인사들이다. 심지어 최영미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하고 있다고 말한 동료 시인도 있다. 

"너무 벗겨서 드러내기보다는 알면서도 모른 척 지나가는 그런 관대함이랄까, 그런 것도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 시시콜콜 다 드러내고 폭로하고 비난하면 세상이 좀 살벌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일거수일투족 조심하다 보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리고 위 인용문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예술가가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리 시시콜콜 따지려 드냐는 원로 평론가 김병익의 어이상실 중앙일보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좋게 얘기해서 행적은 단죄하되 시인의 예술까지 매도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논지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 보자. 누가 이제부터 고은의 시를 싫어하라고 하기라도 했나? 갑자기 고은의 시가 품질 나쁜 시로 둔갑을 하기라도 했나? 성추문 논란 이전이나 이후나 그의 시들을 좋아하든 말든 그건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다만 이제 불행히도 그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우리에겐 그의 시들을 '색안경 끼고 볼 권리'가 생겼다고 얘기하는 것 뿐이다. 이게 맥락이다. 그건 우리만이 아니라 스웨덴 한림원의 입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추행범에게 노벨문학상을 준다는 건 작품이 아무리 멋지고 의미가 있어도 곤란한 일 아닌가. 시는 변하지 않았지만 시가 탄생한 배경이나 집안은 명백하게 변한 것이다.  

서정주가 친일시나 전두환 찬양시를 썼음이 밝혀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똑같은 소리를 했다. 시인의 행적은 밉지만 모국어를 빛낸 그의 찬란한 업적까지 저버리지는 말자고. 정말 그런가? 한 번 거꾸로 생각해볼 순 없을까. 그렇게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시들를 쓸 수 있는 걸까. 한 번 정신의학적으로 연구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 손으로는 성추행을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명작을 써낼 수 있는 게 예술이라면 '예술의 진정성' 같은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거나 이미 소멸된 것이란 말인가. 

'행적은 단죄하되 시인의 예술까지 매도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논지를 계속 펼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번역해 보면 '과정이 구리더라도 결과물만 좋으면 인생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깡패논리와 다름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계속 자기 자식들이나 후배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동안엔 언제라도 제2, 제3의 고은과 이윤택이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는 방법은 지금이라도 그 더러운 손모가지들을 댕겅댕겅 잘라서(실제로 자르라는 얘기는 아니다) 더 이상 거짓된 작품을 생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그를 지켜본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성추행을 범하면 나도 저 꼴을 당하게 되겠구나'하는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서정주나 고은이나 이윤택의 작품이 여전히 좋다는 멘탈의 소유자들은 그냥 포기하자. 어떤 생각을 하건 뭘 좋아하건 그건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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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지날 때마다 생각한다. 

이 역 이름을 처음 지을 때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정말 누군가는 한 글자라도 줄이고 싶었을 텐데. 그러나 뭐든 노력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우선 '동대문'을  뺄 순 없었을 것이다. 동대문은 그 지역의 여러 가게와 거리를 거느리는 대표적인 랜드마크니까. 

그렇다고 '역사'를 뺄 수 있었을까. 그냥 동대문공원이라고 하고 싶어도 '역사'와 '문화' 중 하나를 빼서 관계자들에게 욕을 먹을 생각을 하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라는 긴 이름을 눈물을 머금고 결정했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오늘 내가 했던 일의 결과처럼. 집으로 가야겠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지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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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오

길위의 생각들 2017. 12. 8. 10:15



건강검진을 받으러 와서 문진표를 다 작성해 냈더니 간호사가 선생님은 올해 검진 대상이 아닌데요, 라고 한다. 회사에서 올해 안으로 안 받으면 벌금 문다고 해서 왔는데요, 라고 했더니 건강관리공단에서 이름을 가끔 누락시키는 경우가 있으니 전화를 해보라고 한다. 공단에 전화를 해보니 나는 대상자가 아닌 게 확실하다고 한다. 그럼 누구의 착오냐고 물었더니 모른단다.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고만 한다. 이럴 걸 괜히 어제 저녁부터 공복으로 버텼잖아. 지금 김밥천국에 앉아 있다. 아, 또 욕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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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일 등에 두 번 당첨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길 가다가 벼락을 두 번 맞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평생 한 번만 일어나도 기적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주 로또 일 등에 당첨되는 사람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벼락 맞아 죽는 사람도 꾸준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인생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나에게도 놀라운 행운이 찾아 올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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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가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며 억울해 하던 후배 여자애 생각이 났다. 어릴 땐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어 유부남과 바람도 나보고 결혼도 해보고 하니 그것도 다 한때더라는 것이다. 나도 술 마시고 돌아다니며 노는 게 가장 재미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술, 담배, 외박이 인생의 삼대 지표였고 심지어 술 마시는 게 좋아 '음주일기'라는 글을 따로 연재하기까지 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도 그냥 다 그러했다.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인생일까. 돈을 많이 벌어 인정 받고 높은 지위로 올라가거나 사업을 확장하는 게 최대의 목표요 보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우리끼리만 잘 살면 되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생은 그렇게 몇 가지 목표나 가치로 홀딱 채워지지 않는다.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가족, 친구, 일, 휴식도 필요하고 재미나 의미, 성취, 야망, 좌절도 필요하다. 심지어 썅년이나 개새끼들도 필요하다. 그렇게 온갖 잡것들이 채워지고 하나로 섞일 때 인생이 완성된다. 그래서 인생엔 불순물이 많다. 우린 모두 공평하게 불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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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락객

