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분노]라는 소설을 두 번 샀다. 두 번 읽은 게 아니라 두번 구입. 출퇴근길에 전철 안에서 짬짬이 읽다가 100페이지쯤 읽었을 때 어디선가 잃어버렸는데 책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책값이 16,500원이니까 나는 결국 33,000원짜리 이야기를 읽은 셈이다. 그래서 어땠냐구? 다시 사서 읽길 잘 한 것 같다. 아마도 올해가 다 가도록 나에겐 이보다 더 ‘올해의 책’은 없을 것 같으니까. 

로런 그로프는 무시무시한 작가다. 안 그렇게 생겼는데 글은 독하고 능숙하고 교활하다. 섹스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마음에 딱 든다. 그리고 필력이 엄청나다. 글을 잘 쓴다는 건 시나리오 작가처럼 사건을 잘 짠다는 것과는 좀 다른 얘기다. 사건보다 중요한 건 그 모티브를 어떤 태도와 문체로 다루느냐인데, 뛰어난 작가일수록 가장 고귀해질 수도 가장 저속해질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던 것처럼. 로런 그로프가 그렇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이 책엔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 얘기도 여기저기 끊임없이 인용된다. 남자 주인공 로토가 셰익스피어 연극을 주로 하는 배우였고 나중엔 잘 나가는 희곡작가가 되기 때문이다. 스물두 살에 결혼하는 그의 아내 마틸드를 만난 것도 그가 햄릿 역을 했던 날의 일이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호의와 사랑을 받았고 원하기만 하면 모든 여자와 잘 수 있었던 로토는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던 신비한 여신 같은 마틸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청혼하고 순식간에 결혼을 한다. 소위 ‘킹카’들의 갑작스러운 결합에 어이 없어하던 친구들은(여자라면 대부분 로토와 섹스를 했던-쓰리섬을 했던 여자들도 있다)신혼파티에 와서 그들의 결혼이 곧 깨질 것을 예상하며 "뭐, 첫 번째 결혼이니까”라고 배배꼬인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런 바람과는 달리 두 사람은 로토가 죽기까지 무려 23년간 다른 사람을 넘보는 일 없이 결혼생활을 영위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일찍 결혼한 남녀가 헤어지지도 않고 이십 년 넘게 함께 사는 얘기가 어떻게 흥미로운 소설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로런 그로프라는 작가의 힘이 빛난다. 이 소설은 로토와 마틸드의 격하고 찬란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 뒤엔 콜리와 에이리얼이 라는 음습한 인물들이 숨어 있는 교활하고 잔인한 드라마다.  이 책이 심리소설이었다면 왜 제목이 ‘운명과 분노’인지, 에이리얼과 마틜드의 비밀 거래는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원인과 결과가 딱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이 책이 추리소설이었다면 마틸드가 왜 스물여섯 살에 낙태를 하고 스물여덟 살엔 불임수술을 하는 배신을 저질렀는지 밝혀내려 애쓸 것이다. 아니, 그보다 어렸을 때 정말 마틸드가 남동생을 계단에서 밀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게 사실인지부터 밝혀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문학책이다. 그것도 강력한 서사를 지닌 입체적인 문학 작품. 마침 이 책을 쓸 때 작가가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비극을 탐닉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현대적인 결혼생활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신화적인 구성과 고전적인 비극미를 함께 갖추게 되었다.

백만장자의 아들로 태어나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서 단 한 푼의 돈도 물려받지 못했지만 매력적인 외모와 비상한 두뇌를 소유했던 한 사내와 어릴 적 불운했던 과거를 분노라는 동력으로 맞서려 했던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이 연상되는, 마치 세상 일을 모두 알고있는 듯한 로런 그로프의 우아하고 오만한 문체와 폭발적인 서사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인생사와 인간의 단면을 활자의 힘만으로 능숙하고 위엄있게 그려낸다.   

