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으로 이사를 와서 생긴 변화 중 하나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일이었다. 아파트에서는 없던 우리만의 뒷마당이 생겼고 거기엔 동네 길고양이들이 이따금씩 출몰했다. 단독주택이긴 했지만 내부는 단칸방처럼 좁디좁은 집이고 또 우리 부부는 고양이나 개를 기르는 일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지나가는 고양이라도 우리에겐 반가운 손님이었다. 아내가 어느날 고양이 사료를 사오더니 뒷마당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사료와 물을 놓아 두기 시작했다. 그릇은 이가 빠지긴 했지만 노란색 루꾸르제 대접이었다. 그러자 길고양이들이 와서 먹이를 챙겨 먹었다. 계단 밑에 스티로폴 상자에 담요를 깔아두기도 했지만 거기 와서 잠을 자는 고양이는 없었다. 

길고양이들의 겨울나기는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길에서 아무 거나 먹고 돌아다니는 것은 물론 시동이 꺼진지 얼만 안 되는 자동차 엔진 밑에서 잠을 자다가 아침에 변을 당하는 일도 허다하다. 병원에 데려가주는 주인이 없으니 병에 걸리면 저절로 낫기를 기다리거나 앓다가 그대로 죽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길고양이들의 수명은 아주 짧다고 한다. 

아내는 고양이들의 이름을 제멋대로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 와서 사료를 먹던 고양이 두 마리를 양일이, 양이라고 불렀다. 어미와 새끼로 보이는 녀석이들이었는데 새끼가 먹이를 먹을 동안 어미는 조금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제 새끼가 배불리 먹이를 먹고 나면 비로소 자기도 와서 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양일이 양이 사이로 양삼이가 나타나기도 했고 나중에 양사까지 나타나 먹이를 두고 서로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큰 덩치로 기존의 고양이들을 윽박지르고 먹이를 독차지하는 양삼이를 미워했다. 게다가 어느날인가부터 양일이와 양이가 차례차례 보이지 않게 되자 그 미움은 더 커졌다. 양삼이는 덩치가 크고 검은 색깔 털을 가진 고양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양삼이도 양사도 결국은 오갈 데 없는 길고양이 신세인 것을. 그래, 너라도 많이 먹어라. 아내는 양삼이, 양사, 그리고 양오까지 누구든지 오기만 하면 아낌 없이 사료를 퍼주었다. 양오는 한쪽 귀가 조금 잘린 놈이었다. 나는 고양이들끼리 싸우다가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내는 어딘가 잡혀가서 중성화를 당하고 다시 풀려났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그렇게 번갈아 먹이를 나누어 먹다가 어느날인가엔 결국 모두 사라지고 양오 하나만 남게 되었다. 

양오는 도대체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면 베란다 위에 앉아서 우리를 힐난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이제야 일어나는 거야? 이 게으른 것들. 어서 먹이를 줘."라고 하는 듯한 얼굴을 한 채 발걸음을 계단쪽으로 향했다. 어떤 날은 저녁때도 찾아와 먹이를 요구했다. 아내는 기가 막힌다고 하면서도 그때마다 양오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양오가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우울한 목소리를 “여보, 양오가 안 보여.” 하며 걱정을 했다. 아침마다 마당으로 나가면 늘 우리를 쳐다보던 놈이 안 보이니까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산꼭대기에 있는 작은 집에 사는 두 사람에겐 길고양이 한 마리의 존재가 생각보다 컸던 것이다. 


그런데 만우절인 오늘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가보니 거짓말처럼 양오가 돌아와 있었다. 없어진지 사흘 만이었다. 다행이다. 어딜 갔다 이제 온 거야. 물어도 대답이 없다. 그저 어서 밥을 달라고 우리를 노려볼 뿐이다. 아, 이런 놈에게 계속 밥을 줘야하는 건가. 생각해 보면 우리도 참 불쌍하다. 그래도 잘 돌와왔어. 웰컴백이다, 양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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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꽃을 살까. 예뻐서? 향기가 좋아서? 꽃을 선물한다는 것은 그 꽃을 사서 들고 다니다가 상대방에게 전달할 때까지 쏟아지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일이기에 더 소중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몇 주 전 아내와 고속버스터미널 꽃시장에 갔다가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을 포장하고 있는 제대병을 만났다.그 친구는 하얀 여자 운동화가 들어있는 상자 안에 노란 꽃을 채워넣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물어보니 '오늘 제대하는 날'이라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을 포장하고 있노라고 했다. 기다리던 전역을 맞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갈 생각으로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며 환하게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떳떳하다. 

그 청년도 그랬다. 앞으로 그의 인생에도 수 많은 어려움이 닥치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리고 지금 사랑하는 마음을 나중에도 기억할 수 있다면 남들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다. 오랜만에 꽃을 사러 가서 꽃을 사러 오는 사람의 마음까지 살짝 엿본 것 같아서 하루 종일 기분이 흐뭇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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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택시

길위의 생각들 2016. 8. 19. 13:54



야근을 하고 열두 시 넘어 택시를 타고 오면서 기사 아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내가 마흔일곱 살에 뒤늦게 결혼을 했다고 하니 깜짝 놀라며 자긴 서른넷에 하면서도 늦게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 결혼한 게 결정적인 실수였다며 웃는다. 다시 할 수만 있다면 혼자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저희는 아이 없이 살 거니까 둘이서만 재밌게 살다 깨꾸닥 죽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했더니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저는 어머니가 삼 년을 꼬박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아파트 한 채를 병원비로 다 쓰고 가셨어요. 근데 그 뒤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이게 복귀가 안 되네...'라고 말하는 기사 아저씨. '저는 어머니가 너무 갑자기 돌아가셔서 그게 정말 가슴 아팠는데' 라고 말하는 나. 


