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이승연 배우가 나오는 독립영화를 논현동에 있는 '이디야커피랩'에서 보게되었다. 이디야 커피랩 사장께서 매장 한 곳에 'E씨네'라는 아주 작은 상영관을 만들어서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한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어제 상영작은 [내 청춘에게 고함]으로 잘 알려진 김영남 감독의 [뜨거운 차 한잔]. 2005년도에 찍은 40분가량의 단편이다. 불치병에 걸렸다고 진단을 받은 아버지가 어쩐 일인지 다시 건강해졌다는 진단을 받고 어리둥절해 하는 딸. 병원에서 나온 딸은 아버지에게 택시를 타고 돌아가라 하지만 아버지는 걸어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화가 나서 아버지와 헤어진 딸은 네 살난 아이와 함께 읍내로 나갔다가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던 남자를 만나 모텔로 간다. 그들이 섹스를 하는 동안 모텔 주변에서 놀던 아이는 사라진다. 

아이에게 낚시를 가르치는 할어버지, 새로 생긴 남자친구에게도 위안을 얻지 못하는 엄마, 서울에 있는 친오빠와의 가시돋힌 전화, 엄마의 불안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어린 아들, 전남편에게서 온 편지...등등 영화는 숨겨진 많은 애기들을 뒤로한 채 아버지와 딸 사이에 놓인 차 한잔을 바라보다 끝을 맺는다. 

비록 톤이나 화법은 달랐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들이 생각났다. 롱테이크로 천천히 움직이다가 장면전환할 때마다 약간의 여운을 주는 카메라워크가 인상깊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필름으로 찍었다는데 정작 어제는 필름으로 보지 못해 아쉬웠다. <뜨거운 차 한잔>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재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감독의 말에 의하면 장편으로 개작을 하려다가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엎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이승연의 연기는 11년 전인데도 그 내공이 엄청나다. 그녀가 내 친구라는 게 자랑스럽다. 작은 영화관에 열 명 남짓 모인 관객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그 열기와 진지함은 어떤 시서회장보다도 뜨거웠다. 이렇게 작은 영화들이 일반 관객들과 만나는 일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라꼴이 하도 말이 아닌 때라 영화 보는 것도 마음이 썩 편하지만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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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새벽 산길을 혼자 걷는 상상을 해보자. 아니면 해가 뉘엇뉘엇 지는 풍경이 무심히 펼쳐지는 홍대앞이나 서촌의 골목 또는 이면도로도 좋다. 이 그림들이 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펼쳐지는 건 상상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시간에 그 길을 걸어본 적이 있어서다. 그렇다. 나도 산책을 좋아한다.

'나도' 라고 쓴 이유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인간들이 산책을 좋아한다고 이미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어지간히 걷는 것을 좋아했는지  “심오한 영감, 그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떠올린다”라고 했고 칸트는 매일 마을길을 산책했는데 그 시간이 늘 일정해서 마을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시계를 맞췄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칸트처럼 강박적으로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는 건 미친 짓이다. 왜냐하면 산책의 진정한 묘미는 '목적이 없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은 어디어디까지 걸어봐야지' 하는 정도의 마음을 먹을 수는 있다. 그러나 목적지가 너무 분명하거나 몇 시까지 어디를 꼭 갔다와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걸 산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마 이번에 [산책 안에 담은 것들]이라는 산문집을 낸 이원 시인도 나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새벽에 깨어 홀로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이원 시인. 그녀는 왜 산책을 좋아하는 것일까. 내 생각엔 산책은 '걸으면서 하는 독서'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는 걸으면서 하는 '비움'일 수도 있겠다. 산책하는 사람의 발걸음은 가볍고 허허롭다. 두 다리는 길을 걷고 있지만 마음은 머릿속에 있는 상념들 사이를 거닐고 있다. 그 상념들은 도서관에서 마주쳤던 책들이기도 하고 극장에서 보았던 수천 편의 영화이기도 하고 자신이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원 시인이 걷는 길은 그곳이 절두산 성지든 홍대앞이든 결국은 시인의 마음 속 길에 다름 아니다.

