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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이나 방송인 노홍철은 왜 책방을 냈을까. 아내나 친구들이 술을 마시면서 가끔 서로에게 던져보는 질문이다. 그들은 정말 책의 미래를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책을, 또는 책방을 이용해서 자신의 '퍼스널 브랜드'를 높이려는 것일까(물론 그러면서 책도 잘 팔리면 더 좋고).

평범한 사람으로서 좀 더 잘 살거나 행복해지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거의 진리에 가깝다. 책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읽을 시간이 없다는 얘기를 한다. 우리는 먹고 사는 일에, 공부니 취직 준비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긴다. 그리고도 남는 시간이 생기면 TV에, 인터넷에, 모바일에 또 대부분의 시간을 빼앗긴다. 일이나 공부에 치여, 구직이나 스펙쌓기에 지쳐 널부러져 있다가 잠깐 정신이 나면 리모콘을 들어 '효리네 민박' 같은 프로그램을 틀어 건성으로 본다. 건성으로 보다가 효리가 요가를 하는 걸 보고 나도 요가나 배워볼까, 생각한다. 이상순이 다기에 뜨거운 차를 붓는 것을 보고는 나도 차를 시작해 볼까, 생각한다. 실제로 요가학원이 늘어나고 다기나 보이차가 잘 팔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 책이 끼어들 틈은 없다. 가끔 드라마나 <무한도전> 같은 인기 프로그램에 책이 한 권 노출되면 당장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투기 현장의 떳다방보다도 못한 '반짝 상품'일 뿐이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나도 회사 일이 바빠서 지지난 주에 산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출퇴근 시간과 잠자기 직전에 조금씩 읽었는데도 아직 2권 중간이다. 물론 출퇴근 시간에도 기습적으로 울리는 업무전화나 카톡 때문에 온전히 소설에 집중하기는 어렵다. 남들보다 조금은 더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나도 이렇게 책을 읽기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한기호 소장의 칼럼 ' 대한민국에는 서점이 없다. 그러니 출판 경기가 최악일 수밖에 없다' 에서 보는 것처럼 작가들도 책을 팔아 생활할 수 없으니까 강연으로 돈을 번다. 사람들은 '세바시' 같은 강연엔 열광하며 박수를 치지만 그 강사가 얘기하는 책을 사서 읽진 않는다. 그러니 서점이 잘 될 리가 없다. 그리고 어쩌다가 서점에 가도 서점에서 제안하는 매대 위의 책을 사서 읽을 수밖에 없다. 


책의 유통 구조를 고쳐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만, 책도 서점도 상품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말에도 동의하지만, 정말 그런 것이 본질적인 문제일까. 비꿔야 하는 것은 쓸 데 없이 분주하고 걱정만 하며 사는 우리의 삶이 아닐까. 정말 내가 옛날에 다니던 구파발 전철역 앞의 '진양서점'이나 맥 라이언이 책방 주인으로 나오던 <유브 갓 메일> 같은 정겹고 소소한 일상 속의 서점이란 불가능한 것일까. 이렇게 -까, 로 끝나는 의문문만 잔뜩 늘어놓고 끝내는 글을 쓰는 건 정말 싫지만 그렇다고 내가 뭐라고 뽀족한 수를 낼 수가 있을까. 아, 그런데 참. 그들은 왜 책방을 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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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분노]라는 소설을 두 번 샀다. 두 번 읽은 게 아니라 두번 구입. 출퇴근길에 전철 안에서 짬짬이 읽다가 100페이지쯤 읽었을 때 어디선가 잃어버렸는데 책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책값이 16,500원이니까 나는 결국 33,000원짜리 이야기를 읽은 셈이다. 그래서 어땠냐구? 다시 사서 읽길 잘 한 것 같다. 아마도 올해가 다 가도록 나에겐 이보다 더 ‘올해의 책’은 없을 것 같으니까. 