이미 택시기사와 손님이라는 관계를 망각한 우리는 죽을 때 돼서 금방 죽는 것도 복이라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얘기가 흘러간다. 아저씨는 행여 자신이 죽기 전에 오래 아프거나 치매 같은 거 걸려서 자식들에게 폐라도 끼칠까봐 그게 걱정이라고 한다. 나도 우리 부부 둘이 재밌게 살다가 같이 죽는 게 바람이라고 소원을 얘기한다. 


앞으로 원하는 사람들에겐 인도적인 안락사나 자살 같은 방법은 좀 열어놔야 하는 것 아니겠냐는 데까지 얘기했을 때 택시가 집 근처에 도착했다. 우리는 '서로 알아서 잘 죽읍시다' 라는 이상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밤 12시 52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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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꿈이 뭐냐고 묻는 질문에 대통령'이라고 대답하고 정말 싱겁게 대통령까지 궤도수정을 한 번도 안 하고 달린 사람은 김영삼 하나로 충분하다. 다들 어렸을 적엔 얼토당토한 꿈을 꾸기 마련이지만 철이 들면서 자신의 능력이나 집안 사정, 사회적인 분위기 등등에 따라 순차적으로 그 꿈을 수정하기 마련이고 그게 세상 살아가는 이치다. 그런데 여기 사뭇 다른 이유로 어린 아이들이 눈물을 머금고 꿈을 바꿔야 하는 직종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바로 언론인이다. 기자나 앵커 등 정상적인 언론인을 꿈꾸는 건 자유지만 유독 대한민국에서는 그 직종의 노후 전망을 어둡게 하는 부정적 요소가 또아리를 틀게 된 것인데 이름하여 김영란법이다.

도대체 김영란은 누구더냐. 그는 여성이며 전 대법관 출신의  수퍼 엘리트'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대법관을 지낸 변호사는 3년 안에 100억을 버는 법조재벌이 되는데"(박찬종 변호사의 칼럼) 굳이 그걸 포기하고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 공직자들에게 뇌물을 받아먹지 말라 미친듯이 외치고 있으니 동업자들 사이에서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놓은 잔칫상을 같이 엎어버리자는 ‘상 또라이'인 것이다. 법조계를 출입하던 뜻있는 기자들도 입을 모아 이건 아니라고 분연히 들고 일어났으나 아뿔싸, 계속되는 폭염에 잠깐 더위라도 먹은 건지 믿었던 헌재마저도 며칠 전 합헌 결정을 내는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발의되었던 이 법이 언론계로 불똥이 튀면서 기자 사회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28일 한국기자협회는 대한변호사협회 등과 함께 제기한 ‘김영란법’ 헌법소원심판 합헌 결정에 대해 ‘비판언론 재갈물리기 악용 안 된다’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무엇보다도 권력이 김영란법을 빌미로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릴 가능성을 경계한다”고 밝혔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고위층이 힘 대신 ‘신고나 고발조치'를 통해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릴 것이라는 기발한 착상이다.


그들은 말한다. "엄연히 민간영역에 속하는 언론이 공공성이 크다는 이유로 ‘공공기관’, ‘공직자’로 규정되고 언론활동 전반이 부정청탁 근절을 위한 감시와 규제 대상이 되는 상황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해 보라. 언론고시를 통해 사회에 나왔는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졸지에 공직자 신분으로 바뀌게 된다니 열 받을 만하지 않는가. 더구나 감시자에서 감시를 당하는 사람으로 입장이 뒤바뀐 기자들로서는 당연한 권리 주장인 것이다. 


큰일이다. 원래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인 김영란법이 우리 기자들의 취재를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되고 말았으니. 당장 기자들은 이제 어디 가서 점심을 먹으며 친한 소식통들과 얘기를 나눌 것인가. 더구나 '어디 가면 무슨무슨 식당이 맛있고 거긴 좀 비싸지만 어차피 우리가 돈 내는 거 아니니까 걱정할 것 없이 골고루 시켜 천천히 맛을 음미하라’는 식으로 후배들에게 전수하던 취재요령조차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란 말인가.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은 2016년 7월 29일 jtbc ‘뉴스현장’에 출연해 “기자가 취재원 등 업무관련자와 식사할 때 접대비용 3만 원의 상한선을 두는 것은 대단히 비현실적”이라며 “정치인과 언론인, 정치인과 민원인 등 이해관계인들이 방에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해야 할 얘기가 있는데 3만 원으로 식사하려면 별도 방에선 거의 불가능하고 다중이 쳐다보는 홀에서 먹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5만 원으로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논설위원이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구체적인 설명이라 좀 쪼잔한 감이 없지 않지만 말이야 바른 말이다. 도대체 일반 홀에 앉아 사람들이 쳐다보는 상황에서 고위 공직자나 기업 입원들일 게 뻔한 취재원들이  어찌 기자들과 서로 깊은 속내를 털어놓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람들에겐 ‘파티션(칸막이)’은 기본이다. 예쁜 여종업원들이 서빙을 하느라 바쁘게 왔다갔다 하면 점잖게 불러서 만 원짜리 두세 장을 손에 꼭 쥐어주고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쉴드를 쳐야 대화 분위기가 잡히는 법이다. 이런 걸 그들은 하나도 모른단 말인가. 

농민들도 걱정이다. 그동안 5만 원 넘는 뇌물용 농산물을 양산해 옴으로써 생계를 유지해 온 대한민국의 특산물 농가들은 이제 누굴 믿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한미FTA로 망해, 김영란법으로 망해, 정말 살 수가 없다. 김진 위원은 3만 원 이상 식사를 해도 ‘더치페이’하면 되지 않느냐는 앵커의 물음에 “만약 우리나라에서 전부 다 영수증 처리한다면 언제, 누구를 만났는지 다 적어내야 할 것 아니냐”며 “5만 원 정도에서 공무원들의 자유재량을 확보해 줘야 세상일이 돌아간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모두가 훤히 볼 수 있는 홀 테이블에 앉아 전에부터 잘 알던 고위공직자와 만나 형님, 잘 지내셨어요? 응, 니 덕분에 변비가 좀 나았어. 같은 알맹이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김진 논설위원을 상상하고 있자니 가슴이 아파 온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2014년 한국의 부패인식지수(CPI)는 OECD 34개 회원국 중 27위를 차지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아직 더 부패할 여유가 남아있다. 그리고 대통령이 취임 당시 언급했던 지하 경제 측면에서 보더라도 언론계의 공짜 점심은 그 방면의 금맥이다. 철모르는 대법관 출신의 망발로 인해 대한민국의 언론계가 위축되고 한 해 10조 원이 넘는다는 재계의 접대비 문화가 사라지는 꼴을 더 이상은 볼 수 없다. 나 혼자라도 김영란법 퇴치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할 순간이다. 