그동안 누가 흥미진진하면서도 문학성까지 갖춘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가네시로 가즈키의 [영화처럼],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또는 [인생],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조지수의 [나스타샤]등을 추천했는데 이제 한 권을 더 추천해야겠다. 바로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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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에쁜고 젊은 얼굴과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마흔세 살의 히사코.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이자 두 고등학생 아이의 엄마인 남부러울 게 없는 그녀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사진을 찍으러 밖으로 나가자는 남편의 제안이 영 달갑지 않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면 벌어지는 가벼운 실랑이지만 이번에는 아이들이 둘 다 스키 캠프로 떠난 참이라 처음으로 둘 뿐인 사진 나들이인 것이다. 알 수 가 없다. 늘 자신을 사랑해주고 장모님까지 극진하게 모시는 ‘굿보이’지만 정작 그녀는 한 번도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녀의 가슴 속엔 이십 년 전 파리 유학시절에 잠깐 함께 살았던 남자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몽마르뜨 언덕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보잘 것 없는 화가 지망생이었다. 지나간 사랑은 언제나 아름다움으로만 남는 법. 히사코는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 사진 취미도 포기하고 사업에 매진했던 남편의 사랑이 오히려 버겁기만 하다. 그리고 자신을 렌즈에 담으려는 남편의 성의가 부담스럽다.


삼각대를 세운 남편이 무심코 마로니에 얘기를 꺼냈을 때 그녀는 이미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사진을 찍히지 않으려 렌즈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히사코에게 “뒷모습도 괜찮지만”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기어코 눈물을 터뜨린다. 지난 이십 년 간 단 한 번도 남편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고 거짓말로 살아온 자신이 미워서다. 히사코는 남편에게 말한다. 나 할 얘기가 있어요. 무슨 얘기라도 다 들어준다고 약속해 줄래요? 그래,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무슨 얘길 하든 어머니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또 내게도 변함없는 차코(히사코의 애칭)로 남는다고 약속해줘. 알았어요. 나 처녀 시절 파리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당신을 만났을 때 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어요. 아이를 지우고 당신과 결혼했지만 그 후로도 이십 년 간 그 사람만을 그리워하며 살아왔어요.


그러나 바보처럼 모든 걸 이해하고 안타깝게만 받아들이며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하는 남편을 보며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 세상에서 제일 믿고 있는 이 남자를 믿는 것만큼 사랑하고 싶습니다. 부디 제게 그런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다. 그들이 접어든 초상화 거리에서 이십 년 전 그 남자를 만난 것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 얼굴이 변해도 화풍만은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녀는 예전에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다. ‘초상화 오 분 완성’이라는 안내문을 사이에 두고 단박에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 커피를 사러 갔던 남편은 두 남녀의 표정과 대화를 통해 이십 년 전 그 남자임을 직감하고 말한다. “와이프인데 잘 부탁해요. 오 분 이상 걸려도 좋으니까 젊게 그려주세요.”


신기하게도 그가 그린 초상화는 마흔세 살의 히사코가 아니라 스물세 살의 히사코다. 단박에 이십 년을 가로지르는 슬픈 만남이다. 그러나 기적 같은 일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에나 가능한 이야기랄까. 남편은 남자에게 자기 아내와 식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자신은 커피를 마시고 있겠다며. 눈물겹고 신파스러운 배려다. 그러나 그 부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남자가 질척거리지 않고 그림값 이천 엔을 요구하더니 미련 없이 일어섰기 때문이다. 남자가 사라지고 다시 사진을 찍는 두 사람. 이번엔 히사코가 촬영에 아주 협조적이다. 히사코가 남편에게 부탁을 한다. 방금 받은 그림과 남편이 오늘 찍은 사진을 사무실에 나란히 걸어 달라고. 스물세 살의 히사코는 마흔세 살의 히사코를 결코 이길 수 없을 거라며. 이젠 아무 것도 거리킬 것이 없다. 거리에서 남편의 입, 볼, 턱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입을 맞추는 히사코. 바보 같이 이십 년이나 걸려 남편에 대한 사랑을 찾았다. 마침 크리스마스의 일이다. 아시다시피 크리스마스 이브는 매우 특별한 날이니까.



