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방구에서 팔던 장난감 같은 영화 - [퍼시픽 림] 



영화 [퍼시픽 림]에 에 나오는 ’카이주’는 괴수의 일본 발음이라죠. 외계인은 늘 하늘에서 날아오는 줄 알았는데, 어느날 태평양에서 괴물들이 출현해 도시를 파괴하고 다니는 겁니다. 외계인들이 수억 년 전 공룡시대에 지구에 왔다가 ‘아, 아직 때가 아니구나’하고 그때부터 진득하니 기다렸다가 이제야 나타났다는 거죠. 


카이주라는 이름부터 그 괴물들을 쳐부수는 로봇 ‘예거’를 두 명이 조종한다는 설정, 그리고 괴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장난감처럼 무력하기만 한 탱크와 비행기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오타쿠 맞습니다. 오덕입니다. 마징가Z나 로보트태권V같은 캐릭터들이 우리나라 만화라고 생각하며 자랐던 저희 세대랑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 같습니다. (영민했던 저는 철이가 마징가Z의 조종관으로 들어가 기어를 조종하면서 “화이야, 온!”이라 외치는 걸 보고 일본 만화라는 걸 진작에 눈치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만화의 주인공들은 왜 기어나 버튼을 조작하면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까요? 기합 넣는 건가? 아직도 궁금해요) 



이 영화의 ‘좋은 로봇’ 예거는 마징가나 그레이트 마징가, 태권V처럼 버튼이나 기어 대신 두 명이 직접 몸을 움직여 조정하는 일종의 ‘모션 트레이스’ 방식입니다. 브라이언 브라운이 [F/X]에서 썼던 그 특수장비 옷처럼 말입니다. 아, 얼마 전에 휴 잭맨이 나왔던 [리얼 스틸]도 대충 이런 식이었군요. 


이 작품은 캐릭터도 좀 뻔하고 인물들간의 갈등구조나 해소도 고만고만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진격의 거인]처럼 진지하게 벽을 쌓아 괴물을 막는 어이없는 설정도 나옵니다. 대신 로봇들의 질감이나 규모는 진짜 현실감 넘칩니다. 시가지에서 괴물과 싸우느라 거침없이 부서져 나가는 건물과 자동차들은 그야말로 스펙터클합니다. 문방구에서 파는 그리운 장난감 같은 이 작품을 보고 ‘대도시파괴성애자를 위한 영화’라는 글을 누군가 인터넷에 올렸다는 얘길 듣고 한참 웃었습니다. 


여주인공 마코 모리 역의 기쿠치 린코는 좀 안습이더군요. 그렇게 이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고 눈만 큰 여자애. 브래트 피트 주연의 [바벨]에 나올 때는 그렇게 인상 깊었었는데. 린코 대신 배두나가 맡았어야 했다는 어느 페친의 말씀에 많이 동감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보다 이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무신경함이 더 큰 패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앞섭니다. 



공감 가는 점도 많은 영화입니다. 우선 이런 블록버스터마다 등장하는 ‘팍스 아메리카나’가 없어서 좋습니다. 물론 대사는 모두 영어로 나옵니다만 이 영화에서 미국은 그저 ‘태평양연안(퍼시픽 림)’의 동맹군일 뿐이죠. 그리고 두 명의 조종사가 ‘드리프트’를 해야 한다는 설정도 재미 있었습니다. 드리프트는 서로의 경험과 생각, 심리상태 등을 모두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이런 걸 하게 되면 서로의 성적 취향을 속속들이 알게 되고 결국 “이런 변태새끼!” 소릴 할 만도 한데, 어린 관객을 위해 그런 건 다 그냥 넘어가는군요.  


영화 종반 즈음, 괴수들의 공격으로 최신 예거들이 동작을 멈췄을 때 제일 처음 만들어졌던 구닥다리 예거가 나서서 세계를 구하는 장면이 나오죠. 디지털 기반의 기계들이 어떤 에러로 인해 동작을 멈추었을 때 바보 같은 아날로그가 나선다는 이 설정은 기성세대들에게 보내는 감독의 따뜻한 위로이자 찬가일 겁니다. 찡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죠. 제기랄. 


전 이 영화를 공짜표로 보았습니다만, 뭐 돈을 내고 봤다고 하더라도 재미있게 즐기며 봤을 것 같습니다. 거창한 기대나 새로운 선언 없이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소소하게 떠들면서 볼 수 있는 그런 정감 있는 영화죠. 제가 볼 때는 옆에 초등학생, 앞에 중학생들이 앉아서 함께 떠들면서 봤는데 걔들이 중간에 화장실도 다녀오고 서로 내용도 물어보고 하는 게 오히려 정겹고 좋았습니다. 



영화 보면서 웃었던 거 하나. 이런 영화에서 대장들은 아무리 시끄러운 장소에서도 입만 열면 다른 사람들이 일순 조용해지고 연설하는 목소리도 쩌렁쩌렁 울리게 마련이죠. 이 영화에 나오는 저항군 사령관 스탁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설하는 목소리는 기름지고 호흡도 여유롭습니다. 배경음악도 우퍼가 진동할 정도로 장엄하게 깔리죠. 다른 영화에서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경찰청장이나 전쟁을 선포하는 대통령들도 연설 참 잘 합니다. 그런데 실제 세계에서는 왜 다들 그렇게 목소리들이 쫌팽이 같을까요? 억양이나 발음도 후지고. 