길위의 생각들 2017. 10. 31. 11:22

어젯밤 숙소에서 뉴스를 보니 단풍철을 맞아 전국의 산마다 행락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행락이라는 말의 어감이 왠지 불량스럽고 낮춰보는 것 같아 사전을 찾아보니 ‘놀거나 즐기러 온 사람’이란 뜻이란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무릇 사람이란 노는 것보다는 열심히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해야 한다고 배웠고 뭔가 즐기는 것은 쾌락(아, 여기에도 락이 들어가네)과 연결되어 괜히 떳떳치 못하다는 자기검열에 시달리며 살았던 모양이다.

순천에 내려온 김에 나도 행락객의 일원이 되기로 한다. 단풍이 이렇게 좋은데, 바람이 이렇게 시원한데 여기서 행락을 안 하면 뭘 한단 말인가. 단풍만큼이나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은 강천산 등산객들은 깔깔대고 웃으며 걷다가도 폭포가 나오면 멈춰서 사진을 찍었고 아름드리 세타콰이어가 나오면 얼른 가서 나무에 팔을 척 얹고 사진을 찍었다. 전망대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빼곡해서 오래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즐거웠다. 단지 단풍과 계곡을 구경하기 워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란히 걷고 있다니. 울긋불긋 유치찬란한 자연과 울긋불긋 찰칵찰칵 히히하하 유치찬란한 행락객들. 이래저래 좋은 날이다. 이런 날을 자양분 삼아 또 일주일을 버텨봐야지. 아, 서울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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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프로필을 다시 써본다.


남자로 태어났지만 남자다운 적이 없었고 
막내로 태어났지만 어리광을 부린 기억이 없었고 
문학소년이었지만 문청은 아니었고

<월간팝송>구독자였지만 이젠 음악을 거의 안 듣고 
‘뚜라미’였지만 기타를 잘 못 치고 
여자를 좋아했지만 연애는 잘 못했고

영문과를 나왔지만 영어를 잘 한 적이 없고
카피라이터 출신이지만 아직도 광고를 잘 모르고

책을 좋아하지만 많이 읽지 않고 
여행을 싫어하지만 가끔 여행을 하고

글 쓰는 걸 좋아하지만 잘 쓰진 못하고 
술을 좋아하지만 소주 두 병이면 취하고

칼럼을 가끔 쓰지만 칼럼니스트는 아니고 
[대부]와 [웨인즈 월드]를 모두 좋아했고

노무현을 좋아했지만 노사모는 아니고 
문재인을 지지했지만 문빠는 아니고

이사 오면서 자전거는 누구 줘버렸고 
십여 년 전부터 차가 없는 뚜벅이고 
수영 배운지 다섯 달만에 겨우 물에 뜨고

결혼을 했지만 아직 철이 안 들었고 
애는 없고 고양이 순자는 우리 애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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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시인의 '의자'라는 시가 있다. 몇 년 전 '현역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라고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시다.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갑자기 이 시를 떠올린 것은 출근길에 '허먼 밀러'라는 의자 회사가 눈에 들어와서였다. '의자계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허먼 밀러는 비싸서 그렇지 정말 앉는 순간 몸에 착 붙는 것이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물건이었다. 포털회사 네이버에서는 수습사원들에게도 이 의자를 내준다고 했던가.