로런 그로프는 무시무시한 작가다. 안 그렇게 생겼는데 글은 독하고 능숙하고 교활하다. 섹스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마음에 딱 든다. 그리고 필력이 엄청나다. 글을 잘 쓴다는 건 시나리오 작가처럼 사건을 잘 짠다는 것과는 좀 다른 얘기다. 사건보다 중요한 건 그 모티브를 어떤 태도와 문체로 다루느냐인데, 뛰어난 작가일수록 가장 고귀해질 수도 가장 저속해질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던 것처럼. 로런 그로프가 그렇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이 책엔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 얘기도 여기저기 끊임없이 인용된다. 남자 주인공 로토가 셰익스피어 연극을 주로 하는 배우였고 나중엔 잘 나가는 희곡작가가 되기 때문이다. 스물두 살에 결혼하는 그의 아내 마틸드를 만난 것도 그가 햄릿 역을 했던 날의 일이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호의와 사랑을 받았고 원하기만 하면 모든 여자와 잘 수 있었던 로토는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던 신비한 여신 같은 마틸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청혼하고 순식간에 결혼을 한다. 소위 ‘킹카’들의 갑작스러운 결합에 어이 없어하던 친구들은(여자라면 대부분 로토와 섹스를 했던-쓰리섬을 했던 여자들도 있다)신혼파티에 와서 그들의 결혼이 곧 깨질 것을 예상하며 "뭐, 첫 번째 결혼이니까”라고 배배꼬인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런 바람과는 달리 두 사람은 로토가 죽기까지 무려 23년간 다른 사람을 넘보는 일 없이 결혼생활을 영위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일찍 결혼한 남녀가 헤어지지도 않고 이십 년 넘게 함께 사는 얘기가 어떻게 흥미로운 소설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로런 그로프라는 작가의 힘이 빛난다. 이 소설은 로토와 마틸드의 격하고 찬란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 뒤엔 콜리와 에이리얼이 라는 음습한 인물들이 숨어 있는 교활하고 잔인한 드라마다.  이 책이 심리소설이었다면 왜 제목이 ‘운명과 분노’인지, 에이리얼과 마틜드의 비밀 거래는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원인과 결과가 딱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이 책이 추리소설이었다면 마틸드가 왜 스물여섯 살에 낙태를 하고 스물여덟 살엔 불임수술을 하는 배신을 저질렀는지 밝혀내려 애쓸 것이다. 아니, 그보다 어렸을 때 정말 마틸드가 남동생을 계단에서 밀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게 사실인지부터 밝혀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문학책이다. 그것도 강력한 서사를 지닌 입체적인 문학 작품. 마침 이 책을 쓸 때 작가가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비극을 탐닉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현대적인 결혼생활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신화적인 구성과 고전적인 비극미를 함께 갖추게 되었다.

백만장자의 아들로 태어나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서 단 한 푼의 돈도 물려받지 못했지만 매력적인 외모와 비상한 두뇌를 소유했던 한 사내와 어릴 적 불운했던 과거를 분노라는 동력으로 맞서려 했던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이 연상되는, 마치 세상 일을 모두 알고있는 듯한 로런 그로프의 우아하고 오만한 문체와 폭발적인 서사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인생사와 인간의 단면을 활자의 힘만으로 능숙하고 위엄있게 그려낸다.   

그동안 누가 흥미진진하면서도 문학성까지 갖춘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가네시로 가즈키의 [영화처럼],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또는 [인생],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조지수의 [나스타샤]등을 추천했는데 이제 한 권을 더 추천해야겠다. 바로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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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이 어지럽거나 뭔가 머릿속이 정리가 잘 안 되는 느낌이 들 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들을 다시 꺼내 읽는 버릇이 있다. 오늘도 그런 이유로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 중 <시나가와 원숭이>를 먼저 읽고 다음 작품으로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를 골랐다. 신기한 것은 읽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군데군데 내가 볼펜으로 밑줄을 쳐놓은 문장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단편은 메릴린치에서 증권 거래인을 하다가 갑자기 아파트 계단 사이에서 맨몸으로 사라져버린 남편을 찾으러 온 여자의 사연을 듣게 된 탐정의 얘기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얼마 전에 읽은 [달과 6펜스]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폴 고갱도 주식 중개인이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어느 날 부인과 아이들을 남겨둔 채 혼자서 타히티로 떠나 버렸다. 어쩌면...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설사 고갱이라고 하더라도, 지갑을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테고, 만약 그 시절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가 있었다면, 그것도 잊지 않고 가져갔을 것이다. 어쨌든 타히티까지 가야 하니까.

