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나주 여행을 갔다가 들른  광주 송정시장 안의 작은 서점에서 새로 나온 헤밍웨이의 단편집 [깨끗하고 밝은 곳]을 샀다. 일단 책이 작고 예뻐서 샀고 헤밍웨이의 작품을 요즘 번역으로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좀 있었다. 민음사가 만든 이 작품집엔 표제작과 함께 <살인자들>, <병사의 집>, <킬리만자로의 눈>,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등이 실려 있고 맨 앞엔 '글을 쓴다는 건 언제나 고독한 일'이라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을 탔을 때 발표했던 수상 연설문이 실려 있다. 

<깨끗하고 밝은 곳>이라는 소설은 8쪽짜리 짧은 단편인데 늦은 밤 카페에서 술을 마시는 귀머거리 노인과 그의 시중을 들던 웨이터 두 명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다. 지난 주에 자살을 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알려진 노인은 오늘도 늦게까지 카페에 남아 브랜디를 마신다. 웨이터들이 주고 받는 대화에 의하면 돈도 많은 노인이 자살하려 한 이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이었다나. 늦게까지 버티고 있는 노인 때문에 일찍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한 젊은 웨이터 는 그에게 다가가 브랜디를 따라주며 "영감님은 지난주에 죽는 게 나을 뻔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듣지 못하는 노인은 그저 브랜디를 마실 뿐이다.

브랜디를 다 마신 노인은 '비틀거렸지만 어딘가 품위가 있어 보이'는 모습으로 돌아갔고 조급한 웨이터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자 나이 많은 웨이터가 혼자 가게 뒷정리를 하겠다고 한다. 그는 가게를 정리하면서 말한다. "나는 늦게까지 카페에 남아 있고 싶어. 잠들고 싶어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밤에 불빛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이야."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며 난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던 조급한 웨이터는 퇴근을 하고 나이 많은 웨이터는 문을 닫으며 자신이 매일 밤 가게를 닫을 때마다 약간 망설이는 이유가 뭘까 생각한다. 어쩌면 이 시간에도 카페가 필요한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까.

그는 아까 그 노인을 생각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로 시작하는 주기도문에 신이나 아버지 대신 '허무'라는 뜻의 스페인어 '나다'를 넣어 읊조려본다. 그리고 퇴근길에 들른 바에서 뭘 드시겠습니까, 라고 묻는 바텐더에게 "나다를 주게"라고 말함으로써 "여기 또 미친 놈이 또 하나 있군." 이란 농담 섞인 핀잔을 듣는다. 마지막으로 들른 바도 깨끗하고 불빛이 밝은 카페였다면 더 좋았을 것을, 이라 생각하는 웨이터. 어쩌면 그는 헤밍웨이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깊은 밤에도 자신이 허무에 젖지 않도록 옆에서 환하게 불을 밝혀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웨이터의 마음에서 소설가의 모습이 언뜻 비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도 깨끗하고 밝은 곳(A Clean, Well-Lighted Place)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인자들>이라는 단편은 암살자들이 찾아왔는데도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 그대로 집에 머물고 있는 전 헤비급 챔피언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고 <킬리만자로의 눈>은 어렸을 때 고레고리 펙 주연의 영화로 봤던 작품이다. 그런데 이렇게 책으로 찬찬히 읽으니 마지막 주인공이 죽는 장면만 빼놓고 완전히 헤밍웨이 자신의 이야기나 다름없다.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도 비슷하다. 이건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라는 장편이 생각나는 제목이다. 하루키도 헤밍웨이의 작품을 따서 <여자 없는 남자들>이란 책을 냈었다. 아마도 존경하는 선배 소설가에 대한 오마주로 이런 제목들을 지었을 것이다. 소설가, 저널리스트, 모험가로 멋진 삶을 누리다 간 헤밍웨이가 부러워진다. 




Posted by 망망디
,

[운명과 분노]라는 소설을 두 번 샀다. 두 번 읽은 게 아니라 두번 구입. 출퇴근길에 전철 안에서 짬짬이 읽다가 100페이지쯤 읽었을 때 어디선가 잃어버렸는데 책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책값이 16,500원이니까 나는 결국 33,000원짜리 이야기를 읽은 셈이다. 그래서 어땠냐구? 다시 사서 읽길 잘 한 것 같다. 아마도 올해가 다 가도록 나에겐 이보다 더 ‘올해의 책’은 없을 것 같으니까. 

로런 그로프는 무시무시한 작가다. 안 그렇게 생겼는데 글은 독하고 능숙하고 교활하다. 섹스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마음에 딱 든다. 그리고 필력이 엄청나다. 글을 잘 쓴다는 건 시나리오 작가처럼 사건을 잘 짠다는 것과는 좀 다른 얘기다. 사건보다 중요한 건 그 모티브를 어떤 태도와 문체로 다루느냐인데, 뛰어난 작가일수록 가장 고귀해질 수도 가장 저속해질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던 것처럼. 로런 그로프가 그렇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이 책엔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 얘기도 여기저기 끊임없이 인용된다. 남자 주인공 로토가 셰익스피어 연극을 주로 하는 배우였고 나중엔 잘 나가는 희곡작가가 되기 때문이다. 스물두 살에 결혼하는 그의 아내 마틸드를 만난 것도 그가 햄릿 역을 했던 날의 일이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호의와 사랑을 받았고 원하기만 하면 모든 여자와 잘 수 있었던 로토는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던 신비한 여신 같은 마틸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청혼하고 순식간에 결혼을 한다. 소위 ‘킹카’들의 갑작스러운 결합에 어이 없어하던 친구들은(여자라면 대부분 로토와 섹스를 했던-쓰리섬을 했던 여자들도 있다)신혼파티에 와서 그들의 결혼이 곧 깨질 것을 예상하며 "뭐, 첫 번째 결혼이니까”라고 배배꼬인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런 바람과는 달리 두 사람은 로토가 죽기까지 무려 23년간 다른 사람을 넘보는 일 없이 결혼생활을 영위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일찍 결혼한 남녀가 헤어지지도 않고 이십 년 넘게 함께 사는 얘기가 어떻게 흥미로운 소설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로런 그로프라는 작가의 힘이 빛난다. 이 소설은 로토와 마틸드의 격하고 찬란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 뒤엔 콜리와 에이리얼이 라는 음습한 인물들이 숨어 있는 교활하고 잔인한 드라마다.  이 책이 심리소설이었다면 왜 제목이 ‘운명과 분노’인지, 에이리얼과 마틜드의 비밀 거래는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원인과 결과가 딱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이 책이 추리소설이었다면 마틸드가 왜 스물여섯 살에 낙태를 하고 스물여덟 살엔 불임수술을 하는 배신을 저질렀는지 밝혀내려 애쓸 것이다. 아니, 그보다 어렸을 때 정말 마틸드가 남동생을 계단에서 밀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게 사실인지부터 밝혀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문학책이다. 그것도 강력한 서사를 지닌 입체적인 문학 작품. 마침 이 책을 쓸 때 작가가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비극을 탐닉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현대적인 결혼생활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신화적인 구성과 고전적인 비극미를 함께 갖추게 되었다.