정부는 연 10조 원 규모의 접대문화를 훼손하는 김영란법을 당장 폐지하라!! 
정재계는 기자들의 복지를 위협하는 '반김영란법 펀드'를 당장 조성하라!!
김영란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당장 변호사를 개업해서 전관예우를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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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회의를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혼자 들어간 논현동의 식당엔 채널A가 틀어져 있었다. 북한 김치와 남한 김치를 비교하는 쇼프로였다. 붐비던 손님들이 한 차례 나간 뒤라 식당은 지나치게 한산했다. 마침 리모콘이 내 테이블에 놓여 있길래 나는 혹시 뉴스를 틀어도 되겠냐고 서빙하는 분께 양해를 구하고 재널을 YTN으로 바꿨다. 개성공단 중단에 관한 뉴스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나는 내 귀를 의심해야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식당 사장님께서 나이가 지긋한 남자 손님 두 분과 나누는 황당한 대화 때문이었다.


"거, 개성공단 창문마다 폭탄을 설치해서 나올 때 몽땅 폭파를 시켰어야 하는 건데. 그놈들 하나도 못 건지게. 아까워... 애초에 그거 지을 때 몰래 폭탄을 심어놓고 어제 같은 날 청와대에 앉아서 누루기만 하면 다 터지게! 어째 그 생각을 아무도 못했나..."


사장님과 손님 두 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셨다. 남한측에서 사업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관심 없고 오직 초가삼간 다 태우더라도 미운 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얘기였다. 너무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계셔서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끔찍하고 무서웠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건 맨날 내 입으로 지껄이는 공자님 같은 소리였지만 막상 같은 땅에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일은 짐작보다 괴롭고 심란했다. 


문제는 이런 분들도 선거 때마다 우리와 똑같이 한 표씩을 행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분들의 선택은 우리의 짐작대로일 것이며, 그 신념은 앞으로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제도가 얼마나 심각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는 절망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더욱 더 이번 선거에 관심을 보이고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는 당장 떠오르지 않지만, 지금 야권을 생각하면 푹푹 한숨만 나오지만, 그래도 남은 희망의 불씨를 찾아보자. 누구 좋으라고 포기하나. 정신 차리고 투표 하자. 지난 대선에도 우리가 '설마' 하고 있는 동안에 이 분들이 그토록 카카오톡으로 서로의 투표를 독려하며 막판에 그녀에게 몰표를 몰아줄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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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차라리 니가 나가 죽었으면 좋겠어>

어떤 여자분이 시집 오기 전에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 주인집 아들에 의해 저질러진 강간이었다. 그 과정은 계획적이었고 모질었으며 끔찍했다. 그러나 그 여인은 힘이 없었다. 오래 전 일이었고 또 먹고 사느라 바빠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한채 그냥 참고 살아야 했다. 남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주인집이 두려워서인지 원래 자존심이 없어서인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십 년이 지난 어느 수요일인가부터 그 여인은 가해자 집앞에 가서 사과를 요구하기로 했다. 쩨쩨하게 돈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네가 잘못했음을 동네 사람들 앞에서 깨끗이 인정하고 반성문을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당시 돈을 벌고 싶어 자진해서 주인집 아들에게 강간해 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라는 헛소리가 그 집안 사람들 입에서 흘러나왔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그 여인은 그 후 매주 수요일이 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집 앞에 가서 사과를 요구했다.

그 여인의 사연은 곧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져 많은 공분을 사게 되었고 반상회에 안건으로 상정되기에 이르렀다. 조소과에 다니는 어떤 미대생은 그 여인이 강간을 당하던 당시 나이 즈음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그 놈 집앞에 세워놓기도 했다.

그런데 2015년 12월이 다 끝나갈 즈음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여인의 아들이 그녀에게 말도 안하고 가해자에게 쪼르르 달려가 지난 일은 다 잊기로 하고 앞으로 다시는 그 일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 왔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모친이 그게 무슨 미친 개소리냐고 소리를 질렀더니 "엄마, 이제 대승적 차원으로 생각하셔야 해요. 아세요?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걸 한자로 쓰면 '비가역적'이 되거든요? 깔끔하게 합의를 다 끝냈는데 이제 와서 엄마가 이러시면 아들 입장이 뭐가 돼요." 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용돈으로 십만 엔 정도를 받아왔기 때문에 그놈 집앞에 세워놓은 소녀상도 이제 어디다 좀 치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 엄마가 강간 당한 일을 왜 엄마한테는 알리지도 않고 제 마음대로 가서 합의랍시고 하고, 또 왜 그렇게 서둘렀냐는 질문엔 '앞으로는 그놈이랑 힘을 합쳐 사이 좋게 지내야 옆동네 중국집 배달하는 형들에게 무시 당하지 않을 수 있다'며 이장 아저씨가 지속적인 압력을 가해왔다는 뒷얘기를 털어놨다. 덕분에 주인집 아들은 '12월 28일에 모든 합의를 끝냈으므로 이제 앞으로 그 어떤 사과도 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어길 시엔 그 여인과 그 집은 이 동네에서 끝'이라는 협박을 하기에 이르렀다.

