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가장 

불화가 

심한 날, 

월요일. 


이번주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 심심해서 페북에 


즐거운 월요일입니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화내겠지? 


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페삭 안 당한 걸 다행으로 아셔야"라는 댓글이 달렸더군요. 





그래서 다음날 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즐거운 화요일입니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게 미쳤나?" 그러겠지? 


그랬더니 여러가지 반응들이 쏟아지더군요. 자기도 괴로워 죽겠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구요. 그래서 "저도 너무 괴로워서 거꾸로 이렇게  말해본 거"라고 중간 고백을 했습니다.



은근 재미가 생기더군요. 그래서 수요일 아침에 일어나 이렇게 썼습니다. 


즐거운 수요일입니다, 라고 또 쓰려니 크리에이터로서 면이 안 선다. 나는 카피라이터니까 오늘은 이렇게 써보자. "월요일을 구입하시면 수목금은 번들로 드립니다"


그러자 정말 화를 내는 분들이 생겼습니다. 월요일을 반품하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상품 진열이 후지다고 혹평을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친절하게 김여사와 브라우니 사진을 댓글에 올린 분도 계셨고요. ㅋㅋ




목요일이 밝으니 이거 내가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즐거운 목요일입니다, 라는 되도 않는 거짓말.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아하하.

그래서 오늘아침엔 솔직히 자백을 했습니다. '즐거운'이라는 형용사가 꼭 즐거울 때만 쓰는 건 아니니까요. 그랬더니 "별꼴이네"라고 시비를 걸어오시는 분도 있었습니다만... 뭐,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투지가 돋더군요. 






장난으로 시작했는데, 어느덧 내일은 금요일이네요. 뭐라고 쓸까요? 아직은 모릅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 생각해 봐야죠. 아무튼 '재미 없는 것도 재미를 붙이니 재미가 생긴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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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람은 신기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 국악을 배워 국악인으로 생활하는 한편, 자신의 일렉트릭 밴드도 가지고 있다. 운 좋게도 몇 달 전엔 홍대앞 클럽에서 ‘이자람밴드’의 공연을 보았는데 지난 토요일엔 과천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이자람이 혼자 공연하는 판소리 [억척가]를 보았다. 이 공연은 2011년 초연부터 관객과 평단의 만장일치 찬사를 받고, 프랑스와 루마니아 등 세계적으로도 기립박수를 받으며 큰 화제를 뿌린 바 있다고 한다. 






판소리는 모든 등장인물의 대사와 노래, 동작을 혼자 하는 종합예술이다. 나에게는 얼마 전 타계한 이은관 선생이 ‘TBC향연’이라는 TV프로그램에 나와 ‘배뱅이굿’을 할 때 넋을 잃고 본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접하는 판소리였다. 놀라운 건 두 시간 반 동안 무대를 꽉 채우며 종횡무진 활약하는 판소리꾼 이자람 뿐 아니라 애초에 브레이트의 희곡을 읽고 영감을 얻어 이 극의 모든 대사와 작창(작곡)까지 해낸 사람 역시 이자람이라는 사실이다. 


숙련된 기교나 타고난 천성을 자랑하는 예술가들은 많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지성과 감성,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창조력까지 두루 갖춘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이자람은 우리 예술계의 소중한 자산이라 할 것이다. 


무대가 열리면 이자람이 나와 의고체로 된 ‘적벽가’의 첫 소절을 한 번 읊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어려워서 어디 알아먹겠느냐?”면서 더 쉽게 고친 ‘억척가’를 하겠다고 의뭉을 떤다. 김순종이라는 이름처럼 ‘순종적이었던’ 여인이 어떻게 우여곡절 끝에 남편과 헤어져 달구지 하나만 끌고 어린 아이들과 전쟁통을 살아가면서 김안나(이제 애는 더 안 낳아, 안 낳아…하다가 안나킴이 됨), 김억척이라는 이름으로 변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이 대단한 일인극은 부채 하나를 든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그리고 기타와 드럼, 키보드로 이루어진 밴드와 함께 두 시간 반 동안 관객들을 칼칼칼 웃게 만들고 어흐어흐 눈물 흘리게 만든다. 


그녀의 절창, 능청, 액션, 절묘한 의성어까지…아, 길게 써봐야 손가락만 아프다. 기회가 되거든 다음엔 꼭 놓치지 마시고 직접 보시라. 이런 공연은 ‘Seeing is believing’이요, ‘보는 게 남는 거’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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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도널드슨 감독의 흥미진진한 스파이 영화 [노웨이 아웃]을 보면 파티에서 처음 만나 서로 뿅간 캐빈 코스트너와 숀 영이 격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리무진 뒷자리로 달려가 급하게 섹스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짧은 정사가 끝난 다음 비로소 캐빈 코스트너가 던진 첫 마디는 "My name is Tom." 이었습니다. 숀 영도 “I’m Suzan.” 이라고 대답을 하구요. 전 상병 때 중대 외출외박 스케줄이 뒤죽박죽 꼬이는 바람에 부산 사는 병장 대신 졸지에 외박을 나갔다가 중앙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이 장면에서 꽤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에. 섹스 먼저 하고 통성명을 나중에 하는 경우도 있구나. 미국은 정말 멋진 나라야…

 

어제 페이스북을 통해 ‘First Kiss’라는 화제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미국 LA의 렌스튜디오(Wren studio)라는 곳에서 촬영한 이 영상은 서로 모르는 20명의 남녀를 초대해 첫 인사를 시킨 후 다짜고짜 키스를 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이들 중엔 이미 촬영에 익숙한 모델이나 배우, 뮤지션도 있었고 또 스튜디오 측에서 요구하는 사항에 대해 대충 듣고 왔겠지만 막상 처음 만난 사람과 키스를 하려니 되게 쑥스럽고 이상했겠죠. 커플들 중에는 카메라가 돌아가자 어쩔 줄 모르고 조명을 좀 꺼주면 안 되겠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아까 들은 상대방의 이름을 다시 물어보거나“당신은 배우니까 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겠죠?”라고 상대방에게 조언을 구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첫 키스’를 합니다.