백만장자의 아들로 태어나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서 단 한 푼의 돈도 물려받지 못했지만 매력적인 외모와 비상한 두뇌를 소유했던 한 사내와 어릴 적 불운했던 과거를 분노라는 동력으로 맞서려 했던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이 연상되는, 마치 세상 일을 모두 알고있는 듯한 로런 그로프의 우아하고 오만한 문체와 폭발적인 서사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인생사와 인간의 단면을 활자의 힘만으로 능숙하고 위엄있게 그려낸다.   

그동안 누가 흥미진진하면서도 문학성까지 갖춘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가네시로 가즈키의 [영화처럼],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또는 [인생],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조지수의 [나스타샤]등을 추천했는데 이제 한 권을 더 추천해야겠다. 바로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다.



Posted by 망망디
,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등을 쓴 위대한 소설가지만 동시에 [소설의 기술], [커튼] 등을 쓴 뛰어난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같은 사람이 썼더라도 소설과 에세이는 다르다. 그래서 그가 에세이에서 밝혀놓은 개인적 체험들과 소설 작법, 그리고 사람과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통찰과 유머 등이 소설에서는 과연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읽는 것은 그의 책들을 더욱 즐겁고 고급하게 즐기는 또다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소설이 2차원의 영역이라면 영화는 분명 3차원의 영역일 텐데 그가 쓴 소설은 영화화되면서([프라하의 봄]이라는 멋진 영화를 물론 좋아하지만) 오히려 그  입체감이 사라지고 이미지와 캐릭터만 강렬하게 남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건 아마 아직도 소설이라는 장르만이, 또는 소설가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역설하는 증거가 아닐까. 조지수의 장편 [나스타샤]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누군가가 잘못 영화화 하기라도 한다면 캐나다의 광활한 풍광과 조지와 나스타샤의 사랑 이야기만 덩그라니 남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나스타샤]를 쓴 소설가 조지수는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조중걸의 필명이다. 서양철학사와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학자이며 이미 우리집 책꽂이에도 여러 권의 저서가 있는 일급 에세이스트지만 작년에 아내의 권유로 사놓았던 이 소설책은 분량이 너무 많고 또 앞부분의 문장들이 좀 딱딱해 보여 몇 페이지 읽다가 덮은 뒤로 그동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5월 초 회사 일이 좀 한가해진 틈에 우연히 펼치는 바람에 그야말로 며칠동안 ‘푹 빠져’ 읽게 되었다. 


이야기는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니다가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현재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는 33세쯤의 조지라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캐나다 웰드릭이라는 도시에서 호의적인 친구들과 어울려 생활하고 있는 이 남자는 강의 준비와 저술 활동 이외에는 주로 플라잉 낚시를 즐기는 데 거의 모든 돈과 시간을 쓰는 바람 같은 자유인이다. 낚시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행위이자 생활이다. 왜냐하면 플라잉 낚시는 그저 물고기를 낚는 것 이상으로 그들의 삶에 의미를 주고 저마다에게 영감을 주는 철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낚시에 대한 묘사와 보트, 그들의 커티지, 심지어 자비를 들여 낚시터에 건설하는 작은 수력발전소 등에 대한 글들을 반복적으로 읽다보면 누구나 당장 캐나다로 달려가 광활한 호수변에 서고싶은 충동이 일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면 어떤 시퀀스의 연속으로 이해하기 쉽다. 우연히 주인공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고 갈등구조와 위기를 겪다가 결국 결말로 치닿게 되는 담백하고 전형적인 플롯 말이다. 그러나 소설가의 성향과 역량에 따라 그 구조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다. 철학자 김용규가 쓴 [알도와 떠도는 사원]을 보라. 이 소설은 과학자인 아빠를 찾아 나서는 알도의 모험담임과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철학적 개념과 심리학적 고찰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놓은 지식의 라이브러리다. 조지수의 소설 또한 자칫 줄거리만 놓고 보면 꽤 단순한 외국 체류 경험담이나 좀 특이한 사랑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심지어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나스타샤’라는 여인의 등장도 무려 200페이지가 넘어서야 시작된다. 그러나 그 큰 이야기 기둥 사이로 펼쳐지는 작가의 눈부신 철학적 사유와 통찰력 있는 담론들은 이 소설을 아주 풍부하고도 탄탄한 교양서이자 지적 모험담으로 만들어 준다. 


