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나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정답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잠정적으로 정답이라고,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면서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에 의해 내가 가진 정보의 양이 늘어나다 보면 분명히 어느 지점에선가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대화'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므로써 내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재미있는 작업입니다.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이라는 책을 읽다가요. 메모를 하고싶은 구절이 생겨서 오랫만에 만년필로 베끼고 나중에 제목을 달았더니 글씨들이 손에 닿아 번지고 난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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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일기 2

독서일기 2012. 5. 14. 15:26

 

핑계 같지만, 요즘은 도대체가 소설책 읽을 시간이 안 나네요. 그래도 어딘가 이동할 때마다 조금씩 읽긴 했습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던 안중근 의사가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규가 상주에서 입시공부를 하며 도꼬노미 야스꼬라는 여관집 딸과 기묘한 만남을 가지게 되는 건 지난번에 말했었죠. 수학문제를 가르쳐준 수재 규에게 홀딱 반한 야스꼬는 그 다음에 또 규가 있는 곳으로 수학문제를 들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날 폭풍우가 치고 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어서…ㅋㅋㅋ 아아, (이거 무슨 도미시마 다께오의 포르노소설 같은 설정이지만) 둘은 결국 같이 잤습니다만,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싱겁기 짝이 없는 일이죠.


새학기가 되어 학교에서는 학생복을 카키색으로 바꿉니다. 각반도 상시 착용하게 하구요. 이른바 ‘전시체제’로 돌입하는 것이죠. 학생들은 카키색 학생복을 입기 싫다 하여 수업 거부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전학을 가기도 합니다만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습니다. 학우 중 주영중과 곽병한은 이 문제로 서로 심하게 싸우기도 합니다. 작가는 명급장인 김상태를 등장시켜 이 사건을 마무리하지만 나중에 주영중이 뭔가 동티를 남긴다는 암시로 “주영중은 무서운 사나이”라고 기록해 놓습니다.

한편 권위를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자 괴짜 선생인 쿠사마는 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그는 2차대전 발발을 거론하며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가 승리자이니 모두 살아서 10년 후를 기약하자”라고 말하고 학교를 떠납니다.

규는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진학할 생각을 하죠. 그러나 아버지 심부름으로 찾아간 종갓집 형에게서 네 형편에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말라는 독한 얘기와 행패를 경험하고 굉장한 충격을 받습니다.


여기서 1940년 2월 11일에 있었던 ‘창씨개명’ 사건이 비중있게 다뤄집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진학의 길도 막혀버릴 상황이 되었습니다. 작가는 돈 많은 ‘딜렛탕트’ 하영근의 입을 빌어 당시 창씨개명에 앞장 섰던 작가 이광수를 심하게 비난합니다.(189페이지) 글은 달착지근하게 잘 쓰지만 아무런 사상도 진정성도 갖지 못한 모리배 같은 자라는 거죠.

우여곡절 끝에 친구 윤근필과 함께 일본 경도에 있는 ‘삼고’에 입학한 규는 경도 안에 있는 묘심사라는 고요한 절에 자주 가 책을 읽다가 세스꼬라는 여학생과 친하게 됩니다. 조선인이지만 수재들만 다닌다는 삼고 학생인 규에게 세스꼬가 홀딱 반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 후 세스꼬의 집에 찾아갔던 규는 사춘기 소년이면 당연히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욕정에 놀라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엔 여자가 더 대담해지는 법. 결국 둘은 대판에 있는 여관에 들어가 어렵게 어렵게 첫경험을 치르게 됩니다. 규는 허망한 첫경험 이후 자신이 비로소 욕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느낍니다.

대판에 가서 세스꼬와 자던 날, 규는 우연히 길에서 국민학교 동창인 고완석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무작정 일본에 와서 고학을 하며 성실하게 생활을 하다가 어느 일본인의 눈에 들어 그 집의 양자로까지 들어가게 되면서도 민족적 자존감 만은 잃지 않는 꿋꿋한 친구를 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한편 규가 삼고로 진학을 하는 동안 창씨개명 문제로 퇴학을 당한 천재 박태영은 경도로 규를 찾아와 <죄와벌>의 라스꼴리니코프를 비난하다가 자신은 앞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 몸 바칠 결심을 털어놓습니다.

