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출퇴근길에 조금씩 읽었던 이상한 제목의 단편집 [관내분실]은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마침 회사 카피라이터 박수가 광고회사 사람들이 쓴 초단편집 같은 걸 빌려주며 재밌다고 하길래 뒤적여보고 나서 느낀 결론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김동식의 소설집들처럼 기발한 발상과 시퀀스로만 이루어진 소설은 내가 매우 재미없어 한다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좋은 이야기 속엔 '인간' 또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받은 게 있으면 줘야 한다는  '기브 앤 테이크 정신'으로 나도 그 후배에게 이 책을 권해줬는데 표제작을 읽고 나더니 "짱 재밌어요, 실장님!"이라고 마음껏 감탄해서 나를 기쁘게 했다. 
 
대상 작품이 표제작인 <관내분실>인데 얼마 전 첫 아이를 임신한 주인공 지민이 '마인드 도서관'에서 분실된 죽은 엄마의 자료를 찾아 헤매는 게 중심 스토리다. 어이 없게도 죽은 뒤에야 '실종' 처리가 된 엄마의 이야기로, 거기엔 도저히 화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식구들 모두에게 냉담한 남동생의 이야기가 섞여있다. 지민은 마인드 검색에 필요한 자료들을 찾다가 '김은하'라는 이름을 가졌던 엄마가 결혼 전 출판사에 다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고 그걸 토대로 '관내 분실'되었던 그녀의 자료를 찾아낸다. 이 과정 중 지민이 TV를 통해 보게 된 '인간의 영혼과 마인드는 같은 것인가?'에 대한 토론 프로그램은 작가의 과학적 지식과 존재론적 고민을 함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결과들은 부정적입니다. 마인드가 영혼이 아니라는 가장 결정적인 반박은, 그렇게 스캐닝된 시냅스 패턴이 더 이상 가소적으로 변형되지 않는다는 관찰로부터 나왔죠. 한 사람의 자아는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성장하고, 배우고 반응하고, 노화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변형되지 않는 마인드는 영혼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은 시점에서 고정되어버린, 일종의 박제된 정신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자책과 데이터로 구성된 마인드가 과연 인간의 온기까지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심이 엇갈리던 소설은 마지막에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엄마와 딸의 재회 장면을 짜릿하고 짧게 포착한다. 아마도 심사 위원 중 한 사람인 배명훈이 쓴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다. 나도 읽으면서 반가웠다. 이 작품은 분명 SF소설이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뇌과학은 잘난 체하는 첨단 지식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이해와 갈등, 그리고 새로운 발견을 위한 지렛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책 말미에 붙은 심사평들을 읽어보면 김초엽이라는 작가가 낸 단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유력한 대상 후보였는데 자신이 쓴 <관내분실> 때문에 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뛰어난 SF작가의 탄생을 예고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김초엽의 작품 말고도 김혜진의 <TS가 돌보고 있습니다>와 오정연의 <마지막 로그>도 흥미롭게 읽었다. 심사평 중에서도 재미 있는 글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울시립과학관의 관장 이정모 편이었다. 이정모 관장은 아무리 작품이 뜻하는 바가 좋고 잘 쓰여졌다 하더라도 재미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유미주의'를 내세웠는데 내게는 매우 설득력 있는 글이었다. 그리고 다른 심사위원들이 대상과 가작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에 비해 이 관장은 자기가 예심에서 골랐다 떨어진 작품들만 다루고 있다는 점 역시 특이했다. 본선에 올라야만 심사평을 받는다는 상식을 뒤엎고 낙선작들을 거론한 것이다.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의기소침해 있었을 작가 지망생들에게 이보다 더 큰 위안과 격려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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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나 우주선, A.I 등 신기한 인물이나 사건이 나오지 않는 SF를 쓰는 방법의 예를 들라고 하면 나는 대뜸 테드 창의 단편들을 얘기했을 것이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의 룰들이 이미 그 작품 속 사회에서 당연하게 돌아가고 있다면 신기한 사건이나 장치가 없더라도 소설은 이미 깊이 있는 SF, 또는 그 이상의 고전으로 완성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 대답 목록에 다른 작가와 작품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다.
 
