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몇 년 간 죽어라 땅굴을 파서 겨우 탈옥을 하게 된 죄수들이 알고 보니 얼마 후 있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나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다시 반대편으로 땅굴을 파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한다. 탈옥이 아니라 '귀옥'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이러니가 시작되는 것이다. 거의 이십 년 전 김상진 감독이 설경구 차승원 등과 함께 만든 작품 [광복절 특사]가 바로 그런 얘기였다. 이렇게 설정이 독특하거나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스토리 라인이 선명한 영화를 '하이 컨셉 영화'라고 부른다.  이병헌 감독의 흥행작 [극한직업]은 잠복근무를 위해 마약반 형사들이 치킨집을 인수했는데 예상 밖으로 치킨 장사가 너무 잘 되는 바람에  곤란에 빠지는 상황을 컨셉으로 한 작품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자연스러운 웃음의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군더더기 없이 찰진 속사포 대사들이 류승룡이나 이하늬, 진선규처럼 요즘 펄펄 나는 배우들의 입을 통해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한다. 특히 류승룡은 [내 아내의 모든 것]이나 [7급 공무원]에서 보여줬던 기가 막힌 대사 타이밍 감각을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보여줬고 [범죄도시] 이후 명품 조연으로 떠오른 진선규의 연기는 이제 명불허전이 되었다. 물론 중간에 '수원왕갈비통닭' 프랜차이즈를 둘러 싼 씬에서 등장하는 익숙하면서도 무리한 설정들은 갑지기 영화를 지루하게 만들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너무 긴 러닝타임 때문에 감독의 뚝심 부족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어쨌든 끝까지 딴 욕심 부리지 않고 코미디로 끌고 간 점만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마지막 류승룡 신하균의 보트 결투씬에서 치킨집 사장이 왜 범죄현장에서 설치냐는 악당의 힐난에 "니가 소상공인들을 몰라서 그러나 본데, 우린 다 목숨 걸고 해!" 같은 류승룡의 대사는 이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 문충일의 내공이 엄청나다는 걸 다시금 보여준다. 내 취향의 영화는 아니지만 어쨌든 당대에 흥행하는 영화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몇 겹의 흥행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내와 나는 이 영화를 종로3가 피카디리극장에서 보았는데 극장은 넓고 쾌적했으나 날이 추운 관계로 평소 파고다공원 등에 계실 법한 노인분들이 거의 다 로비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좀 안쓰러웠고 특히 우리 옆자리에 앉은 초로의 불륜커플(대화내용이 전혀 부부의 그것이 아니었음)은 오십대 후반의 여자분이 영화를 보면서 어찌나 크게 떠드시는지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결국은 우리 부부가 비어있는 앞자리로 옮겼는데도 여자분의 감탄사와 코멘터리가 러닝타임 내내 끊임없이 들려왔다. 여자분은 영화 장면장면마다 감탄사를 넣고 깜짝 놀라고 하는 걸로 남자분에게 어필하려는 것 같았고 남자분의 리액션도 그에 못지 않았다. 만장하신 전국의 불륜남녀 여러분, 그런 거 하시려거든 다음부터는 제발 극장으로 오시지 말고 가까운 비디오방이나 모텔방에 가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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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알리타 : 배틀엔젤]을 개봉일에 보았다. 제임스 카메론과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제작과 감독을 맡았고 일본 작가 기시로 유키토의 만화 ‘총몽’이 원작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극장에 들어갔는데, 결론적으로 이 영화 죽인다.   

일단 발전된 CG기술에 입이 쩍 벌어진다. 커다란 눈과 뾰족한 턱을 가진 알리타의 얼굴은 애니인지 사람인지 모호한데 반해 너무나 사실적인 바디가 이상한 불균형을 선사하며 관객을 새로운 시각적 경험으로 초대한다. 사춘기 인간의 뇌를 가진 사이보그 전사 알리타. 제임스 카메론은 이 세계관에 매료되어 영화의 판권을 이십 년 전에 사놓았지만 당시 기술로는 그것을 만족스럽게 재현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기다린 보람이 있었고 사이버 펑크 매니아인 로버트 로드리게즈에게 감독을 맡긴 것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에서 가장 쾌감이 높은 순간은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을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서도 알리타가 처음으로 길거리 모터볼 시합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때가 가장 멋있고 신난다. 물론 그 이후에 나오는 수많은 액션신도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지만. 

