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도 뉴욕을 사랑하는 작가 우디 앨런은 근 십 년 동안 유럽을 떠돌며 영화를 찍어야 했다. 갑자기 뉴욕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미국에서는 자신의 영화에 돈을 댈 투자자들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헐리우드는 전세계가 사랑하는 시네아티스트 우디 앨런조차도 살아남기 힘든 블록버스터의 왕국인 것이다. 


[매치 포인트] [스쿠프] [환상의 그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등등에서 스칼렛 요한슨, 페넬로페 크루즈 증 새로운 뮤즈들과 함께 유럽에서 소소하지만 자유로운 작업을 진행했던 우디 앨런은 회심의 역작 [미드나잇 인 파리]의 엄청난 흥행으로 인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이름만으로도 위엄이 서는 ‘여왕’ 케이트 블란쳇과 함께 새 영화를 찍게 된다. 그게 바로 [블루 재스민]이다. 



케이트 블런쳇은 말한다. “우디는 사실 이 역할을 자기가 직접 연기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재스민이 여자라서 할 수 없이 나를 시킨 것이다.” 케이트의 통찰력 있는 지적이 아니라도 그 동안 우디의 영화들은 모두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부자 남편을 만나 뉴욕에서 상류생활을 즐기던 재스민(자넷이란 이름도 상류상회에 어울리게 재스민으로 바꿨다)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여동생집에 얹혀 살게 된다. 돈은 한 푼도 없지만 여동생한테 갈 때도 일등석을 타고 간다. 루이비똥 가방에 놀라는 여동생에게”이건 다 예전에 산 거고, 내 이니셜이 들어가 있어 중고는 팔기도 힘들어서 그냥 들고 온 것”이라 변명한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한 법이다. 재스민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칫과의 사무원으로 취직을 하기도  하지만 자기는 이것보다는 더 뭔가 의미 있고 대단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 전부터 사람들이 나한테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어보라고 했어. 인터넷으로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워야지. 그러려면 먼저 컴퓨터 강좌부터 들어야겠네…"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마음에도 안 드는 칫과의사가 사귀자고 덤비질 않나, 여동생이랑 사는 ‘루저’가 오히려 자길 업신여기질 않나.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은 샤넬의 트위드 재킷과 에르메스 백, 그리고 거짓말뿐이다. 



나는 우디 앨런의 영화가 해피엔딩인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비극적으로 끝나는 경우도 본 기억이 없다. 모든 것을 잃은 재스민은 길거리에서 혼잣말을 하며 끝을 맺는다. 재스민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거의 차이밍량의 [애정만세]에 버금가는 엔딩씬이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거기엔 묘한 쾌감이 있다. 나이 80이 넘은 이 악동 할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섣불리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식의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너만 외롭고 힘든 게 아니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는 역설의 카타르시스를 던져준다. 그래 좋다. 산전수전 다 겪은 우디 할아버지도 힘들단다. 그러니 우리 모두 힘을 내자.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까지는  아닐지라도 뭐, 조금 위로는 되는 법이니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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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규어 아티스트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이소룡 피규어를 만들어 많은 골수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 어니 킴 단 한 명뿐일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아티스트가 나랑 꽤 친분이 있는 사람이다. 피규어 아티스트 어니 킴(김형언)은 내가 활동하던 대학 서클뚜라미의 일년 선배다. 동네가 비슷해 학교 다닐 때도 전철에서 자주 만났고 취미도 비슷해 집에서김형언의 혼자 듣는 음악실같은 걸 녹음하며(내가 게스트로 출연하면둘이 듣는 음악실로 제목이 바뀌었다) 키득키득 놀기도 참 많이 했다. 미대를 나온 어니 형은 대개의 아티스트들이 그렇듯 음악에도 소질이 많아서 기타와 피아노를 참 잘 쳤고 대학 일학년 때부터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다가 한때 프로 뮤지션으로 앨범을 내기도 했었다. 일찍이선우라는 광고 프러덕션에서 조감독을 거쳐 나중에 감독까지 했으니 나의 광고 인생 선배이기도 하다.

 

대학교 일학년 때 동기 여자애들이서클실에 들어가 보면 얼굴이 창백한 미소년이 와서 기타를 치는데, 분명 한 대의 기타에서 두 대의 기타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그 미소년은 다름아닌 어니 형이었고 그의 기타 주법은쓰리핑거였다. 통기타 음악동아리에 들어가면 대부분 쓰리핑거 주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어니 형의 쓰리핑거는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스승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기타 선생은 다름 아닌 폴 사이먼. 그렇다. 어니 형의 음악적 뿌리는 ‘Simon & Garfunkel’이었던 것이다. 어니 형은 자신의 소년 시절 열렸던 사이먼 앤 가펑클의 전설적인센트럴파크 공연 실황비디오 테이프를 매일 슬로우 비디오로 돌리고 또 돌려보면서 기타 주법을 사숙했던 것이다. 도대체 몇 번을 봐야 기타를 전혀 못 치던 소년이 폴 사이먼처럼 기타를 치게 되는 걸까? 이건 정말 미친 짓이며오타쿠의 전형이다.(노약자나 청소년 여러분, 따라 하려면 따라 해 보라).