전 박원순 시장을 좋아하는데, 서울시장 선거전 할 때 TV토론 본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상대 후보 나경원의 똑부러지고 앙칼진 말솜씨에 비하면 그 분은 얼마나 어눌하고 느려터지던지. 박 시장님, 어렸을 때 웅변학원 같은 데 좀 다니시지 그러셨어요…? 그래도 응원합니다. 존경하구요. 음. 뭐 결론이 좀 이상하네요. 하지만 고치지 않고 그냥 가겠습니다. 이건 그냥 비 오는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난 김에 마구 쓰는 영화 수다니까요. 영화평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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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에 이어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독서일기도 다시 꺼내 봤습니다. 네이버같은 포털에서 이미 읽으신 분들도 혹 계시겠지만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읽어 봅니다. 이거 뭐, 하다보니 저 혼자 '박웅현 특집'이네요.^^ 





다시는 광고인이 낸 책을 구입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나는, 어느날 고속터미널역에 있는 영풍문고에 가서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라는 따끈따끈한 새 책을 발견하게 된다. 에잇, 또 광고책이군. 책값도 더럽게 비싸네.(17,500 원이다) 심드렁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책을 들쳐보던 나는 두 시간 동안 꼼짝않고 책 속에 빠져들었다가 결국 읽을 분량이 반 정도 남은 그 책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서고 말았다. 젠장.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는 엄밀히 말해서 광고인이 낸 책이 아니다. 광고를 하는 박웅현 CD를 출판기획자이자 컬럼니스트인 강창래가 만나 오래도록 인터뷰하고 함께 어울려 고민도 하고 해서 펴낸 공동저작이다.

 

 

어떤 사람은 연애편지를 보낼 때 "보고싶습니다" 라고만 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려지지만 보고 싶은 맘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라고 쓴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더 잘 전달되겠는가. 박웅현은 정지용의 이 시를 인용하면서 광고 커뮤니케이션은 '보고 싶다는 말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말한다. 가령 박경리의 [토지]를 읽는 것은 당장 광고 아이디어를 내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지만 기초 체력을 기르는 데는 보약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넉 달 간, 한 첩의 보약을 먹듯 [토지]를 읽었다' 고 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받쳐주면 그다음부터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아이디어가 되고 소재가 된다. 길 가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주는 사람을 보고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타심'을 새삼 환기한 그는, 이를 그대로 광고에 넣는다.

 

 

 

왜 넘어진 아이는 일으켜 세우십니까?

왜 날아가는 풍선은 잡아주십니까?

왜 흩어진 과일은 주워주십니까?

왜 손수레는 밀어주십니까?

왜 가던 길은 되돌아가십니까?

  

사람 안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향합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적 소양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달라고 하자 그는 베네통 광고의 사진을 찍었던 올리비에르 토스카니의 일화를 얘기해준다. 수녀와 신부의 키스 장면, 천사와 악마로 분장한 백인과 흑인 아이의 포옹 장면, 흑인 여성의 젖을 빨고 있는 백인 아기의 사진 등 수많은 화제작을 남긴 토스카니가 [아카이브]라는 잡지와 인터뷰를 할 때 공산주의에 대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박웅현은 공산주의라는 돌발적 주제에 대해 이렇게 잘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웬만큼 철학적 인문학적 깊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어딘가에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가장 무섭지 않다"는 말도 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강창래가 따라가서 목격했다는 박웅현의 상공회의소 강의다. 주제는 '한국에서 효과적인 광고 캠페인'이었는데 이제 곧 한국에 와서 커뮤니케이션을 펼쳐야하는 외국인들에게 해야하는 강의였다.

 

그때 박웅현의 첫 마디는 "저는 한국말로 하겠습니다."였단다.

 

"제가 영어를 전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인해 영어로 말하는 순간 제 지적 수준이 초등학생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석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으로서 석사 학위를 가진 지적 수준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박웅현은 이날 동시통역사를 대동하고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는 좋은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과감한 장치이기도 했고 프리젠테이션의 주제를 더 깊게 부각시키는 효과까지 발휘했다. 아무리 칸이나 뉴욕페스티벌에서 상를 타는 광고라도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에 맞지 않으면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우리는 버드와이저의 'wazzaup~'광고를 쉽게 이해 못한다)을 말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동시통역사를 쓰는 것으로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내용과 형식이 강의 내용과 제대로 맞아들어간 적절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우리말을 잘하는 외국인이 있다고 해도 언어만 알아서는 그 문화에 깊이 젖을 수 없는 것이고,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이 쌓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웅현은 2002년 월드컵과 촛불집회라는 사회적 이슈 속에서도 또다른 통찰을 발견한다. '아디다스'라는 광고주에게 팔려고 만든 이 광고는 결국 집행되지 않았지만 그의 인문학적 소양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기에 인용한다.

