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녀를 본 날>

일요일 한낮에 햇볕이 내려쬐는 날씨를 무릅쓰고 요즘 흥행작인 <마녀>를 보러 갔다. 사실은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 팬이라 간 것이었다. 제목이 '마녀'라 당연히 느와르 영화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뮤턴트 히어로물이었었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일본 애니메이션을 각색해서 요즘 영화로 다시 만든 느낌이었다. <악마를 보았다>나 <부당거래> 시나리오를 썼던 박훈정인데 도 불구하고 영화 앞부분이 지루하고 유머코드 역시 애매했다. 이 인간이 미쳤나. 여주인공이나 그의 친구 연기도 아쉬웠고 그리고 특히 베테랑 조민수의 연기가 별로였다.

내 옆엔 혼자 온 주제에 영화 상영 내내 커다란 팝콘통을 뒤지며 음료수 두 통을 먹고 마시는 미친놈이 있었다. 괴력을 가진 영화 인물들이 잠깐 스크린을 찢고 나와 그놈을 죽여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으나 오늘따라 스크린과 객석의 구분이 유별하였다. 영화는 별로였고 날씨는 뜨거웠다. 집으로 돌아와 동네 성북동의 단골식당 '디미방'에 가서 닭도리탕을 시키고 다음주 고로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떤 가족]이나 보자고 아내와 합의를 하며 송명섭막걸리와 한라산을 나눠 마셨다.



Posted by 망망디
,




며칠 전 아내와 뉴스를 보다가 일기예보를 전해주는 기상 캐스터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꼭 저렇게 젊고 날씬한 여자가 나와서 날씨를 전해줘야 온도 습도가 시청자들 귀에 착착 감기는 걸까. 원래 짧았던 치마를 더 접어서 위로 올렸네. 핀바리 했네, 핀바리(쓰면 안 되는 속어지만). 

우리 주변엔 오랜 관행으로 그냥 굳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다. 저녁 뉴스의 남성 메인 앵커 옆 젊은 여자 앵커나 아나운서도 마찬가지다. 하긴 나 어렸을 땐 반장은 무조건 남자, 부반장은 여자였다. 그땐 여자 반장보다 신기한 게 남자 부반장이었다. 그리고 여자 반장도 손꼽을 정도로 없었다. 예순 살인 손석희 앵커 옆에 쉰아홉 살의 여성 앵커가 나란히 앉아 나란히 뉴스를 진행하는 신선한 광경을 보게 되는 건 아직 꿈인 걸까. 



Posted by 망망디
,

어떤  극장은 장소 이전에 그 자체가 추억이요 고유의 작품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는 '명동 엘칸토예술극장'과 '삼일로 창고극장'이 그런 경우인 것 같다. 아직 감수성이 여물기 전인 십대 후반에 처음 연극을 봤던 곳이 바로 이 극장들이었으니까. 나는 여기서 추송웅이 번역, 연출, 연기 등 거의 모든 것을 도맡아 했던 화제의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보았다. 당연히 초연은 아니었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 앵콜공연을 할 때 보았던 것 같다. 창고극장은 운영 상의 문제로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나중에 '떼아뜨르 추'라는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런 명동의 추억들 말고 더 추가하자면 송승환이 출연했던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을 보았던 광화문의 '마당세실극장'과 운석화 윤소정의 [신의 아그네스]를 보았던 명륜동의 '실험극장' 정도였을까.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을 해석한 작품들이 재개관 기념극으로 새로 올라간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전화 예매를 했다(인터넷으로 예매하려다가 이런저런 난관에 부딪혀 결국전화를 했다). 내가 표값 4만 원을 카드로 계산하겠다고 하자 담장자가 놀라서 물었다. 무슨 통신할인이나 하다못해 배우할인이라도 없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4만 원 을 계산할 테니 예약을 해달다고 했다. 제 값을 안 내고 보는 게 추세이다 보니 이런  해프닝이 생기는 것  같아 씁쓸했다. 

우리가 예매한 작품은 [빨간 피터들] <추ing_낯선 자>라는 작품이었다. 신유정 연출에 하준호 배우가 출연하는 모노드라마였다. 40 여 분 정도의 짧은 작품이라고 했는데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무대와 객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바닥에 놓인 스툴에 관객들이 앉아 있으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 연극은 무대와 객석이 따로 구별되어 있지 않으니 적당한 의자를 골라 앉으시면 되고 조금 있다가 배우가 나와 연기를 하다가 관객 가까이 가더라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라'는 안내멘트였다. 우리는 웃으며 배우를 기다렸다. 연극영화과를 다니는 듯한 젊은 관객들이 많았다. 

