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너무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길래 회의실에 있는 책꽂이에서 아무 책이나 꺼냈습니다. 일과 상관 없는 책을 읽다보면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거든요. 제 손에 잡힌 건 공지영 작가의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라는 산문집이었습니다. 전에도 제목의 의미가 뭔지 궁금해서 한 번 들여다 봤던 책이었습니다. 


그런다가 '창을 내는 이유'라는 소제목이 붙은 챕터에서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한 줄에 나란히 놓인, 거의 똑같은 문장인데 어떤 건 띄어 쓰고 어떤 건 붙여 쓰는 게 아니겠습니까. '재미없고'는 붙이고 '의미 없고'는 띄었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는 겁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맞춤법검사기를 돌려봤더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없다'는 형용사로 띄어 씀이 원칙이다. 그러나 어이없다, 쓸데없다, 아낌없다, 거리낌없다, 가량없다, 가없다, 다름없다, 느닷없다, 끊임없다, 틀림없다, 상관없다, 거침없다, 변함없다, 빠짐없다, 힘없다, 어림없다, 아랑곳없다는 붙여 쓴다


아, 정말 세상 사는 게 쉽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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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의 역작 [쿨하게 생존하라]라는 책에서 제가 특히 좋아했던 부분은 ‘배드뉴스’에 대한 해석입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누구에게나 인생엔 굿뉴스와 배드뉴스가 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곡선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닥치는 굿뉴스와 배드뉴스. 우리는 그놈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요.


지금 저희 집사람에게 배드뉴스가 왔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길에서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뎠는데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그만 새끼발가락뼈가 부러진 것입니다. 다음 날 정형외과에 가서 응급처치로 반깁스를 했고 오는 화요일에는 다시 통깁스를 해야 합니다. 아내는 심란해 합니다. 발은 계속 부어오르고 제대로 걷지도, 씻지도 못합니다. 남편 밥을 차려주는 건 고사하고 당장 살림에 대한 이해력이 느려터진 남편에게 냉장고에 뭐가 어느 칸에 들어있는지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입이 아프고 심신이 지칩니다. 그리고 당장 다음 주부터 회사생활을 어떻게 해야할지도 걱정이 태산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기회에 병가를 내고 한 달간 새로운 시간을 가져볼 것을 권합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아내에겐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모양입니다. 당장 회사에서 한 달간 휴가를 내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고, 설사 휴가를 낼 수 있다 해도 무급휴가를 쓰면 그만큼 비게 되는 생활비도 걱정입니다. 더구나 요즘 회사 내에서 기획 실적이 그리 좋지 않아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 혹시 잘리는 건 아닐까 하는 소심한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난감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번 ‘배드뉴스’를 더 잘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사람 만나고 다니는 게 일인 아내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술을 마실 수 없고 급기야 차를 마시러 나가기도 당장은 어렵습니다. 반면에 그만큼 자신만의 시간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당분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라고. 집에서 혼자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멍때리며 공상에 잠길 수도 있습니다. 밀린 드라마나 TV프로그램을  첫회부터 마스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집으로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될 것입니다(어제만 해도 저희 집으로 두 분이 찾아오셔서 병문안 겸 업무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이유로 회사에서 잘린다고 하면 오히려 지금 잘리는 게 낫습니다.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는 아내의 실력을 판단하기엔 좀 이르다는 생각이 첫 번째 이유이고, 또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지 않고 당장의 성과만으로 결정을 내리는 곳이라면 차라리 지금 관두는 게 낫다는 게 두 번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도대체 회사에선 아무런 소리도 안 했는데 우린 왜 이러는 걸까요).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무수한 ‘배드뉴스’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젊었을 때 정말 좋은 여자와도 어이없는 바보짓을 하는 바람에 헤어져 봤고 회사도 열 번 가까이 그만둬 봤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특유의 뻔뻔함과 성실함으로 위기를 버텨왔습니다. 인복도 많았습니다. 정말 결정적일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나타나 저를 도와주었으니까요. 길은 있습니다. 대책이 안 설 때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낙관론을 불러오면 됩니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리 절망적이거나 가시밭길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내도 저도 [쿨하게 생존하라]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혜자야, 걱정 하지 마. 일단 더 안 다치고 그만 하길 얼마나 다행이야. 그리고 이번 일 때문에 더 좋은 일이, 더 좋은 기회가 반드시 올 거야.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일단 좀 쉬어. 남들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정신 가다듬을 계기가 없다고 ‘차라리 감방에 들어앉아서라도 책을 읽고싶다’고 하는 마당에 이런 기회가 왔으니 오히려 얼마나 좋아. 남편이 좀 더 열심히 일할 테니 생활비 걱정 말고 정당하게 이 기간을 마음가는대로 잘 요리해 봐. 배드뉴스는 똑똑하고 긍정적인 태도 앞에서는 언제라도 굿뉴스로 변하는 거니까. 안 그래?"







https://www.youtube.com/watch?v=h3ETX6Pv2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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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신경숙 표절 사건'에 관해 창비가 언론사에 보내왔다는 글의 전문을 읽었습니다. 