 


촛불

  

믿지 못할 일이었다.

월드컵 16강

거리는 기쁨에 넘쳤다.

같은 시각

또 하나의 믿지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두 명의 여중생이 죽었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서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던 길이었다.

언론은 크게 다루지 않았다.

미군은 책임이 없다는 발표를 했고

정부는 침묵했다.

두 명의 소녀가 죽었는데

세상은 조용하기만 했다.

한 네티즌이 있었다.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

촛불을 준비해주십시오.

저 혼자라도 시작하겠습니다.

작은 제안이었다.

한 개의 촛불이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밝힐 수 있을까?

상대는 미국의 군대였고

모든 이의 시선은 월드컵을 향해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촛불이 옮겨 붙었다.

그해 한국은 월드컵 4강에 진입했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해 한 개의 촛불이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와 작년 '그리고 대학에 떨어졌습니다...수험생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광고 모두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 흐름 속에서 한 기업의 다짐과 의견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대를 읽고 인간을 연구하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하는 인문학이다.

 

 

박웅현은 나도 전에 3년 남짓 다닌 적이 있던 광고대행사 TBWA/Korea의 ECD다.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뜻이다. 그런 그가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온 적이 있다. 젊은 작가 전아리와 함께 출연했었는데, 나는 그때 그가 진정으로 부러웠다. 광고인으로서 독서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게 부러운 게 아니라 광고인이 TV에 나와서 광고 얘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게 부러웠던 것이다.

 .

며칠 전 TBWA/Korea에서 박웅현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친구 이문선의 사무실에 카피 회의때문에 갔다가 이 책 얘기를 해줬더니, 그는 박웅현에 대해 이런 표현을 했다.

 

"나는 세상엔 두 가지 CD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웅현과 박웅현이 아닌 CD."  

 

이런 게 바로 최고의 찬사다. 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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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은 복잡하지만 법칙은 단순하다”

 – 박웅현이 전하는 인생의 ‘단순한’ 법칙들 [여덟 단어] 




은퇴했지만 제가 좋아하는 CF 감독, 김규환 씨와 호주로 촬영을 간 적이 있어요. 촬영장엔 외국인 모델들이 캐스팅을 위해 찾아왔었어요. 우리가 선택을 하는 입장인데도 180센치미터가 넘는 금발의 여자들이 쭉 서 있으니까 이쪽에서 다들 기가 죽었죠. 그런데 김규환 감독이 가더니 “어 그래, 이 친구 괜찮네”라면서 한국어로 의견을 말하고 통역을 시켰어요. 만약 영어로, “You beautiful” “I like it”, 이런 식으로는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절반도 전달할 수 없었을 거예요. 김규환 감독은 모델들을 찬찬히 살피고 한국어로 의견을 전달하고 통역사에게 말을 전하게 했죠. 당시에 그 눈빛에 모델들이 압도돼서 떨더라구요.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나요? 외국어라고, 외국인 모델과 일을 한다고 해서 모든 말을 꼭 영어로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여덟 단어]라는 책을 읽을 때 저는 특히 이 부분에서 신선함과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많이 마주치게 되고 괴로워하게 되는 ‘권위’에 대한 챕터였는데요, 박웅현은 여기서 저의 광고 선배이자 개인적으론 홍익대학교 학생 동아리 ‘뚜라미’의 선배인기도 했던 규환이 형과의 에피소드를 통해 ‘불합리한 권위에 굴복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줍니다. 



박웅현의 신작 [여덟 단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자세들을 여덟 개의 단어로 나눈 뒤 각 챕터마다 그 의미를 곱씹어보는 책입니다. 서재에 가만히 앉아서 쓴 게 아니라 20,30대들을 모아놓고 매주 강연한 내용을 따로 옮긴 거니까 에세이라기 보다는 강연록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거 같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그걸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공자나 부처, 예수를 능가하는 수퍼맨이거나 사이비종교의 교주쯤 되겠지요. 박웅현도 말합니다. 인생은 강의 몇 번 듣는다고, 책 몇 권 읽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얘기를 시작하는 것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스스로에게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통찰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자들은 왜 남자친구한테 "김태희가 이뻐? 내가 더 이뻐?"라는 질문을 하죠? 김태희가 더 이쁘고, 하지만 난 널 사랑해. 5만원이 비싸? 100원이 더 비싸? 이런 거잖아요.” 성시경, 재밌다. 하하하. 



어제 제 페이스북 친구 김정욱 씨가 올린 글입니다. 성시경이 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은 모양이죠? 이번 책 [여덟 단어]는 ‘자존’이라는 글자로 문을 엽니다. 우린 모두 김태희처럼 예쁠 수도 없고 고소영이 될 수도 없죠. 고소영한테 왜 김태희처럼 예쁘지 않냐고 따지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모든 ‘엄친아’ ‘엄친딸’들은 이런 어불성설을 먹고 자라납니다. 남과 비교하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자존’이죠. . ‘나의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그리고 나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독특한 개성과 능력을 가진 독립체들이니까요. 


