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슬픔

독서일기 2016. 5. 26. 10:58


<제주의 슬픔>

베리 레빈슨 감독이 만든 <굿모닝 베트남>이란 영화를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미군방송 DJ인 로빈 윌리엄스가 멘트를 하고 난 뒤 화면 가득 베트남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면서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 lWorld'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푸르른 자연 속 사람들도 모두 행복한 표정들이다. 그러다가 2절쯤부터 난데없이 헬기가 등장한다. 헬기에선 기관단총과 화염방사기가 난사되고 그 밑에서는 베트콩들과 베트남 양민들이 고스란히 총탄세례와 불세례를 받고 쓰러진다. 그런데도 배경음악은 계속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라고 노래한다. 아이러니라는 말조차 사치스러워지는 비참하고 잔인한 미장센이다.

제주에 처음 오면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풍광에 사로잡혀 절로 감탄을 하게 된다. 나도 이 작고 평화로운 섬이 좋아져서 해마다 내려와 며칠씩 묵고 가게 된다. 하지만 4•3평화박물관에 한 번 갔다 온 이후로는 똑같은 마음으로 푸른 대지를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우리 현대사에서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4•3항쟁'의 과정과 결과는 알면 알수록 너무나 끔찍하고 비참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우리는 제주도에 돌, 바람, 여자가 많다고 배웠다. 섬에 남자가 적은 것은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많은 까닭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었다. 1948년 '4•3사건' 때 군과 경찰이 너무나 많은 양민을 무장공비로 몰아 죽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남한단독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는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만 단독선거를 반대했었기 때문에 제주도민 자체가 눈엣가시였다. 이승만 정권은 북에서 공산당을 피해 내려온 '서북청년단'을 제주도에 투입시켜 공비들을 '소탕'케 했다.

공산당 때문에 고향도 집도 다 잃은 청년들에게 제주도의 공비들과 그 가족들은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죽창으로 찔러죽여도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리라. 당시 특무대장 김창룡은 '하루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은다'는 말을 남겼고 이런 정신분열종자를 이승만은 친히 불러서 일 잘한다 칭찬을 해줬다는 일화를 박물관에서 읽은 기억 난다. 당시의 만행은 김두식이 쓴 <헌법의 풍경>에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게스트하우스에 와서 다이닝룸 책꽂이에 꽂혀있던 책 중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읽었다. 언제 한 번 읽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계속 못 읽다가 이제야 손에 들게 된 책이다. 어제 아침엔 아내가, 오늘 아침엔 내가 읽었다. 제주 4•3항쟁을 최초로 다뤘던 이 소설은 당시 학살현장에서 죽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삼십 년을 더 살다 자살한 마을 어른 '순이삼촌'에 대한 이야기다. 난 순이삼촌이라고 해서 주인공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여자였다. 우리가 음식점에서 일하는 아줌마들을 이모라고 부르듯이 제주에서는 촌수가 애매한 마을 어른들을 남녀불문하고 '삼촌'이라 부르는 습성이 있었던 것이다.

군경의 '소개작전' 때 마을 국민학교에서 분류작업을 당하고 짐승처럼 끌려가 밭에서 집단총살을 당했던 순이삼촌은 기적적으로 죽지 않고 시체더미 속에서 사흘씩이나 기절해 있다가 살아났던 것이다. 그 뒤 그녀의 삶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대인관계도 제대로 갖지 못했으며 평생 안정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있던, 그래서 거기서 자란 고구마가 목침 만했던 그 밭에 가서 죽은 것이다.


책 뒷쪽에 있는 작가연보를 보니 현기영은 이 작품을 발표하고 난 다음해인 1979년에 군 수사기관에 끌려가 삼일 동안 고문을 받고 감옥에 구치되는 등 1개월간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그러고도 1980년에 다시 문제가 되어 종로서에 끌려가 일주일간 취조 받은 끝에 책이 판매금지를 당했다고 한다. 작가 39세때의 일이다.

당시엔 군사독재시절이라 그렇다지만 내 생각에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도 틈만 나면 세월호 유가족들을 폭도들로 매도하려는 종편과 신문들을 보라. 게스트하우스에서 뒤늦게 <순이삼촌>이라는 중편소설 한 편 읽고 흥분해 제꺼덕 이런 글을 휴대폰으로 꾹꾹 눌러 쓰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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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PT 준비로 한참 바쁠 인터넷 서점을 통해 살만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 샀다. 그의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라고 쓰면 매우 폼나겠으나, 사실은 하권까지 읽다가 말았다). 바빠서 책을 읽다가 마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런데 도중에 한 번 덮은 책은 다시 읽기가 참 힘들다. 그러면서 새 책에 대한 유혹은 끊임없이 들어온다. 사는 게 다 이렇다. 이 책도 사실은 여기저기서 워낙 제목을 많이 들어봤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읽어보리라 오래 전부터 다짐하고 있던 작품이었다. 


소설 시작 전에 작가가 25년만에 다시 쓴 서문이 나오는데 거기서 작가는 제목을 정할 때 ‘자정의 아이들(Children of Midnight)’은 너무 진부했고 ‘한밤의 아이들(Midnight’s Children)이 좋은 제목이었다,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글이 잘 써졌다고 고백한다. 나로서는 그 두 제목이 어떻게 진부하거나 그렇지 않은지 아직은 잘 모르겠으니 책을 완독한 후에 이유를 찾아봐야겠다. 지금 현재 110페이지를 조금 넘게 읽었다. 권당 500페이지에 가까우니 이제 한 십분의 일을 읽은 셈이다. 


