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내와 뉴스를 보다가 일기예보를 전해주는 기상 캐스터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꼭 저렇게 젊고 날씬한 여자가 나와서 날씨를 전해줘야 온도 습도가 시청자들 귀에 착착 감기는 걸까. 원래 짧았던 치마를 더 접어서 위로 올렸네. 핀바리 했네, 핀바리(쓰면 안 되는 속어지만). 

우리 주변엔 오랜 관행으로 그냥 굳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다. 저녁 뉴스의 남성 메인 앵커 옆 젊은 여자 앵커나 아나운서도 마찬가지다. 하긴 나 어렸을 땐 반장은 무조건 남자, 부반장은 여자였다. 그땐 여자 반장보다 신기한 게 남자 부반장이었다. 그리고 여자 반장도 손꼽을 정도로 없었다. 예순 살인 손석희 앵커 옆에 쉰아홉 살의 여성 앵커가 나란히 앉아 나란히 뉴스를 진행하는 신선한 광경을 보게 되는 건 아직 꿈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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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성비하 발언을 하는 건 하는 건 아마도 세계 공통인 모양입니다. 게다가 그 남자들이 공사판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 같은 경우라면 더 더욱. 여기 한 편의 광고가 있습니다. 건설현장 노동자(일명 노가다 아저씨들)가 지나가는 여자에게 냅다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어이, 아가씨 이쁜데~!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어이~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그 옷 잘 어울려요, 라고. 공손하게 말합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게 뭐지...? 하고 있는데 한술 더 떠서 "추잡한 말 하나 해줄까? 성 편견!"이라고 외칩니다. 그걸 보고 처음에는 '저것들이...' 하고 황당해 하던 여성들은 결국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립니다. 여성 차별이나 인권에 대한 공익광고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기가 막힌 반전이 있습니다. 

넌 배고플 땐 니가 아니야(You're not you when you're hungry). 

스니커즈가 글로벌 캠페인으로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바로 그 슬로건이군요. 평소엔 할 리가 없고 제정신이 아닐 때나 할 수 있는 여성 존중 멘트들이라니. 전 세계 어디서나 여성 차별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제품 특성과 유머에 버무려 역설적으로 잘 표현한 광고입니다. 

지난 해 헐리우드에서 촉발된 '미투'운동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도 페미니즘 논쟁이 굉장했었죠. 저도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지내다가 아내가 "늦은 밤 택시 탈 때 여자들이 느끼는 공포를 남자들은 절대로 알지 못해'라고 하는 말을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공부해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아주 예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남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실을. 역사를 뜻하는 단어 'History'도 남자(He)의 이야기(Story)라는 뜻이 숨어 있다고 하니 남성 중심의 역사는 참으로 길고도 끈질긴 것 같습니다. 저처럼 평소에 '공처가의 캘리'를 쓰진 않더라도 여자를 좀 더 존중하는 남자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qvnJSGjk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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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하다 토요일' 모임이 있는 토요일은 아침부터 가슴이 설렙니다. 그저 주말 오후에 같은 장소에 모여서 똑같은 소설책을 묵독한 뒤 잠깐 얘기를 나누는 것뿐인데 뭐,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막상 해보니 그 재미가 기대 이상이었던 거죠. 이번에도 그런 느낌은 여전했습니다. 

지난 달과 마찬가지로 토요일 오후 2시에 대학로 '책책'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몸이 안 좋은 분도 있고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참석을 못하게 된 분들이 있어서 결국 김인혜, 손연영, 진주 씨가 참석을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음 달엔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대신 제 뚜라미 동기인 임재섭 씨가 참석을 했습니다. 

이번 주 '독하다 토요일'에서 같이 읽을 책은 한강의 [흰]이었습니다. 한강은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죠. 저는 한강의 작품 중 [소년이 온다]가 특히 좋았는데 [흰]이 또다시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우리가 읽을 책 리스트에 이 작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흰]은 다른 책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소설'이라고는 하는데 구성이나 문체가 시집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책 앞 쪽에 한강이 '흰것들'에 대해 쓰기로 마음을 먹고 목록을 만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만약 제가 그처럼 목록을 작성하고 하나씩 단어를 선택해서 글을 썼다면 어떤 글을 썼을까를 상상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으니 한강의 흰색은 그저 깨끗하고 맑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 흰색은 죽음을 품고 있고 인생의 비애와 부조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어둠과 검은 것들이 모이고 섞이면 결국 이처럼 흰색이 되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봤습니다. 

윤혜자 씨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일단 서술방식이 시 같고 뚜렷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책 뒤에 있는 '작가의 말'을 읽고 나니까 비로소 태어난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작가의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펼쳐지는 어떤 이야기겠구나, 어렴풋이 짐작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윤혜자 씨는 무엇보다 서정적인 문체에 많이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당대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책은 존 버거의 작품(특히 [A가 X에게])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는 소감도 피력했습니다. 