 




“당신은 방금 처음 본 사람과도 키스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듯한 이 당돌한 영상은 한 의류 메이커가 만든 바이럴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한 일간지 기자는 이런 필름을 만든 의도에 대해 “’낯선 사람들도 마음을 열면 따뜻한 관계를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더군요. 


그런데 조금 자세히 뜯어보면 여기에는 좀 더 세련되고 구체적인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이 영상을 제작한 ‘Wren studio’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이 회사가 다양한 중저가 의류를 생산하는 일종의 SPA 브랜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옷을 하나 사려면 무척 고심을 하고 큰맘 먹고 사야 했지만 유니클로나 H&M, Zara 같은 중저가 브랜드들이 생긴 뒤부터는 별 큰 고민 없이 누구나 그럭저럭 옷꼴을 갖춘 의상들을 손쉽게 바꿔가면서 연출할 수 있게 되었죠. 그러나 동시에 다양한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나타내던 ‘그 사람만의 옷’이라는 스토리가 사라지는 아쉬움도 생겼습니다. 

Wren studio’의 창업자이자 크리이에티브 디렉터인 Melissa Coker는 SPA 브랜드의 이런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킬 방법을 고민하다가‘Kiss’라는 단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방금 산 옷보다는 자기가 자주 입어 길이 들고 편안한 옷을 더 좋아하게 마련이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금방 만나 사람과는 악수 정도는 해도 키스를 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방금 본 SPA브랜드 옷을 스스럼 없이 사 입는 건 ‘방금 본 사람과 스스럼 없이 키스하는 것과 닮은 것이 아닐까?’ 라는 데까지 생각이 흘러간 겁니다. 자신이 만든 브랜드는 처음 입더라도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죠. 


무모한 발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모한 발상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바로 치밀한 실행력입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Melissa Coker와 감독인 Tatia Pilieva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으면서 효과적인 바이럴이 될 수 있도록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먼저 최대한 ‘리얼’한 상황을 유지할 것, 출연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유롭고 호감 가는 캐릭터로 선정할 것, 나이와 직업 등에 맞게 다양한 의상을 준비할 것(모두 “wren’ 제품들입니다), 게이 커플을 둘 넣어 시각의 유연성을 확보할 것…이상이 그들이 준비한 ‘촬영 컨셉’일 것입니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됩니다. 정말 처음 만난 사이인 듯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열 쌍의 커플들은 곧 장난스럽게 또는 긴장감을 유지한 채 키스를 시작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만큼 다양한 반응이 나옵니다. 억지로 키스를 하다가 더는 못하겠다며 고사를 하는 여자도 나오고 그런대로 부드럽게 키스를 이어가는 커플도 나옵니다. 머뭇거리던 짧은 순간이 지나 의외로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는 커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장면들이 정말 설레면서도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담깁니다. 제가 특히 감탄했던 것은 게이 커플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입니다. 남자 커플의 경우 입은 옷도 굉장히 점잖고 키스 행위도 과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존중하는 눈빛이나 행동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옵니다. 여성 게이 커플의 경우엔 ‘우리, 키스를 하기 전 잠깐 눈을 맞추는 게 어떠냐?’는 성숙한 제의까지 합니다. 이처럼 ‘리얼함 속에 숨어 있는 디테일’은 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한 프로들만의 세심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바이럴은 지난 월요일에 유투브 사이트에 공개되어 단숨에 3,500만 뷰가 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흔히 유곽의 여자들도 ‘비록 몸은 허락할지라도 입술은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다’ 라는 속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바뀌어도 ‘키스’라고 하는 내밀하고 개인적인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늘 뜨겁기 마련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걸 캐치해서 이처럼 막강한 바이럴로 성공시킨 사람들의 작업 또한 언제 봐도 참 대단합니다. (지금 ‘Wren Studio’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바이럴에 등장했던 사람들이 입고 있던 그 옷들에 친절하게 가격표가 매겨져 있습니다) 


이 영상은 아무 배경도 없는 일명 ‘무지 백’에서 촬영되었습니다. 등장인물들에게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흔한 촬영기법입니다. 화면이 흑백으로 처리된 점도 마찬가지 이유겠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배경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현대인들의 도시적이면서도 쓸쓸한 자화상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씁쓸합니다. 아무런 맥락 없이도 옷을 사고 아무런 스토리 없이도 첫 키스를 할 수 있는, 우리 현대인들 말입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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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운영을 하지 않는 네이버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예전에 대행사 그만둔 후 썼던 백수일기 한 토막을 발견했습니다. 강남역 근처 혼자 살 때였는데 날짜를 보니 무려 2003년 4월이네요. [간장선생]이란 영화 참 좋아했는데.





2003.4.24 PM 3:00

낮잠에서 깨어나 늦은 점심을 먹기 전 케이블TV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며 지난주 놓친 연속극들을 섭렵하다가 충동적으로 시티문고로 달려가 허겁지겁 책을 몇 권 구입함. 


≪타임머신≫, ≪투명인간≫ 등을 썼던 H.G 웰스의 ≪세계문화사≫, 

다큐멘터리 영화 <보울링 포 컬럼바인>의 감독이 쓴 <<멍청한 백인들≫, 

그리고 일본의 드라마 작가이자 소설가 카마타 토시오의 ≪29세의 크리스마스≫ 1, 2권. 