나는 특히 저자의 간결하고 단호한 문체와 정치적 올바름에 반하게 되었다. 여기서 얘기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은 진보나 보수 또는 어떤 특정 정당을 지지하느냐 하는 따위의 좁은 개념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인류학적 관점으로 모든 현상을 공평하게 보려 노력하면서도 사안별로 그때마다 분명하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낚시터로 향하는 고속도로 중간 매번 들르는 케빈의 커피숍에서 나스타샤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여인을 만난 조지는 설명할 수 없는 측인지심에 이끌려 그녀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오게 되고 곧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나스타샤는 분리독립주의자인 남편을 돕다가 러시아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과 폭력에 시달린 뒤 빈털터리로 탈출한 여인이었는데 선량한 커피숍 주인 케빈이 점원으로 채용했던 것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가만히 서있기조차 힘들었던 그녀는 조지의 도움으로 웰드릭 주민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견뎌내며 차츰 건강을 되찾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고국 어딘가에 살아있을지 죽었을지조차 모르는 남편 보리스와 아들 아니카가 있다. 



30대 초반의 토론토 대학교수, 어린 시절의 유학, 그리고 낚시와 강의, 저술활동에 이르기까지 이 이야기는 작가의 자전적 스토리임이 거의 확실하다. 구체적인 사건들 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작가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래서 소설 곳곳에선 교육, 인종차별은 물론 역사, 성공, 사랑, 품위, 고결함 등에 대한 생각들이 거의 소설가의 육성 그대로 흘러 나온다.  또한 그동안 인류가 만들어놓은 철학과 예술에 대한 가치와 그것을 즐기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조지는 나타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셰익스피어와 헤밍웨이를 읽게 하고 더 나아가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포크너를 읽는 행복을 누리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오페라를 본 사람과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도 설명해 준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행복한 시절이다. 선천적으로 총명하고 밝은 나스타샤는 조지가 그려주는 지도대로 새로운 삶을 부지런히 찾아가지만 운명이 예고해 놓은 비극까지 피해가지는 못한다. 



조숙한 수학 천재였으며 여호와의 증인인 동료 교수 그렉, 억만장자이자 허영 덩어리인 유태인 변호사 매튜, 조지의 아이디어로 지렁이 재배에 성공해 큰 부자가 된 뒤 등을 돌리는 김유진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 각각의 이야기를 읽는 맛도 각별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나스타샤와의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지 않는 조지는 눈물을 머금고 그녀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깊은 시름에 빠져 알콜중독자가 된다. 


어떤 인생도 늘 행복할 수 없으며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소설가 조지수는 인생엔 목적이 없고 과정만 존재한다고까지 말한다. 삶은 허무하지만 그것이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며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이라는 그의 생각은 산문집 [One Man’s Dog]에도 잘 나타나 있다. 



무려 719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이다. 책을 읽으며 많은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 표시를 했고 밑줄을 그어야 했다.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문장을 다시 읽겠다는 나와의 약속이다. 결국 나스타샤는 자살하고 조지도 슬쓸하게 과거를 회상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들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성장했음을 무언 중에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이건 사랑 이야기를 통해 펼쳐진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긴긴 이야기 끝에 그 성장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혼자 새벽안개를 맞는 것처럼 알싸한 뿌듯함을 안겨준다. 


누군가가 '네가 읽은 책 중에 정말 신나게 재미있게 읽은 현대소설 몇 권만 얘기해 봐'라고 하면 나는 그동안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과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그리고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또는 [인생],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영화처럼], 레이먼드 카바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을 비롯해 윤대녕, 김훈, 배명훈의 몇몇 단편과 중편들을 추천했었다. 이제 그 목록에 하나를 더 얹어야겠다.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 조지수의 소설 [나스타샤] 말이다. 



Posted by 망망디
,

 

 

 

 만약 누군가 제게 그동안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을 다섯 편만 꼽아보라고 하면 무슨 책을 대야 할까 잠깐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 저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커트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 그리고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얘기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 소설 중 하나인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영화로 옮긴 작품을 IPTV를 통해 보았습니다. 이런 영화는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습니다.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누구든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정말 오랜만에 찰진 작품을 하나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당장 원작소설을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감독은 [빌리 엘리어트]와 [더 리더 : 책 읽어 주는 남자]를 만든 스티븐 달드리. 톰 행크스와 산드라 블록 같은 스타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주인공 오스카 역을 맡은 소년 토마스 혼의 연기가 대단합니다. 오스카의 할아버지로 나오는 막스 폰 시도우는 그 존재만으로도 대배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고요. 오스카네 맨션의 도어맨으로 특별출연하는 뚱땡이 존 굿맨도 참 반가웠죠.

 

영화는 매우 독창적이면서 유려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다만 오스카의 할아버지가 왜 말을 못하게 됐는지, 또 왜 양 손에 ‘YES’와 ‘NO’를 문신으로 새기고 다니며 의사소통을 하게 됐는지가 원작소설에선 자세히 다뤄지는데 영화에서 생략된 게 아쉽습니다. 소설에선 뉴욕 이야기 못지않게 2차대전 당시의 드레스덴 얘기가 기가 막히게 전개되거든요.

 

천재 작가가 쓴 엄청난 작품을 안정된 연출로 잘 만든 영화이고, 9/11을 다룬 영화라고만 쳐도 폴 그린그래스의 [플라이트93]을 능가하는 작품입니다. 전 이 책이 두 권이나 있었는데 모두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받지를 못했습니다. 누구한테 빌려줬는지 기억도 안 나고 해서 결국 오늘 서점에 가서 또 한 권을 샀네요. 전에 써놨던 독후감을 다시 한 번 올려봅니다. 영화도 책도 강추입니다.

 

 

 

 

비극적인 내용을 다루다 보면 글은 당연히 무거워지기 쉽다. 반면에 아무렇게나 몸을 놀리며 가볍게 칠렐레팔렐레 쓰는 거 같으면서도 유치하지 않게 보이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비극적인 내용을 가지고 칠렐레팔렐레 천의무봉으로 자유롭게 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불가능한 일을 해낸 사람도 가끔은 있는 법이다. 내 생각엔 그가 바로 조너선 사프란 포어다. 그리고 그가 쓴 책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란 소설이다.