여기까지 읽고 나서 나는 에버노트에 끄적여놨던 [달과 6펜스] 독후감의 초안을 다시 꺼냈다. 책을 읽은 다음날 급하게 메모를 조금 했다가 일이 바빠져서 중단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래, 오늘은 이 책의 독후감을 마져 써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20세기 초반의 영국 런던. 성실한 가장이자 증권 브로커였던 평범한 남자가 갑자기 집을 나간다. 그런데 그 이유가 여자나 노름에 미쳐서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화가가 되고 싶어서란다. 너무나도 유명한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의 도입부다. 나는 이 소설을 고등학교 때 삼중당문고라는 작은 문고판으로 읽었다(신기하게 아직도 내 책꽂이에 그 문고본이 꽂혀 있다). 어린 나이에 읽기에는 조금 버거운 내용이었는데 당시에도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의 일탈은 꽤나 매력적이었고 그게 화가 폴 고갱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대목에 더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 [달과 6펜스]를 마흔 살쯤 다시 읽어보면 새로운 게 보일 것이라고 쓴 글을 읽었다. 마음이 혹했다. 다시 읽어서 새롭지 않은 소설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서울 변두리에 살던 어느 고등학생의 겨울을 흔들어 놓았던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라면 다시 한 번 만날 만 하지, 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스스로가 성공한 극작가이기도 했던 서머싯 몸은 화자를 런던에서이제 막  필명을 얻기 시작한 풋내기 극작가로 정하고 그가 만나게 된 찰스 스트릭랜드의 첫인상으로부터 시작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 평범하고 덩치가 큰 남자였다, 로 요약된다. 주인공이라고 멋지거나 특이하거나 굳은 신념이 있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시작부터 사람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영웅담을 경계해야 한다 말하며 자신만의 '현대적인' 캐릭터 작법을 펼친다. 즉, 신화나 옛날 이야기에 나오던 멋진 주인공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만으로도 얼마든지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1919년에 발표된 소설임을 생각하면 놀랍도록 모던하고 스마트했던 작가다. 훗날 영국 첩보국의 비밀 스파이로도 활동한 것으로 밝혀졌던 서머싯 몸은 작가이면서 동시에 멋진 카피라이터이기도 했다. 자신의 소설을 팔기 위해 백만장자 미망인의 이름으로 '서머싯 몸의 신작 장편에 등장하는 주인공 남자와 닮은 남편감 구함'이라는 가짜 신문광고를 냈던 것이다. 그 꼼수 덕에 그의 소설이 날개 돋힌듯 팔렸음은 물론이다.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샜다. 아무튼 그렇다면 이 평범하던 남자 찰스 스트릭랜드는 어떻게 해서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서머싯 몸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고갱의 일화를 찾아 타히티로 여행을 갔었다고 한다. 그러나 타히티에 찾아 간다고 고갱의 일생이 일목요연하게 짠, 하고 펼쳐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판단하기보다 알고자 하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서머싯 몸의 이 문장은 소설가라는 직종이 학자나 기자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여기 어떤 남편이 이유 없이 가출한 사건이 있다고 치자. 기자는 육하원칙에 따라 그 사건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쓴 짧은 기사는 그것만으로 명쾌하게 사건의 개요를 말해 준다. 필요하다면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심리학자의 의견을 덧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몇 줄의 기사만으로는 그 사건의 주인공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오다가 어떤 순간에 그런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예술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런 일은 잘 설명되지도 않는다. 인간은 논리적으로만 행동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소설가의 몫이다. 소설가는 단 몇 줄로 요약될 수도 있는 사건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이야기의 뼈대를 다시 맞추고 살을 붙여 입체적인 작품으로 만든다. 그래서 우리에겐 서머싯 몸 같은 입심 좋은 소설가가 필요한 것이다. 작가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부인을 옆에서 지켜보는 젊은 극작가를 등장시켜 주인공이 떠난 파리에 가서 그를 만나게 한다. 그런데 막상 만나본 그는 예술가로서 성공하려는 야심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고 딱히 돈이나 편안함을 바라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지만 남의 평판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뼈져 죽어요.' 라고 뇌까리며 그림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만을 표출할 뿐이다.

"그 사람 정말 천재일세. 확실해. 지금부터 백 년 후에 말일세. 사람들이 자네나 나를 조금이라도 기억해 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찰스 스트릭랜드와 알고 지낸 덕분일걸세." 

지금이라도 누군가에게 팬심을 나타내고 싶을 때 써먹으면 정말 좋을 것 같은 이 문장은 파리에서 찰스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감탄하던 더크 스트로브의 말이다. 그러나 찰스는 자신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더크에게 내내 시쿤둥할 뿐 아니라 나중에 찰스에게 반해 남편을 버리고 자신에게로 달려 온 블란치 스트로브에게도 매몰차게 굴어 결국 자살에 이르도록 만든다. 그런데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찰스는 자신의 생활이나 행복에 대해서도 철저히 무관심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의자에 앉을 때도 편한 의자에 앉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생겨났을까. 

위에서도 한 번 얘기했듯이 작가는 판단하기보다 알고자 하는 데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서미싯 몸은 이런 이상한 사내의 삶을 파고들어 역설적으로 보편적 인간들의 특질에 대해 알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소설을 빌어 '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특질로 형성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이제는 한 인간의 마음안에도 좀스러움과 위엄스러움,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라고 털어놓는다. 그렇다. 사람은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모순과 순리를 잘 나타내기 위해 작가는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인생의 굴곡이 뚜렷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다. 

'달과 6펜스'란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여기저기서 마르고 닳도록 다루어 새삼 얘기하기에도 입이 아프니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덧붙이자면 이 소설은 찰스의 인생을 따라가는 것도 재미 있고 그의 그림에 대한 묘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눈부시지만 그것 말고도 사랑이라든지 사람, 소설 작법 또는  하다 못해 인상파 화가들에 대해서까지 서머싯 몸이라는 작가가 지뢰처럼 여기저기 심어놓은 영리하고도 능숙한 달변들을 찾아보는 즐거움도 크다는 것을 일러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면 소설 쓰는 일과 소설가의 자세에 대한 서머싯 몸의 독설은 이런 식이다.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책들, 책들이 출판될 때 저자들이 갖는 밝은 희망,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생각하다 보면 그것이야말로 유익한 수양이 된다. 어떤 책이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봐야 한철의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다가 책을 산 독자에게 그저 몇 시간의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또는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저자가 얼마나 애를 썼으며, 얼마나 쓰라린 체험을 하였고,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서평을 통해 판단해 보건데, 이들 책 가운데는 심혈을 기울여 쓴 좋은 책들이 많다. 구상에 고심한 책도 많다. 심지어는 평생의 노고를 바친 책들도 있다. 내가 여기에서 얻는 가르침은 작가란 글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소설가 지망생들이 읽으면 한숨을 내쉬며 절망할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정작 서머싯 몸은 글로 돈을 아주 많이 벌어 대저택에서 살다가 1965년 91세로 영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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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맨체스터 그라나다 방송국에서 송출감독으로 20여 년간 일했던 리 차일드라는 사내는 어느날 갑자기 직장에서 쫓겨난다. IMF가 기승를 부리던 시절,구조조정에 휩쓸린 것이다. 퇴직 소식을 들은 그는 밖으로 나가 곧장 '6달러짜리 펜과 노트'를 산 뒤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그 소설은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 머리 좋은 람보 - '잭 리처' 시리즈의 첫 권이었다. 