뛰어난 점만 먼저 얘기하느라 그렇지 이 영화는 CG나 액션만 훌륭한 게 아니다. 전체적인 구성도 쉽고 재미있으며 개연성도 충분하다. 알리타 역을 맡은 로사 살라자르는 물론 크리스토프 월츠, 마허샬라 알리 등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반드시 극장에 가서 보시기 바란다. 이런 영화를 극장에서 안 보면 도대체 무슨 영화를 극장에서 본단 말인가. 이번엔 2D로 봤으니 다음엔 아이맥스로 한 번 더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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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이 책을 또 읽었다. 10여 년 전에 사서 밑줄을 쳐가며 열심히 읽었고 교보문고에 갔을 때 순간 착각을 해서 비슷한 시기에 또 한 권을 샀었다. 그래서 헌 책은 우리집에 놀러왔던 친구 부인이자 후배인, 지금은 제일기획에서 CD를 하고 있는 카피라이터에게 선물로 주고 새 책은 그냥 가지고 있다가 이번에 새삼 읽게 된 것이었다.

내 평생 같은 책은 세 번이나 산 경험이 있나 헤아려 보니 처음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나랑 보통 인연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 뒷장에 붙은 가격표를 보니 7,500원이다.

소설에 대한 본격적인 독후감은 '독하다 토요일'에서 이 책을 함께 읽은 후에 해볼 생각이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무기의 그늘]과 더불어 황석영 소설의 엑기스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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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 나가고 회의실엔 정적이 감돌았다. 십 년째 국내 점유율 1,2위를 다투는 등산복 브랜드 '에이픽스'의 새로운 광고대행사를 선정하기 위한 경쟁PT가 이주일 반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 기획 컨셉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3차 회의가 열렸으니 다들 이게 뭐하자는 짓인가 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사장이었다. 무슨 프로젝트가 시작되든 킥오프 하는 날부터 무조건 이틀에 한 번씩 회의를 하지 않으면 발작 상태가 되어버리는 이 대행사의 사장 현민섭 말이다. 사장이 회의실에 들어오는 이유가 회의를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회의 시간에 화를 내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는 사원들의 반응은 그래서 오늘도 유효하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일차적인 잘못이 AE들에게 있다 하지만 찜찜한 건 고재영CD팀도 마찬가지였다.  고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 이 새끼는 변하질 않지. 드디어 대행사를 그만 두어야 하나. 오늘따라 고재영은 자신의 뚱뚱하고 둔한 몸이 더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오늘 나온 얘기 가지고 뭐라도 아이디어를 좀 만들어서 내일 오후에 다시 만나시죠." 

이렇게 말하면서 고재영은 카피라이터 실장 편성준을 바라보았다. 아이구, 저 마음만 여린 병신 같으니라구. 내가 어쩌다가 저런 놈이랑 한 배를 타가지고 이 고생이냐. 역시 지난 달 사장과 싸웠을 때 미련 없이 사표를 쓰는 거였는데. 내가 너무 착했어. 너무 약해졌어. 고재영은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커피 텀블러의 빨대를 쭉 빨아들였다. 고 실장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편성준은 고 실장님, 오랜만에 우리 냉면이나 드시러 가실래요? 하고 속편한 소리를 하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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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영은 천사다. 흔히 마음씨 착한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메타포로서의 천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진짜 천사다. 영어로는 Angel. 그가 태양계 중 지구라는 별로 파견 근무를 온 건 이만 년이 좀 넘는다. 당연히 지구 위에 인간들이 생겨나는 것을 지켜 보았고 수 많은 종교와 철학, 전쟁 들이 발발하고 유지되고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인간 세상에 어울려 살면서 그들을 연민하지도 억압하지도 않고 지켜보다가 위기의 순간이 오면 일종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천사 고재영에게 부여된 주된 임무였고 그는 대체로 이 어려운 임무를 이만 년이 넘도록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뼈아픈 실수도 있었다. 예수가 태어나기 직전에 한 번, 그리고 십자군 전쟁 때 한 번 잠시 방심했던 고재영이 인간들에게 겉모습을 들켜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사는 모두 흰 천으로 된 옷을 입고 하얀 날개가 달린 금발의 꼽슬머라 뚱보라는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하긴 그때 내가 좀 많이 먹긴 했지. 고재영은 그때를 생각하며 잠깐 웃었다. 20세기에 물리학자 아이슈타인이라는 작자가  '4차원'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을 땐 천국 여기저기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당장 신과 인간계 사이의 비밀을 누설한 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대대적인 색출작업에 들어갔으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아인슈타인은 은하계를 통틀어 가장 이례적인 스타가 되어버렸다. 결국 천국에서 열린 긴급회의에서는 아이슈타인이 거절하지 못할 정도의 빅딜을 제시하기로 했고 그는 인간의 시간으로 장장 십오 년을 고민한 끝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우주를 통틀어 사람이  천사가 된 케이스는 아직도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유일무이한데, 그는 원자폭탄과 인간들이 존재하는 지구가 싫다며 지금은 아주 먼 은하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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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제 승찬이, 박수하고 한 잔 하면서 얘기를 해봤는데요. 에이픽스는 절대로 어렵고 복잡한 컨셉으로 가면 안 돼요. 더구나 창업주가 대구에 있는 재래시장에서 등산복 도매로 시작한 사람이잖아요. 밑바닥에서 시작해 메이저가 된 입지적인 인물이라구요. 신문 기사에서 읽었는데 자기 얘기를 소설로 쓰면 열 권도 넘을 거라고 큰소리를 치던데요. 고집이나 카리스마도 장난이 아닐 거구요. 아직도 회의 시간에 커피잔이 날아다닌다던데...이런 사람한테는 정말 직관적인 걸로 그냥 한 방 던지고 빠져야 돼요." 

