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떤 평론가가 작가 이병주를 평하면서 그가 일제시대와 815해방, 625사변, 419혁명, 516쿠데타 등등 파란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온 세대라 그만큼 할 이야기도 많은 작가라고 쓴 걸 읽은 기억이 난다. 작가에게 할 얘기가 많다는 것은 일단 축복일 것이나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몸에 저장하기 위해 그가 살아내야 했던 힘겹고 유난한 세월 또한 그에겐 축복이었을까. 


김이정의 소설 [유령의 시간]을 읽으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이 소설은 작가의 아버지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에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할 정도로 똑똑하던 이섭은 독립운동을 하던 실천적 지식인인 숙부의 영향으로 인해 사회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한때 '이마가 아름다운 여인' 진을 만나 아이 셋을 둔 행복한 가장이었으나 자신이 수배되어 도망 다니는 동안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남과 북으로 갈린 생이별을 하게 된다. 실의에 젖어 살던 이섭에게 미자라는 여자가 왔다. 그녀 또한 전쟁이 터지던 날 폭발사고로 남편을 잃은 불운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네 아이를 더 낳게 된다. 작가의 분신인 ‘지형’은 그들의 첫째 딸인 것이다. 

제주도에서 말을 키우기도 하고 서해안에 와서 새우를 키우기도 하던 이섭. 사람들은 신수가 번듯하고 배운티도 많이 나는 이섭이 왜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못하고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사업을 하며 전국을 떠돌아야 하는지 궁금해 하지만 이섭은 그저 술잔을 기울이며 쓰게 웃을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한 번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힌 사람은 취직을 하기도 어디 한 군데 정착하며 살기도 힘든 것은 물론 오촌 친척의 해외 지사 발령까지 불가능하게 만드는 ‘연좌제’의 시절이었던 것이다.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제주도 말 목장도 해안의 새우 양식장도 결국 예전 장인의 도움 없이는 차릴 수 없었던 것에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았던 이섭. 그는 새로운 가족들과 생활을 꾸려가면서도 예전 아내와 아이들을 잊지 못한다.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자칫 무겁고 답답하기만 한 내용일 수도 있는 이야기는 김이정의 물 흐르듯 유려한 필력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작가의 글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낄 만한 문장들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건너 온 이모 윤과 그녀의 딸 미희를 지형이 처음 만날 때의 느낌을 간단하게 묘사한 이런 글을 보라. 

“서울 사람들은 전부 얼굴이 하얗디야. 우리 언니가 서울 갔다 왔는디 거기 사람들은 수돗물을 먹어서 얼굴이 다 그렇게 하얀 거랴.” 
  지난봄, 숙자가 자랑처럼 한 말이었다. 숙자의 언니가 방직 공장에 취직하러 서울에 다녀 온 직후였다. 
  일본은 서울보다 수돗물이 더 잘 나오는지, 그들은 유난히 희었다. 몸 전체에 석회라도 발라 놓은 것 같았다. 미희는 밑단에 흰 수술이 달린 큰 꽃무늬 반팔 상의와 곧은 다리가 허벅지까지 드러나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신고 있는 흰 에나멜 구두가 내리꽂히는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작가는 소설에서처럼 실제로 어느 날 아버지가 자기 형제들을 불러 앉혀놓고 이제부터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고 알리며 ‘유령의 시간’이라는 제목까지 그때 정해 두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김이정은 아버지가 시작한 글을 40년 만에 완성하게 된 셈이고 어차피 그 일은 오빠 대신 소설가가 된 자신의 몫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소설의 초고를 쓰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절명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였다고 한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도서관에 나가 글을 쓰는 것 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그는 이 소설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이 글이 그에게 구명보트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구에게나 살면서 꼭 해야 할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게 김이정의 개인사처럼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의 질곡과 만나는 지점에 있을 경우에는 많은 독자들에게 더욱 묵직한 울림이 되는 것이다. 최순실과 박근혜의 국정 농단 등으로 모든 의욕이 사라지는 시기에 허무를 견디는 심정으로 출퇴근 시간마다 전철 안에서 악착 같이 이 책을 읽었다. 책 뒷표지에 실린 소설가 김미월의 글 일부가 내 소감과 거의 똑같기에 이 글의 결론을 대신해 여기에 옮겨둔다.

