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얼마 전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싶다는 얘기를 한 게 기억나서 광복절 낮에 명동CGV 씨네라이브러리에 예약을 하고(내가 하려고 했는데 아내가 포인트가 많다고 자신이 한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가서 그 영화를 봤다. 나는 2008년도에 무슨 국가대표전 축구경기가 있던 날 저녁에 청담CGV에 가서 혼자 이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단발머리 연쇄 살인마 안톤 쉬거. 거의 십 년만에 극장에서 다시 만나는 작품이라 가슴이 설레었다.  

주인이 안톤 쉬거에게 어디서 왔냐고 무심코 물었다가 졸지에 목숨을 걸고 동전 던지기를 하게 되는 수퍼마켓 장면은 대사, 연기, 호흡까지 지금 봐도 역시 끝내준다. 이건 코맥 맥카시의 원작소설이 있지만(소설도 사서 읽었다) 역시 이건 코엔 형제표 영화라고 말하는 게 어울린다. 이백만 달러가 든 돈가방과 연쇄살인마를 먼지바람 횡횡 부는 텍사스로 불러내 인간사 전체를 차갑게 비틀며 조롱하는 이야기를 이 형제만큼 잘 할 사람이 또 있을까. 원래 조엘 코엔은 형 에단 코엔이 쓴 시나리오를 타이핑 해주다가 자기도 얼떨결에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고 겸손을 떨지만 사실은 비트켄슈타인에 대한 논문을 쓴 적이 있을 정도로 철학과 인문학에 조예가 깊다고 한다. 

영화 시작한지 120분쯤 지나면 안톤 쉬거는 교통사고를 당해 기진맥진한 상태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돈가방도 사라지고 화면이 바뀌어 늙은 보안관 토미 리 존스가 아내에게 지난 밤 꿈 얘기를 하다가 영화는 갑자기 맥없이 끝이 난다. 팽팽하던 122분의 러닝타임이 다 지나고 불이 켜졌다. 아, 어려워. 아내가 말했다. 그러게. 나도 어려워. 내가 말했다. 왜 나한테 이 영화 보자고 했어? 하하. 그러게. 근데 되게 재밌지 않아? 도대체 감독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글쎄...인생은 절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니면 인생은 누구든 잘 안 풀리게 되어 있으니 희망을 버려라...? 나, 참. 

적어도 두 가지는 분명한데, 첫 번째는 다시 봐도 무척 재미 있고 동시에 어렵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매력이 철철 넘치는 작품이라는 것. 하비에르 바르뎀처럼 센 캐릭터가 나와 진지하고 섬뜩하게 굴면서도 가끔 뻔뻔하게 웃기는 것까지 잊지 않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얼마 전 [시카리오2]에서 무시무시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던 조슈 브롤린은 또 어떤가. 번번히 살인마를 놓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보안관 토미 리 존스는 또 어떤가. 처음 이 영화를 기획할 때 코엔 형제가 쓴 시나리오를 먼저 읽은 토미 리 존스는 어디서 단발머리를 한 기괴한 사내의 사진을 가져왔다고 한다. 안톤 쉬거의 헤어스타일로는 이게 딱이라고. 사진을 본 하비에르 바르뎀은 '아, 씨발...'이라고 뇌까린 뒤 조용히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희대의 살인마 캐릭터인 안톤 쉬거가 탄생했다. 

누구든 돈가방을 보고 그냥 지나갈 순 없다. 르웰린도 마찬가지였다. 황량한 텍사스 사막 한복판에서 마약상들이 자기들끼리 총질을 하다가 죄다 죽어버린 현장을 발견했다. 다 죽었고 언덕에 있는 시체 옆에 놓인 가방엔 이백만 달러가 들어 있다. 안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르웰린은 생각한다. 어떡하든 이 돈을 가져야겠어. 그러나 안 그러는 게 좋았다. 이 돈가방을 추척하는 사람이 다름아닌 안톤 쉬거니까. 아, 그냥 잘 걸. 괜히 죽어가는 놈 물을 떠다 준다고 거길 간 게 잘못이었어. 아니면 우디 해럴슨의 제안처럼 적당히 나눠 가질걸. 그러나 이 또한 소용 없다.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결과는 별로 달라지진 않았을 테니까. 코엔 형제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러하다. 