 

사이먼 앤 가펑클이 1981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약 50만 명의 관객을 불러모은 무료 공연은 이렇듯 한 소년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이 바꾸어 놓은 인생이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을 처음 들었을 때의 그 감흥을 잊지 못한 사람은 여기저기 참 많았던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폴 사이먼의 기타를 좋아했고 그의 아름다운 노랫말을 좋아했으며 아트 가펑클의 청아한 목소리에 매료된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사이먼 앤 가펑클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여 모임을 만들게 되었고 서로 그들의 곡을 부르고 연주하면서 그들만의순결한 감성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을 기리는트리뷰트 공연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2013년 가을밤, 추석 연휴 마지막 일요일 홍대앞 디딤홀에서 사이먼 앤 가펑클을 기리는 ‘Old Friends Concert’가 열렸다. 어니 킴과 홍정우, 안진영, 안태영 형제 등 동호회 회원들이 모여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공연을 펼친 것이다. 센트럴파크 공연 때처럼 ‘Mrs. Robinson’이 먼저 울려 퍼지자 관객들은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고 ‘Homeward Bound’, ‘April, Come She Will’을 차례로 들으며 모인 사람들은 모두 타임머신을 타고 각자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뮤지션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홍정우 씨는 목소리가 짱짱하고 청아하며 특히 존 덴버의 노래를 잘 한다. 그날도 콘서트 중간에 존 덴버의 ‘Calypso’와 빌리 조엘의 ‘PianoMan’, 김광석의먼지기 되어등을 불러 흥을 돋구었다. 안진영, 안태형 형제 같은 경우는 참 특이했는데 둘 다 기업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성당의 성가대 등을 통해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사는 분들이었다. 어니 킴 형의 결혼식에서도 이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날은 참 많은 곡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사랑해요라는 노래를 히트시켰던 고은희 이정란 누나들도 뚜라미 선배들인데 이날은이정란/이윤선커플로 출연해 옛노래와 새노래를 들려주었다.

 

무협영화를 보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날아다니는 게 당연하듯이 여기서는 평범하게 생긴 사람들도 무대에만 올라오면 다들 기타를 잘 쳤고 노래를 잘 불렀다. 신기한 일이었다. 사회활동을 하면서 돈을 벌어 가족을 공양하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능숙하게 악기를 다루고 음악을 즐기며 타인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이들은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어니 킴은 공연 중간에 자신의 아내와 나눈 얘기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는데 왜 이렇게 돈도 되지 않는 공연을 하느냐?”고 묻는 아내에게 얼른 속시원한 답변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형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꿈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마음 속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접혀 있고 이루지 못한 꿈들이 숨어 있다. 그런데 그 꿈을 가끔이라도 다시 꺼내 반짝반짝하게 닦아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해야 더 정확한 문장이 될 것이다. 자신의 생계와는 관계없이 무엇인가 소중한 가치를 나누는 사람들우리는 이런 사람들을진짜 부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몇 평짜리 집에 살고 있는지,  통장에 얼마의 액수가 찍혀있는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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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마음에 떠오르는 그림을 그려보라"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알록달록한 그림을 그리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도화지 위에 계속 까만색만 칠하는 초등학생. 과도한 집중력으로 계속 도화지를 까맣게 칠하기만 하는 아이를 보고 어른들은 당황하게 되고 급기야 정신과 의사들에게 상담까지 받게 합니다. 그러다 한 간호사가 우연히 깨닫게 되죠. 나중에 그 아이가 아주 커다란 고래를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아이의 꿈을 북돋아 주려면 상상력을 발동하라'는 이 광고는 도식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출과 연기 덕분에 아직도 광고회사마다 회의 시간에 '감동적인 광고' 나 '반전이 있는 광고' 얘기를 할 때 반복해서 거론되곤 합니다.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역시 유투브에 있네요. 편리한 세상입니다. 예전엔 자료 찾기 참 힘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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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뛰어나야 연기도 잘 한다는 걸 알려주는 영화 – [더 테러 라이브] 




조정래의 [아리랑]을 읽으면서 정말 신기했던 것은 친일파에 대한 작가의 뛰어난 묘사력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팔려가던 민초들을 다루거나 순진한 마음으로 정신대에 자원하다시피 끌려가는 소녀들을 다룰 때는 독자들을 같은 편에 서서 울분에 떨게 만들던 작가가 친일파들을 묘사할 때는 180도 돌변해서 어찌 그리 얄미우면서도 논리정연하게 남의 속을 긁는지.. 정말 대단합니다. 혹시 작가가 친일파 출신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였죠. 