어떤 때는 울 일이 있어 9Kg의 몸무게가 빠지도록 몇 달을 계속 울기도 했던 시인은 결국 또 다시 힘을 낸 자신의 두 다리 위에 몸을 실어 산책길에 나선다. 그녀에게 '산책은 한가로운 시간인 동시에 뜨겁고 깊은 시간'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는 곳이 달라질때마다 어떤 날은 경복궁역 2번출구로 나와 이상이 살았던 집터 앞에 무한정 서서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 골목을 찾게 만드는 힘, 문화는 다름 아닌 그것이다'라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어떤 날은 은평구에 있는 진관사 입구까지 걸어가 합장을 하기도 한다. 그녀가 그동안 걸어다닌 홍대, 한강, 명동, 시장, 골목, 동네, 갤러리는 물론 멀리 파리의 골목에 가서도 그녀는 어떤 특별한 것을 하지 않는다. 그저 걸음으로써 마음에 빈 공간을 만들 뿐이다. 


이 산문집은 한 번에 휘리릭 읽히는 책이 아니다. 어떤 때는 시인다운 아름다운 문체로 이루어진 깊은 잠언을 들려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수다스러운 누나처럼 우리가 가보지 못한 길의 비밀들을 알려주기도 하는 이원의 산문들. 그러니 이 책을 한 번에 휘리릭 읽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거니와 저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우리가 하루에 한 번씩 짧은 산책을 하듯 이 책도 한 챕터씩, 또는 몇 장씩 아껴가며 읽는 것은 어떨까. 나는 이번주 토요일에 저자와 함께 이 책을 들고 홍대와 절두산 주변을 산책할 것이다. 아내가 일하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나도 운 좋게 그 행사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모두 같은 책을 들고 시인과 함께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산책이라니. 벌써부터 토요일 아침이 기다려진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쓴 '우리동네'에 대한 짧은 글을 여기에 옮겨본다. 

우리 동네가 된다는 것. 슬리퍼를 신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로 어슬렁거리는 동선이 생긴다는 것. 잘 모르는 가게 주인과도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 뒷골목에 있는 오래된 빵집과 오래된 떡집을 비교할 수 있다는 것. 가장 맛있는 떡과 빵을 고를 수 있다는 것. 지도에 생겨나고 사라지는 곳을 표시할 수 있다는 것. 길을 자꾸자꾸 발견하게 된다는 것. 알게 되는 골목만큼 잠시 멈춤, 즉 간단(間斷)의 시간도 늘어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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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시간에 교보문고 가서 산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중 <봄밤>을 회사에서 읽고 조금 울었다. 서점 갈 때마다 조금씩 들춰보다가(이 책의 책장을 펼칠 때마다 이상하게 급한 전화가 왔다) 오늘에야 사서 끝까지 읽은 것이다. 힘들 때 이렇게 슬픈 소설을 읽으면 왠지 힘이 난다. 눈물에도 세로토닌이 들어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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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 - 허드슨강의 기적] 을 조조로 봤다.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비행기가 허드슨강으로 비상착륙 하기 전에 여승무원들이 침착하게 매뉴얼에 따라 커다란 목소리로 '머리 숙이고! 몸은 낮추고!'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장면부터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났다. 그래, 그냥 저렇게 하면 되는 거였는데.

승객들이 물 위에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내려 양쪽 날개 위에 가지런히 서 있다가 한 명씩 구조되는 모습을 보며서도 눈물이 났다. 아니, 그냥 물에 반쯤 잠긴 비행기 선체를 보면서(사실은 아, 세월호 때랑 똑같네, 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들었을 때부터) 화가 나고 눈물이 났다. 아침에 출퇴근용 보트 선원들이 달려와 사람들을 구조하는 장면에서도, 지나가던 헬기가 관제센터와 무전을 주고받고 구조작업을 펼치는 장면에서도 눈물이 나고 울화통이 터졌다. 아, 저 나라와 이 나라는 얼마나 다른가. 155명 전원이 구조되었고 시작부터끝까지 모두 24분만의 일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연출력에 대해 새삼 더 보탤 말이 없다. 그냥 담백하게 한 시간반의 러닝터임 안에 사고와 반성과 해야할 일과 가족애와 정의로움과 떳떳함을 모두 담아냈다. 기장과 부기장이 공청회 중간에 잠깐 나와 서로 나누는 짧은 대화 중 "We did our job." 한 줄엔 그 떳떳함이 가득 차 있다. 옆자리를 보니 아내도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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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윤 여사