불이 꺼지고 어디선가 배우가 나타났다. 바지를 입고 웃통을 벗은 원숭이 분장이었는데 코를 뒤집어 원숭이처럼 꾸미고 가슴과 등에 털을 달아서 언뜻 보면 진짜 원숭이 비슷하기도 했다. 말을 전혀 하지 않고 원숭이처럼 '기긱', '우우~' 소리만 내는 무언극이었다. 잠시 후 천정에서 땅콩이 후두둑 떨어지고 배우는 그 땅콩을 집어던지며 관객들과 이야기거리를 만들어갔다. 우리는 흡사 진짜 원숭이를 본 것처럼 놀라워했고 수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혼자 원숭이 역을 잘 해내고 있는 배우를 보며 감탄했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순간순간 달라지는 연기이기에 배우 관객 모두 빠른 순발력이 필요했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에 서로 신기해 하거나 뿌듯해했다. 순간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혼란스러웠다. 원숭이 역을 하고 있는 배우를 진짜 원숭이로 여겨야 하나, 아니면 원숭이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배우로 봐야 하나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원작자인 카프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고 왕년의 각색자인 추송웅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으며 새롭게 추송웅과 카프카의 작업을 재해석한 연출가 신유정과 배우 하준호가 원하는 바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부가 끝나고 암전 후 웃도리를 차려 입은 하준호가 나와 2부를 시작하면서 극은 새로운 활기를 띄었다. 하준호는 잘 나가지 못하는 연극배우 역할을 했는데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중간중간 관객들을 툭툭 건들면서 자신의 위치와 생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배우로서의 애환이나 개인적인 역사를 드러내던 배우는 돌연 다시 원숭이가 되어 무대 위를 훨훨 날아다니다가 끝을 맺었다. 배우가 끝내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하고 다시 원숭이로 돌아간 것 같아 슬펐다. 

그런데 왜 원숭이일까. 

설마 이 기회에 원숭이의 생각이나 삶을 들여다보자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에 늘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인간과 닮은 '원숭이 메타포'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영화 [혹성탈출]도 마찬가지다. 원숭이의 눈을 통해 들여다 볼때 인간의 모습은 더 적나라하게 보이지 않던가. 그래서 '빨간 피터'라는 원숭이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고 추송웅의 작업을 재해석한 일련의 작품들도 2018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나름의 의의를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40여 분의 짧은 러닝타임이었지만 느낀 바가 많았고 신선한 자극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좋은 연극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연극이라고 해야할지 퍼포먼스라고 해야할지 약간 헷갈리긴 하지만. 




Posted by 망망디
,

남자들이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성비하 발언을 하는 건 하는 건 아마도 세계 공통인 모양입니다. 게다가 그 남자들이 공사판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 같은 경우라면 더 더욱. 여기 한 편의 광고가 있습니다. 건설현장 노동자(일명 노가다 아저씨들)가 지나가는 여자에게 냅다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어이, 아가씨 이쁜데~!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어이~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그 옷 잘 어울려요, 라고. 공손하게 말합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게 뭐지...? 하고 있는데 한술 더 떠서 "추잡한 말 하나 해줄까? 성 편견!"이라고 외칩니다. 그걸 보고 처음에는 '저것들이...' 하고 황당해 하던 여성들은 결국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립니다. 여성 차별이나 인권에 대한 공익광고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기가 막힌 반전이 있습니다. 

넌 배고플 땐 니가 아니야(You're not you when you're hungry). 

스니커즈가 글로벌 캠페인으로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바로 그 슬로건이군요. 평소엔 할 리가 없고 제정신이 아닐 때나 할 수 있는 여성 존중 멘트들이라니. 전 세계 어디서나 여성 차별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제품 특성과 유머에 버무려 역설적으로 잘 표현한 광고입니다. 

지난 해 헐리우드에서 촉발된 '미투'운동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도 페미니즘 논쟁이 굉장했었죠. 저도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지내다가 아내가 "늦은 밤 택시 탈 때 여자들이 느끼는 공포를 남자들은 절대로 알지 못해'라고 하는 말을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공부해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아주 예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남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실을. 역사를 뜻하는 단어 'History'도 남자(He)의 이야기(Story)라는 뜻이 숨어 있다고 하니 남성 중심의 역사는 참으로 길고도 끈질긴 것 같습니다. 저처럼 평소에 '공처가의 캘리'를 쓰진 않더라도 여자를 좀 더 존중하는 남자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qvnJSGjkdk





Posted by 망망디
,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나 연극들은 '잘해야 본전'이라는 인식이 대다수다. 문자와 상상력만으로 지유롭게 구성되었던 원작을 두 시간 남짓 스크린이나 연극 무대로 재구성하려면 과감한 생략과 변조가 필수라 원작을 읽은 사람들에겐 상대적으로 아쉬움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아쉬움은 원작을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니 원작을 직접 쓴 사람의 경우는 더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연극 [댓글부대]의 원작자인 소설가 장강명은 이 연극을 보고 너무 놀랍고 재미있어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연출과 연기이기에. 재공연 소식 링크를 공유하며 알리는 그의 이런 페이스북 소개글을 출근길 전철 안에서 읽던 나는 반가운 마음에(나도 소설 [댓글부대]의 열렬한 팬이었으므로) 무심코 댓글을 달았는데 작가가 댓글과 링크 공유를 한 사람들에게 선착순으로 초대권을 두 장씩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행운이었다. 덕분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공연 첫날을 선택해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으로 갔다. 

