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나면 의례 혼자 짧은 산책을 나가곤 합니다.

예전엔 일행들이랑 식당 문을 나서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혼자 빠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니까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고 양치까지 한 뒤에 천천히 길을 나섭니다. 산책이라고 해 봤자 사무실 근처를 이십여 분 동안 느리게 한 바퀴 도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제겐 이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평화롭습니다.

산책은 그야말로 목적이 없는 행위이니까요. 빨리 걸을 필요도 없고 또 어디까지 꼭 갔다 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마음을 비우고 걸을 뿐입니다. 요즘처럼 바쁘고 효율성이 중요한 세상엔 이 무슨 한가한 소리냐. 시간을 아껴 정신 없이 일해도 모자랄 판에.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억지로 나선 길이 어디 진정한 산책이겠습니까. 밥 먹고 5분도 안 돼 책상에 앉아 일을 하면 능률이 올라가겠습니까.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설사 기계라고 해도 가끔은 엔진을 끄고 기름을 쳐야 합니다만.

저는 걷는 걸 참 좋아합니다. 마음이 답답해도 걷고 생각이 어지러워도 걷습니다. 몇 년 전 25년 간 피우던 줄담배를 단박에 끊을 때도 흡연욕구가 일 날 때마다 일어나 걸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도 밖으로 나가 30분씩 한 시간씩 무작정 걸어 다녔습니다.

매일 봐서 하나도 새로울 게 없는 골목길. 봄이면 꽃 피고 가을이면 낙엽 떨어지는 보도블럭 위.  그러나 그 길을 걷다 보면 머릿속은 단순해지고 길은 어느새 내 생각을 따라 움직이는 하얀 백지가 됩니다. 그 백지에 점 하나 찍어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단어나 문장 하나 써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냥 백지 상태죠. 당연합니다. 산책은 그런 거니까. 아르키메데스도 목욕탕에 들어갈 때마다 유레카를 외친 건 아니었잖아요.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요즘 들어 하는 생각입니다만 속담은 진리와 가장 맞닿아있는 멘션이 아닌가 합니다. 마음이 무거울수록 천천히 그러나 가볍게 걸으십시오. 보도블럭 하나하나의 무의미가 마음을 어루만지고 지나가야 새로운 게 보입니다. 바쁠수록 돌아가십시오. 그래야 비로소 사람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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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는 제목은

우리를 향한 엄중한 경고인지도 모릅니다

 

 

 

네이버에 이 영화의 제목을 치면 엉뚱하게도 ‘19이 뜨며 주민번호를 입력하라고 나옵니다. 아마 제목에서 풍기는 성인스러운느낌 때문인가 봅니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최초의 토키 영화 [재즈 싱어]에서 여가수의 노래에 환호하는 관객들을 보고 무대 사회자가 지금까지 본 건 아무 것도 아니고 다음 무대가 더 죽이니 기대하시라라는 뜻으로 한 말이랍니다.

 

이 작품은 [히로시마 내사랑] 등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만든 알랭 레네 감독의 신작입니다. 이 분은 무려 아흔 살이 넘었다는데 아직도 이렇게 영화를 만들고 있으니 참 대단한 노익장이죠?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씨입니까? 앙뜨완 감독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고인의 유언대로 귀하를 * *일 저녁 고인의 저택으로 초대하는 바입니다…”라는 똑같은 내용의 부고전화를 받는 장면으로 흥미롭게 시작합니다.

 

앙뜨완의 유언대로 배우들은 산꼭대기에 있는 저택으로 찾아오죠. 이 장면은 예전 헐리우드의 고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나 [바람에 쓰여진 편지]처럼 아주 고풍스럽고도 우아한 느낌으로 표현됩니다. 여기 모인 배우들은 모두 과거에 앙뜨완의 영화나 연극에 출연한 적이 있는 주연급들입니다. 며칠 전 사냥총으로 자살해 이미 화장까지 마쳤다는 감독 겸 극작가 앙뜨완은 죽기 전 오늘 모일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영상으로 미리 찍어놨습니다. 최근 한 극단으로부터 자신의 옛날 작품 '에우리디스' 리허설 영상을 받았는데 과연 이 극단에게 공연을 허락해도 되는지 당신들이 한 번 보고 판단해달라는 거죠.