혜자 2016. 10. 5. 21:26


택배로 도착한 문어를 한 시간동안 밀가루로 세척하신 후 비로소 옥상에 올라와 도도하게 차를 한 잔 하시는 윤혜자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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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손이 안 가는 작가나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랬고 이 작가가 그랬다. 예전에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소설가 김훈이 추천한 50권 중 이 책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느낌은 '김훈은 후배 작가들의 책도 참 많이 찾아 읽는구나' 정도였다. 그러면서 책 제목을 메모까지 해놨었는데 왜 정작 찾아 읽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름이나 그 작가가 지닌 분위기가 지나치게 ‘운동권스럽지 않나’ 하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생각을  혼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선옥은 왠지 뭔가 진지할 것 같고 거룩할 것 같고 게다가 작가의 고향이 전라남도이니 왠지 묵직한 주제의식이나 치열한 의무감을 가졌을 것만 같고…그래서 자꾸 다음에 다음에 하고 미뤘던 것 같다. 그 후에도 서점에서 만났을 때 수채화로 그려진 표지가 너무 ‘나이브’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아, 이 정도면 병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이비인후과 갔다가 들른 강남역 알라딘에서 이 책을 다시 보고는 ‘책값도 삼천 원밖에 안 하는데 어디 사볼까’라는 생각이 들어 집어들었다. 그러나 웬걸, 책을 읽기 막상 시작하자마자 너무 재미있어서 출퇴근길과 휴일 지방 여행 가는 버스 안에서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다. 쓸 데 없는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알려주는 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1980년대 광주 언저리에 살던 파릇파릇한 청춘들의 이야기인데 주인공은 해금이라는 여자애다. 해금이 위로는 언니가 셋 있는데 그 이름이 순금이 정금이 영금이다. 할아버지가 비단금(錦) 자를 정해놓고 이래저래 한자를 한 개씩 돌려 이름을 짓다가 네 번째도 또 딸입니다,라는 아들의 소릴 듣고는 “니무랄, 암거나 허라고 혀’라고 화를 내는 바람에 ‘혀금이'가 될 뻔 했는데 그나마 애 아버지가 바다 해(海)자를 쓰는 바람에 해금이가 되었고 그 다음에 태어난 막내딸은 드디어 '비단 금'자를 벗어나 영미가 되는 바람에 해금이만 가장 억울하게 되었다는 조금 웃기는 사연이다. 해금이는 예쁘지도 공부를 썩 잘하지도 않지만 속이 깊고 착한 아이였다. 이 이야기는 해금이와 그의 친구인 경애, 승희, 정신이, 수경이, 그리고 4.19기념일에 도청 앞에서 우연히 만나 음악실에 가는 바람에 평생 친구가 된 남자애들 승규, 진만이, 태용이, 만영이 들의 ‘청춘스케치’인 것이다. 

어디서나 스무 살 무렵의 이야기에는 늘 피끓는 우정과 연애가 있고 꿈이 아직 뭔지도 모르면서 내지르는 무모한 도전과 좌절, 그리고 희망이 있지만 이들이 있던 곳은 80년대 광주였으니 그 남다르고 슬프고 웃기고 아스라한 사연들이야 오죽하랴. 작가는 하나하나 애정이 가는 친구들의 사연에다 그 가족들의 이야기까지 얹고 정겨운 전라도 사투리와 쌍욕까지 곳곳에 뿌려서 다 읽고 나면 들큰하면서도 아주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아니, 만들어냈다기보다는 들려줬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혹시 작가 친구들의 실제 얘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그들이 방금까지 살았던 것마냥 생생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모두 평범하고 예쁜 아이들이었다. 자기들이 얼마나 예쁜 나이인지 모르는. 그러다가 광주항쟁 때 날아온 유탄에 경애가 맞아 죽고 이에 충격을 받은 수경이가 자살을 하고 집안꼴이 마음에 안 들어 밖으로 나돌던 승희는 성질 급하게 스무 살에 애를 낳는다. 승희를 좋아했던 진만이는 화를 내고 승희를 진짜로 좋아했던 만영이는 승희의 아이를 거둔다. 세상을 바로잡고 싶었던 정신이는 대학을 그만 두고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고 서울대학을 다니며 힉생운동을 하던 승규는 남산으로 끌려가 죽도록 맞은 뒤 군대로 끌려갔다가 자살을 한다. 자살을 할 애가 절대로 아닌데. 그 중간에 해금이도 '나타나기만 하면 세상이 환해지는’ 이환과의 첫사랑을 경험하고. 