젊은 시절 런던의 ‘오길비 앤 매더’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한 적도 있는 살만 루시디는 매력적인 작가다. 이 책 역시 [무어의 마지막 한숨처럼]처럼 거침없고 끈적끈적 유연한 말과 글의 향연이 ‘전설따라 삼천리’처럼 구비구비 펼쳐진다. 이야기의 시작은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는 날 자정에 태어난 살림 시나이라는 남자애부터다. 일단은 그 이유로 ‘한밤의 아이들’이다. 


그런데 소설의 화자인 살림은 자기 얘기가 아니라 그 옛날 독일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인도로 돌아온 자신의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 때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어릴적부터 아담의 나이 많은 친구이자 수다장이인 뱃사공 타이를 등장시켜 시공간을 가르는 각종 ‘구라’들을 끝도 없이 펼치게 한다. 아담 할아버지가 구멍 뚫린 침대보를 사이에 두고 진찰(다 큰 여자가 남자에게 처녀가 함부로 몸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을 계속 하던 부잣집 처녀와 결혼하게 되는 얘기를 시작으로 영국의 식민과 독립을 향한 인도의 정치상황까지 별의 별 이전 얘기를 붙들고 국을 끓이고 있으니까 옆에서 보고 있던 그의 아내 파드마가 와서 “이런 속도로 가다간 당신 탄생에 대해 얘기하기도 전에 이백 살이 돼버리겠어요.”라고 투덜대기까지 한다. 마치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서 작자인 밀란 쿤데라가 나와 “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제목을 잘못 정했어. 사실은 이 책의 제목으로 썼어야 하는 건데.”라고 투덜대는 것만큼 재미있다. 



이 책을 사기 전에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이라는 노르웨이의 추리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작품인데 구성이 치밀하고 짧고 재빠른 대사들도 멋지다. 해리 홀레라는 연쇄살인 전문형사반장을 등장시켰는데 살인에 대한 묘사와 흥미로운 캐릭터 등등이 빛을 발하고 소설 곳곳에 영화나 음악에 대한 통찰력까지 번뜩인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데니스 호퍼의 [뒤로가는 남과 여]라는 영화에 대해 언급할 때는 너무 반가워 혼자 소리를 지를 지경이었다. 이 소설의 작가인 요네스 뵈는 노르웨이의 국민작가이자 뮤지션이고 저널리스트이며 경제학자란다. 도대체 잘난 놈들이 너무 많아서 살 수가 없다. 어쨌든 구정 시즌을 이용해 이 책에 대한 리뷰도 좀 써봐야겠다. 그러나 일단 살만 루시디의 책이 먼저다. 술과 TV, 잠, 영화 등등 여기저기 ‘치즈 인 더 트랩’처럼 유혹이 널려있는 연휴다. 과연 나는 이 역경을 딛고 [한밤의 아이들]이란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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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인 박연준과 시인이자 인문학 저술가인  장석주는 이십오 년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 커플이다.  따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그냥 동거에 들어갔던 이 커플이 며칠 전인 2015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결혼기념일로 정하고 결혼 서약 대신 냈다는 책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읽었다.


이 책은 작년에 호주 시드니에 사는 지인이 한 달 간 집을 비우게 되었으니 두 시람에게 와서 살아보라고 했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집이 한 달간 비니 그동안 와서 우리가 쓰던 집과 방과 이불과 숟가락 젓가락을 마음대로 써도 무방하다고 한 사람도 대단하지만, 지인이 살러 오랬다고 냅다 서교동 집을 한 달이나 비우고 날아갈 수 있는 두 남녀도 대단히 부러운 인생이다. 그리고 이걸 책으로 엮어 결혼 서약 대신 내게 한 기획자이자 시인인 김민정 역시 멋진 사람이다.


제목인 '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라는 문장은 박연준이 쓴 앞부분의 챕터 ‘첫날’이라는 글 속에 들어 있다. 이 책은 반쯤 나눠서 앞 부분은 박연준이 쓰고 뒷부분은 장석주가 쓰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이지만 평이하고 살뜰한 문장을 구사하는 박연준의 글이 미셀러니에 가깝다면 보다 개념적이고 인문학적인 글쓰기를 지향하는 장석주의 글은 에세이스럽다. 



나는 두 주인공이 시드니에서 마주친 월요일의 운동장 모습에서 눈이 멈췄다. 장 본 물건들을 들고 걸어오던 두 사람은 잔디가 깔린 넓은 운동장 벤치에 짐을 부리고 앉아서 쉬고 있었는데 운동장엔 한 남자가 부메랑을 던지며 놀고 있었고 그 옆엔 여자 아이가 혼자서 농구공을 튕기며 놀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 부메랑을 던지며 놀던 남자는 타인과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의심 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는데 ‘월요일인데 저렇게 평화로워도 되는 것일까?’ 라고 놀라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오히려 바쁘게 살아야만 정당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표상이기도 하다. 