커다란 산소통을 들고 다니다가 사람 머리에 공기 구멍을 내서 죽이는 안톤 쉬거. 그도 돈가방을 쫓긴 하지만 돈을 원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죽이기로 정한 사람을 꼭 죽이는 게 더 중요하다. 왜?  어차피 죽거나 죽이는 것 말고는 확실한 게 없으니까. 그런데 돈가방은 어디로 간 걸까.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한데,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그 느리고 무시무시한 편집감에 취해 아무 생각도 못하게 된다. 

재미 있는 이야기 하나 더. 폴 토머스 앤더슨이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찍으러 텍사스에 갔다가 아침에 여관에서 나오는데 마침 코엔 형제가 지나가고 있었다고 한다. 여긴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를 찍는 중이라고 했다나. 그 넓은 텍사스에서 그런 대가들끼리 그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참 신기한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은 그 해에 [데어 윌 비 블러드], [주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걸작들이 다 개봉을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같은 관객들에게 그건 우연을 넘어 행운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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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 전쯤인가, 저녁 시간에 집에서 만난 아내가 요즘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느냐고 인사치레로 묻길래 별 일 없었다고 하다가 마침 그날 낮 수영장에서 있었던 '조금 특별한 일'이 생각나서 잠깐 그 얘기를 해주었다.

그날 몸이 찌뿌듯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수영장에 잠깐 갔었는데 탈의실에서 옷을 다 벗고 샤워실로 들어갔더니 파우치 안에 수영복이 없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수영모자나 안경은 전에도 잃어버린 적이 있지만 수영복을 잃어버린 건 처음이었다. 할 수 없이 옷을 다 입고 밖으로 나와 카운터에서 가서 여직원에게 혹시 습득 신고가 들어온 수영복이 있는지 물었더니 없단다. 맞은편에 있는 매점으로 가서 주인 아줌마에게 새 수영복을 달라고 했다. 처음 갔을 때 내게 수영복을 무척 비싸게 팔았던 아줌마였다. 수영복을 분실했다고 했더니 아줌마가 수영복 잃어버린 게 무척 잘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새 수영복을 내주었다. 이번에도 비싸게 팔면 뭔가 항의를 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좀 저렴한 제품을 권했다. 새 수영복을 받아들고 다시 탈의실로 가서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수영복을 착용하고 수영장 안으로 들어가며 물안경을 썼더니 이번엔 물안경 끈이 툭 끊어지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물안경 없이 수영을 하면 눈이 몹시 아프고 충혈도 되는데. 할 수 없이 다시 나와 옷을 입고 매점으로 갔다. 아줌마가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며 반가워했다. 내가 물안경 줄이 끊어질 줄 어찌 알고 기다렸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아줌마가 내 카드를 디밀었다. 수영복을 사고 신용카드를 안 가져 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굳은 얼굴로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물안경도 하나 달라고 했다. 아줌마가 또 몹시 기뻐하는 환한 얼굴로 물안경을 권했다. 비싼지 아닌지 따져 볼 겨를도 없이 물안경을 들고 다시 탈의실로 가서 옷을 벗고 샤워를 한 뒤 수영복과 물안경을 착용하고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너무 흘러서 레인을 몇 번 왔다갔다 하지도 못하고 뛰쳐나와서 늦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아내가 한숨을 내쉬며 측은한 눈길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남편이 남들보다 어려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정도인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아내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없이 달밤에 대나무숲에 가서 혼자 이런 얘길 두런두런 주절이고 있으면 그 인생이 얼마나 서글프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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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감방 같은 데 들어가서 책만 읽었으면 하는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죠. 호텔에 가서 밤새도록 책만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책 읽는 펜션이 생겼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아무튼 우리나라에도 이런 생각이 유행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책 읽는 사람도 많아지고 책도 많이 팔리겠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071546011&code=970100