삼궁과 찻탓캇, 그리고 10査10은 '팀-알렙'이라는 인터넷마케팅 업체의 일원이다. 인터넷 여론을 조작해 학원 강사의 평판을 좌우하는 등 발군의 실력을 보이던 이들은 어느날 수수께끼의 조직 '합포회'로부터 국내 굴지의 기업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죽은 여직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망하게 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 없이 현장에서의  임금 체불을 문제삼아 가짜 증인, 증언 등을 만들어내 인터넷으로 퍼뜨리자 영화는 초기에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흥행몰이에 실패한다. 내친 김에 이들은 정치적 이슈에 민감한 여성커뮤니티(여초사이트)에 들어가 사사건건 정당함에 대한 시비를 거는 댓글들을 통해 그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여기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ectness)이 어떻게 'PC Police'라는 자기검열 체제로 변색될 수 있는지에 대한 재미있는 예들이 제시된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이철수라는 정체불명의 실장님이 제시하는 막대한 금액과 함께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회장님'의 지시에 따라 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10대들을 선동하는 작업에 투입된 것이다. '팀-알렙'은 원래 왜곡, 조작, 혐오 등이 특기인 일베들이었다. 인터넷에 능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뭔지 아는 사람들. 그러나 실제 인간관계는 서툰 키보드 워리어들. 소설가 장강명은 이들이 '프레임의 전환'을 통해 어떻게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그를 통해 선거에 까지 개입했는지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자칫 르뽀처럼 건조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름도 괴상한 삼궁과 찻탓캇, 그리고 10査10 등의 캐릭터를 통해 입체적인 인물들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연극의 극본과 연출을 맡은 이은진은 원작을 철저히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찻탓캇과 계속 대화를 나누는 신문기자를 임소진이라는 여성으로 바꿈으로써 극의 흐름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연극 무대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도 팀의 브레인인 삼궁의 야망, 넷상에서는 유능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연인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찻탓캇, 그리고 대인기피증이 심한 오타쿠 10査10에게 인간적 훈기를 불어넣어 관객들로 하여금 '일베이긴 하지만 알고보면 쟤들도 불쌍하구나'라는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마지막에 쇠사슬에 묶인 어떤 물체(지금은 밝히지 말아달라는 극단측의 부탁이 있어서)가 천장에서 내려오는 모습은 간단한 상상력만으로 무대를 얼마나 넓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뛰어난 연출력의 예이다.

커튼을 이용한 공간적 아이디어와 드라마적 완성도도 뛰어나다. 그리고 첫회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호연이 빛났다. 장강명 작가가 예전에 들었다는 "요즘은 일베도 연극하나?"라는 어느 관객의 평은 아마 10査10 역을 맡은 민경희 때문에 나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캐릭터가 딱이었다. 삼궁이나 찻탓캇 역도 고르게 연기가 좋았고 이철수나 임소진 역할도 든든한 연기력을 선보였지만 가장 인상 깊은 배우는 회장님 역의 김정호였다. 얼마 전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 역을 맡았던 이 배우는 당시엔 '너무 정극에 충심한 연기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실짝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야말로 그 '정극스러움'이 빛을 발했다. 한때 권력과 금력의 정점에 서 있었으나 이제는 늙어 꼬부라진, 가운을 입고 꾸부정한 걸음걸이로 나타나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비뚤어진 신념을 설파하는 목소리와 대사 처리는 전율을 금치 못하게 하는 에너지가 있었다. 


장강명은  현재 가장 핫한 소설가이다. 그는 소설가가 되기 전 동아일보에서 11년간 기자를 하며 이런저런 보도상을 받았고 소설가가 된 후에도 오늘의작가상, 한겨레문학상 등 국내 문학상을 휩쓸어 '그랜드 슬럼'을 달성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 작품도 4.3평화문학상 수상작이었다. 상을 받은 게 중요하다기보다는 자신의 작업에 얼마나 열심이고 객관적으로 인정받는지를 말하고 싶어서 이 얘기를 굳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의 작품을 연극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기회라니 신나지 않는가. 망설이지 말고 지금 당장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 표를 사시라. 후회하지 않는 110분을 보장한다. 2018년 6월 24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한다. 