근대 이후 어떤 시대든 사람들을 잠 못 들게 하는 가장 크고도 지속적인 고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명제일 것이다. 존재론과 맞닿는 이 고민은 자연스럽게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고민으로 옮겨가기 일쑤인데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이 두 가지 질문에 힌트를 주는 반가운 책이 한 권 나왔다. 바로 홍순성의 [나는 1인 기업가다]이다. 과연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위에서 예를 든 리 차일드 같은 경우는 정말 꿈 같은 얘기다. 직장을 그만 두고 이렇게 대중소설을 써서 단박에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분명한 건 싫든 좋든 누구에게나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해 평균 수명은 점점 늘어 이제 우리는 거의 80세까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저자가 책 앞머리에서 소개한대로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나 [쿨하게 생존하라]의 저자 김호 씨는 '직장과 직업을 혼동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직업은 직장과 관련은 있지만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생 직장'보다 중요한 '평생 직업’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일까. 

먼저 모험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저자 홍순성은 블로그 필명 '혜민 아빠'로 잘 알려진 1인 기업가다. 그도 한 때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직장을 버리고 독립을 결심했다. 그의 전공은 IT와 스마트 워킹이었지만 점점 작업과 공부의 지평을 넓혀 지금은 스마트워킹 컨설턴트, 전문 인터뷰어(팟캐스트 운영), 1인 기업 매니저(액셀러레이터), 그리고 8권의 책을 쓴 작가 등 다양한 직업을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가 되었다. 

무엇이 그를 ‘1인 기업가’로 변신하게 만들었을까. 그는 우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불필요한 일에 시간을 빼앗기는 게 싫었다’고 말한다. 아침에 출근해서 회의 한 번 하고 서류 작업 좀 하다가 점심 먹고 들어오면 시간이 훌쩍 간다. 자기 일만 해도 모자랄 판에 단체 생활을 위한 ‘쓸데 없는 일들’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독립을 하면 최소한 그런 일들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직장에서는 좋아서 하는 일보다 시켜서 하는 일이 더 많다. 물론 전문적인 일일 순 있다. 그런데 회사를 떠나서도 그 전문성이 나를 따라다니며 계속 아이덴티티를 지켜줄까? 뭔가 나만의 컨텐츠를 개발해야 했다. 그는 그 길을 ‘온라인’에서 찾았다. 

그전까지는 일단 아침에 사무실에 나가 책상 앞에 앉아야만 사무를 볼 수 있었지만 이젠 거의 모든 게 온라인과 모바일 디바이스로 해결 가능해졌다. 홍순성은 아침에 커피숍으로 출근을 할 때가 많다. 거기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혼자 생각한 것들을 노트북에 정리하고 자료도 서치한다. 강의 준비를 하거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기도 한다. 뭔가 생각한 것을 남기는 곳은 우선 블로그다. 1인 기업으로 살아남으려면 일단 남과 다른 생각이 필요한데 그 생각은 글로 증명되어야 하고 어딘가에 남겨져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책 여기 저기서 ‘글쓰기와 블로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누구나 블로깅, 또는 SNS를 하기 때문에 글쓰기의 중요성은 한층 더 커졌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누차 말한다. 잘 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매일 꾸준히 쓰는 것이라고. 

이 책은 무조건 처음부터 ‘1인 기업가’가 되라는 허무맹랑한 강요를 하진 않는다. 대신 직장에 있을 때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라도 차근차근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하는 일에 더 집중하라고 충고한다.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성이 없으면 아무리 잘하는 일이라 해도 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 위해 세 가지를 버렸다는데 그 첫 째는 운전대다. 자동차를 버리고 걸어다니며 시간적 여유도 즐기고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그리고 무거운 가방과 조급한 마음도 버렸다. 새처럼 가볍게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 뿐 아니라 저자는 우리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노하우들도 알려준다. 새로운 생각은 수첩에 적기도 하고 마인드맵이나 워크 플로위, 에버노트 등에 수집, 기록한다. 구글 알리미 서비스를 이용하면 좋다고도 알려 준다(난 아직 쓰지 않고 있지 않지만). 그는 언제부터 이런 것들을 다 알았을까. 아마도 스마트 워킹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공부하다 보니 어느덧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버린 것이고 그 노하우들은 그대로 독자들에게도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나도 홍순성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에버노트 전문가’ 로서였다.