이 장편소설은 1990년대 후반의 영국, 어느 시골 마을에 있던 기숙 학교 '헤일셤'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내는 캐시, 토미, 루스 등의 이야기다. 무대가 되는 학교에는 뭔가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흐르는데 이는 학생들이 모두 다른 인간들에게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 유전자 변형으로 태어난 클론들라는 게 밝혀지면서 풀린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또 섹스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들은 서서히 자신들이 어떤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자각하게 되고 그에 맞춰 순응하게 된다(담배를 피우면 절대로 안 된다고 강조하는 루시 선생님에게서 '네 몸은 네 것이 아니야'라는 암시가 강하게 풍겨온다).

[나를 보내지 마]라는 책의 제목은 주인공 캐시가 자신이 아기를 낳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나서 카세트 테이프로 듣게 된 노래 가사 'Never let me go, baby'에서 'baby'를 '아기'로 생각하고 인형을 흔들었다고 마담에게 오해를 산 장면에서 유래되었다. 아기를 낳지 못하므로 피임을 안 하고 섹스를 해도 된다는 사실에 오히려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런 이야기 자체를 피하게 된다. 특히 중반에 영화배우로 사는 게 꿈이라는 남학생에게 충고하는 에밀리 선생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다. 너희들은 결코 영화배우 같은 건 될 수 없어. 그저 운전사나 간병인 등으로 살아가야 해.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편의 이야기를 담은 미드 <블랙 미러>처럼 이 소설도 바이오 산업이 발달된 근과거나 가상의 세계를 담고 있는데 막상 장기 기증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클론들이 얼마나 인간처럼 살고 싶은지를 알려주는 장면들이 많다. 자신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근원자'를 찾아 몰래 외출을 한다든지 자신들에게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려 '마담'에게 전한다든지 하는 게 그것들이다. 심지어 어떤 커플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 헤일셤 관계자들이 그 진위를 가려주고 사실로 인정되면 두 사람은 몇 년 간 기증을 유예하고 함께 살게 된다는 소문까지 퍼지지만 나중에 그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마치 제인 에어가 그렸던 영국의 시골처럼 조용하고 아날로그적인 배경을 뒷그림으로 깔면서도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클론들의 서글픔을 아주 담담하고 델리케이트하게 묘사한다. 주인공들이 헤일셤을 떠나 코티지에서 만난 선배 중 헤어질 때마다 서로의 팔꿈치를 툭 치며 웃는 커플이 있었는데, 이는 TV 드라마에 나오는 인간들의 행위를 따라한 것이라는 것을 캐시가 알아채고 존재론적 회의에 젖는 식이다. 나중에 캐시는 간병사가 되어 기증자인 토미와 루스를 차례로 돌보게 되는데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그들의 과거에는 분명 성장소설적인 요소와 애증이 교차된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이 함께 들어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얘기를 알고 있음에 틀림 없다. 정말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인간의 입장을 떠나야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그 화두에 닿아 있으니까.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을 탄 직후 그의 오랜 친구인 소설가 살만 루시디는 "이시는 기타도 잘 치고 가사도 잘 써서 밥 딜런 정도는 쉽게 이긴다"라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문학의 대가들끼리 나눌 수 있는 멋진 축하인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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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하다 토요일

독서일기 2018. 3. 18. 13:13

'讀하다 토요일' 공지합니다  


토요일 오후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같이 책을 읽는 모임을 만들면 어떨까? 어느날 아내가 제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시작했는데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정말로 그런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읽을 책 몇 권의 책을 골라 드디어 시작합니다. 이름하여 토요일 오후의 한가한 독서모임 '讀하다 토요일'. 

요즘 사람들이 책을 너무 안 읽으니 억지로라도 책을 읽게 만들자... 뭐 이런 계몽적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도 아내도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저런 일에 치이다 보니 일상에서 차분하게 앉아 '책만 읽는 시간'을 내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일단 우리를 위해 그런 시간을 내보자 생각했던 것입니다. 