아사다 지로의 소설은 신파스럽고 복고적이지만 스토리텔링의 균형감각은 세계 최고다. 나는 세상이 가끔 살벌하게 느껴지거나 따스함이 그리워질 때 그의 단편을 하나씩 꺼내 읽는다. 그의 <수국꽃 정사>를 처음 읽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리면서도 좋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샐러리맨 같은 무사 이야기를 다룬 눈물나는 장편소설 <칼의 지다>를 읽은 뒤 완전 그의 팬이 되어버렸다. 우리나라 영화 <파이란>의 원작자도 아사다 지로다(원작은 <러브레터>). 그의 글은 어떤 소재를 다루든지 쉽게 읽힌다는 게 특징이다. 그러나 쉽게 읽히는 글을 쓰는 작가라고 무시하지 말자. 스티븐 킹이 대중작가라고 무시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모두 스티븐 킹에게 무릎을 끓었다. 서점에 나가 베스트셀러들을 잠깐 살펴면 이건 나도 쓰겠다, 싶은 어이 없을 정도로 쉽고 얄팍한 책들이 많을 것이다. 그걸 보고 한심한 세태니 인스턴트 시대라 그렇다느니 한숨 쉬며  탄식하는 건 자유다. 그러나 쉽게 읽힌다고 아무 책이나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아니다. 책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없으면 절대로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을 모르면 쉽게 쓰는 것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역시, 결론은 어이 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쉬운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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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등을 쓴 위대한 소설가지만 동시에 [소설의 기술], [커튼] 등을 쓴 뛰어난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같은 사람이 썼더라도 소설과 에세이는 다르다. 그래서 그가 에세이에서 밝혀놓은 개인적 체험들과 소설 작법, 그리고 사람과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통찰과 유머 등이 소설에서는 과연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읽는 것은 그의 책들을 더욱 즐겁고 고급하게 즐기는 또다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소설이 2차원의 영역이라면 영화는 분명 3차원의 영역일 텐데 그가 쓴 소설은 영화화되면서([프라하의 봄]이라는 멋진 영화를 물론 좋아하지만) 오히려 그  입체감이 사라지고 이미지와 캐릭터만 강렬하게 남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건 아마 아직도 소설이라는 장르만이, 또는 소설가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역설하는 증거가 아닐까. 조지수의 장편 [나스타샤]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누군가가 잘못 영화화 하기라도 한다면 캐나다의 광활한 풍광과 조지와 나스타샤의 사랑 이야기만 덩그라니 남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나스타샤]를 쓴 소설가 조지수는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조중걸의 필명이다. 서양철학사와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학자이며 이미 우리집 책꽂이에도 여러 권의 저서가 있는 일급 에세이스트지만 작년에 아내의 권유로 사놓았던 이 소설책은 분량이 너무 많고 또 앞부분의 문장들이 좀 딱딱해 보여 몇 페이지 읽다가 덮은 뒤로 그동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5월 초 회사 일이 좀 한가해진 틈에 우연히 펼치는 바람에 그야말로 며칠동안 ‘푹 빠져’ 읽게 되었다. 