예전에는 10년이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10년 일하면 감각이 다하고 진이 빠져 물러나야 하는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이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의 특별한 가치와 ‘즐겁게 일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저자는 말한다. 초기엔 하고싶은 것만 하는 만용을 부리기 쉬운데 그것은 ‘예술가 마인드’다. 이건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하지만 고객이 원하는 것을 하는 ‘장사꾼 마인드’도 있다. 예술가에서 장사꾼을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사람만이 ‘1인 기업가’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에 다닌다고 남의 사업을 다 성공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창업 관련 전문가라고 해서 창업 상담할 때마다 대박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홍순성은 좀 믿을 만하다. 일단 남들보다 먼저 바람 부는 벌판에 나와 온몸으로 부딪쳐가며 ‘1인기업’을 몸소 일구어봤고 지금도 끊임없이 구체적인 노하우를 축적, 전파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 경험은 여전히 블로그, SNS, 팟캐스트 등 다양한 채널로 업데이트 되며 누구나 손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여러번 주장했듯이 책만큼 생각이 잘 정리되고 집약적으로 전파되는 매체도 드물다. 

이 책은 당장 ‘1인 기업’을 준비하려는 사람들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고마운 선물이 되겠지만 나는 그보다 지금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장 독립이 필요한 사람에겐 그대로 따라해야하는 메뉴얼일지 몰라도 아직 약간의 심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을 조금 더 비판적으로 읽으며 자신의 생각을 첨가하는 ‘인문학적’ 접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탈무드의 마지막 페이지는 늘 새로운 생각을 위해 백지로 비워져 있다고 했던가. 이 책도 마찬가지다. 처음 마음의 불씨는 홍순성이라는 저자가 피웠을지 몰라도 그 불을 가꾸어 가는 것은 오직 독자인 당신의 몫이다. 정답은 없고 이미 경험한 자의 진솔한 충고만 있을 뿐이다. 다행히 그 충고는 매우 유용하고도 구체적인 듯하다. 

 (*사족 : 내가 읽은 책은 초판1쇄인데, 218페이지 셋째 줄에 이원태 작가를 ‘이원탁’ 이라고 썼다. 아마도 같은 문장에 나오는 김탁환 작가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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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책꽂이에서 J.D 샐린저의 단편집 [아홉 가지 이야기]를 꺼내 <웃는 남자>라는 단편을 읽었다. 1920년대 맨해튼에 살던 꼬마의 이야기다. 소년은 '코만치 클럽'이라는 어린이 야구단에 소속되어 주말마다 낡은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시합을 하러 갔는데 이 팀의 코치 겸 운전사가 '추장'역할을 맡고 있었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는 젊은 추장은 버스를 운전하고 가다가 어느 순간 멈춰서서 이야기 보따리를 꺼내 아이들을 매료시킨다. 그 주에 하던 얘기는 '웃는 남자' 였다. 어렸을 때 중국인들에게 납치를 당해서 얼굴이 망가진 남자의 복수극인데 매번 클라이막스에서 끝나고 다음 주를 기약하는 방식이라 아이들의 원성이 대단했다.

버스 운전석에는 어떤 여자의 사진 액자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녀는 추장의 애인인 메리 허드슨이라고 했다. 정말인가 아닌가 궁금해 하던 차에 어느날 추장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길에서 여자를 태우고 야구장으로 갔다. 그녀가 바로 메리 허드슨이었다. 그녀는 포수 그러브를 끼고 그날 감기에 걸려 시합에 빠진 친구 대신 이루수를 맡아 경기를 하며 소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웃는 남자와 메리 허드슨. 소년은 아마도 이 두 가지 때문에 매주 코만치 클럽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메리 허드슨은 추장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소년의 행복한 시절은 추억이 되었다.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추억의 드라마 <캐빈은 열두 살>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저녁 TV에서 들려오던 캐빈의 목소리. 캐빈의 형이 월남전에 나갔다가 죽었으니 이 소설과는 연대가 안 맞지만 그래도 이 단편을 각색해서 그때처럼 드라마로 만들고 배한성이 더빙을 하면 그 느낌이 얼마나 애잔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노란 석양을 배경으로 버스가 흙먼지를 날리며 떠난 뒤 힘없이 현관문을 들어서는 소년의 뒷모습이 꽤나 쓸쓸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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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눈이 떠져 물을 마시러 밖으로 나왔다가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 아니, 사실은 물을 마시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가 잠이 안 와서 책이나 읽으려고 나왔는데 아내가 잠결에 설거지나 하라고 해서 하게 된 것이었다. 간밤에 친구들이 놀러와서 술을 마셨으므로 싱크대엔 많은 술잔과 접시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그 그릇들을 보니 책을 읽고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책을 읽기 전에 설거지부터 하자고 마음 먹었다. 처음엔 하기 싫었는데 하다 보니 점점 재미가 붙어서 열심히 하게 되었다. 설거지를 다 하고 마른 행주로 유리잔과 그릇들의 물기까지 다 제거하고 난 뒤 비로소 식탁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를 집어들었다. 