 

리허설 영상에서는 아주 현대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느낌의 무대를 배경으로 젊은 배우들이 '에우리디스'를 연기합니다. 그런데 불이 꺼진 거실에서 이 영상을 보던 배우들은 어느 순간부터 젊은 배우들의 대사를 함께 치고 들어갑니다. 자신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것이죠. 이 장면은 참으로 멋집니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입술을 달싹거리던 배우들은 어느새 필름 속의 주인공으로 변하고 자연스럽게 같은 시대에 공연을 했던 배우들과 짝을 이뤄 연극 속의 연인이 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영화의 신비로움은 여기까지입니다. 전 영화를 보기 전 이동진 기자의 [언제나 영화처럼]에서 읽은 리뷰 때문에(너무나 훌륭한 작품입니다, 걸작입니다) 많은 기대를 하고 갔었지만, 이 장면 이후 반복되는 영상과 연극의 교차편집, 나아가 연극과 영화, 인생에 대한 본질적 외연 확대 등이 너무 뻔해서 그만 흥미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만듦새가 허술하다거나 연기의 질이 떨어지거나 하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계속 반복되는 형식 실험이 좀 지겹다고나 할까요?

 

 

상영관도 별로 없고 해서 피곤을 무릅쓰고 밤 930분 영화를 억지로 보고  11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와 TV를 켰더니 박근혜 후보의 대선후보 TV 단독토론이 방송되고 있더군요. 국민면접관 정진홍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아니, 화 안 나세요? 평소에 화를 어떻게 참으세요?”라는 아부성 질문을 던지지 제가 그 동안 참 별별 소릴 다 듣고 살았는데자꾸 듣다 보니까 내공이 쌓이더라구요그때마다 책을 읽었습니다. 명심보감, 정관정요뭐 이런 거근데 나중에 그게 다 제 게 되더라구요같은 차마 맨정신으론 하기 힘든 자화자찬을 듣고 있자니 그만 TV를 벽에서 떼어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만약에, 절대 그러면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박후보가 12 19일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된다면, 우린 그때부터 참으로 기가 막힌 말과 믿을 수 없는 장면들을 끊임없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굳이 그날 밤 이 영화를 찾아본 게 저 자신에게 보내는 무의식의 경고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선후보 'TV단독토론'이란 말이 웃긴다고? 아이고, 아직 멀었군.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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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지만 가끔 마주치게 되는 광고 동료 중에 큰일이야. 나 요즘 TV 연속극 뭐 하는지 하나도 몰라.”라는 말을 자랑처럼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자긴 요즘 TV를 너무 안 봐서 도대체 어떤 드라마가 유행하는지, 어떤 쇼 프로의 어떤 캐릭터가 인기를 끄는지 잘 모르고 한참 화제가 된 다음에야 뒤늦게 인터넷으로 겨우 확인을 한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만난 후배도 그랬습니다. 자긴 요즘 드라마 신의마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천만 관객이 들었다는 광해도 시간이 없어 못 봤으며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아직도 방영되고 있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자랑인가요? 그렇습니다. 알고 보면 지독한 자기 자랑입니다. ‘난 세속의 일엔 별 관심이 없이 고고하게 살고 있어라고 말하고 싶은, (그러면서 집에 가서는 일본드라마에 심취해있는) 고달픈 내면의 투영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고등학생이 와서 , 난 요즘 교과서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지 하나도 몰라요. 시험범위는 왜 맨날 그렇게 자주 바뀌는지. 헷갈려. 하하.”라고 한다면 과연 무슨 생각이 들까요? 아마 정신줄 놓고 사는 싹수가 노란 인생이라고 혀를 차게 될 것입니다. 광고인들에게 TV, 인터넷과 신문과 잡지 같은 각종 매체는 매일매일이 교과서이고 참고서입니다. ‘좋아, 싫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걸 다 챙겨 봐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적어도 안 본다고 자랑질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정치나 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난 정치에 관심이 없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일단 정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정신 산란하고 골치 아프다고 고개부터 내젓습니다. 자긴 박근혜와 문재인과 안철수가 하는 얘기가 다 거기서 거기고 다 똑 같은 거 같다고도 합니다. 어떻게 박근혜와 문재인과 안철수가 똑 같을까요? 그러면서 자세한 건 모른다고 단서를 답니다.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겁하고 쪼잔한 직무유기입니다.

