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읽을 책이 얼마나 많은데 한 번 읽은 책을 또 읽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책은 언제나 다시 읽어도 새롭다. 아니, 책은 다시 읽을 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프랑소와 트뤼포가 씨네필이 되는 세 단계 중 첫 번째를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것’이라 했는데 이는 책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세 가지만 들어 보자. 

첫째, 기억력 때문이다. 분명히 한 번 읽은 책이라 하더라도 전부를 기억할 수는 없다. 그게 당연한 거다. 혹시라도 읽은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저주받은 인생을 사는 거다. 인간은 망각해야 살 수 있는 존재니까. 둘째, 그때 그때 다르기 때문이다. 처음 읽었을 땐 몰랐는데 다시 읽으니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고 감정이나 취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이런 일은 매번 일어난다. 분명 나하고 똑같은 책을 읽었는데 누구는 그걸 읽고 작가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지 않은가. 이처럼 책은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그 가치가 달라지는 요술을 부린다. 셋째는 약속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밑줄을 긋거나 페이지 귀퉁이를 접어 놓는다는 것은 언젠가 그 부분을 다시 읽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리고 어느날 책꽂이에 꽂혀 있는 그 책을 다시 펼 때 비로소 약속은 지켜지는 것이다. 

어제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무심코 책꽂이에서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집어들었다. 분명 다 읽은 책이고 우리집 책꽂이에도 있는 책인데 다시 펼치니 새로운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읽어보니 뻔한 내용이다. 그러나 뻔한 이야기라도 다시 읽으며 마음에 새길 만 한 글이다. 페이지 윗쪽을 접은 흔적이 없고 밑줄 치는 방식이 다른 걸 보니 내 책은 아니다. 이번엔 내 방 책꽂이에 있는 책 중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다시 꺼내 무라카미 하루키와 프란츠 카프카 부분을 읽었다. 전에 내가 쳐놓은 밑줄이 있어서다. 내가 그은 밑줄인데도 다시 읽어보니 ‘아, 이런 얘기가 여기 있었어?’하고 놀라게 된다. 내가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어도 좋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결국 퇴근하면서 유시민의 책을 들고 나왔다. 전철에서 한 챕터만 더 읽고싶어서였다. 출판된 지 얼만 안 되는 유시민의 실용서를 읽으며 이런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이태준의 [문장강화]나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정도는 읽으면서 이런 글을 써야 폼나지 않겠느냐 타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멀리 있는 고전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실용서가 인생에 도움이 될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요즘은 점점 쉽게 쓰인 글에 더 끌린다. 유시민이나 강신주는 어려운 내용을 쉽게 전달할 줄 아는 특급 저술가들이다. 그것만큼은 믿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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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독서일기 2017. 4. 30. 14:18


오늘의 반성. 레이먼드 카버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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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이 어지럽거나 뭔가 머릿속이 정리가 잘 안 되는 느낌이 들 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들을 다시 꺼내 읽는 버릇이 있다. 오늘도 그런 이유로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 중 <시나가와 원숭이>를 먼저 읽고 다음 작품으로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를 골랐다. 신기한 것은 읽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군데군데 내가 볼펜으로 밑줄을 쳐놓은 문장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단편은 메릴린치에서 증권 거래인을 하다가 갑자기 아파트 계단 사이에서 맨몸으로 사라져버린 남편을 찾으러 온 여자의 사연을 듣게 된 탐정의 얘기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얼마 전에 읽은 [달과 6펜스]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폴 고갱도 주식 중개인이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어느 날 부인과 아이들을 남겨둔 채 혼자서 타히티로 떠나 버렸다. 어쩌면...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설사 고갱이라고 하더라도, 지갑을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테고, 만약 그 시절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가 있었다면, 그것도 잊지 않고 가져갔을 것이다. 어쨌든 타히티까지 가야 하니까.

