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작가는 1940~50년대 누군가가 찍은 코닥 필름을 통째로 사서 모으는 게 취미인데 누가 언제 찍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깜깜이' 필름이라고 한다. 운이 좋으면 좋은 사진이 걸리고 아니면 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윤태호 작가의 만화 [인천상륙작전]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는데 거기선 해방 직후 일본 사람들이 남겨놓고 간 가방들을 '근 수로 달아' 사고 파는 사람들이 나온다. 똑같이 생긴 가방이라 값도 똑같고 속에 금덩이가 들어 있을지 옷가지가 들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채 오로지 운에 맡기는 것이었다. 오 작가도 그렇게 낡은 슬라이드 필름들을 무작위로 꺼내 한 장 한 장 인화해보는 과정에서 만나는 뜻밖의 수작들의 즐거움 때문에 이 필름들을 구입한 것이리라. 말하자면 일종의 '세렌디피티'인 것이다.
재미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양복 바지와 셔츠 차림이고 여자들은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 입었고 꼬마 여자애만 빨간 바지다. 뭔가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인데 뿌연 사막을 배경으로 걸아가는 모습이 [환상특급]이나 [블랙 미러]의 한 장면처럼 낯설어 보이기도 한다. 내가 그 얘기를 했더니 오 작가도 가끔 저승 가는 사람들 사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며 웃었다. 오 작가는 모텔 간판이 있는 사진을 특히 좋아한다고 하는데 우연히 사막 사진과 구도가 비슷하다는 걸 발견하고 두 필름을 겹쳐 보았더니 아주 새로운 그림이 되었다고 하며 우리에게 직접 두 필름을 겹쳐서 보여주었다. 순간 사막에 있던 사람들이 모텔이 있는 거리로 들어오는 신기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아, 이런 재미와 열정 때문에 때로는 새벽까지도 혼자 컬러 작업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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