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배명훈이라는 작가를 폐간된 잡지 [판타스틱]에서 처음 발견했습니다. 그 잡지엔 별별 기괴한 상상력을 지닌 SF작가들이 많이도 등장했는데 SF를 잘 모르는 제게는 역설적으로 듀나나 김보영 같은 인기작가들보다는 배명훈이나 정세랑 같은 '약간 삐딱한' 작가들이 더 눈에 띄었습니다. 약간 삐딱하다는 것은 우주나 물리학을 다루거나 하는 본격 SF라기보다는 개인들의 사소한 관심사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이야기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배명훈은 어디에선가 인터뷰에서 '일반 소설에다가 과학적 지식을 첨가해서 쓴 다음 SF라고 우기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스마트 D>라는 데뷔작을 준비했다는 얘기를 읽은 기억도 있었구요. 아무튼 그래서 오래 저부터 제가 좋아했던 [안녕, 인공존재]라는 작품집을 '독하다 토요일'의 다섯 번째 작품으로 선정을 했습니다. 

꽤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크레인 크레인>, <누군가를 만났어>, <안녕, 인공존재!>, <변신합체 리바이어던>만 다시 읽고 대학로 책책으로 갔습니다. 손영연 씨는 SF인지 모르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데 일단 글이 신기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표제작에 나오는 쓸 데 없는 물건, 즉 '무용지물'에 대해 호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느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반면 윤혜자 씨는 시종일관 불편한 책이었다고 했습니다. 일단 '너희들은 이렇게 못 쓰지?'라고 뻐기는 듯한 작가의 잘난 척이 싫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책 뒷쪽에 붙어있는 '출간사유서'를 읽고 더 심해졌다고 했습니다. 존재성에 대해서 나는 이 정도 쓸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작가의 태도가 몹시 거슬린다는 것이었죠.  윤혜자 씨는 언제나 그랬듯이 남편이 가진 책 말고 이번에 새로 똑같은 책을 구입했는데 2010년 초판인쇄를 시작한 책이 아직도 초판인 것은 그런 태도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내놓았습니다. 작가의 태도에 대해서는 저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배명훈의 작품엔 적어도 '인간'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소심한 항변을 했습니다. 

서동현 씨는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읽는 것처럼 새로웠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아이작 아시모프를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그 기발함이 정통 SF와는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이나 기술을 소재로 샤먼이나 초월까지 자유롭게 다루는데 이는 마치 예전 [퇴마록] 시리즈를 썼던 이우혁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기발함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는데 <안녕, 인공존재!>에 등장하는 발명품들은 만약 실제로 존재하기만 한다면 당장 구입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고 했고 특히 <얼굴이 커졌어>를 읽고 많이 웃었다고 했습니다. 

김성희 씨는 다른 사람처럼 별다른 의심이나 고민 없이 그냥 읽었는데 <변신합체 리바이어던>이 제일 재미 없었고 기중기의 신이 등장하는 <크레인 크레인>의 상상력이 돋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오의 침대>는 동화 같았다고 소감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안녕, 인공존재?'의 안녕이라는 말이 만나서 하는 인사일까 아니면 헤어질 때 하는 인사일까도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존재는 아름답다'라는 것에 대한 얘기가 아닐까 하는 의견도 내놓았습니다. 

외교학과를 나온 작가의 이력 때문에 '요즘은 뭐 할까?'라며 혹시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궁금함도 등장했습니다. 솔직히 글만 써서 먹고 살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고 글 쓰는 스타일로 봐서 다작을 하거나 전업작가로 생활 할 것 같지는 않아서 나온 궁금증이었겠죠. 윤혜자 씨는 자기 혼자는 절대로 읽지 않을 작가인데 이런 모임 덕분에 억지로라고 읽에 되어 좋다고 하며 웃었습니다. 정아름 씨는 세 번이나 이 책을 읽었다는 말로 소감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이해가 안 돼서 되풀이 읽기 시작했다는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얼굴이 커졌다>는 너무 웃겼는데 좀 유치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매뉴얼>은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연대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1500년 전 얘기가 갑자기 나와버려서 어리둥정 했다는 것이었는데 저는 그 작품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 더 의견을 보탤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정아름 씨는 <누군가를 만났어>에 나오는 '고고심령학자'라는 직업이 실제로 있는지 알았다며 웃었는데 얼마 전 같은 제목으로 장편소설이 또 나온 걸 보면 배명훈은 이 가상의 직업에 대한 애착이 매우 큰 것 같습니다. 진주 씨는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계속 참석을 못하다가 이날 처음 책책에 와서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안녕, 인공존재!>에 나오는 신우정 박사의 유서의 내용과 비슷하게 최근에 4년 전 남자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펼쳐주었습니다. 소설에 나온 존재론적 이야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쿨하게 엮어 얘기하는 모습이 멋져보였습니다. 

임기홍 씨는 이 소설집을 읽고 자신이 고리타분한 사람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는데, 예를 들면 건축에 있어서도 자신은 벽의 마감은 물론 조명 벽지색깔까지 모두 맞아야 집이 완성되었다고 보는 입장인 반면 이 소설들은 어딘가 미완성 같다고(마치 당인리에 있는 커피숍 '엔트러싸이트'처럼 벽마감이 안 되어 있고) 느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재미있는 게 신기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과학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 작가의 경우는 여러가지 매력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자기 필요한 대로 써먹는 느낌이라 그게 못마땅하다고도 했습니다. 마치 착한 친구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해먹는 느낌이라는 것이죠. 독특한 견해였습니다. 