여기까지 읽고 나서 나는 에버노트에 끄적여놨던 [달과 6펜스] 독후감의 초안을 다시 꺼냈다. 책을 읽은 다음날 급하게 메모를 조금 했다가 일이 바빠져서 중단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래, 오늘은 이 책의 독후감을 마져 써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20세기 초반의 영국 런던. 성실한 가장이자 증권 브로커였던 평범한 남자가 갑자기 집을 나간다. 그런데 그 이유가 여자나 노름에 미쳐서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화가가 되고 싶어서란다. 너무나도 유명한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의 도입부다. 나는 이 소설을 고등학교 때 삼중당문고라는 작은 문고판으로 읽었다(신기하게 아직도 내 책꽂이에 그 문고본이 꽂혀 있다). 어린 나이에 읽기에는 조금 버거운 내용이었는데 당시에도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의 일탈은 꽤나 매력적이었고 그게 화가 폴 고갱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대목에 더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 [달과 6펜스]를 마흔 살쯤 다시 읽어보면 새로운 게 보일 것이라고 쓴 글을 읽었다. 마음이 혹했다. 다시 읽어서 새롭지 않은 소설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서울 변두리에 살던 어느 고등학생의 겨울을 흔들어 놓았던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라면 다시 한 번 만날 만 하지, 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스스로가 성공한 극작가이기도 했던 서머싯 몸은 화자를 런던에서이제 막  필명을 얻기 시작한 풋내기 극작가로 정하고 그가 만나게 된 찰스 스트릭랜드의 첫인상으로부터 시작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 평범하고 덩치가 큰 남자였다, 로 요약된다. 주인공이라고 멋지거나 특이하거나 굳은 신념이 있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시작부터 사람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영웅담을 경계해야 한다 말하며 자신만의 '현대적인' 캐릭터 작법을 펼친다. 즉, 신화나 옛날 이야기에 나오던 멋진 주인공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만으로도 얼마든지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1919년에 발표된 소설임을 생각하면 놀랍도록 모던하고 스마트했던 작가다. 훗날 영국 첩보국의 비밀 스파이로도 활동한 것으로 밝혀졌던 서머싯 몸은 작가이면서 동시에 멋진 카피라이터이기도 했다. 자신의 소설을 팔기 위해 백만장자 미망인의 이름으로 '서머싯 몸의 신작 장편에 등장하는 주인공 남자와 닮은 남편감 구함'이라는 가짜 신문광고를 냈던 것이다. 그 꼼수 덕에 그의 소설이 날개 돋힌듯 팔렸음은 물론이다.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샜다. 아무튼 그렇다면 이 평범하던 남자 찰스 스트릭랜드는 어떻게 해서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서머싯 몸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고갱의 일화를 찾아 타히티로 여행을 갔었다고 한다. 그러나 타히티에 찾아 간다고 고갱의 일생이 일목요연하게 짠, 하고 펼쳐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판단하기보다 알고자 하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서머싯 몸의 이 문장은 소설가라는 직종이 학자나 기자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여기 어떤 남편이 이유 없이 가출한 사건이 있다고 치자. 기자는 육하원칙에 따라 그 사건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쓴 짧은 기사는 그것만으로 명쾌하게 사건의 개요를 말해 준다. 필요하다면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심리학자의 의견을 덧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몇 줄의 기사만으로는 그 사건의 주인공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오다가 어떤 순간에 그런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예술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런 일은 잘 설명되지도 않는다. 인간은 논리적으로만 행동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소설가의 몫이다. 소설가는 단 몇 줄로 요약될 수도 있는 사건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이야기의 뼈대를 다시 맞추고 살을 붙여 입체적인 작품으로 만든다. 그래서 우리에겐 서머싯 몸 같은 입심 좋은 소설가가 필요한 것이다. 작가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부인을 옆에서 지켜보는 젊은 극작가를 등장시켜 주인공이 떠난 파리에 가서 그를 만나게 한다. 그런데 막상 만나본 그는 예술가로서 성공하려는 야심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고 딱히 돈이나 편안함을 바라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지만 남의 평판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뼈져 죽어요.' 라고 뇌까리며 그림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만을 표출할 뿐이다.

"그 사람 정말 천재일세. 확실해. 지금부터 백 년 후에 말일세. 사람들이 자네나 나를 조금이라도 기억해 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찰스 스트릭랜드와 알고 지낸 덕분일걸세." 

지금이라도 누군가에게 팬심을 나타내고 싶을 때 써먹으면 정말 좋을 것 같은 이 문장은 파리에서 찰스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감탄하던 더크 스트로브의 말이다. 그러나 찰스는 자신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더크에게 내내 시쿤둥할 뿐 아니라 나중에 찰스에게 반해 남편을 버리고 자신에게로 달려 온 블란치 스트로브에게도 매몰차게 굴어 결국 자살에 이르도록 만든다. 그런데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찰스는 자신의 생활이나 행복에 대해서도 철저히 무관심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의자에 앉을 때도 편한 의자에 앉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생겨났을까. 

위에서도 한 번 얘기했듯이 작가는 판단하기보다 알고자 하는 데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서미싯 몸은 이런 이상한 사내의 삶을 파고들어 역설적으로 보편적 인간들의 특질에 대해 알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소설을 빌어 '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특질로 형성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이제는 한 인간의 마음안에도 좀스러움과 위엄스러움,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라고 털어놓는다. 그렇다. 사람은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모순과 순리를 잘 나타내기 위해 작가는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인생의 굴곡이 뚜렷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다. 

'달과 6펜스'란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여기저기서 마르고 닳도록 다루어 새삼 얘기하기에도 입이 아프니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덧붙이자면 이 소설은 찰스의 인생을 따라가는 것도 재미 있고 그의 그림에 대한 묘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눈부시지만 그것 말고도 사랑이라든지 사람, 소설 작법 또는  하다 못해 인상파 화가들에 대해서까지 서머싯 몸이라는 작가가 지뢰처럼 여기저기 심어놓은 영리하고도 능숙한 달변들을 찾아보는 즐거움도 크다는 것을 일러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면 소설 쓰는 일과 소설가의 자세에 대한 서머싯 몸의 독설은 이런 식이다.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책들, 책들이 출판될 때 저자들이 갖는 밝은 희망,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생각하다 보면 그것이야말로 유익한 수양이 된다. 어떤 책이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봐야 한철의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다가 책을 산 독자에게 그저 몇 시간의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또는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저자가 얼마나 애를 썼으며, 얼마나 쓰라린 체험을 하였고,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서평을 통해 판단해 보건데, 이들 책 가운데는 심혈을 기울여 쓴 좋은 책들이 많다. 구상에 고심한 책도 많다. 심지어는 평생의 노고를 바친 책들도 있다. 내가 여기에서 얻는 가르침은 작가란 글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소설가 지망생들이 읽으면 한숨을 내쉬며 절망할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정작 서머싯 몸은 글로 돈을 아주 많이 벌어 대저택에서 살다가 1965년 91세로 영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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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맨체스터 그라나다 방송국에서 송출감독으로 20여 년간 일했던 리 차일드라는 사내는 어느날 갑자기 직장에서 쫓겨난다. IMF가 기승를 부리던 시절,구조조정에 휩쓸린 것이다. 퇴직 소식을 들은 그는 밖으로 나가 곧장 '6달러짜리 펜과 노트'를 산 뒤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그 소설은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 머리 좋은 람보 - '잭 리처' 시리즈의 첫 권이었다. 