오늘 [더 테러 라이브]에서 하정우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정우가 맡은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윤영화 앵커는 영화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정말 정이 안 가는 밥맛이죠. 아홉시뉴스 앵커를 5년 간 하다가 뇌물수수 비리로 인해 며칠 전 라디오로 쫓겨온 인물이며 방송기자인 아내의 아이템을 훔친 일 때문에 별거까지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테러범의 전화를 받은 뒤 경찰에 신고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남들보다 먼저 이걸 가로채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드는 야비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하정우가 하는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혹시 저 자식이 실제로 저런 야비한 놈 아닐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인물에 몰입을 하게 만듭니다. 처음에 후줄근한 차림새와 잠 덜 깬 얼굴로 방송을 하다가 화장실에 가서 순식간에 야욕이 넘치는 모습으로 변하는 장면은 참 대단합니다. 더구나 하정우는 이 영화에서 야비한 면뿐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따라 때론 아주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어떤 시점부터는 자신이 속한 시스템에 진한 회의를 느끼는 역할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게다가 흔들리는 카메라는 잠시도 하정우라는 배우를 떠나지 않죠. 



이창동 감독은 어리버리한 [오아시스]의 설경구 캐릭터를 설명하며 “그게 다 내 안에 들어있던 모습”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무의식 속엔 참으로 많은 캐릭터들이 숨어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많은 캐릭터들 중에 한 가지만 꺼내서 살게 되죠. 두 가지가 번갈아 나오면 그게 ‘지킬과 하이드’가 되는 것이구요. 그런데 뛰어난 작가나 배우들은 수시로 여러 캐릭터들을 꺼내 독자나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김수현의 드라마를 봐도 그렇습니다.그녀의 드라마에서는 도저히 한 사람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저마다의 개연성을 가지고 빼곡하게 등장하죠. 


전 이게 상상력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상상력은 작가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흔히들 배우는 상상력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전 배우야말로 머리가 좋고 상상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연기도 잘 합니다. 머리가 나쁘면 연기도 못해요. 자신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캐릭터를 꺼낼 수 있는 힘, 이건 훈련만으로 되는 건 아니거든요. 타고난 상상력과 노력이 합쳐져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한때 ‘설리가 진리’라는 말이 있었듯 요즘 몇 년간은 ‘하정우가 대세’입니다. [더 테러 라이브]를 보시면 왜 지금 하정우가 대세 소릴 듣는지 확실히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근데, 저 자식도 실제 저렇게 야비한 인간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이경영의 날렵한 연기를 보는 즐거움은 ‘덤’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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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는 악당들의 인질극 덕분에 주인공 이소룡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한민국에 있는(!) 파고다탑에 가서 보물을 탈취해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탑엔 각 층마다 세계의 무술 고수들이 지키고 있는 거죠. 이소룡은 첫 칸부터 압둘 자바가 기다리고 있는 맨 윗층까지 올라가 차례차례 고수들을 제압해 나갑니다. 전 그 영화를 볼 때 어린 마음에도 “쟤네들은 도대체 이소룡이 오기 전까지는 저기서 뭘 하고 기다릴까? 먹을 것도 놀 것도 없는 텅 빈 방에서…그리고 왜 이소룡이 괴조음을 내지르고 싸울 때 밑으로 내려와 동료 고수들과 같이 싸우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등장인물들에 대한 ‘개연성’에 대한 목마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봉준호의 [설국열차]를 보면서도 비슷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설국열차라는 설정 자체가 ‘노아의 방주’ 같은 세기말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짐작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꼬릿칸의 사람들은 저토록 현실적이고 삶에 대해 확고한 신념과 욕구, 기대치가 있는데 반해 다른 칸 사람들은 왜 저렇게 비현실적이며 도대체 ‘인격체’처럼 느껴지지 않는 걸까 하고 의아했습니다. 물론 꼬릿칸 사람들이 최하층민 계층이니까 반란의 욕구가 매우 강하고 다른 사람들은 지배층에 속하거나 그 사람들에게 동조하는 계층이라서 그렇다고 할 순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란군들이 달려오는데도 자신의 열차칸을 벗어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문이 열리면 비로소 총을 쏘거나 도끼질을 한다는 게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런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가하게 앉아 초밥을 만들어 먹거나 어린이들과 수업을 하거나 계속 마약을 하고 춤을 추고 사우나를 한다는 건 지나치게 관념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한마디로 불편한 거죠. 그런데 제 아내는 이 장면이 너무도 당연하고 잘 된 설정으로 느껴졌다고 합니다. 저와 삐딱선을 탄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여기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봉준호의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박찬욱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나는 것도 관람의 즐거움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습니다. 열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서로 망치 살육전을 벌이던 적들끼리 “해피 뉴 이어!”를 외치며 잠깐 멈추는 유머코드는 [올드보이]에서 자기 생니를 뽑으며 고문하던 악당에게 “우린 친구잖아”라고 말하는 오달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박찬욱은 이런 잰체하는 유머코드를 좋아합니다.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틸다 스윈튼의 연기도 거북했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결정적으로 삶은 계란을 나눠주다가 그 트레이 속에서 기관총을 꺼내 쏘는 장면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명백한 오마주라고 해야겠죠.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시퀸스에 이르기까지 ‘팔’에 대한 고찰이 많이 나옵니다. 앤드류의팔은 열차 밖으로 내밀어졌다가 박살이 나고 꼬리칸의 선지자 길리엄은 팔이 없는 반면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커티스는 아직도 자기가 팔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죠. 그런데 이 모든 게 나중에 ‘달마대사’의 메타포임이 밝혀집니다. 전 이게 좀 싱겁습니다. 