 

유권자라면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공부를 하고 열심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정치인을 뽑는 건 자기와 자기 주변인들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죠.

 

민주주의라는 이 허점 많은 제도 아래 살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정치 행위는 몇 년에 한 번 하는 투표뿐입니다. 그래서 우린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투표는 나의 미래를 이롭게 하는 이기적인행위입니다. 그런데 나라의 미래를 망치고 자신들의 욕심 채우기 급급한 나쁜 정치인들일수록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유권자들을 몹시 사랑합니다. 오죽하면 말 많으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던 우리나라입니다. 우리가 후보자들을 보고 그 놈이 그 놈이라고 자포자기하는 순간, 그 놈도 그 놈이 되고 그 놈이 아닌 놈도 그 놈이 됩니다. 가치체계가 뒤죽박죽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 입이 찢어질까요? 뒤가 구리고 비전이 불분명한 정치인이 가장 반길 상황입니다. 그리고 유권자에겐 판단 근거가 없어지니 모든 게 허무한 일 대 일상황이 됩니다. (로또 1등의 당첨 확률은 1/8,145,060이지만 되느냐 안 되냐만 놓고 보면 1/2 확률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코미디언이자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민주주의는 졸라 불완전한 체제야. 제대로 하려면 대학생에겐 두 표씩 주고 아줌마들은 두세 집 묶어서 한 표씩 줘야 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웃자고 한 말이지만 투표의 맹점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투표라는 게 옛날 아테네에서처럼 단란한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선량한 아빠에게만 주어지는 권리라면 얼마나 쉬울까요? 그러나 단란한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선량한 아빠에게 한 표가 주어진다면 오늘 또 누구를 속여먹을까궁리하는 사기꾼에게도, ‘은행이나 털어 외국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몽상가에게도 한 표가 주어지는 게 국민투표의 룰인 것입니다. 진정 자기의 미래를 위해 일할 사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도 한 표, 난 아무 것도 모르겠고 그 놈이 그 놈 같으니 아무나 찍을래, 라고 하는 이에게도 한 표입니다.

 

 

TV뉴스에서 정치 얘기 나온다고 고개 돌리지 마십시오. 인터넷에서 연예인이나 요리법 모아놓은 파워 블로거만 찾아 다니지 마십시오. 정치에 관심을 갖는 건 우리의 미래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선거에서 이긴 사람이 5년 동안 우리의 월급과 집값과 세금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귀찮더라도 우리 일에 관심을 가집시다. 괜히 고상한 척 허무한 척 말고, 좀 이기적인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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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나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정답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잠정적으로 정답이라고,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면서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에 의해 내가 가진 정보의 양이 늘어나다 보면 분명히 어느 지점에선가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대화'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므로써 내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재미있는 작업입니다.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이라는 책을 읽다가요. 메모를 하고싶은 구절이 생겨서 오랫만에 만년필로 베끼고 나중에 제목을 달았더니 글씨들이 손에 닿아 번지고 난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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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중2 여학생의 부모는 학생지도카드에 희망대학을 서울대로, 장래희망은 국회의원으로 적었다고 한다. 소녀의 꿈은 스타일리스트였다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난 어제 교보문고에 가서 [피로사회]라는 책을 샀다. 그리고 그 얇은 책을 계속 읽지 못한 채 나오지 않는 아이디어를 쥐어짜고 있다. 피로사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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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병원에 있는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나니 이 시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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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막차 탄 기분으로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 를 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화 속 최익현을 보고 ‘우리 시대 가장들의 비애’를 느꼈다고 하던데, 그게 어디 가장들만의 문제겠습니까. 인간의 모습 자체가 그렇지 않나요.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누군가에게 줄을 대고, 허세를 부리다가 졸지에 역전 되기도 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말 그대로 쩝니다. 명불허전. 최민식은 최익현을 위해 몸까지 둔중하게 만든 듯하고 하정우도 절정의 연기력을 보여 주죠. 조연으로 나오는 조진웅, 곽도원 등 남자 배우들은 물론 기상캐스터 출신 김혜은의 모습도 깜찍하니 좋습니다.