근대 이후 어떤 시대든 사람들을 잠 못 들게 하는 가장 크고도 지속적인 고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명제일 것이다. 존재론과 맞닿는 이 고민은 자연스럽게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고민으로 옮겨가기 일쑤인데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이 두 가지 질문에 힌트를 주는 반가운 책이 한 권 나왔다. 바로 홍순성의 [나는 1인 기업가다]이다. 과연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위에서 예를 든 리 차일드 같은 경우는 정말 꿈 같은 얘기다. 직장을 그만 두고 이렇게 대중소설을 써서 단박에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분명한 건 싫든 좋든 누구에게나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해 평균 수명은 점점 늘어 이제 우리는 거의 80세까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저자가 책 앞머리에서 소개한대로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나 [쿨하게 생존하라]의 저자 김호 씨는 '직장과 직업을 혼동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직업은 직장과 관련은 있지만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생 직장'보다 중요한 '평생 직업’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일까. 

먼저 모험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저자 홍순성은 블로그 필명 '혜민 아빠'로 잘 알려진 1인 기업가다. 그도 한 때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직장을 버리고 독립을 결심했다. 그의 전공은 IT와 스마트 워킹이었지만 점점 작업과 공부의 지평을 넓혀 지금은 스마트워킹 컨설턴트, 전문 인터뷰어(팟캐스트 운영), 1인 기업 매니저(액셀러레이터), 그리고 8권의 책을 쓴 작가 등 다양한 직업을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가 되었다. 

무엇이 그를 ‘1인 기업가’로 변신하게 만들었을까. 그는 우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불필요한 일에 시간을 빼앗기는 게 싫었다’고 말한다. 아침에 출근해서 회의 한 번 하고 서류 작업 좀 하다가 점심 먹고 들어오면 시간이 훌쩍 간다. 자기 일만 해도 모자랄 판에 단체 생활을 위한 ‘쓸데 없는 일들’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독립을 하면 최소한 그런 일들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직장에서는 좋아서 하는 일보다 시켜서 하는 일이 더 많다. 물론 전문적인 일일 순 있다. 그런데 회사를 떠나서도 그 전문성이 나를 따라다니며 계속 아이덴티티를 지켜줄까? 뭔가 나만의 컨텐츠를 개발해야 했다. 그는 그 길을 ‘온라인’에서 찾았다. 

그전까지는 일단 아침에 사무실에 나가 책상 앞에 앉아야만 사무를 볼 수 있었지만 이젠 거의 모든 게 온라인과 모바일 디바이스로 해결 가능해졌다. 홍순성은 아침에 커피숍으로 출근을 할 때가 많다. 거기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혼자 생각한 것들을 노트북에 정리하고 자료도 서치한다. 강의 준비를 하거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기도 한다. 뭔가 생각한 것을 남기는 곳은 우선 블로그다. 1인 기업으로 살아남으려면 일단 남과 다른 생각이 필요한데 그 생각은 글로 증명되어야 하고 어딘가에 남겨져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책 여기 저기서 ‘글쓰기와 블로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누구나 블로깅, 또는 SNS를 하기 때문에 글쓰기의 중요성은 한층 더 커졌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누차 말한다. 잘 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매일 꾸준히 쓰는 것이라고. 

이 책은 무조건 처음부터 ‘1인 기업가’가 되라는 허무맹랑한 강요를 하진 않는다. 대신 직장에 있을 때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라도 차근차근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하는 일에 더 집중하라고 충고한다.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성이 없으면 아무리 잘하는 일이라 해도 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 위해 세 가지를 버렸다는데 그 첫 째는 운전대다. 자동차를 버리고 걸어다니며 시간적 여유도 즐기고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그리고 무거운 가방과 조급한 마음도 버렸다. 새처럼 가볍게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 뿐 아니라 저자는 우리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노하우들도 알려준다. 새로운 생각은 수첩에 적기도 하고 마인드맵이나 워크 플로위, 에버노트 등에 수집, 기록한다. 구글 알리미 서비스를 이용하면 좋다고도 알려 준다(난 아직 쓰지 않고 있지 않지만). 그는 언제부터 이런 것들을 다 알았을까. 아마도 스마트 워킹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공부하다 보니 어느덧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버린 것이고 그 노하우들은 그대로 독자들에게도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나도 홍순성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에버노트 전문가’ 로서였다.