[김진우의 도쿄 리포트]24시 책 아파트·책 호텔…일본, 이색 독서 공간 ‘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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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누군가 생을 달리 하셨을 때 우리가 위로를 전하며 흔히 하는 표현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가는 곳을  명부(冥府)라고 하므로 명복(冥福)을 빈다는 말은 고인이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으로부터 심판을 잘 받고 복을 누리기를 바란다는 뜻이라 합니다. 참으로 상투적인 말이지요. 그러나 막상 이 표현 말고 다른 말로 같은 뜻을 전하기도 참 힘든 게 사실입니다. 얼마 전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이라는 책을 낸 김민정 시인이 오늘 올린 황현산 선생님의 부음 포스팅에 저도 명복을 빈다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이전의 책 [밤이 선생이다]부터 황 선생을 곁에서 모시고 흠모했던 김 시인의 슬픔이 그 누구보다 클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사소한 부탁] 중 <날카로운 근하신년>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근하신년이라는 네 글자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나 '해피 뉴 이어'에 밀려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 같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칼럼은 이런 상투적인 말도 처음에는 굉장히 날카로운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때로 누군가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끼치던 언어였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젊은시절 불운했던 어느 친구의 얘기를 들려줍니다.  고향에 노모를 두고 서울로 올라가던 그 친구는 고속버스 안에서 안내원이 해주는 "손님 여러분의 행운과 가정의 평화를 빈다"는 인삿말을 그날따라 유심히 들었다고 합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문득 가슴을 파고 든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길로 월부 책 장사를 시작해 지금은 조그만 건물을 소유할 정도로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그때 고속버스 안내원의 말을 귀담아 들은 덕분에 자신에게 행운이 찾아온 것이라고 믿고 있답니다. 

어쩌면 모든 상투적인 말이 다 비장한 말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늘 염원하면서도 내내 이루어지지 않았던 희망을 그 상투적인 말이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끌어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이 상투적인 말이 되도록 놓아둔 것은 늘 보던 것 외에 다른 것을 보려 하지 않는, 다른 것을 볼까봐 오히려 겁을 먹는 우리들의 나태함일 것이 분명하다. 말은 제 힘을 다해 우리를 응원하는데, 우리가 먼저 포기해버린 탓일 것이 분명하다. 상투적인 말들도 처음에는 그 날카로운 힘이 우리의 오장에 파고들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말이 나를 넘어뜨리고 내 안일을 뒤흔들 것이 두려워 우리가 철갑을 입을 때 말도 상투성의 철갑을 입기 시작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인들이 말의 껍질을 두들겨 그 안에서 비장한 핵심을 뽑아내려고 사시사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투적인 말들이 갖는 의미를 헤아리다가 '말의 껍질을 두들겨 그 안에서 비장한 핵심을 뽑아내려고 사시사철 애쓰고 있는' 시인들에게로까지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황현산 선생의 따뜻한 사유의 힘이 그립습니다. 그리하여 저도 할 수 없이 상투적인 말을 하나 더 보태겠습니다. 황현산 선생님,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오늘 저희는 또 하나의 반짝이는 별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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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책은 '독하다 토요일'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일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을 약간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는 '독하다 토요일'이 시작된 이래로 가장 흥미진진한 장편소설을 선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김언수의 [뜨거운 피]는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1990년대 노태우 정부 시절 부산 바닥에서 활동하던 건달 희수의 얘기. 대학로 책책에서 열린 '독하다 토요일' 네 번째 모임은 이 책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은 지난 모임 직후 바로 후기를 써서 올렸어야 했는데 제가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계속 미루다가 이제라도 써야지 하고 수첩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그날 모임엔 오랜만에 참석한 손영연 씨, 그리고 윤혜자 씨, 김하늬 씨, 임기홍 씨, 서동현 씨, 임재섭 씨 등이 왔습니다. 재미있긴 하지만 소설이 워낙 두껍다 보니 미처 다 읽지 못하고 온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두 시부터 세 시 넘어서까지 묵묵히 책을 마저 읽는 분위기였습니다. 느와르 영화 같은 소설이라 여자분들보다는 남성들이 더 열광하는 눈치였습니다.  임기홍 씨는 학교 선생님이라 정말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비참한 상황에서 사는 학생들을 대할  때가 많은데 막상 그 어떤 것도 해줄 수가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많이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이 참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제가 소설을 읽고 건진 교훈 중 하나가 '더러운 걸 참아야 싸움에서 이긴다'라고 했더니 윤혜자 씨가 자기는 평소에 그런 걸 잘 못해서 안 되는 모양이라고 하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임재섭 씨는 얼마 전 일을 지지부진하게 만들었던 실제 인물 얘기를 하며 그때 후배가 했던 말, '형, 비즈니스는 그게 **전자 안이라고 해도 다 개새끼에요!'를 기억했습니다. 신사적이고 점잖은 사람은 꿈속에서나 존재하는 법인가 봅니다.  