애초에 장석주는 오랫동안 혼자 잠들고, 혼지 잠 깨고, 혼자 걸어다니는 '1인분의 고독'에 피가 길들여 있던  사람이었는데, 박연준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삶에 들어옴으로써 ‘2인분의 고독’을 덥썩 받아 품기로 한 사람이라 고백한다.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사는 과정을 '고독이라는 공통분모로 묶다니, 이는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더 게으르고 더 형이상학적인 취향을 누리고 살았던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사람조차도 시드니 교외 주택에서 보낸 한 달의 시간은 '심심함을 품은 시간들'이라며 그 소중함을 다시 반추하고 있다. 요즘 세상에 심심함을 품은 시간들이라니. 베란다에 의자를 내놓고 햇볕을 쬐고 책을 읽으며 한가롭게 보낸 시간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부러웠던 것은 바로 이 장면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결혼서약을 대신하는 의미로 두 남녀가 쓴 에세이라는 멋진 포장을 하고 있지만 내용은 한 달 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햇볕을 쬐고 포도주를 마시며 논 이야기다. 심심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뒤쳐짐에 대한 염려나 늙음에 대한 안달도 내려놓은 채 진짜 ‘심심하게’ 지낸 부러운 시간의 기록들. 에필로그에서 장석주는 그가 누렸던 심심함을 이렇게 찬양한다.


심심한 시간은 그냥 심심하기만 한 게 아니다. 심심함 속에서 잊었던 것들이 되살아나고, 사라진 것들이 부활한다. 심심한 시간들은 죽은 것들을 되살리고, 잃었던 것들을 다시 돌려주며 감미로운 감각들을 맛보도록 했다. 시드니의 유칼리투스 숲과 공원들, 푸르름에 물든 하늘과 바다, 청명한 날씨들, 롱블랙 커피, 달링 하버를 걷던 시간들, 우리를 환대했던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하자.



나는 겨울이면 가끔 눈 쌓인 산장에 갖혀 지내는 상상을 한다.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덫>에 나오는 그런 산장처럼 아무도 오지 못하는 그 곳. 거기서 무얼 할까. 핸드폰도 TV도 단절이다. 오늘 내일이 지나야 사람들이 쌓힌 눈을 뚫고 나타날 것이다. 긴긴 겨울밤. 밖엔 옅은 눈보라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벽난로 안의 장작불은 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다...아, 회의를 하러 가야 할 시간이다. 여기는 회사. 화요일 밤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죄다 자리에 앉아 회의를 준비하거나 일을 하고 있다. 논현동에 눈내리는 산장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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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에쁜고 젊은 얼굴과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마흔세 살의 히사코.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이자 두 고등학생 아이의 엄마인 남부러울 게 없는 그녀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사진을 찍으러 밖으로 나가자는 남편의 제안이 영 달갑지 않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면 벌어지는 가벼운 실랑이지만 이번에는 아이들이 둘 다 스키 캠프로 떠난 참이라 처음으로 둘 뿐인 사진 나들이인 것이다. 알 수 가 없다. 늘 자신을 사랑해주고 장모님까지 극진하게 모시는 ‘굿보이’지만 정작 그녀는 한 번도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녀의 가슴 속엔 이십 년 전 파리 유학시절에 잠깐 함께 살았던 남자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몽마르뜨 언덕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보잘 것 없는 화가 지망생이었다. 지나간 사랑은 언제나 아름다움으로만 남는 법. 히사코는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 사진 취미도 포기하고 사업에 매진했던 남편의 사랑이 오히려 버겁기만 하다. 그리고 자신을 렌즈에 담으려는 남편의 성의가 부담스럽다.


삼각대를 세운 남편이 무심코 마로니에 얘기를 꺼냈을 때 그녀는 이미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사진을 찍히지 않으려 렌즈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히사코에게 “뒷모습도 괜찮지만”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기어코 눈물을 터뜨린다. 지난 이십 년 간 단 한 번도 남편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고 거짓말로 살아온 자신이 미워서다. 히사코는 남편에게 말한다. 나 할 얘기가 있어요. 무슨 얘기라도 다 들어준다고 약속해 줄래요? 그래,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무슨 얘길 하든 어머니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또 내게도 변함없는 차코(히사코의 애칭)로 남는다고 약속해줘. 알았어요. 나 처녀 시절 파리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당신을 만났을 때 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어요. 아이를 지우고 당신과 결혼했지만 그 후로도 이십 년 간 그 사람만을 그리워하며 살아왔어요.


그러나 바보처럼 모든 걸 이해하고 안타깝게만 받아들이며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하는 남편을 보며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 세상에서 제일 믿고 있는 이 남자를 믿는 것만큼 사랑하고 싶습니다. 부디 제게 그런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다. 그들이 접어든 초상화 거리에서 이십 년 전 그 남자를 만난 것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 얼굴이 변해도 화풍만은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녀는 예전에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다. ‘초상화 오 분 완성’이라는 안내문을 사이에 두고 단박에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 커피를 사러 갔던 남편은 두 남녀의 표정과 대화를 통해 이십 년 전 그 남자임을 직감하고 말한다. “와이프인데 잘 부탁해요. 오 분 이상 걸려도 좋으니까 젊게 그려주세요.”


신기하게도 그가 그린 초상화는 마흔세 살의 히사코가 아니라 스물세 살의 히사코다. 단박에 이십 년을 가로지르는 슬픈 만남이다. 그러나 기적 같은 일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에나 가능한 이야기랄까. 남편은 남자에게 자기 아내와 식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자신은 커피를 마시고 있겠다며. 눈물겹고 신파스러운 배려다. 그러나 그 부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남자가 질척거리지 않고 그림값 이천 엔을 요구하더니 미련 없이 일어섰기 때문이다. 남자가 사라지고 다시 사진을 찍는 두 사람. 이번엔 히사코가 촬영에 아주 협조적이다. 히사코가 남편에게 부탁을 한다. 방금 받은 그림과 남편이 오늘 찍은 사진을 사무실에 나란히 걸어 달라고. 스물세 살의 히사코는 마흔세 살의 히사코를 결코 이길 수 없을 거라며. 이젠 아무 것도 거리킬 것이 없다. 거리에서 남편의 입, 볼, 턱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입을 맞추는 히사코. 바보 같이 이십 년이나 걸려 남편에 대한 사랑을 찾았다. 마침 크리스마스의 일이다. 아시다시피 크리스마스 이브는 매우 특별한 날이니까.