글은 어이없게도 신경숙이 표절한 것으로 알려진 미시마 유키오가 극우 인사이고 할복자살을 한 문제적 작가라는 점부터 거론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신경숙이 쓴  단편 <전설>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뛰어난 작품으로,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의 작가가 쓴 거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직핍한 현장감과 묘사가 뛰어나고 인간의 근원적인 사랑과 전쟁 중에서의 인간 존재의 의미, 인연과 관계의 유전 등을 솜씨있게 다룬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부분 - 


'사실 두 작품의 유사성을 비교하기가 아주 어렵다. 유사한 점이라곤 신혼부부가 등장한다는 정도이다. 또한 선남선녀의 결혼과 신혼 때 벌어질 수 있는, 성애에 눈뜨는 장면 묘사는 일상적인 소재인데다가 작품 전체를 좌우할 독창적인 묘사도 아니다.(문장 자체나 앞뒤 맥락을 고려해 굳이 따진다면 오히려 신경숙 작가의 음악과 결부된 묘사가 더 비교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 또한 인용 장면들은 두 작품 공히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따라서 해당 장면의 몇몇 문장에서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를 근거로 표절 운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표절시비에서 다투게 되는 ‘포괄적 비문헌적 유사성’이나 ‘부분적 문헌적 유사성’을 가지고 따지더라고 표절로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는 것이다'


라는 황당한 단락입니다. 



표절을 한 것은 아니나 굳이 표절을 했다고 치고 따져보더라도 표절작이 원작보다 더 낫더라,라는 정말 어이 없는 자가당착을 드러냅니다(이거 쓴 사람 정말 창비 맞습니까). 그리고 표절 부분이 아주 지엽적인 내용들이라 작품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표절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논리를 피력합니다. 마치 백만 원 있는 사람한테 만 원 꾼 다음에 너 돈 많으니 만 원 정도 없어도 살지? 그러니 난 만 원 안 꾼거다, 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심뽀죠? 아, 어떡하나. 혹시라도 박근혜 대통령이 이걸 아시면 화끈하게 해경 해체할 때처럼 당장 출판사 창비를 해체부터 하려 드실텐데. 어쩌려고 이러셨어요. 



그리고 신경숙 작가님.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당신을 찾는 전화벨이 끝없이 울릴 겁니다. 기차가 몇 시에 떠나는지는 모르지만 부디 놓치지 말고 막차라도 타시기 바랍니다. 한국문학에서 당신이 있던 자리가 어디 풍금이 있던 자리에 비하겠습니까. 그리고 제발 잘 기억해 보십시오.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은 당신이 유일하게 읽었다던 그의 작품 <금각사>와 같은 책에 수록되어 있으니까요. 아무리 인터스텔라만큼 종횡무진 우주공간을 패럴렐로 엮어도 읽지 않고서는 그렇게 비슷하게 못씁니다.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진짜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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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마종기 



목판을 사서 페인트 칠을 하고 벽돌 장씩을 포개어 책장을 꾸몄다. 윗장에는 시집, 중간장에는 전공, 아랫장에는 저널이니 화집을 꽂았다. 책을 뽑을 때마다 책장은 아직 나처럼 흔들거린다. 그러나 책장은 모든 사람의 과거처럼 집안을 채우고 빛낸다.


어느 혼자 놀던 아이가 책장을 밀어 쓰러뜨렸다. 책장은 희망 없이 방에 흩어지고 전쟁의 뒤끝같이 무질서했지만 그것은 이상 흔들리지 않는 가장 안전한 자세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안전하지 않다.


나는 벽돌을 쌓고 책을 꽂아 다시 책장을 만들었다. 아이는 이후에도 쓰러뜨리겠지. 나는 그때마다 번이고 정성껏 쌓을 것이다. 마침내 아이가 흔들리는 아빠를 때까지, 흔들리는 세상을 때까지.