그러자 김하늬 씨가 얼마 전 직업여성이 쓴 책을 읽었는데 그게 소설에 나오는 인숙과 비슷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불행의 모습은 어딘가 비슷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다가 영화 [변산] 얘기가 나와 전라도 사투리 애기를 하다가 잠깐 각자 알고 있는 충청도 사투리에 대한 유머를 털기도 했습니다('너만 안 지치면 되어야~', '출튜?' 등등). 

저는 어쩌면 이 소설이 '이야기의 원형'에 충실한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부영화처럼 왕년에 잘 나갔지만 지금은 쇠락한 주인공이 등장한다든지 탁구 치듯 재기발랄한 대사들을 주고받는 건달들이 나온다든지 하는 모양새가 그랬습니다. 윤혜자 씨는 일단 자기 취향이 아닌 소설을 읽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하면서도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언제 자기가 이런 소설을 읽어보겠냐며 '페이지 터너'스러운 이 소설의 흡입력에 감탄했고 만약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게 되면 희수 역을 누가 하면 좋을까를 상상해 보았다고도 했습니다(일단 희수 역은 황정민). 

손영연 씨는 요즘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실화는 감정이입이 잘 안 되는 편인데 오히려 이 작품은 자신이 사는 세상과는 너무 다른 얘기이기도 하고 완전한 픽션이라 더 재미있게 읽혔다고 했습니다.  물론 앞부분의 길고 오밀조밀한 설정은 좀 버거웠다고 했습니다. 감하늬 씨도 앞부분을 너무 깔아놓는 게 지겹고 힘들었다며 그런 점이 이 소설의 '진입장벽'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요즘 소설들은 그런 설정 없이 막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친구들과 글 쓰는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쓰는 도중에 심각해지고 그렇게 쓴 걸 나중에 읽다보면  '삶도 힘든데 이런 걸 왜 읽어야 해?'라는 자괴감에 빠진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고전은 예전 작품인데도 오히려 처음부터 그냥 막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라 신기하다고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주인공 희수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김하늬 씨는 빨래공장 관련 에피소드에서 정배와 나누는 대사들과 그 처리 방법 등에 대해 얘기하면서, 사람들이 바라는 이미지 대로 살아가는 희수의 캐릭터가 다지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겹치기도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도대체 작가가 이 이야기들의 취재를 어떻게 했을까 궁금해 했습니다. 손연영 씨는 90년대 장현수 감독의 영화 [게임의 법칙]이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서동현 씨도 건달들 얘기를 글로 설명하려다 보니 앞부분이 좀 길어진 것 같다고 하면서도 여러가지 한국 느와르 영화들이 생각나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비열한 거리], [해바라기], [넘버쓰리] 등등). 살면서는 결코 만나기 힘든 인물들이지만 영화나 소설에서는 매력적인 캐릭터들 말입니다. 매번 모임 때마다 질문을 하는 김하늬 씨가 이번에도 사건을 제안하는 친구 양동과 용강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했는데 너무 시간이 지나서 질문 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메모를 띄엄띄엄 한 결과겠지요. 죄송합니다. 

저는 [형사 매드독]의 제임스 벨루시나 [분노의 주먹]의 로버트 드 니로 등 보스들이 나중에 나이가 들어 클럽에서 스탠딩 코미디를 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깡패의 미덕은 주먹만큼이나 '구라'에 있다고 말했더니 윤혜자 씨도 '칼로 죽이든 말로 죽이든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게 그 세계'라고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희수 역에 박호산을 쓰면 어떨까 애기를 하는 바람에 다시 장진영, 장신영, 전도연 등 일급 배우들이 인숙 역으로 다시 한 번 물망에 오르기도 했습니다(어차피 돈 안 드는 캐스팅이라 생사여부도 상관이 없는 게 특징). 