맨 처음 가정집을 개조해서 사무실로 쓸 때 우리 회사가 가지고 있던 의자들은 품질이 그리 좋지 못했다. 오래 앉아서 일을 해야하는 입장에서는 아쉬운 점이었다. 나는 어느날 회사 대표에게 제안을 했다. 개인용 의자로 허먼 밀러를 하나 마련하고 싶은데 비용이 비싸니 이렇게 딜을 하면 어떠냐. 일단 의자값을 회사와 내가 반반씩 부담하자. 그리고 내가 자진해서 회사를 그만두면 의자를 두고 나가고 내가 쫓겨나는 경우엔 의자를 들고 간다. 어때, 합리적이지 않냐. 가만히 내 얘기를 듣던 대표는 무슨 조건이 그리 복잡하냐고 웃으며 거절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사를 하면서 회사 의자는 '시디즈'로 전면 교체되었다. 허먼 밀러 정도는 아니지만 시디즈도 매우 품질이 좋은 의자였다. 특히 시디즈는 '하루 종일 우리 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의자'라는 컨셉으로 진행된 캠페인이 매우 설득력 있고 잘 만들어진 광고였다. 좋은 의자는 일의 능률도 높이고 허리도 보호해주니 여러 모로 좋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도산공원 근처에 있는 척추전문병원을 지나다가 병원 담벼락에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라는 구절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저 구절은 시인에게 허락을 맡고 가져다 쓴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혹시 좋은 의자들이 우리를 착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허구헌날 의자에 앉아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하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역설한 '셀프 착취'가 아닐까.

아내가 이사 오면서 집에 있는 내 책상 앞에 좋은 의자를 하나 사줄까 묻길래 싫다고 했다. 집안에서까지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집에서는 의자보다 바닥에 앉거나 누워서 마음껏 딩굴거나 TV를 보면서 놀고 싶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어울리는 곳은 의자가 아니라 바닥이었다. '일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일을 할수록 피곤해진다는 게 그 증거다'라는 프랑스 소설가의 농담을 난 진담으로 생각한다. 일은 조금만 효과적으로, 노는 건 오래 많이. 목표는 이건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게 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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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자발적 노동착취의 현장 - 은곡도마 체험교실>

우리집에 있는 도마 이름이 은곡도마다. 박달나무로 만든 고가의 제품. 아내가 은곡도마와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나도 매일 그 도마 위에서 만들어진 음식을 먹고 살고 있으니 아주 무관하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도마는 은곡 이규석 선생의 작품이라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인데, 목공예 예술작품만 만들고 지내던 분이 '도마 메이커'가 된 것은 순전히 그의 딸 소영 씨 덕분이었다. 열 살때부터 소리를 배워 해외 무대까지 발을 넓혀 공연을 다니던 소리꾼 소영 씨는 우연히 은곡도마 아이디어를 낸 이후로 아버지의 일을 도와 이 제품의 제작, 배급은 물론 홍보, 마케팅 등 온갖 궃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아내가 몇 주 전부터 '은곡도마 체험교실' 날짜를 잡고 멤버들을 모았다. 은곡 선생이 오래 전부터 한 번 꼭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혜숙과 그의 남편 표문송, 윤혜자와 그의 남편 편성준, 옆집 총각 서동현까지 갑자기 몽골 여행을 떠난 한 친구만 빼고 원래 같이 가려던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서울에서 소영 씨 부부와 네 살짜리 아들 희수도 비슷한 시간에 출발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목적지는 인제군 필레에 있는 은곡 선생의 작업장. 전날 동현은 반차를 내고 송명섭막걸리 등 술을 준비하는 성의를 보였다. 말이 도마 체험장이지 사실은 캠핑인 것이다. 우리는 작업장으로 가기 전 인제의 하나로마트와 그 앞 정육점에 가서 고기와 술을 더 샀다. 도마 작업은 우리가 가는 캠핑의 일부분일 뿐, 대부분의 일정은 마시고 노는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드넓은 비닐하우스 안에는 도마 말고도 은곡 선생이 만든 작품들이 즐비했다. 달마대사가 있는가 하면 새가 있고 섹시한 여인의 모습이 있도 의자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도 있었다. 짓궃은 성기 모양도 있었다. 하나 같이 그 전에는 그냥 나무일 뿐이었는데 예술가의 눈에 띄는 바람에 생명이 불어넣어지는 경험을 한 피조물들이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소영 씨에게 작업 지시를 받았다. 평평하게 도마 모양으로 절단된 나무토막을 사포질을 해서 매끄럽게 만든 후 작업용 기름을 칠하고 잽싸게 천으로 기름을 닦아내는 과정을 세 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그것도 한 번에 하는 게 아니라 몇 시간 정도 텀을 두고 해야하는 제법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다섯 명의 용병들이 검은색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서울에서 각자 가져 온 앞치마를 하고 작업대 앞에 서서 조를 나눠 작업에 임했다. 누구는 도마를 날라오고 누구는 기름칠을 하고, 옆에서 그걸 받아서 기름을 얼른 닦아내고 도마가 잘 마르도록 건조대에 수납하는 일을 정성껏 했다. 신선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하면서 구슬땀을 흘리는 건 다들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소영 씨가 우리 옆에 와서 이렇게 고급 인력들이 내려와 일을 해줘서 고맙다며 격려를 해줬다. 비닐하우스 바깥에서는 동네 사는 인부들이 모터로 그라인딩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은곡 선생이 작업용 나무들 중 안 쓰는 것들을 모아 숯불을 만들어 주셔서 고기를 구웠다. 먼저 소고기를 구웠다. 문송이 구웠는데 음식에 엄격한 동현이 육즙이 마를까봐 굉장히 긴장하는 얼굴로 고기를 지켜보다가 고기가 채 익기 전에 얼른 들고 상으로 와서 사람들에게 먹어보라고 권했다. 숯불에 구워서 그런지 더 맛이 좋았다. 돼지고기도 구웠다. 좋은 고기를 산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넉넉하게 사온 고기 사이로 오징어도 구워 '오삼불고기'를 만들어 먹었다. 송명섭막걸리를 비롯한 각종 막걸리와 처음처럼이 번개처럼 비워졌다. 아내가 작업장으로 배달을 부탁한 문어도 도착했다. 안주와 술이 넘친다.