대학로에 있는 동네서점 겸 카페 '책책'의 선유정 대표가 저희 취지에 동의해 선뜻 장소를 제공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선유정 대표도 편집자 출신이라 책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책책에선 책도 팔고 예쁜 연필도 많이 팝니다. 따끈한 차를 마실 수도 있고 미니 전시회나 공연도 열리는 공간입니다.

모임 진행은 이렇습니다. 제가 먼저 그 달에 읽을 책을 페이스북 페이지 '북카페에서 수다떨기'나 제 담벼락에 공지합니다. 그럼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토요일 오후 2시에 책책으로 와서 각자 사온 그 책을 묵독합니다(책책에도 그 달의 책을 한두 권 준비해 놓으라 부탁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서로 그 책에 대한 얘기를 자유롭게 나누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와서 책을 다 읽으려면 시간이 모자라고 미리 사서 읽다 여기 와서 마저 읽거나 읽은 책을 다시 한 번 읽는 게 좋겠죠. 모임의 사회는 저나 아내 윤혜자가 돌아가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얘기를 시작하기 전 '세 줄 독후감' 같은 걸 써서 서로 발표하면서 왜 그런 독후감을 갖게 되었는지 얘기해보는 것도 재미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첫 6개월 동안은 한국 소설만 읽기로 했습니다. 이건 제가 마음대로 정한 것인데, 얼마 전 제 후배 카피라이터 두 명에게 읽을 만한 한국 소설 몇 권만 추천해 달라고 했다가 자기들은 한국 소설을 전혀 읽지 않는 '한국소설 문외한'이라는 자랑 섞인 대답을 듣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제가 어렸을 때 잘 나가는 학생들이 '가요는 전혀 듣지 않고 팝송만 듣는다'고 하던 것처럼요. 저는 우리나라 소설들이 얼마나 읽을 만한 게 많은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을 선정해서 같이 읽어보자는 것입니다. 

'독하다 토요일'에선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또는 그 책을 알고 있는지 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달에 한번이라도 토요일 오후 몇 시간을 오로지 책에 쏟고 그 즐거움을 만끽하는 게 목적의 전부입니다. 그날 모임에 대한 후기는 제가 간단히 작성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무슨 책을 읽을지 목록을 알려 드려야겠죠. 


4월 7일의 책 :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5월 12일의 책 :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6월 19일의 책 : 한강의 <흰> 
7월 14일의 책 : 김언수의 <뜨거운 피>
8월 11일의 책 :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 
9월 8일의 책 :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

그 외 추천하고싶은 책 - 윤대녕의 <대설주의보> / 황석영의 <손님> 


모임을 매주 두 번째 토요일에 열고 싶지만 4월달은 저희가 선약이 있어서 부득이 첫 번째 토요일에 모일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독하다 토요일'의 시작은 2018년 4월 7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비 얘기. 제 경험상 무료는 강연이든 교육이든 흥미도 떨어지고 잘 안 가게 되더군요. 그래서 약간의 책임감과 소속감을 위해 회비를 책정했습니다. 회원 회비는 6개월에 10만 원입니다. 6개월 간 같이 모여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고 다음 6개월은 어떻게 운영을 할지, 무슨 책을 읽을지에 대해 다시 의논을 하겠습니다. 회비는 6개월치 일시불을 원칙으로 하며 카드결제는 안 됩니다(나중에 계좌번호를 올리겠습니다). 그 달만 참여하시고 싶은 분은 월 2만원을 내시면 됩니다. 회비는 그날의 장소 대여비와 약간의 간식 등을 마련하는 데 쓰일 것입니다. 책은 각자 구입하셔야 하구요.  