정아름 씨는 '체세포 하나하나가 잠에서 깨어나는 찰나를 슬로우모션으로 보는 듯한' 이라는 멋진 소감을 전하며 입을 열었습니다. 작가가 본 것을 나도 봤을 텐데. 나는 왜 못 느꼈을까, 하는 경이가 있었고 작가의 말대로 '언니가 살아 있었으면 나는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끝에 '힘들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존재들에 대한 연민'들이 느껴진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왜 흰색일까를 잠깐 생각해 보았는데 그 흰색에는 외로움이 밑바닥까지 차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며 화자가 삼촌과 멸치잡이 배에 탔던 장면 묘사가 특히 아름다웠다고 회상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작가의 전작인 <소년이 온다>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김하늬 씨 역시 '소설과 시의 장점만을 모으면 한강의 [흰]이 되지 않을까'라는 탄탄한 소감으로 입을 열었는데 시를 쓰는 자기 친구 얘기를 하며 사진이나 시나 모두 한 장면으로 사람의 발걸음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한강의 이 책은 그런 것을 담담하게 성취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으며, 미묘하게 건조한 문장들이 다시 읽어도 좋고 급기야는 읽으면서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세 줄 평으로 표현하자면 '무섭도록 하얘서 시와 소설 사이에 서 있는 느낌' 이라 했으며 하얗게 보이려면 주위가 어두워져야 해서 그런지 자기는 수 많은 소제목들 중에서도 '어둠'이 가장 좋았다고 했습니다. 흔히 시를 쓰는 사람은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토로를 하고 소설가들은 시를 쓰는 사람을 대단하게 여기는데 한강은 둘 다를 가진 무시무시한 공력의 작가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모임에 처음 참석한 임재섭 씨는 우연히 어디서 읽은 인터뷰에서 한강 작가가 스스로 밝힌 십여 년 전과 달라진 점이 '수식어가 많이 없어졌다'라고 하던데 자기는 공대를 나와서 그런지 '수식어가 적은' 한강의 소설들이 다른 작가들의 작품보다 유난히 더 어렵게 느껴졌었다고 했습니다. [흰]을 읽으면서는 이게 왜 소설일까, 라는 의문에 시달렸고 그래서 자꾸 길을 잃다가 [채식주의자]를 사서 읽었는데 중편 세 개가 모여 장편을 이루는 모양새가 세상의 모든 것을 한 꺼풀 벗겨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독서 모임에서도 [채식주의자]를 읽었는데 작품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했습니다. 

김성희 씨는 첫 페이지에 나오는 '문' 얘기에 벌써 숨이 턱 막혔다고 했습니다. 작가의 공력에 압도된 것이죠. 그래서 이거 안 되겠구나, 하고 맨 뒤로 가서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다고 했습니다. 전작인 [소년이 온다]도 두 번을 읽었는데 그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이런 역사적인 소재를 이렇게 쓸 수 있는 작가가 있다는 게 놀랍다고 했습니다. 김성희 씨는 이 책 덕분에 황석영이나 임철우 등 광주항쟁을 다룬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찾아 읽었다고 했습니다. 굉장히 열정적인 독서를 하는 분입니다.  작가가 언니의 죽음과 허구를  섞은 구성에서 생명의 고비를 넘어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경지를 느꼈는데 특히 <흰나비>라는 소제목의 글에서는 삶이란 직선으로 뻗어가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은 물론 폴란드에서 살해된 소년의 이야기와 겹치면서 확장성을 가지는 것 같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결국 한강은 이런 다층적 의미를 선사하는 좋은 소설가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서동현 씨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도 소설도 아닌 '그녀'라는 화자가 쓴 일기장을 하얀 부분만 훔쳐 읽는 기분이었는데 하얗다는 것은 시작과 끝, 삶과 죽음 등을 상징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면서 제목이 '하얀'이 아니라 '흰'이었던 것도 좋았다고 했습니다. '흰'이라는 표현에서 의미가 더 광범위해지고 특히 <문>에서 흰 페인트를 칠하는 장면에서 촉발된 '바스락' '빳빳' '창백' 등의 의성/의태어적 감정은 이 소설이 삶에서 쓸 수 있는 지우개를 찾는 과정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서동현 씨의 말을 들으며 예전에 Procol Harum이라는 그룹이 발표한 'A Whiter Shade Of Pale'이라는 곡이 떠오른다고 했더니 정아름 씨도 마지막에 옷을 태우는 장면에서 비슷한 걸 느꼈다고 했습니다. 임재섭 씨가 신기하게도 함께 모여서 책 얘기를 해보면 그 작품이 더 좋아진다는 소회를 박혔고 이어 윤혜자 씨가 예전에 채민서가 주연한 한강 소설 원작의 영화 [채식주의자]의 헐렁한 만듦새에 대해 일이 분 간 규탄을 했습니다. 

모임 장소에 영어책을 가져와 읽어 위화감을 조성했던 임기홍 씨가 뒤늦게 작품이 너무 어려워서 읽기 힘들었다, 라고 얘기하자 여기저기서 반가운 '미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곧장 '안 되겠다 싶어서 [채식주의자]를 구해 읽었더니 정말 좋더라. 이 작품은 정말 쉽고 친절하더라. 세상에 이렇게 친절할 수가.' 라는 의견을 밝히는 바람에 사람들은 또다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기홍 씨는 '특히 <몽고반점>은 이것이 바로 소설이구나, 라고 느꼈다'라는 소회를 술술 털어놓았습니다. 

