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함정임은 예전에 경향신문의 칼럼에서 "성인 남성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에 쓰기의 표현 욕망과 지면(紙面)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킨 매력적인 직종이 존재했다. 바로 신문 기자였다." 라고 하면서 "일찍이 그것을 터득한 기자 출신 작가가 20세기의 헤밍웨이, 카뮈, 김훈이고, 오늘의 장강명이다." 라고 쓴 적이 있다.


과연 장강명을 헤밍웨이나 카뮈에까지 견줄 수 있을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가 요즘 가장 '핫한' 작가 중 하나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을 듯하다. 한겨레문학상 발표 즈음에서 심사위원 중 누군가가 '이제 장강명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는데 데뷔작인 [표백]을 읽을 때만 해도 그 말에 크게 동의하진 않았다. 그런데 한참 뒤에 강남구청역에 있는 '아름다운 가게'에서 우연히 [뤼미에르 피플]이라는 단편집을 말도 안 되는 싼 가격에 샀다. 누군가 사서 한 페이지도 읽지 않고 되판 게 분명한 그 '헌책'엔 미카엘 엔데의 단편집이나 토마 귄지그의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에 나올 법한 - 이책을 내게 빌려 준 진희 누나, 아직 내가 잘 가지고 있다오. 언제 돌려주러 꼭 갈게 - 재미있고 낯선 단편들이 그득했다. 그리고 근 일 년 새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열광금지 에바로드> 등 그의 소설들을 몇 권 더 읽었다. 


그의 소설은 어떤 것은 기획기사 같았고 어떤 것은 르포 같았으며 또 어떤 것은 새로운 문체를 시도하는 예술가의 작품처럼 보였다.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 잘 읽히고 나름대로 재미 있다는 사실이었다. 부지런한 작가라는 신문기자나 평론가들의 평 또한 또 하나의 공통점이 될 정도로 그는 열심히 쓰고, 쓴 날짜와 글의 양을 엑셀에 기록하고 그 성실성을 연료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굵직굵직한 공모전들을 좇아다니며 상금을 획득했다. 소설가라는 지위를 폼 잡는 엔터테이너나 고뇌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철저한 생활인으로 포지셔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노력이요 결과였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에세이집을 냈다. 제목은 <5년 만에 신혼여행>. 지금의 아내와 결혼해서 5년 만에 신혼여행을 갔다 온 3박5일간의 기록이다. 제목만 들으면 뒤늦게 신혼여행을 갔다 온 어느 커플의 알콩달콩 여행기일 것 같지만 장강명이 그렇게 알록달록하기만한  글을 쓸 리가 없다. 물론 소재가 신혼여행이니 어떻게 아내를 만나고 연애했는지에 대한 시시콜콜한 얘기가 빠질 수 없다.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결혼 전의 에피소드들, 작가가 되기 전의 고군분투들이 재밌다. 그리고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틈틈이 펼쳐지는 결혼식에 대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과 화해에 대한, 직장생활과 꿈에 대한 작가의 가치관들이 드러나는 대목들이 흥미롭다. 역시 장강명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장강명은 실용주의자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간다. 에둘러 가느라 글의 양을 늘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주장을 기술한 부분들은 직접 옆에서 귀로 듣는 것처럼 명료하고 통쾌하다. 그런데 정작 여행지에 가서 관광을 하고 음식을 사 먹고 한 부분은 별 재미가 없다. 아마도 여행지가 긴장감이나 새로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보라카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원래 계획했던 터키 이스탄불이나 일본 대신 거길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었다. 가난한 부부의 형편에 맞게(또는 늘 비용 대비 효용으로 고르던 그 커플의 버릇대로) 고르다 보니 거기가 된 것일 뿐. 두 사람이 어찌나 싸구려 상술과 바가지 요금에 시달렸던지 마지막엔 둘 다 "이 놈의 보라카이..." 하며 이를 간다. 그러나 상관 없다. 우리는 보라카이라는 나른한 관광지 덕분에 소설가 장강명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또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글을 쓸지 대충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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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아Q정전]은 ‘아Q'라는 이름도 불분명한 개망나니를 내세워 근대 제국주의 앞에서 쩔쩔매는 중국인들의 내적 모순을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때 이 작품을 읽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잘 몰랐다. 그냥 남들이 대단한 작품이라고 하니까 의무적으로 읽은 것이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 때 어쩌다 친구와 이 작품 얘기를 하다가 “야, 근데 아Q 그 새끼는 착하지도 않잖아. 뭐가 불쌍해.” “아유, 그러게. 아Q는 잘 죽은 거야.” 같은 소리를 서로 주고받은 기억이 난다. 