스무 살이라는 나이는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또한 얼마나 불안정하고 가뭇없던가. 살아남은 아이들끼리 모여 비명에 간 친구 승규의 장례를 치루는 장면이 마지막이간 하지만 이상하게 슬프지 않다. 그들이 방금 아주 힘든 인생의 쓴맛을  봤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꽃향기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마음으로 남은 인생을 뚜벅뚜벅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앞부분에 발췌해 놓은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일부분은 이 소설 제목의 연유를 밝히는 것과 동시에 해금이를 비롯한 주인공들에게 대한 작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다시 한 번 고백하는 것으로 읽힌다. 언제 기회가 되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당신이 가장 예뻤던 때는 언제였던가.그 때 당신 곁에는 누가 있었던가.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너무 불행했고 
나는 너무 안절부절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_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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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7일]을 읽으면서 맨 처음 드는 생각은 '뭐 이런 우수한 소설가가 다 있나' 였다. 개성 강한 캐릭터가 떡하니 받쳐주니 웬만한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플롯이 좋으니 극의 흐름에 치우침이 없다. 게다가 적당한 교양과 블랙 유머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다. 이 정도면 정말 장인의 경지 아닌가. 이사카 코타로는 '사신 치바'라는 쿨한 캐릭터를 단편집에서 탄생시킨 뒤 8년 만에 장편으로 그 폭을 넓힘으로써 자신의 소설이 '엔터테인먼트'로서 모자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치바는 정해진 대상을 일주일 동안 관찰한 뒤 그가 죽어 저승으로 가야 하는지 아니면 보류할 것인지 결정하는 사신이다. 즉, 저승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나 보험조사원 같은 신분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조사 대상 야마노베는 젊어서 데뷰하고 TV에도 자주 출연하는 소설가인데 일 년 전 이웃에 사는 사이코패스에게 딸을 살해당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 부부를 비웃기라도 하듯 살해용의자는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고 이에 격분한 야마노베 부부는 개인적인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당연히 인간에 대해서는 중립적일 수밖에 없는 치바지만 이번엔 그들의 삶에 개입해서 함께 움직이기로 한다. 물론 복수를 도와주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치바는 다른 사신들이 이승에 와서 일주일 중 딱 하루만 일하고 나머지 엿새를 빈둥대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축이라 '나라도 일을 열심히 하자'는 취지에서 그러는 것이다. 