임기홍 씨의 소감에 덧대어 [채식주의자]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도 한참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흰]으로 돌아와서 한강이 아니면 이런 소설은 씌어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만약 신인 소설가가 이런 글을 써서 신춘문예 같은 곳에 보냈다면 일단 '조건 미달'로 떨어졌을 거란 얘기였죠. 그런 얘기가 공감을 얻는 것은 이 소설 뒤에 김민정이라는 뛰어난 편집자가 숨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윤혜자 씨는 이 작품을 '난다'판과 '문학동네'판으로 번갈아 읽은 경험을 거론하며 편집자인 김민정 씨에게서 들은 얘기도 전해주었습니다. 짧게 얘기하면 나중에 나온 문학동네 판은 작가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어 시집처럼 꾸며졌고 난다 판은 상대적으로 산문집처럼 구성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판본에 쓰인 사진들도 다르다는 얘기를 듣고 사람들이 새삼 번갈아가면서 책을 펼쳐 보기도 했습니다. 

김하늬 씨가 질문이 있는데 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늘 질문을 많이 하는 분입니다). 일단 소제목에 나온 '당의정'이 어떤 의미일까, 라는 질문을 했고 두 번째는 본문 중간중간에 나오는 이탤릭체는 왜 썼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윤혜자 씨가 인생의 내면은 누구나 쓰고 힘드니 그것을 잘 삼키기 위해 '당의정'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소제목이 '각설탕'이라는 얘기를 곁들이면서. 그리고 이탤릭체에 대해서는 편집자이자 시인인 김민정 씨에게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이번 모임엔 편집자인 김민정 씨도 참석해 달라 저희가 부탁을 해서 정말 올 예정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아버님의 생신과 겹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두 시간 정도가 훌쩍 지나갔고 우리는 모두 전보다 한강의 [흰]이라는 작품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여덟 권의 [흰]을 보니 뭔가 마음이 뿌듯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뿌듯함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대학로의 중국집으로 몰려가 이것저것 요리를 시키고 이과두주보다 훨씬 비싼 공부가주를 큰 것 두 병, 작은 것 한 병 마셨습니다. 모든 것은 N분의 1이라 많이 먹고 마시는 사람이 유리한 술자리였습니다. 2차를 마치고 몇몇은 성북동 꼭대기에 있는 저희 부부의 집 '성북동소행성'으로 가서 일본 소주와 와인을 더 마셨습니다. 

다음에 읽을 책은 김언수의 [뜨거운 피]입니다. 이 책은 싸구려 삼류소설처럼 읽는 재미가 있는데 도중에 의표를 찌르는 문학적 표현들도 난무하는 작품이라 했더니 많은 분들이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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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에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글을 쓰면서
내가 지금 쓰는 것처럼
문장이 맨 오른쪽까지 가서 
허공에 부딪혀 다음 줄로 가기 전에 
아무 때나 서둘러 행을 바꾸는 것은 

(또는 이렇게 맥락 없이 행을 띄는 것은) 
자기가 쓴 글이 마치 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꼼수라는, 얼토당토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니, 그게 아니라 
글을 읽는 독자의 시선이 
매번 맨 오른쪽까지 가느라
혹시 피곤하거니 주의력을 읽을까봐
노심초사한 나머지 알아서 적당히 
행을 바꿔주는 글쓴이의 노력이나 
배려가 아니었을까 하는
기특한 생각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던 찰라,  
문학동네 시인선 084 김민정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을 읽게 되었다. 

거기엔 글을 읽는 독자의 시선이
매번 오른쪽 끝까지 가느라
혹시 피곤하거니 주의력을 읽을까봐
노심초사한 나머지 알아서 적당히 
행을 바꿔주지 않는, 요 며칠 유행하는 말로
'시건방진' 시가 하나 있었으니 

이제까지 산문시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위와 같은 얼토당토한 생각을 
하던 찰라에 마침 읽은 참신하고 재미있는 시라 
한 번 소개를 해볼까 하는 생각인데. 

시의 제목과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럼 쓰나 

  만나보라는 남자가 82년생 개띠라고 했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핏덩인데요. 이거 왜 이래 영계 좋아하면서. 젖비린 내 딱 질색이거든요. 이래 봬도 걔가 아다라시야. 아다라시. 두툼한 회 한 점을 집어 우물우물 씹는데 어느 대학의 교수씩이나 하는 그가 내게 되물었다. 아나, 아다라시? 무슨 스키다시 같은 건가요? 일본어 잘 몰라서요.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그들은 웃었고 그들은 소주잔에 젓가락을 찢어 숯이니 숫이니 히로키에게 써 보였고 얌전한 히로키는 빨개진 얼굴이더니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일로 그들과의 대화에서 조용히 빠져나갔다. 동경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와 공부를 했다는 동갑내기 히로키와는 가끔 만나 커피 마시며 시 얘기를 하는 사이인데 그는 윤동주의 시를 나보다 더 많이 외우고 나보다 더 많이 베껴본 터라 내가 모르는 윤동주의 시를 토론의 주제로 삼곤 하여서 내게 반강제적으로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을 사게도 하였는데 그런 그가 한국에 와 처음 배운 단어는 밤도 아니고 별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자지라 했다. 자라고 할 때는 자지, 보라고 할 때는 보지. 그렇지. 그건 맞지. 그래서 우리말 번역이 어렵다는 얘기지. 누가 저 문장을 가르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웃음기 없이 술자리도 아닌 데서 듣는 아랫도리 사정이다보니 참으로 거시기하여 거시기하구나 하는데 그 거시기가 뭐냐 물으니 그러니까 나는 합치면 자보자라 하여 권유형 자보지가 된다며 뻘쭘하니 한술 더 뜨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얼렁뚱땅 시인의 시를
딱 한 편만 시 같지도 않은 형태로 소개하고 
이 시집엔 이런 유쾌발랄하고
귀엽게 음란하면서도 자기비하적인 시들이 
수두룩하다는 평을 슬쩍 흘림으로써 