예전에는 10년이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10년 일하면 감각이 다하고 진이 빠져 물러나야 하는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이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의 특별한 가치와 ‘즐겁게 일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저자는 말한다. 초기엔 하고싶은 것만 하는 만용을 부리기 쉬운데 그것은 ‘예술가 마인드’다. 이건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하지만 고객이 원하는 것을 하는 ‘장사꾼 마인드’도 있다. 예술가에서 장사꾼을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사람만이 ‘1인 기업가’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에 다닌다고 남의 사업을 다 성공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창업 관련 전문가라고 해서 창업 상담할 때마다 대박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홍순성은 좀 믿을 만하다. 일단 남들보다 먼저 바람 부는 벌판에 나와 온몸으로 부딪쳐가며 ‘1인기업’을 몸소 일구어봤고 지금도 끊임없이 구체적인 노하우를 축적, 전파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 경험은 여전히 블로그, SNS, 팟캐스트 등 다양한 채널로 업데이트 되며 누구나 손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여러번 주장했듯이 책만큼 생각이 잘 정리되고 집약적으로 전파되는 매체도 드물다. 

이 책은 당장 ‘1인 기업’을 준비하려는 사람들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고마운 선물이 되겠지만 나는 그보다 지금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장 독립이 필요한 사람에겐 그대로 따라해야하는 메뉴얼일지 몰라도 아직 약간의 심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을 조금 더 비판적으로 읽으며 자신의 생각을 첨가하는 ‘인문학적’ 접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탈무드의 마지막 페이지는 늘 새로운 생각을 위해 백지로 비워져 있다고 했던가. 이 책도 마찬가지다. 처음 마음의 불씨는 홍순성이라는 저자가 피웠을지 몰라도 그 불을 가꾸어 가는 것은 오직 독자인 당신의 몫이다. 정답은 없고 이미 경험한 자의 진솔한 충고만 있을 뿐이다. 다행히 그 충고는 매우 유용하고도 구체적인 듯하다. 

 (*사족 : 내가 읽은 책은 초판1쇄인데, 218페이지 셋째 줄에 이원태 작가를 ‘이원탁’ 이라고 썼다. 아마도 같은 문장에 나오는 김탁환 작가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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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책꽂이에서 J.D 샐린저의 단편집 [아홉 가지 이야기]를 꺼내 <웃는 남자>라는 단편을 읽었다. 1920년대 맨해튼에 살던 꼬마의 이야기다. 소년은 '코만치 클럽'이라는 어린이 야구단에 소속되어 주말마다 낡은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시합을 하러 갔는데 이 팀의 코치 겸 운전사가 '추장'역할을 맡고 있었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는 젊은 추장은 버스를 운전하고 가다가 어느 순간 멈춰서서 이야기 보따리를 꺼내 아이들을 매료시킨다. 그 주에 하던 얘기는 '웃는 남자' 였다. 어렸을 때 중국인들에게 납치를 당해서 얼굴이 망가진 남자의 복수극인데 매번 클라이막스에서 끝나고 다음 주를 기약하는 방식이라 아이들의 원성이 대단했다.

버스 운전석에는 어떤 여자의 사진 액자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녀는 추장의 애인인 메리 허드슨이라고 했다. 정말인가 아닌가 궁금해 하던 차에 어느날 추장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길에서 여자를 태우고 야구장으로 갔다. 그녀가 바로 메리 허드슨이었다. 그녀는 포수 그러브를 끼고 그날 감기에 걸려 시합에 빠진 친구 대신 이루수를 맡아 경기를 하며 소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웃는 남자와 메리 허드슨. 소년은 아마도 이 두 가지 때문에 매주 코만치 클럽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메리 허드슨은 추장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소년의 행복한 시절은 추억이 되었다.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추억의 드라마 <캐빈은 열두 살>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저녁 TV에서 들려오던 캐빈의 목소리. 캐빈의 형이 월남전에 나갔다가 죽었으니 이 소설과는 연대가 안 맞지만 그래도 이 단편을 각색해서 그때처럼 드라마로 만들고 배한성이 더빙을 하면 그 느낌이 얼마나 애잔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노란 석양을 배경으로 버스가 흙먼지를 날리며 떠난 뒤 힘없이 현관문을 들어서는 소년의 뒷모습이 꽤나 쓸쓸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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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과 문체의 향연’에 있어서 우리 글이 도달할 수 있는 빼어남의 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되는 에세이 [자전거 여행] 어딘가에서 김훈은 시장에서 파는 해산물들을 바라보며 ‘인간은 기본적으로 개불과 다를 바 없다. 입과 항문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다 부속물이다’라는 생각을 토로한 적이 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매우 인색한 평가지만 평소 거대담론이나 인간의 신념따위를 도무지 믿지 못하는 그의 솔직한 심정이 서려있는 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비록 역사소설이라 하더라도 권력이나 영웅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개인’으로 귀결된다. <칼의 노래>가 임진왜란 당시의 전지적 시점이 아닌 이순신 개인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된 것이나 <흑산>도 천주교 박해 당시 나라 안팎의 역사정치적 상황을 파고드는 대신 황사용이나 정약전이라는 개인의 선택에 집중했던 게 그 까닭이다. 

그런 김훈이 일제시대부터 8.15해방, 6.25와 월남전을 지나 10.26과 1980년대를 아우르는 소설을 쓴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그 해답이 바로 6년 만에 새로 나온 소설 [공터에서]다. 소설은 마동수라는 한 사내의 초라하고 쓸쓸한 죽음으로 시작된다. 독립문 근처 빈민들이 모여 사는 쪽방촌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그의 생애는 일제시대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가서 매 맞던 모습에서부터 만주를 떠돌아 아나키스트 운동을 하다가 실패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도 영원히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던 인물의 약전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1979년에 독재자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찾아온 그의 죽음이 다른 소설에서처럼 한 세대를 마감시키고 새로운 탄생을 축복하는 도식도 아니다. 그는 북에서 젖먹이를 잃고 내려온 아낙을 만나 그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 아이는 장세, 둘째는 차세라 이름 지었다. 