모든 훌륭한 소설이 그러하듯이 [유령의 시간]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세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마침내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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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연애하는 여자 이야기 - 성수선의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

 


아침에 일어나 무슨 책을 읽을까 서가에서 잠깐 망설이다가 성수선의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를 집어 들었다. 반쯤 읽다가 잠깐 ‘급한’ 다른 책을 본다고 덮어 그대로 책꽂이에 꽂아놨던 책이었다. (그래도 ‘요즘 읽는 책’ 코너에 꽂았다)

 

성수선은 직장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열혈 독서가다. 그리고 작가다. 나와는 십여 년 전 온라인을 통해서 인연을 맺고 서로 안부를 전하는 친구 사이이며 이젠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페친’이 되었다. 얼마 전 그녀가 ‘북포럼’에 저자로 출연했을 땐 직접 방청객으로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 비로소 얼굴을 마주하고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사실 오늘은 다른 책을 읽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이 책부터 집어 들게 되었다. 아니, 잠깐 꺼내 무심코 책장을 넘겼는데 성석제의 [순정]을 다룬 챕터가 눈에 띄는 바람에 계속 읽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아, 이 작가도 나처럼 [순정]을 가끔 읽는구나. 지난번에 읽을 땐 그 맛이 또 조금 다르던데…하면서.


[밑줄 긋는 여자의 토닥토닥 에세이 -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는 그녀가 쓴 두 번째 독서 에세이다. 책 안에는 일반 직장인처럼 열심히 일을 하다가 퇴근 후면 확 달라지는 그녀의 일상이 들어있다. 그녀는 도대체 저녁마다 혼자 사는 오피스텔로 돌아가 뭘 할까?


책을 읽는다.

 

혼자인 그녀는 오피스텔에 들어가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예전에 소설가 이병주가 [행복어사전]이라는 책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지금 집에서 톨스토이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병주가 기다리고 있다”라고 한 것처럼 그녀는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 가서 김영하를 만나고 장정일을 만난다. 레이먼드 카바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소설가 제임스 쉘터나 김승옥, 그리고 시인 류근을 만나 심야식당의 손님들처럼 한바탕 영혼의 술판을 벌인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녀의 문체는 정직하다. 사실은 너무 바르고 정직해서 조금 더 풀어졌으면, 하고 아쉬워할 때도 있다. 소위 ‘범생이’의 느낌이 나는 것이다. 그건 대기업에 다니면서 늘 열심히 사는 그녀의 프로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가 저녁 8시면 문을 닫고 자기들끼리 노는 오피스텔 1층 라면집 아줌마 아저씨들을 부러워한다. 이건 이율배반이다. 마치 자기 별명을 ‘날건달’이라 지었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날건달은커녕 동기들 중에서도 가장 착실하게 광고회사 본부장님으로 잘 살고 있는 내 친구 류 모 씨처럼. 

 

늦게까지 하면 훨씬 높은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면집은 저녁 8시가 되면 어김없이 영업을 종료했다.


며칠 전 팟캐스트로 ‘창비 라디오 책다방’을 듣다가 기생충학자 서민 교수가 “알라딘서재 시절 알던 분 중에요, 성수선 씨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다음부터 저를 멀리하고…”라고 눙을 치는 바람에 한참 웃다가 성수선 씨에게 일러바친 적이 있다. 물론 성수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책을 좋아하는 만큼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한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 ‘피곤하니까 한 잔 한다’는 말은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말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말이다”라는 문장을 쓸 수 있는 작가라면 얼마나 훌륭한 술친구인지는 말 안 해도 다 알지 않겠는가. 마침 어제 페이스북에 [밑줄 긋는 여자]가 8쇄를 찍었다는 그녀의 자랑글이 올라왔다. 생각난 김에 다음 주쯤 술 한 잔 사달라고 졸라봐야겠다.