윤혜자 씨는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 즉 김탁환의 [이토록 고고한 연예]와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를 비교해본 느낌을 전했는데 [이토록 고고한 연예]가 물흐르듯 이어지는 스토리텔링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안녕, 인공존재!]는 SF이면서도 문학의 완결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게 오히려 '문청'이 쓴 소설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조금 더 자유로워도 되지 않을까, 하는 얘기를 했더니 이 책이 나온 곳이 '북하우스 퍼블리셔스'라는 곳이라 어느 정도는 전형성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공식적 루트로 등단한 작가들이게는 뭔가 '공식'이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그동안 우린 모여서 등단한 작가의 작품만 읽었는데 만약 그렇지 않은(이를테면 웹작가라든지)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다면 고른 문장력이나 작품성을 보증받기 힘들다는 점도 있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서동현 씨의 지적대로 정통 SF도 아닌 소설에 제목도 SF 팬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라 잘 안 팔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솔직히 배명훈은 장편보다는 단편이 좋다고 하며 특히 감동스러웠던 작품 중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를 인터넷 이용자들이 집단으로 구해내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더니 누군가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라고 제꺼덕 알려주었습니다. 그밖에도 배명훈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은경'이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 예전에 인기 높았다가 이제는 존재감이 없어진 웹작가 '귀여니'에 대한 이야기,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다는 신춘문예 이야기 등등이 중구난방으로 이어지다가 다음엔 정세랑의 연작소설집 [피프티 피플]을 읽자고 합의하며 2차를 가기로 했습니다. 원래 윤혜자 씨와 손영연 씨는 광화문 월향에서 이여영 대표가 번개를 쳤던 '브라쟈 풀고 마십시다' 라는 여성들만의 행사에 참여하기로 했었으나  시간이 애매해서 포기하고 같이 2차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대학로에 있는 삼겹살집에서 이어진 이차에서 매우 많은 양의 고기와 술을 먹고 마셨고 3차로 대학로 '나무요일'에 가서 또 맥주를 마시다 헤어졌습니다. 사실은 위에 쓴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는데 제가 회사 일이 바빠서 - 사실은 다음날 즉시 써야하는데 숙취와 게으름 때문에 - 후기를 너무 늦게 쓰는 바람에 빼먹은 내용들이 많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모임은 더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제가 쓴 세 줄 평과 함께 이번에 참석하지 못했던 김하늬 씨가 카톡으로 보내온 작품평을 첨부합니다. 

편성준의 세줄평 : SF이면서도 서사가 능숙한 소설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안녕, 인공존재!]는 반짝이는 아이디어 뒤에 존재론적 성찰까지 깔려 있어서 읽는 맛이 남다른 단편들이었다. [팔란티어] 이후 종적이 묘연한 김영민과 달리 배명훈은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활동을 계속 해줄 것으로 묻는다. 


김하늬 씨가 카톡으로 보내 온 평들 : 헉... 보낸다는게 시간을 못봤습니다ㅠㅜ 뒤풀이중이실거 같지만 첨부합니다.

안녕, 인공존재! / 배명훈

■ 총평
데우스엑스마키나를 사랑하나보다. 뭘 말하려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구성이 흔들리지 않아서 제목만 봐도 내용이 기억난다. 재미있다! 각 단편 별로 화자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다. 인물의 특성을 잘 살린 것 같다. 그간 읽은 단편작가들(김애란, 레이먼드 카버 등)은 그들의 특징이 글에 많이 묻어났다. 배명훈의 소설 연결고리는 발랄함과 SF라는 점 정도만 있고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다. 본받을 점이 보이는 소설집.

■ 크레인 크레인
크레인을 신적 존재로 보는 것 까지 참신하고 좋았는데 신이 등장하며 참신함을 부셔버렸다.

■ 누군가를 만났어
세 국가를 모은 이유는 외교상황을 빗대고 비꼬려고 하는 것이었을까? 역시 데우스엑스마키나...

■ 안녕, 인공존재!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 교류를 해야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과, 스스로를 증명해 폭발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한 자갈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글의 전개 내용도 안정적이다.

■ 매뉴얼
참신하다. 매뉴얼을 마로하, 신적 존재와 연결한게 인상적이지만, 끝이 너무 허무하고 끝나지 않은 느낌이 아쉽다.

■ 얼굴이 커졌다
알레고리 소설이었다. 얼굴이 커짐을 프로로 의미했으나 가정, 즉 행복을 찾은 나는 얼굴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행복을 얼굴의 크기로 비유한 것 같다. 가장 좋다.

■ 엄마의 설명력
아이의 세계는 부모라고들 하는데, 그런 걸 보면 주인공은 30대가 되어서도 부모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건 현 세대를 풍자한게 아닐까.

■ 변신합체 리바이어던
홉스의 사회계약론에서 영감받은듯. 로봇의 합체로 국회를 비꼰 것도 참신. 신을 죽이는 행위로 현대 예술을 일컫는 것 같다. 두번째로 좋다.

■ 마리오의 침대
사랑은 돌고 도는 것? 배우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점도 재미있고 문제를 몰래 해결하는 것도 사랑스럽다. 세번째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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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출퇴근길에 조금씩 읽었던 이상한 제목의 단편집 [관내분실]은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마침 회사 카피라이터 박수가 광고회사 사람들이 쓴 초단편집 같은 걸 빌려주며 재밌다고 하길래 뒤적여보고 나서 느낀 결론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김동식의 소설집들처럼 기발한 발상과 시퀀스로만 이루어진 소설은 내가 매우 재미없어 한다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좋은 이야기 속엔 '인간' 또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받은 게 있으면 줘야 한다는  '기브 앤 테이크 정신'으로 나도 그 후배에게 이 책을 권해줬는데 표제작을 읽고 나더니 "짱 재밌어요, 실장님!"이라고 마음껏 감탄해서 나를 기쁘게 했다. 
 