2003.4.24 PM 5:00

느닷없이 '이게 몇 년만이냐'며 해도 지기 전 동네로 찾아온 후배 이종혁과 순대집에서 소주를 마심. 전날의 음주행각과 늦은 점심식사 등의 영향으로 인해 소주 두 병을 겨우 비우고 일어섬. 카운터 앞에서 미적미적하고 있는데 이종혁이 마침 잔돈이 없다고 선수를 치며 오천 원을 내밈. 두 지갑의 돈을 합쳐봐도 이천 원이 모자람. 짧게 절망하고 카드를 꺼낸 뒤 이종혁에게 차비조로 삼천 원을 돌려줌. 백수의 카드를 쓰게 하다니... 얄미운 놈.



2003.4.24 PM 8:00

저녁뉴스를 보다가 인터넷에 들어가 평소처럼 약간의 포르노를 다운받음. 태풍권의 영향으로 전국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끝나고 <위풍당당하지 못한 그녀>를 건성으로 보다가 TV를 끈뒤 ≪29세의 크리스마스≫를 집어듬.


비가 오기 시작함. 소설은 생각보다 재밌고 몹시 맥주가 땡김. 옆 건물의 편의점으로 달려가 카스 500cc를 두 캔 사고 냉동만두를 레인지에 데운 뒤 맥주를 홀짝거리며 소설을 탐독함. 1권을 다 읽고 맥주 두 캔을 다 마시니 어느덧 새벽 3시. 2권은 내일 마저 읽기로 하고 침대로 올라감.



2003.4.25 AM 9:00

계획보다 일찍 깨어난 자신을 원망하며 조간신문을 집으러 나가다가 이사를 가는 옆집 아줌마와 마주침. 조만간 첼로를 하는 처녀가 혼자 이사올 거라는 아줌마의 귀뜸에 환호작약함. 화장실에서 신문을 대충 훓어보고 간단한 아침을 끓여먹은 후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면서 미소지음. '어서 침대로 들어가라고,다시 자도 된다고'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따뜻하게 속삭여 주는 듯한 착각속에 평화롭게 잠이 듬. 



2003.4.25 PM 12:00

이틀전에 약속한 전 회사 동료 김욱현 부장과의 점심식사. 탕수육에 빼갈을 네 잔 정도 마심.

회사로 잠깐 올라가 마주치는 동료들마다 '잘 지내고 있다'고 과장되게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킬킬대다 귀가함.



2003.4.25 PM 5:00

어제 인터넷으로 대여신청한 DVD <간장선생>이 도착함. 영화를 보기 전 백수일기를 토닥거리고 있는데 우체부 아저씨가 초인종을 누름. 주간지 [Film2.0] 2년 정기구독 사은품으로 고른 공짜 DVD 16장이 등기우편으로 도착함.



내일을 향해 쏴라(SE)

타이타닉

에이리언1(SE)

에이리언2(SE)

사운드 오브 뮤직

가위손

다이하드1(SE)

다이하드2(SE) 

로마의 휴일(SE)

THE BEATLES "A HARD DAY'S NIGHT"

바닐라 스카이

가게무사

판타스틱 소녀백서

더 도어즈(SE)

터미네이터2(UE) - 2장으로 침




갑자기 쏟아진 DVD의 세례에 잠시 어이없어 함. 일단 내일 반납해야 하는 <간장선생>을 보기로 결정함. 내일은 전주영화제에 가서 밤새도록 네 편의 영화를 봐야 하므로 컨디션 조절이 절실함. 오늘은 일체의 저녁약속을 삼가기로 다짐함. 


백수, 바쁨.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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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 ‘와, 좋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주제의식이나 플롯이 아주 선명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좋다고 느끼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좋긴 좋은데 도대체 뭐가 좋은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자고 일어나도 생각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지난 일요일에 본 영화 [노예 12년]은 후자였죠. 영화를 보고 나서 직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며칠이 흐른 후에야 이렇게 천천히 리뷰를 써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벙찐 표정으로 멀뚱멀뚱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는 목화농장 노예들의 모습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몇 초간 지속됩니다. 감독이 “자, 이제부터 시작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인상 깊은 첫 장면입니다.


1841년 뉴욕의 사라토가에서 바이얼린 연주자로 살아가고 있는 흑인 솔로몬 노섭은 어느날 예술단을 사칭한 사기꾼들에게 속아 폭음을 한 뒤 쇠사슬에 묶여 노예상에게 팔려가게 됩니다. 당시엔 흑인들이 자유롭게 사는 지역과 노예로 사는 지역이 혼재하던 시절이었는데 노섭은 하룻밤의 실수로 졸지에 자유인에서 플랫이라는 이름의 노예로 신분이 달라지게 되어버린 것이죠. 그로부터 12년 간 솔로몬 노섭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가까스로 다시 자유인이 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영화는 얼핏 150여 년 전 한 흑인 남자의 기막힌 삶을 통해 우리가 살던 세상의 야만성을 돌아보고 자유의 소중함을 설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의지로 운명의 비가역성을 이겨낸 안티히어로의 인간승리 이야기’로만 볼 수 없는 게 바로 스티브 맥퀸이라는 감독의 이름 때문이죠. 데뷔작 [헝거]는 못 봤지만 전작인 [셰임]만 보더라도 이 젊은 아티스트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평범한 인간드라마에 만족할 리가 없다는 선입관이 생깁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선입관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사람은 똑똑한 인간이니까 이번에도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또는 저 사람은 업계 평판이 대단하니까 아이디어도 무궁무진하고 통찰력도 뛰어날 거야. 또는 저 여자는 얼굴이 예쁘니까 분명 남자친구가 있을 거야…)