 

 

 

 






(* 예전에 제가 ‘음주일기’를 한창 쓰며 빈둥거리던 시절에 써놨던 [밑줄 긋는 여자] 독서일기도 있길래 찾아서 함께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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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가면 좋은 점. 첫째, 공짜로 보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 둘째, 후덥지근한 길거리와 달리 냉방이 잘 돼 있어서 시원하다. 셋째, 누군가 전화를 해서 “지금 어디야?”라고 물으면 “응, 지금 서점에 있어.”라고 고상한 척 폼 잡으며 대답할 수 있다…

 

요즘은 서점 나들이에 재미를 붙여서 오후엔 대개 고속터미널에 있는 영풍문고에 가서 논다. 집에 있으면 자꾸 TV를 틀거나 멍하니 쓸데 없는 짓거리만 하다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요즘 서점에 가서 읽은 책들은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 그리고 성수선의 [밑줄 긋는 여자] 등이었다.

 

나는 성수선이란 작가를 ‘수선 님’이라 부른다. 몇 년 전 한겨레에 소개된 인물 기사를 보고 책꽂이 사이에서 웃고 있는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그녀의 홈피까지 찾아갔었는데, 거기에 있는 수 많은 독서일기와 에세이들을 읽느라 자주 들락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 방명록에 가서 ‘독서일기를 쓰는 분께 음주일기를 쓰는 인간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긴 뒤 친하지는 않지만 간간히 온라인으로 안부를 전하는 사이가 되었다.

 

 

[밑줄 긋는 여자]는 수선 님이 [나는 오늘도 유럽 출장 간다]에 이어 내놓은 두 번째 책이다. 이번 책은 굳이 구분을 하자면 독서 에세이에 속하겠지만 대개의 작가나 학자들처럼 심각하게 폼 잡고 서평을 쓰는 에세이가 아니라 자신의 일과 생활, 생각들을 풀어놓으면서 거기에 자연스럽게 책들이 스며드는 미셀러니에 가깝다.

 

이런 글쓰기의 현실감은 현재 해외영업 전선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저자의 남다른 이력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현재 삼성정밀화학 해외영업부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사흘이 멀다 하고 해외 영업을 다니는 한편 대학원에서 MBA과정까지 공부하는 저자가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쓴 글들이기에 각 편마다 에피소드들도 풍부하고 현실감이 넘친다.

 

 

도쿄에 출장을 가서는 [돈까스의 탄생]이란 책을 떠올리고 독일에서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원서를 찾아 다니는 도중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하는 식이다. 일본 출장을 가서인가 회사 상사에게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 [장미 도둑]을 선물하고 ‘너는 어쩌면 하는 짓도 이렇게 이쁘니?’라는 칭찬을 들었다는 에피소드는 참 재치가 있다. 그 상사의 방에는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가 열 권도 넘게 있더라는 것이다. 다들 성의없이 달착지근한 자기계발서 따위를 반복해서 선물할 때 삶의 애환과 아이러니가 배어있는 아사다 지로의 소설책을 선물한 부하 직원이 있었으니 어찌 이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살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과 그에 따른 상념마다 공지영, 박민규, 김영하 등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하나씩 하나씩 거론된다. 콘돔은 물론 꽃다발까지 자판기에서 판매되는 외국 출장지에서는 대학 신입생 시절 장미꽃다발을 신문지에 싸서 선물했던 동기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백만 번 산 고양이]를 읽으면서는 늘 자신의 곁에 있어줄 것이라 믿었던 이성 친구의 결혼 소식에 받은 충격을 얘기하며 평생 자기 짝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수선 님의 장점이자 단점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심플한 마인드다. 책을 내는 저자라면 좀 현학적으로 굴 수도 있고 쿨한 척 할 수도 있는데, 이 여자는 글 곳곳에 급하고 솔직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신은 외로움을 감추지 못하고 질질 흘리고 다닌다면서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정호승의 시 [수선화에게]를 권하고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엉엉 울어버렸던 사실까지 거침없이 고백한다. [백지연의 SBS전망대]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책 읽어주는 여자’라는 패널로 고정출연을 했던 추억을 애기할 때도 앞으로 그런 프로그램이나 TV 출연까지 기회만 된다면 또 하고 싶다는 소망을 숨기지 않는다. 어쩌면 순진하게까지 느껴지는 이러한 면모가 작가로서의 ‘가오’는 덜 서게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참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덕분에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친한 친구와 술집에서 만나 대화를 하는 착각을 하게 된다. 힘들고 지친 일상들을 얘기하며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에 공감하고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를 읽은 사람들 중 일요일 저녁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다가올 월요일 생각에 우울해지는 친구가 또 하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동병상련의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우리는 모두 바쁘게 산다(나는 전혀 안 그렇지만).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 그렇다. 수선 님도 바쁘게 사는 게 몸에 배어서 그런지 늘 바쁘고 늘 뭔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다. 첫 책을 출간하고 나서 휴가로 괌에 갔을 때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리라’ 다짐했건만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거 같은 강박에’ 스노쿨링 강의에 하루 세 번씩 참가했다는 글을 읽고 깔깔 웃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가하게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들은 책상에 처박혀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서 저자가 딸에게 건낸 ‘작가가 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고 했다. 사람들과 부딪히고 세상살이의 기쁨과 슬픔, 스트레스를 경험하지 않고는 인생의 비밀도 제대로 풀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앞으로도 열심히 회사를 다니면서 또 이런 책들을 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녀에게서 자극을 받고 자기계발서 대신 소설책을 집어들 것이고 일반인들도 글쓰기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서 ‘코카콜라 회장의 신년사’ 같은 파급력 높은 글을 쓰게 될 것 아닌가.