Posted by 망망디
,

쫄면

혜자 2018. 6. 12. 17:15

<쫄면> 

아내와 나는 둘 다 군것질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둘이 있을 때는 과자나 음료수 등을 사먹는 일이 거의 없다. 심지어 집에 손님이 와서 탄산음료나 쥬스를 찾을 때도 없어서 미안해 한 적이 있을 정도다. 입맛이 비슷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아내도 나도 어렸을 때 군것질을 할 정도로 용돈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형제자매가 많은 집의 넷째 딸이었고 어머니가 하숙을 치셨다니 아이들의 어리광을 받아줄 여유가 없으셨을 것이다. 나는 가난한 집에서 자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군것질을 할 정도로 유복한 것도 아니어서 어린 시절 내내 동네 가게에서 과자 하나 제대로 사먹은 기억이 없다. 옛날 시골집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더구나 그 때는 집에서 프라이드 키킨이나 피자 등을 시켜먹는 건 고사하고 세 끼 밥만 먹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으니. 

대학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남들은 학교 다니면서도 과외 아르바이트니 뭐니 해서 스스로 돈을 벌고 쓴다고도 하는데 나는 하릴 없이 띵가띵가 놀기만 하는 편이라 늘 용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술집이나 당구장엔 가도 다방이나 빵집엔 잘 가지 않았다. 시쳇말로 '가성비'가 떨어진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구장 가는 길에 스낵코너 같은 데 들러서 뭘 사먹는 애들이 되게 신기했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이런 식이었으니 군것질이나 불량식품의 즐거움은 다른 세상의 일인 것만 같았던 반생이었다고나 할까. 어쩌면 이런 이력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나 결혼한 덕에 안 싸우고 잘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지만. 

그런 아내가 가끔 열광하는 음식이 쫄면이다. 아내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자기 용돈으로 뭔가를 사먹어봤는데 그 첫 번째가 쫄면이었던 것이다. 여고시절에 쫄면에 만두 하나 추가해 친구들과 나눠 먹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고 말할 정도니까. 그래서 요즘도 밖에 나가 뭘 먹을까, 하면 쫄면을 꼽을 때가 많다. 이제 쫄면 정도는 배가 터지도록 사줄 수도 있지만 나는 왠지 그런 아내가 좀 안쓰럽다. 시인 김수영이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쓴 것처럼 아내가 너무 작은 것에 행복해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과 미안함 때문이다. 내일 투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맛있는 쫄면집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은 아내가 예전에 페이스북에 올렸던 쫄면 사진)



'혜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빵터진 아내  (2) 2018.10.07
루꼴라가 있는 풍경  (1) 2018.09.24
TV 시청하다 잠드신 아내  (0) 2018.04.28
성공  (0) 2018.03.24
남편이라는 직업  (2) 2017.09.02
Posted by 망망디
,


'독하다 토요일' 모임이 있는 토요일은 아침부터 가슴이 설렙니다. 그저 주말 오후에 같은 장소에 모여서 똑같은 소설책을 묵독한 뒤 잠깐 얘기를 나누는 것뿐인데 뭐,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막상 해보니 그 재미가 기대 이상이었던 거죠. 이번에도 그런 느낌은 여전했습니다. 

지난 달과 마찬가지로 토요일 오후 2시에 대학로 '책책'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몸이 안 좋은 분도 있고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참석을 못하게 된 분들이 있어서 결국 김인혜, 손연영, 진주 씨가 참석을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음 달엔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대신 제 뚜라미 동기인 임재섭 씨가 참석을 했습니다. 

이번 주 '독하다 토요일'에서 같이 읽을 책은 한강의 [흰]이었습니다. 한강은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죠. 저는 한강의 작품 중 [소년이 온다]가 특히 좋았는데 [흰]이 또다시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우리가 읽을 책 리스트에 이 작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흰]은 다른 책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소설'이라고는 하는데 구성이나 문체가 시집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책 앞 쪽에 한강이 '흰것들'에 대해 쓰기로 마음을 먹고 목록을 만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만약 제가 그처럼 목록을 작성하고 하나씩 단어를 선택해서 글을 썼다면 어떤 글을 썼을까를 상상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으니 한강의 흰색은 그저 깨끗하고 맑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 흰색은 죽음을 품고 있고 인생의 비애와 부조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어둠과 검은 것들이 모이고 섞이면 결국 이처럼 흰색이 되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봤습니다. 

윤혜자 씨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일단 서술방식이 시 같고 뚜렷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책 뒤에 있는 '작가의 말'을 읽고 나니까 비로소 태어난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작가의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펼쳐지는 어떤 이야기겠구나, 어렴풋이 짐작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윤혜자 씨는 무엇보다 서정적인 문체에 많이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당대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책은 존 버거의 작품(특히 [A가 X에게])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는 소감도 피력했습니다. 