마장세는 월남전에 나가 훈장까지 탔지만 그 이력을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다. 심지어 제대 후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않고 괌으로 가서 고철 사업을 하며 살아간다. 적진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아직 살아있던 동료를 죽였던 죄책감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뻔한 이야기가 될 터이고 정작 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묘비 사이를 걸어가면서 마장세는 1972년 9월 25일 롱하이에서 덜 죽은 김정팔을 사살한 일은 잘한 일도 아니고 잘못한 일도 아니며, 거기에 잘잘못을 들이댈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을빛에 반짝이는 말뚝들이 마장세의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끌어당겨주었다. 그때 죽이지 않았더라면 김정팔은 밀림 속에서 혼자 죽거나, 적에게 끌려가서 심문받다가 죽었을 것이고, 실종으로 분류되어 무공훈장도 묘비도 없었을 것이지만 딱히 어느 쪽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때 김정팔을 쏘아 죽인 것은 일이 그렇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대로 되어진 것이라고 마장세는 비석들 사이를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잘못되었단 마인가. 마장세는 스스로에게 되물어서 마음을 안정시켰다. 

김훈의 소설에서 인간은 똥을 싸고 토악질을 하거나 물비린내에 시달리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존재들이다. 주인공이라고 해도 좀처럼 착한 사람이나 악한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닥친 상황과 세상을 겨우 또는 기진맥진 ‘살아내는’ 개인들이 존재할 뿐이다. 김훈의 이러한 비관은 역사소설에서는 비장함과 멋스러움으로 다가오는데 현대소설에서는 그대로 비참함이 된다. 그들은 역사의 중심에 설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변방을 떠돌며 고철이나 쓰레기 수거사업을 하고 광야를 달리는 대신 어중간한 ‘공터에서' 서성일 뿐이다. 동생 차세도 오랜 실직 상태에 시달리다 형과 친구의 일을 돕지만 다시 실직 상태가 된다. 모두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달리 방법을 알지 못한다. 

김훈이 이렇게 여러 세대를 이야기한 적이 없다. 다섯 권짜리 대하소설이 될 수도 있었던 이 이야기는 역사와 사회로 곁가지를 치고 뻗어나가지 않고 개인 차원으로 수렴하는 작가의 특질 때문에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소설로 마감되었다. 그러면서도 근 60년을 살아온 한 집안의 내력과 그 주변인물들에 대한 쓸쓸한 소회가 마음을 서늘하게 적신다. 더구나 형용사와 부사를 배제하는 그의 글쓰기는 주어와 술어의 단조로운 반복이지만 화려하지 않아서 더 화려해지는 역설을 낳는다. 

그도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멋진 영웅담이나 복수극을 쓰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장에 깊은 허무를 탑재하고 있는 김훈이라는 캐릭터는 결코 그런 글을 쓰지 못할 것이고 쓰지도 않을 것이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장석주는 [글쓰기는 스타일이다]에서 ‘허무를 말할 때 그의 문체는 가장 화사해진다’라고 했다. 나도 김훈이 쓴 벚꽃 지는 날에 대한 짧은 글을 기억한다. 미인은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일 때 그 아우라가 더욱 빛난다. 김훈의 글이 그렇다.   


*사족 : 내가 읽은 것은 초판5쇄인데, 188페이지 마동수의 묘지 얘기를 할 때 ‘마차세의 동지들이 거기 묻을 것을 요구했다’라는 문장은 ‘마동수의  동지들’을 잘못 쓴 게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리 읽어보아도 마동수에 관한 이야기이고, 마차세에겐 이렇다 할 동지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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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가 일을 저지른다’라는 말이 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덥썩 뭔가 시작해버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오늘 아내와 함께 참석한 명로진의 북콘서트 [논어 당일치기]가 그런 경우다. 아무리 요즘 다양한  북콘서트가 유행이라지만 무려 2500년 전 공자의 4대 제자들이 쓴 ‘논어’의 북콘서트라니. 게다가 토요일 아침 열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당일치기’로 가는 강행군이다. 이만하면 무모한 도전 아닌가.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요즘 경험한 일상 중에 가장 ‘핫’한 시간이었다. 

기자 출신에 한때 연기자로도 활약했던 명로진은 수십 권의 책을 쓴 작가인 동시에 오래 전부터 ‘인디라이터 양성’으로 이름 높은 스타 강사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중국 고전을 소개하는 인기 팟캐스트도 운영하고 있는데 오래 전부터 ‘논어를 좀 화끈하게 공부하는 시간을 가질 순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마침내 일곱 시간 연속 강의를 생각해 낸 것이다. 