사신 치바가 일을 하는 동안 그 주변은 늘 비가 온다는 설정이다. 업무를 위해 사람들 앞에서 인간인 척하는 사신들은 사실 아프지도 않고 배가 고프거나 졸립지도 않다. 그런데 자신이 사신이라는 걸 밝히면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이 생기므로 적당히 배고픈 척, 졸린 척을 하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스멀스멀 재미가 피어난다. 더구나 치바는 교통체증을 싫어하고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특이한 취향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음악을 들으려 노력하고 실제로 인간이 만든 것 중 음악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간들을 도와주는 경우에도 사실은 큰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일을 빨리 해결하고 음악을 듣고 싶어서'인 것이다. 인간의 말을 잘 이해하지만 때로는 '데스크'가 편집장인지 책상인지 헷갈리는 치바. 그는 결국 저수지에서 야마노베 부부를 끝까지 돕게 되지만 자신은 한 일이 없고 '그건 부력이 한 일'이라고 눙을 친다(그래서 이 책의 원제도 '死神の浮力'이다). 치바의 이런 시종일관 엉뚱하면서도 쿨한 태도는 딸이 살해당한 뒤 웃을 일이 전혀 없었던 작가 부부에게 의외의 웃음을 선물하는 포인트가 된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사카 코타로라는 작가와 인연이 잘 이어지지 않았는데 그건 [집오리와 야생오리의 코인로커]라는 소설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은 읽으려고 하면 무슨 일이 생겨서 그냥 책장을 덮게 되고 그 다음에 수십 페이지 읽었는데 또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읽히지 않아서 집어던지고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책도 인연이란 게 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 작가의 책을 읽는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이원흥CD라는 분이 '최인아책방'에 추천도서들을 제시할 때 좋은 책이라고 강력하게 권하는 글을 읽고 사서 읽게 된 것이다. 물론 이제 나도 이사카 코타로의 팬이 되었으므로 [명랑한 갱이 지구를 움직인다]나 [중력 삐에로], [마왕] 같은 소설들을 계속 사서 읽을 것이다. 

살인사건이 있고, 죽음을 앞둔 작가가 있고 그를 데려가야 하는 사신이 있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거기에 싸이코패스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함께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도드라지는 '인간의 길'도 따뜻한 국물처럼 담겨져 있다. 어떤가. 한 번 연휴에 한 번 읽어볼 만 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나라 소설 중에도 비슷한 소설이 있다.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이다. 그 책도 이사카 코타로 작품 못지 않게 재미 있다. 양심을 걸고 둘 다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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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짧은 글 짧은 여운 2016. 9. 27. 17:36

*오늘 비도 오고 하길래 어머니에 관한 글을 페이스북에 써서 올렸더니 

  많은 분들이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하시며 '좋아요'를 눌러 주셨습니다.





<전화>




서른넷.
비교적 늦은 나이에 부모님의 집을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다.

집안의 막내이긴 했지만
곰살맞은 아들은 아니어서 
남들처럼 주말마다
부모님 집으로 찾아간다거나
하진 못했는데

대신, 매일 저녁 일곱 시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전화를 했다.

전화는 대부분 어머니가 받았고 
아버지가 받는 날도 가끔 있었는데 
그런 날은 정말 통화가 짧았다.

식사 하셨어요? 
그래, 먹었다. 어서 쉬어라. 
네...


2000년 1월부터
2012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매일 저녁 일곱 시면
어디서든 전화를 했으니 
횟수만 헤아려도 
수천 통은 될 것이다.

내가 일곱 시면 휴대전화를 손에 드는 것처럼 
어머니도 일곱 시면 전화기 옆에 가 계셨다.


옆에 아버지가 계실 때는 
짧게 인사만 하고 끊으셨지만
(그래, 별 일 없다. 쉬어라) 
혼자 계실 때는 통화가 길어졌다. 
어떤 날은 30분이 넘을 때도 있었다.

통화가 길어지는 날은 
어김없이 아버지, 형 얘기였다.

신세한탄을 하고 싶은데
나 말고는 아무한테도
할 수 없는 얘기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부터는 전화 거는 시간을
여섯 시로 바꾸라 하셨다.
(요새 니 아버지가 일찍 들어온다.
밖에 일이 없나봐)

그때부터 나는 저녁 여섯 시면 
일을 하다가도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일사후퇴때 혼자 내려와 
평생을 우리집 식구들을 위해 
일하고 돈벌고 속썩고 하던 어머니는 
말년에도 가만히 앉아
며느리가 해주는 밥을 
받아먹는 신세는 못 되었다.

막내는 아예 결혼을 안 했고 
큰아들은 나가 살다가
결국 이혼을 했기 때문이다.


요즘 혹시 만나는 여자는 없는지 
가끔 물으실 때도 있었다.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늘 없어요, 라고 짧게 대답했다.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마음을 고쳐먹고
뒤늦게 결혼하겠다고 
지금의 아내를 데려갔을 때 
좋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고등학교 삼학년 때 
집에 데려간 여자애 말고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아내를 
보자마자 좋아하셨고 
아내도 어머니를 좋아해서 
참 다행이었다.