스티브 맥퀸은 놀라운 미술적 재능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획득한 비주얼 아티스트 출신 영화감독입니다. 당연히 그가 만드는 영화는 한 장만 한 장면이 다 당장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도 좋을만큼 때깔이 좋고 구도가 탁월합니다. 이번 영화도 그런 장면들이 차고 넘치게 나옵니다.배가 처음 나타날 때 돌아가는 터빈의 모습과 배 안에서 느닷없이 벌어지는 정사신에서 보여주는 빅클로즈업은 정말 압도적이죠. 그리고 배 안에서 어떤 흑인 여자가 겁탈 당할 위기에 처할 때 노섭의 동료가 그걸 막으려다가 허무하게 칼에 찔려 죽는 장면에서는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번 드라마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진행이 되는 편입니다. 첫 장면 이후의 플래시백 말고는 영화 속 사건들도 그냥 시간 순으로 진행이 됩니다. 말하자면 감독이 자신의 능력을 절제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어쩌면 감독은 현란한 비주얼적 장치들을 거둬들임으로써 관객들이 보다 더 영화 속의 다른 이야기에 집중하길 바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더 집중적으로 봐줬으면 하는 얘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영화는 오래 전 이야기이고 또 솔로몬 노섭이라는 사람이 겪은 특이한 실화이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비슷하듯이 영화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등장합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세상을 유영하다가 갑자기 불의의 덫에 걸려들지만 끝까지 자존감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노섭, 비교적 인간적이지만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충될 때는 그저 허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주인 윌리엄 포드,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휘둘려 바닷물을 마시듯 끊임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두 번째 주인 에드윈 엡스까지.



노예로서의 생활은 끔찍한 것입니다. 우리도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종이나 하인이라는 노예제도가 있었죠. ‘식모’라는 이름으로 임금과 성을 착취당하기 일쑤이던 반노예도 있었구요. 그런데 이 노예들도 ‘뒤웅박 팔자’라고나할까, 정해진 주인이나 환경에 따라 고생의 차이가 천차만별입니다. 노섭은 첫 번째 주인인 포드 밑에서는 비록 고생스럽더라도 자신의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펼치기도 하고 나름대로 중간 관리자와 싸움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드가 빚에 쫓겨 그를 잔인하고 포악하기로 소문난 엡스에게 팔아버리죠. 그때부터는 더 생지옥입니다. 목화밭에서 하루 종일 아무리 열심히 목화를 따도 저녁에 결산하는 자리에선 목표량에 모자라는 무게만큼 매일 채찍을 맞아야 했습니다. 도망가려고 몇 번이나 시도를 해봤지만 그 때마다 명백하게 깨닫는 건 잡혀서 나무에 목 매달리기 전에는 탈출할 방법이 없다는 절망뿐이었습니다.



이런 지옥 같은 삶을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걸까요? 농장에서 목화를 가장 잘 따는 팻시는 노섭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합니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육체적 고생은 물론 주인인 엡스에게 당하는 성폭력, 그리고 주인마님의 노골적인 질투까지 더해지니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말이죠. 그러나 노섭은 그 부탁을 거절합니다. 그녀에게 버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돌보기도 벅차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은 견디는 것’이라는 메시지는 오히려 화면 밖의 감독이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영화의 폭력장면은 매우 사실적입니다. 처음 노섭이 술에서 깨어나 자신은 플랫이 아니라고 말하다가 등을 얻어 맞을 때를 시작으로 수많은 채찍질, 주먹질, 마님이 팻시에게 던지는 술병, 마지막에 나오는 길고 긴 롱테이크 신의 채찍질 등 어느 하나 편안한 장면이 없이 가장 높은 레벨의 압박감을 유지합니다. 덕분에 괴로운 건 영화 속 노예들만이 아닙니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도 그 잔혹한 장면들을 참아내는 건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런데 스티브 맥퀸 감독은 눈 돌리지 말고 그 장면들을 똑바로 보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인터뷰를 읽어보니 마지막에 팻시를 채찍질 하는 장면은 그 중요성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단 한 번의 테이크로 찍어냈다고 하더군요. 밀도가 대단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아마도 노섭이 작업반장과 싸우다가 결국 나무에 목이 매달려 선 채 진흙탕에 발을 디디고 간당간당 서 있는 장면일 겁니다. 두 손조차 묶인 채 미끌미끌한 진흙탕 위에 까치발을 하고 서 있는 노섭은 살짝 미끌어지기만 해도 목숨을 잃을 지경이지요. 그런데 카메라는 이 장면을 롱테이크 기법으로 잔인하게 오래오래 잡아냅니다. 감독의 재능이 빛나는 명장면이죠. 처음엔 안타깝게 지켜보던 동료들도 결국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정말 사는 게 이래도 되는 걸까요?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됩니다. 아, 인생이라는 건 정말 참는 것의 연속이구나.‘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라는 속담도 있지만 결국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서 참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참는 경우가 더 많은 거구나, 하는 아픈 깨달음이죠. “제가 가진 선의는 제가 소유한 만큼의 동전 갯수를 넘지 못합니다”라는 노예상의 말처럼 세상의 선의에 기대 산다는 건 헛된 망상일 뿐입니다.노섭도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오는 행운을 잡게 되었을 때 자신을 죽여달라던 팻시를 한 번 꽉 껴안아주고는 그대로 도망치듯 마차로 오릅니다. 혼자 살기도 바쁜데 남의 챙길 여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사정이 이 정도인데도 우리는 배를 타기 전 노섭이 내뱉었던 말 “I don’t wanna survive, I wanna live!”라는 말을 기억해야 하는 걸까요? 멋진 말이긴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감독은 오스카 작품상을 타고 난 직후 이 대사를 다시 한 번 언급했지만.


