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Beatles의 'When I'm sixty four'라는 노래를 듣고 정말 대단한 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폴 매카트니나 존 레논 같은 천재가 어떻게 지구상에 존재했을까 하고요. 물론 산울림의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를 듣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음악적인 스타일은 물론 가사를 읽어봐도, 하다못해 TV나 영화의 연기자나 진행자로서도 이래저래 김창완은 천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잔인하고 뻔뻔한 천재가 아니고 늘 괴로워하고 허덕허덕 겨우 살아가는 '인간적인' 천재 말입니다. 이 노래 가사를 다시 한 번 가만히 음미해 보세요. 이런 게 바로 살아있는 철학이요 표현력 아닐까요. 저는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김창완이라는 사람이 늘 부럽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VSxjEJ8eBU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



열두살은 열두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

예순둘은 예순둘을 살고

일곱살은 일곱살을 살지

내가 스무살이었을때 일천구백칠십년 무렵

그 날은 그 날이었고

오늘은 오늘일뿐야


여자들은 여자들을 살고

남자들은 남자들을 살지

어린애는 어린애로 살고

어른들은 어른들로 살지

내가  일흔살이 들면 이천이십삽십년무렵

그날은 그날일거고 오늘은 오늘일뿐야


미리 알수있는건 하나없고

후회없이 살 수 있지도 않아

피할수있다면 피하고싶지만

다 겪어봐야 알수있는게있지

꿈이 자라나던 내 어린시절

내 꿈을 따먹던 청춘시절

이젠 꿈을 접어 접어 날려보낸다

묻어버린 꿈 위로 나비춤을 추네

꿈이 춤을 추네

나비 날아가네

꿈이 날아가네


열두살은 열두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

예순둘은 예순둘을 살고

일곱살은 일곱살을 살지


꿈이 자라나던 내 어린시절

내 꿈을 따먹던 청춘시절

이젠 꿈을 접어 접어 날려보낸다

묻어버린 꿈 위로 나비춤을 추네


꿈이 춤을 춘다

나비 날아가네

꿈이 날아가네


열두살은 열두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

예순둘은 예순둘을 살고

일곱살은 일곱살을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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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업에 '철학담당 임원'이 따로 있다는 게 부럽습니다. 그러니까 "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라는 광고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기업의 하는 이유가, 세상을 보는 태도가 다른 거지요. 물론 그 사람이 부사장과 마케팅 임원을 담당했던 사람이라도 말이지요. 


파타고니아는 1973년 창업 때부터 기업 이윤보다 자사 제품을 쓰는 사람들이 누려야 할 자연을 지키는 데 신경써온 기업이고 진짜 그걸 실천함으로써 오히려 더 소비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곳이니까요(참고로 여기는 사장이 직원들에게 근무 중에도 서핑을 하라고 등을 떠미는 회사입니다. 2005년에 회장이 펴낸 책 제목이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입니다. 참 좋은 내용인데 책 만듦새가 좀 아쉽습니다. 누군가 다시 한 번 편냈으면 좋겠습니다) .  


누군가 이본 쉬나드 회장에게 경영철학을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모든 의사 결정은 지금부터 100년 뒤가 기준입니다.” 


정말 배포가 다르지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100100&artid=201502242129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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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역사상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이 곡이라는 외신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마침 은희경의 단편소설 '인 마이 라이프' 도 생각이 나서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어느 겨울 신촌에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라는 지루한 영화를 혼자 소리내어 울며 보던 여주인공이 3층에 있는 카페 '인 마이 라이프'를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손님 중 한 남자가 기타를 치며 비틀즈의 '인 마이 라이프'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세 번 목격하게 되는 이야기. 


내 인생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소가 있지. 
어떤 곳은 변하고 어떤 곳은 영원하고 
어떤 곳은 사라지고 어떤 곳은 남아 있어도 
이 모든 장소는 그들만의 순간을 지니고 있네. 