제목을 읽고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마지막 챕터 소제목이 '카레닌의 미소’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쇼코의 미소>는 제목과 달리 그리 서정적인 작품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한국에 와서 홈스테이를 하며 주인공 소유를 만나게 된 쇼코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중편 소설이다. 그런데 유창한 영어로 “언젠가는 유두 근처에 애벌레 모양 타투를 할 거야.”라고 말해 주인공 소유를 웃게 만들었던 쇼코는 시간이 지나면서 소유와 점점 괴상하고 살벌한 대화를 주고받게 되고 소설은 이 부분부터 범상치 않은 공력을 발휘한다. 

소설을 읽기 전 평소의 버릇대로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는데 거기엔 작가가 등단하기 전에 얼마나 여러 번 좌절하고 절망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었고 그 심정은 소설 속 소유가 영화감독 지망생이 되어 시나리오를 쓰고 단편 영화를 만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혹평을 받을 때의 모습으로 그대로 투영된다. 나는 훌륭하게 쓰인 거의 모든 소설은 실패담이라고 믿는 편인데 이 소설도 예외는 아니어서 소유는 끝내 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하지 못한다. 아니, 그녀가 성공했더라면 이 이야기는 쓰이지 못했을 것이고 만약에 작가가 살짝 미쳐서 그렇게 썼더라면 아무런 재미도 없는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쇼코가 일본어로 주고받는 편지에 대한 질투, 소유가 일본으로 찾아갔을 때 쇼코가 보여줬던 이상한 행동 등은 나중에 할아버지와 엄마의 비밀들과 반전으로 얽히면서 기이한 감동을 준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가 아내에게 ‘당신은 술이 취하면 안주를 너무 게걸스럽게 먹는다’는 주의를 듣고 짧게라도 독후감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의 띠지에 ‘소설가들이 뽑은 2016년 올해의 소설 1위!’라고 쓰여 있더니 정말 묘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이다. 이 느낌을 한 마디로 뭐라 표현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작년에 읽은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와 더불어 책꽂이에 나란히 세워두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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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의 한 호텔이다. 설 연휴, 아내의 넓은 마음과 배려 덕분에 아무 것도 안 하고 혼자 지낼 수 있는 24시간이 주어지자 나는 고심 끝에 호텔방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들을 데려왔다([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무라키미 하루키 잡문집] 그리고 [유혹하는 글쓰기]를 가져왔다). 이건 참으로 폼 안 나는 선정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통속적인 작가들이라니. 더구나 이 책들은 여기저기 책장을 접고 밑줄을 치고 손때가 묻어있을 정도로 전에 여러번 읽은 책들이다. 

내가 왜 이 책들을 들고 왔는지는 저녁에 교보문고에 가서 새 책을 한 권 더 산 후에 깨달았다. 요즘 잘 나가는 에세이 중 하나를 사서 그 문장의 흐름과 내용을 살펴보았는데(무슨 책인지는 안 알랴줌) 애써 고른 그 책을 읽다보니 역설적으로 하루키나 킹이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를 다시금 느끼게 된 것이었다. 

일단 둘 다 문장이 참 좋다. 쉽고 평이한 단어들을 사용하되 에둘러 가는 일 없이 하고싶은 말을 차근차근 할 줄 안다. 독자들이 혹시 못 알아 들을까 걱정해서 부사를 남발하지도 않는다(실제로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그가 쓸데 없는 부사 사용을 얼마나 경계하는지 들려준다). 작가는 스토리나 플롯만 짜는 사람이 아니다. 쉽고 친절한 문장으로 어려운 내용을 잘 묘사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설사 작가가 아니더라도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은 다 비슷하다. 

아침이다. 그래봤자 먹고 자고 하는 것을 빼면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라 내가 쓰고싶은 글까지 많이 쓰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광고 카피가 아닌 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그러면서도 편안하게 궁리할 수 있는 소중한 시공간이었다. 더구나 내 곁에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스티븐 킹이라는 엉청난 선생님들이 있었으니. 나는 하루키나 킹 같은 작품을 쓰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대의 문장 고수들에게 한 칼 가르침을 받으려 해 본 것이었는데 다행히 그들이 나를 내치지 않고 친절하게 거두어 주었을 뿐이다. 이만하면 워런 버핏과의 백만 불짜리 점심식사보다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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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에세이 중 가장 좋았던 책은 단연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였다.

문단에 소설가가 하나 더 늘었다고 해서 밥그릇을 빼앗길까봐 걱정하는 소설가가 없는 것으로 보아 소설가 집단이야말로 배타성이 가정 적은 곳, 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긴 에세이는 하루키라는 사람이 자신의 평생 직업인 소설가에 대해서, 그리고 소설이라는 것을 쓰는 이유와 자세, 독자에 대한 생각 등을 아주 성실하면서도 쉽고 다정한 문체로 기술하고 있다. 당연히 데뷔 전과 데뷔 초기 얘기도 많이 나오고 인터넷에 뜨는 독자들의 반응과 온갖 구설을 피하기 위해 유럽으로 가서 일생일대의 히트작 [노르웨이의 숲]을 쓰던 얘기도 나온다. 퇴고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온다. 자신이 [양을 둘러싼 모험]이던가, 아무튼 어떤 소설 원고의 일부분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다시 써야 했다고 한다. 한 번 썼던 글을 기억에 의존해 다시 쓰는 것도 괴로운 일인데다가 더 걱정인 것은 다시 쓰는 글이 처음 썼던 글보다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후에 우연히 잃어버린 원고를 다시 찾아 읽어보니 새로 쓴 원고가 예전 원고보다 나아서 크게 안심했다는 얘기였다. 이런 얘기까지 술술 읽고 있노라면 하루키라는 소설가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진다.  