강의는 약속대로 오전 10시 정각에 시작되었다. 명로진 선생이 직접 만든 교재를 펼쳐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고 읽으면 학생들이 이어서 ‘배우고 때에 맞게 익히면 정말 기쁘지 않겠느냐’라고 한글 해설을 읽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소개하면 그야말로 고색창연한 서당이 떠오를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논어’라는 책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도 플라톤의 [국가]나 [소크라테스의 변명] 같은 서양 고전들이 무시로 끼어들고 ‘스키십’이나 ‘사교육’ 같은 현대어들이 적절하게 사용되는가 하면 우병우, 최순실 같은 인물들이 공자님 말씀의 예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진중함을 잃지 않는 철학적 고찰과 해석들이 초롱초롱한 수십 개의 눈동자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약 두 달 전에 이 강의가 기획되었는데 처음에는 강의 신청자가 없어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강의 시간도 길고 강의료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명로진 선생은 강의 도중 그런 얘기를 하면서 맨 처음 공고가 나자마자 신청해준 아내 윤혜자를 비롯한 몇몇 분들에게 조그만 선물을 전달했다. 선생이 공자의 고향에 가서 사온 ‘향나무 공자상’이 그것이다. 비싼 것은 아니라지만 대한민국에서 이런 선물을 받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점심 시간에 김밥을 먹을 때 수육을 가져와 나눠주신 분도 있었고 강의 후 간단한 뒷풀이 자리에서는 황현호 선생이 가져 온 ‘마약두부’를 맛보기도 했다. 심지어 꽃다발을 가져 온 플로리스트도 계셨고 커피 머신을 가져와 행사를 도운 제자도 있었다.    

북콘서트 도중에 초대 가수의 진짜 콘서트도 있었다. '술을 마시고’라는 곡으로 유명한 ‘금주악단’이 와서 세 곡을 불렀다. 워낙 독특한 인디밴드라 아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고 나중에는 앵콜곡으로 ‘낙타’라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공자님 말씀 하고 앉았네’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은 정작 공자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명로진 선생은 공자 강의를 기획하면서 스스로 만든 교재 맨 앞장에 이런 글을 인용해 놓았다. 

‘논어를 읽기 전에도 그저 그런 사람이요, 
읽은 후에도 그저 그런 사람이라면 
곧 논어를 읽지 않은 것과 같다.” 
- 정이천(1033~1107) <논어 집주> 

위 글이 아니더라도 한 자리에 모여 논어를 읽고 듣는 일은 확실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정이천의 말대로 논어를 읽은 후에도 '그저 그런 사람'인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왜 그럴까. 

논어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고 몇 줄의 문장으로 엑기스만 담긴 책이다. 당시에는 그 정도 문장만 있어도 사람들이 다 맥락을 이해 했겠지만 이천오백 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그 글만 읽어서는 앞뒤 사정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나타나 '사실 그때 공자의 수제자 자공은 이러이러한 성격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안회라는 제자는 공자에게 어떻게 편애에 가까운 사랑을 받았는지 등등을 설명해 주면서 그 시대에 이러이러한 일화들이 있었기에 아마 이런 문장이 나왔을 것이다'라고 배경을 깔아 준다면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강의를 듣는 동안 우리는 공자라는 인물이 수천 년 전 죽은 전설의 히어로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얼마 전까지 존재했었던 '셀럽' 같은 느낌으로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진지하게 그의 사상과 철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이노베이션은 옛것에서 새로움을 찾아낼 수 있는 눈에서 시작된다는 말도 있다. 우리가 오늘 논어를 접하고 내 인생이 조금이라도 변하거나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작은 단초라도 제공할 수 있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은 힘들어서 국악인들도 판소리 완창을 안 한다는 그 일곱 시간 동안 연속 강의를 마친 명로진 선생은 막판엔 기진맥진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오후 다섯 시에 이르니 아이 하나 낳은 아낙처럼 해맑고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오늘은 1강에서 5강까지 들었는데 앞으로 20강까지 들어야 ‘논어’를 다 떼는 것이라 한다. 아내는 강의실을 나오면서 앞으로 일요일마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있을 논어 강의를 신청했노라 통보했다. 오늘 특강 때문에 회사 가서 일하는 것을 내일로 미뤄 놨는데 앞으로는 당분간 일요일을 피해 토요일에 특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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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눈이 떠져 물을 마시러 밖으로 나왔다가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 아니, 사실은 물을 마시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가 잠이 안 와서 책이나 읽으려고 나왔는데 아내가 잠결에 설거지나 하라고 해서 하게 된 것이었다. 간밤에 친구들이 놀러와서 술을 마셨으므로 싱크대엔 많은 술잔과 접시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그 그릇들을 보니 책을 읽고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책을 읽기 전에 설거지부터 하자고 마음 먹었다. 처음엔 하기 싫었는데 하다 보니 점점 재미가 붙어서 열심히 하게 되었다. 설거지를 다 하고 마른 행주로 유리잔과 그릇들의 물기까지 다 제거하고 난 뒤 비로소 식탁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를 집어들었다. 


제목을 읽고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마지막 챕터 소제목이 '카레닌의 미소’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쇼코의 미소>는 제목과 달리 그리 서정적인 작품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한국에 와서 홈스테이를 하며 주인공 소유를 만나게 된 쇼코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중편 소설이다. 그런데 유창한 영어로 “언젠가는 유두 근처에 애벌레 모양 타투를 할 거야.”라고 말해 주인공 소유를 웃게 만들었던 쇼코는 시간이 지나면서 소유와 점점 괴상하고 살벌한 대화를 주고받게 되고 소설은 이 부분부터 범상치 않은 공력을 발휘한다. 