엄마 눈에 피눈물이 흘렀다.
이런 걸 자식새끼라고.

슬프고 허무했다. 이제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그 여인은 아들이 받아온 돈다발을 풀어 지폐를 박박 찢어서 병신 같은 자식의 얼굴에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난 차라리 나가 나가 죽었으면 좋겠다. 이 쓸개 빠진 개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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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네

길위의 생각들 2015. 8. 11. 15:47





박가네라고 혹시 들어보셨는지? 마포에 있는. 아, 최대포는 아신다구요. 네. 사실 마포는 최대포라는 고깃집이 제일 유명하죠. 그런데 오늘은 최대포 말고 박가네라는 집 얘기 좀 하려구요. 제가 두 번째로 다니던 광고회사가 MBC애드컴이라는 곳이었는데요, 정동MBC빌딩에 있던 그 회사가 어느날 갑자기 마포 태영빌딩이란 곳으로 이사를 간 겁니다. 정동MBC빌딩은 덕수궁과 광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나름 정취가 있었고 또 당시만 해도 경향신문과 MBC라디오방송국이 남아 있어서 가끔 ‘별밤' 공개방송 같은 녹화방송 프로그램이 열리는 날엔 여중생들이나 여고생들이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인기 연예인이 나타나면 광화문이 떠나갈 정도로 비명을 지르는 소소한 재미가 있던 곳이었죠. 아, 박근혜 대통령이 대표를 지낸 정수장학회도 그 건물에 있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정' 자와 육영수 여사의 수' 자를 따서 이름이 그랬다죠. 그런데 회사가 마포로 옮겨가면서 그런 분위기나 재미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마포라는 새로운 공간에 재빨리 적응을 했습니다. 일단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밥집. 마침 회사 바로 앞에 공덕시장이라는 오래된 재래시장이 있어서 우리의 점심과 저녁은 그곳에서 손쉽게 해결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팀은 곧바로 시장 안에 있는 명재네라는 분식집과 단골을 텄습니다. 오후 네다섯 시쯤 되면 두세 명씩 가서 간식으로 떡볶이도 먹고 라면도 먹고 하던 집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초등학생인 명재네집 아들 명재가 우리 팀장님인 국동이 형을 보면 저쪽에서부터 달려오며 “아저씨,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공덕시장은 이후에 두 번 크게 신문에 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전국에서 가장 붕괴위험이 큰 건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사였고 또 한 번은 IMF를 맞아 저렴한 시장 전집이 뜬다, 5천 원이면 배부른 안주에 막걸리까지...라는 내용의 조금 서글픈 기사였습니다)  바로 근처에 건물이 있던 한겨레 기자들도 많이 오고 그랬지만 어쨌든 공덕시장은 너무 오래된 건물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예나 지금이나 밥보다는 술이었죠. 눈만 뜨면 회사에 와서 허구헌날 부대껴가며 회의하고 야근하고 툭하면 주말에도 나와 일하고정말 어이 없게도 가족들보다 오래 시간을 같이 보내는 사이였고 또 쓸데없이 체력은 넘쳐나던 신입사원 시절, 절대적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는 건 업무 중간 틈틈이 마시는 술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우리 회사 뒤에는 제일빌딩이라는 적당한 크기의 베이지색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일층의 맥주집부터 2,3층의 파발마 같은 단란주점, 그리고 지하에 ‘언니들’이 T/C 없이 자유롭게 근무하는 야릇한 술집들까지 즐비해서 우리는 매일 밤 선택의 폭을 넓혀가며 그 빌딩에 출근부 도장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밤에 MBC애드컴 직원들을 만나고 싶으면 제일빌딩으로 가라' 는 말이 생겨났고 실제로 밤이면 그 빌딩 화장실에서 술에 취한 동료들과 자주 마주치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빌딩은 어느새 우리들 사이에서도 ‘환락빌딩’이라는 직관적인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마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가게는 최대포였죠. 우리도 당연히 처음엔 최대포를 갔었습니다. 그러나 곧 시들해지고 만 것이, 소문과 달리 고기 질이 그리 좋지 못했고 서비스도 그저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이유는 고기를 굽는 연료가 숯불이 아니라 브루스타’ 라 불리는 이동식 가스렌지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건 회사에서 가까운 '그냥 대포'든 마포 굴다리 밑에 있는 '원조 최대포'든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십 년 이름 높은 최대포가 가스렌지로 고기를 구워주다니. 우린 마포라는 지역의 문화적 자존심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 같이 숯불로 고기를 구워주는 집이 하나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회사앞 제일빌딩 맞은편 박가네'였습니다. 

환락빌딩 바로 맞은편에 있던 박가네였으니 우리들의 회식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어쩌다 경쟁PT라도 따는 날이면 당연히 팀 전체가 몰려갔고 그냥 별 이유 없이 저녁에 술 한 잔 걸치고 싶은 날도 우리의 발걸음은 어느새 김유신의 말처럼 박가네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술, 담배, 외박을 인생 삼대지표로 삼고 살았을 정도로 한창 팔팔했던 저는  바쁘든 한가하든 어떤 경우에도 집에는 일찍 들어가면 안 되는 걸로 알고 살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툭하면 술이요, 뻑하면 외박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부지런한 박가네 사장님은 우리가 갈 때마다 활짝 웃으시며 가게 옆 숯막에서 빨갛게 익은 숯불을 들고 들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잘 생기고 붙임성도 좋은 우리 선배 김동만 차장은 원래도 사장님과 친했지만 두 사람이 동향이라는 걸 알고 난 다음부터는 즉시 호형호제하는 막역한 사이가 되어 한가한 저녁이면 가게에 가서 함께 숯불을 지피기까지 했습니다. 가게는 부지런한 사장님 사모님 덕분인지 나날이 번창했고 늘 만석에 가까울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우리는 번지르르한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MBC애드컴 직원놈들보다 박가네 사장님이 훨씬 더 돈도 많이 벌고 실속 있다고 부러워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장님 부부는 에이, 말도 안 된다고 손을 내저으며 웃으셨구요. 