김애란의 단편집 [비행운] 중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아Q 정전]이 생각났다. 택시 기사인 용대는 어렸을 때부터 주변의 멸시와 홀대를 받고 살아온 인물이다. 어느 집안에나 꼭 한 명씩은 존재하는 천덕꾸러기. 그런데 그 이유는 다 용대 자신의 처신 때문이다. 자기 형이 두부공장 하다가 말아먹고 도망 다닐 때 형을 좀 찾아봐 달라는 형수에게 용대는 오토바이 기름값을 달라고 했다가 욕을 먹었다. 누가 취직을 시켜줘도 진득하게 붙어있질 못하고 때려치우는 게 다반사인 성격이고 하다못해 형수가 밭애서 고추를 따고 있을 때도 종일 툇마루에서 기타를 치고 놀던 인사였다.

그런 인간이 기사식당에서 일하던 조선족 여자 명화에게 반했다. 어렵게어렵게 같이 외식을 하고 프로포즈를 하고 결국 결혼까지 했다. 언제가 중국에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러나 명화는 암에 걸려 죽어버렸다. 용대는 명화가 죽은 후에도 쉬는 시간이면 괜히 중국어 회화 테이프를 틀어놓고 택시 안에서 따라한다.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 ‘제 자리는 어디 입니까.” 테이프에서 명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리 쩌리 위안 마?” “여기서 멉니까?” 


김태용의 영화 [만추]에서 탕웨이가 오지 않는 현빈을 기다리며 “It’s been a long time...”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던 장면이 떠오르는 엔딩이다. 아Q처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심지어 그에게 애정까지 품는 것이 문학의 위대함이 아니겠느냐고 쓴 글을 얼마 전에 읽은 기억이 난다(박웅현의 책이었던가). 그렀다면 그 얘기는 김애란의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도 적용된다고 나는 믿는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만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다. 우리 주변엔 잘 쓰는 작가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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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부터 허리가 아파서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고 난리를 치다가 퇴근시간에 교보문고에 목보호대를 사러 간김에 참지 못하고 책을 또 한 권 샀다. 곽재식의 작품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다. 곽재식은 옴니버스 소설집에 실렸던 단편 <박시은 특급>을 읽고 홀딱 반했던  소설가다. 버스 안에서 읽은 그의 데뷔작 <달과 육백만 달러>도 재미있는데 그 다음에 실린 <최악의 레이싱>은 심하게 웃기고 착하고 재미있다. 마치 배명훈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다. 아껴놨다가 내일부터 한 편씩 천천히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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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운 하늘색 웃도리를 입은 서현진이 식탁에 앉아 입이 미어터지도록 밥을 밀어넣으면 그 위로 '엄마의 마음이 놓이는 장면'이라는 자막이 뜬다. 옆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이렇게 묻는다. "그렇게 맛있니?" 계속 숟가락에 묻은 밥알을 핧아 먹으며 "어...!"라고 대답하는 서현진. 카메라가 밑으로 내려가면 그녀가 먹는 밥의 정체가 보인다. 햇반이다. 그것도 미처 밥공기에 덜지 못하고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것 그대로 퍼먹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얘 엄마는 뭐하느라 굶고 들어온 딸년 밥 한 공기 못 해먹이고 햇반 뜯어먹는 걸 옆에서 쳐다보며 마음이 놓인다고 하시는 걸까. 