(옆에서 내 얘기를 듣던 아내는 시인이 마치
단어들을 두 주먹 안에 넣고 저글링을 하는 것처럼 
자유롭고 통쾌한데 그 산문적  경쾌함이
매우 현대적이고 비주얼라이징하면서도 
시류에 영합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써달라 부탁을 하므로 나는 그렇게 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그 궁금함을 못이겨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이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이라는
시집을 뒤늦게 사게 만들었노라 허튼 자위를 하면서 
나는 에어컨 바람 앞에 앉아 껄껄껄 웃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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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두 번째 토요일 오후 두 시에 열리는 '독하다 토요일'의 두 번째 모임이 어제 대학로 카페 겸 서점 '책책'에서 있었습니다. 이번에 같이 읽은 책은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이라는 단편집이었습니다. 두 시 이전에 모인 몇몇 분들과 함께 먼저 각자 가져온 책을 묵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개인적 미팅 때문에 김인혜 씨가 오지 못하게 되었고 정아름 씨도 출장 후유증으로 몸이 안 좋아 참석을 못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할 수 없으니 다음 달을 기약하자 했습니다. 옆집 총각 서동현 씨는 목요일에 촉발된 숙취에 괴로워하면서도 참석해 묵묵히 책을 읽었습니다.

새로운 멤버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제 후배인 광고인 김휘중 씨였습니다. 제가 몇 주 전 술자리에서 이 모임에 대해 얘기했더니 눈을 반짝이며 자신도 참석하고 싶다고 너무 간절하게 부탁을 해서 초대했습니다. 타고난 길치라 모임 장소를 찾는 데 좀 고생을 했지만 뒤늦게 도착해 책을 읽고 작품에 대한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늦게 도착한 사람도 있고 해서 3시 반까지 책을 읽기로 했고 그 후 십오 분 정도 각자의 독후감과 세줄평 등을 정리하고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노찬성과 에반>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습니다. 에반이라는 존재는 개를 넘어서 우리가 의지하거나 붙들고 싶어하는 어떤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옆집총각 서동현 씨는 <건너편>이 너무 슬프고 리얼했다고 했습니다. 적나라했고 정말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수산시장 장면에서는 마치 '사람들이 줄돔 같다'는 생각도 했다고 했구요. <풍경의 쓸모>에서는 무리하게 연결을 원하는 아버지와 노회한 박 교수가 교차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작가의 묘사가 일상을 마구 긁어대는 느낌이고 등장하는 사건 사고들이 '느슨한 시침질처럼 꿰어져' 오히려 거대한 풍경을 이룬 게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창단 멤버였지만 지난 달 참석을 못해 이번이 첫 모임이 된 진주 씨는 <노찬성과 에반>을 읽고 자기에게도 에반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했습니다. 다들 <노찬성과 에반>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같습니다. 김휘중 씨는 자기는 평소 장르소설을 좋아하는데 김애란의 소설을 읽고 홍상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적나라하고 리얼한 느낌을 받았다 했습니다. 그는 <입동>과 <건너편>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건너편>에서 연인에게 차이는 이수의 입장이 잘 이해되어 마음 아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입동> 등의 작품들이 현실을 너무 잘 반영해서 '바깥은 여름'이라는 작품집의 제목이 뜻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했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다른 사람들은 그 사정을 모르는 게 세상 일이고 결국 산다는 다 고독하다는 게 핵심이라는 것이죠. 

 영어선생님인 임기홍 씨는 모임에 와서 또 영어책을 읽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했는데 무슨 작품이 좋았냐고 물었더니 <침묵의 미래>가 흥미로웠다고 털어왔습니다.  다른 소설과 달리 화자가 '언어'라는 게 재밌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노찬성과 에반>에서 왜 찬성이 할머니한테 '목사님이 할머니 싫어한대'라고 얘기했는지 의문을 제기해서 잠시 토론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목사님이 할머니한테 더 이상 바랄 게 없자 그런 식으로 나온 게 아닐까?'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목사님이 나쁘다는 것이죠. 저는 읽은지 좀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 했었는데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는 바람에 확 걸렸던 대목이었습니다. 

김성희 씨는 <입동>이 좋았는데 '바깥은 여름'이라는 인식 자체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 김애란의 에센스 같은 느낌이었고 그래서 이 작가의 작품은 다 영화화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먼자들의 국가]에서도 이 작가가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미리 느낄 수 있었다고 하며 지난 번 우리 모임의 작가였던 권여선보다 더 대중성이 있는 것 같다는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번 소설도 세월호 사건 때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얘기했는데 다들 그 의견에 공감해서 찾아보니 그때 이 작품을 쓴 게 맞는 것 같았습니다.