저희 부부 포함해서 예닐곱 명 정도가 모이면 적당하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 몇 분이 신청하실지는 아직 감이 안 잡힙니다. 혹시 아무도 없으면 저희 둘이라도 시작할까 합니다. 편성준나 윤혜자에게 페북 메시지로 참여 의사를 전해주시거나 페이스북 담벼락에 댓글로 참가 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나중에 저희가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많은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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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미국 작가가 쓴 것 같은 프랑스 소설을 한 권 읽었다. 레일라 슬리마니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달콤한 노래]다. 물론 이 작품은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콩쿠르상을 받은 작품인 만큼 당연히 정통 프랑스 소설이 틀림 없지만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 고통은 없었다고 의사가 분명하게 말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소설이 끝나는 장면의 "얘들아, 이리 와. 목욕할 거야."라는 대사에 이르기까지 이전에 똑 같은 상을 탔던 선배 작가 에밀 아자르나 파트릭 모디아노의 몽환적인 글들에 비하면 한결 선명하고 단호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음악 비즈니스에서 일하는 폴과 법조계에서 새롭게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하던 미리암이 등 두 젊은 중산층 부부가 아이들을 돌봐줄 보모를 구하는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너무나 일 잘 하고 나무랄 데 없었던 보모 루이즈가 어느날 갑자기 돌변해 두 아이를 살해한 뒤 자신도 자살을 기도한 사건을 다룬 짧은 소설이다. 레일라 슬리마니는 뉴욕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파리로 가져와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소설의 내용을 거침없이 밝힐 수 있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첫 챕터에 모두 나오기 때문이다. 살인이 벌어지긴 하지만 함정이나 서스펜스가 없는 이야기.  

그렇다면 이건 무슨 소설일까. 소설가에겐 어떤 스토리를 던지고 그 시퀀스들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 가는 것도 주요하지만 등장인물들에게 왜 그런 스토리가 생겨나게 되었을까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리고 문학성이 높거나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일수록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나 전후 설명이 더 밀도 높고 입체적으로 이루어진다.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만 밝히고 제대로 된 살해 방법조차 언급되지 않는 첫 챕터를 단숨에 읽은 후 나는 레일라 슬리마니의 소설 [달콤한 노래]는 명백하게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임을 직감했다.

누가 죽였느냐,가 초반에 이렇게 밝혀진다면 이제 남은 건 왜 죽였느냐 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왜 루이즈가 아이들을 죽이게 되었는지 직접적인 동기는 쉽사리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집으로 들어와 처음에는 요정이라는 찬사까지 받던 루이즈라는 여자가 어느 순간부터 폴과 미리엄의 경계를 받는 처지가 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하나 하나  읽어나가다보면 마지막엔 그녀의 심리상태가 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팩트들은 레일라 슬리마니라는 뛰어난 작가에 의해 마치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그 사람 얘기를 시시콜콜 듣는 것처럼 내밀한 부분까지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는 루이즈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노동계층인 루이즈에게 공정하게 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선량한 부부이면서 동시에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교양 있는 직장인인 폴과 미리암을 묘사한 대목을 잠깐 읽어보자.

삶은 이런전런 책무와 완수해야 할 계약, 잊으면 안 될 약속의 연속이 되었다. 미리암과 폴은 일로 정신이 없다. 그들은 그렇게 일에 치인다는 것이 곧 성공을 알리는 징표이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정신이 없다는 말을 한다. 그들의 삶은 용량을 초과해서, 남은 자리는 겨우 잠을 자기 위한 것일 뿐, 무언가를 응시할 자리는 전혀 없다.