 

  이 책의 주인공 오스카는 아홉 살이다. 그의 아빠는 9·11 때 무역센터에서 회의를 하다가 죽었다. 아빠는 죽기 직전에 다급하게 집으로 여러 통의 전화를 했고 오스카는 그때 자동응답기에 녹음이 되는 걸 알면서도 너무 무서워서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비극적인 일이다. 오스카는 그 이후로 전화를 무서워한다. 자동차나 비행기도 무서워한다. 전화기를 무서워하는 오스카는 길 건너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할머니와 얘기를 할 때는 무전기를 사용한다. 난 신선하고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와 말투를 창조해 낸 이 장면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가서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할머니? 할머니, 제 말 들리세요? 할머니? 할머니?” “오스카니?” “전 잘 있어요. 오버.” “밤이 늦었어. 무슨 일이냐? 오버.” “저 땜에 깨셨어요? 오버.” “아니다. 오버.” “뭐하고 계셨어요? 오버.” “세입자한테 얘기를 좀 하던 참이었다. 오버.” 그 사람도 아직 안 자고 있어요? 오버.” 엄마는 세입자에 대한 질문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렇단다. 하지만 방금 막 나갔어. 심부름할 것이 좀 있어서. 오버.” “하지만 지금은 새벽 4시 12분인데요? 오버.”

 

 

  오스카는 전화를 무서워하지만 사람들에게 편지 쓰는 건 좋아한다. 그래서 스티븐 호킹에게 자기를 제자로 삼아달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제인 구달에게서 답장을 받기도 한다. 호킹도 나중에 정중한 답장을 보내온다. 그는 쉴 때마다 공상을 하고 발명을 한다. 보통 아홉 살이 아니다.

 

  어느날 오스카는 아빠의 방을 뒤져보다가 파란색 꽃병을 깼는데, 그 속에서 ‘블랙’이라고 씌여진 봉투와 열쇠 하나를 발견한다. 그는 인터넷으로 블랙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낸 뒤 여덟 달에 걸쳐 그 사람들을 방문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유는 그 열쇠에 맞는 자물쇠를 찾기 위해서다.

 

  한편, 할머니는 오스카의 아버지를 임신했을 때 남편과 헤어졌던 뼈아픈 과거가 있다. 2차대전 당시 드레스덴에서 폭격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뉴욕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말을 못하는 상태였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에서처럼 여기서도 드레스덴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그 책도 비극적인 현실을 블랙유머로 펼쳐낸 책이었다. 보네거트와 사프란 포어는 이렇게 만나는 건가?)

 

  노트에 필기를 해서 대화를 했고 왼손엔 “예스”, 오른손엔 “노”라고 문신을 해서 의사소통을 했다. 할머니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제발 저랑 결혼해 주세요.” 그리고 둘은 결혼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또 잃을까 봐 그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비극적인 일이다. 둘 다 아주 젊었을 때의 일이었다...

 

  아아, 줄거리를 소개하려고 하다 보니 이상해진다.

 

  그냥 짧게 말하겠다. 이 소설은 엄청난 입심과 다채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시도들로 이루어진 멋진 작품이다. 페이지 사이사이 사진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글이 딱 한 줄만 써있는 페이지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글씨들이 서로 겹쳐져 볼 수 없게 만든 페이지도 있다. 근데 놀라운 건 그런 시도들이 조금도 치기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작가가 말하려는 감정이 절실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글을 워낙 잘 쓰다 보면 그렇게도 되는 모양이다.

 

  정말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아니, 너무 슬프면 울지 못한다. 그래서 오스카도 아빠의 장례식에 가는 날 리무진 운전기사와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런 오스카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완벽하게 이해한다.

 

 

넌 운전사와 농담을 하고 했지만, 속으로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운전사를 웃겨야 할 만큼 넌 고통스러웠던 거야.


 

 

  이 소설은 마치 여러 대의 카메라로 똑 같은 장면을 찍을 것처럼 동일한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그리고 화자가 바뀌어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때는 ‘아, 그때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깨달음을 선사해 준다. 그런 시선들과 사건들이 쌓이면서 여덟 달 만에 이야기는 마침내 이상한 감동과 함께 따뜻한 위로와 화해의 지점으로 향하게 된다.


 

이 책은 현대의 고전으로 남을 게 확실해 보인다. 아직 새파란 1977년생인데. 아무래도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엄청나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재인 모양이다.

 


Posted by 망망디
,


2010년 12월 31일 저녁, 저는 갑자기 한 해 동안 읽은 책들에 대해 뭔가 정리를 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이 글을 휘갈기고 나가 술을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글은 2년 전에 쓴 메모입니다. 뭐, 그렇다고 그 해 읽은 책을 다 쓴 건 아니고 생각나는 것만 몇 권 추려 간단하게 리뷰를 썼습니다. '나중에 정식으로 한 권씩 다시 써야지'라는 생각이었으나...역시 그런 게 생각대로 될 리가 없죠. (그러고보니 '생각노트'라는 제목도 여기서 나왔군요)



2010년의 장편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_ 조너선 샤프란 포어

아홉 살 소년 오스카가 들려주는 놀라운 이야기. 911테러 당시 무역센터에서 회의를 하다가 죽은 아빠의 다급한 전화를 받지 못해 트라우마에 빠진 아이의 이야기, 그리고 2차대전 당시 독일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 남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만 했던 할아버지의 얘기가 겹친다.