아사다 지로의 소설은 신파스럽고 복고적이지만 스토리텔링의 균형감각은 세계 최고다. 나는 세상이 가끔 살벌하게 느껴지거나 따스함이 그리워질 때 그의 단편을 하나씩 꺼내 읽는다. 그의 <수국꽃 정사>를 처음 읽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리면서도 좋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샐러리맨 같은 무사 이야기를 다룬 눈물나는 장편소설 <칼의 지다>를 읽은 뒤 완전 그의 팬이 되어버렸다. 우리나라 영화 <파이란>의 원작자도 아사다 지로다(원작은 <러브레터>). 그의 글은 어떤 소재를 다루든지 쉽게 읽힌다는 게 특징이다. 그러나 쉽게 읽히는 글을 쓰는 작가라고 무시하지 말자. 스티븐 킹이 대중작가라고 무시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모두 스티븐 킹에게 무릎을 끓었다. 서점에 나가 베스트셀러들을 잠깐 살펴면 이건 나도 쓰겠다, 싶은 어이 없을 정도로 쉽고 얄팍한 책들이 많을 것이다. 그걸 보고 한심한 세태니 인스턴트 시대라 그렇다느니 한숨 쉬며  탄식하는 건 자유다. 그러나 쉽게 읽힌다고 아무 책이나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아니다. 책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없으면 절대로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을 모르면 쉽게 쓰는 것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역시, 결론은 어이 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쉬운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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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광고계 친구들과 신사동에 있는 대창집에서(그러고보니 이 대창집 주인도 카피라이터 출신이다)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원래 술 마시면서 일 얘기는 잘 안 하는 게 우리들의 불문율이었는데 어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창구이에 소맥을 마시면서 광고 얘기를 제법 했다. 

“야, 광고엔 정답이 어딨냐. 그저 용기가 필요한 거지."
“그래. 광고도 여자도 다 용기야. 늘 용기 있는 놈이 먼저 먹는 거야...” 

다소 거친 표현이고 또 가정이 있는 몸이라 누가 이런 소리를 지껄였는지는 밝힐 수가 없다. 아무튼 뭐든 너무 범생이처럼 접근해서는 빅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건 우리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이미 엄청나게 성공한 선배 광고인이자 [겁나게 중요한 충고]라는 책의 저자인 조지 로이스 할아버지도 수십 년 전부터 똑같은 주장을 해왔다. 


조지 로이스(‘루이스’가 아니다)는 ‘빅 아이디어 광고’의 창시자라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이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그림에 그치지 않았다. 좋은 광고를 만들고 싶다는 아트 디렉터들에게는 '카피부터 시작하라’라고 충고하고 실제로 위대한 광고를 만든 아트 디렉터들 중에는 카피까지 직접 쓴 사례가 있음을 강조한다. 즉, 직종과 상관없이 그림으로 생각하든 글로 생각하든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것이 없고 항상 '관습을 깨뜨리는 독창적이고 과감한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한국전쟁에서 돌아와 일주일만에 CBS텔레비전에서 일자리를 구했을 때의 일화(33화 당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라!)는 그런 그의 스타일을 잘 말해준다. 방송국의 까마득한 디자이너 선배에게 보여줄 첫번째 디자인 시안을 들고 갔는데 정작 그 선배는 책상에서 자기 일에 골몰하느라 조지는 쳐다보지도 않더라는 것이다(미국에서도 신참자에 대한 선배들의 무시는 유구한 전통이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선배가 알고 있고 심지어 헛기침을 해도 돌아보지 않는 데 화가 난 조지는 밖에 나가 비서가 보고 있던 두꺼운 사전을 빌려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선배 책상에서 1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가슴 높이에서부터 사전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고 한다. 엄청난 소리에 놀란 선배는 그제서야 연필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들며 “오, 조지. 뭘 도와줄까?”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조지는 그 선배의 아내에게서 축하 전화까지 받았다고 한다. 전설 같은 이야기다. 






조지 로이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최악의 슬로건은 “조지, 늘 조심해!”였다고 말한다. 크리에이티브에 있어서 조심스럽다는 것은 똑같거나 평범해지는 지름길이며 결국 그 광고는 묻혀버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가 만든 광고 중 무하마드 알리를 순교자 성 세바스찬처럼 표현한 에스콰이어 표지는 이미 전설이 되었다. 그는 인종차별이나 반전 등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위해서 그의 크리에이티브를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후배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종용한다. 그리고 남들이 안 될 거라고 하는 말에 전혀 신경 쓰지 말라고도 충고한다. 이는 마치 어려운 일 앞에서 “해보기는 했어?”라고 물었다던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도 궤를 같이 하는 말이다.