매번 관광도시를 강간도시로 발음하던 바보 같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 갑작스럽게 IMF가 왔고 많은 사람들이 나이 서른에 명퇴를 당하며 회사를 떠났습니다. 동료들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환송회를 하던 곳 역시 대부분은 박가네였던 것 같습니다. 저 또한 IMF시절은 어떻게 버텨냈지만 그 다음 해엔 회사 다니기가 너무 지겨워져 다른 곳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십대를 넘어 서른 언저리, 아직 마흔이 되기 전 우리들의 모습이 담겨있던 마포 시절은 그렇게 힘없는 산문처럼 한 줄 한 줄 흩어져 추억의 책갈피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이제는 PD프로덕션의 기획실장 일을 하고 있는 저는 작년 어느날 마포의 HS애드라는 광고대행사에 회의를 하러 갔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실로 오랜만에 박가네를 갔습니다. 카운터에 앉아서 활짝 웃는 사모님과 여전히 저를 반갑게 맞아주는 사장님을 보고 함께 간 PD들이 “실장님, 여기 단골이었나봐요?라고 물었습니다. 단골이었지. 그것도 아주 찐한 단골이었지. 고기를 시키고 소주도 시켰습니다. 여전히 사장님이 웃는 낯으로 숯불을 피워 들고 오시더군요.


"아유, 이제 숯불 피우는 건 다른 사람 시키시지...동만이 성은 요즘도 와요?"
하하, 안 와."

예나 지금이나 그저 하하 웃기만 하는 사장님을 보니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아니, 그 동안 번 돈은 다 어쩌고 아직도 이러고 계세요. 사모님은 다리를 다치셨는지 카운터 의자에 앉아 다리 위에 덮은 담요를 한 번도 치우지 않으셨습니다. 반가워 하면서도 저한테 가까이 와 인사도 못하고 그냥 카운터에 앉아 박꽃처럼 하얗게 웃기만 하는 사모님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가게에 손님은 여전히 넘쳐나는데, 돈은 여전히 많이 버는 거 같은데. 왜 이 분들은 여전히 이러고 살고 있는 거야. 그 돈 다 누가 쓰는 거야. 아, 씨발.


박가네 사장님, 반가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희들이라고 뭐 다른 게 있나요. 십여 년쯤 후엔 나도 뭔가 다르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그때쯤이면 내 친구나 동료들도 이런 힘겨운 일들 졸업하고 지금보다는 더 여유 있게 살아가고 있겠지...하지만 막상 오랜만에 만났을 때 우리들의 손에도 저마다의 숯불화로들이 하나씩 들려 있는 거죠. 그게 광고를 굽는 숯불이든 IT를 녹이는 숯불이든 뭐 별 차이가 있겠어요. 어디서 일을 하고 있든 여전히 우리의 얼굴은 그 숯불 때문에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는 걸요. 다만 아직은 사장님처럼 그렇게 웃으면서 빨간 숯불을 솜씨있게 집어낼 자신이 없어서요. 그리고 아직은 그 숯불에 우리들 꿈이 다 타버린 건 아니라고 우겨보고 싶어서요. 여름은 아직 다 지나가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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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주년, 그래서 우리는 제주로 갔다>



아내와 만나기 시작한 날이 5월 23일, 내 생일이 5월 24일, 그리고 결혼기념일이 5월 25일. 우리는 이 정도면 ‘기념일 폭풍주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겠냐는 데 서로 동의했다. 그래서 아내는 작년 12월에 소위 ‘취소가 불가능한’제주도행 평일 항공편 티켓을 싼값에 끊은 것이리라.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늘 바쁜척하며 사는 내게 아예 쐐기를 박은 것이다. 물론 나도 회사에 미리 사정 얘기를 했다. 평소에 더 열심히 일 할 테니 해마다 5월말 휴가만큼은 좀 보장을 해다오. 그러나 시집 가는 날 등창 난다고 휴가를 하루 앞둔 날이 하필 경쟁PT 준비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이었다. 결국 휴가 전날 새벽 한시가 넘어야서 회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제주로 가는 비행기 시간이 낮 2시 45분이니 좀 천천히 일어나도 되겠지 생각했지만 막상 일어나 짐 챙기고 밥 먹고 씼고 공항까지 가서 발권하고 검색대 통과하고 하는 시간을 생각하니 도저히 느긋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멀미를 심하게 하는 나는 비행기 시간에 맞춰 멀미약까지 챙겨 먹어야 했다.