살고 있는 도시만 다를 뿐 성공을 바라보며 일에 치여 허덕이는 것은 우리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아이들이 생기기 전 폴이 언젠가 미리엄에게 했다는 "우리 여행도 많이 하고, 아이는 팔 밑에 끼고 다니자. 당신은 대단한 변호사가 될 거고, 나는 잘나가는 아티스트들을 프로듀싱할 거야. 아무것도 달라질 건 없어"라는 말은 오래 전 읽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마스터 키튼]의 한 에피소드 중 "난 서른다섯 살에 중역, 마흔엔 사장이 될 거야. 그럼 은퇴를 하고 세계 여행을 떠나자. 당신은 사교계에 데뷔를 하고 난 그레이엄 그린 같은 소설가가 될 거야...당신이 청혼하면서 내게 한 말이야." 라는 어느 주인공 여자의 대사로 겹쳐진다. 어느 것 하나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기댈 언덕이 있었던 폴이나 미리암과 달리 루이즈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폴 가족이 근교에 있는 친구 농장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시내에서 루이즈를 목격했을 때다. 루이즈는 그들을 보지 못하고 쇼윈도 사이를 허정허정 걸어다니고 있었는데 이는 미리암이 자기 집에 있지 않은 상태의 루이즈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미리암이 차 안에서 루이즈를 멍하니 쳐다보며 '이야기를 착각하고 낯선 세상에 와 있는, 영원히 떠돌아야 할 운명을 선고받은 인물 같아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어린 아들이 "루이즈 아줌마 어디 가는 거야?"라고 묻고 미리암은 "집에 가는 거지. 자기 집으로."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루이즈는 그때 이미 세든 집에서도 쫓겨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씬이다. 

루이즈가 원래는 착한 여자였는지 악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간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에 왔던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나는 살인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모욕의 순간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모욕이 있고 모순과 소외가 존재한다. 그리고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 프랑스의 젊은 소설가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건을 수사하던 경감의 현장검증을 앞두고 끝나는 이 소설은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건 단지 보모의 살인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커다란 질문부터 시작해 관계의 문제, 내가 속한 세상에서 밀려나는 것에 대한 공포,영원히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실존적 절망...그래서 이 이야기는 파리에 사는 루이즈나 미리암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뉴욕에서 실제로 아이들을 살해했던 보모의 범행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작가도 몰랐을 것이다. 사실에 대한 단서가 적을수록 '돌아갈 곳 없는 외로운 사람의 절망적 선택'이라는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은 더 큰 힘을 얻는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뛰어난 소설가들은 아주 작은 기사 한 줄만 읽고도 훌륭한 소설을 써낸다는 사실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신문 귀퉁이 1단 기사에서 전당포 노파 살해사건을 접하고 구원과 심판에 대한 걸작 [죄와 벌]을 썼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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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지갑

독서일기 2018. 2. 9. 14:29


일을 하다가 막히면 책꽂이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는 습관이 있다. 

오늘은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인문학]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네 번째 챕터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들이 쓰여 있다.  '사람은 서로 신뢰하고 존중할 때 행복하다'는 글에 이끌려 본문을 펼쳐보다가 예전에 어디선가 흥미롭게 읽었던 실험 이야기가 다시 언급되어 있길래 읽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길거리에서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되찾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 50 달러가량의 돈을 지갑에 넣고 이름을 표시한 1,100개의 지갑을 전 세계 도시 곳곳에 떨어뜨려 놓았다. 지갑이 가장 많이 돌아온 도시는 어디였을까? 

놀랍게도 인구 13만 명이 사는 덴마크 올보르에서는 지갑 100%가 회수되었고 지갑 속 돈도 그대로였다고 한다. 이로써 덴마크는 세계에서 신뢰도가 가장 높은 나라임이 증명된 것이다. 멕시코나 중국, 이탈리아, 러시아에서는 지갑이 돌아오는 확률이 굉장이 낮았다고 한다. 

사회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악에 바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나라일수록 행복감도 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실험을 하면 과연 몇 개의 지갑이 되돌아올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갑을 자주 흘리는 나로서는 여러 번 해 본 실험이다(비록 원해서는 아니었지만). 한숨이 나온다. 슬프다. 일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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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다 가기 전에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에 대해 몇 자 기록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017년 1월부터 지금까지 읽은 책이 몇 권이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중 딱 한 권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한국 소설 쪽에서는 이 작품을 꼽고 싶으니까(외국 작품은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