쉽게 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오늘 아침에 신문에 실린 마종기 선생의 시를 읽으며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좋은 글은 누구나 볼 수 있는 현상을 마치 신기한 것 보듯 하는 눈에서 시작하는구나.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구나. 좋은 문장이나 멋진 수식은 죄다 개뿔이었구나.

다른 시선 하나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구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524205929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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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등을 쓴 위대한 소설가지만 동시에 [소설의 기술], [커튼] 등을 쓴 뛰어난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같은 사람이 썼더라도 소설과 에세이는 다르다. 그래서 그가 에세이에서 밝혀놓은 개인적 체험들과 소설 작법, 그리고 사람과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통찰과 유머 등이 소설에서는 과연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읽는 것은 그의 책들을 더욱 즐겁고 고급하게 즐기는 또다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소설이 2차원의 영역이라면 영화는 분명 3차원의 영역일 텐데 그가 쓴 소설은 영화화되면서([프라하의 봄]이라는 멋진 영화를 물론 좋아하지만) 오히려 그  입체감이 사라지고 이미지와 캐릭터만 강렬하게 남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건 아마 아직도 소설이라는 장르만이, 또는 소설가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역설하는 증거가 아닐까. 조지수의 장편 [나스타샤]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누군가가 잘못 영화화 하기라도 한다면 캐나다의 광활한 풍광과 조지와 나스타샤의 사랑 이야기만 덩그라니 남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나스타샤]를 쓴 소설가 조지수는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조중걸의 필명이다. 서양철학사와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학자이며 이미 우리집 책꽂이에도 여러 권의 저서가 있는 일급 에세이스트지만 작년에 아내의 권유로 사놓았던 이 소설책은 분량이 너무 많고 또 앞부분의 문장들이 좀 딱딱해 보여 몇 페이지 읽다가 덮은 뒤로 그동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5월 초 회사 일이 좀 한가해진 틈에 우연히 펼치는 바람에 그야말로 며칠동안 ‘푹 빠져’ 읽게 되었다. 


이야기는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니다가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현재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는 33세쯤의 조지라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캐나다 웰드릭이라는 도시에서 호의적인 친구들과 어울려 생활하고 있는 이 남자는 강의 준비와 저술 활동 이외에는 주로 플라잉 낚시를 즐기는 데 거의 모든 돈과 시간을 쓰는 바람 같은 자유인이다. 낚시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행위이자 생활이다. 왜냐하면 플라잉 낚시는 그저 물고기를 낚는 것 이상으로 그들의 삶에 의미를 주고 저마다에게 영감을 주는 철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낚시에 대한 묘사와 보트, 그들의 커티지, 심지어 자비를 들여 낚시터에 건설하는 작은 수력발전소 등에 대한 글들을 반복적으로 읽다보면 누구나 당장 캐나다로 달려가 광활한 호수변에 서고싶은 충동이 일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면 어떤 시퀀스의 연속으로 이해하기 쉽다. 우연히 주인공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고 갈등구조와 위기를 겪다가 결국 결말로 치닿게 되는 담백하고 전형적인 플롯 말이다. 그러나 소설가의 성향과 역량에 따라 그 구조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다. 철학자 김용규가 쓴 [알도와 떠도는 사원]을 보라. 이 소설은 과학자인 아빠를 찾아 나서는 알도의 모험담임과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철학적 개념과 심리학적 고찰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놓은 지식의 라이브러리다. 조지수의 소설 또한 자칫 줄거리만 놓고 보면 꽤 단순한 외국 체류 경험담이나 좀 특이한 사랑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심지어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나스타샤’라는 여인의 등장도 무려 200페이지가 넘어서야 시작된다. 그러나 그 큰 이야기 기둥 사이로 펼쳐지는 작가의 눈부신 철학적 사유와 통찰력 있는 담론들은 이 소설을 아주 풍부하고도 탄탄한 교양서이자 지적 모험담으로 만들어 준다. 


나는 특히 저자의 간결하고 단호한 문체와 정치적 올바름에 반하게 되었다. 여기서 얘기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은 진보나 보수 또는 어떤 특정 정당을 지지하느냐 하는 따위의 좁은 개념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인류학적 관점으로 모든 현상을 공평하게 보려 노력하면서도 사안별로 그때마다 분명하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낚시터로 향하는 고속도로 중간 매번 들르는 케빈의 커피숍에서 나스타샤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여인을 만난 조지는 설명할 수 없는 측인지심에 이끌려 그녀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오게 되고 곧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나스타샤는 분리독립주의자인 남편을 돕다가 러시아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과 폭력에 시달린 뒤 빈털터리로 탈출한 여인이었는데 선량한 커피숍 주인 케빈이 점원으로 채용했던 것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가만히 서있기조차 힘들었던 그녀는 조지의 도움으로 웰드릭 주민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견뎌내며 차츰 건강을 되찾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고국 어딘가에 살아있을지 죽었을지조차 모르는 남편 보리스와 아들 아니카가 있다. 