소영 씨가 어느 정도 먹었으면 이제 저녁작업에 들어가자고 말했다. 다들 비닐장갑을 끼고 앞치마를 하고 작업대 앞으로 가서 도마에 기름을 칠하고 천으로 기름을 닦아내고 건조대에 조심스럽게 수납을 했다. 다리가 아팠다. 팔도 아팠다 소영 씨 말에 의하면 내일 아침에 손가락 끝이 굉장히 아플 것이란다. 처음 하는 사람들은 떨어뜨릴까봐긴장하느라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작업자들이 너무 열심히 하는 바람에 도대체 쉴 틈이 없었다. 도마 하나를 건조대에 수납하고 나면 기름을 닦아내야 할 도마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마셔서 화장실에도 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었다. 아, 어쩌다 이런 덫에 빠져버린 것일까.

카피라이터 출신 광고인이 둘, 기획팀장 출신 광고인이 하나, 출판기획을 하고 있는 기획자 하나, 화장품 회사의 인테리어 팀장 하나. 이런 단순 작업을 하기엔 우리들위 학력이나 지위가 너무 높다는 자조적인 농담이 오고 간다. 그러면서도 칠 똑바로 해라, 기름 잘 닦아내라, 떨어뜨리지 마라 등등 서로를 감시하고 독려하는 데엔 게으름이 없다.

작업은 명목일 뿐, 사실은 놀러 가는 거라는 윤혜자 여사의 꼬임에 빠져 순진하게 따라 온 나머지 네 명은 원망하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지만 윤 여사는 '나도 피해자다' 라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우리가 작업하는 동안 은곡 선생의 이웃인 동네 어른들이 놀러와서 술을 마시고 소영 씨에게 소리를 시키고 한다. 소영 씨가 어른 접대차 하는 소리 '사철가'를 들으며 우리들은 열심히 사포질을 했다.

손님들이 돌아간 뒤 겨우 겨우 도마들을 정리하고 다시 모여 술을 마셨다. 은곡 선생이 특별히 춘향가 한 대목을 들려 주셨는데 소영 씨가 북을 치고 은곡 선생이 소리를 하는 아주 멋진 무대였다. 소영 씨가 소리를 배울 때 아버지도 함께 소리를 배웠다는데 정말 솜씨가 대단했다. 타고난 예술가 집안이 아닐 수 없다. 가져간 텐트를 하우스 안 빈 공간에 쳤다. 몇 년만에 쳐보는 텐트를 어둠 속에서 치려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 텐트 여자 텐트로 나누어서 잤는데 밤새도록 빗소리가 들려왔다.

일요일 아침에 소변을 보려고 일어났다가 다들 주섬주섬 작업대에 모여 사포질을 시작했다. 웃음이 나왔다. 어느덧 작업에 중독이 된 모양이었다. 우리가 열심히 할수록 고품질의 도마가 만들어진다는 데 묘한 쾌감과 자부심이 따라왔다. 은곡선생이 오시더니 이번 자원자들은 작업 수준이 매우 높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우리는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작업도 잘 한다는 소영 씨의 뻔한 거짓말에 싱글벙글하며 또 열심히 사포질을 하고 기름칠을 하고 닦아냈다.