1일차


오후 늦게 제주공항에 도착해 버스를 탄 우리는 협재 근처 한림 금능리 ‘추의작은집’이라는 게스트하우스에 가서 체크인을 했다. 추소명 씨라는 젊은 여주인이 운영하는 이 곳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깥채가 다이닝룸으로 꾸며져 따로 식사나 차를 즐기기 좋았다. 우리가 들어올 때는 주인장이 없어 전화로만 얘기를 했는데 샤워를 하고 나와보니 밖에 키가 큰, 머리를 질끈 동여맨 젊은 여자가 얼핏 보이는 것이었다. 옥상으로 올라간 나는 텃밭에서 뭔가 하고 있는 여자분에게 주인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하면서 아래층에도 남자분이 하나 계시던데요, 라고 한다. 그 남자가 바로 접니다, 방금 옥상으로 올라왔어요, 라고 대답하니 그녀가 웃는다.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별 의미 없는 하늘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다시 일층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짐을 부려놓고 아내의 페이스북 친구인 윤수훈 씨에게 연락을 했다. 윤수훈 씨는 뉴질랜드에서 살다가 제주도로 와서 혼자 ‘연미당’이라는 떡볶이집을 하고 있는 솔직담백하고 멋진 여자였다. ‘추의작은집’에서 걸어가면 금방인 연미당에 도착한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마침 수훈 씨 여자 후배 하나 씨도 같이 있길래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수훈 씨가 안내한 곳은 한림읍에 있는 ‘칠돈가’라는 곳이었다. 제주흑돈을 두껍게 썰어 연탄불에 올려 구워주는 집인데 고기 맛이 아주 좋았다. 그들은 제주도에 와서 돈을 더 내고 구태여 프리미엄 돼지고기를 먹을 필요가 없다고 귀뜸한다. 제주도에서 파는 돼지고기는 하나같이 품질이 좋기 때문이란다. 손님이 고기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서 구워주는 시스템이므로 우리가 할 일은 잘 익은 돼지고기를 골라 자신의 접시에 갖다놓고 그때마다 술잔을 들어 입으로 털어넣는 것뿐이었다. 수훈 씨가 뉴질랜드를 마다하고 제주도에 와서 장사를 하게 된 이야기, 서울에 사는 오랜된 남자친구와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는 하나 씨의 이야기, 우리가 5월에 제주여행을 하게 된 이야기 등등 일차에서 이런저런 정보들을 주고받으며 즐거워 하던 우리는 여세를 몰아 이차로 숙소의 다이닝룸에 와서 와인을 더 마셨다. 수훈 씨가 소주를 못 마시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술이 올랐다. 아내는 이제 그만 들어가 자자고 했고 나머지 술꾼들은 편의점에 가서 한 잔 더 하자고 했다. 결국 아내를 뺀 세 명만 편의점으로 가 싸구려 와인 한 병을 더 사서 플라스틱컵에 따라 마셨고 숙소로 들어간 아내는 ‘남편은 젊은 여자들과 술 마시러 가고 늙은 나는 잔다’라는 글을 남겼다.



2일차


아침에 둘 다 일찍 깼다. 매일 아침 일곱시 경이면 아침밥을 차려먹는 습성 때문이었다. 배가 고프지만 아침식사는 아홉 시부터라고 한다. 둘 다 하기가 져서 어쩔 줄을 모른다. 마루에 나가서 테이블에 쌓여 있던 책 중 [안도현의 발견]을 집어들었다. 안도현 시인이 한겨레에 연재하던 원고지 3.7매의 글들을 모은 책이다. 나도 한겨레를 보던 시절 즐겨 읽던 쪽칼럼이다. 책표지 안쪽에는 ‘추소명 씨에게 드립니다’라는 안도현의 친필싸인이 있었다. 책을 뒤적이다가 눈에 익은 시를 발견했다. 이제하 시인이 고등학교 때 써서 학원문학상 장원으로 뽑힌 '청솔 그늘에 앉아'라는 시다. 워낙 유명한 시였고 우리 집에 있는 [시의 고향]이라는 책에서도 읽은 적이 있는 작품이라 더 반가웠다. 천재의 작품이다. 도대체 고등학교 때 처음 쓴 시가 교과서에 실리다니, 뭐 이런 기분나쁜 천재가 다 있단 말인가.


아침에 추의작은집에서 차려준 샌드위치와 요구르트, 커피 등으로 허기를 채우고 오전 내내 금능리 해변을 어슬렁거리다 최상식 씨를 만났다. 상식 씨는 제주도에서 캠핑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친구인데 이번 제주 여행에서도 우리에게 길안내와 캠핑을 도와주기로 했다. 상식 씨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서 아내의 친구 부부인 윤주 씨와 상완 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본격 투어의 시작이다. 


아내가 제일 먼저 정한 곳은 국제학교 근처에 있는 이태리식당 ‘포르체타’였다. 여기 주방장이자 주인장인 김효중 씨는 서울에서도 요리를 꽤 잘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삼 년 전 제주도로 내려와 이태리식당을 여는 모험을 감행했다고 한다. 제주도 현지 음식을 사용하는 것으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는 이 식당에서 리조또와 피자, 파스타 등을 주문했는데 모두 수준급 이상이었다. 특히 리조또의 맛에 아내는 혀를 내둘렀다. 보통 리조또를 시키면 너무 달거나 반죽이 질척질척하게 나오기 쉬운데 포르체타는 밥알이 고슬고슬하고 양념도 과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맛있었다. 요리를 들고 나온 주인장께 물어보니 드물게 제주에서 생산되는 쌀이 있는데 그걸 쓴다고 했다. 제주에 오면 돼지고기, 갈치, 생선회를 무시할 수가 없는데 그걸 피하고 이태리 음식을 하려다 보니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가 택한 길은 자신의 메뉴를 고집하되 약간 싸게, 그리고 양도 약간 많이 내는 것이었다. 음식을 다 내고도 주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식탁 옆 벽난로에 한쪽 팔을 올리고 계속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가는 김효중 씨를 보니 사람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고 요리 좋아하는 그의 인품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아무튼 제주에 와서 뻔한 음식 대신 고급한 식사를 한 끼니 하고 싶다면 주저 않고 추천할 만한 식당이다.


점심을 먹고 영아리오름에 올랐다. 오를 땐 약간 숨이 찼지만 올라가 보니 바람이 엄청 시원하게 불었고 전망도 기가 막혔다. 와인 한 병을 들고 가 바람을 맞으며 마시면 정말 천국일 듯했다. 이타미 준 건축가의 바람미술관, 물미술관, 돌미술관, 두손미술관 등이 있는 ‘비오토피아’도 방문했다. 이 곳은 연예인이나 성공한 사업가들이 별장처럼 쓰는 회원제 타운하우스라 입장부터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비오토피아 레스토랑을 예약한 후 여기서 커피를 한잔씩 마시고 구경을 해야했다. 현대예술은 뭐든 컨셉이 중요하다. 이곳 역시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물론 건축물을 자연과 결합시킨 머리 좋은 건축물들이 그 가치를 드높이는 것 같았다. 근처에 있는 방주교회도 가서 잠깐 구경한 후 월드컵경기장 근처에 있는 ‘수모루국수’에 갔는데 여기가 완전 대박이다. 좁은 가게에서 직접 뽑아 내는 국수도 흘륭하지만 수육은 정말 최고였다. 자신있게 강추한다. 서귀포 올래시장에서 회를 조금 사고 이마트에서 와인을 산 후 하도리 해변으로 이동 후 해변에서 캠핑을 했다.