이야기는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니다가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현재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는 33세쯤의 조지라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캐나다 웰드릭이라는 도시에서 호의적인 친구들과 어울려 생활하고 있는 이 남자는 강의 준비와 저술 활동 이외에는 주로 플라잉 낚시를 즐기는 데 거의 모든 돈과 시간을 쓰는 바람 같은 자유인이다. 낚시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행위이자 생활이다. 왜냐하면 플라잉 낚시는 그저 물고기를 낚는 것 이상으로 그들의 삶에 의미를 주고 저마다에게 영감을 주는 철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낚시에 대한 묘사와 보트, 그들의 커티지, 심지어 자비를 들여 낚시터에 건설하는 작은 수력발전소 등에 대한 글들을 반복적으로 읽다보면 누구나 당장 캐나다로 달려가 광활한 호수변에 서고싶은 충동이 일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면 어떤 시퀀스의 연속으로 이해하기 쉽다. 우연히 주인공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고 갈등구조와 위기를 겪다가 결국 결말로 치닿게 되는 담백하고 전형적인 플롯 말이다. 그러나 소설가의 성향과 역량에 따라 그 구조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다. 철학자 김용규가 쓴 [알도와 떠도는 사원]을 보라. 이 소설은 과학자인 아빠를 찾아 나서는 알도의 모험담임과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철학적 개념과 심리학적 고찰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놓은 지식의 라이브러리다. 조지수의 소설 또한 자칫 줄거리만 놓고 보면 꽤 단순한 외국 체류 경험담이나 좀 특이한 사랑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심지어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나스타샤’라는 여인의 등장도 무려 200페이지가 넘어서야 시작된다. 그러나 그 큰 이야기 기둥 사이로 펼쳐지는 작가의 눈부신 철학적 사유와 통찰력 있는 담론들은 이 소설을 아주 풍부하고도 탄탄한 교양서이자 지적 모험담으로 만들어 준다. 


나는 특히 저자의 간결하고 단호한 문체와 정치적 올바름에 반하게 되었다. 여기서 얘기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은 진보나 보수 또는 어떤 특정 정당을 지지하느냐 하는 따위의 좁은 개념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인류학적 관점으로 모든 현상을 공평하게 보려 노력하면서도 사안별로 그때마다 분명하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낚시터로 향하는 고속도로 중간 매번 들르는 케빈의 커피숍에서 나스타샤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여인을 만난 조지는 설명할 수 없는 측인지심에 이끌려 그녀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오게 되고 곧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나스타샤는 분리독립주의자인 남편을 돕다가 러시아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과 폭력에 시달린 뒤 빈털터리로 탈출한 여인이었는데 선량한 커피숍 주인 케빈이 점원으로 채용했던 것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가만히 서있기조차 힘들었던 그녀는 조지의 도움으로 웰드릭 주민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견뎌내며 차츰 건강을 되찾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고국 어딘가에 살아있을지 죽었을지조차 모르는 남편 보리스와 아들 아니카가 있다. 



30대 초반의 토론토 대학교수, 어린 시절의 유학, 그리고 낚시와 강의, 저술활동에 이르기까지 이 이야기는 작가의 자전적 스토리임이 거의 확실하다. 구체적인 사건들 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작가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래서 소설 곳곳에선 교육, 인종차별은 물론 역사, 성공, 사랑, 품위, 고결함 등에 대한 생각들이 거의 소설가의 육성 그대로 흘러 나온다.  또한 그동안 인류가 만들어놓은 철학과 예술에 대한 가치와 그것을 즐기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조지는 나타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셰익스피어와 헤밍웨이를 읽게 하고 더 나아가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포크너를 읽는 행복을 누리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오페라를 본 사람과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도 설명해 준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행복한 시절이다. 선천적으로 총명하고 밝은 나스타샤는 조지가 그려주는 지도대로 새로운 삶을 부지런히 찾아가지만 운명이 예고해 놓은 비극까지 피해가지는 못한다. 



조숙한 수학 천재였으며 여호와의 증인인 동료 교수 그렉, 억만장자이자 허영 덩어리인 유태인 변호사 매튜, 조지의 아이디어로 지렁이 재배에 성공해 큰 부자가 된 뒤 등을 돌리는 김유진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 각각의 이야기를 읽는 맛도 각별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나스타샤와의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지 않는 조지는 눈물을 머금고 그녀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깊은 시름에 빠져 알콜중독자가 된다. 


어떤 인생도 늘 행복할 수 없으며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소설가 조지수는 인생엔 목적이 없고 과정만 존재한다고까지 말한다. 삶은 허무하지만 그것이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며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이라는 그의 생각은 산문집 [One Man’s Dog]에도 잘 나타나 있다. 