그런데 남들과 비교되는 순간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나는 일인가 봅니다. 알랭 드 보통도 [불안]이라는 책에서 이런 경험을 토로하죠. (그러나 쾌적한 집에 살며 편안한 일자리로 출퇴근한다 해도 경솔하게 동창회에 나갔다가 옛 친구 몇 명((이들보다 더 강력한 준거집단은 없다))이 아주 매력적인 일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우리 집보다 더 큰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왜 이리 불행하냐는 생각에 정신을 못 가누기 십상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 성공한 케이스로 박웅현은 [나무열전]이라는 책을 쓴 사학자 강판권 씨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촌놈’출신이라는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학자라죠? 이러한 자존의 성찰은 자연스럽게 ‘본질’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박웅현은 남들 앞에 서서 말하는 게 힘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 단점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하는 과정을 다시 떠올리며’본질’의 문제를 풀어갑니다. 남들보다 잘 하자, 가 아니라 ‘내 얘기를 내 방식대로 잘 전달하자’고 생각을 바꿨을 때 그는 비로소 프리젠테이션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영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남들보다 배우는 속도가 느릴까,하고 자책하는 대신 “잘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땀 흘리려고 하는 거니까”가 본질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간단한 이치죠? 


본질(本質). 


저는 이 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이 씁니다. 그런데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라는 에르메스 브랜드의 지면광고 카피만큼 본질을 한 마디로 표현한 예는 드물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게 마련이죠. 예를 들면 사람들의 웃음 같은 거.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웃음, 기쁨, 감동, 행복, 공감 등 몇 가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지난 학기 제게 강의를 들은 학생 중에 학점에 불만이 있다고 이메일을 보낸 온 친구가 있었습니다. 자기는 제가 내준 과제를 빠짐없이 성실하게 다 했고 밤새워 ‘프레지(Prezi)를 배워 기말과제도 발표했다는 것입니다. 그 학생의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 파워포인트에 글이나 그림을 올리고 링크시키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저에게 프레지 같은 프리젠테이션 도구는 그야말로 신세계처럼 멋진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콘텐츠’였습니다. 저는 그 학생보다 더 투박하지만 좀 더 아이디어가 살아있는 과제물에게 좋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웅현은 ‘촛불’을 예로 들어 콘텐츠의 힘을 역설합니다.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죽은 이의 영혼이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라는 어느 네티즌의 제의에 의해 일파만파 퍼져나갔던 촛불의 힘. 이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촛불시위로 번져갔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의무감에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던 거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 좋은 콘텐츠는 미디어가 무엇이든 퍼지게 되어 있다는 것. 광고를 하는 저희들 머릿속에도 늘 이런 생각으로 가득하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까요? 리처드 파인먼은 [생각의 탄생]이란 책에서 “현상은 복잡하다. 그러나 법칙은 단순하다.”라는 중요한 힌트를 던져줍니다. 잡다한 지식이나 곁가지 상황들을 걷어내고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통찰에 집중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는 것이죠. 인구에 회자되는 지구상의 모든 강력한 콘텐츠들은 다 그렇게 탄생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콘텐츠를 만드는 기초체력을 기르기에 가장 좋은 것은 다시 ‘책 읽기’라고 박웅현은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전작인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나 [책은 도끼다]같은 경우에서도 늘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저자는 자신이 신문보다는 단행본을 즐겨 읽는 이유도 신문은 그냥 흘러가는 느낌인데 비해 책은 집중해서 다 읽고 나면 뭔가를 얻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밑줄을 치게 되고 다시 펼쳐보게 되고 그러다가 이런 시도 발견하게 되니까요.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 이라는 시입니다. 며칠 전에 제 페이스북 친구 중 한 분이 먼저 쓰신 [여덟 단어] 리뷰에서 이 시를 올리셨더라구요. 저도 한 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2008년 창비





시인이라서 이런 눈을 가지게 된 걸까요?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자세히, 마음으로, 제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살면서 열심히 본다는 것(見) 역시 참 중요한 것이죠. 이 책에서는 자존에서 시작해 본질, 클래식(고전), 본다는 것, 현재 등등의 단어들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줄줄이 이어집니다. 그 단어들은 모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첫 물음에 대한 답의 단서들을 품고 있는데 어떤 때는 안도현이나 고은 시인의 시로 설명되기도 하고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아포리즘이나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문장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눈만 뜨면 정보가 넘쳐나고 인터넷, 모바일 기기들이 24시간 옆에서 나를 끊임없이 간섭하는 시대. 이는 곧 ‘결핍이 결핍된’ 역설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예전엔 구하기도 힘들었던 책들이, 영화들이 이젠 너무 많아서, 구하기가 너무 쉬워져서 제목만 읽었는데도 이미 그걸 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읽기만 하고 생각을 안 하면 남는 건 제목뿐입니다. 박웅현이 강조하는 인문학도 바로 그런 것이죠.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고전이 왜 중요한지, 발견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은 많은 책을 읽어 지식을 쌓는 것보다는 한 가지를 보더라도 ‘깊게’ 읽고 느낌으로써 본질적인 것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잘 나가는 광고인들 중에는 욕을 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회사 일은 안 하고 밖으로 돌아다니며 강의나 심사위원만 하다고 욕 먹고, 해외광고제 같은 데 가서 자료들을 잔뜩 선점해 뻔한 광고책 쓴다고 욕 먹고, 실력에 비해 과대평가 되어 방송에만 자주 나온다고 욕먹고. 어쩌면 박웅현도 그런 사람일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하면 그냥 광고 얘긴데 박웅현이 내는 책만 왜 유독 ‘인문학’ 딱지를 붙여주느냐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웅현을 이 책에서 배우고 함께 궁리해 본대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박웅현이 계속해서 이런 책을 쓰고 강의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뭘까요? ‘자존’을 생각한다면 남보다 더 인정받는 광고인이나 유명인이 되기 위해서는 아닌 거 같구요. ‘현재’를 생각한다면 노후를 위한 꼼수로 이러는 것도 아닌 거 같고. ‘권위’라는 챕터에 비춰보면 우리는 ‘똑똑하고 잘난 박웅현’한테 주눅들 필요가 하나도 없는 거겠죠. 