“나는 앞으로 술도 담배도 안 할끼다. 어느 시기까진.”
아까부터 넌 어느 시기, 어느 시기 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 시기란 뭣고?”
“우리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그리고 쿠사마 선생이 얘기한 10년 후를 거론하며 둘 다 27세, 28세가 되었을 때를 상상하며 독립투사와 대학자로서의 기초작업을 하자고 약속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은 검정고시를 준비하겠다는 말도 합니다.

박태영은 일본에서 우유배달을 하며 검정고시 공부를 틈틈히 합니다. 그러나 천재는 어디 가서도 표가 나는 법. 태영은 기어코 일을 내고야 맙니다. 전검시험에서 1등 합격을 하는 바람에 신문기자가 찾아오고 어쩌구…결국 전국적인 스타가 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팬레터를 받게 된 태영은 특히 김숙자라는 교포 여학생의 편지에 감복해 그녀를 찾아가게 되고 둘은 졸지에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역시 청춘남녀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른 풀처럼 불이 잘 붙습니다.

우유배달소엔 태영 말고도 원서를 읽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다리를 저는 20대 후반의 과묵한   청년 무나까와였습니다.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이층에서 덜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무나까와는 태영에게 독일어를 배울 것을 권하고 곧 그의 독일어 개인교사가 됩니다...


분명 전에 다 읽은 내용들인데 어쩌면 이렇게 새 책 같은지 참 신기하기만 합니다. 지금 2권 71페이지까지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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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일기 1

독서일기 2012. 5. 4. 11:15

 

 

이 소설은 1933년 추석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박경리의 [토지]가 1897년 추석날 시작하던 것과 비슷하지요? 첫 장면은 제사를 지낸 규와 태가 다음날 지리산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십 리라고 했던 무덤까지의 거리는 그 두 배가 넘는 길이었다는 게 밝혀지죠. 그건 할머니의 양반이수’라는 뻥이었다고 같이 가던 중부가 알려줍니다. 양반이수란 양반들이 짐꾼들 삯을 떼어먹으려고 거리를 줄여 말하던 수작을 일컫는 말이었죠. 규와 태는 결국 지리산에 있는 할아버지 묘에 참배를 하고 나오다가 제사 지낼 때 펴놨던 병풍과 똑같은 풍경을 목격하고 할아버지가 수십 년 전에 화공을 앞세우고 거기까지 와서 그 풍경을 병풍에 그대로 담게 한 까닭을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규와 같이 산소에 갔던 중부는 몇 년 뒤 가출을 해버립니다. 독립운동 하느라 집안 다 말아먹고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중부를 보다 못한 백부가 마름 자리라도 해보라고 말한 게 화근이 된 겁니다. 행방이 묘연한 중부는 지리산에 있는 ‘서동지’라는 사람을 찾아간 게 아닌가 하는 아련한 소문만 남깁니다.

 

규는 공부도 잘 하고 마음가짐도 바른 청년으로 자랍니다. 그리고 박태영이라는 엄청난 천재와 친구가 됩니다. 고리끼의 소설을 탐독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불려간 사건을 계기로 박태영과 더 친해진 규는 돈 많은 지식인이자 자신을 ‘딜렛탕트’라고 자조하는 인물 하영근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중국의 노신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알게 되죠. 그리고 하영근의 딸 윤희에게 희미한 연정도 품게 됩니다. 일본인이지만 존경할 만한 인물인 하라다 교장과 영어선생인 쿠사마도 만나게 되는군요. 지금 고등학교 진학 공부를 위해 상주에 왔다가 여관집 딸인 야스꼬의 수학문제를 풀어주는 바람에 이 여자와도 나중에 뭔가 이루어질 분위기를 풍깁니다…지금 134페이지까지 읽었습니다.

