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광고계 친구들과 신사동에 있는 대창집에서(그러고보니 이 대창집 주인도 카피라이터 출신이다)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원래 술 마시면서 일 얘기는 잘 안 하는 게 우리들의 불문율이었는데 어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창구이에 소맥을 마시면서 광고 얘기를 제법 했다.
“야, 광고엔 정답이 어딨냐. 그저 용기가 필요한 거지."
“그래. 광고도 여자도 다 용기야. 늘 용기 있는 놈이 먼저 먹는 거야...”
다소 거친 표현이고 또 가정이 있는 몸이라 누가 이런 소리를 지껄였는지는 밝힐 수가 없다. 아무튼 뭐든 너무 범생이처럼 접근해서는 빅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건 우리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이미 엄청나게 성공한 선배 광고인이자 [겁나게 중요한 충고]라는 책의 저자인 조지 로이스 할아버지도 수십 년 전부터 똑같은 주장을 해왔다.
조지 로이스(‘루이스’가 아니다)는 ‘빅 아이디어 광고’의 창시자라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이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그림에 그치지 않았다. 좋은 광고를 만들고 싶다는 아트 디렉터들에게는 '카피부터 시작하라’라고 충고하고 실제로 위대한 광고를 만든 아트 디렉터들 중에는 카피까지 직접 쓴 사례가 있음을 강조한다. 즉, 직종과 상관없이 그림으로 생각하든 글로 생각하든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것이 없고 항상 '관습을 깨뜨리는 독창적이고 과감한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한국전쟁에서 돌아와 일주일만에 CBS텔레비전에서 일자리를 구했을 때의 일화(33화 당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라!)는 그런 그의 스타일을 잘 말해준다. 방송국의 까마득한 디자이너 선배에게 보여줄 첫번째 디자인 시안을 들고 갔는데 정작 그 선배는 책상에서 자기 일에 골몰하느라 조지는 쳐다보지도 않더라는 것이다(미국에서도 신참자에 대한 선배들의 무시는 유구한 전통이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선배가 알고 있고 심지어 헛기침을 해도 돌아보지 않는 데 화가 난 조지는 밖에 나가 비서가 보고 있던 두꺼운 사전을 빌려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선배 책상에서 1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가슴 높이에서부터 사전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고 한다. 엄청난 소리에 놀란 선배는 그제서야 연필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들며 “오, 조지. 뭘 도와줄까?”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조지는 그 선배의 아내에게서 축하 전화까지 받았다고 한다. 전설 같은 이야기다.
조지 로이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최악의 슬로건은 “조지, 늘 조심해!”였다고 말한다. 크리에이티브에 있어서 조심스럽다는 것은 똑같거나 평범해지는 지름길이며 결국 그 광고는 묻혀버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가 만든 광고 중 무하마드 알리를 순교자 성 세바스찬처럼 표현한 에스콰이어 표지는 이미 전설이 되었다. 그는 인종차별이나 반전 등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위해서 그의 크리에이티브를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후배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종용한다. 그리고 남들이 안 될 거라고 하는 말에 전혀 신경 쓰지 말라고도 충고한다. 이는 마치 어려운 일 앞에서 “해보기는 했어?”라고 물었다던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도 궤를 같이 하는 말이다.
‘나는 MTV를 원해’라는 캠페인에 주변 사람들이 회의적이었을 때 그는 영국에 있는 믹 재거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MTV를 원해!”를 외치게 만들었고, 억울하게 300년형을 선고받은 허리케인 카터를 구하기 위해서는 밥 딜런을 찾아가 딜런에게 ‘허리케인’이라는 노래를 만들고 내친김에 콘서트까지 열게 했다. 밥 딜런은 이 곡을 가지고 ‘허리케인의 밤’이란 콘서트를 두 번이나 열었는데 한 번은 놀랍게도 감방 안이었고 두 번째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게 “만약에…어떻게 될까?”라는 순진무구한 생각을 도중에 접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간 덕분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책에 담겨 있는 120 개의 충고 내내 잘난척을 삼가지 않는 조지 로이스 할아버지, 하지만 그는 정말 잘난척 할 만하다. 트렌드를 쫒아가는 것은 덫에 빠지는 일이며 ‘안전’은 죽음을 뜻한다고 외치는 그에게서 특히 존경스러운 점은 많은 광고인들에게 "왜 그냥 크리에이터로 남으려고 하느냐, 문화 선동가가 될 수도 있는데!”라고 선동한다는 점이다. 이천 년 전 소크라테스도 젊은이들에게 비슷한 소릴 하다가 독배를 받았지만 현대의 선동가 조지 로이스는 여든 살이 넘은 지금도 팔팔하게 살아서 현역 광고인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를 마구 던지고 있는 것이다.
원제가 'Damn Good Advice'인 이 책은 아내가 출판기획자로 근무하는 세종서적에서 며칠 전 발간된 따끈따끈한 신작인데 난 기획자의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남들보다 먼저 이 책을 접하는 행운을 누렸다. 교정쇄로 받아본 책은 일단 내용이 너무 쉬우면서도 통쾌하고 흥미진진했다. 120 개의 충고들은 짤막짤막한 챕터로 이루어져 있어서 아무 데서나 펴보기도 좋았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 개인적 친분이 있는 카피라이터 정철 선배와 CF감독 백종열 실장님에게 짧은 추천사를 부탁했는데 다행히 두 분 모두 흔쾌히 추천사를 써주셨다. 고마운 분들이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나도 그들과 함께 추천사 한 줄을 뒷표지에 같이 올리게 되었다. 내가 쓴 추천사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나면 동료에겐 추천하지 않은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배운 걸 당장 그 사람들에게 써먹고 싶은 욕망에 먼저 시달리게 될 테니까. - 편성준(카피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