형이상학적 소설을 쓰기로 유명한 '심각 보이' 이승우가 이번에 잡은 주제는 '사랑'이다. 그런데 소재도 '사랑'이다. 주제가 사랑이라는 건 따지고 보면 거의 모든 소설에 적용되는 것이니 그렇다 친다 해도 소재조차 사랑이라는 건 일단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주인공도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다. 첫 문장을 보자.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영화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우주괴물들이 인간의 몸을 인큐베이터처럼 이용한 것처럼 이번엔 형체도 체취도 없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우리 몸을 빌려 세상에 나오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주장이다. 언뜻 관념의 장난이나 궤변처럼 느껴지는 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작가는 형배와 선희라는 구체적인  인물들을 데려온다. 소설 초반에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어."라는 말로 이별을 통보하는 형배. 그 말을 듣고는 기가 막혀서 " 지금,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흡사 독립선언문 낭독하듯 하고 있는 거 알아?" 라고 묻는 선희. 두 남녀는 그렇게 헤어지고 그들이 헤어지는 과정에서 사랑이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인가, 형배가 자학에 가까운 선언을 함으로써 얻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에 있어서 진정한 약자와 강자는 누구인가 등에 대한 작가의 상념들이 유려하면서도 집요한 문장으로 쫀쫀하게 이어진다. 

그리고 몇 년 후 두 사람은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때 형배는 그녀의 귀가 하트 모양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고 뒤늦게 혼자 사랑에 빠진다. 쉽게 말해 사랑의 포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왜 대개의 사랑은 이렇게 타이밍이 잘 맞지 않는 것일까.

자기가 찍은 거의 모든 여자와 자는 바람둥이 준호는 그런 형배를 '진실한 사랑은 평생 한 번 뿐'이라는 그릇된 신화에 사로잡혀 그런 것이라고 비판한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작가는 평생 세 번 약혼하고 세 번 파혼한 프란츠 카프카의 예를 들며 준호의 입장을 옹호한다.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중 '감옥에 갇힌 죄수'의 욕망과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죄수는 탈옥을 해서 감옥 밖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감옥을 잘 개조해서 그 안에 살고 싶은 욕망도 가지고 있다. 누구나 갑자기 나타난 해결점 앞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흡사 영화 [빠삐용]에서 드가가 그랬던 것처럼. 

이 소설은 작가가 카프카의 약혼 이야기를 몰스킨에 메모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몰스킨에 적힌 단상이 스마트폰의 메모장으로 옮겨 갔고 그 후에 생각날 때마다 메모한 문장들이 그대로 소설의 소제목들이 되었다. 그리고 형배, 선희와 그녀의 새로운 사랑 영석, 그리고 친구 준호와 민영, 그리고 형배의 어머니까지 소환해 사랑이라는 이 복잡미묘한 감정이 인간을 어떻게 이용하고 지배하는지를 세밀하게 관찰한다.

책을 읽으면서 그의 집요한 문장에 매번 감탄했다. 처음엔 형이상학적인 것 같아 저항이 일었지만 곧 저항을 포기하고 리드미컬하게 그 문장에 몸을 실으면 어느 순간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쾌감이 몰려왔다. 특히 등장인물들의 사랑에 대처하는 어이 없는 상황마다 카프카는 물론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등 고전들이 등장해 인간 심연에 숨어있는 보편적인 심리를 새삼 일깨워주기도 해서 더 흥미로웠다. 