아무튼 참 세고 진하고 묵직한 영화였습니다. 요즘 여유가 없어서 이 영화와 함께 등장한 화제의 작품들을 아직 못 보았지만 한동안 이 영화를 쉽게 잊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이 모든 훌륭한 얘기를 이끌어 가는 데는 명배우들의 명연기가 있었습니다. 요즘 ‘셜록’ 시리즈로 인기 절정에 있는 베네딕트 컴버베치와 스티브 맥퀸의 모든 영화에 출연 중인 마이클 패스빈더가 연기 경연을 벌이고, 얄미운 작업 반장 역을 맡은 폴 다노의 연기도 [데어 윌 비 블러드]에 이어 또 한 번 대박이죠. 팻시 역을 맡았던 루피타 니용고는 결국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탔군요. 제작자인 브래드 피트도 뒷부분에 잠깐 출연하는데, 너무 천사 같은 역으로 나와서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쟁쟁한 스타들을 조연으로 만들어버린 치웨텔 에지오프의 연기는 정말 발군입니다. 이 친구를 어디서 본 듯 하다구요? 저도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러브 액추얼리]에서 키이라 나이틀리의 남편으로 나왔더군요. 그 유명한 ‘스케치북 고백 신’에서 거실 안 소파에 앉아있던 흑인 남자가 바로 그였습니다. 엡스의 부인으로 나왔던 사라 폴슨은 [Studio 60 on the Sunset Strip]이라는 아론 소킨의 드라마에서 매튜 페리의 전 애인이자 돌고래 소리를 잘 내던 코미디언이었구요. 중요한 건 아닙니다. 뭐, 그렇다는 거죠.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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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도 아니다. 그렇다고 뮤지컬도 아니다. 무대 위에 이러저러한 소도구들이 보이고 연기자들이 손가락으로 연기를 시작하면 한 사람이 그걸 진지하게 ENG카메라로 찍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지런히 다음 장면에 등장할 소도구들을 준비한다. 카메라에 찍힌 장면들은 무대 위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영화처럼, 뮤직비디오처럼 실시간 투사된다.  


지젤이라는 여자가 어느 기치역 벤치에 앉아 있다(그녀는 레고인형으로 표현된다). 우선 어렸을 적 13초 간 만났던 첫사랑의 남자부터 회상해 본다. 뒤이어 또 다른 남자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는 지젤이라는 여성이 평생 사랑하고 떠나보내고 잊어야 했던 다섯 명의 남자들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가 연기자의 얼굴과 몸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표현된다. 손가락은 마치 벗은 몸처럼 느껴지고 두 손가락이 엉킬 땐 매우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손톱을 기른 손가락은 그대로 피겨스케이트 선수가 된다. 손가락이라는 기관이 얼마나 섬세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놀라운 건 손가락 연기만이 아니다. 카메라 웍도 장난이 아니다. ‘접사’라는 방식이 이렇게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지 정말 몰랐다. 아주 작은 소도구들, 물 속에서 퍼지는 잉크, 책상 위의 비닐이나 모래 등이 접사를 통해 순식간에 거대한 회오리와 바다, 해변, 기억 속의 마을 등으로 변한다. 그리고 탁월한 음향효과는 물론 한 곡 한 곡 들을 때마다 감탄하게 만드는 끝내주는 선곡이 관객들의 눈과 귀를 황홀경에 빠트린다.  아울러 감독이 직접 듣고 낙점했다는 유지태의 사려 깊고 귀족적인 나레이션도 정말 멋지다.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식탁해서 시작된 이 ‘손가락 공연’은 친구들의 수 많은 아아디어와 공감각적인 장치들이 더해져 이젠 가는 곳마다 전 세계인들을 놀래키는 공연이 되었다. '키스 앤 크라이'라는 제목은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연기를 끝내고 심사위원들이 매긴 점수를 기다리는 공간을 뜻한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곳은 사랑과도 많이 닮은 것 같아서 이 작품 제목으로 정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이라는 범상치 않은 소설집을 냈던 작가 토마 귄지그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토토의 천국]과 [제 8요일]의 자코 반 도마엘이 감독이다. 그의 부인은 안무 담당자. 아마 맨 처음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일 것이다. 손가락으로 하는 장난 같은 공연인데 열 명이 넘는 어른들이 아주 진지하게 움직이는 모습들도 이상한 감동을 준다. 공연을 보면서 저 아이디어 중 어느 하나만 베껴서 CF에 써먹어도 대박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직접 베끼면 안 되겠지만. 거기서 영감을 얻어 창조적으로 변형을 해야겠지만. 아, 안다 알아. 그냥 너무 멋진 장면이나 장치들이 많아서 하는 소리지. 최근에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시집을 읽었다. 크리에이터들은 이 공연을 보고나면 정말 몇 주일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이다. 아니, 배가 고파질 것이다. 아니, 목이 마를 것이다. 그러니 이 공연을 꼭 봐라. 아니, 보지 마라. 아니, 당신 마음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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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마라톤이다’라는 닳고 단 명제를 살짝 뒤집으니 이렇게 멋진 자유와 희망의 메시지가 되는군요. 일본 구직사이트인 리쿠르트의 최신 광고 ‘인생은 마라톤이다’편은 기존의 통념을 뒤집음으로써 통쾌한 자유와 함께 개인의 자존감까지 되씹어보게 해줍니다. 