3일차


아침에 일어났더니 온몸이 쑤신다. 좀은 텐트 안에서 낡은 슬리핑백을 깔고 덮고 자서 그렇기도 하지만 바닥이 좀 고르지 못해 더 잠을 설쳤던 것 같다. 상식 씨가 준비해준 커피와 빵을 먹으며 해변의 정취를 천천히 즐긴 우리는 아침 식사를 위해 이동했다. 그러나 너무 형편없는(?) 식당이라 언급하지 않겠다. 식재료 좋기로 이름난 제주에서 아침부터 고춧가루 듬뿍 들어간 조림을 먹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된다. 물론 그동안 여러 고객에게서 괜찮은 평가를 받은 식당이었겠지만 아침 메뉴를 옥돔조림(분명 중국산 냉동옥돔였을 것이다)으로 선택한 것은 분명 우리의 실수였다.


식사 후 재작년도 갔던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에 다시 갔다. 마침 그날이 김영갑 선생이 돌아가신 지 10주년 되는 날이었다. 김영갑은 제주의 산천에 반한 후 오직 제주의 오름 사진을 찍기 위해 부모형제도 애인도 모두 버리고 제주로 이주한 기인이다. 그리고 필름을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돈을 모으는 일 말고는 아무 것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사진을 찍는 일에만 구도자처럼 매달린 예술인이었다. 루게릭병에 걸려 죽기 전까지 이 갤러리를 만들기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평범한 사람이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자신에게 엄격해지고 고독해져야하는지 알려주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주는 결혼 기념일 선물로 김영갑 선생의 작품이 담긴 액자를 하나 샀다. 물결치는 억새밭을 찍은 사진이다. 3만 원밖에 안 하는 저렴한 사진액자다. 그러나 앞으로도 결혼기념일 선물은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뜻깊은 것을 주는 것을 구입하기로 했다.


아침이 좀 무거웠던지 아무도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해서 점심은 ‘자연속으로’라는 카페 겸 식당으로 가서 토마토 비빔국수와 콩국수를 먹었다. 이 집 역시 구태여 찾아가서 먹을 만한 집은 아니었다. 적당히 코스가 그 지역이고 거르기 애매한 점심식사를 해야 한다면 가보길 바란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용눈이오름, 숲길이 만들어내는 그늘과 햇빛에 비친 나뭇잎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비자림을 거쳐 숙소인 구좌읍 ‘성산가는길’에 갔다. 2년 만에 찾은 성산가는길은 여전히 깨끗하고 정원은 더 아름다워졌다.


저녁은 숙소에서 가까운 세화리의 ‘천하일미’라는 고기집에서 먹었다. 돼지고기 모듬에 오리고기, 전복까지 포함된 세트 메뉴로 고기가 대단히 좋은 집은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평균점은 줄 수 있다. 저녁을 마치고 성식 씨와 헤어진 뒤 숙소로 가서 어제 남은 와인과 소주 한 병을 마시며 늘어지게 수다를 끓여부었다. 우리도 닭살 부부지만 윤주 상완 부부도 장난이 아니다. 결혼한 지 이십 년이 된 커플이지만 여전히 이 사람들은 틈만 나면 ‘물고빨고’를 멈추지 않는다.



4일차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늘어지게 자다가 일어나 보니 온세상에 촉촉하게 비가 오고 있었다. 숙소 사장님께서 준비해 주신 반찬과 아내가 타이머를 맞춰놨던 전기밥솥이 지은 새 밥으로 천천히 아침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순한 쌀밥과 배추된장국에 우리를 금방 행복해졌다. 옆방의 부부는 아침도 안 먹고 더 자겠다고 했다고 한다. 아마 ‘아침 물빨’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가 오는 숙소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사모님이 월정리까지 태워주시겠다고 해서 염치불구하고 두 부부가 그 차를 타고 바닷가를 달렸다. 자고 일어나면 땅값이 오르고 있다는 제주에서도 요즘 가장 핫한 곳 중 하나가 월정리라고 했다. 우리는 이 년 사이 몰라보게 번화한 월정리 해변을 조금 구경하고 이 동네 기인께서 운영한다는 ‘빌레못카페’에서 차도 한 잔 마셨다. 주인은 서울로 놀러 갔다는데도 3층에 있는 카페 문은 열려 있었고 사모님이 전화를 해보니 그냥 올라와서 차 마시고 놀다 가도 된다고 허락을 했다고 한다. 주인이 수작업으로 제작했다는 음악 CD까지 얻은 뒤 시간이 남은 친구 부부는 그 주변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고 우리는 사모님과 작별한 뒤 시외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공항 오는 길엔 제주시내 제일교사거리에서 내려 사거리에 있는 ‘맛짱김밥집’에 들어가 급한대로 김밥을 먹었다. 간판에 ‘1200원 김밥의 위용’이라고 써있었던가. 김밥이 무척 맛있었다. 배가 고파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김밥집인데 의외로 김밥 맛이 아주 좋았다. 내용물보다 밥의 간이 아주 잘 맞아 기분이 좋았다. 심지어 김밥이 한줄에 1200원. 택시기사분 말씀이 ‘찾아와서 먹는 집’이란다. 운이 좋았다.



결론


5월에 두 사람만의 ‘애니버서리 주간’ 휴가를 내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중요한 일은 중요하게 여기고, 행복을 누릴 수 있을 때 그것을 추구하는 것.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년엔 일본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다만 이번 여행처럼 여러 곳을 돌아다니지는 얺을 것 같다. 우리 둘은 평상시도 그렇지만 여행지에서는 특히 더 게으른 커플이니까.