대상 작품이 표제작인 <관내분실>인데 얼마 전 첫 아이를 임신한 주인공 지민이 '마인드 도서관'에서 분실된 죽은 엄마의 자료를 찾아 헤매는 게 중심 스토리다. 어이 없게도 죽은 뒤에야 '실종' 처리가 된 엄마의 이야기로, 거기엔 도저히 화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식구들 모두에게 냉담한 남동생의 이야기가 섞여있다. 지민은 마인드 검색에 필요한 자료들을 찾다가 '김은하'라는 이름을 가졌던 엄마가 결혼 전 출판사에 다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고 그걸 토대로 '관내 분실'되었던 그녀의 자료를 찾아낸다. 이 과정 중 지민이 TV를 통해 보게 된 '인간의 영혼과 마인드는 같은 것인가?'에 대한 토론 프로그램은 작가의 과학적 지식과 존재론적 고민을 함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결과들은 부정적입니다. 마인드가 영혼이 아니라는 가장 결정적인 반박은, 그렇게 스캐닝된 시냅스 패턴이 더 이상 가소적으로 변형되지 않는다는 관찰로부터 나왔죠. 한 사람의 자아는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성장하고, 배우고 반응하고, 노화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변형되지 않는 마인드는 영혼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은 시점에서 고정되어버린, 일종의 박제된 정신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자책과 데이터로 구성된 마인드가 과연 인간의 온기까지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심이 엇갈리던 소설은 마지막에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엄마와 딸의 재회 장면을 짜릿하고 짧게 포착한다. 아마도 심사 위원 중 한 사람인 배명훈이 쓴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다. 나도 읽으면서 반가웠다. 이 작품은 분명 SF소설이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뇌과학은 잘난 체하는 첨단 지식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이해와 갈등, 그리고 새로운 발견을 위한 지렛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책 말미에 붙은 심사평들을 읽어보면 김초엽이라는 작가가 낸 단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유력한 대상 후보였는데 자신이 쓴 <관내분실> 때문에 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뛰어난 SF작가의 탄생을 예고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김초엽의 작품 말고도 김혜진의 <TS가 돌보고 있습니다>와 오정연의 <마지막 로그>도 흥미롭게 읽었다. 심사평 중에서도 재미 있는 글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울시립과학관의 관장 이정모 편이었다. 이정모 관장은 아무리 작품이 뜻하는 바가 좋고 잘 쓰여졌다 하더라도 재미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유미주의'를 내세웠는데 내게는 매우 설득력 있는 글이었다. 그리고 다른 심사위원들이 대상과 가작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에 비해 이 관장은 자기가 예심에서 골랐다 떨어진 작품들만 다루고 있다는 점 역시 특이했다. 본선에 올라야만 심사평을 받는다는 상식을 뒤엎고 낙선작들을 거론한 것이다.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의기소침해 있었을 작가 지망생들에게 이보다 더 큰 위안과 격려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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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책장을 정리하자고 한다. 올 8월이면 이 집으로 이사온 지 4년이 된다. 7층에서 바라보는 한강이 한 눈에 보이고 거실에는 친구들과 술 마시기 좋은 테이블도 있고 책꽂이도 양쪽으로 큰 게 있어서 더 살고 싶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엔 이사를 가야 할 것 같다. 아내가 눈대중으로 세어보니 대략 1,500권 정도란다. 책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가지고 있는 책을 줄여야 한다. 어떻게 줄일까.


일단 무슨 책을 남기고 무슨 책을 없앨 것인가부터 정해야 한다. 오늘 아침에 출근길에 아내와 한강변을 함께 걸으며 그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며칠 전 친구 표문송과 술을 마시다 무슨 얘기 끝에 내가 '십수 년 전에 홍명희의 <임꺽정> 열 권을 사놓기만 하고 아직 못 읽었다'고 했더니 그 책만큼은 절대 버리지 말고 나중에라도 꼭 읽으라고 한 게 기억난다. 그 책을 기준으로 남겨야 할 책과 없애야 할 책들을 생각해 보자.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 중엔 아무래도 <태백산맥>을 다시 읽고 싶어질 것 같다. <아리랑>은 읽으면 가슴이 너무 아리고 답답해져서(특히 정신대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부분) 다시 읽기 힘들 것 같고 <한강>은 두 책에 비하면 개인적으로 크게 당기지가 않았다. 그러니 <아리랑>과 <한강>을 다른 데로 보내고 필요하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도록 하자.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책들이나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늘 잘 팔리는 작가의 책들은 초기 희귀본이 아니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으니 모두 내보내자. <용은 잠들다>나 <방과 후> 같은 건 기념으로 한 권씩 남겨 놓을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들도 몽땅 내보내기로 하자. 이미 후배 윤보라가 내가 개포동 옥상 있는 집에 살 때 놀러와 우리집에서 술을 마시고 <개미> 전집 다섯 권을 빌려가다가 그날 밤 택시 안에서 분실한 터라 이건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하다. 