 


어렸을 적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가슴이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새삼 기억납니다. 중편소설인데도 스케일이 크고 꿈을 꾸는듯한 낭만적인 필치가 어지간히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이게 데뷔 소설이라니요. 그리고 그 뒤 고등학교 2학년 때 [행복어사전]을 읽으면서 얼마나 즐거웠던지. 지금 다시 읽으면 좀 구시대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이병주를 읽으니, 옛 친구를 다시 만난 느낌이랄까.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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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겐 이상한 버릇이 있습니다. 뭔가 일을 시작하면 좀처럼 다른 걸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하루 종일 일만 하는 워커홀릭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일을 하는 시간은 아주 짧습니다. 아이디어를 내는 직업일수록 더 그렇지요. 그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어떡하지”,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데…”하고 근심 걱정으로 보내는 시간이 전부입니다. 이건 일의 성과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냥 제가 새가슴이라 그런 겁니다.

일을 회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술을 마시는 겁니다.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취해서 몸도 마음도 늘어지기 때문에 뭐든 포기가 빠르죠.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는 데’는 술만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일이 싫다고 늘 술만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보면 일도 지지부진하면서 다른 것도 전혀 즐기지 못하는 오갈 데 없이 한심한 상태가 도래합니다.

이래저래 전 몇 달 간 전혀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영화도 죄다 놓쳐서 [건축학개론], [어벤저스], [은교] 등 못 본 영화가 지천으로 널렸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SNS나 블로그에도 글을 잘 올리지 못합니다. 일도 성에 차게 못하면서 다른 걸 한다는 게 맘에 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컴퓨터 프로그래머인데 프로그램은 별로로 짜면서 취미로 멋진 탁자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저는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럼 넌 목공을 하지 왜 프로그래머를 하고 있는 거야?”

 

마음에 공황 상태를 메우기 위해서는 ‘잘 읽히는 책’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지리산]은 쉬운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병주라는 한 시대의 천재가 목숨을 걸고 쓴 대하장편소설입니다. 요즘처럼 인문학과 실용서만 주로 읽던 제겐 [지리산]처럼 유장하고 압도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는 소설이 필요했습니다. 더구나 이 책은 전에 제가 어렸을 때 줄까지 쳐가며 읽었던 소설인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습니다.

새로운 문물이 쏟아지던 격동의 세월을 거스르며 살다 죽어간 한반도의 젊은이들의 이야기인 이 소설은 TV드라마로도 각색되어 방영된 적도 있지요. 생각해보면 [태백산맥]이나 [토지]에 비해 너무 일찍 완간된 불행한 소설이기도 합니다. [관부연락선]이랑 이어 읽은 기억이 나서 그것부터 읽을까 하다가 일단 책장에서 눈에 띄길래 이 책부터 집어들었습니다. 앞으로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고 티블로그에 독서일기를 연재할 생각입니다. 이미 끝까지 읽은 독자들이 수두룩한데, 이런 식의 독서일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기도 하지만, 쥐가 자라나는 이빨을 시멘트 바닥에 갉아내는 기분으로 그냥 미련하게 한 번 진행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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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중2 여학생의 부모는 학생지도카드에 희망대학을 서울대로, 장래희망은 국회의원으로 적었다고 한다. 소녀의 꿈은 스타일리스트였다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난 어제 교보문고에 가서 [피로사회]라는 책을 샀다. 그리고 그 얇은 책을 계속 읽지 못한 채 나오지 않는 아이디어를 쥐어짜고 있다. 피로사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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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병원에 있는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나니 이 시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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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막차 탄 기분으로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 를 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화 속 최익현을 보고 ‘우리 시대 가장들의 비애’를 느꼈다고 하던데, 그게 어디 가장들만의 문제겠습니까. 인간의 모습 자체가 그렇지 않나요.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누군가에게 줄을 대고, 허세를 부리다가 졸지에 역전 되기도 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말 그대로 쩝니다. 명불허전. 최민식은 최익현을 위해 몸까지 둔중하게 만든 듯하고 하정우도 절정의 연기력을 보여 주죠. 조연으로 나오는 조진웅, 곽도원 등 남자 배우들은 물론 기상캐스터 출신 김혜은의 모습도 깜찍하니 좋습니다.