이 모든 친구와 사랑하는 이들 중에서도 
당신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당신과의 사랑은 나날이 새로워
지나버린 추억들은 모두 의미가 없네 


함께 한 친구들 지나간 세월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네 
때로 걸음을 멈추고 그때를 생각하겠지 
그러나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 뿐이라네
인 마이 라이프, 아이 러브 유 모어 


 은희경이 2001년에 쓴 이 수필 같은 소설 속에서 직접 번역한 '인 마이 라이프'의 가사입니다. 어때요, 난로가 빨갛게 타고 있는 그 카페에서 몇 명이 빙 둘러 앉아 작은 노래를 부르고 듣던 그 겨울이 기억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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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만든 스팸 문자 차단 앱 '후후(Whowho)'의 인터넷 광고입니다. 할인문자를 허위로 보내오는 스팸을 잡는다는 이야기를 "분위기 잡지 마, 후후한테 잡혔어!" 라는 카피로 재미를 준 작품인데 매체량이 별로 없어서 눈에 띄진 못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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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을 오며가며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거의 다 읽었다. 일요일이지만 회사에 와서 저녁을 먹고 일을 하다가 아까 몇 페이지 남겨놓은 소설을 에필로그까지 마저 다 읽어버렸다. 충격적이다.


'너무'라는 말을 좀처럼 쓰지 않지만 이럴 경우는 '너무'라는 표현이 허용될 것 같다. 소설가가 글을 너무 잘 써서, 너무 진심이 느껴져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너무 쓰리고 너무 괴롭고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동호라는 소년의 가녀린 팔과 뒷모습이 상상되고, 평범한 모나미볼펜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지고, 취조실에서 일곱 번의 뺨을 맞던 그녀의 당혹감이 아직도 내 뺨에 빨갛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강. 소년. 5.18. 일요일...


아,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내일까지 모 자동차회사 기업PR 아이디어를 낸단 말이냐. 아, 너무 한다. 




(지난 일요일 휴대폰으로 간단하게 작성했던 독후감입니다. 요즘은 너무 바빠서 진득하지 않아 책을 읽기도 독후감을 쓰기도 쉽지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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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한없이 모진 상대에게 순한 양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은 결코 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질고 악한 것이다. 필요하다면 큰소리도 치고 당당히 싸우기도 하는 것이 진짜 착한 것이다. 올해는 모두가 착하게 사는 한 해가 되시기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40601&artid=201501152113375



진짜 착한 사람은 참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큰 소리도 치고 싸우기도 하는 사람이란 말에 백 번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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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주식은 심심하다. 빵뿐 아니라 쌀밥, 감자, 옥수수가 그렇다. 매일, 평생 먹어도 물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심함이란 적당히 간을 하면 원하는 맛을 낼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심심하다는 건 맛의 부재에 대한 서술이라기보다 맛의 풍부함을 준비하고 있다는 신호로 봐야 한다. 그건 우리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심심해야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다. 심심해야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심심함은 인생의 맛을 위해 비워 놓은 자리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짜고 맵고 시고 달고 쓰기만 하다. 심심한 때가 언제였는지 아득하다. 지난해 누적된 피로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또 바빠질 한 해를 헤쳐 나가려면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하자고 새해 결심을 한다. 이미 지친 몸과 마음을 채찍질하며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보자고 이를 악문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을 위해.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107204917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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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노량진이라는 지역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은 소설가가 하나 있다고 치자. 그는 그 소설을 쓰기 전에 무엇부터 했을까.

일단 노량진에 갔을 것이다. 거기 가서 그곳에 밀집되어 있는 고시텔 주상복합 건물들이 대개 몇 층짜리인지부터 살펴보았을 것이다. 거기 가서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친구들이 사는 삼 평이나 사 평짜리 초라한 원룸을 들여다 봤을 것이고 내친김에 뚝불과 돈가스, 삼천 원짜리 김밥 + 라면을 파는 일층 대형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어봤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곳에선 사천 원짜리 식권 열 장을 사면 삼만오천 원을 받고 월식 구십 끼니는 육만 원을 깎아줘서 삼십만 원을 받는다는 것도 당장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고시텔 앞에서 일회용 컵에 소시지볶음밥, 야채비빔밥, 카레라이스를 담아 팔고 있는 무허가 노점상들도 조용히 취재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손바닥만한 고시텔의 이름이집현전이거나 뭐 그 비슷한 우스운 이름을 달고 있는 것도 부수적으로 알게 되었을 테고 기타 소설에 써먹을 만한 이런저런 아이디어들이 하나 둘 사금처럼 모아졌을 것이다.