손영연 씨는 <건너편>이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마치 누가 글을 양동이로 쏟아붓는 느낌이라 했습니다. 그만큼 강렬했던 것이겠죠. 그리고 <풍경의 쓸모>에서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을 박제해 놓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결국은 '전형적으로' 살게 되는 것' 이란 느낌을 받았다 했습니다. 아버지를 돕지도 못하고 결국 교수 임용에 떨어지는 주인공의 삶도 전형적인 것의 대표격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김휘중 씨는 그게 바로 살아가면서 나이 먹어간다는 것을 사진을 통해 잘 짚어낸 것이라 말하며 김애란이 글을 너무 잘 써서 좋기도 하지만 막상 그 글을 읽어내는 게 자신과 마주하는 것 같아서 힘들고 기분 나쁘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김하늬 씨는 동료 작가와 이 작품집을  올 1월에 이미 읽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쓸 것인지를 얘기를 하느라 조금 다르게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입동>이라는 작품이 별로다,라는 생각이었다는 것이데, 그 이유가 너무 전형적으로 잘 쓴 작품이라 그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하다 모임에 와 보니 일반 독자들이 이 작품에 대해 반응이 뜨거운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는 것이죠.
그녀는 [침묵의 미래]가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의 문제를 다룬 [가리는 손]이 인상 깊었다고 했습니다. 아는 언니와 나눈 '세월호와 액체괴물' 얘기도 했습니다. 다 얘기하려면 길지만 짧게 말하면 잘 몰라서, 순수해서 오히려 잔인해질 수 있는 아이들에 대한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러자 김휘중 씨가 [가리는 손]이 정유정의 [종의 기원]이 생각나는 소설이라 인상 깊었다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정유정에 대한 소설 얘기를 중구난방으로 나누다가 결국 김애란은 잘 쓰는 소설가이며, 너무 잘 쓰다 보니 오히려 역설적으로짜증이 나기도 하다는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지만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이나 단편 <입동> 모두 압도적인 소설이라는 상찬을 나누다 모임이 끝이 났습니다.

뒷풀이는 원하는 멤버만 간다는 원칙 하에 광장시장의 '박가네 빈대떡'에 갔었는데 약속이 있다는 김하늬 씨와 손영연 씨만 빼고 모두 달려가 '빈대떡 삼합' 안주에 막걸리와 소주를 마셨습니다. 어쩌다 제가 똥에 얽힌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똥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김휘중 씨한테 옮겨가면서 또다른 똥얘기로 번져 오랫동안 각종 똥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다은 달에 한강 작가의 [흰]을 읽기로 하고 다들 무사히 헤어졌습니다. 


다들 세줄평을 발표하지 않아서 제가 쓴 세줄평만 괜히 공유해 봅니다. 

견고한 슬픔들 -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김애란의 소설은 사라진 것들이나 도달하지 못한 곳에 대한 애잔한 반추들이 있어 슬프다. 그러면서도 성실한 취재가 소설의 견고함에 힘을 보탠다. 진작에 끝나버린 연인들의 이야기 <건너편>에 등장하는 '하늘을 친구처럼, 국민을 하늘처럼' 같은 기상청의 캐치프레이즈가 그런 대목이다. 남편을 잃고 영국에 다녀온 주인공이 휴대폰 서비스 시리와 대화를 시도하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도 서글프다. 다른 단편집 [비행운]에 들어있는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를 추천한다. 그 소설을 읽고나면 김태용 감독의 영화 [만추]에서 탕웨이가 하던 대사가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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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화장실에 다녀 오다가 충동적으로 그제 서촌 벼룩시장에서 한 권에 천 원씩 주고 산 책 들 중 정이현의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을 집어 들었다. 예전에 읽은 책이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제목이 제일 낯익은 <삼풍백화점>부터 다시 읽었다. 분명 전에 읽은 소설인데도 다시 읽으니 제목 말고는 기억 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게 신기했다. 아니, 주인공인 여자애가 대학 졸업 후 구직 중이었다는 것은 어슴프레 기억이 났고 그에겐 삼풍백화점에 근무하는 고등학교 때 친구가 있었다는 게 희미하게 떠오르긴 했다. 그러나 주인공 여자가 구직의 일환으로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 삼류 에로영화 사무실에 찾아가서 사장에게 "떡 영화라고 들어봤지?"라는 질문을 받는 장면은 맹세코 전혀 새로운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장면만 건너뛰고 이 소설을 읽었단 말인가.