30대 초반의 토론토 대학교수, 어린 시절의 유학, 그리고 낚시와 강의, 저술활동에 이르기까지 이 이야기는 작가의 자전적 스토리임이 거의 확실하다. 구체적인 사건들 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작가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래서 소설 곳곳에선 교육, 인종차별은 물론 역사, 성공, 사랑, 품위, 고결함 등에 대한 생각들이 거의 소설가의 육성 그대로 흘러 나온다.  또한 그동안 인류가 만들어놓은 철학과 예술에 대한 가치와 그것을 즐기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조지는 나타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셰익스피어와 헤밍웨이를 읽게 하고 더 나아가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포크너를 읽는 행복을 누리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오페라를 본 사람과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도 설명해 준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행복한 시절이다. 선천적으로 총명하고 밝은 나스타샤는 조지가 그려주는 지도대로 새로운 삶을 부지런히 찾아가지만 운명이 예고해 놓은 비극까지 피해가지는 못한다. 



조숙한 수학 천재였으며 여호와의 증인인 동료 교수 그렉, 억만장자이자 허영 덩어리인 유태인 변호사 매튜, 조지의 아이디어로 지렁이 재배에 성공해 큰 부자가 된 뒤 등을 돌리는 김유진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 각각의 이야기를 읽는 맛도 각별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나스타샤와의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지 않는 조지는 눈물을 머금고 그녀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깊은 시름에 빠져 알콜중독자가 된다. 


어떤 인생도 늘 행복할 수 없으며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소설가 조지수는 인생엔 목적이 없고 과정만 존재한다고까지 말한다. 삶은 허무하지만 그것이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며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이라는 그의 생각은 산문집 [One Man’s Dog]에도 잘 나타나 있다. 



무려 719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이다. 책을 읽으며 많은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 표시를 했고 밑줄을 그어야 했다.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문장을 다시 읽겠다는 나와의 약속이다. 결국 나스타샤는 자살하고 조지도 슬쓸하게 과거를 회상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들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성장했음을 무언 중에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이건 사랑 이야기를 통해 펼쳐진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긴긴 이야기 끝에 그 성장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혼자 새벽안개를 맞는 것처럼 알싸한 뿌듯함을 안겨준다. 


누군가가 '네가 읽은 책 중에 정말 신나게 재미있게 읽은 현대소설 몇 권만 얘기해 봐'라고 하면 나는 그동안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과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그리고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또는 [인생],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영화처럼], 레이먼드 카바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을 비롯해 윤대녕, 김훈, 배명훈의 몇몇 단편과 중편들을 추천했었다. 이제 그 목록에 하나를 더 얹어야겠다.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 조지수의 소설 [나스타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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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회사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회사 이사를 앞두고 놀리기만 하던 마당에서 고기라도 구워먹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온 김에 카피라이터와 PD들이 급히 고기를 사러 가고 숯을 대령하고 했던 것이다. 고기가 구워지기 직전 잠깐 어지러웠던 나는 우연히 내 책꽂이에서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를 꺼내 펼쳐들었다. 정말 아무데나 펼쳤는데 거짓말처럼 시 제목이 '애인은 고기를 사고'였다. 뭐 이런.





애인은 고기를 사고 



이민하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나풀나풀 스웨터를 벗는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상추를 사고 깻잎을 사고 나는 원피스를 벗고 코르셋을 벗고 피어오르는 솜털들을 벗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닦고 있던 거울에 매달려 낮잠을 잔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검은 페인트로 정원수를 칠하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심이 까만 연필을 밤새 깎는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흑연 가루에 목이 메어 눈에서 구름을 뚝뚝 흘린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배꼽을 어루만지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붉은 신호등을 어깨에 매달고 달려간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산부인과에 다녀오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손목의 피를 풀어 욕조에 잠긴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구급차에 실려 가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의사를 사랑하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자궁을 꿰매고 애인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고기를 사고 나는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구두를 닦고 애인은 스무 해째 고기를 사고 나는 애인이 있는 정육점을 지나 스무 해째 엘리베이터를 타고 훨훨훨 공중으로 하관되고 애인은 정육점에 배달된 나의 엘리베이터를 끄르고