노량진 고시텔에서구준생(9급 공무원 시험 준비생)’으로 살고 있는 남자 주인공이영자라는 이름의 여자와 동거했었다는 얘기를 쓰고 싶어서 자료를 찾다보니 우리나라에 남녀 동거를 알선해 주는 인터넷 카페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남녀 동거를 알선해 주는 인터넷 카페가 있다는 것을 전에 우연히 들었는데 마침 생각이 나서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고 이 소설에 써먹은 것인지도 모른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의 얘기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먼저 잡아먹는 놈이 임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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톤 규모의 어선으로 고기를 잡던 주인공의 아버지가 어획량이 줄자 4.5톤 배로 줄였고 그걸 팔아 아들의 서울 이주비용을 대준 이야기를 지나가는 말처럼이라도 쓰려면 지금 서해안의 4.5톤짜리 중고 배 시세가 대충 얼마나 나가는지도 알아내야 한다. 이런 게 소설가의 일이다.


사육신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남긴 시구의 의미를 묻는 문제가 재작년 9급 지방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출제되었다는 설정은 주인공이 머물고 있는 고시텔집현전에서 두 블럭 건너편 언덕에 사육신 묘지가 있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픽션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고 특히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뚜렷한 인간의 신념이나 입장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소설가 김훈이기에 더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진 것일 확률이 높다.

김훈은 사육신의 묘가 노량진에 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죽을 벗기고 무릎 뼈를 빻고 가랑이를 찢어서 거리에 버리는가혹한 형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임금을 꾸짖으며 신념을 절대로 바꾸지 않은 바보 같은 인간들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을 것이고, 심지어인두가 겨드랑이 밑을 지져서 기름이 튀고 누린내가 퍼질 때도 자신을 고문하는 형리에게인두를 달구는 화로가 식었지 않느냐라고 호통을 칠 수 있는 인간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이 쉬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대단했던 신념들이 작금에 와서는 겨우 9급 지방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출제되어 그 해 수만 명의 수험생을 탈락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의 역사적 아이러니에 몹시 허탈해 했을 것이다.


김훈의 단편소설 <영자>는 가난한 서해안 어부의 아들인 구준생 남자가 가난한 남해안의 순댓집 딸 영자와 노량진 고시텔에서 1년 간 동거하면서 시험준비도 하고 섹스도 하다가 남자는 붙고 여자는 떨어져서 결국 헤어졌다는 이야기다.


검사, 판사. 도지사는 한자로 쓸 때 일사()가 맞고 변호사, 계리사, 변리사, 회계사, 운전사는 선비사()가 맞는이상하고 아리송하고 쓸데 없는 문제들에 직면해 헤매던 남자는 결국 시험에 합격해 바라던 공무원이 되지만 그렇게 해서 그가 도착한 곳은 서울도 아니고 자신의 고향도 아닌 마장면이라는 작은 지방 마을의 하급 공무원 자리일 뿐이다.  

소설가는 마장면 사무소에 9급 총무계 서기보로 부임한 주인공 얘기를 쓰기 위해 가축 전염병 예방주사를 신청하는 공문을 작성해서 축협으로 보내거나, 오십 시시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을 돌며 공가 상태를 점검하거나, 산불 팻말을 밭두렁에 박거나 마을 경로잔치 때 면장의 축사를 쓰는 일 등 이것저것 다 하는그의 업무 내용도 조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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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 서기보인 주인공의 한심한 처지를 보여줘야 하기에, 어느날 5급 중앙 사무관으로 합격한 마장면 출신 청년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다는 장면에서는 현수막의 제작비가 만이천 원인데 관급물품이라고 팔천 원으로 깍아주지만 배달은 없다는 사실도 알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동거했던 영자가 도대체 무슨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었는지 몰랐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는 주인공의 반성을 쓰기 위해서는 서울 강남에 식당 화장실 앞에서 지키고 서 있다가 손님이 용무를 마치고 나오면 안으로 들어가서 변기에 눌어붙은 배설물을 솔로 닦아내고 물 위에 단풍잎을 띄우는 아르바이트가 있다는 것도 알아냈거나 상상해 냈을 것이다. 그래야 단 한 번의 외출이자 데이트였던 사육신묘 장면에서 영자가 굳이 단풍잎을 줍던 이유가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소설가가 하는 일의 전부일까?