 

 

지금 서점에 가면 카를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보다 성수선의 [밑줄 긋는 여자]를 찾는 게 더 쉬울 것이다. 이번 휴가를 떠나기 전에 들었는데 이미 2쇄를 찍었다고 한다. 그녀의 책을 펼치면 목차 전 페이지에 ‘No Rain, No Rainbow”라는 글이 써 있다.  힘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꾸만 뭔가 저지르는 여자, 그렇지만 우리의 모습과 참으로 비슷한 저자. 그녀의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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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일기 2

독서일기 2012. 5. 14. 15:26

 

핑계 같지만, 요즘은 도대체가 소설책 읽을 시간이 안 나네요. 그래도 어딘가 이동할 때마다 조금씩 읽긴 했습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던 안중근 의사가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규가 상주에서 입시공부를 하며 도꼬노미 야스꼬라는 여관집 딸과 기묘한 만남을 가지게 되는 건 지난번에 말했었죠. 수학문제를 가르쳐준 수재 규에게 홀딱 반한 야스꼬는 그 다음에 또 규가 있는 곳으로 수학문제를 들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날 폭풍우가 치고 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어서…ㅋㅋㅋ 아아, (이거 무슨 도미시마 다께오의 포르노소설 같은 설정이지만) 둘은 결국 같이 잤습니다만,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싱겁기 짝이 없는 일이죠.


새학기가 되어 학교에서는 학생복을 카키색으로 바꿉니다. 각반도 상시 착용하게 하구요. 이른바 ‘전시체제’로 돌입하는 것이죠. 학생들은 카키색 학생복을 입기 싫다 하여 수업 거부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전학을 가기도 합니다만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습니다. 학우 중 주영중과 곽병한은 이 문제로 서로 심하게 싸우기도 합니다. 작가는 명급장인 김상태를 등장시켜 이 사건을 마무리하지만 나중에 주영중이 뭔가 동티를 남긴다는 암시로 “주영중은 무서운 사나이”라고 기록해 놓습니다.

한편 권위를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자 괴짜 선생인 쿠사마는 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그는 2차대전 발발을 거론하며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가 승리자이니 모두 살아서 10년 후를 기약하자”라고 말하고 학교를 떠납니다.

규는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진학할 생각을 하죠. 그러나 아버지 심부름으로 찾아간 종갓집 형에게서 네 형편에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말라는 독한 얘기와 행패를 경험하고 굉장한 충격을 받습니다.


여기서 1940년 2월 11일에 있었던 ‘창씨개명’ 사건이 비중있게 다뤄집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진학의 길도 막혀버릴 상황이 되었습니다. 작가는 돈 많은 ‘딜렛탕트’ 하영근의 입을 빌어 당시 창씨개명에 앞장 섰던 작가 이광수를 심하게 비난합니다.(189페이지) 글은 달착지근하게 잘 쓰지만 아무런 사상도 진정성도 갖지 못한 모리배 같은 자라는 거죠.