그런데 이 슬프고도 웃기고 품격 있는 문체는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어느덧 신선한 파격으로 흐른다. 놀라운 필력과 참신한 기획으로 마음을 흔든 역작. 단연 올해의 책으로 꼽을 만하다. 저자의 데뷔작 <모든 것이 밝혀졌다>도 출간되어 있다. 는 대학생 때 논픽션으로 구상했던 작품인데 지도교수의 권유로 인해 소설로 개작되었다고 한다. 첫 작품부터 작가의 뚝심과 역량을 느낄 수 있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_ 주노 디아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왕따. 섹스를 좋아하는 친누나와 살지만 정작 자신은 아직도 숫총각인 찌질이. 게임만 좋아하는 뚱뚱하고 못생긴 오스카 와오의 이야기가 도미니카 공화국의 악명 높은 독재자 투르히요의 역사와 유머러스하게 엮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처음엔 뭔 얘긴가 하다가 읽을수록 빠져드는 마술 같은 책. 주노 디아스는 올해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조너선 샤프란 포어와 더불어 천재라는 말을 들어도 당연한 작가. 그의 데뷰 단편집 <드라운>은 나 같은 놈이 읽고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책인가 보다. 읽다가 어느 순간 포기하고 다시 책장을 들추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날을 잡아서 정갈한 음식만 골라 먹은 다음 맑은 정신으로 다시 천천히 읽을 계획.




 
2010년의 단편

 
암소 _ 토마 귄지그


앙리라는 한 남자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신문 찌라시에서 ‘여자친구를 찾고 계십니까? 자연스럽고 순수한 교제를 원하시는 분들만 연락 바랍니다.(성적 접촉이나 매춘 아님)’이란 요상한 문구를 발견하게 된다. 앙리는 한 여자를 만나 집으로 데려오는데, 알고 보니 이 여자는 어떤 농학자가 유전자를 조작해 여자로 탈바꿈시킨 암소였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이라는 소설집에 있는 기발하면서도 황당한 단편 <암소>는 이렇게 시작한다.

정말 골 때리는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설이 골 때리는 얘기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이런 소재를 통해 인간의 모순과 인생의 슬픔, 외로움 등을 잔인할 정도로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암소> 외에도 여섯 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는데, 모두 다 “도대체 뭘 먹고 자란 인간이길래 이따위로 못돼먹고 뒤틀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고 환호하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가학적인 유머감각에 낄낄거리다가도 갑자기 세상 살기가 싫어질 정도로 살벌한 냉기를 함께 느끼게 해주는 미친 작품들.


 안녕, 인공존재 _ 배명훈

<판타스틱>이란 장르문학 잡지를 통해 배명훈을 만나 그의 작품들에 매료되어 지낸 지 벌써 이삼 년이 되어 간다. 데뷔 당시에 “설정을 굉장히 세게 한 뒤 일반 소설 쓰듯이 쓰고 그냥 SF라고 우기면 되지 않을 까 될까?”라는 생각으로 SF작가가 되었다는, 이 농담같은 그의 소설들은 그래서 그런지 설정만 SF이고 등장 인물들이나 행동양식, 사고방식 등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로봇공학자들이 벌레보다 작은 극소형 로봇으로 벌이는 스파이전 이야기 , 실연 당한 은경 씨가 구입한 중장비가 하필 예비군 훈련 징발 대상이 되는 바람에 화성까지 날아가 "예비군 훈련은 간식 안 주나요?"라는 엉뚱한 질문을 일삼다가 급기야 기계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 이야기 , 수면공학을 연구한 덕분에 꼴보기 싫은 총통의 임기 5년 동안 잠을 자게 된 남자 이야기 ...

이번 창작집 <안녕, 인공존재>는 이전의 단편들이나 연작소설 보다 더 재밌고 신기한 이야기들로 그득하다. 난 <안녕, 인공존재>와 다른 창작집 표제작이이기도 했던  <누군가를 만났어>가 특히 좋았다.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과 유려한 문체가 '동시패션'적으로 뛰어난 작가. 어떤 면에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보다 더 좋다.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 – 휘뚜루마뚜루 세계사1 _ 최제훈

얼마 전 독서일기에도 얘기했던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에 실린 단편. 다채롭고 귀여운 인문학적 지식에서부터 시침 뚝 떼고 덤비는 형식의 변주까지. 이 작가의 입담은 정말 굉장하다. 말이 필요 없다. 내용에 대해 더 이상 발설하고 싶지 않다. 이런 책은 전해 듣는 것보다 직접 읽는데서 오는 쾌감이 훨씬 더 크니까.



대설 주의보 _ 윤대녕

 
당대 젊은 작가들 작품까지 빼놓지 않고 섭렵한다는  탐욕의 학자 김윤식은 이인직의 <혈의 누> 이후 대한민국 문학사의 새로운 연대기를 여는 작품으로 대뜸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을 선정한 적이 있다. 90년대 혜성처럼 등장해 새로운 감수성으로 사람들에게 '생물학적 상상력'이니 '존재의 시원'이니 '회기'니 하는 알쏭달쏭한 단어들을 주입시키던 그의 섬세함은, 그러나 곧 세상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강산이 한 번 반쯤 변했을까.여름 휴가를 떠나기 직전,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나는 그의 신작 <대설 주의보>를 읽었다. 여전히 윤대녕이었다. 툭하면 여행을 떠나고, 주인공은 먹물이 든 비정규직 지식인이기 일쑤고,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산사로 섬으로 바닷가로 흘러다닌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뭐가 사연이 있는 여자들을 만나 잠깐씩의 연애를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맨날 통속적인 연애 얘기를 다루면서도 윤대녕이 쓰면 그것이 통속에서 벗어나  일정한 품격과 정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재수없는 문어체로 꼰대같은 대사들을 뱉어내기 일쑤인 남자 주인공들에게도 어느덧 중독이 되어서 그런지 결국은 아무렇지도 않아지는 것이다. 그 옛날 읽는 사람들 가슴을 뻐근하게 했던 의 연인들이 다시 만나 못다한 뒷얘기를 이어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는, 그러나 뜻밖에도 따뜻하고 희망적인 결말을 맞는다. 파리하게 여리고 냉혹하던 윤대녕도 이제 나이가 든 것일까.