이승우는 프랑스에서 특히 인기가 높은 소설가다. 그만큼 관념적으로 뛰어난 직조를 선보인다는 뜻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황석영이나 고은 선생이 노벨문학상을 못 타고 작고한다면 나중에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상은 아마 이 작가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점쳐보기도 한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아주 어렸을 때 나는 어른들이 부르는 이 노래를 듣고 자랐다. 아마 그때도 사랑은 중요했고 그 본질이 무엇이지에 대해서도 다들 궁금해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이냐 묻는 것만큼 어리석을 일이 또 있으랴. 물어봤자 답이 없는 것이 사랑일 텐데. 다행히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라로 소설책 한 권을 채운 이승우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신은 일한다. 일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신의 존재 근거나 방식에는 관심 없다.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 사랑하느라 바쁜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것의 근거나 방식이 어떠한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니 걸핏하면 '도대체 자기는 나를 사랑하긴 하는 거야?'고 묻는 여자친구가 았다면 이 책을 선물하라.  그리고 사랑은 하는 것이지 묻는 게 아니라고 점잖게 말하라. 이때 모텔 간판을 가리키며 말하면 빰을 맞을 것이요, 꽃이나 목도리를 내밀고 말하면 미소와 키스를 받을 것이다(자매품으로 조중걸의 [러브 온톨로지]라는 에세이도 있다. 사랑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아포리즘으로 가득한 책이다. 내 아내 윤혜자가 기획한 책이라 그런 건 물론,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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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화장실에 가서 [해피 투데이]라는 잡지를 읽다가 들고나와 계속 읽었다. 이 책엔 매달 아내 윤혜자가 쓰는 칼럼 ‘방방곡곡 탐식유랑단’이 실리기 때문이었다. 이번달엔 마천중앙시장의 두부 전문점 <내일도두부>와 시장 입구에 있는 호떡 포장마차에 대한 글이었다. 나도 두 군데 다 같이 갔던 곳인데 특히 그 호떡집은 맛이나 역사에 있어서도 보물 같은 곳이었다(TV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에 나온 사람들 중에 그 집 아저씨에게서 호떡을 배운 분들이 여럿 있을 정도라고 한다).

아내의 글 말미에 프로필이 실리는데 내 얘기도 조금 섞여 있어서 읽을 때마다 웃긴다.

​필자소개 윤혜자 :
책을 비롯한 다양한 컨텐츠를 엮는 기획자로 일했다. 나이 들어 결혼, 아침을 안 먹으면 하루 일과를 시작하지 못하는 남편과 살며, 그리하여 즐거이 매일 아침밥을 지어 상을 차린다. 손수 밥을 지어먹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고 음식 공부를 하고 있다. 남편과 함께 동네 술집과 밥집을 어슬렁거리며 맛있고 즐거운 음식점을 만나면 여기저기 소문내는 일을 즐거워 한다.


같은 책에 실린 도올 김용옥 선생의 글 ‘도올곤지’를 읽으며 깔깔깔 웃었다. 자신이 제주도에서 한 강의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했으며 <월간중앙>에 실으려 하는 글도 크게 환영 받을 것이다, 라는 식의 특유의 잘난척이 넘쳐남은 물론이고 월간중앙 한기홍 기자가 ‘선생님 글이 너무 래디컬에서' 실을 수가 없다라고 하자 ‘내가 먼저 쓰겠다고 한 글도 아니고, 자기들이 부탁해놓고 못 싣겠다고 하면, 내 피땀은 어디로 가나?그까짓 고료나 시간낭비의 문제는 용서할 수도 있지만, 문재인정부의 새시대에 나의 논리가 언론의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서글픔은 나의 존재의 시대적 기능이나 사명에 관해 근원적인 회의감을 불러 일으켰다’라고 투덜거리는 대목의 솔직함이 너무 너무 천진하고 귀엽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투덜거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르던 닭 두 마리가 죽자 먹지 않고 향나무 밑에 묻어 준 얘기도 나오고 추석 연휴에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소설가 김훈에게 전화를 건 얘기도 나온다. 물론 김훈에게 맨 처음 소설 쓰기를 권한 사람이 자기였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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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뭘 배우러 다니는 걸 좋아한다. 강연도 많이 듣고 음식이나 꽃을 배우러 다니기도 한다. 사실은 나도 아내처럼 뭔가 배우러 다니고 싶지만 회사 일만으로도 벅차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할 뿐이다. 세상에 시험 안 보는 공부만큼 재미 있는 건 없다. 인생을 헤아려 보아도 주로 돈 안 되는 일을 할 때가 더 재미 있었다. 일단 누가 시켜서, 또는 먹고 사느라 할 수 없이 하는 일과 내 자유의지로 하는 일은 모든 면에서 천지차이다. 매일 일에 치여 사는 샐러리맨들에겐 그래서 휴일이 필요하고 사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질 때만 비로소 커피 한 잔이나 럼주 한 잔도 더 맛있게 음미할 수 있을 것이었고, 담배 연기와 무더운 날 바다에서 하는 수영, 토요일마다 보는 영화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메렝게 음악, 이 모든 게 육체와 정신에 더 좋은 느낌을 선사할 것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 [염소의 축제]를 읽다가 눈에 번쩍 뜨여 잠시 멈추고 밑줄을 그으며 이 대목을 되새겼다. 이승우의 [가시나무 그늘]을 읽을 때도 느꼈던 ‘자유의지’의 소중함에 대한 한 구절이다. 오늘 같은 토요일 한가하게 한 잔 하는 차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소중한 행복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은 [새엄마 찬양] 이후 처음인데 노벨문학상을 탔던 만큼 대단한 필력과 통찰력에 유머까지 겸비하고 있다. 이런 우수한 작가가 말년에 극우파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고 가슴 아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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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와 한 여자가 뒤늦게 만나
살림을 합쳤다.