임재섭 씨는 '여기서 뒷부분 얘기 하면 안 되냐?'며 스포일러로서의 욕망을 토로했지만 아직 끝까 안 읽은 사람들이 많아서 뜻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이  소설은 뒷부분에 몇번이나 뒤집어지는 '반전'이 읽는 맛을 더해주는 바람에 한 번 잡으면 밤을 새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임기홍 씨는 이 소설조차도 성장소설로 읽혔다고 토로했습니다. 나이 서른에도 마흔에도 쉬흔에도 사람은 자란다는 것이죠. 희수의 인생역정을 보면 확실히 그런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그러면서 '소맥'에 대한 멋진 비유를 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역시 죄송합니다). 

책에 대한 수다를 마치고 모두 일어나 을지로에 있는 '영락골뱅이'에 가서 골뱅이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아무말 대잔치'를 이어갔습니다. 이차는 '태성골뱅이'였는데 역시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다음엔 SF소설을 쓰는 배명훈의 소설집 [안녕, 인공존재!]인데 역시 제가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벌써 8월 11일이 기다려집니다. 모두들 무더위에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사족으로 제가 쓴 세 줄 평을 첨가합니다 : 

인생의 진리는 고매한 지위나 인격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나오지 않는다. 시궁창에서 딩굴며 악에 받친 인간들끼리 목숨 걸고 싸우거나 한편이 될 때 기름기 쏙 빠진 금언들이 하나씩 튀어나온다. [뜨거운 피]가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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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은 이런저런 사연을 가지고 모여 사는 유사가족 이야기다. 영화에서 구성원들은 할머니의 연금과 가족들의 좀도둑질, 성인업소 알바 등으로 연명하는데 이는 그리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고레에다 감독은 과연 혈연으로 엮이거나 정식 결혼을 통해 공인받은 가족만이 행복을 담보하는가 묻고 있다. 그래서 친부모에게 폭행을 당하던 유리를 데려다 키운 사람들은 유괴범이 되고 정말 마음으로 아꼈던 할머니가 죽자 신고하지 않고 집 안에 파묻었다는 이유만으로 유기죄를 받게 되는 걸 냉정하게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는 각본이나 연출도 좋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연기력을 선보이는 배우들을 보는 맛이 각별하다. 그의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키키 키린이나 릴리 프랭키는 물론이고 [백엔의 사랑]으로 일본 열도를 들었다놨던 명배우 안도 사쿠라의 연기가 그야말로 빛을 발한다.


일요일 조조로 영화를 보고 나왔다. 어린 여동생 유리를 데리고 물건을 훔치던 소년 쇼타에게 '여동생에겐 시키지 마'라며 가게의 물건을 그냥 내주던 문방구 할아버지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피가 섞이든 아니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려는 태도는 결국 이런 '어른스러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작품은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도 그렇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중 바로 전 작품인 [세번째 살인]이 유일하게 싫었는데 이 영화는 다시 좋았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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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IP-TV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았다. 제목부터가 멋지다. 워낙 좋다는 소문을 많이 들어서 진작부터 보고싶기는 했지만 바빠서 극장에서는 놓치고 말았다.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여름을 보는 것만을도 좋은데다가('관객들으르 햇살에 취하게 만들자' 라는 게 감독의 의도였다고 한다) 주연을 맡은 티모시 샬라메와 아미 해머의 매력과 연기도 매우 뛰어나다. 나는 퀴어영화는 슬퍼서 좀 망설이는 편이다. 토드 헤인즈의 [캐롤] 때도 느꼈는데 동성이라서 더 애절한 그들의 사랑은 늘 아슬아슬하고 불행의 씨앗을 품고 있다. 다행히 이 영화에서는 어린 엘리오의 부모가 올리버와의 사랑을 용인하고 위로까지 해주는 편이어서 그나마 견디기가 쉬웠다. 