나도 광고를 만드는 사람인데 남이 만들어놓은 광고를 헐뜯으려고 이런 글을 쓸 리가 없다. 더구나 이 광고는 아주 잘 만들어진 광고다. '마음이 놓이다, 햇반이 놓아다'라는 카피도 질투날 정도로 좋고 바스트샷 카메라를 압도하는 요즘 '대세' 서현진의 찰진 연기도 만점이다. 다만 그녀가 먹고 있는 밥이 문제다 햇반은 밥이 아니다. 카피처럼 '갓 짓은 밥맛'이긴 하지만 이건 알고보면 가짜다. 심지어 밥알도 진짜 밥알이 아니고 지어진 밥을 으깨어 다시 밥알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내가 하려는 얘기는 밥이 중요하다는 얘기고, 마침 고은정의 <반찬이 필요 없는 밥 한 그릇>이라는 책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므로 그 책의 유용함에 대해 소개하려는 것이다.


고은정은 약선 식생활연구센터 소장 겸 우리장 아카데미 대표다. 지리산 뱀사골 근처 '맛있는 부엌'에서 제철음식학교를 운영하기도 하는 음식문화 운동가다. 한 마디로 요리 연구가가 아니라 음식 연구가인 것이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보다는 우리 몸에 좋은 음식 얘기를 많이 하고 음식 밑에 깔려 있는 인문학적 통찰을 실생활에서 실천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맛이 없어도 몸에 좋으니 참고 먹으라는 막무가내식도 아니고 우리 음식이 무조건 좋다는 식의 국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밥'에 대한 책을 냈다. 냄비나 압력밥솥 또는 전기밥솥에 쌀 씻어서 안치면 저절로 되는 게 밥인데 뭘 새삼스럽게 책을 다 냈을까. 


밥은 쌀과 물과 불이 만들어내는 삼중주의 예술품이다. 하지만 재료가 너무 단순한 탓인지 오히려 맛있는 밥맛을 구현해내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재료뿐만 아니라 조리법조차 단순하여 밥맛 내기의 어려움에 한몫 거든다.


 위의 글처럼 이 책은 재료 뿐 아니라 조리법초차 간단하여 밥맛 내기에 어려움이 있음을 바탕에 갈고 들어간다. 그러면서 제대로 '요리'된 밥 한 끼가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고 풍요하게 하는지를 역설한다.  


우리의 밥도 다양한 재료와 결합하면 더 맛있어진다. 철마다 나오는 싱싱한 채소나 감칠맛 고는 해물들을 쌀과 같이 넣고 밥을 해 먹거나 조금 더 기분을 내고 싶은 날엔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를 넣고 같이 밥을 해 먹으면 밥도 요리가 된다. 흰쌀밥을 할 때 갖게 되는 반찬의 부담감을 밥 하나로 다 날릴 수 있으니 자꾸 밥을 해 먹고 싶어진다. 밥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져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맛있는 밥을 집에서 해먹는 것. 거기엔 밖에서 아무리 비싼 요리를 사먹더라도 느낄 수 없는 특유의 기쁨과 충만함이 있다. 그리고 보온밥통에서 꺼내먹는 이름만 '더운밥'인 보온밥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신선함이 있다. 


바쁜 현대인들이 매끼 새로 밥을 해서 먹을 수 없게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 전기를 이용해 보온을 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밥 짓는 수고를 힘들어하고 밥을 짓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보온의 기능이 담긴 밥솥이 처음 들어왔을 때의 놀람과 기쁨을 잊지 못하지만 그건 정말 잠시였다. 수고를 덜고 시간을 벌었지만 밥맛을 놓쳤기 때문이다.