‘나는 MTV를 원해’라는 캠페인에 주변 사람들이 회의적이었을 때 그는 영국에 있는 믹 재거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MTV를 원해!”를 외치게 만들었고, 억울하게 300년형을 선고받은 허리케인 카터를 구하기 위해서는 밥 딜런을 찾아가 딜런에게 ‘허리케인’이라는 노래를 만들고 내친김에 콘서트까지 열게 했다. 밥 딜런은 이 곡을 가지고 ‘허리케인의 밤’이란 콘서트를 두 번이나 열었는데 한 번은 놀랍게도 감방 안이었고 두 번째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게 “만약에…어떻게 될까?”라는 순진무구한 생각을 도중에 접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간 덕분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책에 담겨 있는 120 개의 충고 내내 잘난척을 삼가지 않는 조지 로이스 할아버지, 하지만 그는 정말 잘난척 할 만하다. 트렌드를 쫒아가는 것은 덫에 빠지는 일이며 ‘안전’은 죽음을 뜻한다고 외치는 그에게서 특히 존경스러운 점은 많은 광고인들에게 "왜 그냥 크리에이터로 남으려고 하느냐, 문화 선동가가 될 수도 있는데!”라고 선동한다는 점이다. 이천 년 전 소크라테스도 젊은이들에게 비슷한 소릴 하다가 독배를 받았지만 현대의 선동가 조지 로이스는 여든 살이 넘은 지금도 팔팔하게 살아서 현역 광고인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를 마구 던지고 있는 것이다. 


원제가 'Damn Good Advice'인 이 책은 아내가 출판기획자로 근무하는 세종서적에서 며칠 전 발간된 따끈따끈한 신작인데 난 기획자의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남들보다 먼저 이 책을 접하는 행운을 누렸다. 교정쇄로 받아본 책은 일단 내용이 너무 쉬우면서도 통쾌하고 흥미진진했다. 120 개의 충고들은 짤막짤막한 챕터로 이루어져 있어서 아무 데서나 펴보기도 좋았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 개인적 친분이 있는 카피라이터 정철 선배와 CF감독 백종열 실장님에게 짧은 추천사를 부탁했는데 다행히 두 분 모두 흔쾌히 추천사를 써주셨다. 고마운 분들이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나도 그들과 함께 추천사 한 줄을 뒷표지에 같이 올리게 되었다. 내가 쓴 추천사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나면 동료에겐 추천하지 않은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배운 걸 당장 그 사람들에게 써먹고 싶은 욕망에 먼저 시달리게 될 테니까. - 편성준(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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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의 역작 [쿨하게 생존하라]라는 책에서 제가 특히 좋아했던 부분은 ‘배드뉴스’에 대한 해석입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누구에게나 인생엔 굿뉴스와 배드뉴스가 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곡선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닥치는 굿뉴스와 배드뉴스. 우리는 그놈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요.


지금 저희 집사람에게 배드뉴스가 왔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길에서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뎠는데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그만 새끼발가락뼈가 부러진 것입니다. 다음 날 정형외과에 가서 응급처치로 반깁스를 했고 오는 화요일에는 다시 통깁스를 해야 합니다. 아내는 심란해 합니다. 발은 계속 부어오르고 제대로 걷지도, 씻지도 못합니다. 남편 밥을 차려주는 건 고사하고 당장 살림에 대한 이해력이 느려터진 남편에게 냉장고에 뭐가 어느 칸에 들어있는지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입이 아프고 심신이 지칩니다. 그리고 당장 다음 주부터 회사생활을 어떻게 해야할지도 걱정이 태산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기회에 병가를 내고 한 달간 새로운 시간을 가져볼 것을 권합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아내에겐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모양입니다. 당장 회사에서 한 달간 휴가를 내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고, 설사 휴가를 낼 수 있다 해도 무급휴가를 쓰면 그만큼 비게 되는 생활비도 걱정입니다. 더구나 요즘 회사 내에서 기획 실적이 그리 좋지 않아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 혹시 잘리는 건 아닐까 하는 소심한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난감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번 ‘배드뉴스’를 더 잘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사람 만나고 다니는 게 일인 아내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술을 마실 수 없고 급기야 차를 마시러 나가기도 당장은 어렵습니다. 반면에 그만큼 자신만의 시간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당분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라고. 집에서 혼자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멍때리며 공상에 잠길 수도 있습니다. 밀린 드라마나 TV프로그램을  첫회부터 마스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집으로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될 것입니다(어제만 해도 저희 집으로 두 분이 찾아오셔서 병문안 겸 업무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이유로 회사에서 잘린다고 하면 오히려 지금 잘리는 게 낫습니다.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는 아내의 실력을 판단하기엔 좀 이르다는 생각이 첫 번째 이유이고, 또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지 않고 당장의 성과만으로 결정을 내리는 곳이라면 차라리 지금 관두는 게 낫다는 게 두 번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도대체 회사에선 아무런 소리도 안 했는데 우린 왜 이러는 걸까요).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무수한 ‘배드뉴스’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젊었을 때 정말 좋은 여자와도 어이없는 바보짓을 하는 바람에 헤어져 봤고 회사도 열 번 가까이 그만둬 봤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특유의 뻔뻔함과 성실함으로 위기를 버텨왔습니다. 인복도 많았습니다. 정말 결정적일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나타나 저를 도와주었으니까요. 길은 있습니다. 대책이 안 설 때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낙관론을 불러오면 됩니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리 절망적이거나 가시밭길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내도 저도 [쿨하게 생존하라]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혜자야, 걱정 하지 마. 일단 더 안 다치고 그만 하길 얼마나 다행이야. 그리고 이번 일 때문에 더 좋은 일이, 더 좋은 기회가 반드시 올 거야.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일단 좀 쉬어. 남들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정신 가다듬을 계기가 없다고 ‘차라리 감방에 들어앉아서라도 책을 읽고싶다’고 하는 마당에 이런 기회가 왔으니 오히려 얼마나 좋아. 남편이 좀 더 열심히 일할 테니 생활비 걱정 말고 정당하게 이 기간을 마음가는대로 잘 요리해 봐. 배드뉴스는 똑똑하고 긍정적인 태도 앞에서는 언제라도 굿뉴스로 변하는 거니까. 안 그래?"