정아름 씨는 '체세포 하나하나가 잠에서 깨어나는 찰나를 슬로우모션으로 보는 듯한' 이라는 멋진 소감을 전하며 입을 열었습니다. 작가가 본 것을 나도 봤을 텐데. 나는 왜 못 느꼈을까, 하는 경이가 있었고 작가의 말대로 '언니가 살아 있었으면 나는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끝에 '힘들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존재들에 대한 연민'들이 느껴진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왜 흰색일까를 잠깐 생각해 보았는데 그 흰색에는 외로움이 밑바닥까지 차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며 화자가 삼촌과 멸치잡이 배에 탔던 장면 묘사가 특히 아름다웠다고 회상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작가의 전작인 <소년이 온다>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김하늬 씨 역시 '소설과 시의 장점만을 모으면 한강의 [흰]이 되지 않을까'라는 탄탄한 소감으로 입을 열었는데 시를 쓰는 자기 친구 얘기를 하며 사진이나 시나 모두 한 장면으로 사람의 발걸음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한강의 이 책은 그런 것을 담담하게 성취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으며, 미묘하게 건조한 문장들이 다시 읽어도 좋고 급기야는 읽으면서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세 줄 평으로 표현하자면 '무섭도록 하얘서 시와 소설 사이에 서 있는 느낌' 이라 했으며 하얗게 보이려면 주위가 어두워져야 해서 그런지 자기는 수 많은 소제목들 중에서도 '어둠'이 가장 좋았다고 했습니다. 흔히 시를 쓰는 사람은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토로를 하고 소설가들은 시를 쓰는 사람을 대단하게 여기는데 한강은 둘 다를 가진 무시무시한 공력의 작가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모임에 처음 참석한 임재섭 씨는 우연히 어디서 읽은 인터뷰에서 한강 작가가 스스로 밝힌 십여 년 전과 달라진 점이 '수식어가 많이 없어졌다'라고 하던데 자기는 공대를 나와서 그런지 '수식어가 적은' 한강의 소설들이 다른 작가들의 작품보다 유난히 더 어렵게 느껴졌었다고 했습니다. [흰]을 읽으면서는 이게 왜 소설일까, 라는 의문에 시달렸고 그래서 자꾸 길을 잃다가 [채식주의자]를 사서 읽었는데 중편 세 개가 모여 장편을 이루는 모양새가 세상의 모든 것을 한 꺼풀 벗겨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독서 모임에서도 [채식주의자]를 읽었는데 작품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했습니다. 

김성희 씨는 첫 페이지에 나오는 '문' 얘기에 벌써 숨이 턱 막혔다고 했습니다. 작가의 공력에 압도된 것이죠. 그래서 이거 안 되겠구나, 하고 맨 뒤로 가서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다고 했습니다. 전작인 [소년이 온다]도 두 번을 읽었는데 그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이런 역사적인 소재를 이렇게 쓸 수 있는 작가가 있다는 게 놀랍다고 했습니다. 김성희 씨는 이 책 덕분에 황석영이나 임철우 등 광주항쟁을 다룬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찾아 읽었다고 했습니다. 굉장히 열정적인 독서를 하는 분입니다.  작가가 언니의 죽음과 허구를  섞은 구성에서 생명의 고비를 넘어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경지를 느꼈는데 특히 <흰나비>라는 소제목의 글에서는 삶이란 직선으로 뻗어가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은 물론 폴란드에서 살해된 소년의 이야기와 겹치면서 확장성을 가지는 것 같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결국 한강은 이런 다층적 의미를 선사하는 좋은 소설가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서동현 씨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도 소설도 아닌 '그녀'라는 화자가 쓴 일기장을 하얀 부분만 훔쳐 읽는 기분이었는데 하얗다는 것은 시작과 끝, 삶과 죽음 등을 상징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면서 제목이 '하얀'이 아니라 '흰'이었던 것도 좋았다고 했습니다. '흰'이라는 표현에서 의미가 더 광범위해지고 특히 <문>에서 흰 페인트를 칠하는 장면에서 촉발된 '바스락' '빳빳' '창백' 등의 의성/의태어적 감정은 이 소설이 삶에서 쓸 수 있는 지우개를 찾는 과정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서동현 씨의 말을 들으며 예전에 Procol Harum이라는 그룹이 발표한 'A Whiter Shade Of Pale'이라는 곡이 떠오른다고 했더니 정아름 씨도 마지막에 옷을 태우는 장면에서 비슷한 걸 느꼈다고 했습니다. 임재섭 씨가 신기하게도 함께 모여서 책 얘기를 해보면 그 작품이 더 좋아진다는 소회를 박혔고 이어 윤혜자 씨가 예전에 채민서가 주연한 한강 소설 원작의 영화 [채식주의자]의 헐렁한 만듦새에 대해 일이 분 간 규탄을 했습니다. 