무려 719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이다. 책을 읽으며 많은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 표시를 했고 밑줄을 그어야 했다.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문장을 다시 읽겠다는 나와의 약속이다. 결국 나스타샤는 자살하고 조지도 슬쓸하게 과거를 회상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들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성장했음을 무언 중에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이건 사랑 이야기를 통해 펼쳐진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긴긴 이야기 끝에 그 성장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혼자 새벽안개를 맞는 것처럼 알싸한 뿌듯함을 안겨준다. 


누군가가 '네가 읽은 책 중에 정말 신나게 재미있게 읽은 현대소설 몇 권만 얘기해 봐'라고 하면 나는 그동안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과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그리고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또는 [인생],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영화처럼], 레이먼드 카바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을 비롯해 윤대녕, 김훈, 배명훈의 몇몇 단편과 중편들을 추천했었다. 이제 그 목록에 하나를 더 얹어야겠다.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 조지수의 소설 [나스타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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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누군가 제게 그동안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을 다섯 편만 꼽아보라고 하면 무슨 책을 대야 할까 잠깐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 저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커트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 그리고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얘기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 소설 중 하나인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영화로 옮긴 작품을 IPTV를 통해 보았습니다. 이런 영화는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습니다.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누구든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정말 오랜만에 찰진 작품을 하나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당장 원작소설을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감독은 [빌리 엘리어트]와 [더 리더 : 책 읽어 주는 남자]를 만든 스티븐 달드리. 톰 행크스와 산드라 블록 같은 스타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주인공 오스카 역을 맡은 소년 토마스 혼의 연기가 대단합니다. 오스카의 할아버지로 나오는 막스 폰 시도우는 그 존재만으로도 대배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고요. 오스카네 맨션의 도어맨으로 특별출연하는 뚱땡이 존 굿맨도 참 반가웠죠.

 

영화는 매우 독창적이면서 유려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다만 오스카의 할아버지가 왜 말을 못하게 됐는지, 또 왜 양 손에 ‘YES’와 ‘NO’를 문신으로 새기고 다니며 의사소통을 하게 됐는지가 원작소설에선 자세히 다뤄지는데 영화에서 생략된 게 아쉽습니다. 소설에선 뉴욕 이야기 못지않게 2차대전 당시의 드레스덴 얘기가 기가 막히게 전개되거든요.

 

천재 작가가 쓴 엄청난 작품을 안정된 연출로 잘 만든 영화이고, 9/11을 다룬 영화라고만 쳐도 폴 그린그래스의 [플라이트93]을 능가하는 작품입니다. 전 이 책이 두 권이나 있었는데 모두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받지를 못했습니다. 누구한테 빌려줬는지 기억도 안 나고 해서 결국 오늘 서점에 가서 또 한 권을 샀네요. 전에 써놨던 독후감을 다시 한 번 올려봅니다. 영화도 책도 강추입니다.

 

 

 

 

비극적인 내용을 다루다 보면 글은 당연히 무거워지기 쉽다. 반면에 아무렇게나 몸을 놀리며 가볍게 칠렐레팔렐레 쓰는 거 같으면서도 유치하지 않게 보이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비극적인 내용을 가지고 칠렐레팔렐레 천의무봉으로 자유롭게 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불가능한 일을 해낸 사람도 가끔은 있는 법이다. 내 생각엔 그가 바로 조너선 사프란 포어다. 그리고 그가 쓴 책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란 소설이다.