삼품백화점이 무너지던 날을 기억한다. 마포에 있는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 초년생으로 근무하던 나는 몇 미터 저편에 앉아 있던 선배 아트디렉터(당시엔 디자이너라는 호칭을 더 많이 썼다) 김 차장이 아내의 전화를 받으며 "어? 뭐라구?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고?" 라고 외친 뒤 즉시 켠 TV를 통해 흉측하게 무너진 분홍색 건물을 보았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바로 전 해에 성수대교가 끊어져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더니 이젠 멀쩡하던 백화점이 무너졌단 말인가. 머리가 멍해졌지만 당장 급한 카피를 쳐내야 했고 회의 준비도 해야 했다. 당장 삼풍백화점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다음날 내가 모시고 있던 카피라이터 박 부장님이 사내 카피라이터들을 불러모아 특별 점심을 샀다. 어리둥절해 하는 우리들에게 그는 '무사귀환기념 점심턱'이라고 고백했다. 전날 퇴근시간이 되기 전에 몰래 회사를 빠져나간 박 부장님은 만년필이나 하나 살까 하고 삼풍백화점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화장실이 급해 다른 곳에 잠깐 멈췄고, 내린 김에 현금인출기에 들어가 돈도 찾으려 했는데 고장이 났는지 작동이 잘 되지 않아서 시간을 좀 지체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백화점 언덕으로 올라가니 차들이 꽉 막혀 있었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교통경찰에게 물었더니 백화점이 무너졌으니 어서 차를 돌리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때 마침 화장실이 급하지 않았다면, 또는 현금인출기가 말을 잘 들었다면 자신은 지금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점심을 먹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고 부장님은 웃었다. 

소설 속 중주인공에겐 삼풍백화점에 다니던 고등학교 동창 R이 있었다. 힉교 다닐 때 친하진 않았지만 대학 졸업 후 우연히 만나 뒤로 취직을 못했던 주인공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주고 하던 순한 친구였다.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가 일기장에 '나는 오늘,'이라고 쓰던 순간 백화점은 무너졌다. 한 층이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1초에 지나지 않았다. 사고가 난 뒤 주인공은 조간신문에 난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을 읽지 않았다. 옆면에는 삼풍백화점 사고를 다룬 명사 칼럼이 있었다. 호화롭기로 소문난 강남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은 사치와 향락에 젖었던 대한민국에게 하늘이 내리는 경고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주인공은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필자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다는 독자부의 담당자에게 소리를 쳤다.

그 여자가 거기 한 번 와본 적이나 있대요? 거기 누가 있는지 안대요? 나는 하아하아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울음이 그칠 때까지 전화를 들고 있어 주었던 그 신문사 직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맙게 생각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텅 빈자리로 남아있던 백화점 자리에 2004년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이사를 갔고 그곳을 떠난 뒤에야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맨 마지막 '글을 쓸 수 있었다'는 말에서 이 소설이 어느 정도 자전적 이야기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몇날 며칠 뉴스만 틀면 삼풍백화점 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수백 시간 동안 콘크리트 잔해에 깔려 있을 때 노래를 부르며 버티다가 기적적으로 구조된 어느 이십 대 여자가 '콜라가 먹고 싶다'라고 얘기하는 바람에 어느 음료회사가 평생 그녀에게 콜라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화제였다. 우리는 마포의 사무실에 모여앉아 "나 같으면 나오면서 콜라 대신 포르셰라고 외쳤을 텐데..."같는 농담을 하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그때 모여서 웃던 사람들 중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없다. 다들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소설을 읽었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수학여행 가던 고등학생 삼백 병이 물에 잠겨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고 있는 우리들. 과연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건가,라고 소설은 뒤늦게 내게 묻는다. 그러게.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우리는 멀쩡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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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출퇴근길에 조금씩 읽었던 이상한 제목의 단편집 [관내분실]은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마침 회사 카피라이터 박수가 광고회사 사람들이 쓴 초단편집 같은 걸 빌려주며 재밌다고 하길래 뒤적여보고 나서 느낀 결론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김동식의 소설집들처럼 기발한 발상과 시퀀스로만 이루어진 소설은 내가 매우 재미없어 한다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좋은 이야기 속엔 '인간' 또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받은 게 있으면 줘야 한다는  '기브 앤 테이크 정신'으로 나도 그 후배에게 이 책을 권해줬는데 표제작을 읽고 나더니 "짱 재밌어요, 실장님!"이라고 마음껏 감탄해서 나를 기쁘게 했다. 
 