모임 장소에 영어책을 가져와 읽어 위화감을 조성했던 임기홍 씨가 뒤늦게 작품이 너무 어려워서 읽기 힘들었다, 라고 얘기하자 여기저기서 반가운 '미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곧장 '안 되겠다 싶어서 [채식주의자]를 구해 읽었더니 정말 좋더라. 이 작품은 정말 쉽고 친절하더라. 세상에 이렇게 친절할 수가.' 라는 의견을 밝히는 바람에 사람들은 또다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기홍 씨는 '특히 <몽고반점>은 이것이 바로 소설이구나, 라고 느꼈다'라는 소회를 술술 털어놓았습니다. 

임기홍 씨의 소감에 덧대어 [채식주의자]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도 한참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흰]으로 돌아와서 한강이 아니면 이런 소설은 씌어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만약 신인 소설가가 이런 글을 써서 신춘문예 같은 곳에 보냈다면 일단 '조건 미달'로 떨어졌을 거란 얘기였죠. 그런 얘기가 공감을 얻는 것은 이 소설 뒤에 김민정이라는 뛰어난 편집자가 숨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윤혜자 씨는 이 작품을 '난다'판과 '문학동네'판으로 번갈아 읽은 경험을 거론하며 편집자인 김민정 씨에게서 들은 얘기도 전해주었습니다. 짧게 얘기하면 나중에 나온 문학동네 판은 작가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어 시집처럼 꾸며졌고 난다 판은 상대적으로 산문집처럼 구성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판본에 쓰인 사진들도 다르다는 얘기를 듣고 사람들이 새삼 번갈아가면서 책을 펼쳐 보기도 했습니다. 

김하늬 씨가 질문이 있는데 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늘 질문을 많이 하는 분입니다). 일단 소제목에 나온 '당의정'이 어떤 의미일까, 라는 질문을 했고 두 번째는 본문 중간중간에 나오는 이탤릭체는 왜 썼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윤혜자 씨가 인생의 내면은 누구나 쓰고 힘드니 그것을 잘 삼키기 위해 '당의정'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소제목이 '각설탕'이라는 얘기를 곁들이면서. 그리고 이탤릭체에 대해서는 편집자이자 시인인 김민정 씨에게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이번 모임엔 편집자인 김민정 씨도 참석해 달라 저희가 부탁을 해서 정말 올 예정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아버님의 생신과 겹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두 시간 정도가 훌쩍 지나갔고 우리는 모두 전보다 한강의 [흰]이라는 작품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여덟 권의 [흰]을 보니 뭔가 마음이 뿌듯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뿌듯함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대학로의 중국집으로 몰려가 이것저것 요리를 시키고 이과두주보다 훨씬 비싼 공부가주를 큰 것 두 병, 작은 것 한 병 마셨습니다. 모든 것은 N분의 1이라 많이 먹고 마시는 사람이 유리한 술자리였습니다. 2차를 마치고 몇몇은 성북동 꼭대기에 있는 저희 부부의 집 '성북동소행성'으로 가서 일본 소주와 와인을 더 마셨습니다. 

다음에 읽을 책은 김언수의 [뜨거운 피]입니다. 이 책은 싸구려 삼류소설처럼 읽는 재미가 있는데 도중에 의표를 찌르는 문학적 표현들도 난무하는 작품이라 했더니 많은 분들이 좋아했습니다. 
 






Posted by 망망디
,


나는 평소에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글을 쓰면서
내가 지금 쓰는 것처럼
문장이 맨 오른쪽까지 가서 
허공에 부딪혀 다음 줄로 가기 전에 
아무 때나 서둘러 행을 바꾸는 것은 

(또는 이렇게 맥락 없이 행을 띄는 것은) 
자기가 쓴 글이 마치 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꼼수라는, 얼토당토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니, 그게 아니라 
글을 읽는 독자의 시선이 
매번 맨 오른쪽까지 가느라
혹시 피곤하거니 주의력을 읽을까봐
노심초사한 나머지 알아서 적당히 
행을 바꿔주는 글쓴이의 노력이나 
배려가 아니었을까 하는
기특한 생각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던 찰라,  
문학동네 시인선 084 김민정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을 읽게 되었다. 

거기엔 글을 읽는 독자의 시선이
매번 오른쪽 끝까지 가느라
혹시 피곤하거니 주의력을 읽을까봐
노심초사한 나머지 알아서 적당히 
행을 바꿔주지 않는, 요 며칠 유행하는 말로
'시건방진' 시가 하나 있었으니 

이제까지 산문시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위와 같은 얼토당토한 생각을 
하던 찰라에 마침 읽은 참신하고 재미있는 시라 
한 번 소개를 해볼까 하는 생각인데. 