편성준은 애주가다. 늘 어제 누구랑 몇 차까지 갔었고 술자리에서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무용담을 늘어놓는 걸 즐긴다. 인간들은 왜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걸까. 어젯밤 자신이 한 고민의 총량이나 반성의 질량을 주량과 병치시키길 좋아하는 인간들의 습벽을 마주하면 고재영은 쓴웃음부터 나온다. 자신이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술고래에 골초였는지 알면 얘네들이 놀라 자빠질 텐데.  술이나 담배, 마약, 도박, 하다못해 섹스까지, 인간들이 즐기는 기호품이나 습성들 중에서 중독성이 유난히 강한 품목들은 모두 천사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천사들은 아무리 음주와 흡연을 일삼아도 죽지 않지만 인간들은 그럼으로써 원래 얼마 되지도 않는 수명을 더욱 단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고재영은 수천 년 전부터 지구의 인구 수를 조절하는 데 술과 담배, 설탕을 요긴하게 사용했다. 어쨌든 그는 이만 년 전부터 태양계 안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천사니까. 

그런 고재영이 당장 등산복 PT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우주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잠복근무는 천사들의 또다른 숙명이다. 인간세상에 섞여 살려면 어쩔 수 없이 가정과 직업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고재영에게도 가족이 있고 취미가 있다.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사신의 7일]에 나오는 '사신 치바'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 중에 음악을 가장 마음에 들어해 틈만 나면 음악을 듣는데, 고재영은 그런 면에서는 음악보다 영화가 더 좋았다. 1890년 초반 우연한 기회에 뤼미에르 형제에게 '영화'라는 영감을 주게 되어서만은 아니었다. 인간 세상에 또 하나의 예술 장르를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된 고재영은 그 이후로 수 많은 영화들을 섭렵했는데 그 중에서도 에밀 쿠스트리차와 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그가 지금 광고 아트디렉터라는 직업을 택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였는지도 몰랐다. 

**

 등산복 시장은 급격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고등학생들의 유니폼이라 불리던 **페이스 같은 제품의 판매량이 반토막이 나기 시작하더니 덩달아 어른들의 외출복 노릇을 하던 등산복 바지나 점퍼 등도 판매량이 뚝뚝 떨어졌다. 일본이나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SPA 브랜드들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트렌드가 변한 것이다. 그래서 광고량도 급격하게 줄었는데 이번에 에이픽스의 회장이 '기업의 명운을 걸고' 제품부터 광고까지 전혀 새로운 캠페인을 만들겠다고 해서 광고계의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새로운 출구전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언발에 오줌 누기로 그칠 것인가.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일단 경쟁 PT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등산복 광고가 아무리 달라진다 해도 산 나오고 등산복 나오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 PT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광고전략이요 컨셉이었다. 그 중에서도 메인 카피는 정말 중요했다. 

"박수, 내일 회의 때 내놓을 카피 좀 써봤어?" 
"몇 개 써봤는데, 다 별로예요." 

박수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고재영은 박수가 천사가 아닐까 약간 의심하고 있다. 일단 밥을 너무 안 먹는다. 깡마른 체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토록 밥을 안 먹는 인간은 참으로 드물다. 참고로 천사들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고재영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 연기를 하다 보니 뚱뚱한 몸이 되었지만 갑자기 체형을 바꾸면 의심을 받을까봐 몇십년 째 지금 같은 섭식을 유지하고 있다. 박수가 천사라면 고재영은 긴장해야 한다. 가끔 천국에서는 기존 천사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잠입 천사들을 내려보내기도 한다. 부정을 감시한다, 라기보다는 기존 천사가 너무 인간화되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박수가 천사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모든 천사는 점조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고 어떤 잠입 천사라고 해도 고재영에게 문제가 생겼을 경우가 아니라면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박수는 원래 이름 '박수연'에서 '박수'로 개명하기 훨씬 전부터 팔뚝에 '337'이라는 문신을 새기기도 했다. '337박수'라는 대한민국에만 있는 풍습으로 몸에 낙서를 한 것이었다. 이는 아무리 너그럽게 봐줘도 천사들이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다만 일부러 그럴 수는 있다. 하긴 수만 년을 넘어 거의 영원히 사는 천사들의 속을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 

서울 하늘은 며칠째 쨍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지만 고재영팀이 있는 논현동의 사무실엔 하루 종일 답답한 공기가 감돌았다. 편성준이 카피를 써왔다. 몇 개의 카피 중엔 다행히 에이픽스 회장이 마음에 들어할 만한 게 하나 있었다. 