장정일이 새파란 시인이던 시절에 쓴 시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 버전 업되어 나타난 것처럼 경쾌하고 개성 넘치는 시였다. 그러나 난 시를 잘 모른다. 그녀는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고양이는 골목의 사생활입니다. 그리고 시는 세계의 사생활입니다. 길 위에는 산책하는 시, 굶주린 시, 낮잠을 즐기는 시, 병에 걸린 시도 있고, 집 안에는 사람들이 떠받드는 시, 갇혀 버린 시도 있습니다. 그러다 사람들 모르게 탈출하는 시, 사람들 모르게 죽어가는 시들이 있습니다. 거리에는 시가 넘치지만 세계의 화합이나 질서나 품위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시는 세계의 사생활을 지켜줍니다. 그것이 시가 공동체에 가담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이민하의 이 시를 읽고 평론가 신형철은 "그녀의 시는 관습적인 서정시를 면도칼(환상)로 자해하며 흘리는 붉은 피다"라고 썼다. 참 대단한 시에 대단한 평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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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자기계발업계에서 '아침형 인간'이 크게 우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침 시간을 잘 활용하더라는 이론이었는데 그건 나처럼 잠이 많고, 특히 아침잠이 많은 인간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렇다고 야밤에 일을 잘 하는 스타일도 아닌 나는 그저 '느즈막히 일어나 최선을 다 하다가 해 지면 술 마시고 놀아야 하는 거 아닌가?' 정도의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던 터라 일찌감치 성공을 포기해야만 했다.


다행히 뜨겁던 '어얼리 버드' 열풍도 지나가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든 늦게 일어나든 신자유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누구나 성공하기 힘들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도래함으로써 나 같은 사람이 오히려 희망을 품고 살아가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되었다.

라이프 코치 조정화가 쓴 [휴대폰 소녀 밈의 시간의 발견]은 어얼리 버드 열풍 이후 지금까지 여러 번 등장했던 시간 활용법에 대해 새로운 힌트를 제공하는 탄탄한 에세이다.

우선 반가운 것이 이 책은 '억지로 관리할 필요가 없는 시간관리법’을 표방한다는 사실이다. 즉, 정색을 하고 인생을 바꾸거나 할 필요 없이 시간을 관리할 수 있다는 뜻인데, 조금 더 책 안으로 들어가 보자.


사실 하루 24시간 중 우리가 정말로 일에 쓰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직장이나 학교까지 가는 데 한 시간 남짓을 사용하고 자기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거나 업무를 볼 때도 일과 관계없는 인터넷 서핑이나 휴대폰 사용, 메신저 대화 등등으로 호시탐탐 방해를 받다보면 어느덧 점심시간, 퇴근시간이 되기 일쑤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모자란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지은이는 일단 '시간의 상대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님과의 한 시간은 쏜살 같이 지나가지만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무간지옥처럼 길게만 느껴지는 원리 말이다. 지은이는 최신 영화 [인터스텔라]까지 예로 들며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척'만 하는 우리들의 생활습관 또한 매섭게 지적한다. '멀티태스킹'이 그 예이다. 철학자 한병철도 얘기했듯이 현대인은 멀티태스킹과 어울리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매스미디어의 발달 등으로 인해 한꺼번에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 결과 어떤 한 가지에 몰입하기는 더 힘들어진 것이다.

이 책은 멀티 태스킹에서 싱글 테스킹으로 가는 아주 구체적인 방법, 예를 들면 '불필요한 외부 정보를 차단한다', '자기만의 공간을 정한다', '반복적으로 연습한다' 등을 정확하게 조언해준다. 똑같은 시간이라도 몰입을 잘 하는 사람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왜 한 가지 목표에만 끝까지 매달리면 안 되는지,혼자 있을 때 뭘 해보면 좋은지 등등도 페이지마다 깨알 같은 실제 정보를 통해 전해준다. 이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처럼 애매하게 개인을 추궁하다 잠깐 위로하는 척하고 마는 슈퍼 베스트셀러들보다 나은 이 책의 미덕이다.