우리 결혼식도 못 보고 
너무나 급하게 돌아가신 어머니.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오늘 비가 오는 날이라 그런가 
어머니 생각이 자꾸 난다.


고맙고 
미안하고 
불쌍한 
우리 어머니.


오늘 같은 날 전화를 드리면

어디 아픈 덴 없냐. 
밥은 먹었고?
라며 반가워하실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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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라고 하는 한심하고 야비한 방송사를 그래도 시청자들이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한도전’이나 ‘복면가왕'과 같은 킬러 콘텐츠가 아직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엔 ‘PD수첩’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황우석 사건 등등에 대한 정권의 입맛을 해치는 취재와 방송 이후 PD수첩의 주요 PD들이 좌천되고 해직되었다. 뉴스타파로 간 최승호 PD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는 뉴스타파에서 일하면서 만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이라는 이상한 사건을 한 번 깊게 파보기로 결심한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 서울시 공무원이 간첩이라니,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은  ‘21세기 액션 블럭버스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다분히 과장된 유머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리 틀린 타이틀도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일단 ‘스파이’가 등장한다. 거짓말이 난무하고 강력한 방어기제가 있으며 그걸 파헤치는 PD의 담대함은 ‘저러다 어디 한 군데 크게 다치는 거 아냐?’라고 염려가 될 정도로 ‘무대뽀’일 때가 많다. 이 영화는 최승호라는 ‘공익적인’ 인간의 집념이 어떻게 실천적으로 진행되고 구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결과물이다.

북한에서 살았던 유우성의 동생 유가려는 오로지 친오빠와 함께 살고 싶다는 이유로 서울에 온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와 국정원은 그녀를 합동신문센터라는 곳으로 데려가 6개월 간이나 감금한 채 협박과 회유, 폭행을 일삼는다. 하이힐이나 구둣발로 자신을 때리다가 조금 후엔 같이 눈물을 흘리고 껴앉아주는 ‘언니’와 ‘큰삼촌’ 수사관들의 농간에 판단력이 흐려진 그녀는 결국 '오빠를 위해’ 유우성이 간첩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게 된다. 당연히 그것 때문에 유우성은 체포되어 감방으로 끌려간다. 아무래도 이 나라엔 ‘간첩’이 꼭 필요한 모양이다. 영화 곳곳에 재판정에서의 실제 녹음 분량이 나오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살살 유도하는 검사의 목소리는 간교하기 이를 데 없고 기가 막힌 유우성의 목소리와 주눅이 든 유가려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가득차 있다. 최승호PD팀과의 인터뷰 내내 눈물을 흘리던 유가려는 결국 오빠를 만나지도 못하고 중국으로 추방되고 만다. 공항에서 취재진의 카메라에 대고 힘없이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련하다. 

모든 것은 국정원이 꾸민 짓이다. 유우성 사건을 취재하다가 만난 한종수 사건(본명은 한준식. 역시 간첩으로 몰려 수사를 받다가 감옥에서 자살했고, 무연고자 묘지에 묻혀있다)도 마찬가지다. 간첩은 해마다 생겨났고 그때마다 억울한 사람들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죽거나 병신이 되었다. 70년대 대학생 간첩사건이나 유학생 간첩사건 얘기가 나올 때 등장하는 남산의 살벌한 지하 고문실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최승호는 안기부를 찾아간다. 법원 앞에서 몇날며칠을 기다려 유우성을 간첩으로 만드는 검사를 인터뷰하고 유가려를 때렸던 ‘언니’에게 말을 건넨다. 중국으로 날아가 유우성이나 한준식의 주변인물들을 만난다. 중국에서 북한에 있는 열여덟 살짜리 한준식의 딸과 통화하며 뒤늦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주는 대목에선 정말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런데 합동신문센터는 영화팀이 묻는 것에 대해 ‘일체에 대한 아무 것도 확인해줄 수 없다’라고 말한다. 들이대는 카메라를 손으로 막고 끄라고 고함을 치는 건 어디서나 똑같이 벌어지는 일이다. 당장 달려들어 깨버릴 기세다. 그래도 최승호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국정원장이었던 원세훈에게 달겨들어 유우성 사건에 대해 묻고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예전 대공분실 팀장이었던) 김기춘에게 가서 학생 간첩단 사건에 대해 묻는다. 당신이 직접 쓴 메모가 여기 있지 않냐고. 지금이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할 용의는 없냐고. 당신은 대답할 의무가 있다고. 그러나 묵묵부답. 소이부답. 외면이 이어진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모르는 일입니다. 왜 이러세요? 당신 누굽니까. 명함을 주십시오. 적반하장. 철면피…이것만이 그들의 대답이다.  원세훈과 그의 부인은 결국 우산으로 카메라를 가려버리고 공항에서 만나 처음엔 반가워하던 김기춘은 최승호의 정체를 알고나자 굳은 얼굴로 돌아선다. 