"사람과 산 사이, 에이픽스가 있다" 

간결하면서도 등산복의 본질과 기능을 한꺼번에 꿰뚫은 펀치라인이었다. 고재영은 이번 PT는 이 슬로건 덕분에 이길 것임을 직감했다. 물론 고재영의 능력이라면 등산복 PT 정도야 얼마든지 이기게 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전쟁이나 자연 재해 등 커다란 이슈에는 가끔 개입을 해도 이렇게 자잘한 일상사는 개입하지 않는 게 고재영의 신조였으니까. 문제는 천국에서 받은 메시지였다.  갑작스럽게 고재영의 내근이 결정된 것이었다. 그동안의 임무를 대체로 무리없이 수행한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50년 간의 안식년을 보너스로 받으면서 천국 내 인사과로 새로이 발령이 난 것이었다. 남은 시간은 겨우 육 개월. 고재영은 잠깐 망설였다. 이대로 가면 편성준은 이번 PT를 비롯한 몇 건의 프로젝트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어 광고계에서 제법 인정을 받겠지만 술을 좋아한 댓가로  간암에 걸려 일찍 죽을 텐데. 떠나는 마당에 그에게 조금 더 성취감을 주고 수명도 더 연장을 해주는 건 어떨까. 

"고 실장님, 전근 축하해요. 헤헤." 

그 때 박수가 와서 속삭였다. 역시 짐작대로 그녀는 잠입 천사였던 것이다. 고재영은 약간 짜증이 나서 이십만 볼트짜리 벼락 한 가닥을 품에서 꺼내 박수에게 던졌지만 그녀는 그것을 가볍게 손바닥 안으로 흡수해 버리며 소리 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러기냐, 진짜? 안 그래도 너 좀 수상했어." 
"하지 마세요. 그런 인간 어디가 이쁘다고 봐줄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설마 걔가 이뻐서 그러겠냐? 인간들 흥망성쇠가 게 하도 빤해서 장난 좀 쳐보려는 거지." 
"하지 마세요. 요즘은 제가 보고 안해도 천국에서 먼저 안다니까요." 

고재영은 이 순간 편성준을 살리려는 자신이 천사일까 악마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인간들은 천사와 악마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머무는 곳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언제라도 천사였다가 금방 악마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선악 기준이라는 게 그만큼 편협할 뿐이다. 고재영은 편성준이 업계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은 취소하고 간암으로 사망하는 것만 막아주기로 했다. 술 좋아하면서 오래 살면 그것도 괜찮지 뭐. 딱 그정도가 적정선이라고 생각했다. 고재영은 자기가 전출되고 나면 다음에 어떤 천사가 올까 궁금해졌다. 기왕이면 자신처럼 악마보다는 천사쪽에 가까운 성격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노트북 앞에서 일하는 척하고 있는 박수를 다시 한 번 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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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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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은 본능적으로 작가였고 소설가였던 것 같다. 해방 후 몇 년 동안의 경험들을 돌아다 보면 인간 이하의 모욕을 받거나 밑바닥 생활을 한 적도 있는데 그럴 때조차 선생은 '언젠가는 당신 같은 사람을 한 번 그려보겠다'는 식의 문학적 복수를 꿈꾸었다고 하니까. 그런 마음이 불행감을 덜어줌으로써 아주 뼛속까지 불행해하지는 않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저런 인간을 소설로 한 번 써야지, 라고 생각하며 현재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대가의 어릴적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런 날것들의 증언이 있어서 인터뷰글을 좋아한다.