에우리피데스, 아우구스티누스, 벤저민 프랭클린, 허레이쇼 넬슨, J.P 모건, 장 폴 싸르트르, 톨스토이…등등 이 책에는 시간과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들려주는위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철학자 한병철, 강신주,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 등도 기꺼이 출연해서 쓸모있는 통찰들을 들려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름난 사람들이 남긴 말들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문학적 주제와 상통하기 마련인데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정화는 우리가 시간에 끌려다니면 시간의 노예가 되지만 시간의 주인이 되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노라고 단언하다. 그리고 '시간관리를 잘 하는 사람은 미래를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를 잘 사는 사람'이라는 통찰력 있는 결론을 내놓는다.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그런데 성공에 대한 갈망이 클수록 조급증을 낳게 되고 또 매순간 남과 비교됨으로써 끊임없이 시간에 쫓기게 되는 악순환을 낳는다. 그리고 성공을 이루어야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비극이다.

[휴대폰 소녀 밈의 시간의 발견]은 뜬구름 잡는 형이상학적 문장이나 간지러운 메타포 대신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들을 짧게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고마운 책이다. 특히 매 챕터마다 등장하는 휴대폰 소녀 ‘밈’ 의 활약이 크다. 밈은 SNS를 통해 유명해진 캐릭터인데 24시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휴대폰 중독자다. 어찌보면 이 책의 주제인 시간관리에 역행하는 대표적인 인물인 셈인데, 이 아이가 보여주는 짧은 만화 속 행태들이 영락없이 현대 젊은이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휴대폰 배터리가 떨어지면 공포심을 느끼고 액정이 깨지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이. 왠지 하루 종일 휴대폰 속에 빠져 사는 현재 대한민국 도시인들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는가.


내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이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 백날 묻고 다녀봤자 속시원히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이렇게 유용한 '참고서' 하나 읽어보는 것은 어떨는지. 내가 이 책을 통독하고 느낀 점을 한 줄로 요약해 보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간을 잘 다루는 사람이 삶의 주인이다'

한 권 사서 휘리릭 읽고 친구에게 줘도 좋고 한 권 더 사서 들고 다니다 생각날 때마다 펼쳐봐도 좋은 책이다. 혹시 책을 읽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 책은 사랑 받을 가능성이 크다. 휴대폰 소녀 밈이 등장하는 만화 페이지만 대충 들춰보려고 펼쳤다가도 흥미롭고 공감가는 내용들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본문과 이어지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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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을 오며가며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거의 다 읽었다. 일요일이지만 회사에 와서 저녁을 먹고 일을 하다가 아까 몇 페이지 남겨놓은 소설을 에필로그까지 마저 다 읽어버렸다. 충격적이다.


'너무'라는 말을 좀처럼 쓰지 않지만 이럴 경우는 '너무'라는 표현이 허용될 것 같다. 소설가가 글을 너무 잘 써서, 너무 진심이 느껴져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너무 쓰리고 너무 괴롭고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동호라는 소년의 가녀린 팔과 뒷모습이 상상되고, 평범한 모나미볼펜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지고, 취조실에서 일곱 번의 뺨을 맞던 그녀의 당혹감이 아직도 내 뺨에 빨갛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강. 소년. 5.18. 일요일...


아,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내일까지 모 자동차회사 기업PR 아이디어를 낸단 말이냐. 아, 너무 한다. 




(지난 일요일 휴대폰으로 간단하게 작성했던 독후감입니다. 요즘은 너무 바빠서 진득하지 않아 책을 읽기도 독후감을 쓰기도 쉽지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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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노량진이라는 지역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은 소설가가 하나 있다고 치자. 그는 그 소설을 쓰기 전에 무엇부터 했을까.

일단 노량진에 갔을 것이다. 거기 가서 그곳에 밀집되어 있는 고시텔 주상복합 건물들이 대개 몇 층짜리인지부터 살펴보았을 것이다. 거기 가서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친구들이 사는 삼 평이나 사 평짜리 초라한 원룸을 들여다 봤을 것이고 내친김에 뚝불과 돈가스, 삼천 원짜리 김밥 + 라면을 파는 일층 대형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어봤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곳에선 사천 원짜리 식권 열 장을 사면 삼만오천 원을 받고 월식 구십 끼니는 육만 원을 깎아줘서 삼십만 원을 받는다는 것도 당장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고시텔 앞에서 일회용 컵에 소시지볶음밥, 야채비빔밥, 카레라이스를 담아 팔고 있는 무허가 노점상들도 조용히 취재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손바닥만한 고시텔의 이름이집현전이거나 뭐 그 비슷한 우스운 이름을 달고 있는 것도 부수적으로 알게 되었을 테고 기타 소설에 써먹을 만한 이런저런 아이디어들이 하나 둘 사금처럼 모아졌을 것이다.