하루키는 이 책에서 소설에 대한 얘기를 실로 많이 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Ritual'에 대한 것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대여섯 시간을 일하고 오후에는 수영이나 조깅을 한 뒤 아홉 시면 잠자리에 드는 패턴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 전설로 남은 천재 예술가들처럼 방탕한 생활을 흉내내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 평생 단 한 번도 주문에 의해 쓰지 않고 자기가 쓰고 싶을 때만 즐겁게 글을 썼다는 그의 비결 아닌 비결인 것이다. 하루키는 이걸 애기하며 미국의 금주 단체 표어 'One day at a time(하루씩 꾸준하게)'를 소개하기도 한다. 며칠 전 아내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이 책을 꼭 읽어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아내도 매일 아침마다 식탁 사진을 찍어 '매일매일밥상'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리고 또 출근길에 한 곳을 정한 뒤 사계절의 변화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같은 프레임으로 꾸준히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사에 와서 아무리 이 책을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자주 들춰보는 책은 사무실 책상 근처 탁자 위에 두고 읽은지 좀 된 책은 PD들과 함께 쓰는 책꽂이에 두는데 두 군데 다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읽어보라고 빌려준 모양이다(책을 잃어버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시 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루키의 왕팬인 김건익 실장님에게 빌려야만 했다. 아내가 읽고 나면 나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고맙습니다. 김건익 실장님. 


부탁 1.
제 책을 빌려가신 분은 속히 반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족1.
우연히 인터넷에 들어갔다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소설가가 될 결심을 하고 서점에 갔을 때 맨 처음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였다. 이것은 나에게 운명처럼 느껴졌다. 비록 그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았지만..."이라는 내용의 글을 읽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이 그의 책을 하나도 읽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루키의 소설을 하나도 읽지 않고 이 책부터 읽는 것은 음...뭐랄까. 교과서는 안 읽고 참고서부터 보는 격이랄까. 아니면 고기도 안 씹고 이쑤시개로 이부터 쑤시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물론 김지운이 [달콤한 인생]을 만들기 전에 오우삼의 [영웅본색]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건 워낙 그 사람이 천재였으니까 가능한 일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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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에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거기 수련 한포기가 살고 있습니다. 
나는 수련에게 왜 더러운 진흙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진흙이야말로 존재의 바탕이요 수련의 현실이요 운명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왜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느냐고 묻습니다. 
진흙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현실 아닐까요.
아비규환의 현실, 고통과 절규와 슬픔과 궁핍과 몸부림의 현실. 

그 속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요.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을 찍으려면 몸에 흙이 묻습니다. 집을 고쳐 지으려면 흙먼지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지난 사년간 온몸에 흑을 묻히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이 시들을 썼습니다. 

구도의 길과 세속의 길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행을 통해 가고자 하는 길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2016년 10월 
도종환


오늘 점심시간에 서점에서 집어든 도종환의 새 시집 [사월 바다]에 실린 '시인의 말' 전문이다. 도종환은 그 옛날 [접시꽃 당신]이라는 베스트셀러를 낸 시인이기도 하지만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가 현재 재선에 성공한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대표적 서정시인이었던 그가 왜 뒤늦게 국회의원이 되어 시정잡배들과 어울릴까. 왜 스스로 문체부장관이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려가며 답답한 현안들을 붙들고 시장바닥보다 지저분한 곳에서 나딩구는 걸까.
 
브레히트는 나치 이후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고 했지만 도종환은 이미 브레히트의 절망도 아도르노의 엄살도 아랑곳하지 않을 결심이 선 모양이다. 그래서 기꺼이 아이들이 수장된 사월의 바다로 들어가고 중상모략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진흙탕 속에 들어가 온몸으로 세상과 역린한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이런 서정시들을 손바닥에 쓴다. 

나는 그런 그가 든든하다. 이런 강철 같은 정신력의 서정시인이 우리 옆에 하나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쁘다. 사무실에 들어와 급하게 휘리릭 들춰본 시집 중 '해장국'이라는 시가 눈에 띈다. 우리 시대의 서정시는 이런 것이라는 듯, 시에서 김이 난다. 따뜻하다 못해 이내 뜨거워진다. 일단 그 시를 여기에 남기며 짧은 메모를 접는다. 