아울러 앞으로 내게 오는 나쁜 새끼들도 좀 귀하게 여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그놈들이 내 작품에 도움을 주는 캐릭터가 되어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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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먼저 이 영화 [일일시호일]을본 아내는 '영화가 슬프지는 않지만 눈물이 날 수 있으니 주의하라'면서 손수건을 챙겨가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는 내겐 눈물보다는 씁쓸한 미소와 엷은 한숨이 더 자주 나왔다. 아내가 어느 지점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거의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는 스무 살의 노리코는 무엇 하나 특별하지도 않고 잘 풀리는 인생도 아니다. 사실 그 나이 때는 대부분이 다 그렇지만 노리코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같이 다도 수업을 듣는 사촌동생 미치코만 해도 취업이든 결혼이든 뭔가 적극적이고 매번 자기보다 앞서 나가는 것만 같은데 그녀는 맨날 제자리 걸음 같다. 그렇다고 매주 가는 다도에 엄청난 애착이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학창 시절은 쏜살 같이 지나가 버리고 인생은 무엇 하나 깔끔하게 떨어지는 게 없다. 글을 쓰며 살고 싶지만 출판사 취직 시험에 떨어져 프리랜스 작가가 되어야 했고 결혼을 앞둔 남자가 배신한 것을 두 달 전에 알아 파혼을 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다도 수업은 꼬박꼬박 참석하는 노리코. 다도를 가르쳐주는 다케다 선생은 계절마다 바뀌는 거실 족자의 글씨들을 읽어주며 그런 노리코의 마음을 조용히 다독여준다.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라는 뜻의 '日是好日'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며 다도를 시작했던 노리코는 여러가지 사건들을 겪으며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봤던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이라는 영화가 왜 좋은 작품인지 비로소 알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그때는 이미 고마운 아빠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후였다. 

다도는 내용보다 형식이 먼저라는데 난  과연 인생의 내용과 형식 중 어느 것을 선택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어느덧 다도를 시작한지 20년이 넘은 노리코는 생각한다. 옛날 사람들이 가장 추운 때를 입춘으로 정한 건 이제 멀지 않아 봄이 온다는 마음을 가지고 싶기 때문 아닐까. 누구는 좀 일찍 도착하고 누구는 조금 늦게 갈 수도 있는 게 인생 아닐까. 다케다 선생도 말한다. 같이 차를 마셔도 다시 이렇게 똑같이 마실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임해주세요. 

그렇다. 자책할 것도 없고 조급해할 것도 없다. 지금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비 오는 날에는 빗소리를 듣고 눈 오는 날엔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여름에는 찌는 듯한 삼복더위를, 겨울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다도는 그런 삶의 방식을 어려운 이론 없이 '몸으로 익힐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쳐 준다. 그래서 매일매일이 힘든 날이지만 동시에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느리고 고단해도 지금처럼 날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고마워하고 또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인생은 그럭저럭 살 만하지 않겠는가. 

키키 키린 할머니는 [걸어도 걸어도]나 [만비키 가족] 같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부터 워낙 좋아했지만 유작인 이번 영화에서 늘 다도 교실 안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한 장면 한 장면이 욕심 없는 할머니의 유언을 듣는 것만 같았고 그녀의 목소리는 스님의 법문이나 랍비 또는 신부님의 고언을 듣는 것처럼 매번 지혜롭고 다정했다. 

여러 번 우려낸 찻물처럼 따뜻하고 정갈한 영화를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 안에서 돌아가신 키키 할머니가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힘들지요? 괜찮아요. 스님들이 좋은 일에나 나쁜 일에나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우는 것처럼 여러분도 이제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라고 외워보세요. 그럼 좀 나아져요."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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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회사를 다니는 내가 작년에 '2018평창동계올림픽' 홍보영상을 만들 때만 해도 영상의 마지막엔 '세계인이여, 평창으로 오라. 대한민국은 안전한 곳이다'라는 식의 메시지를 넣어야 했다. 당시엔 북한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말폭탄을 쏘아올릴 때였고 미국도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심'이 바닥난 듯 보이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실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도 낙관하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롤러코스터를 타듯 변화를 거듭하던 한반도 문제는 작년 한 해만도 전격적인 남북영수회담과 북미영수회담이 줄지어 열리는 등 '상전벽해'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일단 부시와 오바마를 거쳐 북한에 가장 적대적이었던 트럼프 대통령이 복핵 문제 해결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 보수지의 사주를 지냈던 홍석현이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기 위한 고민으로 책 [한반도 평화 오디세이]를 낸 것도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보니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면서부터 남북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보수지의 회장을 지낸 저자가 가지고 있는 진보적인 대북관이다. 그는 지금 한반도에는 통일보다 평화가 더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우리가 할 일은 북한의 개혁개방과 경제발전을 돕는 일이라고 한다. (심지어 통일부 명칭도 '남북교류부'로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얘기까지 한다). 지난 보수정권 때였다면 '종북발언'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책이 쉽게 술술 읽힌다. 홍석현 이사장이 가지고 있는 한반도에 대한 지식과 견해를 스무 고개 넘듯 하나하나 펼쳐나가기 때문이다. 하루 만에 휘리릭 다 읽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급변하는 한반도 상황에 대입해봐도 큰 무리가 없다. 이는 그가 언론사를 경영하고 다년 간 국제활동을 해서 국제정세 파악에 능한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짚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꺼림직하다면 홍석현이라는 이름을 가리고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중대 현안을 인터넷 기사로 읽는 것과 책으로 읽는 것은 그 느낌이 다르다. 더구나 대표적 보수주의자가 내놓은 진보적 주장을 읽는 짜릿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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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에 명동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영화 [그린북]을 관람했다. 1960년대 초 피아노 천재 연주자인 '닥터 돈 셜리'가 허풍 세고 주막 센 이탈리아계 백인 '떠벌이' 토니를 운전기사 겸 로드 매니저로 고용해 미국 남부를 돌아다니며 연주 여행을 하면서 티격태격하는 버디 무비다. 지적이고 자존심 강한 흑인과 하층민 백인이라는 듀오는 기존 흑백 관계의 클리셰를 역전시킨다는 점에서 작품의 큰 차별점이지만 그렇다고 메시지 자체가 전복적이거나 문제 의식을 던지는 수준이 그리 높진 않다. 돈 셜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데 비해 점점 셜리에게 교화되는 토니의 모습은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시나리오를 정교하게 짜맞춘 혐의조차 느껴진다(실제로 영화 개봉 후 돈 셜리의 가족들이 '거짓말로 가득 찬 영화'라고 비난했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읽었다). 탁월하고 유머러스한 연출과 시나리오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흑백 갈등의 역사와 그 해결책을 '선의'라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찾는 건 너무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과도 겹친다.  