윤대녕의 소설을 읽고 나면 갑자기 혼자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물론 내가 당장 집을 나서서 선운사나 속초, 강릉으로 아무리 돌아다닌다 해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랑 술을 마시며 말도 안 되는 화두 몇 개를 서로 집어 던지다가 결국 함께 자는 일은 절대 안 생긴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런 아련한 예술적 향취와 수채화적인 풍경에 갇혀 꼼짝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 편 한 편 다 표구를 해서 조용한 화랑에 걸어놓고 싶은 느낌의 예술 소설들. 표제작인 <대설주의보>와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가 그 중 특히 좋았다.

 

  박시은 특급 _ 곽재식

이 단편은 원래 2009년도에 출판된 <U,ROBOT>이라는 작품집에 실린 소설인데 뒤늦게 책을 사서 읽은 내가 개인적으로 감동한 작품이라 그냥 올해의 책에 올리게 되었다.

주인공이 일하는 '한국 천문 정보 해석 연구소'라는 이상한 기관은 사실 별 볼일 없는 곳이었다. 별을 쳐다보는 곳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별 볼 일 없는 곳인 이 장소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주인공이 미국에서 보내온 자료들을 해석하다가 우연히 외계인과 통신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세계 최초, 인류 최초로 말이다. 당장 연구소는 수십 배로 확장이 되었고 주인공은 급기야 주요 인물로 부각이 된다. 그런데 주인공은 엉뚱하게도 동료와 한 여자를 두고 싸우며 알력을 쌓다가 이른바 '박시은 문제'로 왕따가 된다.

박시은 문제란 주인공이 예전에 <SBS 단막극장 >에서 방영되었던 탤런트 박시은 주연의 <멋지게 세이 굿바이>라는 드라마에 대해 말다툼을 하다 동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 것을 말한다. 황당한 것은 주인공 말고는 아무도 그 드라마의 존재 자체를 기억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인터넷으로 방송국으로, 심지어 박시은 집으로 전화를 해봐도 사실 확인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러다가 드디어 외계인과 교신을 하게 되는 날이 왔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문화부장관이자 차기 유력 대권주자가 역사적인 첫 교신 담당자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외계 문명의 신호를 처음 발견한 주인공에게로 그 영광이 돌아가게 되었다. 사필귀정. 역사적인 순간이다.  세계인들의 눈과 귀가 한꺼번에 집중되는 코리아에서 KBS 김경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인공은 중앙 통제실로 올라 미국 대통령, 한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었고 심지어 키보드 앞에 앉기 직전엔 문근영이 와서 뺨에다 뽀뽀까지 해줬다. 주인공은 외계 문명과의 첫 교신 내용으로 너무 거창하고 철학적인 거 말고, 그냥 간단하고 평범한 인사말을 하라는 데이비드 그로스 박사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혹시 전에 SBS TV에서 단막극으로 방송했던 <멋지게 세이 굿바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가? "

통쾌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곧바로 그 드라마를 찾아 보았다'는  외계인의 성실한 답변에 의해 자신의 오타쿠적인 정체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고, 다음날 SBS 토크쇼에 탤런트 박시은과 함게 출연해 외계 문명과 처음 교신하게 된 계기와 고충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물론 박시은이 출연했던 단막극 <멋지게 세이 굿바이>는 전 세계 107개 방송국에서 우주 문명 특선으로 재방송되었다...


 

 2010년의 에세이

 몰락의 에티카 _ 신형철

현재 대한민국에서 글 좀 쓴다는 작가들이면 누구나 줄을 서서 신형철이 평론을 써주기를 기다린다는 농담은 현재 신형철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 평론가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책에서 김훈의 소설에 대해 쓴 평론을 읽어보면 그의 진가를 당장 느낄 수 있다. 더구나 신기한 것은 신형철은 평론가임에도 불구하고 글에서 어떤 ‘고결함’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고종석과는 또 다른 느낌의 지식인을 만났다고 해야 할까. 폭설로 고립된 산장같은 데서 한가롭게 천천히 다시 읽고싶어지는 책이다.

 

 책을 읽을 자유 _ 로쟈(이현우)

전작인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로쟈가 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은 독서 도중 벌떡 일어나 이 책에 언급된 다른 책을 당장 사러 나가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그가 읽고 소개하는 싸르트르, 도스토예프스키, 강상중, 지젝, 보드리야르, 벤야민에서 타르코프스키나 우석훈, 가라타니 고진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독서편력들은 책을 읽는 동안 '우리가 새롭게 만나고 싶어진 저자들의 리스트'로 돌변하게 된다.

이현우는 '그 사람이 읽는 책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책에 대해 무척 엄격한 편인데, 그게 다 독자의 입장에 서서 취하는 엄격함이라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이 책에서는 특히 번역서의 문제점에 대해 여러 번 지적하는데 아주 구체적인 단락들을 원문과 비교해 자세히 실어놓았다. 옛날에 읽은 고전이라고 하더라도 왜 다시 새롭게 번역된 책으로 다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프롤로그에서 독서의 필요성에 대해 쓴 그의 글은 평범한 진리면서도 이 책의 집필 의도(또는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를 아주 잘 설명해 준다.

"흔히, 인간을 '도구적 인간'(호모 파베르)으로 정의하면서, 인간이 똑똑해서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똑똑해지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한 사정은 독서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듯싶습니다. 즉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집니다. 따라서 독서 능력이라는 '옵션 액세서리'는 있으나마나 한 장신구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_ 장하준

지난 30년 간 전 우주적인 절대 진리처럼 맏들어졌던 '시장 자유주의'라는 개념에 강력하게 '안다리 후리기' 기술을 건 장하준의 역작. 최근 독서일기에 언급을 했으므로 새삼 다시 할 얘기는 별로 없지만, 특히 이 책이 올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어 우리나라 인문학 독서 시장에 새로운 불을 지폈다는 건 자랑스럽게 다시 거론하고 싶어진다.