아침은 김치찌개와 쏘세지 볶음이었는데 은곡 선생이 한 냄비밥이 너무 맛있어서 다들 배가 튿어질 지경으로 먹고 비명을 질렀다.

오전 작업을 마무리하고 바로 옆에 있는 필레온천에 갔다. 규모는 작지만 프랑스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발견된 게르마늄 온천이란다. 물의 느낌이 굉장히 좋았고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즐기는 야외 온천탕의 느낌은 정말 좋았다.

온천에서 돌아와 소영 씨 남편 동현 씨가 부쳐주는 부침개에 막걸리를 또 마셨다. 쉬엄쉬엄하라는 소영 씨의 말이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달려가서 남은 도마들에 기름칠을 하고 바닥을 천으로 문질러 닦았다. 이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노예들이 된 느낌이었다.

스마트폰으로 교통정보를 검색해 보니 길이 막힌다 하니 저녁을 먹고 천천히 출발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어차피 길에서 시간을 버리느니 그렇게 하자고 모두들 찬성했다. 소영 씨는 모든 작업이 끝날 때쯤 한 가구 당 마음에 드는 도마를 한 개씩 주겠다며 고르라고 했다. 신이 난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에 담아두었던 도마를 하나씩 골라 선물로 받았다.

토요일 새벽 여섯 시에 모여 일요일 저녁까지 꽉찬 시간을 보냈다. 다음에 또 한 번 놀러오기로 하고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남편이 의사인 소영 씨는 서울에 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서울로 올라간다. 다 떠나고 나면 이 넓은 하우스엔 은곡 선생 한 사람만 남는 것이다. 그러나 은곡 선생도 딸 내외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비는 그치지 않고 끈질기게 내린다.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서 집에 가서 눕고싶운 생각 뿐이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겠지. 뭐, 날이 흐려서 해가 뜰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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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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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동쪽 어딘가에 있다는 행복의 나라를 상상해 본다. 그 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정치에 관심이 없다.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민주적인 생각의 틀이 전통으로 잘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중앙정부는 때때로 민의를 물어 법률을 개정하거나 곧바로 현실에 적용하기 때문에 따로 국회의원들이 발의를 미끼로 유세를 떨거나 협박을 할 수 없다. 그나마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들은 언론과 비정부기구들이 힘을 합쳐 퇴출하기 쉬운 구조를 만들어 놓아 함부로 까불지도 못한다.막말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날로 정치 인생이 끝나기 십상이다. 


그 나라엔 과로사가 거의 없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하루 4시간 정도만 일한다. 그래서 어떤 직장은 4교대까지 가능한 곳도 많다. 생산직이나 공무원들만 그런 게 아니다. 물론 작가나 프로그래머, 기획자 같은 사람들 중에서는 하루 10시간 이상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큰 사회적 존경과 보상을 받는다. 

초등학생들은 숙제가 없다. 그날 배운 걸 그날 학교에서 다 소화하고 나머지 시간엔 놀면 된다. 아이들은 하고 싶은 공부를 선택해서 배울 수 있고 일년에 한 달은 자율학습을 할 수 있어서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 선행학습은 전면 금지되어 있다. 

부자들은 세금을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은 세금 혜택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부자들 중엔 집을 사지 않고 전세나 월세로 사는 사람이 많고 서민들은 집을 사는 경우가 많다. 서민일수록 대출 받기가 쉽기 때문이다. 

상을 받는 경우 애든 어른이든 거의 대부분 부상으로 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경험은 여행이라는 사회적 합의 때문이다. 상품은 배낭여행부터 크루즈까지 다양한데 예를 들어 용감한 시민상을 받은 경우엔 몇 달씩 크루즈 세계여행을 시켜 주기도 한다.

벌을 받는 경우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교도소는 수만 권의 책이 꽂혀있는 대형도서관이다. 재소자들은 휴대폰이나 컴퓨터 등 전자기기를 몰수 당한 후 도서관에 갇혀 책을 읽어야 한다. 읽어야 할 책의 할당량이 주어진 것은 아니나 책을 읽은 뒤 독후감을 쓰는 경우엔 글의 질과 양에 따라 복역기간이 줄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수감생활에 만족하는 편이기 때문에 독후감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드물다. 일시적인 전자기기 사용 금지로 금단증상을 겪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 쉽게 아날로그적인 상황에 적응한다. 교도소에 다녀 온 사람일수록 삶이 여유롭고 윤택해졌다고 고백하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 선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만약 교도소가 도서관이라면 어떨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던 게 떠올라서 아무렇게나 써본 글이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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