잘은 모르겠습니다. 전 그저 그저 박웅현이 책 말미에 쓴 대로 ‘묵묵히 자기를 존중하면서, 클래식을 궁금해 하면서, 본질을 추구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현재를 가치 있게 여기고, 깊이 봐가면서, 지혜롭게 소통하면서 각자의 전인미답의 길을 가자.”라는 그의 주장으로 만들어지는 ‘박웅현의 인생’이라는 고유 브랜드를 앞으로도 흥미롭게 천천히 지켜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 독서일기를 쓰기 전에 제법 많은 단어와 문장들을 메모했었는데, 쓰면서 대부분 버렸습니다. 이런 책은 남의 리뷰만 휘리릭 훑어보고 ‘음, 무슨 얘긴지 대충 알겠네.’라고 넘겨버리기엔 너무 아까우니까요. 그러니 지금 제 리뷰를 대충 읽어보신 뒤 얼른 책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책상 옆에다 놓고 인생이 막연해질 때마다, 자신이 무능해 보일 때마다, 싫은 놈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울 때마다 한 번씩 들쳐 보시기 바랍니다. 정답이야 얻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유용한 힌트 몇 개 정도는 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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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페이스북에서 보고 공유한 필름인데, 여기에도 또 올립니다. 그만큼 좋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인싸이트를 이토록 공감 넘치게, 디테일하게, 이 짧은 시공간 속에 다 집어넣다니요. 대단하죠? 사진을 찍을 당시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들의 간절함과 절박함이 뒷부분에 나오는 사진 결과물 덕분에 더 가슴 뭉클해지네요. 


최근 미국에서 제작된 캐논의 해외 광고인데요, 2013년 칸느 광고영화제에서 FILM부분 SILVER수상작에 선정되었답니다. 'Long live imagination'...예전 캐논의 카피, "촬영은 죽이지 않는 사냥이다"만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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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몇 달 간 이런저런 사정으로 놀았더니 일감이 똑 떨어지는 바람에 아주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리서 스스로 일을 구한다는 청탁서를 페북에 올렸죠.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라는 글이었는데 반응은 매우 뜨거웠지만 정작 일은 들어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2탄으로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 2’라는 글을 또 올렸습니다. 이번엔 더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셨고 일을 연결해 주신 분도 있었습니다.

 

역시 페북에다가 음식사진만 찍어 올리는 것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들을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올리자고 생각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조금은 쑥쓰럽고 창피했던 제 글에 ‘좋아요’로 격려해 주신 많은 분들, 그리고 공유를 해주신 선배, 후배, 친구 여러분,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글이 좋다며 다시 읽고 싶어하는 분들이 좀 계셔서 1,2편을 모아 제 홈피에 올립니다)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

 

 

 

밥을 많이 먹지만 카피는 잘 씁니다.
술을 많이 마시지만 카피는 잘 씁니다.
나이는 좀 있지만 카피는 잘 씁니다.

 

카피라이터지만 홍보영화 시나리오도 잘 씁니다.
카피라이터지만 CD(Creative Director)도 잘 합니다.
카피라이터지만 비주얼 아이디어도 잘 냅니다.

 

강의도 잘 하지만 카피를 더 잘 씁니다.
프리젠테이션도 잘 하지만 카피를 더 잘 씁니다.
칼럼도 잘 쓰지만 카피를 더 잘 씁니다.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지금 일을 찾고 있습니다.

 

이름은 편성준.

 

1993년부터 여러 대행사를 다니며, 프리랜서를 하며
카피라이터로 살아왔습니다.

 

최근에 모친상•결혼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을 치르느라
생업인 광고 일을 좀 등한시 했더니,

소에 심각한 얘기 쓰기 싫어서 

페북에선 늘 잘 지내는 척만 했더니,

 

언젠가부터

 

프리랜서 명함이 무색할 정도로
일감이 뚝 끊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페친 여러분들께 보내는
청탁서입니다.