영화를 보면서 역시 여름은 '청춘'에게 어울리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각적이고 안정된 연출력 덕분에 1983년 이탈리아의 여름 풍경과 과즙 같은 공기의 느낌까지 두 시간 내내 아름답게 펼쳐진다. 어젯밤 과음으로 오전 내내 누워있던 아내가 무슨 영화 보냐고 묻길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고 했더니 그런 걸 왜 당신 혼자 보냐고 화를 냈다. 영화가 끝나고 검색을 해보니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전에 [아이 엠 러브]를 만들기도 했단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비슷한 정서가 많은 영화다. 더 놀라운 것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시나리오 각색을 했다는 점이다. 이런 청춘영화를 89세 노인이 쓰다니. 대단한 할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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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에 예약해 놓은 조조영화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를 보러 토요일 아침에 CGV용산아이파크몰에 갔다. 밤늦게 찾아온 후배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으므로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화 볼 시간을 내기 힘드니 숙취에 시달리거나 아침을 굶는 것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매장이 워낙 넓어서 여긴 올 때마다 길을 헤맨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쇼핑몰 사이를 헤매다 겨우 극장을 찾아내 들어가니 내 자리가 있는 열엔 60대 할머니 여섯분이 쫘악 앉아계셨다. 내가 나의 좌석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한 할머니가 "여기 맞아요, 자리"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일어설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다 일행이세요? 그럼 제가 저쪽에 앉을게요, 라고 줄 끝을 가리키자 다들 그게 좋을 것 같다며 맞장구를 쳤다. 자리야 얼마든지 양보해 줄 수 있지만 이 분들은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떤 건지는 알고 오신건가,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고 심각하고 잔인하게 사람 많이 죽어나가는 영화인데. 오래 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를 볼 때 만났던 할머니 두 분이 떠올랐다. 영화 초반 얼치기 킬러가 이발소에서 면도칼로 손님의 목을 그어 살해하는 씬에서 걱정을 했었으나 중반쯤 보니 영화 도중 여유있게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시던 그 할머니. 

아무튼 영화가 시작되었다. 전편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기대감이 컸다. 여전히 묵직하고 사실적인 진행, 강렬한 총격씬, 배우들의 존재감 등 어떤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영화였다. 특히 투탑인 베니치오 델 토로와 조슈 브롤린의 연기와 카리스마는 끝장 그 자체다. 시나리오도 역시 좋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확인해보니 1편 '암살자들의 도시'도 썼던 요즘 정말 잘 나가는 각본가 테일러 셰리던의 작품이었다. 그는 작년 개봉했던 [로스트 인 더스트]의 각본도 썼다고 한다. 배우 출신인데 이렇게 잘 쓰다니 정말 놀랍다. 한 십 년 전 날고 기던 배우 출신 각본가 아론 소킨이 생각났다. 정치드라마 [웨스트 윙] 등 미니시리즈 각본을 많이 썼던 그가 아주 수다스러운 편이었다면 테일러 셰리던은 꼭 필요한 대사만 하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며서 구조를 잘 짜는 작가다. 이번엔 전작에서 신참 여성 요원 케이트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엘밀리 블런트가 빠져서 너무 아쉬웠지만 그건 1편에 비해 그렇다는 얘기지 작품 자체만 놓고 본다면 너무 큰 욕심이라 할 수도 있겠다. 스테파노 솔리마 감독도 뚝심있게 이야기를 잘 이끌어 간다. 그러나 전편의 드니 빌뇌브 감독이 그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총격전 등 액션은 한층 강화되었으니 눈호강, 귀호강이야 더할나위 없이 했지만 절절했던 등장인물들의 사연이 1편에서처럼 새롭지 않으니 너무 매끈하고 정석적으로 흘러간다는 일말의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맨 마지막에 죽을 뻔하다가 살아 돌아온 베니치오 델 토로가 자신의 머리에 총을 쐈던 어린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이 닫히는 장면 이후 뿌듯한 마음으로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다가 옆좌석을 살펴보니 할머니들은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 그 분들은 이 영화에 대해 뭐라 영화평을 남기셨을까. 3편의 제작이 확정되었고 그 작품에선 드니 빌뇌브 감독이 다시 복귀할지도 모르다던데 그 때도 극장에서 나와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까. 모두 젊고 건강한 편이셔서 충분히 시리즈 세 번째 작품도 보러 오실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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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빼어난 산문집 [자전거 여행]이 100쇄를 넘긴 것은 작가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마추쳤던 만경평야나 문경새재 등 한반도의 아름다운 풍경들과 거기에 스민 깊은 사유 뿐만이 아니라 언덕길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듯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단호하고도 치밀한 문장들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는 아직도 컴퓨터 대신 종이 위에 연필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아닐로그형 작가'인데 이는 우연히도 이반 일리치가 설파하는 자전거의 효용과 꼭 닮았다. 