내 생각에 소설가가 하는 일은 이런 것이다. 마을 노인들 효도관광에 따라갔던 주인공이 남해안을 지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영자에게 전화를 걸어봤을 때 이 전화기는 고객의 사정에 의해 사용이 중지된 번호라 흘러나오는 서글픈 음성 메시지를 독자들이 함께 듣게 만드는 일. 그 장면 때문에 오래 전 내 옆에 있던, 그러나 지금은 없는 각자의 사람을 떠올리고 또 앞으로 내 옆에 있을 미래의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일. 소설가는 2014년 현재 서울 노량진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일 뿐이지만 그것들은 결국 2014년 대한민국 전체의 이야기가 되고, 이는 더 확장되어 2014년 지구 위의 모습이 되고, 마침내는 이 이야기도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수천 년간 그게 그거였던 하찮은 인간사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하는 일. 그게 바로 소설가가 하는 일이다. 그리고 방금 김훈이 한 일이기도 하다. 그저, 내 생각엔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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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엔 연극을 한 편 보자고 전부터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올 크리스마스에 선택한 작품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목걸이가 언제나 옳아요]라는 창작극입니다. 제목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싶었는데 연극을 보면서 의문이 풀렸습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과 기드 모파상의 [목걸이], 그리고 안데르센의 [영감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아요] 세 편을 묶어 한편의 뮤지컬로 만들었으니까요.  이 연극은 100% 노래만 하는 뮤지컬이 아니고 등장인물들이 라디오 공개방송을 진행하면서 잘 알려진 단편소설들을 극으로 재연해 보여주는 형식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왜 이런 노래를 부르는지, 또 기왕의 단편소설이나 동화들이 현대에 와서 어떻게 재해석되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고 작가나 연출자의 기획 의도도 명확히 알 수 있죠. 진행자와 초대손님들, 그리고 밴드가 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따뜻하고 편안하게 진행되는데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모두 훌륭합니다. 소극장이라 배우들의 목소리나 동작이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는 장점도 있구요. 뮤지컬 장면들의 화음도 뛰어납니다.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하고 춤추는 배우들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별로 많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닐 텐데 언제나 어딘가에선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한 것이죠. 이런 일은 취미삼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작년에 봤던 연극 [식구를 찾아서]의 배우와 스탶들이 다시 뭉친 연극이라 들었습니다. 그때도 참 재밌게 봤는데. 각본을 쓴 오미영 작가의 작품은 다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제목에 들어있는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이 연극은 12월 28일까지 대학로 아리랑소극장에서 계속 상연됩니다.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계절, 사랑하는 사람과 연극을 한 편 보는 건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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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설 읽을 시간이 어딨습니까. 다른 책 읽기도 바쁜걸요. 책깨나 읽는다는, 흔히 지식인입네 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세계적인 트렌드인 피케티니 지제크니 유명 석학들의 신작 쫓아가기도 바쁜데 한가롭게 문학책 뒤적일 시간이 어딨소 하는 뉘앙스들. 이런 반응에서 나는 묘한 ‘꼰대성’을 느낀다. 알다시피 유식과 삶의 지혜는 정비례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반대이기도 해서 지식, 정보, 교양이 많을수록 그에 치여 오히려 삶에 대해선 수동적, 방어적, 보수적이 되는 아이러니도 흔히 발생한다.


시와 소설을 읽으며 감동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판검사가 되고 교수나 CEO가 되는 건 무서운 일이다. 그 사람들도 스스로는 인간과 세상에 대해 다 '이해'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도 요즘 너무나 일에 관계된 글자나 영상만 쳐다보고 산다. 이러다 망가지겠다. 



http://www.hani.co.kr/arti/SERIES/572/6669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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