다만 북미만 돌아도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실력과 명성을 갖춘 일급 흑인 연주자 셜리가 굳이 그린북(당시 남부를 여행하는 흑인들이 갈등없이 모텔이나 식당을 이용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정보를 편찬해 놓은 가이드북)을 들고 남부 구석구석을 고집스럽게 다니며 연주 여행을 감행하는 모습은 국회의원, 시장 선거 등에서 번번히 떨어지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던  '바보 노무현'을 떠올리게 했다. 가끔 이렇게 엉뚱한 지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곤 한다. 오늘밤엔 문득 그가 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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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

혜자 2019. 1. 19. 18:41


아내와 나는 TV를 보는 스타일과 시간대가 다르다. 아내는 아무 때나 TV를 켜도 처음 보는 드라마나 쇼의 내용을 금방 파악하고 적응하는 편이라면 나는 무슨 프로그램이든 처음부터 보지 않으면 잘 이해를 못하거나 흥미를 잘 느끼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불시에 TV를 켜고도 프로그램에 금방 빠져드는 아내가 신기했다. 결혼 전에 성수동에서 동거를 시작할 때는 거실 TV를 없애고 안방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TV 시청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방안에서 아내가 TV를 보더라도 나는 밖에서 책을 읽거나 일을 하는 등 다른 짓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북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집 크기가 작아지자 집안에서 TV를 틀면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함께 봐야 했다. 

아내는 TV를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다만 예전에 혼자 살 때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너무 쓸쓸해서 들어오자마자 그냥 TV를 켜놓는 게 버릇이 되었다고 했다. 이른바 '백색소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문제는 내가 그런 성향이 못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심코 틀어놓은 TV에도 신경이 쓰여 다른 일을 하거나 잠을 자지 못했다. 하루는 늦게까지 일을 하다 들어왔는데 아내가 TV를 켜놓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다음날 일찍 일어나 회사에 나가야 해서 먼저 자겠다고 했고 아내는 TV를 좀 더 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라고 대답했다. 

문제는 TV 내용이었다. 12시가 넘어 케이블TV에서 틀어주는 무슨 단막극 재방송이었는데 거기 출연한 남자 연기자 새끼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나는 방문이 없는 침실에 누워 어쩔 수 없이 그 드라마 내용을 고스란히 다 들어야 했다. 소개팅을 하러 나온 남녀가 카페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는 상황이었다.  

남) 안녕하세요~~!! (엄청 소리를 지르며) 
여) 네, 안녕하세요.(다소곳하게) 

남) 반갑습니다~!!! 
여)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세요? 

남) 제가 방송국 조연출인데요~~! 
여) 그런데요? 
남) 오늘 녹화장에서 실수로 폭발이 일어났어요! 
여) ....
남) 그때 고막을 다쳤는지, 소리가 잘 안 들려서요!!!
여) 어머...그러세요?!!

이젠 여자까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미칠 노릇이었다. 드라마 내용 전개 상 소리를 지르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게 이 드라마의 웃음 포인트였으니까. 나는 한참을 참다가, 어이 없어 하다가, 헛웃음을 짓다가, 화를 내다가 결국 아내에게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여보, TV 좀 끄면 안 될까? 저 새끼 너무 소리를 지르네." 그러자 거실에서 뭔가 다른 것을 하던 아내가 고개를 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 끌게."  