“인생은 마라톤이다….하지만, 정말 그럴까?”


결승점을 향해 성실하게 달려가는 마라톤 대열이 보이다가 갑자기 주인공의 입에서 이렇게 반문하는 카피가 나온 뒤부터는 전혀 새로운 해석이 펼쳐집니다. 그렇게 정해진 코스대로 달리기엔 인생이 너무 재미 있고 또 다양한 가능성으로 넘친다는 것 때문이죠. 마라톤 코스를 달리던 선수들이 제멋대로 이탈해서 보여주는 새로운 길은 호수, 운동장, 침대 위, 바다, 창공, 눈밭 등등 참 다양한 곳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불꽃놀이를 하는 언덕에서, 누군가는 교실에서, 또 누군가는 요트 위에서 각자의 꿈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리쿠르트는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는만큼 다양한 꿈이 있고,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라고 말합니다.  



길은 하나가 아니야

결승점은 하나가 아니야 

그건 인간의 수만큼 있는 거야 

모든 인생은 훌륭하다 


누가 인생을 마라톤이라고 했나? 

리쿠르트 포인트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취업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 불안하고 조급하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무능력에 좌절하기도 하고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서 괴로워하게 되죠. 그럴 때 어떤 구직전문 회사가 젊은이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던져준다면 얼마나 위로가 될까요? 아마도 마포대교를 걷다가 마주친 “밥은 먹었어?”라는 전혀 마음이 담겨있지 않은 생명보험회사의 자살방지용 카피보다는 훨씬 더 타겟의 마음속 깊게 파고 들어갈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짐작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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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화를 보면 ‘나, 그거 인터넷으로 찾아봤어’라고 하는 말로 아예 “I googled it.”라는 말을 쓰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죠. 그럴 정도로 구글은 이제 전 세계인들 검색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이 ‘대단한 검색 엔진’의 광고를 당장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면 과연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까요? 더구나 광고주께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은 구글에서 찾는다(찾았다)’라는 식의 뻔한 서술형 광고 말고 누구나 고개를 끄떡일 수 있는 이성적인 방법이면서 동시에 따스한 감성까지 팍팍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광고라야만 하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리고 유명인을 쓰거나 화려한 해외 로케로 해결할 생각 말고 오로지 멋진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광고를 한 번 만들어 보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주문을 늘어놓는다면 과연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아마도 이 광고야말로 그 ‘말도 안 되는 주문’을 거의 충족시킨 광고가 아닌가 합니다. 2010년 슈퍼볼 경기에 등장했던 구글의 캠페인 ‘parisian love’ 편입니다.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공부를 하려는 청년이 있습니다. 당연히 항공편을 알아보겠죠. 그리고 파리로 건너갑니다. 거기서 어떤 소녀를 하나 만나게 됩니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런데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하겠죠. 소녀가 아까 자기한테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검색을 해봅니다. 그리고 프랑스 소녀와는 어떻게 데이트를 해야 하는지도 검색해 봅니다. 젊은이들답게 그들은 곧 사랑에 빠집니다. 

초콜릿 가게를 찾아 소녀에게 선물도 하고 그녀가 특히 좋아한다는 누벨바그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봅니다. 어느덧 사랑이 깊어집니다. 이제 더 이상은 떨어져서 살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결국 둘은 프랑스에 있는 작은 교회를 찾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곧 아기가 태어납니다. 행복에 겨워 아기 침대를 조립하는 아빠의 해맑은 미소로 영상이 끝납니다. 

 그런데 이 광고엔 제가 말한 그 어떤 장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피아노 연주를 배경으로 누군가 키보드를 두들기며 구글 검색바에 입력하는 장면과 간단한 효과음, 그리고  목소리들이 들릴 뿐입니다. 놀랍지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우린 순식간에 어떤 젊은이들의 국경을 넘는 사랑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엔 ‘구글 검색엔진’이라는 딱딱한 용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습니다.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참 많은 것을 보여주는 2010년도 구글 캠페인. 좋은 아이디어는 언제 봐도 참 경탄스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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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국문학 강의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다가 요즘 문창과 학생들의 꿈이 대부분 동화작가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젊은 애들이 너도나도 갑자기 동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나? 그럴 리가 없다. 졸업 후 순수 소설가나 시인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으니 그나마 잘 팔린다는 동화 쪽으로 발길을 들여 놓겠다는 속셈이다.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누가 동화작가는 먹고 살 만하다는 환상을 심어 주었단 말인가? [마당을 나온 암탉]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서점에서 [Why?] 같은 아동 학습물이 꾸준히 팔린다고 해서 동화를 쓰는 일이 만만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문제는 장르가 아니라 내용이다. 코난 도일이 ‘먹히는’ 장르인 추리물을 선택해서 쓰는 바람에 지금도 셜록 홈즈가 TV시리즈 등으로 계속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단 말인가? 아니다. 내용과 캐릭터가 훌륭해서다. 스티븐 킹의 수많은 소설들은 원래 대중 소설이라 영화계와 방송국에서 앞다투어 작품 계약을 하는가? 아니다. 그의 작품은 흥미진진하고 뭔가 새롭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탁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소설들은 서점에 나오기가 무섭게 [조선 명탐정] 같은 대중 영화로, [불멸의 이순신]이나 [나, 황진이] 같은  드라마로 판권이 팔려 나간다. 그런데 그가 작품을 구상할 때마다 “아마 몇 년 있으면 이순신이 뜰 거야”, 라거나 “이번엔 백탑파를 한 번 띄워 볼까”라고 생각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작년에 마포의 문화공간 숨도에서 열렸던 '기획자의 마음'이라는 강의에서 소설가 김탁환을 만난 적이 있다.