노량진 고시텔에서구준생(9급 공무원 시험 준비생)’으로 살고 있는 남자 주인공이영자라는 이름의 여자와 동거했었다는 얘기를 쓰고 싶어서 자료를 찾다보니 우리나라에 남녀 동거를 알선해 주는 인터넷 카페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남녀 동거를 알선해 주는 인터넷 카페가 있다는 것을 전에 우연히 들었는데 마침 생각이 나서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고 이 소설에 써먹은 것인지도 모른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의 얘기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먼저 잡아먹는 놈이 임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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톤 규모의 어선으로 고기를 잡던 주인공의 아버지가 어획량이 줄자 4.5톤 배로 줄였고 그걸 팔아 아들의 서울 이주비용을 대준 이야기를 지나가는 말처럼이라도 쓰려면 지금 서해안의 4.5톤짜리 중고 배 시세가 대충 얼마나 나가는지도 알아내야 한다. 이런 게 소설가의 일이다.


사육신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남긴 시구의 의미를 묻는 문제가 재작년 9급 지방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출제되었다는 설정은 주인공이 머물고 있는 고시텔집현전에서 두 블럭 건너편 언덕에 사육신 묘지가 있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픽션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고 특히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뚜렷한 인간의 신념이나 입장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소설가 김훈이기에 더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진 것일 확률이 높다.

김훈은 사육신의 묘가 노량진에 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죽을 벗기고 무릎 뼈를 빻고 가랑이를 찢어서 거리에 버리는가혹한 형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임금을 꾸짖으며 신념을 절대로 바꾸지 않은 바보 같은 인간들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을 것이고, 심지어인두가 겨드랑이 밑을 지져서 기름이 튀고 누린내가 퍼질 때도 자신을 고문하는 형리에게인두를 달구는 화로가 식었지 않느냐라고 호통을 칠 수 있는 인간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이 쉬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대단했던 신념들이 작금에 와서는 겨우 9급 지방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출제되어 그 해 수만 명의 수험생을 탈락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의 역사적 아이러니에 몹시 허탈해 했을 것이다.


김훈의 단편소설 <영자>는 가난한 서해안 어부의 아들인 구준생 남자가 가난한 남해안의 순댓집 딸 영자와 노량진 고시텔에서 1년 간 동거하면서 시험준비도 하고 섹스도 하다가 남자는 붙고 여자는 떨어져서 결국 헤어졌다는 이야기다.


검사, 판사. 도지사는 한자로 쓸 때 일사()가 맞고 변호사, 계리사, 변리사, 회계사, 운전사는 선비사()가 맞는이상하고 아리송하고 쓸데 없는 문제들에 직면해 헤매던 남자는 결국 시험에 합격해 바라던 공무원이 되지만 그렇게 해서 그가 도착한 곳은 서울도 아니고 자신의 고향도 아닌 마장면이라는 작은 지방 마을의 하급 공무원 자리일 뿐이다.  

소설가는 마장면 사무소에 9급 총무계 서기보로 부임한 주인공 얘기를 쓰기 위해 가축 전염병 예방주사를 신청하는 공문을 작성해서 축협으로 보내거나, 오십 시시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을 돌며 공가 상태를 점검하거나, 산불 팻말을 밭두렁에 박거나 마을 경로잔치 때 면장의 축사를 쓰는 일 등 이것저것 다 하는그의 업무 내용도 조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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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 서기보인 주인공의 한심한 처지를 보여줘야 하기에, 어느날 5급 중앙 사무관으로 합격한 마장면 출신 청년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다는 장면에서는 현수막의 제작비가 만이천 원인데 관급물품이라고 팔천 원으로 깍아주지만 배달은 없다는 사실도 알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동거했던 영자가 도대체 무슨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었는지 몰랐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는 주인공의 반성을 쓰기 위해서는 서울 강남에 식당 화장실 앞에서 지키고 서 있다가 손님이 용무를 마치고 나오면 안으로 들어가서 변기에 눌어붙은 배설물을 솔로 닦아내고 물 위에 단풍잎을 띄우는 아르바이트가 있다는 것도 알아냈거나 상상해 냈을 것이다. 그래야 단 한 번의 외출이자 데이트였던 사육신묘 장면에서 영자가 굳이 단풍잎을 줍던 이유가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소설가가 하는 일의 전부일까?