각자의 애인이나 옛 추억이야
당연히 정리를 했지만
책꽂이에는 아직도
과거의 편린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두 권의 책을 한 권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한 집에 사는 두 사람이
할 일이라 생각했다.

[토지]나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들을
먼저 원하는 사람들에게 한 질씩 주었다.

시시한 추리소설이나
값싼 베스트셀러들은
그냥 버렸다.

그래도 책꽂이엔 이상하게 
책들이 많았다. 

어느날 저녁
거실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각자 가지고 있던 시집들만 모아 보았다.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
정호승의 <새벽편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정호승의 <별들은 따뜻하다>
유하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황지우의 <어느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모두 두 권씩이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당대에 화제가 되었거나
후대까지 스테디 셀러로
사랑을 받았던 시집들.

너무 흔하고 트렌디해서
살짝 민망하기까지 했던,
그러나 전생에 나누어 가졌던
깨진 거울조각처럼

이제 와서야 두 권이
제짝처럼 야하게 몸을 맞댄
그 시절의 공감대.

'2-1=1'

이 간단한 수식이
삶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2013년 9월의 어느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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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가 김용은 대만에서 신문사를 창간하고 평생 그 신문의 주필로 일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평생 독재와 싸우고 잘못된 사회문제에 일침을 가하는 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여기며 살았다. [사조영웅전], [의천도룡기] 등 그가 쓴 무협소설들은 - 세계적으로 히트하고 나중에 그의 문학만을 연구하는 ‘김용학’이라는 장르까지 만들어졌지만 - 어디까지나 신문의 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김용과 비슷한 사람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스웨덴의 스티그 라르손이다.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에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냐 싶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스티그 라르손도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엑스포’라는 언론사를 세우고 극우파나 파시스트, 인종주의자들과 평생 싸운 사람이었다. 항상 적들에게 살해 위협을 느끼며 사느라 여자친구와 결혼도 하지 못하고 삼십 년 동거를 했다고 하는 그가 농담삼아 ‘노후 보장용’으로 구상한 게 ‘밀레니엄 시리즈’라 이름 붙은 사회파 추리소설들이다. 첫 번째 소설’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시작으로 10부작으로 구성되었지만 세 번째 소설까지 원고를 넘기고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만다.


몇 년 전 읽은 첫 번째 소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 이어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를 헌책방에서 구해 읽었다. 전작에서 이미 선보인 밀레니엄의 편집장 미카엘 블름크비스트와 보안업체 조사원인 천재 해커 리스벳 살란데르가 또다시 거친 운명을 헤쳐가며 활약한다. 이번에는 미성년자 성매매에 얽힌 추악한 진실을 파헤친다. 세계적으로 히트하고 스웨덴 인구 중 삼분의 일쯤은 읽은 수퍼 베스트셀러라서 그런지 충격적인 소재 말고도 주인공들의 파격적인 언행과 폭력, 섹스, 이상 성격 등이 양념처럼 골고루 배어있다. 특히 아주 작고 가냘픈 체격에 불 같은 성격과 민첩함, 괴력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공 살란데르는 작가가 좋아하는 '말괄량이 삐삐’가 어른이 되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서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스웨덴에서는 당연히 영화로 만들어졌고 미국에서도 데이빗 핀처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소설과 분위가 좀 다르지만 영화도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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