(작가의 이름을 대하면 왠지 솔제니친이 쓴 소설의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가 생각나지만 전혀 상관 없고)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신학과 철학, 역사학 등을 공부하고 한때 사제이기도 했었던 이반 일리치는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이 발명한 교통수단들의 속도를 통해 우리 삶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지를 통찰한다. 

인간의 자아성은 생활공간 및 생활시간을 덧붙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이 이동하는 보폭에 의해 통합된다. 만일 이 관계가 인간 자신의 이동능력이 아니라 수송수단의 속도에 의해 결정되면, 인간은 공간의 설계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단순한 통근자의 위치로 전락하고 만다.

근대 이후 도시인들은 늘 시간이 없고 바쁘다고 아우성을 치며 살고 있다. 문명과 기술이 발달할수록 생활은 편리해지는데도 삶의 여유는 더 없어지는 아이러니는 왜 일어나는걸까. 그는 교통수단의 속도가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그 절약된 시간을 누군가 독차지하게 되는 '시간 횡령'이 일어난다고 간파한다. 즉, 인간의 이동 속도가 자전거를 넘어서면서부터 불공정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도 'Energy and equity(시간과 공정성)'이다. 우리가 매일 타는 승용차, 지하철, 버스 등은 우리를 멀리 있는 회사나 일터로 실어나른다. 필요하다면 누군가는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멀리 간다. 그런데 이러다 보니 기차나 버스를 타는 사람보다 비행기를 타는 사람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겨난다. 속도의 차이가 결국 시간의 가치에서도 차별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당신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가르쳐주겠다."

우리는 지금 만 원 정도면 점심 한끼를 가쁜히 해결할 수 있지만 조지 소로스와 점심을 먹으려면 백만 달러를 내야 한다. 물론 이건 호사가들의 '돈지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지만 어쨌든 우리의 시간보다 그의 시간이 훨씬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뜻이 되겠다. 이반 일리치는 자전거를 탄 사람은 보행자보다 3~4배 더 빨리 갈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는 5분의 1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왜 이렇게 자꾸 자전거 얘기를 꺼내는 걸까. 설마 그가 우리에게 자전거를 팔아먹으려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닐 텐데. 

자전거는 인간을 더 빠른 속도로 이동시키면서도 공간이나 에너지나 시간을 특별히 더 많이 빼앗지도 않는다. 자전거 이용자는 거리 당 이동시간을 적게 쓰면서도 연간 이동거리를 늘릴 수 있다. 타인의 일정이나 에너지 또는 공간을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기술 도약이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동료들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대로 자기 이동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스티브 잡스 이후 인문학 바람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우리가 뒤늦게라도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는 것은 인문학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고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이반 일리치가 자전거를 예찬하는 것도 전 세계인이 다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에 올인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라는 책 제목은 칠레 아옌데 정부 법무부차관보의 말 '사회주의는 자전거를 타고서만 올 수 있다'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에게 자전거는 'ideal'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징일 뿐이다. 자전거를 이용한다는 것은  기계 문명에 몸을 던진 현대인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제어를 시도한다는 뜻이니까. 그런 대안을 생각해본 사람과 안 해본 사람의 태도는 분명 다를 것이라고 이반 일리치는 믿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전거로 인문학하기'라고나 할까. 이는 책 맨 뒤에 '<이반 일리치 전집>을 펴내며'라는 글에 있는(안희곤 대표가 쓴 것으로 짐작되는) "이성으로는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대로"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해설 빼고 본문만 치면 100페이지 정도밖에 안 되는 이 책이 말하려는 건 우리 모두 자전거를 타자는 게 아니라 보다 바람직한 대안을 가슴에 품고 살자는 얘기로 읽힌다. 1974년도에 이런 인사이트풀한 생각을 발표했다는 게 얼른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하룻밤 사이에 읽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상주의자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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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 우리 동네엔 특이한 담배 가게가 하나 있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밤새도록 무릎 위에 담요를 덮고 앉아 조그만 유리창을 통해 담배를 팔던 곳이었다. 구파발 시장 입구에 있던 그 가게는 열두 시가 넘으면 불이 꺼지고 터미널 티켓 창구처럼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는 유리창 앞엔 삐뚤삐뚤한 필체로 '절대 두드리지 마시오'라는 빨간색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담배가 필요하거나 늦게 귀가하는데 담배가 떨어졌을 때면 유리창 앞에 가서 "할아버지" 또는 "저기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면 정확히 1초 뒤에 '똑'하고 작은 스탠드 불이 켜졌고 정확히 원하는 담배와 거스름돈을 받을 수 있었다. 만약 할아버지가 써놓은 안내문을 무시하고 아주 약하게라도 유리창을 두드리게 되면 불을 켠 할아버지에게 눈이 멀었냐는둥 온갖 욕을 먹어야했고 그 날 담배는 절대로 살 수 없었다. 나름 고집이 있는 할아버지였는데. 지금은 아마 돌아가셨을 것이다.  