 

주위 분들에게 괜찮은 카피라이터가
지금 놀고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전해주십시오.

 

터무니없는 가격을 받고
일을 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자존심 지키며 정정당당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추천해 주신 분 창피하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혹시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 찾는 분께
저를 추천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 은혜 당장 갚진 못하겠지만
고마운 마음에
술 석 잔이야 못사겠습니까?

 


편성준 배상.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 2

 

 

 

아내는 제가 설거지를 잘 한다고 칭찬하지만
저는 카피라이팅에 훨씬 더 소질이 많습니다.

 

친구들은 제게 드라마 작가 한 번 해보라고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카피라이터로 잘 살아왔습니다.

 

교수님들은 제 강의가 학생들에게 인기라고 하시지만
저는 소비자들에게 인기 있는 광고를 만드는 게 더 행복합니다.

 

카피라이터지만 홍보영화 시나리오도 잘 씁니다.
카피라이터지만 CD(Creative Director)도 잘 합니다.
카피라이터지만 비주얼 아이디어도 잘 냅니다.

 

강의도 열심히 하지만 카피를 더 열심히 씁니다.
프리젠테이션도 똑소리 나지만 카피가 더 똑소리 납니다.
칼럼도 곧잘 쓰지만 카피를 더 잘 씁니다.

 

지난 주에 놀던 카피라이터, 아직도 놀고 있습니다.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지금 일을 찾고 있습니다.

 

이름은 편성준.

 

1993년부터 MBC애드컴, TBWA/Korea 등 여러 대행사를 다니거나
프리랜서를 하며 카피라이터로 살아왔습니다.

 

최근에 큰 조사 하나와 큰 경사 하나를 치르느라
생업인 광고 일을 좀 등한시 했더니,

 

평소에 앓는 소리 하기 싫어서
페북에선 늘 잘 지내는 척만 했더니,

 

언젠가부터

 

프리랜서 명함이 무색할 정도로
일감이 뚝 끊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지난 주에 이어
페친 여러분들께 다시 보내는
청탁서 2탄입니다.

 

일주일간 ‘좋아요’만 수백 번 쏟아지고
아직 일은 한 건도 안 쏟아졌습니다.

 

주위 분들에게 괜찮은 카피라이터가
지금 놀고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전해주십시오.

 

터무니없는 가격을 받고
일을 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자존심 지키며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추천해 주신 분 창피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혹시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 찾는 분께
저를 추천해 주십시오.

 

이 농담 같은 청탁서를
진담으로 받아들여 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고마운 마음에
서울 어느 흐린 주점으로 모시고 가
소주 한 잔이야 못 올리겠습니까?

 


편성준 배상.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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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EBS ‘한국영화특선’에서에서 이창동의 [밀양]을 다시 하네요. 2007년도 영화입니다. ‘생일번개’로 친구들과 이 영화를 본 다음날 집에서 꼼짝 않고 오후 내내 영화일기를 쓰다가 밖으로 나가 술을 마시고 다시 들어와 마저 완성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 제가 쓴 영화일기 중 가장 집중해서, 가장 괴로워하면서, 그리고 가장 행복해하면서 쓴 글이 아닐까 합니다. 제목도 없고 좀 긴 글이지만 그래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져 오랜만에 다시 꺼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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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 저, 신애예요. 이신애. [밀양]의 주인공이요. 며칠 전 전도연씨가 칸에서 상 탄 소식 듣고 저도 무척 기뻤어요. 혹시 [밀양] 아직 못보셨어요? 어머, 그럼 이 글은 읽지 마세요. 저도 스포일러라고 욕먹고 싶진 않거든요.

 

 

[밀양]보시는 동안 힘드셨죠? ㅋㅋ…죄송해요. 제 팔자가 좀 세야 말이죠. 사실 남편 고향이라고 밀양 내려간 건 순전히 제 오기였죠. 죽은 남편이 바람 피운 것도 인정하기 싫었고, 사랑에 배신당한 여자라구 동정 받는 것도 싫었거든요. 그래서 ‘오냐, 내가 얼마나 잘 살아내는지 한번 보여주마!’라는 마음으로 내려간 거였어요. 괜히 센 척 한 거죠. 안 그러면 전 재산 780만원 남은 년이 땅은 왜 보러 다니고 그랬겠어요.
 
우리 쭌이 보셨죠? 예쁘죠? 진짜 너무 예뻐요! 근데 그렇게 이쁜 애를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미치겠더라구요. 처음 범인의 전화를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제가 밀양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겨우 종찬 씨뿐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무작정 달려갔는데 이 남자, 혼자 카센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예요. 미치는 줄 알았어요. 정말 애는 돌려줄 줄 알았는데. 걔가 무슨 죄가 있다구 그렇게 죽여요? 그게 사람이에요? 당장 패 죽이고 싶었어요. 찢어 죽이고 싶었어요. 그 놈 죽이고 저도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쭌이 사망신고를 하고 나오다 동사무소 앞에 잠깐 정신을 놓고 쓰러졌었는데 그 때 마침 ‘상처 받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회’ 라는 현수막이 보이더라구요. 약국 아줌마가 예수 믿으라고 치근덕댈 땐 이게 왠 헛소린가 했는데 그 땐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걸음이 향하더라구요. 이런 게 바로 성령인가 싶었죠.