시의 제목과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럼 쓰나 

  만나보라는 남자가 82년생 개띠라고 했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핏덩인데요. 이거 왜 이래 영계 좋아하면서. 젖비린 내 딱 질색이거든요. 이래 봬도 걔가 아다라시야. 아다라시. 두툼한 회 한 점을 집어 우물우물 씹는데 어느 대학의 교수씩이나 하는 그가 내게 되물었다. 아나, 아다라시? 무슨 스키다시 같은 건가요? 일본어 잘 몰라서요.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그들은 웃었고 그들은 소주잔에 젓가락을 찢어 숯이니 숫이니 히로키에게 써 보였고 얌전한 히로키는 빨개진 얼굴이더니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일로 그들과의 대화에서 조용히 빠져나갔다. 동경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와 공부를 했다는 동갑내기 히로키와는 가끔 만나 커피 마시며 시 얘기를 하는 사이인데 그는 윤동주의 시를 나보다 더 많이 외우고 나보다 더 많이 베껴본 터라 내가 모르는 윤동주의 시를 토론의 주제로 삼곤 하여서 내게 반강제적으로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을 사게도 하였는데 그런 그가 한국에 와 처음 배운 단어는 밤도 아니고 별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자지라 했다. 자라고 할 때는 자지, 보라고 할 때는 보지. 그렇지. 그건 맞지. 그래서 우리말 번역이 어렵다는 얘기지. 누가 저 문장을 가르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웃음기 없이 술자리도 아닌 데서 듣는 아랫도리 사정이다보니 참으로 거시기하여 거시기하구나 하는데 그 거시기가 뭐냐 물으니 그러니까 나는 합치면 자보자라 하여 권유형 자보지가 된다며 뻘쭘하니 한술 더 뜨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얼렁뚱땅 시인의 시를
딱 한 편만 시 같지도 않은 형태로 소개하고 
이 시집엔 이런 유쾌발랄하고
귀엽게 음란하면서도 자기비하적인 시들이 
수두룩하다는 평을 슬쩍 흘림으로써 

(옆에서 내 얘기를 듣던 아내는 시인이 마치
단어들을 두 주먹 안에 넣고 저글링을 하는 것처럼 
자유롭고 통쾌한데 그 산문적  경쾌함이
매우 현대적이고 비주얼라이징하면서도 
시류에 영합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써달라 부탁을 하므로 나는 그렇게 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그 궁금함을 못이겨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이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이라는
시집을 뒤늦게 사게 만들었노라 허튼 자위를 하면서 
나는 에어컨 바람 앞에 앉아 껄껄껄 웃는 것이었다. 




Posted by 망망디
,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삶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평범함 속에는 어떤 조건들이 숨어 있는 걸까? 대충 이런 것들 아닐까. 엄청난 연봉은 아니더라도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직장에 다니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아무 때나 이주일 정도 해외여행을 떠나고, 돈과는 상관 없는 나만의 취미생활을 영위하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하나 하나 열거하다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이건 평범보다는 차라리 특별한 삶쪽에 가까운 게 아닌가. 적어도 신자유주의 시대의 폭풍을 온몸으로 맞은 뒤 한반도 남한에서 허덕허덕 살아가고 있는 이삼십 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영화 [버닝]은 무라키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1990년대에 이 작품을 읽은 나는 아침에 조깅을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는 주지 않고 오로지 헛간만 조심스럽게 골라 태우는 등장 인물의 무용한 행위가 영화에서 어떤 의미로 작용했을지 몹시 궁금했다(후에 전쟁영화의 레퍼런스급으로 등극한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기 전 읽은 시놉도 '2차대전 중 참전용사로 네 명의 아들을 잃은 집의 마지막 아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한 군인들의 노력'이 전부였는데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영화의 분위기를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감독이 이창동이라는 말에 꽤 독한 영화가 나오겠구나, 예상을 했고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유통회사에서 '알바'를 뛰고 있는 소설가 지망생 종수는 일을 하다 행사장에서 춤을 추고 있던 어렸을 적 동네 친구이자 동창인 해미를 만나 가까워진다. 그녀는 취미로 팬터마임을 하기도 하고 고양이 '보일'이를 기르기도 하는데 어느날 종수에게 고양이를 맡기고 아프리카 여행을 훌쩍 떠났다가 벤이라는 돈 많은 남자와 함께 돌아온다. 벤은 특별히 열심히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스포츠카를 몰고 방배동의 고급 빌라에서 살고 있는 잘 생긴 싱글이다. 종수는 벤이 마치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 주인공 개츠비 같다는 생각을 하고 벤은 그런 종수와 대마초를 나눠 피우며 자기는 가끔 들판에 널려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습성이 있다고 고백한다. 불이 나도 대부분 아쉬워하지도 않고 큰 범죄가 되지도 않는 비닐하우스 태우기. 종수는 혹시 자기가 비닐하우스 같은 하찮은 존재는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본능적으로 몸을 떤다. 이들은 모두 저녁 노을보다는 아침 햇살이 더 어울리는 나이지만 그들이 모이는 곳엔 늘 석양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일 것이다. 해미가 아프라카에 가서 들었다는 얘기.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은 리틀 헝거이고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사람은 그레이트 헝거라는 그럴듯한 메타포. 그레이트 헝거는커녕 리틀 헝거라도 한 번 폼나게 해보고 싶지만 매 순간 가진 것 없이 뜨겁기만 한 젊은 육체를 버거워 해야하는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시시각각 색깔이 변해 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죽을 용기는 없고 그냥 저것들처럼 훌쩍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며 술집에서 운다. 