https://www.youtube.com/watch?v=h3ETX6Pv2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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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06192049365



칼럼을 쓴 조운찬 소장처럼 저도 이만수 감독의 독서목록에 감탄했지만 그보다 더 놀랐던 것은 명창 안숙선 선생이었습니다. 국악인이면 창 연습이나 하고 판소리 대사나 반복해서 외우겠지, 라는 저의 안일한 생각을 단숨에 깨부수는 깊이 있는 리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위고의 '장발장'(레 미제라블)과 고전 '춘향가', 그리고 한운사의 '대야망' 등에 대한 해석은 통찰력이 대단합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 중요한 게 깊이 읽는 것이란 점을 깨닫게 해주는 분들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222242325&code=960205&s_code=ac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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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신경숙 표절 사건'에 관해 창비가 언론사에 보내왔다는 글의 전문을 읽었습니다. 


글은 어이없게도 신경숙이 표절한 것으로 알려진 미시마 유키오가 극우 인사이고 할복자살을 한 문제적 작가라는 점부터 거론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신경숙이 쓴  단편 <전설>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뛰어난 작품으로,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의 작가가 쓴 거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직핍한 현장감과 묘사가 뛰어나고 인간의 근원적인 사랑과 전쟁 중에서의 인간 존재의 의미, 인연과 관계의 유전 등을 솜씨있게 다룬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부분 - 


'사실 두 작품의 유사성을 비교하기가 아주 어렵다. 유사한 점이라곤 신혼부부가 등장한다는 정도이다. 또한 선남선녀의 결혼과 신혼 때 벌어질 수 있는, 성애에 눈뜨는 장면 묘사는 일상적인 소재인데다가 작품 전체를 좌우할 독창적인 묘사도 아니다.(문장 자체나 앞뒤 맥락을 고려해 굳이 따진다면 오히려 신경숙 작가의 음악과 결부된 묘사가 더 비교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 또한 인용 장면들은 두 작품 공히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따라서 해당 장면의 몇몇 문장에서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를 근거로 표절 운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표절시비에서 다투게 되는 ‘포괄적 비문헌적 유사성’이나 ‘부분적 문헌적 유사성’을 가지고 따지더라고 표절로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는 것이다'


라는 황당한 단락입니다. 



표절을 한 것은 아니나 굳이 표절을 했다고 치고 따져보더라도 표절작이 원작보다 더 낫더라,라는 정말 어이 없는 자가당착을 드러냅니다(이거 쓴 사람 정말 창비 맞습니까). 그리고 표절 부분이 아주 지엽적인 내용들이라 작품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표절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논리를 피력합니다. 마치 백만 원 있는 사람한테 만 원 꾼 다음에 너 돈 많으니 만 원 정도 없어도 살지? 그러니 난 만 원 안 꾼거다, 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심뽀죠? 아, 어떡하나. 혹시라도 박근혜 대통령이 이걸 아시면 화끈하게 해경 해체할 때처럼 당장 출판사 창비를 해체부터 하려 드실텐데. 어쩌려고 이러셨어요. 



그리고 신경숙 작가님.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당신을 찾는 전화벨이 끝없이 울릴 겁니다. 기차가 몇 시에 떠나는지는 모르지만 부디 놓치지 말고 막차라도 타시기 바랍니다. 한국문학에서 당신이 있던 자리가 어디 풍금이 있던 자리에 비하겠습니까. 그리고 제발 잘 기억해 보십시오.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은 당신이 유일하게 읽었다던 그의 작품 <금각사>와 같은 책에 수록되어 있으니까요. 아무리 인터스텔라만큼 종횡무진 우주공간을 패럴렐로 엮어도 읽지 않고서는 그렇게 비슷하게 못씁니다.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진짜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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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등을 쓴 위대한 소설가지만 동시에 [소설의 기술], [커튼] 등을 쓴 뛰어난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같은 사람이 썼더라도 소설과 에세이는 다르다. 그래서 그가 에세이에서 밝혀놓은 개인적 체험들과 소설 작법, 그리고 사람과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통찰과 유머 등이 소설에서는 과연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읽는 것은 그의 책들을 더욱 즐겁고 고급하게 즐기는 또다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소설이 2차원의 영역이라면 영화는 분명 3차원의 영역일 텐데 그가 쓴 소설은 영화화되면서([프라하의 봄]이라는 멋진 영화를 물론 좋아하지만) 오히려 그  입체감이 사라지고 이미지와 캐릭터만 강렬하게 남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건 아마 아직도 소설이라는 장르만이, 또는 소설가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역설하는 증거가 아닐까. 조지수의 장편 [나스타샤]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누군가가 잘못 영화화 하기라도 한다면 캐나다의 광활한 풍광과 조지와 나스타샤의 사랑 이야기만 덩그라니 남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나스타샤]를 쓴 소설가 조지수는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조중걸의 필명이다. 서양철학사와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학자이며 이미 우리집 책꽂이에도 여러 권의 저서가 있는 일급 에세이스트지만 작년에 아내의 권유로 사놓았던 이 소설책은 분량이 너무 많고 또 앞부분의 문장들이 좀 딱딱해 보여 몇 페이지 읽다가 덮은 뒤로 그동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5월 초 회사 일이 좀 한가해진 틈에 우연히 펼치는 바람에 그야말로 며칠동안 ‘푹 빠져’ 읽게 되었다. 