창간호부터 절판될 때까지 읽었던 SF잡지 [판타스틱]은 놔두자. 거기서 배명훈의 소설들도 만났고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보건교사 안은영>의 저자 정세랑의 단편도 처음 접했으니까. 1983년도쯤 문학잡지 [현대문학]을 일 년치 구독한 것은 순전히 당시 대성고등학교 국어교사인 권희돈 선생님 때문이었다. 수업시간에 '벌레'인지 '벌레구멍'인지 하는 시를 칠판에 적어주셨는데 시 말미에 '현대문학 몇월호'라고 출처가 씌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분히 허영심에서 선택한 정기구독이었지만 나에게는 당시 몇 달치 용돈을 모아 저지른 작은 사건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 잡지에 막 연재를 시작했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제목으로나마 먼저 구경할 수 있었다. 현대문학 과월호도 지금은 구하기 힘든 책이 분명하니 그냥 놔두기로 하자. 

김용 선생의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는 어떻게 할까. 난 <사조영웅전>을 너무 재미있게 읽은 나머지 중독성 때문에 <신조협려>까지 선뜻 손을 대지 못하다가 여태 못 읽은 케이스다. 엉뚱하게도 무협지를 좋아하는 뚜라미 동기이자 '오근네닭갈비'1,2호점의 사장님인 고한우가 빌려다가 며칠 밤 통독을 하고 다시 돌려줬다. 허멘 멜빌의 <모비딕>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백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 읽다가 만 책들은 그냥 놔둘 생각이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서>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등은 너무 어렸을 때 읽었으므로 다시 읽으려고 일단 눈에 들어올 때마다 사놨으나 아직 읽지는 못한 책이다. 일단 놔두자. 대신 아멜리 노통브나 무라카미 류, 마루야마 겐지, 야마다 에이미 등 한때를 풍미했던 작가들의 작품은 언제든지 구할 수 있으니 모두 내보내자. 아,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떻게 할까. 왠지 이 사람 책은 그냥 놔두고 싶어지는데. 그냥 무시하고 싶다가도 그 꾸준함이나 향상성 때문에 자꾸 생각나는 작가다. 최근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단편들만 읽어봐도 그렇다. 어쨌든 참 잘 쓴다. 

황석영의 소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무기의 그늘>과 <손님>만 남길까 한다. <손님>은 어쩌다보니 세 번이나 같은 책을 샀다.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없게 가까운>도 세 번째 산 책이다. 내보낼 순 없을 것 같다.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 같은 책은 쉽게 절판될 것 같으니 놔둬야 한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이나 <나라 없는 사람> 같은 책을 어찌 내보낼 수 있으랴. 밀란 쿤데라의 책들도 일단 다 품고 있어야 한다. 이런 책을 내보내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새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도 누군가 훔쳐가는 바람에 다시 샀던 책이다. <벨벳 애무하기>라면 혹시 몰라도 이 책은 안 된다. 모옌의 <홍까오량 가족>은 인덕이한테 선물받은 책인데 아직 안 읽었고 <탄샹싱>은 정말 정말 어렵게 구했던, 애지중지하는 책이다. 그런데 바르가사 요사의 책들은 다 어디 간 걸까. 


김훈의 책들은 일단 모셔 두기로 한다. 윤대녕의 단편집들도 마찬가지다. 폴 오스터의 책 중 그래도 <뉴욕 통신>쯤은 남겨둘까. 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서 집에 가서 어떤 책들이 꽂혀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싶다. 이러다가 몇 권이나 내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서재 결혼시키기'보다 어려운 게 '서재 시집보내기' 인 것 같다. 이건 일단 거실 왼쪽에 있는 내가 산 책들 중심의 책장 이야기다. 오른쪽에 아내가 산 책들까지 생각하면 정신이 약간 아득해진다. 아내는 그 책들 중에서 또 어떤 걸 골라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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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31일 저녁, 저는 갑자기 한 해 동안 읽은 책들에 대해 뭔가 정리를 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이 글을 휘갈기고 나가 술을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글은 2년 전에 쓴 메모입니다. 뭐, 그렇다고 그 해 읽은 책을 다 쓴 건 아니고 생각나는 것만 몇 권 추려 간단하게 리뷰를 썼습니다. '나중에 정식으로 한 권씩 다시 써야지'라는 생각이었으나...역시 그런 게 생각대로 될 리가 없죠. (그러고보니 '생각노트'라는 제목도 여기서 나왔군요)



2010년의 장편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_ 조너선 샤프란 포어

아홉 살 소년 오스카가 들려주는 놀라운 이야기. 911테러 당시 무역센터에서 회의를 하다가 죽은 아빠의 다급한 전화를 받지 못해 트라우마에 빠진 아이의 이야기, 그리고 2차대전 당시 독일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 남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만 했던 할아버지의 얘기가 겹친다.

그런데 이 슬프고도 웃기고 품격 있는 문체는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어느덧 신선한 파격으로 흐른다. 놀라운 필력과 참신한 기획으로 마음을 흔든 역작. 단연 올해의 책으로 꼽을 만하다. 저자의 데뷔작 <모든 것이 밝혀졌다>도 출간되어 있다. 는 대학생 때 논픽션으로 구상했던 작품인데 지도교수의 권유로 인해 소설로 개작되었다고 한다. 첫 작품부터 작가의 뚝심과 역량을 느낄 수 있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_ 주노 디아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왕따. 섹스를 좋아하는 친누나와 살지만 정작 자신은 아직도 숫총각인 찌질이. 게임만 좋아하는 뚱뚱하고 못생긴 오스카 와오의 이야기가 도미니카 공화국의 악명 높은 독재자 투르히요의 역사와 유머러스하게 엮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처음엔 뭔 얘긴가 하다가 읽을수록 빠져드는 마술 같은 책. 주노 디아스는 올해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조너선 샤프란 포어와 더불어 천재라는 말을 들어도 당연한 작가. 그의 데뷰 단편집 <드라운>은 나 같은 놈이 읽고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책인가 보다. 읽다가 어느 순간 포기하고 다시 책장을 들추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날을 잡아서 정갈한 음식만 골라 먹은 다음 맑은 정신으로 다시 천천히 읽을 계획.