끝까지 엎치락뒤치락하는 서사구조가 과잉스럽다는 느낌이 있고 러닝타임도 좀 길다 싶지만 힘 있는 내러티브에 디테일까지 잘게 신경 쓴 윤종빈의 연출에는 별 불만이 없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돌연 마음이 무거워지던군요. 뭔가 해야 할 일을 잔뜩 쌓아둔 일요일 저녁에 삶의 신산함을 다룬 컴컴한 영화를 봐서 그런 모양입니다. 뭐 그렇다고 주말에 늘 팝콘영화만 볼 순 없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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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침을 먹으러 국밥집에 들어갔다가 조선일보를 봤습니다. 요즘은 거의 보지 못하는 신문이라 반가운(?) 마음에 잠깐 들췄더니 '가정식백반' 이란 따뜻한 시가 실려 있더군요. 시인 윤제림의 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카피라이터 윤준호 선생의 시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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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남은 휴가를 긁어 모아 짧은 유럽 여행을(그것도 배낭여행이 아니라 폼 안 나게 여행사 패키지 상품으로) 갔다 온 저는 귀국하자마자 호쾌하게(!)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대책 없이 그만둔 회사였기 때문에 그 즉시부터 전혀 할 일이 없었고, 시간은 누에똥처럼 펑펑 남아돌기만 했습니다. 이른바 술과 장미의 나날이었죠. 그때 제가 회사를 그만 두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고우영 삼국지] 박스세트와 MBC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 DVD 세트 구입이었습니다.


지금은 홍자매나 김도우, 김지우([마왕]과 [부활]을 쓴) 등 마니아층을 형성하는 작가들이 꽤 많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거짓말]의 노희경과 [넷멋]을 쓴 인정옥 등이 그나마 가장 튀는 작가들이었습니다. 인정옥은 그 동안 잠잠하다가 얼마 전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의 애인으로 밝혀져 다시 화제를 불러모은 적이 있죠.

아무튼 고다르의 데뷔작 제목을 그대로 따온 이 드라마는 처음엔 그리 기대가 가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양복을 입고 다니는 소매치기 얘기라니 식상하잖아, 였던 거였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상한 관심과 애정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드라마였습니다. 일단 인정옥의 대사가 신선했습니다. TV 여주인공들이 좀처럼 쓰지 않던 “새끼”를 무심하게 내뱉게 했고, 공효진의 말버릇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돈 버느라 그랬지…’도 “내가 돈 버니라 그랬지” 처럼 입에 붙는 말 그대로를 대사로 쓰는 게 신기하고도 정감 있었습니다. 심지어 무슨 소린지 잘 들리지 않던 양동근의 웅얼거리는 말투도 단점이 아니라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참 가슴이 아픈 드라마이기도 했습니다. 양동근이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던 공효진을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새로 생긴 애인 이나영에게로 가는 얘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끔은 ‘도파민의 과다분비 현상’으로 오해 받기도 하는 ‘사랑’이라는 이상한 감정의 불가해성이 진정 아프고도 실감나게 드러난 작품이었던 거죠.

그리고 높은 완성도도 이 드라마를 더욱 사랑하고 싶은 작품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대개 시청률로 몰아치는 인기 작가들은 모든 시퀀스를 주인공들과 주요 사건에만 집중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네멋]은 주변 인물 한 명 한 명이 전부 다 살아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별스런 대사 없이도 사보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신구의 연기를 비롯, “그 대가리나 까딱까딱 하는 게 무슨 음악이냐?”고 이나영에게 야멸차게 굴다가도 아내 이해숙만 나타나면 금방 활짝 웃으며 “응, 당신 왔어?”라고 말하며 바보가 되는 조경환. 그리고 “이 아저씨 은근히 느끼하다?”라는 공효진의 대사에 “야, 은근히는 무슨 은근히냐. 나 보는 사람마다 다 느끼하다고 하던데.”라고 맞받아치는 이세창. 마지막 장면에서 야쿠르트 아줌마로 변해 공효진에게 봉변을 당하고 “아유, 그 아가씨 참 싸가지 없네.”라고 중얼거리는 윤여정까지 모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균등하게 그 존재감을 부여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방송을 지켜보다가 서서히 [네멋]의 팬이 되었고 DVD를 사서 반복 시청하면서부터는 ‘네멋 폐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엔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이동건이 이나영을 좋아하는 신문기자로 나왔었고 나중에 [커피 프린스]에 나왔던 김재욱이 양동근의 꼬붕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니 이 드라마도 참 오래되었네요. 엊그제 같은데 벌쎄 10년이 지났어요. 근데 지금도 서울 하늘 아래 어디선가 복수와 미래, 경이가 피시피식 웃으며 살고 있을 것만 같으니, 전 이 드라마를 참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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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