그리고 열차의 엔진을 소유하고 있는 맨 앞칸의 윌포드가 작은 아이를 납치해 가는 이유도 “이 작은 곡사포 안을 어린아이 손 아니면 어떻게 닦아낸다 말입니까?”라는 거짓말로 나치들로부터 어린 생명을 구했던 쉰들러의 대사를 거꾸로 변용한 것 같아서 좀 낯간지러웠습니다. 



얘길 하다 보니 온갖 불만을 늘어놓으며 남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영화를 일방적으로 폄훼하고 있는 꼴이 되어버렸군요. 그런데 평소에 안 그러던 정말 제가 정말 왜 이럴까 생각해 봤더니 가장 결정적인 건 ‘감동’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짜릿함이나 감동 부분의 트리거 역할을 해야 할 요나와 남궁민수의 ‘캐릭터’가 너무 평면적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 연기 잘 하는 송강호와 동서양 어디서도 통할 거 같은 매력적인 포스를 뿜어내는 고아성은 영화 내내 심드렁하게 겉돕니다. 캐릭터 구축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죠. 이 열차의 보안 책임자였던 남궁민수와 다음 칸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있는 요나는 원할 때마다 열차칸의 문을 척척 열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지만 정작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성취동기’가 부족합니다. 하다 못해 윌포드에게 철천지 원수 진 일이 있어 그걸 꼭 갚아야 한다든지, 아니면 그게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진실과 통한다든지 하는 확실한 동기가 그들에게 주어졌으면 어땠을까요.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건 고작 1년에 한 번씩 세계를 뱅뱅 도는 ‘윤회’ 같은 이 지겨운 열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가 새로운 세상에서 생존 가능성을 찾는 것뿐입니다. 이건 좀 맥이 빠지는 결론이며 안일한 통찰이죠. 



이상이, 엄청난 스케일과 비주얼, 쟁쟁한 스타들의 뛰어난 연기가 등장하는 만듦새 훌륭한 일급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설국열차]를 재미 없게 본 이유입니다. 물론 이 메모는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혀야 뒷탈이 없겠으나… 따지고 보면 개인적이지 않은 의견이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저는 유명한 평론가나 기자도 아닌 일반 관객인데요 뭐. 그런 의미에서 매우 성급하고 편협한 영화 일기인지 알면서도 그냥 올립니다. 이건 그저 제 개인적인 블로그이고, 개인적인 페이스북 담벼락일 뿐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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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통찰력과 막강한 연기력의 행복한 만남 – [마지막 4중주] 






주먹으로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데니스 호퍼는 자신을 고문하던 마피아들에게 담배를 하나 달라고 해서 맛있게 빤 다음 엉뚱한 얘기를 시작합니다. 그것도 아주 침착하고 흥미롭게 빙글빙글 웃어가면서.  “난 책을 좋아하지. 특히 역사책을 많이 읽었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한 가지 가르쳐 줄까? 니네 시실리아인들은 원래 곱슬머리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천 년 전쯤에 무어인들의 피가 섞이면서 그렇게 된 거지. 깜둥이 말야. 그러니까 시실리아인들은 죄다 깜둥이의 종자인 거라고…니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깜둥이들하고 그짓을 한 거야...” 


얘기를 들으며 점점 얼굴이 일그러지던 보스 크리스토퍼 월큰은 나중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그만 킥킥킥킥 웃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데니스 호퍼도 그의 약을 올리느라 마주 보고 더 크게 웃죠. 하하하하하. 자세를 수습하려 돌아서던 월큰은 손으로 데니스 호퍼를 가리키며 다시 한 번 포복절도를 합니다. 아아, 이 새끼 봐라 진짜 웃기네, 하는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던 크리스토퍼 월큰, 결국은 참지 못하고 부하의 권총을 뽑아서 단숨에 데니스 호퍼를 쏴죽여 버립니다. “1984년 이후로 내가 누군가를 직접 죽이는 건 니가 처음이야!”라는 말과 함께. 