'밥은 먹고 다니냐?'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한 이 대사 한 마디가 이렇게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될지는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누구나 생래적으로 느끼는 삶의 본질을 건드린 대사라서 그렇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만큼 우리에겐 한 끼니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당장 김한길의 에세이 [아침은 얻어먹고 사십니까]나 김훈의 에세이 [밥벌이의 지겨움]을 들춰보시라. 이 책들은 제목에서부터 우리의 삶이란 밥에서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도 처음 자취생활을 시작할 때 밥하는 법이 적혀있는 요리책을 산 기억이 있다. 요즘 영화 <곡성> 때문에 뭣이 중한디? 라는 말이 유행이다. 나는 정말 중요한 건 밥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제목이 '반찬이 필요없는 밥 한 그릇'이다. 그렇다고 맨밥을 먹으라는 게 아니다. 쌀을 잘 고르고 재료의 성질을 잘 이해하면 누구나 가장 소박하면서도 알찬 한 끼를 영위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책값이 만 원이다. 내가 가끔 가는 을지병원 뒤 평양면옥의 냉면 한 그릇 값인 만천 원보다 싸다. 지금 친구에게 냉면 한 그릇을 사주면 하루 고맙다는 소릴 듣겠지만 오늘 그 친구에게 이 책을 한 권 선물한다면 그는 아마 몇 년 동안 당신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너무나 간단하고도 중요한 행복의 방법을 선물해 주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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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밤에 우연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옛 단편이 읽고 싶어져서 책꽂이에서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을 꺼내들었다. 김춘미 교수가 번역한 책으로, 내가 맨 처음 하루키를 접한 책이다. 맨 앞에 있는 <중국행 슬로보트>를 펼치면서 이전에 이 단편의 인상이 상당히 모호했던 게 기억났다.


그러다가 유유정 교수가 번역한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걸작선]에도 이 작품이 실려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거기 실린 작품의 제목은 <중국행 화물선>이었다. 제목은 좀 다르지만 똑같은 작품이겠지, 하면서도 번역의 미묘한 차이를 느끼고 싶어서 두 작품을 대조해가며 읽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이 두 작품이 같은 원작을 보고 번역한 작품이 맞단 말인가. 번역은 유유정의 버전이 좀 더 촘촘하다. 그런데 주인공이 초등학교 때 중국인 학교 교실에 시험을 치르러 가서 생애 최초로 중국인을 만난 경험 뒤로 이어지는 고3때의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장면이 몽창 빠져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두 번째로 만난 알바 동료 중국인 여학생과 디스코테크로 놀러갔던 얘기는 김춘미 교수 버전은 거의 '다이제스트'처럼 세부 묘사들이 뭉텅뭉텅 빠져 있다. 중요한 장면이고 필요한 심리 묘사인데도 그렇다. 그렇다고 유유정의 번역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니다.


외국어가 익숙치 않아 번역본을 읽어야만 하는 처지가 바로 이런 것인가. 아니면 두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발표한 글의 다른 버전을 차례대로 번역한 것일까. 하나는 1991년, 또 하나는 1992년 초판 번역이다.


내가 그동안 읽은 책들은 작가들의 의도나 문장과 몇 퍼센트나 만난 것일까. 이젠 정말 번역된 책을 읽는 것이 두려워질 지경이다. 그나저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런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아니, 문학사상사나 모음사는 예전에 이걸 알기나 했을까. 몰랐다면 직무유기요 알고도 이랬다면 정말 나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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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이루어낸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외로움'을 이겨낸다는 것이다. 스스로 홀로 되어 자신과 마주하고 세상과 독대하며 깊은 생각을 가다듬고 마침내 깨닫는 것, 이것이 모든 대가의 첫걸음이다. 수많은 작가들이 그랬고 수많은 음악가, 예술가들이 뭔가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 홀로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독공]의 저자 배일동도 그런 사람이다. 가난 때문에 원양어선을 타다가 뒤늦은 나이에 소리를 배운 그는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어 7년 간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공부를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를 닦아세운 것이다. 그래서 [독공]은 우리나라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 분야에서 대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철학적 본보기이기도 하다. 



그는 성숙한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재주와 정신이 함께 익어야 한다고 말한다. 재주만 있고 덕이 없어서도 곤란하고, 반대로 덕이 빛나지만 재주가 변변치 않아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리공부를 하는 한편으로 수 많은 책들을 읽고 익혔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한낱 소리꾼인 그가 어찌 이리 많은 한자를 알고 이렇게 많은 동서양의 지식을 쌓았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책을 조금 더 읽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가 공부를 택한 까닭은 이렇다. 외국 공연을 많이 다니면서 실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더불어 묻어오는 칭찬도 찬사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외국 음악가나 예술 석학들로부터 어떻게 판소리에 대한 영어 이론서가 하나도 없느냐는 질문을 들은 후로는 그 많은 칭찬과 찬사가 졸지에 빛을 잃었다. 자신의 소리를 한 자락 들려주면 누구라도 단박에 눈물을 터뜨리게 할 자신은 있지만 조금만 더 학문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우리 판소리에 대한 변변한 책 한 권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진 것이다. 물론 그를 가르친 선배들 스승들도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문서상으로 이론적인 토대를 탄탄하게 쌓아놓은 이는 없었다. 