나의 드라마 연대기 2012. 3. 27. 13:17

 


여친 : 자, 이제 뭐할까?
성준 : 나 오늘 일찍 들어가 봐야 돼.
 
여친 : 왜?
성준 : 얼른 가서 홍길동 봐야 돼. (당시 SBS에서 [홍길동] 방영 중이었음)

여친 : 어휴, 이게 오빠야, 아줌마야?!(퍽퍽퍽-)
성준 : …어흑.


드라마를 너무 좋아해 옛날 여친에게 ‘아줌마’라는 별명까지 하사 받았던 접니다. 일요일 아침 늦은 산책길에 나섰다가 문득 ‘드라마와 나’라는 사적 문화 연대기를 조금씩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흥적으로 말이죠. 하긴 전 거의 모든 일을 즉흥적으로 하긴 합니다만.

 

전 경기도 백마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렸을 때 그 마을엔 ‘봄순이네’라는 집 딱 한 집에만 TV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저녁때면 모든 아이들이 그 집으로 몰려갔고, 그 집 아이들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우리 형이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TV를 보러 봄순이네 갔다가 발냄샌가 땀냄샌가가 난다고 몇몇 아이들이랑 같이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분노하신 울 부친은  당장 다음날 서울로 가서 TV를 사오셨습니다. 긴 다리가 네 개 달리고 잘게 쪼개진 나무 셔터를 좌우로 잡아당기면 화면을 잠글 수도 있는 최신식 흑백TV였습니다. 정말 삐까뻔쩍 했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졸지에 마을에서 두 번째로 TV를 가진 집이 되었습니다.

제 기억에 제가 최초로 본 연속극은 TBC의 사극 [연화]였던 것 같습니다. 김창숙 주연이었고 박병호, 김세윤 같은 중견 탤런트들도 나왔습니다. 박병호의 부인이었던 정혜선은 MBC 전속이라서 같이 출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거 같습니다. (둘은 나중에 이혼했죠) [연화]의 인기는 그 다음 드라마 [윤지경]으로 이어졌습니다. 조선시대 공주의 남편인 ‘부마’를 소재로 한 드라마였는데, 재주는 출중하나 ‘외척 배제의 원칙’에 따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부마(역시 김세윤이 주인공이었고)의 심정이 어린 가슴에도 꽤 답답하게 느껴졌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저녁 때만 되면 저희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 드라마인 [여로]를 보기 위해서였죠. 장욱제, 태현실 등이 니왔던 일일연속극이었는데 아마 전국 시청률이 70%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야말로 국민 드라마였습니다. 장욱제가 바보 영구를 나왔는데 마을 사람들이 “저 사람은 저거 하느라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병원에 주사 맞으러 다닌대잖어. 안 그러면 진짜 바보 된대…” 라고 쑥떡거리며 장욱제의 연기를 칭찬했습니다. 나중에 심형래나 이창훈이 했던 ‘바보 영구’ 캐릭터도 다 이 드라마에서 나온 겁니다. 그리고 ‘난타’로 유명한 탤런트 송승환도 이 드라마로 고등학생 때 데뷔를 했습니다. 장욱제 태현실 사이에서 난 아들로 말이죠... 이런, 벌써 A4 용지 한 장이 넘었군요. 다음에 또 생각날 때 이어서 써볼게요. ^^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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