기억 나세요? 얼마 전 자살한 토니 스코트 감독의 영화이긴 하지만 매니아들 사이에선 무명 시절의 쿠엔틴 타란티노 시나리오로 더 유명한 영화 [트루 로맨스]의 한 장면이죠. 여기 나오는 크리스토퍼 월큰은 정말 카리스마가 넘치는 악역 전문 배우입니다. 몇 해 전 인사동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친구들 영화제’가 열렸을 때 아벨 페라라의 [킹 뉴욕]을 추천했던 류승완 감독은 영화가 끝나고 열린 간담회에 나와 “우리 월큰 형님이 나오는 장면에서, 우와!…”라고 흥분하며 크리스토퍼 월큰을 기렸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에서 여자 승객의 돈을 빼앗는 지하철 강도에게 “야, 그러지 말고 차라리 이건 어때? 하고 자신의 지갑 속 돈을 던지며 “생각 있으면 나중에 한 번 찾아오라” 고 말하는 장면은 실제로 월큰의 경험담이라고 합니다. 실제로도 눈빛 카리스마가 장난 아닌 배우라는 얘기죠) 


자, 그런 전설적인 악역 전문 배우가, [퓨너럴]에서 숀 펜의 동생 크리스 펜과 함께 사악하게 웃던 그 보스가, [디어 헌터]에서 단 한 발의 탄환이 든 권총을 머리에 대고 끊임없이 러시안 룰렛을 해대던 그 슬픈 또라이가 [마지막 4중주]의 첼리스트로 나온다니. 얼른 상상이 안 갔습니다. 물론 크리스토퍼 월큰이 코미디 영화에 전혀 출연을 안 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가 기억하는 그는 백 번 양보해도 [수어사이드 킹]같이 살짝 맛이 간 상황의 ‘납치 당한 보스’라도, 결국은 카리스마 작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불이 꺼지고 [마지막 4중주]가 시작되고 나니 조직의 보스 월큰 형님은 어디 가고 파킨슨병 진단을 받아 고뇌하는 노장 첼리스트가 거기 서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푸가’라는 세계적인 쿼텟의 리더인 피터는 자신이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새 첼리스트를 구하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공연곡으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을 결정합니다. 


얘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피터가 빠지게 된다는 건 25년 간 지속되었던 네 사람의 팀웍이 깨진다는 얘기죠. 타격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제2바이올린인 로버트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 받쳐주는 역할만 하긴 싫다며 앞으론 때에 따라서 자신이 다니엘 대신 제1 바이올린을 맡을 수도 있음을 시사합니다.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다니엘이 당황하는 것은 물론 로버트의 아내이자 쿼텟의 비올라 연주자인 줄리엣도 곤혹스러워 합니다. 그동안 모두의 아버지와 같았던 피터의 리드 하에 가려져 있던 멤버들의 질투, 갈등, 욕심 등이 한꺼번에 표출되는 상황인 것이죠. 


자신을 만류하는 줄리엣에게 화가 난 로버트는 홧김에 알고 지내던 조깅 파트너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그 사건 때문에 둘의 사이는 더욱 벌어집니다. 게다가 로버트와 줄리엣 사이에서 태어난 대학생 딸에게 바이올린을 지도하던 다니엘이 그녀와 사랑에 빠져 동침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습니다. 얼핏 단조롭고 고귀한 척 할 수도 있었던 극은 이처럼 클래식 음악에 어울리지 않는 ‘막장스러움’을 통해 인간적인 온기와 삶의 신산스러움을 함께 갖춘 입체적인 텍스트로 발전합니다.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던 피터는 자신이 마지막 연주곡으로 선택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의 의미에 대해 질문합니다. 


“당시엔 4악장으로 구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 곡을 7악장으로 구성했으며, 악장 사이에 쉬는 시간 없이 바로 연주하도록 했다. 40분 동안 쉼 없이 계속 이어서 연주해야 하는 이 곡은 연주하는 동안 악기의 튜닝이 풀리거나 연주자들의 하모니가 망가지기 마련이지. 그렇다면 연주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베토벤의 주문을 어기고 중간에 잠시 멈춰서 조율을 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연주자들에게 자신의 연주를 맞춰 가며 끝까지 계속 쉬지 않고 연주해야 할까?” 


좋은 텍스트엔 언제나 ‘인생의 메타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죠. 다큐멘터리를 찍던 야론 질버만 감독은 극영화 데뷔작인 이 작품에서 베토벤의 곡을 통해 이기심과 이타심, 화합과 개성의 관계, 그리고 직업과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을 관객에게 던지죠. 



이처럼 명확한 컨셉과 만듦새를 가진 이 영화는 기가 막힌 배우들의 열연으로 더욱 빛이 납니다. 무슨 연기를 시켜야 저 사람이 연기 못 한다는 소릴 한 번 들어볼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무슨 연기든 완벽하게 해내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물론 , 다니엘 역의 마크 이바니어와 줄리엣 역의 캐서린 키너도 명불허전입니다. 


리허설을 하면서 호흡을 고르고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배우들의 긴장된 손끝 연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요. 젊었을 때 카잘스와 만났던 장면을 회상하며 즉흥적으로 첼로를 켜는 크리스토퍼 월큰의 몸짓과 연기를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적당할까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악기를 연주할 땐 정말 악기를 배워서 실력으로 연주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멋진 음색들이 계속 흘러 나옵니다. 