우여곡절 끝에 친구 윤근필과 함께 일본 경도에 있는 ‘삼고’에 입학한 규는 경도 안에 있는 묘심사라는 고요한 절에 자주 가 책을 읽다가 세스꼬라는 여학생과 친하게 됩니다. 조선인이지만 수재들만 다닌다는 삼고 학생인 규에게 세스꼬가 홀딱 반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 후 세스꼬의 집에 찾아갔던 규는 사춘기 소년이면 당연히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욕정에 놀라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엔 여자가 더 대담해지는 법. 결국 둘은 대판에 있는 여관에 들어가 어렵게 어렵게 첫경험을 치르게 됩니다. 규는 허망한 첫경험 이후 자신이 비로소 욕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느낍니다.

대판에 가서 세스꼬와 자던 날, 규는 우연히 길에서 국민학교 동창인 고완석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무작정 일본에 와서 고학을 하며 성실하게 생활을 하다가 어느 일본인의 눈에 들어 그 집의 양자로까지 들어가게 되면서도 민족적 자존감 만은 잃지 않는 꿋꿋한 친구를 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한편 규가 삼고로 진학을 하는 동안 창씨개명 문제로 퇴학을 당한 천재 박태영은 경도로 규를 찾아와 <죄와벌>의 라스꼴리니코프를 비난하다가 자신은 앞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 몸 바칠 결심을 털어놓습니다.

“나는 앞으로 술도 담배도 안 할끼다. 어느 시기까진.”
아까부터 넌 어느 시기, 어느 시기 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 시기란 뭣고?”
“우리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그리고 쿠사마 선생이 얘기한 10년 후를 거론하며 둘 다 27세, 28세가 되었을 때를 상상하며 독립투사와 대학자로서의 기초작업을 하자고 약속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은 검정고시를 준비하겠다는 말도 합니다.

박태영은 일본에서 우유배달을 하며 검정고시 공부를 틈틈히 합니다. 그러나 천재는 어디 가서도 표가 나는 법. 태영은 기어코 일을 내고야 맙니다. 전검시험에서 1등 합격을 하는 바람에 신문기자가 찾아오고 어쩌구…결국 전국적인 스타가 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팬레터를 받게 된 태영은 특히 김숙자라는 교포 여학생의 편지에 감복해 그녀를 찾아가게 되고 둘은 졸지에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역시 청춘남녀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른 풀처럼 불이 잘 붙습니다.

우유배달소엔 태영 말고도 원서를 읽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다리를 저는 20대 후반의 과묵한   청년 무나까와였습니다.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이층에서 덜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무나까와는 태영에게 독일어를 배울 것을 권하고 곧 그의 독일어 개인교사가 됩니다...


분명 전에 다 읽은 내용들인데 어쩌면 이렇게 새 책 같은지 참 신기하기만 합니다. 지금 2권 71페이지까지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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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일기 1

독서일기 2012. 5. 4. 11:15

 

 

이 소설은 1933년 추석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박경리의 [토지]가 1897년 추석날 시작하던 것과 비슷하지요? 첫 장면은 제사를 지낸 규와 태가 다음날 지리산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십 리라고 했던 무덤까지의 거리는 그 두 배가 넘는 길이었다는 게 밝혀지죠. 그건 할머니의 양반이수’라는 뻥이었다고 같이 가던 중부가 알려줍니다. 양반이수란 양반들이 짐꾼들 삯을 떼어먹으려고 거리를 줄여 말하던 수작을 일컫는 말이었죠. 규와 태는 결국 지리산에 있는 할아버지 묘에 참배를 하고 나오다가 제사 지낼 때 펴놨던 병풍과 똑같은 풍경을 목격하고 할아버지가 수십 년 전에 화공을 앞세우고 거기까지 와서 그 풍경을 병풍에 그대로 담게 한 까닭을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규와 같이 산소에 갔던 중부는 몇 년 뒤 가출을 해버립니다. 독립운동 하느라 집안 다 말아먹고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중부를 보다 못한 백부가 마름 자리라도 해보라고 말한 게 화근이 된 겁니다. 행방이 묘연한 중부는 지리산에 있는 ‘서동지’라는 사람을 찾아간 게 아닌가 하는 아련한 소문만 남깁니다.