이야기는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니다가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현재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는 33세쯤의 조지라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캐나다 웰드릭이라는 도시에서 호의적인 친구들과 어울려 생활하고 있는 이 남자는 강의 준비와 저술 활동 이외에는 주로 플라잉 낚시를 즐기는 데 거의 모든 돈과 시간을 쓰는 바람 같은 자유인이다. 낚시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행위이자 생활이다. 왜냐하면 플라잉 낚시는 그저 물고기를 낚는 것 이상으로 그들의 삶에 의미를 주고 저마다에게 영감을 주는 철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낚시에 대한 묘사와 보트, 그들의 커티지, 심지어 자비를 들여 낚시터에 건설하는 작은 수력발전소 등에 대한 글들을 반복적으로 읽다보면 누구나 당장 캐나다로 달려가 광활한 호수변에 서고싶은 충동이 일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면 어떤 시퀀스의 연속으로 이해하기 쉽다. 우연히 주인공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고 갈등구조와 위기를 겪다가 결국 결말로 치닿게 되는 담백하고 전형적인 플롯 말이다. 그러나 소설가의 성향과 역량에 따라 그 구조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다. 철학자 김용규가 쓴 [알도와 떠도는 사원]을 보라. 이 소설은 과학자인 아빠를 찾아 나서는 알도의 모험담임과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철학적 개념과 심리학적 고찰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놓은 지식의 라이브러리다. 조지수의 소설 또한 자칫 줄거리만 놓고 보면 꽤 단순한 외국 체류 경험담이나 좀 특이한 사랑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심지어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나스타샤’라는 여인의 등장도 무려 200페이지가 넘어서야 시작된다. 그러나 그 큰 이야기 기둥 사이로 펼쳐지는 작가의 눈부신 철학적 사유와 통찰력 있는 담론들은 이 소설을 아주 풍부하고도 탄탄한 교양서이자 지적 모험담으로 만들어 준다. 


나는 특히 저자의 간결하고 단호한 문체와 정치적 올바름에 반하게 되었다. 여기서 얘기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은 진보나 보수 또는 어떤 특정 정당을 지지하느냐 하는 따위의 좁은 개념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인류학적 관점으로 모든 현상을 공평하게 보려 노력하면서도 사안별로 그때마다 분명하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낚시터로 향하는 고속도로 중간 매번 들르는 케빈의 커피숍에서 나스타샤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여인을 만난 조지는 설명할 수 없는 측인지심에 이끌려 그녀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오게 되고 곧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나스타샤는 분리독립주의자인 남편을 돕다가 러시아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과 폭력에 시달린 뒤 빈털터리로 탈출한 여인이었는데 선량한 커피숍 주인 케빈이 점원으로 채용했던 것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가만히 서있기조차 힘들었던 그녀는 조지의 도움으로 웰드릭 주민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견뎌내며 차츰 건강을 되찾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고국 어딘가에 살아있을지 죽었을지조차 모르는 남편 보리스와 아들 아니카가 있다. 



30대 초반의 토론토 대학교수, 어린 시절의 유학, 그리고 낚시와 강의, 저술활동에 이르기까지 이 이야기는 작가의 자전적 스토리임이 거의 확실하다. 구체적인 사건들 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작가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래서 소설 곳곳에선 교육, 인종차별은 물론 역사, 성공, 사랑, 품위, 고결함 등에 대한 생각들이 거의 소설가의 육성 그대로 흘러 나온다.  또한 그동안 인류가 만들어놓은 철학과 예술에 대한 가치와 그것을 즐기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조지는 나타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셰익스피어와 헤밍웨이를 읽게 하고 더 나아가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포크너를 읽는 행복을 누리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오페라를 본 사람과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도 설명해 준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행복한 시절이다. 선천적으로 총명하고 밝은 나스타샤는 조지가 그려주는 지도대로 새로운 삶을 부지런히 찾아가지만 운명이 예고해 놓은 비극까지 피해가지는 못한다. 



조숙한 수학 천재였으며 여호와의 증인인 동료 교수 그렉, 억만장자이자 허영 덩어리인 유태인 변호사 매튜, 조지의 아이디어로 지렁이 재배에 성공해 큰 부자가 된 뒤 등을 돌리는 김유진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 각각의 이야기를 읽는 맛도 각별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나스타샤와의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지 않는 조지는 눈물을 머금고 그녀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깊은 시름에 빠져 알콜중독자가 된다. 


어떤 인생도 늘 행복할 수 없으며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소설가 조지수는 인생엔 목적이 없고 과정만 존재한다고까지 말한다. 삶은 허무하지만 그것이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며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이라는 그의 생각은 산문집 [One Man’s Dog]에도 잘 나타나 있다. 



무려 719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이다. 책을 읽으며 많은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 표시를 했고 밑줄을 그어야 했다.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문장을 다시 읽겠다는 나와의 약속이다. 결국 나스타샤는 자살하고 조지도 슬쓸하게 과거를 회상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들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성장했음을 무언 중에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이건 사랑 이야기를 통해 펼쳐진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긴긴 이야기 끝에 그 성장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혼자 새벽안개를 맞는 것처럼 알싸한 뿌듯함을 안겨준다. 