영화는 네 사람이 무대에 서서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을 연주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연주 도중 한 사람이 떠나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연주는 계속 이어지죠. [마지막 4중주]. 이 영화는 텍스트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막강한 연기력이 만나면 얼마나 멋진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게다가 귀를 황홀하게 해주는 정상급 연주들을 한 시간 반 동안 실컷 들을 수 있습니다. 얼른 가까운 극장으로 가십시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땐 아마 "아, 오늘 술 약속 취소하고 극장으로 오길 정말 잘 했어."라는 생각이 절로 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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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제약 우루사의 새 캠페인이 눈에 들어옵니다. '전사의 몸' 편을 먼저 봤는데 '괜찮다' 편도 좋군요. 그 동안의 '활력'이라는 효능효과 컨셉에서 벗어나 '시대'와 '인간'을 담으니 광고의 지평이 단박에 이렇게 넓어지는군요. 


선배 광고인 J.월터 톰슨은 "상품의 진실과 인생의 진실을 잘 합치하는 데서 광고의 힘이 발휘된다"라고 했습니다. 신자유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역설적인 화면과 카피로 표현한 이 캠페인, 힘이 있습니다. 왜일까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있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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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

짧은 글 짧은 여운 2013. 7. 29. 05:29



누구에게나 힘든 일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보는, 일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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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연애하는 여자 이야기 - 성수선의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

 


아침에 일어나 무슨 책을 읽을까 서가에서 잠깐 망설이다가 성수선의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를 집어 들었다. 반쯤 읽다가 잠깐 ‘급한’ 다른 책을 본다고 덮어 그대로 책꽂이에 꽂아놨던 책이었다. (그래도 ‘요즘 읽는 책’ 코너에 꽂았다)

 

성수선은 직장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열혈 독서가다. 그리고 작가다. 나와는 십여 년 전 온라인을 통해서 인연을 맺고 서로 안부를 전하는 친구 사이이며 이젠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페친’이 되었다. 얼마 전 그녀가 ‘북포럼’에 저자로 출연했을 땐 직접 방청객으로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 비로소 얼굴을 마주하고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사실 오늘은 다른 책을 읽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이 책부터 집어 들게 되었다. 아니, 잠깐 꺼내 무심코 책장을 넘겼는데 성석제의 [순정]을 다룬 챕터가 눈에 띄는 바람에 계속 읽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아, 이 작가도 나처럼 [순정]을 가끔 읽는구나. 지난번에 읽을 땐 그 맛이 또 조금 다르던데…하면서.


[밑줄 긋는 여자의 토닥토닥 에세이 -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는 그녀가 쓴 두 번째 독서 에세이다. 책 안에는 일반 직장인처럼 열심히 일을 하다가 퇴근 후면 확 달라지는 그녀의 일상이 들어있다. 그녀는 도대체 저녁마다 혼자 사는 오피스텔로 돌아가 뭘 할까?


책을 읽는다.

 

혼자인 그녀는 오피스텔에 들어가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예전에 소설가 이병주가 [행복어사전]이라는 책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지금 집에서 톨스토이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병주가 기다리고 있다”라고 한 것처럼 그녀는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 가서 김영하를 만나고 장정일을 만난다. 레이먼드 카바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소설가 제임스 쉘터나 김승옥, 그리고 시인 류근을 만나 심야식당의 손님들처럼 한바탕 영혼의 술판을 벌인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녀의 문체는 정직하다. 사실은 너무 바르고 정직해서 조금 더 풀어졌으면, 하고 아쉬워할 때도 있다. 소위 ‘범생이’의 느낌이 나는 것이다. 그건 대기업에 다니면서 늘 열심히 사는 그녀의 프로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가 저녁 8시면 문을 닫고 자기들끼리 노는 오피스텔 1층 라면집 아줌마 아저씨들을 부러워한다. 이건 이율배반이다. 마치 자기 별명을 ‘날건달’이라 지었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날건달은커녕 동기들 중에서도 가장 착실하게 광고회사 본부장님으로 잘 살고 있는 내 친구 류 모 씨처럼. 

 

늦게까지 하면 훨씬 높은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면집은 저녁 8시가 되면 어김없이 영업을 종료했다.


며칠 전 팟캐스트로 ‘창비 라디오 책다방’을 듣다가 기생충학자 서민 교수가 “알라딘서재 시절 알던 분 중에요, 성수선 씨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다음부터 저를 멀리하고…”라고 눙을 치는 바람에 한참 웃다가 성수선 씨에게 일러바친 적이 있다. 물론 성수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책을 좋아하는 만큼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한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 ‘피곤하니까 한 잔 한다’는 말은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말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말이다”라는 문장을 쓸 수 있는 작가라면 얼마나 훌륭한 술친구인지는 말 안 해도 다 알지 않겠는가. 마침 어제 페이스북에 [밑줄 긋는 여자]가 8쇄를 찍었다는 그녀의 자랑글이 올라왔다. 생각난 김에 다음 주쯤 술 한 잔 사달라고 졸라봐야겠다.