어떻하면 그렇게 내놓는 소설마다 현재 트렌드에 부합되는가? 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본질이 트렌드다’라는 획기적인 답변을 대뜸 내놓았다. 본질이 트렌드라니? 자기가 트렌드를 따라가거나 예측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인간의 모습과 역사의 물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뭔가 본질적인 것이 보이고 그것들을 입체적인 시각과 설계로 불러일으키고 나면 결국은 그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새로운 ‘트렌드’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사랑, 행복, 고통, 질투, 꿈, 비루함 등 몇몇 단어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삶이다. 아울러 역사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곧은 길과 굽은 길의 대결, 도전과 실패의 반복과 교차, 합리와 불합리를 넘어서는 막막함, 만약을 허용치 않는 냉정함, 끊임없이 반추하는 과거와 미래의 대화가 인간의 역사다.



그런 김탁환이 이번에 선택한 소재는 바로 ‘금융’이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 ‘자본주의’라는 괴물은 도대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민족자본이 형성되던 시절에 그 곳에선 어떤 인물들이 살고 있었는지를 작정하고 탐구해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3권짜리 장편소설 [뱅크]다.


구정 연휴에 무심코 책꽂이에서 꺼내 들었던 [뱅크] 1권은 빠른 속도로 읽혔다. 개성 상인 장훈, 인천 상인 서상진, 서울 상인 홍도깨비 등 한반도 주요 지역의 상권을 대표하는 세 거상이 모여 급격하게 밀려드는 외세의 자본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자고 맹세하는 술자리에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곧 그들의 아들 딸들인 장철호와 박진태, 최인향의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1868년생 동갑내기로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모두 아홉 살이었던 이들은 인천 부두를 배경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하면서 모험과 도전, 경쟁, 배신, 살인, 섹스, 러브스토리 등이 난무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김탁환은 소설을 쓰기에 앞서 자료를 많이 모으고 공부를 많이 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역사소설을 쓰는 사람은 아주 사소한 단서라도 역사적 고증에 철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100권이 넘는 책을 사고 그 중 10권 넘는 책을 샅샅이 읽는다고 하니 소설가의 근면함과 장인정신에 고개를 숙일 따름이다. 이번 소설도 마지막 권 말미에 실린 참고문헌록을 보면 ‘국역 경성부사,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처럼 개화기를 다룬 수 많은 책과 논문들은 물론 우리가 읽었던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나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같은 대중서적도 쉽게 눈에 띔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그도 이 소설을 쓰면서 두 번이나 집필을 중단했다고 한다. 은행의 역사에 대해 빠삭하게 공부를 하고 나면 곧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글을 써나가다 보니 이 땅의 주식회사가 생겨난 배경이  필요해졌고, 주식회사 역사를 섭렵하고 나자 다시 조선 후의 경제상황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전까지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고종 등 정치적 인물들만으로 가득했던 구한말의 이야기는 작가 김탁환의 노력으로 인해 드디어 경제적인 부분의 상상력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나는 오랜 버릇대로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등장인물들의 개요와 인상착의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장편소설을 읽을 때는 이렇게 독자 스스로 인물들의 개요를 정리하면서 읽어야 훨씬 입체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장훈, 서상진, 홍도깨비를 시작으로 해서 어린 철호와 진태, 인향 등은 내 메모의 양이 늘어감에 따라 나이를 먹고 도중에 권혁필 같은 악인도 만나게 된다.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이 훌륭한 이유는 김범우나 염상진보다 염상구를 잘 그렸기 때문입니다.”



김탁환은 [태백산맥]의 염상구를 예로 들면서 ‘악인 캐릭터 창출의 매력’에 대한 소설가적 쾌감을 만끽했음을 고백했다. 이번 소설 [뱅크]에는 절대 악인 권혁필이 등장한다. 15살에 인천 부두에 흘러 들어 온 권혁필은 타고난 지혜와 집념으로 내거간을 거쳐 인천 상단을 접수함은 물론 나중에는 대한제국 상권을 좌지우지할 위치에까지 다다른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협잡과 배신, 살인, 음모 등이 배경도움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권혁필의 야심 덕분에 천민의 아들로 태어나 멋진 복수극을 꿈꾸던 박진태는 배신자의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고, 기생으로 시작해 천하의 절창으로까지 성공한 장철호의 여동생 장윤주도 결국 아편중독에 이어 비극적 죽음을 맞게 된다.


1권을 하룻밤 새 다 읽은 나는 다음날 건대점 반디앤루니스까지 달려가 바로 2,3권을 샀다. 이번 소설은 각 권마다 꽤 두꺼운 분량이었지만 손에 잡기만 하면 다음 내용이 궁금해 나도 모르게 술술 읽히는 흡입력을 자랑했던 것이다. 나는 책이 너무 빨리 읽히는 게 아쉬워 중요한 장면마다 줄을 치기도 하고 페이지를 접어놓기도 하다가 결국은 한 챕터를 다 읽고 나면 즉시 챕터 시작 페이지로 돌아와 간단한 내용을 메모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 동안 별 생각 없이 읽던 소제목들의 의미가 한결 더 분명하게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희한한 경험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뱅크]는 100년 전을 불꽃처럼 뜨겁게 살다 간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2014년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똑같다.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하고 간절한 사랑을 꿈꾼다. 복수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선한 의지로 가득 찬 사람도 있다. 다만 우리의 인생은 이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그렇게 극적이지도 못하고 구조적으로 완벽하지도 못할 뿐이다. 그래서 흡입력 있는 소설 [뱅크]를 읽는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 외에도 우리의 인생이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상을 살아본다는 차원에서 ‘대리만족’의 기능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곧 TV드라마로 방영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드라마나 영화가 그렇듯 원작 특유의 분위기와 촘촘한 플롯을 드라마가 따라잡기는 어렵다. 정말로 재미를 느끼려면 소설로 읽어야 한다. 그것은 비범하고 성실한 작가가 튼실한 자료와 상상력으로 축조해 놓은 세계로 함께 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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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예정되었던 일정들도 미리 앞당겨져 다 소화되는 바람에 졸지에 사무실에 한가한 바람이 불길래 옆방의 윤PD를 꼬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보러 가자. CGV압구정, 3시 20분 있네. 표는 내가 살게.” 