영화의 뒷부분에 최승호 팀은 서울대를 다니다가 끌려가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한 뒤 정신병에 걸려 평생을 허비한 재일교포 김승효를 찾아간다. 40년 만에 찾아간 친구들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던 김승효는 차츰 기억이 돌아오자 수십 년간 쓰지 않았다는 한국말로 ‘한국 무서워’, ‘한국 나빠’를 중얼중얼 외친다. 누가 이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영화 말미엔 지금까지 있었던 간첩사건 일지가 연도별로 쭈욱 나온다. 모든 간첩사건 끝엔 ‘무죄 판결’이라 씌여 있는데, 지금까지 해마다 빠지지 않고 간첩 사건이 있었다는 기막힌 사실이 기록에 의해 밝혀진다. 신기하게도 중간에 딱 십 년 간만 간첩사건이 없었는데 그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다. 그때만 북한이 정신을 차려 간첩을 양성하지 않았던 것일까. 간첩은 북한이 만드는 걸까, 안기부가 만드는 걸까.


서울극장에서 있었던 시사회장엔 영화 상영 직전 최승호 PD가 나와 인사를 했다. 보통 영화를 개봉하고 무대인사를 할 때는 감독이 주연배우들을 데리고 나와 인사를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영화의 ‘주연배우'들은 모두 고위직인데다 한결 같이 바쁜 사람들이라 나오지 못했노라 너스레를 떠는 그는 이 영화가 개봉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준 ‘뉴스타파’ 회원들과 이름 없는 후원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천안함 프로젝트]도 [다이빙벨]도 멀티플렉스라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좌절됐다. 영화를 만들어도 극장을 잡지 못하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멀티플렉스에서 상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철저하게 상업논리로 무장한 멀티플렉스 시스템을 뛰어넘는 방법은 역시 많은 사람들이 봐주는 것 뿐이다.

엔딩 크레딧엔 이 영화의 제작과 상영이 가능하도록 펀딩을 해준 사람들의 명단이 ㄱㄴㄷㄹ순으로 나온다. 길고 긴 그 명단이 우리에게 남은 힘이고 시대를 바꾸는 희망이다. 영화를 같이 본 배우 김혜나는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해져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는 심정을 토로했고 배우 박호산은 쉽게 흥분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영화의 흐름이 마음에 들었으나 또한 그것 때문에 조금 아쉽기도 했다는 말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박수를 치는 것으로 제작진의 노고를 치하했다. 

논리적인 이론과 언변으로 보는 이를 설득하는 텍스트가 있는가 하면 단지 보여주는 것만으로 강한 펀치를 날리는 영화도 있다. 다큐멘터리 [자백]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괜찮다고 생각하냐 질문을 던지는 문제작이다. 물론 그 대답은 영화를 보기 전과 후로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골치 아프고 힘든 것일수록 외면하면 마음은 편해진다. 그러나 두 눈 부릅뜨고 현실과 마주하는 사람이 있어야 희망의 불씨는 생겨난다. 어렵지만 지금 그런 걸 만드는 사람들과 공감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지점, 그곳에 영화 [자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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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도 추리소설이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찬호께이라는 직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의 작품 [13.67]이라는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매우 뛰어난 추리소설이라는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휴대폰에 제목과 작가 이름을 메모해 놨다가 서점에 가게 된 어느날 드디어 사서 읽게 되었다. 한창 일이 바쁜 때라서 일과시간엔 읽지 못하고 자기 직전이나 출퇴근하는 전철에서 주로 읽었는데 내용이 흥미진진해서 그런지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며칠 만에 다 읽어버렸다. 

