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구경하다가 뒤늦게 좋은 칼럼을 읽고 공유합니다.
쓸모없는 것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가 '황우석 사태'처럼 언젠가 있을 대박을 터뜨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주는 글이라서요.
[정동칼럼]쓸모없는 것들을 가르칠 의무
대학에 갓 입학한 ‘고등학교 4학년’들이 내 수업에서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들의 첫 질문은 과연 그것이 시험 범위에 들어가는지 여부이고, 내가 궁금한 점은 어떻게 모든 종류의 추천도서 목록에 빠지지 않는 이 책을 읽어본 학생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이 예의 바르게도 묻지 않는 질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게 우리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나요?”
목적의식이 뚜렷한 세대이며 목적 없는 “쓸모없는 것들”을 가차 없이 퇴출시켜나간 교육시스템이다. 대학은 더 좋은 직장으로의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고, 고등학교는 더 좋은 대학으로의 입학을 준비하는 곳이며, 중학교는 더 좋은 대학에 많이 입학시키는 고등학교로 갈 준비를 하는 곳이며, 초등학교는, 그리고 유치원은…. 아니, 이 앞의 문장은 상식이 되어버려 새삼 지면에 옮기기도 뜬금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교육의 황폐화와 우리 현실의 암담함이 이런 목적론적 교육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문화의 시작이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었고, 학술의 근원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는 궁금증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 교육에는 문화도 학술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그것이 매우 자랑스럽다. 이것을 서생정신이라 불러도 좋고 아마추어리즘이라 불러도 좋다. 쓸모없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은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을 통해 아이폰을 만들 수 있었고, 워런 버핏이 ‘풍부한 독서’를 통해서 훌륭한 투자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학술과 교육과 문화는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기치 않게 페니실린이 발견되기도 할 것이며 우연찮게 뢴트겐은 X선에 손을 대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폰과 주식투자와 페니실린과 X선이 - “대박”이 - 학술과 교육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혹은 전해주고 싶은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이, 이 강의실이, 나아가 학교에서의 모든 경험들이 당신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고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동굴의 우상’이 무엇인지를 외우기 전에, 동굴에서 무기력한 삶을 살던 이가 동굴을 나와서 처음 광명한 햇살을 느꼈을 때의 그 저미는 고통을, 그리고 다시 동굴로 되돌아갔을 때의 뼈를 깎는 격통을 책으로 느낄 수 있다면 당신들은 이미 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것은 시험에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며 당신들이 살아가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면 다시는 읽어볼 수도, 고민해볼 수도, 토론해볼 수도 없을 마지막 기회라는 것. 나는 우리의 대학교와 고등학교와 중학교와 초등학교가 학생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더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소중한 ‘마지막 기회’들을 허비하고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든다.
계절이 지나 겨울방학을 앞둔 시기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학생들이 또 있다. 취업의 어려운 관문을 뚫은 졸업예정자들인데, 축하의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기말고사를 치를 수 없다는 양해를 구한다. 학점을 받아야 졸업을 할 수 있지만 당장 회사에서 출근 - 무급인턴 - 을 하라고 하니 시험 대신 다른 것으로 학점을 달라는 부탁이다.
우리 교육시스템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위치한 ‘회사’들은 이토록 촌스럽기 짝이 없으며 이들에게 묻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학생들 일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교정에서의 마지막 두어 달 기간에 당신들이 학생들을 얼마나 더 잘 성장시킬 자신이 있는지. 세상의 모든 관심과 배려를 받고 초·중·고·대학의 십수년 교육기간 동안의 학생 생활을 마감하는 이들을 두어 달 기다려줄 여유도 없는지. 사회적 배려라는 것이 수능일 아침 앰뷸런스로 고사장에 실어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약간의 시간을 주고 성장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이런 교육환경이 이르는 종착역은 바닥 모를 둔감함이다. 배려받지 못한 학생들은 공감하지 못하는 시민으로 자라고, 손톱 밑의 가시가 아니면 고통과 분노는 건망증에 포획된다. 세월호, 국정원, 부패리스트, 메르스 등 신문 지면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공동체의 사건들이 너무도 쉽사리 잊혀지고, 일상의 아득함만 우리 앞에 벽처럼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아들 딸들에게 어떤 공동체를 물려줄 것인가. 대답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근원적인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대안 없는 쓸모없는 글로 지면을 허비하게 되어 송구한 마음이다.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