대뜸 넘어오는 윤PD. 그래서 오래 전부터 보고 싶어했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드디어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NHK의 대하드라마 [료마전]의 타이틀롤을 맡았던 미남 배우죠.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의 탐정물 [갈릴레이] 시리즈의 주인공이기도 하구요. 언제 봐도 준수한 외모와 좋은 인상,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자기관리 등으로 이름이 높죠. 1969년생인가 그런데 아직도 결혼을 안 해서 그런지 지금도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싶은 연예인’ 같은 앙케이트 조사에서 해마다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엄청난 훈남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실력 있는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하다죠? 나 참. 


그런데 후쿠야마 마사하루만큼이나 저를 반갑게 했던 인물은 상대역으로 나오는 릴리 프랭키였습니다. 이름이 좀 이상하죠? ‘Frank Goes to Hollyood’ 라는 영국 그룹이 있었는데 거기서 따온 예명이랍니다. 이 사람은 연기자이기 이전에 일러스트레이터였고 칼럼니스트였고 작곡가였고 라디오 DJ였으며 소설가였습니다. 보잘것없게 생겼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다방면에 눈부신 재능을 뿜어내는 인간이죠. 예전에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함께 [료마전]에도 특별출연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라는 자전적 소설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전 이 소설을 읽고 정말 펑펑 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광고 카피가 ‘우는 얼굴을 보이기 싫다면 전철에서는 읽지 마라’였다네요. 나 참. 그런데 아마 지금 읽어도 또 울 겁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 책을 읽고 그렇게 울었는데 이젠 저도 릴리 프랭키처럼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까요. 



영화는 아이가 병원에서 바뀐 줄도 모르고 육 년 동안이나 친자식으로 키워오다가 어느날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당황하는 두 집안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매우 극적인 사건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늘 그렇습니다. 죽어서 림프계에 머물게 된다거나(원더플 라이프), 엄마가 아이들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버린다거나(아무도 모른다), 실직한 사실을 숨기고 형의 기일을 챙기러 부모님댁으로 찾아 온다거나(걸어도 걸어도) 하는 돌발상황을 던져놓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살아가며 변화하고 변화시키는 인간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관찰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떤 묵직한 울림이나 깨달음이 다가오는 것이지요. 특수한 상황을 통해 인류 보편적 가치까지 서서히 끌어올리는 통찰력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젊은 거장으로 불리게 한 힘일 것입니다.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맡은 아버지 역은 빈틈없고 세련된 성공 비즈니스맨의 모습입니다. 당연히 이 문제도 아주 이성적으로 풀어가려고 하죠. 반면 상대편 아버지 역을 맡은 플랭키 릴리는 시골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입니다. 문제의 아들 말고도 두 명의 아이를 더 키우고 있는 40대의 중년이구요. 당연히 영화는 후쿠야마 마사하루 부부의 입장에서 진행이 됩니다. 어쩐지…수학이나 피아노를 잘 못하는 거 보면 역시 핏줄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는 거야. 저렇게 초라한 전파상을 하면서 애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는 걸까? 차라리 우리가 두 아이를 모두 키우면 안 될까…?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얼굴은 점점 초조해지는 반면 릴리 프랭키의 표정은 늘 여유가 있습니다. 그건 두 가족이 함께 만나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엘리트 아빠는 자기 친아들과도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서먹서먹해 하는데 전파상 아빠는 패스트푸드점 놀이시설에서 아이들과 한덩이가 되어 뒹굴고 웃으며 순간을 즐깁니다. 어떤 가정이 더 행복할 지는 관객이 눈으로 지켜보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히로카즈 감독은 아이들을 참 잘 찍습니다. [아무도 모른다]를 찍을 때는 아이들에게 연기지도를 하는 대신 촬영 직전에 아이들에게 다가가 앞으로 찍을 내용을 귀에 조용히 속삭여 주고는 그냥 마음대로 놀게 했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연스러운 연기들이 나오는 것이겠죠. 저는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이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사랑스럽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아이들에겐 아이들의 생각이 있다’ 라는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영화 도중 초밥 먹는 장면이 나오자 “외, 맛있겠다!”라며 입맛을 다시던 윤PD는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대뜸 초밥 얘기부터 합니다. 



윤PD : 정했어요. 오늘 저녁엔 혼자라도 회를 먹을 생각입니다. 

성준 : 영화 참 좋지? 


윤PD : 그러게요. 잔잔하게 찍었는데도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아요. 

성준 : 저런 게 바로 사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윤PD : 예, 애를 하나 낳아볼까 하는 생각이 다 들더라니까요. 

성준 : 하하. 잘 생각해. 



윤PD나 저나 둘 다 아이가 없는 놈들인데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상관 없습니다. 이 영화는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영화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인지를 질문하게 하는 영화니까요. 그리고 좋은 인간이 되는 법을 함께 고민하게 해주는 좋은 영화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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