판소리의 역사는 삼백 년밖에 되지 않지만 그 속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우리나라 고유의 예술 철학이 담겨 있는데. 자칫 중국에서 들어온 것인가 하는 혐의를 뒤집어쓰기 딱 알맞은 조건인데.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던 그는 산에 있을 때 방 안에 벽지 대신 훈민정음 해례본을 붙여놓고 매일 들여다 보며 판소리의 발성과 장단 원리를 깨달으려 노력했다. 이러한 간절함 덕에 나날이 지식과 경험이 쌓이고 머릿속에 자신감과 할 말이 넘치게 되었고 마침내 책을 쓰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그가 고리타분한 이론가나 꼰대스러운 예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는 예감은 그의 남다른 집필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판소리에 아이폰이라니! 그는 컴퓨터에도 익숙한 세대가 아니라 글쓰기에 애를 먹고 있었는데 우연히 스마트폰에 메모 어플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쓰고 싶은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꾹꾹 자판을 눌러 글을 썼다는 것이다. 글쓰기부터 전통과 퓨전의 만남이요, 배일동과 스티브 잡스의 만남이었다. 


이는 ‘음양오행이나 동양철학들은 절대 관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학문이 아니다. 우주의 엄연한 질서를 인간의 상세한 관찰로 이루어낸 위대한 자연법칙들이다. 현대사회에서도 그러한 철학들이 문화생활의 원리에 얼마만큼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그의 퓨전 철학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아무튼 스마트폰 글쓰기에 맛을 들여 허리가 비뚤어질 정도로 글을 생산해내느라 의사한테 야단까지 맞았다는 배일동은 마침내 우리 문화사에 의미 있는 족적이 될 [독공]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이 책 이후에 판소리의 실제 이론을 다룬 제 2권이 곧 나올 예정이다. ‘명창’이라는 하드웨어적 자산에 ‘공부’라는 소프트웨어적인 추진력을 겸비한 그의 행보가 사뭇 궁금해진다. 그나마 우리 곁에 [독공]이라는 책이 방금 도착해서 여러모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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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메모처럼 짧은 독후감을 쓰는 경우가 있다. 

정세랑의 경우가 그랬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랬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메모와 오늘 쓴 두 줄을 붙여보았다. 

나중에 진짜 쓴다니까. 


1

정세랑의 <이만큼 가까이>를 읽고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에 이어 두 번째 책인데 이 책도 정말 사부작사부작 잘 읽힌다. 창비 장편소설상을 탄 작품인데 소재나 인간관계와는 상관없이 그냥 글을 잘 써서 받은 상이 틀림없다. 전에 소설가 장강명이 페이스북에 '보건교사 안은영 같은 엔터테인먼트 소설은 한 이십만 부는 팔려야 한다'고 쓴 적이 있는데, 맞는 말이다. 심윤경에 이어 요즘 내가 매우 좋아하는 작가다. 개인적인 소회를 얘기하라고 하면 예전에 계간지 [판타스틱]에서 그녀의 데뷔작 <드림,드림,드림>을 읽고 꽤 좋은 작가네, 하고 생각했던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2

온수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정세랑의 <이만큼 가까이>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다(인천인하대병원으로 문상 가는 길이다). 영화 <세인트엘모어의 열정>이나 <위노나 라이더의 청춘스케치>를 2016년 파주 버전으로 읽는 느낌이랄까. 주인공이 영화미술감독으로 나오는데 틈틈히 친구들과 가족을 찍었던 화면들을 이어붙여 단편영화로 만드는 장면이 뒷부분에 나온다. 다 읽고나니 그 영화가 보고싶어진다. 애틋하고 재미있고 따뜻할 것이다.