 

 

 

 






(* 예전에 제가 ‘음주일기’를 한창 쓰며 빈둥거리던 시절에 써놨던 [밑줄 긋는 여자] 독서일기도 있길래 찾아서 함께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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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가면 좋은 점. 첫째, 공짜로 보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 둘째, 후덥지근한 길거리와 달리 냉방이 잘 돼 있어서 시원하다. 셋째, 누군가 전화를 해서 “지금 어디야?”라고 물으면 “응, 지금 서점에 있어.”라고 고상한 척 폼 잡으며 대답할 수 있다…

 

요즘은 서점 나들이에 재미를 붙여서 오후엔 대개 고속터미널에 있는 영풍문고에 가서 논다. 집에 있으면 자꾸 TV를 틀거나 멍하니 쓸데 없는 짓거리만 하다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요즘 서점에 가서 읽은 책들은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 그리고 성수선의 [밑줄 긋는 여자] 등이었다.

 

나는 성수선이란 작가를 ‘수선 님’이라 부른다. 몇 년 전 한겨레에 소개된 인물 기사를 보고 책꽂이 사이에서 웃고 있는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그녀의 홈피까지 찾아갔었는데, 거기에 있는 수 많은 독서일기와 에세이들을 읽느라 자주 들락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 방명록에 가서 ‘독서일기를 쓰는 분께 음주일기를 쓰는 인간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긴 뒤 친하지는 않지만 간간히 온라인으로 안부를 전하는 사이가 되었다.

 

 

[밑줄 긋는 여자]는 수선 님이 [나는 오늘도 유럽 출장 간다]에 이어 내놓은 두 번째 책이다. 이번 책은 굳이 구분을 하자면 독서 에세이에 속하겠지만 대개의 작가나 학자들처럼 심각하게 폼 잡고 서평을 쓰는 에세이가 아니라 자신의 일과 생활, 생각들을 풀어놓으면서 거기에 자연스럽게 책들이 스며드는 미셀러니에 가깝다.

 

이런 글쓰기의 현실감은 현재 해외영업 전선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저자의 남다른 이력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현재 삼성정밀화학 해외영업부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사흘이 멀다 하고 해외 영업을 다니는 한편 대학원에서 MBA과정까지 공부하는 저자가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쓴 글들이기에 각 편마다 에피소드들도 풍부하고 현실감이 넘친다.

 

 

도쿄에 출장을 가서는 [돈까스의 탄생]이란 책을 떠올리고 독일에서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원서를 찾아 다니는 도중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하는 식이다. 일본 출장을 가서인가 회사 상사에게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 [장미 도둑]을 선물하고 ‘너는 어쩌면 하는 짓도 이렇게 이쁘니?’라는 칭찬을 들었다는 에피소드는 참 재치가 있다. 그 상사의 방에는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가 열 권도 넘게 있더라는 것이다. 다들 성의없이 달착지근한 자기계발서 따위를 반복해서 선물할 때 삶의 애환과 아이러니가 배어있는 아사다 지로의 소설책을 선물한 부하 직원이 있었으니 어찌 이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살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과 그에 따른 상념마다 공지영, 박민규, 김영하 등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하나씩 하나씩 거론된다. 콘돔은 물론 꽃다발까지 자판기에서 판매되는 외국 출장지에서는 대학 신입생 시절 장미꽃다발을 신문지에 싸서 선물했던 동기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백만 번 산 고양이]를 읽으면서는 늘 자신의 곁에 있어줄 것이라 믿었던 이성 친구의 결혼 소식에 받은 충격을 얘기하며 평생 자기 짝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수선 님의 장점이자 단점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심플한 마인드다. 책을 내는 저자라면 좀 현학적으로 굴 수도 있고 쿨한 척 할 수도 있는데, 이 여자는 글 곳곳에 급하고 솔직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신은 외로움을 감추지 못하고 질질 흘리고 다닌다면서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정호승의 시 [수선화에게]를 권하고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엉엉 울어버렸던 사실까지 거침없이 고백한다. [백지연의 SBS전망대]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책 읽어주는 여자’라는 패널로 고정출연을 했던 추억을 애기할 때도 앞으로 그런 프로그램이나 TV 출연까지 기회만 된다면 또 하고 싶다는 소망을 숨기지 않는다. 어쩌면 순진하게까지 느껴지는 이러한 면모가 작가로서의 ‘가오’는 덜 서게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참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덕분에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친한 친구와 술집에서 만나 대화를 하는 착각을 하게 된다. 힘들고 지친 일상들을 얘기하며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에 공감하고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를 읽은 사람들 중 일요일 저녁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다가올 월요일 생각에 우울해지는 친구가 또 하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동병상련의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우리는 모두 바쁘게 산다(나는 전혀 안 그렇지만).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 그렇다. 수선 님도 바쁘게 사는 게 몸에 배어서 그런지 늘 바쁘고 늘 뭔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다. 첫 책을 출간하고 나서 휴가로 괌에 갔을 때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리라’ 다짐했건만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거 같은 강박에’ 스노쿨링 강의에 하루 세 번씩 참가했다는 글을 읽고 깔깔 웃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가하게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들은 책상에 처박혀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서 저자가 딸에게 건낸 ‘작가가 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고 했다. 사람들과 부딪히고 세상살이의 기쁨과 슬픔, 스트레스를 경험하지 않고는 인생의 비밀도 제대로 풀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앞으로도 열심히 회사를 다니면서 또 이런 책들을 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녀에게서 자극을 받고 자기계발서 대신 소설책을 집어들 것이고 일반인들도 글쓰기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서 ‘코카콜라 회장의 신년사’ 같은 파급력 높은 글을 쓰게 될 것 아닌가.