 
2010년의 단편

 
암소 _ 토마 귄지그


앙리라는 한 남자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신문 찌라시에서 ‘여자친구를 찾고 계십니까? 자연스럽고 순수한 교제를 원하시는 분들만 연락 바랍니다.(성적 접촉이나 매춘 아님)’이란 요상한 문구를 발견하게 된다. 앙리는 한 여자를 만나 집으로 데려오는데, 알고 보니 이 여자는 어떤 농학자가 유전자를 조작해 여자로 탈바꿈시킨 암소였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이라는 소설집에 있는 기발하면서도 황당한 단편 <암소>는 이렇게 시작한다.

정말 골 때리는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설이 골 때리는 얘기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이런 소재를 통해 인간의 모순과 인생의 슬픔, 외로움 등을 잔인할 정도로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암소> 외에도 여섯 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는데, 모두 다 “도대체 뭘 먹고 자란 인간이길래 이따위로 못돼먹고 뒤틀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고 환호하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가학적인 유머감각에 낄낄거리다가도 갑자기 세상 살기가 싫어질 정도로 살벌한 냉기를 함께 느끼게 해주는 미친 작품들.


 안녕, 인공존재 _ 배명훈

<판타스틱>이란 장르문학 잡지를 통해 배명훈을 만나 그의 작품들에 매료되어 지낸 지 벌써 이삼 년이 되어 간다. 데뷔 당시에 “설정을 굉장히 세게 한 뒤 일반 소설 쓰듯이 쓰고 그냥 SF라고 우기면 되지 않을 까 될까?”라는 생각으로 SF작가가 되었다는, 이 농담같은 그의 소설들은 그래서 그런지 설정만 SF이고 등장 인물들이나 행동양식, 사고방식 등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로봇공학자들이 벌레보다 작은 극소형 로봇으로 벌이는 스파이전 이야기 , 실연 당한 은경 씨가 구입한 중장비가 하필 예비군 훈련 징발 대상이 되는 바람에 화성까지 날아가 "예비군 훈련은 간식 안 주나요?"라는 엉뚱한 질문을 일삼다가 급기야 기계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 이야기 , 수면공학을 연구한 덕분에 꼴보기 싫은 총통의 임기 5년 동안 잠을 자게 된 남자 이야기 ...

이번 창작집 <안녕, 인공존재>는 이전의 단편들이나 연작소설 보다 더 재밌고 신기한 이야기들로 그득하다. 난 <안녕, 인공존재>와 다른 창작집 표제작이이기도 했던  <누군가를 만났어>가 특히 좋았다.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과 유려한 문체가 '동시패션'적으로 뛰어난 작가. 어떤 면에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보다 더 좋다.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 – 휘뚜루마뚜루 세계사1 _ 최제훈

얼마 전 독서일기에도 얘기했던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에 실린 단편. 다채롭고 귀여운 인문학적 지식에서부터 시침 뚝 떼고 덤비는 형식의 변주까지. 이 작가의 입담은 정말 굉장하다. 말이 필요 없다. 내용에 대해 더 이상 발설하고 싶지 않다. 이런 책은 전해 듣는 것보다 직접 읽는데서 오는 쾌감이 훨씬 더 크니까.



대설 주의보 _ 윤대녕

 
당대 젊은 작가들 작품까지 빼놓지 않고 섭렵한다는  탐욕의 학자 김윤식은 이인직의 <혈의 누> 이후 대한민국 문학사의 새로운 연대기를 여는 작품으로 대뜸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을 선정한 적이 있다. 90년대 혜성처럼 등장해 새로운 감수성으로 사람들에게 '생물학적 상상력'이니 '존재의 시원'이니 '회기'니 하는 알쏭달쏭한 단어들을 주입시키던 그의 섬세함은, 그러나 곧 세상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강산이 한 번 반쯤 변했을까.여름 휴가를 떠나기 직전,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나는 그의 신작 <대설 주의보>를 읽었다. 여전히 윤대녕이었다. 툭하면 여행을 떠나고, 주인공은 먹물이 든 비정규직 지식인이기 일쑤고,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산사로 섬으로 바닷가로 흘러다닌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뭐가 사연이 있는 여자들을 만나 잠깐씩의 연애를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맨날 통속적인 연애 얘기를 다루면서도 윤대녕이 쓰면 그것이 통속에서 벗어나  일정한 품격과 정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재수없는 문어체로 꼰대같은 대사들을 뱉어내기 일쑤인 남자 주인공들에게도 어느덧 중독이 되어서 그런지 결국은 아무렇지도 않아지는 것이다. 그 옛날 읽는 사람들 가슴을 뻐근하게 했던 의 연인들이 다시 만나 못다한 뒷얘기를 이어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는, 그러나 뜻밖에도 따뜻하고 희망적인 결말을 맞는다. 파리하게 여리고 냉혹하던 윤대녕도 이제 나이가 든 것일까.

윤대녕의 소설을 읽고 나면 갑자기 혼자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물론 내가 당장 집을 나서서 선운사나 속초, 강릉으로 아무리 돌아다닌다 해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랑 술을 마시며 말도 안 되는 화두 몇 개를 서로 집어 던지다가 결국 함께 자는 일은 절대 안 생긴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런 아련한 예술적 향취와 수채화적인 풍경에 갇혀 꼼짝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 편 한 편 다 표구를 해서 조용한 화랑에 걸어놓고 싶은 느낌의 예술 소설들. 표제작인 <대설주의보>와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가 그 중 특히 좋았다.