소설을 읽기 전 평소의 버릇대로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는데 거기엔 작가가 등단하기 전에 얼마나 여러 번 좌절하고 절망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었고 그 심정은 소설 속 소유가 영화감독 지망생이 되어 시나리오를 쓰고 단편 영화를 만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혹평을 받을 때의 모습으로 그대로 투영된다. 나는 훌륭하게 쓰인 거의 모든 소설은 실패담이라고 믿는 편인데 이 소설도 예외는 아니어서 소유는 끝내 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하지 못한다. 아니, 그녀가 성공했더라면 이 이야기는 쓰이지 못했을 것이고 만약에 작가가 살짝 미쳐서 그렇게 썼더라면 아무런 재미도 없는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쇼코가 일본어로 주고받는 편지에 대한 질투, 소유가 일본으로 찾아갔을 때 쇼코가 보여줬던 이상한 행동 등은 나중에 할아버지와 엄마의 비밀들과 반전으로 얽히면서 기이한 감동을 준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가 아내에게 ‘당신은 술이 취하면 안주를 너무 게걸스럽게 먹는다’는 주의를 듣고 짧게라도 독후감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의 띠지에 ‘소설가들이 뽑은 2016년 올해의 소설 1위!’라고 쓰여 있더니 정말 묘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이다. 이 느낌을 한 마디로 뭐라 표현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작년에 읽은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와 더불어 책꽂이에 나란히 세워두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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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의 한 호텔이다. 설 연휴, 아내의 넓은 마음과 배려 덕분에 아무 것도 안 하고 혼자 지낼 수 있는 24시간이 주어지자 나는 고심 끝에 호텔방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들을 데려왔다([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무라키미 하루키 잡문집] 그리고 [유혹하는 글쓰기]를 가져왔다). 이건 참으로 폼 안 나는 선정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통속적인 작가들이라니. 더구나 이 책들은 여기저기 책장을 접고 밑줄을 치고 손때가 묻어있을 정도로 전에 여러번 읽은 책들이다. 

내가 왜 이 책들을 들고 왔는지는 저녁에 교보문고에 가서 새 책을 한 권 더 산 후에 깨달았다. 요즘 잘 나가는 에세이 중 하나를 사서 그 문장의 흐름과 내용을 살펴보았는데(무슨 책인지는 안 알랴줌) 애써 고른 그 책을 읽다보니 역설적으로 하루키나 킹이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를 다시금 느끼게 된 것이었다. 

일단 둘 다 문장이 참 좋다. 쉽고 평이한 단어들을 사용하되 에둘러 가는 일 없이 하고싶은 말을 차근차근 할 줄 안다. 독자들이 혹시 못 알아 들을까 걱정해서 부사를 남발하지도 않는다(실제로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그가 쓸데 없는 부사 사용을 얼마나 경계하는지 들려준다). 작가는 스토리나 플롯만 짜는 사람이 아니다. 쉽고 친절한 문장으로 어려운 내용을 잘 묘사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설사 작가가 아니더라도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은 다 비슷하다. 

아침이다. 그래봤자 먹고 자고 하는 것을 빼면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라 내가 쓰고싶은 글까지 많이 쓰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광고 카피가 아닌 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그러면서도 편안하게 궁리할 수 있는 소중한 시공간이었다. 더구나 내 곁에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스티븐 킹이라는 엉청난 선생님들이 있었으니. 나는 하루키나 킹 같은 작품을 쓰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대의 문장 고수들에게 한 칼 가르침을 받으려 해 본 것이었는데 다행히 그들이 나를 내치지 않고 친절하게 거두어 주었을 뿐이다. 이만하면 워런 버핏과의 백만 불짜리 점심식사보다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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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 전에 소설의 수준은 결정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작가가 초고를 쓰기 전 어딜 가는가, 무엇을 읽는가, 누굴 만나는가에 따라 소설의 내용과 형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법이다.”

소설가 김탁환이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 감사의 글’에 쓴 문장이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기 전에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이야기들을 듣는지에 따라 이야기의 방향과 디테일이 달라지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일 텐데, 왜 그는 굳이 이런 얘기를 책 말미에 써놨을까. 아마도 그는 언론 보도를 통해 세월호 참사를 접하는 것과 직접 현장으로 나가 관련된 사람들과 인터뷰 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주하는 세월호의 이면이 얼마나 다른가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너무, 자주 기가 막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하려고 해도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얘기와 상황들. 나도 예전에 자주 가던 식당에서 주인아줌마가 TV뉴스를 보다가 “아유, 유족들 한 사람당 삼 억씩 받았다메? 그만하면 됐지 뭘 더 받으려고 저 난리래…”라고 말하는 걸 듣고 기겁을 한 적이 있었다. 사장님,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으셨어요? 라고 말하던 나는 그 순간의 무력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노란 리본 좀 안 달고 나오면 안 되냐고, 이젠 세월호 지겹다고 말하던 청중 속 아줌마에게 ‘자기 일이라고 생각해 보라’ 호통치던 이재명 성남시장의 심정이 그때 나와 같지 않았을까.