알고보니 아내는 이미 그 드라마를 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았다. 괜히 나만 혼자서 바보처럼 끙끙 앓았다. 입만 열면 커뮤케이션을 외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나지만 막상 이런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서로 솔직하게 말한는 게 중요하다.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사랑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다소 뻔한 교훈을 얻은 사건이었다. 나는 그날 밤 아내가 흔쾌히 TV를 꺼주는 바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고 다음날부터 열심히 일을 해서 지금처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음, 이건 아니구나. 비약이 너무 심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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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 처음 열리는 '독하다 토요일' 모임이지만(시즌2로는 세 번째) 감기나 독감, 과중한 업무 등으로 인해 멤버들의 결석이 많은 날이었습니다. 윤혜자 씨는 간밤의 격한 음주와 그에 따른 숙취로 인해 도저히 모임에 참석하지 못할 컨디션이었고 서동현 씨도 독감이 심해서 집에 누워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아름 씨는 요즘 회사의 과중한 업무 때문에 토요일 오전 내내 기절하듯이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손영연 씨도 집안에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계속 참석을 못하는 형편이었구요. 아무튼 저조한 출석율을 예상하며 제가 1시 40분쯤 '청춘여가여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정은빈 대표는 물론 다른 회원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설상가상 저는 간밤에 금호동 '오남매곱창'이라는 술집에 스마트폰을 두고 왔는데 그 가게는 저녁에나 문을 열어서 아무런 커뮤니케이션 도구 없이 문 앞에 서 있어야 했던 상황이었구요.  노트북으로 카톡을 확인하고 싶어도 안으로 들어가 와이파이 번호를 알아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스마트폰이라는 도구에 매여 사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1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가서 사정을 하고 전화기를 빌려 윤혜자 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다시 10층으로 올라가 출입문에 메모되어 있는 정은빈 대표의 전번을 노트에 메모하고 1층 커피숍에 와서 또 전화기를 빌려 정 대표와 통화를 하고 나서야 출입문 비밀번호가 이미 카톡 메시지로 공유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려서 카톡창을 볼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비밀번호를 받아서 10층으로 올라오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진주 씨를 만났습니다. 

간밤에 파티를 열어서 조금 지저분하거나 음식 냄새가 날 수 있다고 했지만 올라와 보니 얘기 들은 것보다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곧 정 대표의 친구라는 분이 올라오시더니 주섬주섬 청소를 해주셨습니다. 진주 씨와 저는 이십 분 정도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뒤 테이블 위에 있던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습니다. 김하늬 씨와 김성희 씨, 임기홍 씨가 속속 도착해서 세 시 정도에는  다섯 명의 인원으로 조촐한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읽을 책은 구병모 작가의 [네 이웃의 식탁]이라는 장편이었습니다. 저는 작가의 전작인 [파과]를 재미있게 읽었고 또 세간의 평도 좋은 것 같아서 이 책을 추천했지만 결과적으로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윤혜자 씨도 같은 느낌이었는지 시즌1과 달리 책을 미리 읽어보지도 않고 도서목록에 올린 것은 주최자로서의 직무유기라며 저를 맹비난했습니다. 독하다 토요일 멤버들의 수준을 존중하라는 경고이기도 하죠.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곳에 입주해 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인 장편소설 [당신의 식탁]에 대해 제가 '공동생활과 공동육아의 어려움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는 성공했지만 그 의도가 성공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 안 좋은 소설이 된 케이스'라고 했더니 김하늬 씨도 '용두사미 같은 소설'이라는 말을 꺼냈습니다. 시작은 매우 흥미로운데 서로의 성격이 부딪히고 사건이 생기는 과정에서 남은 것은 육아와 불륜에 대한 앙상한 이야기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의 주도 하에 공동주택에 들어가게 된다는 점에서는 어쩌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와 비슷한데 노벨상을 받은 그 작품과 달리 이 소설은 그저 현상과 반동만을 다룬 피상적인 이야기로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가 공동주택 담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것 같다'라고 아쉬워하면서 식탁이 들어가는 제목도 참 잘 지었는데 작품은 그렇제 못한 것 같다고 했고 김하늬 씨도 동의하면서 특히 마지막에 수미쌍관 식으로 보여준 에피소드는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멋부림이 아닐까, 하는 제 대답에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도 비슷한 플롯이 있는데 훨씬 세련되게 구현이 되었다며 역시 아쉬워했습니다. 