 

  박시은 특급 _ 곽재식

이 단편은 원래 2009년도에 출판된 <U,ROBOT>이라는 작품집에 실린 소설인데 뒤늦게 책을 사서 읽은 내가 개인적으로 감동한 작품이라 그냥 올해의 책에 올리게 되었다.

주인공이 일하는 '한국 천문 정보 해석 연구소'라는 이상한 기관은 사실 별 볼일 없는 곳이었다. 별을 쳐다보는 곳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별 볼 일 없는 곳인 이 장소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주인공이 미국에서 보내온 자료들을 해석하다가 우연히 외계인과 통신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세계 최초, 인류 최초로 말이다. 당장 연구소는 수십 배로 확장이 되었고 주인공은 급기야 주요 인물로 부각이 된다. 그런데 주인공은 엉뚱하게도 동료와 한 여자를 두고 싸우며 알력을 쌓다가 이른바 '박시은 문제'로 왕따가 된다.

박시은 문제란 주인공이 예전에 <SBS 단막극장 >에서 방영되었던 탤런트 박시은 주연의 <멋지게 세이 굿바이>라는 드라마에 대해 말다툼을 하다 동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 것을 말한다. 황당한 것은 주인공 말고는 아무도 그 드라마의 존재 자체를 기억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인터넷으로 방송국으로, 심지어 박시은 집으로 전화를 해봐도 사실 확인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러다가 드디어 외계인과 교신을 하게 되는 날이 왔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문화부장관이자 차기 유력 대권주자가 역사적인 첫 교신 담당자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외계 문명의 신호를 처음 발견한 주인공에게로 그 영광이 돌아가게 되었다. 사필귀정. 역사적인 순간이다.  세계인들의 눈과 귀가 한꺼번에 집중되는 코리아에서 KBS 김경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인공은 중앙 통제실로 올라 미국 대통령, 한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었고 심지어 키보드 앞에 앉기 직전엔 문근영이 와서 뺨에다 뽀뽀까지 해줬다. 주인공은 외계 문명과의 첫 교신 내용으로 너무 거창하고 철학적인 거 말고, 그냥 간단하고 평범한 인사말을 하라는 데이비드 그로스 박사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혹시 전에 SBS TV에서 단막극으로 방송했던 <멋지게 세이 굿바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가? "

통쾌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곧바로 그 드라마를 찾아 보았다'는  외계인의 성실한 답변에 의해 자신의 오타쿠적인 정체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고, 다음날 SBS 토크쇼에 탤런트 박시은과 함게 출연해 외계 문명과 처음 교신하게 된 계기와 고충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물론 박시은이 출연했던 단막극 <멋지게 세이 굿바이>는 전 세계 107개 방송국에서 우주 문명 특선으로 재방송되었다...


 

 2010년의 에세이

 몰락의 에티카 _ 신형철

현재 대한민국에서 글 좀 쓴다는 작가들이면 누구나 줄을 서서 신형철이 평론을 써주기를 기다린다는 농담은 현재 신형철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 평론가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책에서 김훈의 소설에 대해 쓴 평론을 읽어보면 그의 진가를 당장 느낄 수 있다. 더구나 신기한 것은 신형철은 평론가임에도 불구하고 글에서 어떤 ‘고결함’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고종석과는 또 다른 느낌의 지식인을 만났다고 해야 할까. 폭설로 고립된 산장같은 데서 한가롭게 천천히 다시 읽고싶어지는 책이다.

 

 책을 읽을 자유 _ 로쟈(이현우)

전작인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로쟈가 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은 독서 도중 벌떡 일어나 이 책에 언급된 다른 책을 당장 사러 나가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그가 읽고 소개하는 싸르트르, 도스토예프스키, 강상중, 지젝, 보드리야르, 벤야민에서 타르코프스키나 우석훈, 가라타니 고진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독서편력들은 책을 읽는 동안 '우리가 새롭게 만나고 싶어진 저자들의 리스트'로 돌변하게 된다.

이현우는 '그 사람이 읽는 책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책에 대해 무척 엄격한 편인데, 그게 다 독자의 입장에 서서 취하는 엄격함이라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이 책에서는 특히 번역서의 문제점에 대해 여러 번 지적하는데 아주 구체적인 단락들을 원문과 비교해 자세히 실어놓았다. 옛날에 읽은 고전이라고 하더라도 왜 다시 새롭게 번역된 책으로 다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프롤로그에서 독서의 필요성에 대해 쓴 그의 글은 평범한 진리면서도 이 책의 집필 의도(또는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를 아주 잘 설명해 준다.

"흔히, 인간을 '도구적 인간'(호모 파베르)으로 정의하면서, 인간이 똑똑해서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똑똑해지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한 사정은 독서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듯싶습니다. 즉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집니다. 따라서 독서 능력이라는 '옵션 액세서리'는 있으나마나 한 장신구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_ 장하준

지난 30년 간 전 우주적인 절대 진리처럼 맏들어졌던 '시장 자유주의'라는 개념에 강력하게 '안다리 후리기' 기술을 건 장하준의 역작. 최근 독서일기에 언급을 했으므로 새삼 다시 할 얘기는 별로 없지만, 특히 이 책이 올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어 우리나라 인문학 독서 시장에 새로운 불을 지폈다는 건 자랑스럽게 다시 거론하고 싶어진다.

언론에서는 올해 이토록 딱딱하고 어려운 책들이 새삼 우리 독자들에게 환영을 받은 이유가 현 정부의 비도덕성, 무능력이나 세계적인 경제난을 반영한 결과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그건 이차적인 문제다. 가장 첫 번째로 꼽아야 할 것은 바로 텍스트의 우수성이다.