김탁환의 소설 [거짓말이다]는  세월호 참사 이후 맹골수도에서 선체 수색과 실종자 수습을 위해 일했던 민간 잠수사들의 이야기이다. 김탁환은 세월호 사건 이후 조선 후기 조운선 침몰 사건을 다룬 장편 [목격자들]을 펴냈지만 역사적 사건의 비유만으로는 도저히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가 없어서 결국 세월호 참사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을 다시 쓰게 된 것이다. 마침 세월호 유족들이 출연하는 팟캐스트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목격자들]을 읽고 김탁환을 사회자로 초빙하면서 소설의 구성은 더욱 객관적이고도 입체적으로 변하게 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설의 주인공을 단원고 학생들이나 유족 대신 민간 잠수사로 정한 것이었다. 사건에 가장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유족들처럼 마냥 슬픔에 잠겨 있는 게 아니라 뭔가 구체적인 ‘작업’을 수행했던 사람들. 그러면서도 그 선의를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한 건’ 하러 내려갔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도록 일만 하다가 신체적 외상과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심지어 정부로부터 민간 잠수사로 인정도 받지 못한 그들. 그 중에서도 가장 열심이었고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던 던 잠수사 나경수가 이 소설 [거짓말이다]의 주인공이다.

 소설 속 이름은 ‘나경수’로 나오지만 이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은 김관홍이다. 김탁환은 팟캐스트 진행을 하다 민간인 잠수사였던 김관홍을 만나면서 세월호 침몰 이후 벌어진 일련의 참담한 과정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된다. 일테면 희생자를 인양하는 방법은 오로지 두 팔로 시신을 껴안고 올라오는 것밖에 없다는 것도 신문이나 뉴스를 봐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나라에서 끝끝내 바디팩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아직도 배가 인양되지 않았으니 침몰된 선체의 내부를 직접 본 사람들은 잠수사들 뿐인 것이다.

작가는 세월호 유족들 뿐 아니라 진도 어민, 생존 학생과 그 부모들, 공무원, 동료 잠수사들, 심지어 일베 회원들까지 만나면서 이 사건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의 연속이고 동시에 사실들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르포타쥬 형식으로 우리들에게 알려 준다.

“돈 벌려고 간 겁니다. 간단해요…잠수사 일당이 백만 원이고, 시신 한 구당 오백만 원을 더 얹어 준다면서요? 민간 잠수사가 한 달 잠수하며 시신 열 구를 건졌다고 칩시다. 그럼 얼맙니까? 월수 3천만 원에서 시신 건진 값이 5천만 원이니, 한 달에 자그마치 8천만 원을 버는 겁니다. 그렇게 두 달이면 1억 하고도 6천만 원이죠. 두 달 동안 국가에서 공짜로 먹여 주고 재워 줬습니다. 생활비가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이죠. 나야 핸들 잡는 재주밖에 없어 이러고 있지만, 잠수기능사 자격증만 있다면 당장 그 바다로 내려갔습니다. 잠수사들에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바로 맹골수돕니다.”

소설가 김탁환이 만난 대리운전 기사 공환승(60세) 씨의 이야기다. 누가 이 사람을 욕할 수 있을까. 우리도 한때 이런 흉흉한 소문을 듣지 않았던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믿었다. 잠수사들이 그렇게 많았다는데도 단 한 명을 구조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이기도 했고 또 너무나 기가 막힌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김관홍을 비롯한 많은 잠수사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서 내려간 것이지만 그러한 마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다 죽은 뒤에 내려가면 뭐하냐', '돈 벌러 가는 것 아니냐'라는 비아냥거림이 있을 뿐 이들의 진심을 이해하고 도와준 사람은 없었다. 해군이나 해경과는 달리  작업일자 내내 육지나 항공모함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바지선에서 생활했던 민간 잠수사들은 결국 일을 끝내지도 못하고 나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았다.

김관홍은 잠수사 일을 그만두고 대리운전을 했고 아내는 꽃집을 운영했다. 하지만 바닷속에 들어가 활보하던 사람이 대리운전을 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는 없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맹골수도에 다시 간 나경수가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장면으로 끝나는 소설의 마지막을 작가에게서 듣고 마음에 들어 했다던 김관홍 잠수사는 결국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 글을 다시 읽어보니 이 독후감은 2016년 11월 6일에 쓰다가 만 것이었다. 일요일에 시작해서 그날 다 쓰려다가 무슨 일이 있어서 미뤄둔 것이 지금까지 온 것이다. 그러다가 며칠 전 인터넷에서교보문고가 2016년도 '올해의 한국소설10'을 발표했는데 거기서 1위로 뽑힌 소설이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라는 기사를 읽고 그때 쓴 메모를 다시 찾아보았다. 참담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천 일이 지났지만 선체는 여전히 인양되지 않았고 참사 당일 대통령의 일곱 시간 행적도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아무 것도 밝혀내지 못하고 희생자들도 건져내지 못한 우리들은 역사의 죄인이 아닌가.

그래서 [거짓말이다]라는 소설이 고맙다. 역사소설을 주로 써오던 김탁환은 세월호를 기점으로 난생 처음 르포에 가까운 현대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인세는 전부 세월호 규명 활동을 위해 기부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 김탁환 덕분에 우리는 세월호라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아주 외면하지는 않고 잠시 들여다 보았다는 치사한 위안을 얻는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비겁한 우리들을 위한 최소한의 알리바이 같은 소설인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간악한  무리들이 저지른 국정농단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기 힘든 시절이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으며 옳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제 오늘 다시 들춰본 이 소설책에서 김관홍이 후배 잠수사인 박정두에게 일갈했던 구절이 눈에 아프게 밟힌다.

"정두야! 작년 봄 맹골수도로 내려오란 권유를 받고 내가 무슨 생각한 줄 알아? 간단해. 이게 옳은 일인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 지금도 마찬가지야. 옳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난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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