대상 작품이 표제작인 <관내분실>인데 얼마 전 첫 아이를 임신한 주인공 지민이 '마인드 도서관'에서 분실된 죽은 엄마의 자료를 찾아 헤매는 게 중심 스토리다. 어이 없게도 죽은 뒤에야 '실종' 처리가 된 엄마의 이야기로, 거기엔 도저히 화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식구들 모두에게 냉담한 남동생의 이야기가 섞여있다. 지민은 마인드 검색에 필요한 자료들을 찾다가 '김은하'라는 이름을 가졌던 엄마가 결혼 전 출판사에 다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고 그걸 토대로 '관내 분실'되었던 그녀의 자료를 찾아낸다. 이 과정 중 지민이 TV를 통해 보게 된 '인간의 영혼과 마인드는 같은 것인가?'에 대한 토론 프로그램은 작가의 과학적 지식과 존재론적 고민을 함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결과들은 부정적입니다. 마인드가 영혼이 아니라는 가장 결정적인 반박은, 그렇게 스캐닝된 시냅스 패턴이 더 이상 가소적으로 변형되지 않는다는 관찰로부터 나왔죠. 한 사람의 자아는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성장하고, 배우고 반응하고, 노화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변형되지 않는 마인드는 영혼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은 시점에서 고정되어버린, 일종의 박제된 정신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자책과 데이터로 구성된 마인드가 과연 인간의 온기까지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심이 엇갈리던 소설은 마지막에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엄마와 딸의 재회 장면을 짜릿하고 짧게 포착한다. 아마도 심사 위원 중 한 사람인 배명훈이 쓴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다. 나도 읽으면서 반가웠다. 이 작품은 분명 SF소설이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뇌과학은 잘난 체하는 첨단 지식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이해와 갈등, 그리고 새로운 발견을 위한 지렛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책 말미에 붙은 심사평들을 읽어보면 김초엽이라는 작가가 낸 단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유력한 대상 후보였는데 자신이 쓴 <관내분실> 때문에 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뛰어난 SF작가의 탄생을 예고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김초엽의 작품 말고도 김혜진의 <TS가 돌보고 있습니다>와 오정연의 <마지막 로그>도 흥미롭게 읽었다. 심사평 중에서도 재미 있는 글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울시립과학관의 관장 이정모 편이었다. 이정모 관장은 아무리 작품이 뜻하는 바가 좋고 잘 쓰여졌다 하더라도 재미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유미주의'를 내세웠는데 내게는 매우 설득력 있는 글이었다. 그리고 다른 심사위원들이 대상과 가작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에 비해 이 관장은 자기가 예심에서 골랐다 떨어진 작품들만 다루고 있다는 점 역시 특이했다. 본선에 올라야만 심사평을 받는다는 상식을 뒤엎고 낙선작들을 거론한 것이다.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의기소침해 있었을 작가 지망생들에게 이보다 더 큰 위안과 격려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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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나 우주선, A.I 등 신기한 인물이나 사건이 나오지 않는 SF를 쓰는 방법의 예를 들라고 하면 나는 대뜸 테드 창의 단편들을 얘기했을 것이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의 룰들이 이미 그 작품 속 사회에서 당연하게 돌아가고 있다면 신기한 사건이나 장치가 없더라도 소설은 이미 깊이 있는 SF, 또는 그 이상의 고전으로 완성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 대답 목록에 다른 작가와 작품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다.
 
이 장편소설은 1990년대 후반의 영국, 어느 시골 마을에 있던 기숙 학교 '헤일셤'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내는 캐시, 토미, 루스 등의 이야기다. 무대가 되는 학교에는 뭔가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흐르는데 이는 학생들이 모두 다른 인간들에게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 유전자 변형으로 태어난 클론들라는 게 밝혀지면서 풀린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또 섹스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들은 서서히 자신들이 어떤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자각하게 되고 그에 맞춰 순응하게 된다(담배를 피우면 절대로 안 된다고 강조하는 루시 선생님에게서 '네 몸은 네 것이 아니야'라는 암시가 강하게 풍겨온다).

[나를 보내지 마]라는 책의 제목은 주인공 캐시가 자신이 아기를 낳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나서 카세트 테이프로 듣게 된 노래 가사 'Never let me go, baby'에서 'baby'를 '아기'로 생각하고 인형을 흔들었다고 마담에게 오해를 산 장면에서 유래되었다. 아기를 낳지 못하므로 피임을 안 하고 섹스를 해도 된다는 사실에 오히려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런 이야기 자체를 피하게 된다. 특히 중반에 영화배우로 사는 게 꿈이라는 남학생에게 충고하는 에밀리 선생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다. 너희들은 결코 영화배우 같은 건 될 수 없어. 그저 운전사나 간병인 등으로 살아가야 해.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편의 이야기를 담은 미드 <블랙 미러>처럼 이 소설도 바이오 산업이 발달된 근과거나 가상의 세계를 담고 있는데 막상 장기 기증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클론들이 얼마나 인간처럼 살고 싶은지를 알려주는 장면들이 많다. 자신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근원자'를 찾아 몰래 외출을 한다든지 자신들에게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려 '마담'에게 전한다든지 하는 게 그것들이다. 심지어 어떤 커플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 헤일셤 관계자들이 그 진위를 가려주고 사실로 인정되면 두 사람은 몇 년 간 기증을 유예하고 함께 살게 된다는 소문까지 퍼지지만 나중에 그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마치 제인 에어가 그렸던 영국의 시골처럼 조용하고 아날로그적인 배경을 뒷그림으로 깔면서도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클론들의 서글픔을 아주 담담하고 델리케이트하게 묘사한다. 주인공들이 헤일셤을 떠나 코티지에서 만난 선배 중 헤어질 때마다 서로의 팔꿈치를 툭 치며 웃는 커플이 있었는데, 이는 TV 드라마에 나오는 인간들의 행위를 따라한 것이라는 것을 캐시가 알아채고 존재론적 회의에 젖는 식이다. 나중에 캐시는 간병사가 되어 기증자인 토미와 루스를 차례로 돌보게 되는데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그들의 과거에는 분명 성장소설적인 요소와 애증이 교차된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이 함께 들어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얘기를 알고 있음에 틀림 없다. 정말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인간의 입장을 떠나야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그 화두에 닿아 있으니까.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을 탄 직후 그의 오랜 친구인 소설가 살만 루시디는 "이시는 기타도 잘 치고 가사도 잘 써서 밥 딜런 정도는 쉽게 이긴다"라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문학의 대가들끼리 나눌 수 있는 멋진 축하인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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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vcf.co.kr/YCf/V.asp?Code=A000342766