 

무턱대고 들어가 의자에 앉았는데 처음엔 계속 기침만 나왔어요.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냥 울음이 쏟아지는 거예요. 무슨 둑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요. 도저히 울음을 그칠 수가 없더라구요. 사실 우리 쭌이 보내고 나서 그때처럼 후련하게 울어본 게 처음이었어요. 목사님이 와서 제 머리에 손을 얹으시는 순간 온 몸이 짜릿하게 떨리고, 아 이제 살겠구나 싶었어요. 전 그날 처음으로 잠을 아주 푹 잤어요.

 

 왜 하필 기독교냐구요? 저도 이창동 감독님한테도 물어봤죠. 왜 하필 교회냐구. 그랬더니 ‘기독교만큼 사람들 인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종교가 또 있냐?’고 하시더라구요. 맞는 말이에요. 제가 만일 교회 대신 절이나 성당에 갔었으면 그토록 빠르고 그토록 절실하게 구원과 평화를 얻지는 못했을 거 같아요. 제가 만난 신이 하필 하나님이었던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좀 극성스럽긴 해도 이건 단순한 종교영화나 반기독교 영화는 절대로 아닌 거죠.

 

하루하루가 새로웠어요. 전 그야말로 벼락을 맞은 것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그때부터 하나님하고 연애를 하는 기분이었다니까요. 진짜 믿는 건지 아니면 믿는 척 하고 싶었던 건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뭘 모르는 종찬씨도 저를 졸졸 따라다니다 결국 교회까지 왔지만(그 사람 진짜 속물이거든요) 그렇게라도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제가 역 앞에서 찬양하는 동안 뒤에서 불량한 친구들하고 담배나 피면서 ‘한라산 정기’ 어쩌구 떠들더라도 전 조금도 개의치 않았어요. 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이렇게 행복한데, 그 사람이 원님 덕분에 나팔 좀 분다고 뭐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용서하기로 했죠. 그래, 우리 쭌이한테 그런 일이 생긴 것도, 나한테 그런 일이 생긴 것도 다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뜻이었을 테니까. 이제 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라면, 거꾸로 그걸 실천함으로써 나도 영원한 마음의 평화를 얻으리라. 면회 가서 그 인간을 봤을 때 전 너무나 뿌듯했어요. 아, 저기 나의 용서를 받고 새롭게 구원을 얻을 어린 양이 앉아 있구나. 이게 결국 하나님의 큰 뜻이었구나...

 

근데…근데 이런 씨발, 그게 아니었어요. 말이 돼요? 감방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그 놈의 말을, 드디어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그 미친놈의 말을, 아침에 일어나 기도로 시작하고 자기 전에도 기도로 끝낸다는 그 인간 말종의 말을 제가 듣다니요!

어떻게 교도소를 나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제가 잠깐 기절을 했었나 보죠? 하하하. 웃음밖에 안 나왔어요. 하나님이 날 배신하다니. 하하. 그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약국에 찾아가서 아저씨를 꼬셨어요. 순진한 분이라 그런지 쉽게 넘어오더라구요. 아저씨랑 억지로 섹스를 하면서 전 하나님한테 물었어요. ‘보여? 보여? 보이냐구?’ 당신이 그렇게 사랑한다던 그 어린 양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보이냐구!

 

 약국 아저씨랑 헤어져서 카센터로 갔더니 종찬씨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더라고요. 오늘이 생일이었나 봐요. 아, 그래서 같이 저녁 먹자고 했었구나. 전 잔인하게 물었죠. ‘종찬씨도 하고 싶어요, 섹스? 혹시 원하나 해서.’ 미친년같이 노래를 부르는 제 앞에서 종찬씨는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며 가게를 뒤엎었죠.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였거든요. 하하. 신에게 복수하는 길은 신의 어린 양을 죽이는 길뿐이다. 그래 죽자! 잘 봐. 과도로 손목을 그은 것도 몰랐어요. 그냥 견딜 수가 없었나 봐요. 피가 철철 나데요. 근데 왜 살고 싶었을까요? 이 비참하고 치사한 목숨, 왜 놓기가 싫었을까요?

 

 정신병원에서 나온 저는 머리를 자르러 미장원에 갔다가 그 살인범의 딸을 만났어요. 이창동 감독님, 정말 지독한 사람이죠? 보통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리면 그 사람도 좀 맛이 가는 법인데 이창동 감독님은 문화부 장관까지 하고 나서도 어떻게 변한 게 한 개도 없어요? 그 뭐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쓴 유홍준 씨도 얼마 전에 문화재 옆에서 고기를 구워먹다가 장난 아니게 욕 먹고 하던데 말이죠.

 

 머리를 자르다 말고 뛰쳐나온 저는 ‘니 미칬나, 머리를 한쪽만 자르다 나오게?’ 라고 말하는 양품점 아줌마 얘기를 듣고 쿡쿡 웃음을 터뜨렸어요. 미친년한테 미친년이라구 물으니까 그것도 의외로 재밌더라구요.