언론에서는 올해 이토록 딱딱하고 어려운 책들이 새삼 우리 독자들에게 환영을 받은 이유가 현 정부의 비도덕성, 무능력이나 세계적인 경제난을 반영한 결과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그건 이차적인 문제다. 가장 첫 번째로 꼽아야 할 것은 바로 텍스트의 우수성이다.

이 책은 일단 호기심을 자아내는 제목부터 독자들의 눈길을 확 끌고, 내용도 아주 쉽고 간단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이전 인문학 책들보다 우수한 것이다. 그러니 나같은 문외한들도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며칠 전 전철에서 이 책을 읽는 50대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다. 선입견 때문이겠지만 평소 인문학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그 아주머니의 독서 풍경을 보면서 나는 묘한 동지애까지 느낄 수 있었다.



삼성을 생각한다 _ 김용철

'이 책을 읽으면 뭐하냐? 어차피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도 삼성 꺼고, 전화기도 삼성 제품인데. 삼성 욕하면서 카타르시스는 잠깐 느끼겠지만 너라구 뭐 다르겠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차피 똥 될 거 밥은 먹어서 뭐하나, 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삼성이 힘이 셀수록, 현대가, 효성이 태영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국민들의 돈을 훔치면서도 큰 소리 빵빵 칠수록, 우리는 우리 앞에 던져진 최소한의 진실 앞에서라도 두 눈을 부릅 떠야 예의 아니겠는가.

김용철도 어차피 7년간이나 삼성밥 먹던 놈 아니냐고? 맞다. 그래서 더 대단한 것이다. 7년 동안 '호의호식'과 '장밋빛 미래'라는 마약 속에 빠져있던 한 엘리트가 뒤늦게 기적적으로 그 늪에서 뻐져나와 목숨 걸고 쓴 책이 바로 다. 어떤가? 가끔 이런 미친놈이 있다는 건 아직도 우리에게 희망이 조금 남아 있다는 증거 아닌가?


 

생각 노트 _ 기티노 다케시

  기타노 다케시는 한 번도 영화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신기하지 않은가? 기타노 다케시가 쓴 책 를 읽어보면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는 대학 시절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 것도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죽어버린다면, 이라는 두려움에 떨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횡단보도 앞에서 문득 '대학을 그만 두자'라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날로 만담가의 길로 접어든 그는 그때부터 온 청춘을 코미디에 바친다. 얼마나 열심이었냐 하면 여자와 섹스를 하는 순간에도 머릿속에서는 내일 공연할 만담 소재를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가난하게 살았던 어린 시절의 얘기도 기타노 다케시가 하면 재미있는 얘기가 된다. 고생하던 시절의 얘기도 기타노 다케시의 입을 통하면 꼭 필요한 과정이나 신기한 무용담처럼 들린다. 장애물을 넘어서는 것이 크리에이티브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유머와 새로운 아이디어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그는 참 멋진 인간이다. 진정 부러운 사람이다.

 



 2010년의 추리소설

 로마 서브 로사1,2,3,4 _ 스티븐 세일러

<로마 서브 로사>는 올해 읽은 책 중에도 가장 재밌고 뿌듯했던 작품이다. 일단 탐정물인데다가 스케일도 크고 문체도 좋고 캐릭터들도 훌륭하다. 주인공이자 사설 탐정인 '더듬이' 고르디아누스는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다. (더듬이라는 별명은 늘 사건의 자료를 수집하고 날카로운 추리를 일삼는 고르디아누스의 명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촉이 있는’ 사람 정도가 되겠다)

소설의 배경이 로마시대이고 키케로나 슐라, 스파르타쿠스, 크라수스 등 실존 인물들을 다루고 있지만, 고르디아누스만은 가상의 인물로 설정함으로써 작가 스티븐 세일러는 독자들로 하여금 매우 자유스럽고 현실적이면서도 쿨한 성격을 가진 주인공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같다. 더구나 로마 시대는 그리스도 이전 세대이기 때문인지 돈, 종교, 윤리, 섹스, 동성애(작가인 스티븐 세일러가 동성애자다) 등을 그리는 데 있어서도 훨씬 자유롭고 심지어 급진적이기까지 하다.

1권 [로마인의 피]에서 키케로와 고르디아누스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로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도 계속 으르렁거리는 사이로 나온다. 난 이게 이 소설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고르디아누스가 키케로에게 주눅이 들거나 무조건 존경하는 역할이었다면 퍽이나 무미건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존경은커녕 열심히 변론을 준비하는 키케로의 목소리를 두고 '앵앵거린다'고 빈정거리는 고르디아누스는 매우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엔 또 둘이 하나로 뭉치기도 하고.

전편에 흐르는 은근하고 현대적인 유머 감각 또한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2권 [네메시스의 팔] 초반부에서 고르디아누스가 사건 의뢰 비용을 평소 임금의 다섯 배로 부풀려 협상하는 데 성공한 뒤에 "마침내 뒷담을 보수하고 아트리움의 부서진 타일을 교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어쩌면 베데스타를 거들 노예 소녀도 하나 들일 수 있을 터..."라고 생각하며 기뻐하는 대목에선 나 혼자 킬킬대고 많이 웃었다.