'영화에는 예고편이 있지만 화재에는 예고편이 없습니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아...그리고 박호산이 제 동네 후배입니다, 라고 얘기했더니 심사위원들이 와하하 웃었고 저는 순간 우리 아이디어가 일 등으로 뽑힐 것을 예감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심사위원 중 한 분이 그러시더군요. 이제 공익광고도 좀 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때요? 이런 공익광고,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번 공익광고의 주제인 '화재 안전' 편은 최근 부쩍 늘어난 대형 화재 사고로 인한 피해들을 돌아보고 불의 무서움에 대한 전 국민적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만든 공익광고였습니다.  다들 모여 이런 저런 아이디어들을 내고 옥신각신하다가 막내 카피라이터 박수가 가져온 '영화 예고편' 아이디어가 재미 있어서 최종적으로 그걸 다듬고 발전시켰습니다. 연기력 좋은 모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더 좋겠다는 얘기가 있어서 제가 그 자라에서 배우 박호산에게 전화를 걸어 출연을 부탁했더니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이세돌 씨와 찍었던 '경쟁위주 사회문화' 이후 오랜만에 만드는 공익광고라 욕심을 좀 부렸습니다. 촬영날은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렸는데 문미영 감독과 스태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고 박호산과 다른 조연배우들의 열연이 있어 좋은 결과물이 나온 것 같습니다. 애정어린 마음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교조적이거나 뻔하지 않은 공익광고라 자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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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살아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무슨 연유에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일곱 살 때까지는 '나는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말해서 어른들을 걱정시켰는데 막상 여덟 살이 되어 학교에 들어가더니 단박에 모범생이 되어버렸다. 당시엔 어른들이 시키는 것은 뭐든지 열심히 하거나 잘 해야 칭찬 받는 풍토였으므로 나는 어른들의 말을 잘 들으려 노력했고 공부도 꽤 열심히 했다. 그래서 놀고 싶을 때도 제대로 놀지 못했고 군것질을 하고 싶었지만 늘 용돈이 부족해서(또는 나이보다 어른스러운 아이이므로)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약간의 반항심이 있었지만 여러가지 규율과 입시에 대한 부담, 사춘기 특유의 존재론적 방황 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반항은 할 수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약간의 자유가 생겼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과 술, 담배, 허무를 열심히 누리는 대신 학점이나 연애, 미래 설계가 펑크나기 일쑤였으므로 그것 역시 '자학'에 가까운 자유였다. 설상가상 군대엘 갔더니 자유라는 건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부대원 중 자야할 시간에 안 자고 버티는 놈 정도가 있었지만 그걸 자유라고 부르기엔 너무 서글프고 웃겼다. 

졸업을 하고 힘들게 광고대행사에 들어갔더니 선배들이 술을 사주며 우리는 영원한 '을'이라고 털어놓았다. 모든 걸 광고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대행사에서 나와 친구와 크리에이티브 브띠끄를 차려보기도 했고 CM프로덕션에 들어가보기도 했다. 이번엔 '병'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을'인 광고대행사가 시키는 대로 해줘야 하는 것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다 사실이었다. 그래서 프리랜스 카피라이터로 독립도 해봤다. 내 위엔 아무도 없고 출퇴근 시간도 없고 일도 내가 마음대로 고를 수 있으므로 일단 자유는 넘쳐 흘렀다. 그러나 내가 하고싶은 대로 몇 번 했더니 곧 통장의 잔고가 바닥이 났다.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 예전엔 왕이 있었고 지금은 기업의 회장님이나 건물주 등이 마음대로 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사장이나 왕에게 물어보면 "무슨 소리야, 나도 내 맘대로 못 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라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게 월등히 많은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 증거로 대기업의 회장님들은 대체로 장수하는 반면 이인자들은 단명한다는 통계가 있었다. 삼성이었던가, 아무튼 연봉이 수십 억원인 부회장님이 평소 소주 한 잔 이상을 마시지 않는 게 음주 철칙이었다는데 그 이유가 '회장님이 언제 찾으실지 몰라서'였다고 한다. 너무 한심하고 슬퍼서 그 기사 내용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영화 [넘버 쓰리]의 대사처럼 '일등이 다 해먹는 세상'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행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라는 심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나왔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해도 틀렸다고 말하거나 위험하다고 제지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 상황은 반복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내가 하는 일은 다 옳은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누군가 반항을 하고 경찰이나 언론에 신고를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은 CEO의 인물 됨됨이가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는 것인데, 안타까운 건 CEO가 되는 순간 공감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심리학자들의 증언이다. 그러니까 출세하더니 사람 변했다, 라는 말은 그 사람이 원래 싸가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인간의 특질이라는것이다.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요즘도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음대로 못하고 산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쩌면 그 덕분에 요즘 세상을 좀 더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부터 시작해 회장님들, CEO, 건물주님들, 아주 작은 가게의 사장님들까지, 혹시라도 내가 지금 내 마음대로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해 보라고. 물론 대단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부탁해 본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우월적인 지위에 서 본 적이 없어서, 라는 말씀만은 삼가하기 바란다. 당신이 고은이나 이윤택, 오달수, 안희정, 김기덕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일단 우월적 위치에 서 본 것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대한민국의 정계, 학계, 법조계, 문화계를 강타하고 있는 '미투운동'의 본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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