 

 

죽는 건 좀 보류하기로 했어요. 그렇다고 뭐 딱히 살아갈 희망이 생긴 건 아니구요. 따뜻한 햇빛 아래서 머리를 듬성듬성 잘라버리고 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맨날 구박만 받으면서도 변함없이 제 주변을 얼쩡거리는 종찬씨가 어떤 땐 좀 고맙기도 하구요. 사실 그 사람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냐구요?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죠 뭐.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애들 피아노 가르치고…가끔 종찬씨 좀 갈궈주고. 아, 근데 요즘은 씽크대 앞에 서서 혼자 밥 먹고 그러진 않아요. (2007.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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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하철 노원역 안에서 본 와이드칼라입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그림이 보이는 원리를 이용해 만든 원자력병원 광고. ‘암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면 삶이 보입니다’ 라는 카피까지, 매체의 특성에 컨셉을 절묘하게 잘 엮은 아이디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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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vertising Agency: Wieden + Kennedy, London, UK

Executive Creative Directors: Tony Davidson, Kim Papworth

Creatives: Chris Lapham, Aaron McGurk

Producer: James Guy

Client services: Laura McGauran, Paulo Salomao

Production Company: Nexus

Directors: Smith & Foulkes

Executive Creative Director: Chris O Reilly

Producer: Tracey Cooper

Production Assistant: Fernanda Garcia Lopez

Director of Photography: Clive Norman

Editorial Company: Trim Editing

Editors: Paul Hardcastle and David Slade

VFX Company: Nexus Productions & Analog

 

오늘 친구 중 한 명이 페북에 올려줘서 알게 된 혼다의 기업PR "Hands"편입니다. 고정된 카메라 앵글에 맨손이 등장해 볼트를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 등등으로 바꿔가며 장난감 만지듯 마술을 부리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영상이네요. 그런데 혼다는 왜 이런 필름을 만들었을까요? 그냥 재밌으라고 만든 건 아니겠죠? 혼다 홈페이지나 유투브에 있는 설명을 읽어보니 지난 65년 간 혼다가 이룩해 온 여러 가지 기술력도 보여주고 미래 기술도 보여주려고 만든 광고라고 합니다.

 

기업PR인데도 아주 미니멀하게 접근했고, 혼다에게 어울릴만한 젊고 세련된 소비자들을 타겟으로 할 얘기 다 하고 있는 영악한 광고입니다. 마침 유투브에 스텝 프로파일이 있어서 함께 올려봅니다. (아, 중간에 자동차를 쥐어짜 컵에 물을 따라 마시는 장면은 수소연료((전지))자동차 얘기랍니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서 배기구에서는 물이 나오게 된다는 원리라네요: 친구 노상범의 페친인 하채효라는 분의 댓글 설명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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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학습만화 WHY? 시리즈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책은 ‘똥’ 편이라죠. 어른들이 “냄새 나, 지지야!” 하면서 터부시하고 호들갑 떠는 똥이라는 존재가 버젓이 제목으로 올라와 있는 것에 아이들은 더 열광하는 모양입니다.

 

 

사계절 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는 어느날 바깥세상이 궁금한 두더지가 머리를 내밀었다가 누군가의 똥을 맞으면서 시작됩니다. 눈이 나쁜 두더지는 자기 머리 위에 똥을 싸놓고 도망간 동물을 찾지 못한 것이죠. 화가 난 두더지는 범인을 찾기 위해 비둘기, 말, 토끼, 염소, 소, 돼지 등 주변 인물(?)들을 수사하고 다닙니다.

 

 

추리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가는 곳마다 “나, 아니야. 내 똥은 이렇게 생겼는걸?”이라며 자신의 똥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생태계 학습을 시킵니다. 그러다가 두더지는 똥덩어리를 핥아먹고 있는 파리들에게 결정적인 정보를 얻게 되죠. 마침내 법인을 찾은 겁니다. 두더지는 자신이 당한 것처럼 똑같이 정육점집 개 한스의 이마 위에 똥을 떨어뜨려 복수하고는 기분 좋게 땅 속으로 돌아갑니다.

 

 

이 동화를 쓰고 그린 베르너 홀츠바르트와 볼프 에를브루흐는 오랫동안 광고대행사에서 일러스트와 기획 일을 하던 사람들이랍니다. 짧은 이야기지만 흥미진진한 추리극 형식에 통쾌한 복수극이기도 한 동화, 아직 못 보셨으면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지금 사면 똥덩어리가 그려진 부채도 부록으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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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화감독의 인터뷰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류승룡이나 이병헌과 일 할 때는 적어도 주인공이 대사를 못 외워서 NG가 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당대의 스타로 군림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죠. 테너 가수의 진짜 실력은 ‘감기 걸렸을 때 목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뭣뭣 때문에…’, ‘나도 그 위치에 있으면…”, ‘하필 그때…’ , 등등의 핑계를 대며 자신에게 무한정 관대한 판결만 내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선 저부터 반성해 볼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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