내 생각에 소설가가 하는 일은 이런 것이다. 마을 노인들 효도관광에 따라갔던 주인공이 남해안을 지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영자에게 전화를 걸어봤을 때 이 전화기는 고객의 사정에 의해 사용이 중지된 번호라 흘러나오는 서글픈 음성 메시지를 독자들이 함께 듣게 만드는 일. 그 장면 때문에 오래 전 내 옆에 있던, 그러나 지금은 없는 각자의 사람을 떠올리고 또 앞으로 내 옆에 있을 미래의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일. 소설가는 2014년 현재 서울 노량진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일 뿐이지만 그것들은 결국 2014년 대한민국 전체의 이야기가 되고, 이는 더 확장되어 2014년 지구 위의 모습이 되고, 마침내는 이 이야기도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수천 년간 그게 그거였던 하찮은 인간사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하는 일. 그게 바로 소설가가 하는 일이다. 그리고 방금 김훈이 한 일이기도 하다. 그저, 내 생각엔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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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나 영화는 전체에 대해 말하기보다 부분만 발췌해서 소개하는 효과적일 때가 있다.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 그런 경우 아닐까. 소설 중간쯤 나오는 노래칠갑산 대한 부분이 그렇다


노래할까요.
무재 씨가 말했다.
은교 씨는 무슨 노래 좋아하나요.
나는 칠갑산을 좋아해요.
나는 그건 부를  없어요
칠갑산을 모르나요?
알지만 부를  없어요.
왜요.
콩밭,에서 목이 메서요.
목이 메나요?
콩밭 매는 아낙네는 베적삼이 젖도록 울고 있는 데다포기마다 눈물을 심으며 밭을 매고 있다고 하고새만 우는 산마루에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와 버렸다고 하고….
그렇군요.




어찌보면 연인끼리 하기엔 너무 싱거운 얘기를 진지하게 주고받는 사람이 우습기도 하지만 가만히 그럴까 하고 천천히 읽어나가다 보면 어떤 기이한 진정성이나 순결함이 느껴지는 [百의 그림자] 작가 황정은의 문체이고 작법인 것이다목이 멘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공감하여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철거되기 전의 세운상가쯤으로 짐작되는 소설 공간과 등장인물들을 묘사하는 작가의 섬세하면서도 짐짓 무심한 척하는 시각에 매료되었고, 그런 배경이나 시간 묘사와는 달리 감각적인 구어체를 포기한 느릿느릿한 문어체로 진행되는 사람의 대화가 단연 소설의 백미라고 느꼈다.

나중에 무재는하얀 위에 구두 발자국이라는 노래를 불러달라는 은교의 청도 거절한다. 이것도새벽에 떠나는데 강아지만 같이 갔다고 하고, 발자국만 남았다고 하고해서 목이 멘다는 것이다. 구어체로 썼다면 말도 되게 싱거울 대화가 문어체라는 옷을 입자 뭔가 자신만의 개성과 조심성을 확보하는 느낌이다. 그러니 이건 내가 평소에 애써 피하려고만 들었던 문어체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이상한 방법으로 일깨워주는 소설인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무재가 은교에게노래할까요라고 다시 묻는 장면으로 끝난다. 아마 그들은 어떤 노래 하나를 가지고 이건 목이 메네 메네 하고 싱거운 소리를 늘어놓으며 가만가만 둘만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나는 소설의 이런 결말이 좋았다. 다시 노래하는 사람 덕분에 나는 전자상가에서 일하던 아저씨도, 가끔 복권 돈을 꾸러 오던 유곤 씨도, 어느 갑자기 사라져버린 오무사의 할아버지도 이상 안부를 궁금해 하거나 걱정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뒤를 따르던 그림자가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서 벗어나 조금 뒤에서 일어나 쫓아오더라도 이상 이상하지 않은 그림이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뭔가 좋은 소설을 읽었다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소설을 읽고 나서 소설에 대해 무언가 쓰지 않으면 된다는 다급한 의무감 같은 느끼고 출판사에 연락을 취했다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말미에 붙은 해설에 이런 글을 썼다.


소설을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도심 한복판에 사십 전자상가가 있다. 상가가 철거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내력이 하나씩 소개된다. 와중에 소설은 시스템의 비정함과 등장인물들의 선량함을 대조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과연 만한 곳인지를 묻는다. 소설을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소설은 우선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나 사랑은 선량한 사람들의 선량함이 낳은 사랑이고 이제는 선량함을 지켜 나갈 희망이 사랑이기 때문에 소설은 윤리적인 사랑의 서사가 되었다. 소설을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소설은 사려 깊은 상징들과 잊을 없는 문장들이 만들어낸, 일곱 개의 () 장시(長時). 소설을 단어로 정리하면 이렇다. 고맙다. 소설이 나온 것이 그냥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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