3.

시간 내서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에 대한 독후감을 써보고 싶다. 사실은 읽은 직후 몇 줄을 써놨는데 그리고는 일에 치여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책은 정말 재밌다. 케이블TV에서 드라마로 제작을 결정하고 작가에게 후속작을 쓰라고 하면 거뜬히 다섯 편은 쓸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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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슬픔

독서일기 2016. 5. 26. 10:58


<제주의 슬픔>

베리 레빈슨 감독이 만든 <굿모닝 베트남>이란 영화를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미군방송 DJ인 로빈 윌리엄스가 멘트를 하고 난 뒤 화면 가득 베트남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면서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 lWorld'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푸르른 자연 속 사람들도 모두 행복한 표정들이다. 그러다가 2절쯤부터 난데없이 헬기가 등장한다. 헬기에선 기관단총과 화염방사기가 난사되고 그 밑에서는 베트콩들과 베트남 양민들이 고스란히 총탄세례와 불세례를 받고 쓰러진다. 그런데도 배경음악은 계속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라고 노래한다. 아이러니라는 말조차 사치스러워지는 비참하고 잔인한 미장센이다.

제주에 처음 오면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풍광에 사로잡혀 절로 감탄을 하게 된다. 나도 이 작고 평화로운 섬이 좋아져서 해마다 내려와 며칠씩 묵고 가게 된다. 하지만 4•3평화박물관에 한 번 갔다 온 이후로는 똑같은 마음으로 푸른 대지를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우리 현대사에서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4•3항쟁'의 과정과 결과는 알면 알수록 너무나 끔찍하고 비참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우리는 제주도에 돌, 바람, 여자가 많다고 배웠다. 섬에 남자가 적은 것은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많은 까닭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었다. 1948년 '4•3사건' 때 군과 경찰이 너무나 많은 양민을 무장공비로 몰아 죽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남한단독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는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만 단독선거를 반대했었기 때문에 제주도민 자체가 눈엣가시였다. 이승만 정권은 북에서 공산당을 피해 내려온 '서북청년단'을 제주도에 투입시켜 공비들을 '소탕'케 했다.

공산당 때문에 고향도 집도 다 잃은 청년들에게 제주도의 공비들과 그 가족들은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죽창으로 찔러죽여도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리라. 당시 특무대장 김창룡은 '하루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은다'는 말을 남겼고 이런 정신분열종자를 이승만은 친히 불러서 일 잘한다 칭찬을 해줬다는 일화를 박물관에서 읽은 기억 난다. 당시의 만행은 김두식이 쓴 <헌법의 풍경>에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게스트하우스에 와서 다이닝룸 책꽂이에 꽂혀있던 책 중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읽었다. 언제 한 번 읽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계속 못 읽다가 이제야 손에 들게 된 책이다. 어제 아침엔 아내가, 오늘 아침엔 내가 읽었다. 제주 4•3항쟁을 최초로 다뤘던 이 소설은 당시 학살현장에서 죽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삼십 년을 더 살다 자살한 마을 어른 '순이삼촌'에 대한 이야기다. 난 순이삼촌이라고 해서 주인공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여자였다. 우리가 음식점에서 일하는 아줌마들을 이모라고 부르듯이 제주에서는 촌수가 애매한 마을 어른들을 남녀불문하고 '삼촌'이라 부르는 습성이 있었던 것이다.

군경의 '소개작전' 때 마을 국민학교에서 분류작업을 당하고 짐승처럼 끌려가 밭에서 집단총살을 당했던 순이삼촌은 기적적으로 죽지 않고 시체더미 속에서 사흘씩이나 기절해 있다가 살아났던 것이다. 그 뒤 그녀의 삶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대인관계도 제대로 갖지 못했으며 평생 안정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있던, 그래서 거기서 자란 고구마가 목침 만했던 그 밭에 가서 죽은 것이다.


책 뒷쪽에 있는 작가연보를 보니 현기영은 이 작품을 발표하고 난 다음해인 1979년에 군 수사기관에 끌려가 삼일 동안 고문을 받고 감옥에 구치되는 등 1개월간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그러고도 1980년에 다시 문제가 되어 종로서에 끌려가 일주일간 취조 받은 끝에 책이 판매금지를 당했다고 한다. 작가 39세때의 일이다.