평생 아쉽거나 슬픈 일이라고는 당해본 적이 없어서 눈물을 흘려보지도 못한 벤은 그런 청승을 떠는 종수와 해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모든 일에 심드렁하다. 여자든 돈이든 원하기만 하면 바로 생기는 데다가 종수처럼 분노조절이 안 돼서 폭력혐의로 재판을 받는 아버지가 있거나 해미처럼 카드빚 다 갚기 전에 집에 들어올 생각 말라 야멸차게 내치는 가족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데, 아다시피 그것도 그리 큰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는 '재밌네'라는 말을 남발한다.  파주에 사는 종수 집으로 갔을 때 마을에 울려퍼지는 소음이 대남방송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는 무심코"재밌네요"라고 말한다. 사실은 뭐든 게 재미 없어서 자신의 여자들이 파티장 친구들 앞에서 신나게 떠들 때도 하품을 하다가 매번 종수에게 들키면서도. 

종수 역을 맡은 유아인은 영민하지만 '세상이 거대한 수수께기 같아서' 소설을 쓰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청년 역할을 너무나 잘 소화해 내고 있다. 판토마임으로 없는 귤을 까먹고 노을 앞에서 옷을 훌훌 벗은 채 반나로 춤을 추는 전종서도 해미 역에 딱이다. 그러나 이 영화 최고의 캐스팅은 모든 것을 다 가졌으나 권태롭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은 벤을 연기한 스티브 연 아니었을까. 이창동 감독의 연출력은 어느 하나 뛰어나지 않은 점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벤을 악역으로 설정하지 않은 점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종수에게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인데 정작 본인은 늘 침착하다못해 천진하기끼지 하다. 도대체 싸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은 아마 이처럼 무심한 존재일 것이다. 마지막에 종수가 벤을 칼로 찔렀을 때도 그는 아마 "재밌네"라고 중얼거리며 죽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 그래도 희망은 있다, 거나 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겠니? 같은 가짜 위로의 말은 당분간 삼가해 주시기 바란다. 비극의 주인공을 꾸며내려고 해도 '과잉 설정'이라는 소릴 듣게 되는 상황이 바로 하루에 햇빛이 딱 한 번 드는(그것도 남산 타워에 반사된) 해미의 방일 것인데 어쩌면 그 또래들에게 이 영화의 배경은 2018년 대한민국 전체로 확장되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 에스컬레이터에서 에티켓을 무시하고 걷거나 뛰어다니는 승객들 대부분이 젊은이들이라는 어른들의 질책에 '나도 언젠가 에스컬레이터에서 뛰지 않고 그냥 서서 가는 입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대학생 알바생의 가슴 시린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에서 바로 그 젊은이의 분노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나리오 작가 오정미 각본가에 의하면 이 영화는 시나리오 작업 단계에서 지금의 제목 대신 '분노 프로젝트'라고 불렸다고 한다. 



Posted by 망망디
,



존 포드와 존 웨인이 만들어 놓은 '옛날 옛적 서부에서'의 신화적 구라들을 1960년대에 세르지오 레오네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귀엽게 비틀었다면 2016년 데이빗 맥킨지와 크리스 파인은 서부라는 세트에 현대의 쓸쓸한 비극을 세련되게 옮겨 놓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금요일 밤인데 남편의 속이 고장나는 바람에 술도 마시지 못해 심기가 불편해진 아내의 눈치를 보다가 IP-TV에서 이 영화를 찾아냈다. 

황량한 텍사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소하고 영리한 은행강도 행각과 침착하게 그들을 쫓는 늙은 보안관 콤비. 각본도 연출도 좋고 배우들의 연기도 모두 끝내준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무심코 던지는데 대사 타이밍들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마지막 농장 신에서 크리스 파인과 제프 브리지스가 주고 받는 어른스러운 대사와 표정들은 특히 멋지다. 1,500원밖에 안 하길래 안심하고 아내의 허락을 구하고 틀었는데 우연히 좋은 영화를 보았다.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