이 책은 일단 호기심을 자아내는 제목부터 독자들의 눈길을 확 끌고, 내용도 아주 쉽고 간단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이전 인문학 책들보다 우수한 것이다. 그러니 나같은 문외한들도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며칠 전 전철에서 이 책을 읽는 50대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다. 선입견 때문이겠지만 평소 인문학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그 아주머니의 독서 풍경을 보면서 나는 묘한 동지애까지 느낄 수 있었다.



삼성을 생각한다 _ 김용철

'이 책을 읽으면 뭐하냐? 어차피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도 삼성 꺼고, 전화기도 삼성 제품인데. 삼성 욕하면서 카타르시스는 잠깐 느끼겠지만 너라구 뭐 다르겠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차피 똥 될 거 밥은 먹어서 뭐하나, 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삼성이 힘이 셀수록, 현대가, 효성이 태영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국민들의 돈을 훔치면서도 큰 소리 빵빵 칠수록, 우리는 우리 앞에 던져진 최소한의 진실 앞에서라도 두 눈을 부릅 떠야 예의 아니겠는가.

김용철도 어차피 7년간이나 삼성밥 먹던 놈 아니냐고? 맞다. 그래서 더 대단한 것이다. 7년 동안 '호의호식'과 '장밋빛 미래'라는 마약 속에 빠져있던 한 엘리트가 뒤늦게 기적적으로 그 늪에서 뻐져나와 목숨 걸고 쓴 책이 바로 다. 어떤가? 가끔 이런 미친놈이 있다는 건 아직도 우리에게 희망이 조금 남아 있다는 증거 아닌가?


 

생각 노트 _ 기티노 다케시

  기타노 다케시는 한 번도 영화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신기하지 않은가? 기타노 다케시가 쓴 책 를 읽어보면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는 대학 시절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 것도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죽어버린다면, 이라는 두려움에 떨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횡단보도 앞에서 문득 '대학을 그만 두자'라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날로 만담가의 길로 접어든 그는 그때부터 온 청춘을 코미디에 바친다. 얼마나 열심이었냐 하면 여자와 섹스를 하는 순간에도 머릿속에서는 내일 공연할 만담 소재를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가난하게 살았던 어린 시절의 얘기도 기타노 다케시가 하면 재미있는 얘기가 된다. 고생하던 시절의 얘기도 기타노 다케시의 입을 통하면 꼭 필요한 과정이나 신기한 무용담처럼 들린다. 장애물을 넘어서는 것이 크리에이티브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유머와 새로운 아이디어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그는 참 멋진 인간이다. 진정 부러운 사람이다.

 



 2010년의 추리소설

 로마 서브 로사1,2,3,4 _ 스티븐 세일러

<로마 서브 로사>는 올해 읽은 책 중에도 가장 재밌고 뿌듯했던 작품이다. 일단 탐정물인데다가 스케일도 크고 문체도 좋고 캐릭터들도 훌륭하다. 주인공이자 사설 탐정인 '더듬이' 고르디아누스는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다. (더듬이라는 별명은 늘 사건의 자료를 수집하고 날카로운 추리를 일삼는 고르디아누스의 명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촉이 있는’ 사람 정도가 되겠다)

소설의 배경이 로마시대이고 키케로나 슐라, 스파르타쿠스, 크라수스 등 실존 인물들을 다루고 있지만, 고르디아누스만은 가상의 인물로 설정함으로써 작가 스티븐 세일러는 독자들로 하여금 매우 자유스럽고 현실적이면서도 쿨한 성격을 가진 주인공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같다. 더구나 로마 시대는 그리스도 이전 세대이기 때문인지 돈, 종교, 윤리, 섹스, 동성애(작가인 스티븐 세일러가 동성애자다) 등을 그리는 데 있어서도 훨씬 자유롭고 심지어 급진적이기까지 하다.

1권 [로마인의 피]에서 키케로와 고르디아누스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로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도 계속 으르렁거리는 사이로 나온다. 난 이게 이 소설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고르디아누스가 키케로에게 주눅이 들거나 무조건 존경하는 역할이었다면 퍽이나 무미건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존경은커녕 열심히 변론을 준비하는 키케로의 목소리를 두고 '앵앵거린다'고 빈정거리는 고르디아누스는 매우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엔 또 둘이 하나로 뭉치기도 하고.

전편에 흐르는 은근하고 현대적인 유머 감각 또한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2권 [네메시스의 팔] 초반부에서 고르디아누스가 사건 의뢰 비용을 평소 임금의 다섯 배로 부풀려 협상하는 데 성공한 뒤에 "마침내 뒷담을 보수하고 아트리움의 부서진 타일을 교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어쩌면 베데스타를 거들 노예 소녀도 하나 들일 수 있을 터..."라고 생각하며 기뻐하는 대목에선 나 혼자 킬킬대고 많이 웃었다.

<로마 서브 로사>는 문장이 참 좋다. 번역도 굉장히 좋은 편이다. 장중하면서도 유연하고 기지와 통찰력도 넘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것은 고르디아누스의 캐릭터일 것이다. 힘이 세거나 성격이 거친 것도 아니어서 늘 부상을 당하거나 위험에 처하게 되고, 또 사건을 맡아 정신 없이 동분서주하는 처지지만 결국 만화 '가제트 형사'처럼 사건 해결의 핵심에서는 조금 비껴나거나 가려지는 씁쓸한 상황들이 그를 더욱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마침 화제의 미드 <스파르타쿠스>와 소설 2권의 시대가 딱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더 즐거운 여름이었다. 난 아무래도 고르디아누스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건 이제 겨우 4권. 아직 4권은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았다. 의 춘희 말마따나 '냉장고에 일주일 치 양식을 쌓아놓은 것처럼 뿌듯'하다.