 

 

지금 서점에 가면 카를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보다 성수선의 [밑줄 긋는 여자]를 찾는 게 더 쉬울 것이다. 이번 휴가를 떠나기 전에 들었는데 이미 2쇄를 찍었다고 한다. 그녀의 책을 펼치면 목차 전 페이지에 ‘No Rain, No Rainbow”라는 글이 써 있다.  힘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꾸만 뭔가 저지르는 여자, 그렇지만 우리의 모습과 참으로 비슷한 저자. 그녀의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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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했다가 동네 수퍼에 들렀는데 문득 캔커피가 사먹고 싶어지는 겁니다. 요즘은 늘 집에서 원두커피를 내려서 먹곤 해서 캔커피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캔커피를 하나 들고 와 계산을 하면서 저는 예전에 60만 원짜리 커피를 마셨던 쓰라린 기억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10여 년 전의 일이니 꽤나 비싼 커피를 마신 셈이죠.

 

 

제가 TBWA/Korea라는 광고대행사를 다닐 때였습니다. 12월 말에 웬일인지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들에게 노트북을 하나씩 지급한 사건이 있었죠. 워낙 연봉도 세고 직원들에게 잘 해주기로도 이름난 잘 나가는 회사이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좀 파격적인 대우였습니다. 회사의 카피라이터들은 신이 났습니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는 저도 마찬가지였구요.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카피라이터. 생각만 해도 멋진 일 아닙니까.

 

1월 업무 첫날, 시무식을 마치고 돌아온 저는 회사에 있는 밴딩머신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가지고 제 책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자, 이제 일을 시작해 볼까? 하고 노트북을 열고 종이 커피잔을 집는 순간, 커피잔이 살짝 앞으로 튀어나가더니 노트북 자판에 가서 팍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어, 어, 앗, 아악! 안 돼~!!!”

 

 

커피는 이미 노트북 자판 위로 쏟아졌고 제 입에선 알 수 없는 비명들이 쏟아졌습니다. 얼른 전원선을 뽑고 전 버튼을 누르고 노트북을 거꾸로 들어 흔들고 별짓을 다 해봤지만 노트북은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차라리 물을 쏟았으면 얼른 전원을 끄고 거꾸로 해서 말리면 되는 수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커피는, 특히 자판기 밀크커피는 설탕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자판에 들러붙어 부품들을 빠르게 부식을 시킨다는 겁니다.

 

아, 새해 첫날부터 이게 뭐람.

 

저는 이 비극적인 소식을 경원지원팀에 알려야 했습니다. 경영지원팀 차장님이 와서 노트북을 가져가더니 좀 있다가 전화를 걸어 저를 위로하더군요. 차라리 데스크탑이었으면 자판만 갈면 되는데 이건 노트북이라 전체를 바꿔야 한다. 이 노트북이 120만 원짜린데 수리비가 물경 80만 원이란다. 그러니 차라리 새 노트북을 사는 게 낫다. 우리, 새 노트북을 사도록 하자. 근데 너무 비싸다. 회사에서 반을 부담할 테니 편성준 씨가 반을 부담해라. 거의 한 번도 안 쓴 노트북인데, 참 안 됐다.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토를 달지 않고 그러자고 순순히 동의를 했습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경영지원팀이랑 잘 못 지내는 편이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그 예로, 그 전 해 겨울에 회사 동료들하고 스키장 갔다가 오는 길에 삼성동 글래스타워 앞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무릎을 크게 다쳤을 때도 저는 병가를 내지 못했습니다(후배의 차는 폐차를 시킬 정도로 큰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경영지원팀 왈, 다친 건 알겠는데 그게 일하다가 다친 게 아니라 놀러 갔다 오며 다친 거라 병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몹시 화가 난 저는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따졌지만, “그런 법이 있다”는 차장님의 침착한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본의 아니게도 며칠간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무단결근’을 해야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참 멍청한 선택도 많이 했고 억울한 일도 많이 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항상 손해 보는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결국 예쁘고 착한 아내와 결혼도 했고 주변에 괜찮은 친구들도 꽤 많은 인생이니까요. 이젠 심지어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한 연설이 생각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라고 했던가요? 저도 계속 그의 말처럼 멋진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비록 앞으로도 제가 하는 선택들이 ‘hungry’보다는 ‘foolish’에 가까울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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