<로마 서브 로사>는 문장이 참 좋다. 번역도 굉장히 좋은 편이다. 장중하면서도 유연하고 기지와 통찰력도 넘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것은 고르디아누스의 캐릭터일 것이다. 힘이 세거나 성격이 거친 것도 아니어서 늘 부상을 당하거나 위험에 처하게 되고, 또 사건을 맡아 정신 없이 동분서주하는 처지지만 결국 만화 '가제트 형사'처럼 사건 해결의 핵심에서는 조금 비껴나거나 가려지는 씁쓸한 상황들이 그를 더욱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마침 화제의 미드 <스파르타쿠스>와 소설 2권의 시대가 딱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더 즐거운 여름이었다. 난 아무래도 고르디아누스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건 이제 겨우 4권. 아직 4권은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았다. 의 춘희 말마따나 '냉장고에 일주일 치 양식을 쌓아놓은 것처럼 뿌듯'하다.

 

 


2010년의 만화

 심야 식당 _ 아베 야로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여는 심야식당이다. 메뉴는 그냥 밥하고 그날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음식 아무거나. 그래서 어떤 사람은 비엔나 소시지만 잔뜩 먹고 가고 누구는 삶은 계란을 먹고 가기도 한다. 일본 작가 아베 야로가 그리고 쓴 만화책 이다. 일본에선 드라마로도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선 소화제 '훼스탈'과 대부업체 '미즈사랑' CF들이 설정과 분위기를  일본 드라마와 똑같이 만들어서 욕을 먹기도 했다.

난 심야식당의 영업시간이 마음에 든다. 밤 열두 시부터 아침 일곱 시까지는 희망이나 활력, 출세, 메이저 등과는 거리가 있는 시간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도 되는 새나라의 어린이는 이곳에 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시간에 여기 오는 손님들은 대개 밤에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야쿠자, 형사, 호스티스, 복서, 스트립 댄서, 가라오케 가수도 있고 작곡가도 있다. 주인장은 음식을 만들지 않을 때는 담배를 꼬나 물고 있는데 눈에 심각한 칼자국이 있는 게 뭔가 사연이 많아 보인다.

들어오는 손님들마다 사소한 사연이 있고 그 얘기가 끝나면서 한 편이 마감되는 연작 만화 형식인데, 그 작은 이야기 하나 하나마다 사람의 인생이 담기는 게 놀랍다. 내공이 있는 이야기 솜씨다. 난 1권의 편을 보다가 울고 말았다. 다섯 권까지 한꺼번에 샀지만 휙 다 읽어버리는 게 아까워서 아직 3권까지밖에 못 읽었다. 박스세트로 사면 철과 자석으로 된 예쁜 메모판도 준다.

 



2010년의 고전


불멸 _ 밀란 쿤데라

작년에 나의 술친구 국동이 형을 만나서 술을 마시며 요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꼼꼼히 재미 있게 읽었다고 얘기했더니, 국동이 형은 나이 들어서 다시 읽으면 정말 좋은 책이 <불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서점에 가도 은 찾을 수가 없었다. 몇 년 전에 절판이 된 것이다. 국동이 형은 그 후로 만날 때마다 자기 집에 <불멸>있다고 자랑을 했고, 난 그걸 빌려달라고 사정을 하는 입장이었지만 만나면 늘 술만 진탕 마시고 헤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서점에 가서 미친 척하고 검색을 해보니 민음사에서 다시 찍어낸 2010년 3월 26일 자 초판이 있길래 냉큼 사서 읽었다.

불멸의 시인 괴테와 그런 괴테의 연인으로 남기 위해 평생 애썼던 베티나의 이야기. 그리고 야녜스라는 여자와 그녀의 동생 로라, 그리고 남편 폴의 이야기. 작품 속에서 밀란 쿤데라는 그 자신이자 아베나리 교수의 친구인 소설가 밀란 쿤데라를 등장시키고, 괴테와 함께 베토벤, 헤밍웨이 등을 불러내 불멸에 대한 토론을 시키기도 한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불멸과 역사에 대한 예시, 그리고 고귀함과 막장을 무시로 오가며 전개되는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의 고군분투기가 쿤데라의 요설을 타고 페이지마다 흩뿌려진다.

베티나는 온갖 노력과 협잡질 끝에 결국 역사 속 괴테의 연인으로 남아 불멸을 얻는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불멸에 대해 생각하다가 지미 카터의 예(이것 저것 한 일도 많지만 결국 조깅 도중 쓰러져 일그러진 입을 보여준 ‘우스꽝스런 불멸’ 속으로 들어간)를 통해, ‘아무리 좋은 기회가 생기더라도 섹스 비디오만은 찍지 말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꼭 얘기해야겠다는 엉뚱한 교훈을 얻었다.   

 


 안나 카레니나 _ 레흐 톨스토이

 

부러운 것 중 하나가 비교적 교양이 뛰어난 친구들(내 주변에 그런 친구들이 별로 없긴 하지만)을 보면 엄청나게 두꺼운 책들도 휙휙 잘 읽어낸다는 점이다. 난 김용 선생의 무협소설처럼 잘 읽히는 책이 아닌 경우 일단 500페이지가 넘어가면 좀 겁을 먹는 편이다.
그래도 두꺼운 책에 대한 미련을 좀처럼 버릴 수가 없었던 나는 어느날 서점에 가서 3권 짜리 를 과감하게 질렀다. 같은 3권 짜리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가 경합을 벌인 결과였다(하하, 미쳤군).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가 젊었던 시절 쓴 대작이다. 그러나 겁 먹을 필요는 없다. 길고 방대하긴 하지만 뼈대를 이루는 내용은 러시아의 귀부인 안나 카레니나가  브론스키라는 젊은 장교를 만나 바람 피우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카레니나의 시누이 키티에게 청혼했다 거절 당한 뒤 시골로 돌아가 농장을 개혁하려 하는 젊은 농장주 레빈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룬다.

결과는? 아직 반쯤 밖에 읽지 못했다. 일도 해야하고.....다른 책들도 읽어야 하고...게다가 연말연시에 술자리는 좀 많은가..... 그래도 이 책을 뻔뻔하게 '올해의 고전'에 굳이 올린 이유는? 간단하다. 따로 읽은 다른 고전이 없으니까!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