캐릭터들의 역할이 너무 정확하게 정해져 있어서 공감하기 힘들었다는 불만도 나왔습니다. 진주 씨는 시간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세세한 분석까지 해가며 읽진 못했는데 아무튼 다 읽고나니 뭔가 허무하고 답답한 느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구병모 작가가 어디선가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고 쓴  책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렇다면 공동주택생활이라는 게 육아든 삶이든 인간에게 좋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라는 통찰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이건 그게 아니라 '내가 어쩌다보니 재수 없는 애들을 떼로 만났어' 식의 개인적 경험담을 들려주는 수준으로 주저앉는 느낌이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임기홍 씨가 '똥통에 빠졌다고 한거죠'라고 거들어서 모두들 웃었습니다. 

김성희 씨는 새로운 부서로 발령이 나고 개인적으로도 부산한 일들이 많아서 책을 읽지 못하고 왔는데 오면서 앞부분을 조금 들춰보았다고 하면서 제목만으로는 우리가 비판하는 내요을 상상하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만큼 제목을 잘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진주 씨가 결론이 너무 허무하다고 얘기하자 김하늬 씨는 작가들은 문제 제기만 잘 해도 그 의미가 있는데 이 작품은 문제 제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결책을 주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임기홍 씨는 이게 과연 소설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어다고도 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처럼 아예 르뽀 형식을 깆춘 작품도 아니면서 작가는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민낯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은데 읽다보면 소설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고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지경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주도한 공동주택사업이라는 게 처음엔 거창한 의도로 시작했는데 잘 안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벌려놓은 사업이므로 꾸역꾸역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거기서 갈등이 나와 사건이 만들어진다든지 하는 게 올바른 작법인 것 같은데 이 소설은 그런 인과관계를 파고들지 않고 그냥 그 내부에서 각각의 캐릭터들이 개인적 사연만 밀고 나가는 느낌이라는 것이죠. 

좋은 소재를 놓고 이 정도밖에 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큰 작품이었습니다. 김하늬 씨는 김탁환 작가에게 들었던 '소설 특강'을 회상하며 사건이 일어나면 끝을 봐야지 도망가지 마라, 라는 얘기에 매우 공감을 했는데 이 소설은 그런 사건들을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후일담 식으로 처리한 것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지적이었습니다. 김성희 씨는 시간이 없어서 앞부분에 나오는 효내 얘기만 좀 읽었는데 예전에 읽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같은 경우도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사는 이야기였지만 굉장히 인간미 있었는데 여기 모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너무 어렵다는 얘기도 했는데 저도 동감이었습니다. 재강, 단희, 여산, 교원, 상낙, 효내, 은오, 요진 등의 이름이 하나같이 세련되어서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으니까요. 

아무튼 너무 비난 일색이라서 지금쯤 작가의 귀가 꽤 간지럽겠다, 라는 얘기까지 하면서도 캐릭터에 대한 불만이 또 터져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작가가 너무 착해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색다른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뭔가 일을 제대로 해내려면 좀 독하고 못된 구석이 있어야 하고 특히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는 얘기를 제가 꺼냈더니 그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서  이병헌, 홍상수, 잭 니콜슨 등 자기 분야에서는 눈부신 업적을 이뤘지만 개인생활에서는 '악동'으로 소문난 캐릭터들에 대한 얘기가 가십처럼 흘러나와 한참 수다를 떨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제목은 참 좋은데 참 아쉬워, 라고 말하는 김하늬 씨와 차라리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처럼 한 사람 한 사람 연작소설로 썼으면 더 나았을 것을, 이라 말하는 김성희 씨의 대안 제시가 이어졌고 제가 작가는 좀 못된 구석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의 연장선으로 예전에 광고대행사 다닐 때 술자리에서 늘 동료들과 늘 하던 얘기인 '같이 일하고 싶은 놈은 바보와 개새끼 중 누구를 고르겠냐?' 를 가지고 또 한참 수다를 떨었습니다. 배가 산으로 가서 급기야 제가 예전에 조폭 출신의 건설회사 대표와 회의 끝내고 점심 먹으러 갔다가 그 대표가 "아무거나 자유롭게 시켜요. 여긴 짬뽕을 잘 하지만. 난 짱뽕..."이라고 말씀하셔서 졸지에 여덟 명이 짬뽕 여덟 그릇 먹고 나온 이야기까지 하다가 허둥지둥 모임을 끝냈습니다. 

이날은 뒷풀이 모임조차 참여가 저조해서 다른 분들은 가고 김성희 씨, 진주 씨,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 정동길 따라가다 있는 '장수회관'에 가서 국수전골에 소맥, 볶음밥까지 맛있게 먹고 마신 뒤 헤어졌습니다. 아마 읽은 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얘기한 첫 번째 모임이 아니었나 합니다. 이런 날도 있는 거겠죠 뭐. 다음달에 읽을 책은 황석영이 [손님]입니다. 개인적으로 [무기의 그늘]과 함께 황석영의 역작이라고 생각하는 장편소설입니다. 다음엔 또 어떤 독후감들이 등장할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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