해장국


사람에게서 받지 못한 위로가 여기 있다
밤새도록 벌겋게 달아오르던 목청은 쉬고
이기지 못하는 것들을 안고 용쓰던 시간도 가고
분노를 대신 감당하느라 지쳐 쓰러진 살들을
다독이고 쓰다듬어줄 손길은 멀어진 지 오래
어서 오라는 말 안녕히 가라는 말
이런 말밖에 하지 않는
주방장이면서 주인인 그 남자가 힐끗 내다보고는
큰 손으로 나무 식탁에 옮겨다놓은
콩나물해장국 뚝배기에 찬 손을 대고 있으면
콧잔틍이 시큰해진다
어디서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랴
떨어진 잎들이 정처를 찾지 못해 몰려다니는
창밖은 가을도 다 자나가는데
사람에게서 위로보다는 상처를 더 많이 받는 날
세상에서 받은 쓰라린 것들을 뜨거움으로 가라앉히며 
매 맞은 듯 얼얼한 몸 깊은 곳으로 내려갈 
한숟갈의 떨림에 가만히 눈을 감는 
늦은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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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어떤 평론가가 작가 이병주를 평하면서 그가 일제시대와 815해방, 625사변, 419혁명, 516쿠데타 등등 파란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온 세대라 그만큼 할 이야기도 많은 작가라고 쓴 걸 읽은 기억이 난다. 작가에게 할 얘기가 많다는 것은 일단 축복일 것이나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몸에 저장하기 위해 그가 살아내야 했던 힘겹고 유난한 세월 또한 그에겐 축복이었을까. 


김이정의 소설 [유령의 시간]을 읽으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이 소설은 작가의 아버지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에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할 정도로 똑똑하던 이섭은 독립운동을 하던 실천적 지식인인 숙부의 영향으로 인해 사회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한때 '이마가 아름다운 여인' 진을 만나 아이 셋을 둔 행복한 가장이었으나 자신이 수배되어 도망 다니는 동안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남과 북으로 갈린 생이별을 하게 된다. 실의에 젖어 살던 이섭에게 미자라는 여자가 왔다. 그녀 또한 전쟁이 터지던 날 폭발사고로 남편을 잃은 불운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네 아이를 더 낳게 된다. 작가의 분신인 ‘지형’은 그들의 첫째 딸인 것이다. 

제주도에서 말을 키우기도 하고 서해안에 와서 새우를 키우기도 하던 이섭. 사람들은 신수가 번듯하고 배운티도 많이 나는 이섭이 왜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못하고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사업을 하며 전국을 떠돌아야 하는지 궁금해 하지만 이섭은 그저 술잔을 기울이며 쓰게 웃을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한 번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힌 사람은 취직을 하기도 어디 한 군데 정착하며 살기도 힘든 것은 물론 오촌 친척의 해외 지사 발령까지 불가능하게 만드는 ‘연좌제’의 시절이었던 것이다.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제주도 말 목장도 해안의 새우 양식장도 결국 예전 장인의 도움 없이는 차릴 수 없었던 것에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았던 이섭. 그는 새로운 가족들과 생활을 꾸려가면서도 예전 아내와 아이들을 잊지 못한다.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자칫 무겁고 답답하기만 한 내용일 수도 있는 이야기는 김이정의 물 흐르듯 유려한 필력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작가의 글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낄 만한 문장들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건너 온 이모 윤과 그녀의 딸 미희를 지형이 처음 만날 때의 느낌을 간단하게 묘사한 이런 글을 보라. 

“서울 사람들은 전부 얼굴이 하얗디야. 우리 언니가 서울 갔다 왔는디 거기 사람들은 수돗물을 먹어서 얼굴이 다 그렇게 하얀 거랴.” 
  지난봄, 숙자가 자랑처럼 한 말이었다. 숙자의 언니가 방직 공장에 취직하러 서울에 다녀 온 직후였다. 
  일본은 서울보다 수돗물이 더 잘 나오는지, 그들은 유난히 희었다. 몸 전체에 석회라도 발라 놓은 것 같았다. 미희는 밑단에 흰 수술이 달린 큰 꽃무늬 반팔 상의와 곧은 다리가 허벅지까지 드러나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신고 있는 흰 에나멜 구두가 내리꽂히는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작가는 소설에서처럼 실제로 어느 날 아버지가 자기 형제들을 불러 앉혀놓고 이제부터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고 알리며 ‘유령의 시간’이라는 제목까지 그때 정해 두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김이정은 아버지가 시작한 글을 40년 만에 완성하게 된 셈이고 어차피 그 일은 오빠 대신 소설가가 된 자신의 몫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소설의 초고를 쓰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절명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였다고 한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도서관에 나가 글을 쓰는 것 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그는 이 소설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이 글이 그에게 구명보트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구에게나 살면서 꼭 해야 할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게 김이정의 개인사처럼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의 질곡과 만나는 지점에 있을 경우에는 많은 독자들에게 더욱 묵직한 울림이 되는 것이다. 최순실과 박근혜의 국정 농단 등으로 모든 의욕이 사라지는 시기에 허무를 견디는 심정으로 출퇴근 시간마다 전철 안에서 악착 같이 이 책을 읽었다. 책 뒷표지에 실린 소설가 김미월의 글 일부가 내 소감과 거의 똑같기에 이 글의 결론을 대신해 여기에 옮겨둔다.

모든 훌륭한 소설이 그러하듯이 [유령의 시간]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세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마침내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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