'세븐일레븐'이라는 24시간 편의점이 처음 생겼을 때 내 친구 동생은 "오빠, 우리 이제 새벽에도 집에서 술 마실 수 있어!"라고 감격스러워 했다지만  내가 처음 그 곳에 들어가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밤중에도 대낮같이 밝은 형광등의 불빛이었다. 거기엔 '도대체 이 늦은 밤에 어떤 미친 새끼가 뭘 사러 온 거야?' 따위의 불평이나 신경질이 없었다. 새벽 두시에 가도 떳떳한 동네 가게.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모든 상품은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고 한쪽 테이블에서는 간단하게 컵라면이나 커피 등을 먹을 수도 있었다. 어렸을 때 동네마다 있던 구멍가게와는 차원이 다른 삶이 펼쳐지는 순간이었고, 그 내용의 한 축은 한밤중이 되어도 자지 않고 일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게 당연한 디스토피아의 시작이기도 했다.

내년도 최저임금이 올해보다 10.9% 오른 시간당 8,350원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요 며칠 사이 편의점주들의 반발이 거셌던 것이, 알바생들 시급을 만 원까지 올려주면 점주들은 남는 게 없으니 차라리 편의점 문을 닫겠다는 입장까지 나왔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편의점주들이 유난히 나쁜 사람들이라 이러는 건가. 아니다. 세상에 그냥 나쁜 사람은 없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나쁜 사람과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낼 뿐이다. 저녁 뉴스에서도 아침 시사프로그램에서도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정리해 보면 핵심은 '갑의 횡포'에 있다. 여기서 갑이란 프랜차이즈 본사와 건물주를 말한다. 편의점 사업을 하는 대기업들이 워낙 많은 돈을 가져가니 남은 돈으로 점주와 알바가 나눠가지려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건물주들이 갑자기 월세를 올리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들과 싸워서 이겼다는 사람을 아직 나는 보지 못했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했을까. 

"문제는 몇백 원 오른 알바 시급이 아니라 높은 임대료나 프랜차이즈 본사에 내는 비용이다. 이건 ‘갑’을 제쳐놓고 ‘을’이 ‘을’에게 화를 내는 식이다" 

을과 을의 싸움에 대해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읽은 기사 내용 일부다. 배가 부르지만 늘 배고프다고 하는 갑들은 팔짱 끼고 구경만 하는데 죄 없고 힘 없는 을들끼리 멱살 잡고 싸우는 모습이란 얼마나 비참하고도 슬픈가.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오전 “최저임금위원회의 결정으로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목표는 사실상 어려워졌다. 결과적으로 대선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을 사과드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의 사과에서도 알 수 있듯 당장 1만 원으로 올릴 수는 없다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계속 알바생들만 조질 수도 없는 일이다. 보다 큰 호흡과 안목으로 정책을 정비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기업이나 건물주들은 일제시대에 친일파 말고도 지주나 돈 많은 부자들이 왜 그렇게 민중들의 미움을 받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아무리 유발 하라라가 [호모 루덴스]에서 얘기했듯이 "자본주의에서는 그만 하면 됐으니 멈추라고 하는 법이 없다"고 하지만 당신들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닌가. 당신 옆에서 어떤 사람들은 단 돈 몇 백, 몇 천만 원에도 자살을 하는데.  

오늘도 우리는 편의점에 간다. 밝고 반듯반듯한 진열대가 있고 누구나 선량한 시민들로서의 권리를 똑같이 누릴 수 있는 편의점.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작년에 무라타 사야카가 쓴 소설처럼 '편의점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 구멍가게가 가지고 있던 촌스러움과 따뜻함을 포기한 대신 메마르고 익명성 넘치는 자유만 쓸 데 없이 만끽하게 된 슬픈 인간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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