이 소설은 탁월한 추리력과 기억력을 가진 관전둬라는 홍콩 경찰이 사건을 해결해가는 여섯 개의 이야기다. 첫 번째 이야기인 <흑과 백 사이의 진실>은 놀랍게도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누워있는 관전둬가 등장한다. 관전둬의 후배인 뤄샤오밍 독찰은 ‘Yes’또는 ‘No’만 할 수 있는 그의 두뇌 반응을 이용해서 살인사건의 진범을 밝혀낸다. 처음부터 독자의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다. 그게 2013년의 일이고 그 다음 작품부터 시간을 거슬러 점점 젊어지는 관전둬의 활약성이 펼쳐지는데 맨 마지막 작품인 <빌려온 시간>에서는 이제 막 경찰이 된 관전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게 1967년이다. 즉 이 책의 제목 ‘ 13.67’은 은 2013년과 1967년에서 따온 것이다. 책을 다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한 것은 독자들의 흥미를 돋구는 것은 물론 주인공의 숨은 사연이나 캐릭터의 입체성을 구축하는 데에도 매우 효과적인 장치였다고 생각된다. 작가인 찬호께이는 홍콩에서 태어난 공학도였는데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취미로 추리소설을 쓰다가 작가가 된 케이스다. 그러나 취미로 시작했다고 하기엔 믿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필력을 자랑한다.  

그는 원래 현장에 나가지 않고 셜록 홈즈처럼 추리력만으로 범인을 찾아내는 ‘소파탐정소설’을 구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고가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원하는 공모전에 낼 수가 없게 되어버리자 아예 다른 이야기를 덧붙여 장편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다행이다. 그의 열려있는 사고 덕분에 ‘관전둬’라는 멋진 경찰이 탄생하게 된 것이니까. 찬호께이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홍콩이라는 도시에 대한 애정과 어렸을 때부터 흠모했던 용감하고 정직한 경찰의 모습을 소설 속에 함께 녹여냈다. 원해 추리소설을 좋아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촘촘한 트릭과 정교한 플롯들이 이야기 하나하나를 빛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건이 해결된 후에도 완벽한 반전이 하나씩 등장해 독자들의 뒤통수를 친다. 놀라운 것은 그러면서도 사회파 추리소설적인 면모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경찰 내부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과 이해관계에도 밝은 편이다. 마치 수십 년 동안 경찰에서 근무한 사람이 나와서 회고록을 쓴 게 아닐까싶을 정도로 사실성이 넘친다. 

홍콩 반환 이전과 이후 얘기가 공존하는 이 소설들은 점점 서구화되는 홍콩 사람들, 그리고 홍콩에 와서 점차 홍콩사람들처럼 변모하는 영국 사람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홍콩이라는 작고 복잡한 도시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은 ‘홍콩 느와르’라 불리는 많은 영화들을 통해서도 언뜻언뜻 비춰졌었는데 이 소설에서도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이야기는 두기봉이나 오우삼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다가 사건의 피해자들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어가면 홍콩이라는 도시를 관통하는 어떤 슬픈 정서와 만나게 된다. 이런 식의 사회파 추리소설 속에 경찰 내부의 내막에 얽힌 이야기까지 고루 담는 걸 보면 작가의 역량이 참 대단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이 소설엔 유머가 거의 없다. 대신 정직하고 진지하고 어른스러운 주인공들의 면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즉 잔재주 없이 선명한 사건과 캐릭터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고전소설의 틀 안에서도 얼마든지 현대성과 함께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찬호께이는 안정된 필력을 통해 증명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타이페이 국제 도서전 대상을 수상했고 곧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이야기의 뼈대만 남고 디테일들은 새롭게 변할 것이다. 오랜만에 소설 읽는 재미를 만끽하게 해줬던 ‘웰메이드’ 추리소설이라 웬만하면 책으로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데뷔작이자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을 받은 [기억나지 않음, 형사]도 찾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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