끝까지 엎치락뒤치락하는 서사구조가 과잉스럽다는 느낌이 있고 러닝타임도 좀 길다 싶지만 힘 있는 내러티브에 디테일까지 잘게 신경 쓴 윤종빈의 연출에는 별 불만이 없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돌연 마음이 무거워지던군요. 뭔가 해야 할 일을 잔뜩 쌓아둔 일요일 저녁에 삶의 신산함을 다룬 컴컴한 영화를 봐서 그런 모양입니다. 뭐 그렇다고 주말에 늘 팝콘영화만 볼 순 없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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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침을 먹으러 국밥집에 들어갔다가 조선일보를 봤습니다. 요즘은 거의 보지 못하는 신문이라 반가운(?) 마음에 잠깐 들췄더니 '가정식백반' 이란 따뜻한 시가 실려 있더군요. 시인 윤제림의 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카피라이터 윤준호 선생의 시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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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남은 휴가를 긁어 모아 짧은 유럽 여행을(그것도 배낭여행이 아니라 폼 안 나게 여행사 패키지 상품으로) 갔다 온 저는 귀국하자마자 호쾌하게(!)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대책 없이 그만둔 회사였기 때문에 그 즉시부터 전혀 할 일이 없었고, 시간은 누에똥처럼 펑펑 남아돌기만 했습니다. 이른바 술과 장미의 나날이었죠. 그때 제가 회사를 그만 두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고우영 삼국지] 박스세트와 MBC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 DVD 세트 구입이었습니다.


지금은 홍자매나 김도우, 김지우([마왕]과 [부활]을 쓴) 등 마니아층을 형성하는 작가들이 꽤 많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거짓말]의 노희경과 [넷멋]을 쓴 인정옥 등이 그나마 가장 튀는 작가들이었습니다. 인정옥은 그 동안 잠잠하다가 얼마 전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의 애인으로 밝혀져 다시 화제를 불러모은 적이 있죠.

아무튼 고다르의 데뷔작 제목을 그대로 따온 이 드라마는 처음엔 그리 기대가 가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양복을 입고 다니는 소매치기 얘기라니 식상하잖아, 였던 거였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상한 관심과 애정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드라마였습니다. 일단 인정옥의 대사가 신선했습니다. TV 여주인공들이 좀처럼 쓰지 않던 “새끼”를 무심하게 내뱉게 했고, 공효진의 말버릇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돈 버느라 그랬지…’도 “내가 돈 버니라 그랬지” 처럼 입에 붙는 말 그대로를 대사로 쓰는 게 신기하고도 정감 있었습니다. 심지어 무슨 소린지 잘 들리지 않던 양동근의 웅얼거리는 말투도 단점이 아니라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참 가슴이 아픈 드라마이기도 했습니다. 양동근이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던 공효진을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새로 생긴 애인 이나영에게로 가는 얘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끔은 ‘도파민의 과다분비 현상’으로 오해 받기도 하는 ‘사랑’이라는 이상한 감정의 불가해성이 진정 아프고도 실감나게 드러난 작품이었던 거죠.

그리고 높은 완성도도 이 드라마를 더욱 사랑하고 싶은 작품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대개 시청률로 몰아치는 인기 작가들은 모든 시퀀스를 주인공들과 주요 사건에만 집중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네멋]은 주변 인물 한 명 한 명이 전부 다 살아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별스런 대사 없이도 사보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신구의 연기를 비롯, “그 대가리나 까딱까딱 하는 게 무슨 음악이냐?”고 이나영에게 야멸차게 굴다가도 아내 이해숙만 나타나면 금방 활짝 웃으며 “응, 당신 왔어?”라고 말하며 바보가 되는 조경환. 그리고 “이 아저씨 은근히 느끼하다?”라는 공효진의 대사에 “야, 은근히는 무슨 은근히냐. 나 보는 사람마다 다 느끼하다고 하던데.”라고 맞받아치는 이세창. 마지막 장면에서 야쿠르트 아줌마로 변해 공효진에게 봉변을 당하고 “아유, 그 아가씨 참 싸가지 없네.”라고 중얼거리는 윤여정까지 모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균등하게 그 존재감을 부여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방송을 지켜보다가 서서히 [네멋]의 팬이 되었고 DVD를 사서 반복 시청하면서부터는 ‘네멋 폐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엔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이동건이 이나영을 좋아하는 신문기자로 나왔었고 나중에 [커피 프린스]에 나왔던 김재욱이 양동근의 꼬붕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니 이 드라마도 참 오래되었네요. 엊그제 같은데 벌쎄 10년이 지났어요. 근데 지금도 서울 하늘 아래 어디선가 복수와 미래, 경이가 피시피식 웃으며 살고 있을 것만 같으니, 전 이 드라마를 참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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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일’이란 말을 아십니까? 예전엔 토요일을 반공일이라고 불렀죠. 제가 어렸을 땐 토요일에도 학교나 직장에 평일처럼 나가 오전에 공부나 일을 하는 척 하다가 점심 시간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싱겁기 짝이 없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래서 ‘월차’라는 말은 있어도 ‘반월차’라는 말은 없을 겁니다. 아, 월차란 말도 사라졌나요? 아무튼 저도 직장 다닐 때 홍상수의 데뷔작이 너무 보고 싶어서 ‘반월차’를 내고 종로2가의 ‘씨네코아’에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조조로 본 적이 있습니다. 아, 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지금은 주말 2회가 당연하지만 예전엔 토요일은 TV에서 주말연속극을 틀어주지 않았습니다. 즉 일요일 저녁에만 주말연속극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규칙을 바꾸고 토/일 방송을 시작한 게 바로 TBC의 주말드라마 [결혼행진곡]부터였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너무 재밌어서’였구요.