 

규는 공부도 잘 하고 마음가짐도 바른 청년으로 자랍니다. 그리고 박태영이라는 엄청난 천재와 친구가 됩니다. 고리끼의 소설을 탐독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불려간 사건을 계기로 박태영과 더 친해진 규는 돈 많은 지식인이자 자신을 ‘딜렛탕트’라고 자조하는 인물 하영근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중국의 노신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알게 되죠. 그리고 하영근의 딸 윤희에게 희미한 연정도 품게 됩니다. 일본인이지만 존경할 만한 인물인 하라다 교장과 영어선생인 쿠사마도 만나게 되는군요. 지금 고등학교 진학 공부를 위해 상주에 왔다가 여관집 딸인 야스꼬의 수학문제를 풀어주는 바람에 이 여자와도 나중에 뭔가 이루어질 분위기를 풍깁니다…지금 134페이지까지 읽었습니다.

 


어렸을 적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가슴이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새삼 기억납니다. 중편소설인데도 스케일이 크고 꿈을 꾸는듯한 낭만적인 필치가 어지간히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이게 데뷔 소설이라니요. 그리고 그 뒤 고등학교 2학년 때 [행복어사전]을 읽으면서 얼마나 즐거웠던지. 지금 다시 읽으면 좀 구시대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이병주를 읽으니, 옛 친구를 다시 만난 느낌이랄까.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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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종수 2013.08.31 2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능을 마치고 기나긴 여유로움을 즐기던 때 어머니께서 처녀시절 읽으셨던 비닐포장의 지리산 7권을 읽는 이틀 사이 새로운 경이로움을 느꼈지요 ㅎㅎ
    문득 오랫만에 책을 다시 접하는 중 '딜렛탕트'란 단어가 궁금하여 검색하다가 블러그가 눈에 띄어 잠시 다녀갑니다^^

 

제겐 이상한 버릇이 있습니다. 뭔가 일을 시작하면 좀처럼 다른 걸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하루 종일 일만 하는 워커홀릭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일을 하는 시간은 아주 짧습니다. 아이디어를 내는 직업일수록 더 그렇지요. 그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어떡하지”,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데…”하고 근심 걱정으로 보내는 시간이 전부입니다. 이건 일의 성과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냥 제가 새가슴이라 그런 겁니다.

일을 회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술을 마시는 겁니다.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취해서 몸도 마음도 늘어지기 때문에 뭐든 포기가 빠르죠.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는 데’는 술만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일이 싫다고 늘 술만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보면 일도 지지부진하면서 다른 것도 전혀 즐기지 못하는 오갈 데 없이 한심한 상태가 도래합니다.

이래저래 전 몇 달 간 전혀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영화도 죄다 놓쳐서 [건축학개론], [어벤저스], [은교] 등 못 본 영화가 지천으로 널렸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SNS나 블로그에도 글을 잘 올리지 못합니다. 일도 성에 차게 못하면서 다른 걸 한다는 게 맘에 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컴퓨터 프로그래머인데 프로그램은 별로로 짜면서 취미로 멋진 탁자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저는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럼 넌 목공을 하지 왜 프로그래머를 하고 있는 거야?”

 

마음에 공황 상태를 메우기 위해서는 ‘잘 읽히는 책’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지리산]은 쉬운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병주라는 한 시대의 천재가 목숨을 걸고 쓴 대하장편소설입니다. 요즘처럼 인문학과 실용서만 주로 읽던 제겐 [지리산]처럼 유장하고 압도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는 소설이 필요했습니다. 더구나 이 책은 전에 제가 어렸을 때 줄까지 쳐가며 읽었던 소설인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습니다.

새로운 문물이 쏟아지던 격동의 세월을 거스르며 살다 죽어간 한반도의 젊은이들의 이야기인 이 소설은 TV드라마로도 각색되어 방영된 적도 있지요. 생각해보면 [태백산맥]이나 [토지]에 비해 너무 일찍 완간된 불행한 소설이기도 합니다. [관부연락선]이랑 이어 읽은 기억이 나서 그것부터 읽을까 하다가 일단 책장에서 눈에 띄길래 이 책부터 집어들었습니다. 앞으로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고 티블로그에 독서일기를 연재할 생각입니다. 이미 끝까지 읽은 독자들이 수두룩한데, 이런 식의 독서일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기도 하지만, 쥐가 자라나는 이빨을 시멘트 바닥에 갉아내는 기분으로 그냥 미련하게 한 번 진행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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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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