당시엔 군사독재시절이라 그렇다지만 내 생각에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도 틈만 나면 세월호 유가족들을 폭도들로 매도하려는 종편과 신문들을 보라. 게스트하우스에서 뒤늦게 <순이삼촌>이라는 중편소설 한 편 읽고 흥분해 제꺼덕 이런 글을 휴대폰으로 꾹꾹 눌러 쓰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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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즌 브레이크]의 스코필드를 석호필이라고 부르고 가수이자 제작자인 토니 안을 '토 사장'이라 부르듯이 우리는 로버트 파우저 교수를 '파 교수님’이라 부른다. 이미 트위터의 유명인사이고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는 지식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그가 이렇게 역사에 관한 정확한 지식과 민주사회에 대한 논리정연한 생각을 두루 갖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 


로버트 파우저 교수의 신작 에세이 [미래시민의 조건]은 3개 국어 이상을 구사하는 언어학자이자 교육자인 실천적 지식인 파 교수가 헬조선에 보내는 따뜻한 충고다. 일본어를 전공하던 학생이었던 로버트 파우저는 1982년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후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13년을 지내며 교토대와 서울대 등에서 영어와 일본어, 한국어를 번갈아 가르쳤다. ‘한국인의 따뜻한 정과 라틴적 감수성’에 매료되어 어느덧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던 그는 오랜만에 다시 돌아와 변해버린 한국에 놀란다. 그가 처음 봤던 활기차고 역동적인적인 대한민국은 어디 가고 ‘헬조선’이라는 자조적인 단어가 날아다니는 체념의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꼭 세월호 참사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촌에 한옥을 사서 다시 짓고 지역 공동체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어울리기도 하던 그는 어느날 문득 서울대를 그만두고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떠나면 더 잘 보인다고 했던가. 29년만에 고향에 돌아가 한국생활을 반추하던 파우저 교수는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는 '민주주의'로 귀결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한국인이 알아야 할 민주주의 사용법'이다. 

대한민국은 [이코노미스트] 민주주의 지수도 높게 나왔고 GDP도 2만달러에 달하는, 심지어 '2050클럽'에 속하는 선진국이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나라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가장 큰 원인은 사회 시스템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안위를 우선으로 여기는 '각자도생'의 생활방식이  온 나라에 팽배하게 되었다. 파우저 교수는 시스템 불안의 원인으로 혈연, 지연과 같은 '사회적 자본'에 집중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이 주목한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스펙을 많이 쌓고 이용할 수 있는 연줄은 다 걸어서 스스로 안전망을 만들어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파우저가 어떻게 서울대 교수가 된 것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들의 작용이었다. 로버트 파우저는 한국 학계에서 그리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뭘 시켜준다고 해서 금방 크게 자라 세력화 될 염려가 없는 인물인 것이다. 더구나 그가 '첫 외국인 국어교육학과 교수'가 되면 대외적으로 서울대 이미지도 올라갈 수 있다. 꿩먹고 알먹고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파우저 교수가 우리 사회를 더 사심(?) 없이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 왜 '민주주의'인가. 파우저 교수는 언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사람이다. 언어는 단지 말이나 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어느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방식 등을 그대로 담고 있다. 따라서 언어에 능하면 그만큼 통찰력도 늘어나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는 모국어 하나만 하면 흑백의 세상을 사는 것이고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하면 컬러 세상을, 세 개 이상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면 3D 세상을 사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는 그가 수평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한국사회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큰 덕목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일본이나 미국이 나쁘고 한국은 무조건 좋다, 는 식의 단순무식한 사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처한 문제들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사라진 활력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데 이는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 파우저 교수는 책의 첫머리부터 '시민'에 대해 이야기 한다. 중요한 모든 것들이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애초부터 한국어로 씌여졌는데 가만히 읽다보면 로버트 파우저 교수가 얼마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 시민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훓어보는 세계사와 근대사는 마치 중고등학교 교과서처럼 짧으면서도 요점적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중간중간부분은 인간적인 체취가 넘친다. 맨 뒤쪽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글도 있는데 막상 그의 생애와 관심사에 관해 우리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아 놀라웠다.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미래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비전은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비전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현황을 보고 제시한 비전과 비교하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논의할 수도 있다. 미래 비전은 사실 또는 진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며, 따라서 이 책은 미래에 대한 희망 이야기인 셈이다.