(* 이 글은 아내 윤혜자가 공항에서 핸드폰으로 틈틈히 메모한 것을 받아 남편 편성준이 정리한 글입니다. 아래에 저희들이 다녔던 맛집과 숙소 중 추천할 만한 곳을 몇 군데 적어놓았으니 참고하시길)

_추천 맛집 : 월드컵공원 근처 수모루국수 / 한림 칠돈가 / 이태리식당 ‘포르체타’
_추천 명소 ;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 영아리오름 / 비오토피아
_추천숙소 : 성산가는길(제주시 구좌읍 상도리657 010-5549-9908) / 추의작은집(010-8878-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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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32&aid=0002416141&sid1=001







요즘 가장 핫한 전시는 대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라이언 맥긴리(Ryan McGinley)의 사진전일 것이다. 라이언 맥긴리는 약관의 나이에 ‘똑딱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천재다. 그는 사진을 찍기 전에 자신의 모델들과 수많은 얘기를 나누고 같이 술 마시고 여행하고 놀고  하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사진 컨셉을 설계한다. 이미 친구가 되어 싫컷 놀다 진력이 날 정도로 서로에게 완전한 믿음이 생겼을 때 모델들은 비로소 옷을 활활 벗어던지고 라이언의 카메라 앞에 선다. 라이언은 유명한 스타이거나 엔터테이너이거나 현재 활동 중인 젊은 예술가들인 그들을 마음껏 찍음으로써 사진가로서의 명성을 더욱 높여 간다. 



오늘 신문에서 서동진 교수가 쓴 문화비평을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사진전을 보고나면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뜨리는 관객들이 꽤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내 처제 금모래 양(아내의 사촌동생)도 아내와 같이 가서 이 사진들을 보고 나오며 눈물을 흘렸다고 들었다. 그만큼 울림이 큰 것이다. 


그런데 “‘속았다’라고 생각하며 바라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서동진 교수는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들이 불편하고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아니, 그는 팝스타 뺨치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스타 포토그래퍼의 ‘스타성’ 강한 사진에 대책없이 열광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유행한 초상 사진들은 지치고 망가진 젊음의 초상을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마치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한 점의 얼룩도 없는 젊음을 그리는 사진들이 눈앞에 도착했다.

내가 ‘속았다’라고 생각하며 바라보는 사진들을 젊은이들은 선망과 감격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그 사진에서 본 것이 과연 젊음이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서동진 교수는 라이언이 설계해 낸 청춘의 눈부신 자유들은 실제가 아니라 ‘가짜’ 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의 연장선에서 틈만 나면 청춘을 소비하라고 외치는 자본주의는 결국 격정, 저항, 모험, 떠돎, 창의성 등 진짜 청춘이 누려야 할 자유는 주지 않고 ‘그래도 이 세계는 니가 선택할 수 있는 거야’라는 환상만 심어준다고 비판한다. 


서동진 교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라이언과 그의 친구들이 창조해낸 세계는 이상향이다. 마치 60년대 히피들이 꿈꾸었던 세계처럼 거침없고 걱정없고 순수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렇다고 정말 우리 젊은이들이 라이언의 사진에 열광하면 안 되는 걸까? 이게 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선망’이나 ‘미지의 세계로의 도피’이기만 한 걸까? 


그렇게 우리의 젊은이들을 일반화내지는 하향편준화시켜 버리는 것은 너무 씁쓸하고 쓸쓸한 일인 것 같다. 아무리 우리가 “지난 반세기를 통틀어 우리는 최악의 시절을 살아야 할 청년세대를 가지게 되었다”지만, 그저 잠깐 이렇게 대책없이 자유롭고 영악한 기획력 앞에서 대책없이 감탄 한 번 해보는 것도 어느덧 우리에겐 그토록 사치가 되었단 말인가. 나야말로 괜히 신문을 읽는 사치를 부렸다. 그 시간에 일이나 할 걸. 휴일날 회사에 나와서 밤늦도록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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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스포츠 경기를 잘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프로야구도 프로축구도 잘 모릅니다. 그저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가 되면 “우리나라, 이겨라!” 하고 반짝 응원하는 정도지요. 그런데 요 며칠 제 눈길을 끄는 스포츠 기사가 있었습니다. 포항 스틸러스 이야기입니다. 황새 황선홍 감독이 수장인 ‘토종군단’ 포항 스틸러스. 이 구단은 외국인 ‘용병’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 포항 스틸러스가 어제 경기 종료 30여 초를 남기고 기적적인 결승골을 넣어 K리그 우승을 차지했다네요.(축구팬들은 이게 무슨 ‘축구바보 씨락까먹는소리냐’ 하시겠지만)


지난주에 신문에서 읽은, 결승전을 앞둔 홍 감독의 얘기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축구가 뭐 별거냐. 재밌게 한 번 놀아보자.”라고 선수들을 격려한다네요. 이른바 동심 축구죠. 그가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성적을 올리려면 우선 선수들의 몸과 마음이 가벼워야 한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어제 우승을 하고 난 뒤 한 인터뷰에서도 그 컨셉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네요. 다른 13개 팀에는 모두 외국인 선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선수가 골을 못 넣으면 국내 선수들은 “용병 맞아? 그 정도는 넣어야지.”라고 불평하기 일쑤랍니다. 그런데 황선홍 감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선수들은 동료가 골을 못 넣어도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패스를 하지 못한 자신들을 되돌아보면서 미안해합니다” 



참으로 부러운 사람들이고 부러운 구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게 바로 꿈의 직장이지요. 지금부터 제가 열심히 체력을 기르고 축구 연습을 미친 듯이 해서 포항 스틸러스 선수로 입단만 할 수 있다면....음. 그건 제가 10년 연속 매주 로또 1등에 담첨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겠군요. 뭐, 부러운 김에 헛소리 한 번 해보는 거죠. 죄송해요.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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