 

 


2010년의 만화

 심야 식당 _ 아베 야로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여는 심야식당이다. 메뉴는 그냥 밥하고 그날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음식 아무거나. 그래서 어떤 사람은 비엔나 소시지만 잔뜩 먹고 가고 누구는 삶은 계란을 먹고 가기도 한다. 일본 작가 아베 야로가 그리고 쓴 만화책 이다. 일본에선 드라마로도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선 소화제 '훼스탈'과 대부업체 '미즈사랑' CF들이 설정과 분위기를  일본 드라마와 똑같이 만들어서 욕을 먹기도 했다.

난 심야식당의 영업시간이 마음에 든다. 밤 열두 시부터 아침 일곱 시까지는 희망이나 활력, 출세, 메이저 등과는 거리가 있는 시간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도 되는 새나라의 어린이는 이곳에 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시간에 여기 오는 손님들은 대개 밤에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야쿠자, 형사, 호스티스, 복서, 스트립 댄서, 가라오케 가수도 있고 작곡가도 있다. 주인장은 음식을 만들지 않을 때는 담배를 꼬나 물고 있는데 눈에 심각한 칼자국이 있는 게 뭔가 사연이 많아 보인다.

들어오는 손님들마다 사소한 사연이 있고 그 얘기가 끝나면서 한 편이 마감되는 연작 만화 형식인데, 그 작은 이야기 하나 하나마다 사람의 인생이 담기는 게 놀랍다. 내공이 있는 이야기 솜씨다. 난 1권의 편을 보다가 울고 말았다. 다섯 권까지 한꺼번에 샀지만 휙 다 읽어버리는 게 아까워서 아직 3권까지밖에 못 읽었다. 박스세트로 사면 철과 자석으로 된 예쁜 메모판도 준다.

 



2010년의 고전


불멸 _ 밀란 쿤데라

작년에 나의 술친구 국동이 형을 만나서 술을 마시며 요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꼼꼼히 재미 있게 읽었다고 얘기했더니, 국동이 형은 나이 들어서 다시 읽으면 정말 좋은 책이 <불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서점에 가도 은 찾을 수가 없었다. 몇 년 전에 절판이 된 것이다. 국동이 형은 그 후로 만날 때마다 자기 집에 <불멸>있다고 자랑을 했고, 난 그걸 빌려달라고 사정을 하는 입장이었지만 만나면 늘 술만 진탕 마시고 헤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서점에 가서 미친 척하고 검색을 해보니 민음사에서 다시 찍어낸 2010년 3월 26일 자 초판이 있길래 냉큼 사서 읽었다.

불멸의 시인 괴테와 그런 괴테의 연인으로 남기 위해 평생 애썼던 베티나의 이야기. 그리고 야녜스라는 여자와 그녀의 동생 로라, 그리고 남편 폴의 이야기. 작품 속에서 밀란 쿤데라는 그 자신이자 아베나리 교수의 친구인 소설가 밀란 쿤데라를 등장시키고, 괴테와 함께 베토벤, 헤밍웨이 등을 불러내 불멸에 대한 토론을 시키기도 한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불멸과 역사에 대한 예시, 그리고 고귀함과 막장을 무시로 오가며 전개되는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의 고군분투기가 쿤데라의 요설을 타고 페이지마다 흩뿌려진다.

베티나는 온갖 노력과 협잡질 끝에 결국 역사 속 괴테의 연인으로 남아 불멸을 얻는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불멸에 대해 생각하다가 지미 카터의 예(이것 저것 한 일도 많지만 결국 조깅 도중 쓰러져 일그러진 입을 보여준 ‘우스꽝스런 불멸’ 속으로 들어간)를 통해, ‘아무리 좋은 기회가 생기더라도 섹스 비디오만은 찍지 말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꼭 얘기해야겠다는 엉뚱한 교훈을 얻었다.   

 


 안나 카레니나 _ 레흐 톨스토이

 

부러운 것 중 하나가 비교적 교양이 뛰어난 친구들(내 주변에 그런 친구들이 별로 없긴 하지만)을 보면 엄청나게 두꺼운 책들도 휙휙 잘 읽어낸다는 점이다. 난 김용 선생의 무협소설처럼 잘 읽히는 책이 아닌 경우 일단 500페이지가 넘어가면 좀 겁을 먹는 편이다.
그래도 두꺼운 책에 대한 미련을 좀처럼 버릴 수가 없었던 나는 어느날 서점에 가서 3권 짜리 를 과감하게 질렀다. 같은 3권 짜리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가 경합을 벌인 결과였다(하하, 미쳤군).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가 젊었던 시절 쓴 대작이다. 그러나 겁 먹을 필요는 없다. 길고 방대하긴 하지만 뼈대를 이루는 내용은 러시아의 귀부인 안나 카레니나가  브론스키라는 젊은 장교를 만나 바람 피우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카레니나의 시누이 키티에게 청혼했다 거절 당한 뒤 시골로 돌아가 농장을 개혁하려 하는 젊은 농장주 레빈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룬다.

결과는? 아직 반쯤 밖에 읽지 못했다. 일도 해야하고.....다른 책들도 읽어야 하고...게다가 연말연시에 술자리는 좀 많은가..... 그래도 이 책을 뻔뻔하게 '올해의 고전'에 굳이 올린 이유는? 간단하다. 따로 읽은 다른 고전이 없으니까!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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