누군가가 '네가 읽은 책 중에 정말 신나게 재미있게 읽은 현대소설 몇 권만 얘기해 봐'라고 하면 나는 그동안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과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그리고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또는 [인생],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영화처럼], 레이먼드 카바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을 비롯해 윤대녕, 김훈, 배명훈의 몇몇 단편과 중편들을 추천했었다. 이제 그 목록에 하나를 더 얹어야겠다.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 조지수의 소설 [나스타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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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자기계발업계에서 '아침형 인간'이 크게 우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침 시간을 잘 활용하더라는 이론이었는데 그건 나처럼 잠이 많고, 특히 아침잠이 많은 인간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렇다고 야밤에 일을 잘 하는 스타일도 아닌 나는 그저 '느즈막히 일어나 최선을 다 하다가 해 지면 술 마시고 놀아야 하는 거 아닌가?' 정도의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던 터라 일찌감치 성공을 포기해야만 했다.


다행히 뜨겁던 '어얼리 버드' 열풍도 지나가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든 늦게 일어나든 신자유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누구나 성공하기 힘들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도래함으로써 나 같은 사람이 오히려 희망을 품고 살아가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되었다.

라이프 코치 조정화가 쓴 [휴대폰 소녀 밈의 시간의 발견]은 어얼리 버드 열풍 이후 지금까지 여러 번 등장했던 시간 활용법에 대해 새로운 힌트를 제공하는 탄탄한 에세이다.

우선 반가운 것이 이 책은 '억지로 관리할 필요가 없는 시간관리법’을 표방한다는 사실이다. 즉, 정색을 하고 인생을 바꾸거나 할 필요 없이 시간을 관리할 수 있다는 뜻인데, 조금 더 책 안으로 들어가 보자.


사실 하루 24시간 중 우리가 정말로 일에 쓰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직장이나 학교까지 가는 데 한 시간 남짓을 사용하고 자기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거나 업무를 볼 때도 일과 관계없는 인터넷 서핑이나 휴대폰 사용, 메신저 대화 등등으로 호시탐탐 방해를 받다보면 어느덧 점심시간, 퇴근시간이 되기 일쑤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모자란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지은이는 일단 '시간의 상대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님과의 한 시간은 쏜살 같이 지나가지만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무간지옥처럼 길게만 느껴지는 원리 말이다. 지은이는 최신 영화 [인터스텔라]까지 예로 들며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척'만 하는 우리들의 생활습관 또한 매섭게 지적한다. '멀티태스킹'이 그 예이다. 철학자 한병철도 얘기했듯이 현대인은 멀티태스킹과 어울리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매스미디어의 발달 등으로 인해 한꺼번에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 결과 어떤 한 가지에 몰입하기는 더 힘들어진 것이다.

이 책은 멀티 태스킹에서 싱글 테스킹으로 가는 아주 구체적인 방법, 예를 들면 '불필요한 외부 정보를 차단한다', '자기만의 공간을 정한다', '반복적으로 연습한다' 등을 정확하게 조언해준다. 똑같은 시간이라도 몰입을 잘 하는 사람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왜 한 가지 목표에만 끝까지 매달리면 안 되는지,혼자 있을 때 뭘 해보면 좋은지 등등도 페이지마다 깨알 같은 실제 정보를 통해 전해준다. 이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처럼 애매하게 개인을 추궁하다 잠깐 위로하는 척하고 마는 슈퍼 베스트셀러들보다 나은 이 책의 미덕이다.


에우리피데스, 아우구스티누스, 벤저민 프랭클린, 허레이쇼 넬슨, J.P 모건, 장 폴 싸르트르, 톨스토이…등등 이 책에는 시간과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들려주는위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철학자 한병철, 강신주,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 등도 기꺼이 출연해서 쓸모있는 통찰들을 들려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름난 사람들이 남긴 말들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문학적 주제와 상통하기 마련인데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정화는 우리가 시간에 끌려다니면 시간의 노예가 되지만 시간의 주인이 되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노라고 단언하다. 그리고 '시간관리를 잘 하는 사람은 미래를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를 잘 사는 사람'이라는 통찰력 있는 결론을 내놓는다.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그런데 성공에 대한 갈망이 클수록 조급증을 낳게 되고 또 매순간 남과 비교됨으로써 끊임없이 시간에 쫓기게 되는 악순환을 낳는다. 그리고 성공을 이루어야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비극이다.

[휴대폰 소녀 밈의 시간의 발견]은 뜬구름 잡는 형이상학적 문장이나 간지러운 메타포 대신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들을 짧게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고마운 책이다. 특히 매 챕터마다 등장하는 휴대폰 소녀 ‘밈’ 의 활약이 크다. 밈은 SNS를 통해 유명해진 캐릭터인데 24시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휴대폰 중독자다. 어찌보면 이 책의 주제인 시간관리에 역행하는 대표적인 인물인 셈인데, 이 아이가 보여주는 짧은 만화 속 행태들이 영락없이 현대 젊은이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휴대폰 배터리가 떨어지면 공포심을 느끼고 액정이 깨지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이. 왠지 하루 종일 휴대폰 속에 빠져 사는 현재 대한민국 도시인들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는가.


내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이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 백날 묻고 다녀봤자 속시원히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이렇게 유용한 '참고서' 하나 읽어보는 것은 어떨는지. 내가 이 책을 통독하고 느낀 점을 한 줄로 요약해 보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간을 잘 다루는 사람이 삶의 주인이다'

한 권 사서 휘리릭 읽고 친구에게 줘도 좋고 한 권 더 사서 들고 다니다 생각날 때마다 펼쳐봐도 좋은 책이다. 혹시 책을 읽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 책은 사랑 받을 가능성이 크다. 휴대폰 소녀 밈이 등장하는 만화 페이지만 대충 들춰보려고 펼쳤다가도 흥미롭고 공감가는 내용들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본문과 이어지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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