 

  이 책의 주인공 오스카는 아홉 살이다. 그의 아빠는 9·11 때 무역센터에서 회의를 하다가 죽었다. 아빠는 죽기 직전에 다급하게 집으로 여러 통의 전화를 했고 오스카는 그때 자동응답기에 녹음이 되는 걸 알면서도 너무 무서워서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비극적인 일이다. 오스카는 그 이후로 전화를 무서워한다. 자동차나 비행기도 무서워한다. 전화기를 무서워하는 오스카는 길 건너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할머니와 얘기를 할 때는 무전기를 사용한다. 난 신선하고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와 말투를 창조해 낸 이 장면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가서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할머니? 할머니, 제 말 들리세요? 할머니? 할머니?” “오스카니?” “전 잘 있어요. 오버.” “밤이 늦었어. 무슨 일이냐? 오버.” “저 땜에 깨셨어요? 오버.” “아니다. 오버.” “뭐하고 계셨어요? 오버.” “세입자한테 얘기를 좀 하던 참이었다. 오버.” 그 사람도 아직 안 자고 있어요? 오버.” 엄마는 세입자에 대한 질문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렇단다. 하지만 방금 막 나갔어. 심부름할 것이 좀 있어서. 오버.” “하지만 지금은 새벽 4시 12분인데요? 오버.”

 

 

  오스카는 전화를 무서워하지만 사람들에게 편지 쓰는 건 좋아한다. 그래서 스티븐 호킹에게 자기를 제자로 삼아달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제인 구달에게서 답장을 받기도 한다. 호킹도 나중에 정중한 답장을 보내온다. 그는 쉴 때마다 공상을 하고 발명을 한다. 보통 아홉 살이 아니다.

 

  어느날 오스카는 아빠의 방을 뒤져보다가 파란색 꽃병을 깼는데, 그 속에서 ‘블랙’이라고 씌여진 봉투와 열쇠 하나를 발견한다. 그는 인터넷으로 블랙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낸 뒤 여덟 달에 걸쳐 그 사람들을 방문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유는 그 열쇠에 맞는 자물쇠를 찾기 위해서다.

 

  한편, 할머니는 오스카의 아버지를 임신했을 때 남편과 헤어졌던 뼈아픈 과거가 있다. 2차대전 당시 드레스덴에서 폭격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뉴욕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말을 못하는 상태였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에서처럼 여기서도 드레스덴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그 책도 비극적인 현실을 블랙유머로 펼쳐낸 책이었다. 보네거트와 사프란 포어는 이렇게 만나는 건가?)

 

  노트에 필기를 해서 대화를 했고 왼손엔 “예스”, 오른손엔 “노”라고 문신을 해서 의사소통을 했다. 할머니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제발 저랑 결혼해 주세요.” 그리고 둘은 결혼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또 잃을까 봐 그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비극적인 일이다. 둘 다 아주 젊었을 때의 일이었다...

 

  아아, 줄거리를 소개하려고 하다 보니 이상해진다.

 

  그냥 짧게 말하겠다. 이 소설은 엄청난 입심과 다채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시도들로 이루어진 멋진 작품이다. 페이지 사이사이 사진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글이 딱 한 줄만 써있는 페이지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글씨들이 서로 겹쳐져 볼 수 없게 만든 페이지도 있다. 근데 놀라운 건 그런 시도들이 조금도 치기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작가가 말하려는 감정이 절실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글을 워낙 잘 쓰다 보면 그렇게도 되는 모양이다.

 

  정말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아니, 너무 슬프면 울지 못한다. 그래서 오스카도 아빠의 장례식에 가는 날 리무진 운전기사와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런 오스카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완벽하게 이해한다.

 

 

넌 운전사와 농담을 하고 했지만, 속으로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운전사를 웃겨야 할 만큼 넌 고통스러웠던 거야.


 

 

  이 소설은 마치 여러 대의 카메라로 똑 같은 장면을 찍을 것처럼 동일한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그리고 화자가 바뀌어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때는 ‘아, 그때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깨달음을 선사해 준다. 그런 시선들과 사건들이 쌓이면서 여덟 달 만에 이야기는 마침내 이상한 감동과 함께 따뜻한 위로와 화해의 지점으로 향하게 된다.


 

이 책은 현대의 고전으로 남을 게 확실해 보인다. 아직 새파란 1977년생인데. 아무래도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엄청나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재인 모양이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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