파우저 교수는 책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대신에 어떻게 하면 '헬조선'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의 단초들을 던져준다. 지금처럼 각자 스펙을 쌓아 남들을 짓밟고 올라가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 갑자기 메시아가 나타날 리도 없다. 각자의 올바른 생각과 참여를 통해 시민의식을 깨우는 것만이 방법이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좀 더 발전적인 공동체 건설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파우저 교수는 이를 '국민'의 사고에서 공동체 주인으로서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문장으로 역설한다. 


 '국민은 투표할 때만 주인이고, 선거가 끝나면 노예가 된다'라는 장 자끄 루소의 말이 있다. 곧 지방선거가 다가온다.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 시기에 로버트 파우저 교수 같은 지식인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얇은 책이지만 우리에게 던지는 무게는 만만치가 않다. 일독을 권한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이 책을 많이 읽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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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속 바빠 아내와 함께 일찍 출근을 하다가 오늘은 좀 여유가 있길래 아내 먼저 출근시킨 후 혼자 침대에 누워 단편소설을 하나 읽고 회사로 갔다(광고 프로덕션 특성 상 일반 직장인보다 출근시간이 좀 늦다). 



김연수의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이라는 짧은 단편이다. 전에 분명히 읽었는데 ‘읽었다는 기억’만 나고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전엔 그래도 기억력이 좀 좋았는데 이젠 정말 바보가 되어간다. 2009년 3월, 소설가인 주인공이 세브란스병원 암병동 복도에서 정대원이라는 노인을 만나는 장면을 읽으니 어렴풋이 소설의 도입부를 읽은 기억이 났다. 노인이 쓴 소설 ‘24번 어금니로 남은 사랑’이라는 제목을 읽으니 그가 들려준 어금니의 비밀도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어금니를 뽑고 나와 기념사진을 찍다가 자살을 기도한 이야기. 자신의 이를 뽑아주고 사진을 찍어준 간호사와 몇 달 간 동거를 했던 이야기. 그녀가 어느날 볼펜 한 박스를 사다 주며 그 사연을 소설로 쓰게 했던 이야기. 그가 세브란스에서 작가와의 만남 이후 그 이야기를 빨간색 펜으로 써서 보내왔던 뒤늦은 원고. 그리고 마침내 그해 5월 23일 아침, 정대원이라는 원로 소설가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기사. 동시에 갑작스러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알리는 친구의 전화. 소설가가 찾아갔던 대한문 앞의 조문행렬. 그곳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모습.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 볼펜에 대한 이야기는 김연수가 쓴 다른 책 <소설가의 일>에서 주장하던 그의 창작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책을 다시 펼치기 전까지는 이 모든 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던 것은 아마 책을 ‘천천히’ 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어느덧 나는 책을 천천히 읽으며 곱씹는 즐거움을 읽어버리고 살게 된 것이다. 

이 작품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는 좋은 단편들이 많다. 김연수는 자신의 경험이나 실제 있었던 일을 소설에 녹이면서도 핍진성을 잃지 않는 작가다. 첫 번째 실린 소설 ‘벚꽃 새해’에 나오는 영화 <몽중인>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이 소설에 나오는 정대원이라는 소설가도 실제로 이름과 작품이 존재한다. 알면 알수록 재밌어지는 이 모든 이야기를 그냥 휘리릭 읽어버리고 곧바로 잊기엔 너무 아깝다.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을 다시 읽음으로써 비로소 김연수의 소설은 나의 것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좀 천천히 읽자. 김연수처럼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못 누리더라도 책 읽는 이들의 한 가지 즐거움, 즉 천천히 음미하면서 내 것으로 만드는 순간의 기쁨은 좀 누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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