[결혼행진곡]은 정말 대단한 드라마였습니다. 당시의 청춘 스타였던 장미희, 유지인, 한진희가 모두 출현했고 한진희의 “죽갔네”라는 대사는 전국적인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청춘 스타들만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TV 드라마에서 이 사람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싶었던 김세윤이 홍세미와 커플로 나왔고, 잘 기억이 안 나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보니 김동훈과 서우림도 커플로 나왔더군요. 안옥희도 나왔구요. 안옥희라는 이지적인 탤런트는 나중에 소설가인가 극작가로 변신을 하기도 했죠. 김동훈은 안국동에 있던 실험극단과 실험극장의 대표이기도 했었는데요, 저도 어렸을 때 거기서 [에쿠우스]니 [신의 아그네스] 같은 화제작을 보았고 대학생일 때도 [스티밍, 욕탕 속의 여인들] 같은 연극을 보러 다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욕탕 속의 여인들은 번역극이었는데 영화배우 최민식의 전 부인 등 실력 있는 유명 여배우들이 모두 가슴을 벗고 나와서…음.음. 그리고 김동훈은 가수 김세환의 아버지일 걸요 아마.

[결혼행진곡]은 정말 유행어도 많은 드라마였습니다. 한진희의 “죽같네” 말고도 얄개 이승현의 “인생무상” 그리고 김순철의 “바쁘다 바빠”가 있었습니다. 김순철은 투박하게 생겼지만 전천후로 연기를 참 잘 하던 ‘한국의 잭 니콜슨’같은 배우였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했던 [여보 정선달]이란 드라마에선 정선달 역의 김성원과 콤비를 오래 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 장사 해서 떼돈 버는 것도 아니고, 세금 꼬박꼬박 내고…”도 분명 김순철의 유행어였는데 어느 드라마인지 도대체 생각이 나질 않네요. 무슨 호스티스들이 떼로 나오는,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파격적인 드라마였던 거 같은데. 지금은 고인이 된 미남 배우 임성민이 말 더듬는 남자로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만)

 

우리나라에서 난데없이 ‘비목’이란 가곡이 전국을 뒤흔든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결혼행진곡]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레스토랑에서 얘기를 하고 일어서려다가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녁에~” 라고 ‘비목’이 흘러나오면 “아! 조금만 더 있다 가자. 내가 좋아하는 곡 나오네.”라고 말하던 장미희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비목’의 유행은 나중에 작가 임성한이 [보고 또보고] 같은 드라마에서 조랭이 떡국이나 유행시키던 것과는 정말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도 있고 게임도 있고 멀티플렉스도 있지만 그 시절엔 오로지 TV뿐이었습니다. 김수현의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엔 수돗물 사용량이 줄고 도둑이 들어와도 몰랐다는 전설 같은 우리나라의 TV시청 역사엔 이미 이런 막강한 콘텐츠들이 이미 시범을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얘기는 여기서 끝.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얘기들이 떠올라서 주책스럽게 마구 지껄여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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